[안종혁]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본 칼럼의 제목은 장래 진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마음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에 가고 싶으나 마땅한 직장이 없다. 별수 없이 미국에 남아서 살고 싶기도 하지만, 미국 이민 생활에 자신이 없고 두렵다. 결국 IMF 경제한파가 유학생들의 진로 결정에 진퇴양난을 몰고 온 셈이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일찍이 예고하고, 나는 KOSTA 2000에서 “미국을 점령하는 유학 생활”이라는 다소 이상한 세미나 제목으로, IMF 경제 한파 뒤에 유학생들이 진로 결정을 하게 될 때 예견되는 혼란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미국을 점령하는 유학 생활”에서 내가 주장하였던 논제의 근본을 유지하며, 이를 다시 글로 써서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크리스천의 직업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논할 의사는 전혀 없다. 이미 크리스천 직업관에 관하여서는 이코스타의 여러 필진에 의해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본다. 또한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지가 거의 15년이 지났으니, 한국에서 취업을 어떻게 하고 또 어떤 방법을 써야 되며,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지는 유학생들이 나보다 더 밝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은 좁고”의 논제는 유학생 여러분에게 맡겨두는 편이 더욱 좋다고 생각되며, 도리어 내가 좀더 경험했고 또 자신있는 “미국은 두렵다”의 논제에 주요 관점을 두고 본 칼럼을 쓰고자 한다. 아니 차라리 “미국에서 직장을 얻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되나요?” 또는 “미국 생활에서 겪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어떻게 두려움 없이 극복하며 살 수 있나요?” 라는, 수 많은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질문에 나의 경험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고 싶다.


K형제의 고민


지금 학위취득을 앞에 둔 유학생 K형제의 고민을 들어보자.


“최근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학위 논문 심사를 몇 달 앞에 남겨 둔 K형제의 (학위 취득 후) 취업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수년 동안의 힘든 학위 과정을 이제 거의 마쳐가고 있지만, 앞으로의 취업과 진로 문제를 생각하면, 학위 취득의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형편이다. IMF 경제 한파 이후에 고국에서 보내 주시던 향토 장학금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생활고에 지친 아내의 불평을 감내하는데도 이제 힘에 겨워지고 있다. 최근 학위 취득 후에 취업이 늦어지면서, 유학생 부부들의 가정 불화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통계는 여간 불안한 소식이 아니다. 이에 더하여, 최근에 실직하신 부모님께서는 학위 취득 후 빨리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얻어서, 부족한 가계를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눈치이시다.


게다가 최근에 공부를 마친 선배들이 고국에서 직장 찾기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취업의 문이 참 좁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행히 미국이 경제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직장을 얻기에는 한국보다는 나은 형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가 쉽지도 않지만, 또 얻는다 해도 어떻게 미국에서 계속 살아 남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려우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 자신감이 없다.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 여쭈어 보지만, 주님의 응답은 더디기만 한 것 같다. ‘주님, 한국입니까, 아니면 미국입니까?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K형제는 요사이 주님께서 한국에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에 살아야 하는지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K형제의 고민은 현재 거의 모든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공통된 고민이요, 또 기도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의 상황과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10여 년 전에 유학생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 미국에 남게 된 나의 경험담은 여러분의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학위를 마칠 때까지 꿈 속에서조차도 생각지 않았던 나의 미국 이민 생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꿈도 꾸지 않았던 미국 이민 생활


내가 학위를 취득하던 90년대 초만해도 미국의 경제는 극히 나쁜 상황이었다. 일본의 경제력이 너무 막강하여서 미국이 이제 망해가고 있다는 패배감이 팽배할 때였다. 따라서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학위 취득 후에 한국에 돌아가길 원했다. 또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직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절이라서, 나의 유학 동료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도 물론 학위 취득이 가까워지자,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하여 몇몇 대학에 지원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고무적이지 못하였다. 특히 서른이 훨씬 넘어 늦게 유학을 와서, 동료들 보다 학위 취득에 시간이 더 많이 걸렸고, 나이가 마흔이 가까워서 학위를 취득하게 된 탓도 있었다.


