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안]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현황 평가 (I)

유학생 사역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현황 평가 (I)
한국 유학생 사역의 특징 (공통점)


* 지난 호에서는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전반적인 현황을 설문 조사 분석을 토대로 하여 실었고 이번 호에서는 그 현황에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호에서는 한국 유학생 사역의 장단점을 살펴보고 건설적인 제안들을 하고자 한다.


1. 사역자

이 지역의 사역자 대부분이 유학 생활을 경험했거나 이민 교회 목회의 경험을 갖고 있는데, 이는 사역자들이 유학생들의 생활과 상태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장점이 된다. 교단적으로는 UMC (United Methodist Church)와 PCUSA (Presbyterian Church in USA)에 소속된 사역자들이 다수이며, 연령별로는 40대 초반과 중반, 50대 중반 이후의 사역자들이 다수다.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사역자는 1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지역의 교회에서는 사역자의 목회 철학에 의해 교회 사역의 방향과 내용과 구조가 결정되어 진다.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징은 부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주일학교나 청년부에 부교역자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형편이나 지역적 위치로 인해 부교역자를 두기가 힘들다. 특이한 것은 유학생이 중심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영어권부 교역자보다 유학생 부교역자 숫자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

2. 지역적 특성

지역적으로 크게 이민자 중심의 도시와 유학생 중심의 도시로 나뉘어 진다. 그리고 중간 형태의 도시들도 있다. 협력과 연합이 잘 되는 지역이 있는 반면 갈등과 경쟁이 있는 지역도 있다. 협력과 연합이 잘 되는 지역의 개 교회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 비해 유학생 사역이 효과적으로 잘 되어지고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같은 지역 안의 교회들의 사역의 구조나 형태 프로그램 등이 서로 닮아 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일 전교인 식사 교제나, 청년부 찬양팀 구성, 신입생 contact 전략, web site 운영, 청장년부 성경 공부,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 한국어권 중고등부 사역, 주일 예배 시간의 변경, 새벽 기도회나 주일 저녁 예배 등 한 교회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다른 교회들도 따라서 하는 경향들이 있다.

반면에 사이즈가 큰 지역에서는 사역이 전문화되는 경향도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지역 내에서 학부생이 많이 모이는 교회, 대학원생이 많이 교회, 1.5세들이 많은 교회, 교민들이 많은 교회, 교환 교수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등으로 ‘교회 구성원’이라는 측면에서 각 교회들이 특화되는 경향이 있다. 상대적으로 도시 규모가 크고 물가가 비싼 지역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학생, 서울 출신들, 소위 일류대 출신들의 비율이 높고, 작은 규모이고 물가와 학비가 싼 도시에는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학생들과 지방 출신들의 비율이 많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학생들은 한국에서부터 학교를 지원할 때 TA와 RA을 통한 장학금과 월급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역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오기 