그런데 학위를 마쳐 갈 즈음에 크리스천으로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만한 도전이 있었다. 유학 생활 동안 나의 믿음의 본이 되었으며, 또 믿음의 동역자로 같은 교회에서 유학생을 섬겼던 믿음의 동지인 P형제가 학위 취득 후에 가족과 함께 M국에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섬기던 교회에서 P형제를 M국 선교사로 파송할 때, 나는 그 교회에 선교부장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 당시는 M국의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았고, 대단히 위험한 시기였다. 그때 주님은 나에게 M국에 나간 P선교사의 사역을 지원할 독립적인 선교회를 미국에 세울 것을 요구하셨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어찌 말씀하시든지 한국에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국제 바울선교회(PIM)를 조직하고, 미국 정부에 비영리 선교회로 등록까지 마쳤다. 나는 총무 간사로서 M국 선교 지원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사실 나는 속히 한국에 돌아가기 위하여 가능하면 빨리 국제 바울 선교회의 재정적인 자립을 이루고, 또 장기적인 P선교사의 선교 지원 교두보를 미국에 확보해 두고 싶었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 후에 나는 귀향하는 군인처럼, 선교 사역의 부담을 던져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계속 내 마음에 부담을 주시며, 미국에 남아서 국제 바울 선교회를 섬기며 M국 선교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셨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그때까지 학위 취득 후에 미국에 남아서 직장을 잡고 살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꿈에서 조차 없던 터였다. 물론 수년 동안 주님께 한국에 돌아가서 대학 교수로 젊은이들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 오고는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저 유학 생활이 끝나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 생활의 압박을 다시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 없는 영어 실력을 가지고 미국사회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까에 도통 자신이 없었다. 이때에 주님은 몇 년 전 내가 유학 생활이 힘들어 눈물 흘릴 때에 그 눈물을 닦아주시던 주님의 은혜에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께 드린 나의 신앙 고백을 생각나게 하셨다 – “주님! 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하고,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미국에 남기로 작정하였다. 내가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 많은 기존연 구원들을 계속 해고하고 있던 IBM Watson 연구소에서 나를 박사후 연구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꿈도 꾸지 않았던 나의 미국 생활(이민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미국에 남기로 한 후에 가장 먼저 나를 괴롭게 한 것은 한국 유학생으로서 미국에 온 나의 정체성(Identity)이었다. 미국에 사는 나는 한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인가? 나는 어차피 두 문화에 접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이민 1세이지만, 나의 자녀와 후손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 결국 내 후손들의 피부는 나와 같이 계속 동양인의 모습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인종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인가? 꼬리를 무는 수 없는 질문들로 날을 지새웠다. 아마 지금도 미국에 남아 살기로 작정한 유학생들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고민하고 있을 것이 틀림 없다.


재미있는 미국 생활


내가 지금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초임 조교수로 부임해 온지도 이제 7년이 되었다. 새로운 대학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숨가쁘게 바쁜 나날들이었다. 열심히 연구하고, 또 가르쳤다. 또한 주님의 사역 때문에 대학에서 일하는 만큼의 또 다른 바쁜 스케줄 속에 보낸 날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총무 간사로서 바울 국제 선교회를 섬기고 있다. 주님은 바울 국제 선교회를 축복하셨고, 본 선교회를 통하여 M국 선교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 바울 국제 선교회는 작은 사람들이 섬기는 구멍 가게 같은 선교회지만, 결코 작은 선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나의 연구 프로그램은 이미 대학 내에서 뿐만 아니라 내 연구의 전문 분야에서도 영향을 크게 끼치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하였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세계 각국에서 내 연구실을 견학하고자 하는 방문객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대학에서 견학오신 교수들을 만나게 되면, 거의 어김 없이 언제쯤 한국 대학으로 들어올 계획이냐고 묻는다. 아마 그분들이 보시기에는 한국 대학의 교수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 내가 근무하는 미국 대학에서 훈련을 잘 받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모양이다. 또 실제로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하여 미국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는 젊은 교수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질문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상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마치 백인 미국 교수에게 가서 한국 대학으로 언제 들어올 거냐고 물을 때, 백인 미국 교수가 느끼는 당혹스런 감정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거의 비슷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처럼 주님께서 명하시고, 허락하신 땅이면 내가 살 땅이라고 믿고 산다. 그래서 나는 한국은 고국으로 믿고 살고, 미국은 내 땅이라고 믿고 산다.


요사이 미국에서는 이민 신학이라는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다. 하나님이 명하시고 허락하신 땅이면, 내가 살 땅이라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이민 신학에 근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은 저들의 조상이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던 이방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명하시니,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고, 또 그들의 자손이 거기서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배우며 산다. 또 내 평생에 고칠 가망이 전혀 없는 영어의 엑센트를 여전히 유창하게 쓰면서, 오늘도 자유롭게 미국 땅을 누비고 다닌다. 다민족이 어울려 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미국 생활이 나는 참 재미있다. 내가 미국에 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수 많은 주님의 사역에 참여해 오면서, 왜 주님이 나를 미국에 남겨 두시기를 원하셨는지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한때는 나도 K형제처럼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라고 두려움 가운데서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 이민 생활이 자유로워져서 “한국 대학의 교수로 언제 들어올 계획입니까?”라는 질문이 이상한 질문으로 들린다. 그래도 나는 언제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어느 곳으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움직이는 이민 생활의 참 자유를 맛보고 있다. 결국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를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고민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물어야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크리스천은 결코 진로를 결정하는데 향방 없이 나아가지 않는다.


다음 회에서는 미국에서 전문직을 가지고 이민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위하여,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민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일형]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에 순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캠퍼스 사역 Q&A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에 순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지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자도의 입문이 세례받는 것이라면 제자의 훈련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배우며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키는 자가 없기 때문에(롬3:10) 우리 누구도 참된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온전하신 스승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자 삼으라는 말씀은 곧 온전하신 스승이신 예수님께 제자도를 배울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인도해 주는 일 그 자체도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을 배우는 것과 지키는 것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운다는 뜻은 곧 그 말씀을 지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행동을 요구하는 진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말씀을 이해했다면 행위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삶이 말씀의 지배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말씀 공부와 묵상의 시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28절에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면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고 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에게 직접 말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올바로 이해시켜 주시고 또 말씀이 삶 가운데에서 올바로 체험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즉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 이해할 수 있게 하시므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시고 또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 혹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의 열매가 인간의 응답과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응답함으로 이루어지며 전도의 미련한 도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 삼는 일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빗나간 인간의 의식 속에 성령님께서는 먼저 된 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듣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마치 빌립이 에티오피아 대신에게 말씀을 설명해 줌으로 말씀이 그 대신의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던 것처럼(행8:26-40), 제자 삼는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한 사람 내에서 이루시려는 일을 우리가 한 팀이 되어 외부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함께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시켜 주는 일과 그 말씀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인간의 고정된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그 변화가 삶의 구석 구석에서의 실질적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지속적인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의식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리고 생각의 가장 가는 줄기까지 들어가 말씀으로 정복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히4:12-13)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3년 동안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같이 생활하시면서 그 생활 속에서 말씀을 이해시켜 주신 바로 그 작업입니다. 그 죄성 때문에 계속적으로 타락하려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역행하여 말씀을 올바로 이해시켜 어느 정도 자리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일은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베풀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을 모아 성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며 그들에게 말씀의 이해를 돕는 일입니다. 그리고 공부하며 함께 나누어지는 교제와 대화 속에서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 하나 잡아 주고 교정시켜 주는 일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인간의 잘못된 마음의 세계를 말씀으로 정복해 가는 행위입니다. 사람들마다 사단에게 잡혀 있는 부분들이 다 다르지만 (과거의 아픈 상처에서 비롯되었든지 욕심에 붙들려 잡혀있든지) 모두가 잡혀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이런 부분들부터 치유하고 해방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간의 교만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어져야 합니다. 이런 교만이 깨어질 때야 비로소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공부를 할 때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함께 할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어떤 캠퍼스를, 혹은 청년회나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을 놓고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방향성이나 성경 공부의 분위기가 불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적은 숫자의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장기적 계획으로 말씀을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비슷한 신앙의 깊이가 있는 사람들끼리는 모여서 성경 공부를 시작한다면 약 열 번 정도 공부한 후 흩어져서 제자 양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주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을 읽고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 기본이 없는 자일 경우 간단한 교재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을 직접 공부해야 합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말씀 공부를 준비할 때 자신이 먼저 확실하게 묵상하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 은혜 받는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이 자신에게 크게 감동이나 괴로움으로 와 닿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인도한다면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성경 공부에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제자 훈련의 기회를 상실시켜 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또 어떻게 이해되어져야 하는지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자신의 간증이 될 때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 공부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다른 일들을 이유로 자주 빠지거나 시간을 변경하면 참석하는 자들이 성경 공부에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시간을 지키고자 하는 헌신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제자 삼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된 제자 훈련은 그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자신의 친 형제와 같아질 때, 그들의 고통과 기쁨이 자신의 일과 같이 될 때 시작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랑의 역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연종] 사람분류법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사람분류법

고등학교 때부터 이과생에 대해서 이유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문과와 이과로 나뉘고 난 뒤 난 인문계와 자연계는 타고난 적성은 물론 인생의 목표도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이과생은 자기만 혼자 잘 살겠다고 편한 삶을 찾은 사람이고 문과생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 큰길을 택한 사람이라는 말도 안되는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과생은 어쩐지 쪼잔해 보이고 소심하다는 이미지도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수학과 물리는 이과 과목이고 국어, 영어는 문과 과목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이유에서 비롯한 나의 편견과 오만은 결국 문과생과 이과생은 물과 기름, 또는 상이한 궤도를 달리는 기차처럼 영원히 다른 사람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아 버렸다.

문과 교수와 이과 교수가 한데 어울려 생활하면서 난 가끔 이 보이지 않는 벽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음에 놀라곤 한다. 이과생을 만나면 우선 부수기 어려운 벽과 건너기 힘든 강이 있으리라 짐작을 해버린다. 어떤 문제를 두고 토론하고 해결을 도모하다가도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결론을 전제하고 있어 길고 깊은 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쉽게 포기하고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일이다. 입시 면접 시험에 어떤 문제를 내는 게 좋을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 당시 세상을 한참 시끄럽게 하던 고교생들의 비디오 <빨간 마후라> 같은 시사문제를 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느 한 분이 대뜸 “장동휘, 박노식이 나오는 그런 영화를 요즘 아이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고, 난 어이가 없어 신문도 안보느냐고 웃어 버린 기억이 있다. 다음 해에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작년의 <빨간 마후라>를 예로 들면서 교수들이 시사에 민감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자리의 분위기는 참으로 썰렁했고, 그 분들 중 누구도 두 <빨간 마후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이들이 이과생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문제는 문과와 이과의 차이라기보다 뉴스를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였을 뿐이다.

한번 길들여진 분류법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정보조차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자리잡은 사유체계는 그로부터 세상을 분류하고 사람을 구분하는 법이 되어 버린다. 하여 사람들은 의례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시야만큼 보며 자기 그릇 크기만큼 세상을 퍼낸다.

세상과 사람을 구분하는 법 가운데서도 이분법은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다. 세상과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간단히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릴 적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어느 나라가 좋은 나라고 어느 편이 나쁜 나라냐고 묻곤 했다. 하지만 이분법은 분류의 편이성은 있지만 무차별적으로 속성을 나누어버린다는 측면에서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배운 학습체계가 이분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학교는 물론 교회의 가르침도 이분법적인 체계를 따르는 경향이 많다. 선과 악, 남과 북,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세상과 교회,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등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완전히 속성이 구분되는 것처럼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렇게 간단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많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문과와 이과의 경우에서처럼 물론 타고난 속성이 어느 한 성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쉽게 무엇을 규정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정당화하여 당연시한 우리의 안이함과 무감각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요즘은 인간의 심성과 성격유형 등을 이리저리 나누는게 유행한다. 사주, 관상 등의 관심이 시들지 않는 한편으로 별점이니 혈액형이니 MBTI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만나 그를 하나하나 경험하기 전에 그에게 붙여진 성격유형으로 그 사람을 규정해 버린다. 문제는 이러한 규정이 남에게 적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 버린다는데 있다. 성격 유형 검사를 끝내고 나면 학생들은 나의 직업은 무엇이고 내게 적합한 사람은 어떤 타입이라고 정한 해답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떤 운명론적 예감을 추종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 정도는 더 심각하다. 이 방법을 따르게 될 때 가령 내성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 하지 않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필수적인 사회생활조차 기피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성향별로 나누고 분류하고 그에 따라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러한 경향이 예언기도에 까지 이르면 그 정도는 매우 심각해진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태중에서 부터 정하셨다는 굳은 믿음이 때로는 우매한 자기 미신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렵다고 미래에 꿈을 두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추종하여 현실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자기 기만이다. 나의 인생을 결정하지 말자. 규정하지도 말고 한정하지도 말자. 나는 어떤 사람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말자. 지금 열심히 살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함철훈] 물에도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함철훈] 물에도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eKOSTA 갤러리


물에도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Mission San Juan Capistrano 안뜰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연꽃도 고왔지만 하늘을 비춰내고 있는 물빛이 먼저 내 심상에 새겨졌습니다.
물이 이렇게 하늘까지도 넉넉히 담아낼 수 있음은 자기 색을 고집하지 않고서도 물일 수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렇게 사셨던 주님이 생각납니다.

[팽동국] 박영선 목사의

eKOSTA 서평


박영선 목사의 <구원 그 이후: 신앙생활의 성숙이란 무엇인가>


지난 달의 추천 양서는 존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 였는데, 2001년 미주 코스타를 통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 책 선정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초신자들 뿐만 아니라 조장이나 성경 공부 인도자, 혹은 전도하고 싶은 분들도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이며, 나도 작년에야 읽고 나서는 너무 늦게 읽어 전도할 때나 성경 공부 인도할 때에 잘 활용하지 못했음을 후회했다는 부끄러운 고백도 털어놓은 바 있다. 추천서를 쓰면서 처음 책을 읽을 때보다도 훨씬 깊이 있게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보다도 약 2주전에 교회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추천서를 쓰며 정리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활용하여 복음을 잘 설명할 수가 있어서 더욱 좋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이 큰 기쁨으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천국의 기쁨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는 영광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자를 들어서 놀랍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것을 나타내셨을 뿐 아니라, 이러한 기쁨과 간증을 통해서 어쩌면 독자들에게 서평을 쓰는 기쁨과 복, 그리고 신앙 양서를 읽기를 권면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이러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며 9월의 양서 추천을 시작한다.


이번 9월의 추천 도서로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계속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성숙해져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선정했다. 바로 서울 남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영선 목사의 대표적인 저서 <구원 그 이후: 신앙 생활의 성숙이란 무엇인가>이다. 얼핏 제목을 보면 누구나 쉽게 그 내용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고 또한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믿고 난 이후에도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거나, 믿었는데도 안 믿을 때보다 더 많은 문제가 생긴다던가, 도대체 믿기는 믿었는데 믿었다는 사실이 별로 감동으로도 감격으로도 느껴지지 않기에 어디 가서 신자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계신다면 바로 이 책이 여러분을 위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매 순간 흥분으로 살던 날들을 기억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기억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거나, 나보다 훨씬 늦게 믿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영적으로 성숙해 진 모습에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해 보이기도 하며 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 하여 하나님께 항의를 해 보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또한 예수님 믿고 나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거룩해야 되고 영광스러워져야 되는지 알고 싶다면 역시 이 책 속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실 수 있을 것이다.


박영선 목사는 이 <구원 그 이후>라는 책과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총체적인 구원과,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고 심도있게 알려 준 분이다. 구원론은 간단한 듯 하면서도 그 깊이를 다 헤아리기는 참으로 어렵고, 너무 내세적으로만 바라보거나 혹은 너무 현세적이거나, 아니면 고백이나 감격과 감정만을 강조하거나 그 반대로 사실과 이성만을 강조하여 감정을 무시하거나, 때로는 인간의 선택이나 책임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는 등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러한 치우침 없이 참으로 균형있고 깊이있게 구원 받은 자가 바라 보아야할 궁긍적 영광스러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설복>을 알게 함으로 구원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전도나 복음, 구원 받는 방법에 대한 책도 많고 신자의 성화에 대한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책은 많지만, <구원 그 이후>처럼 믿고 구원 받은 자의 영광스러움을 일깨워 줌으로써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이지만도 않게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문제와 어려움 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되는지를 잘 알려 주기도 한다. 그 외에 우리 주변의 평범하고 쉬운 예화들과 날카로운 풍자를 접하는 맛도 또한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박영선 목사는 이 외에도 로마서, 요한복음, 사도행전,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히브리서등 많은 강해 설교집을 출판했다.


여러 이코스타 독자들이 이 책 <구원 그이후>를 읽음으로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원하시는 만큼 영광스러운 성도로 신앙이 성숙해 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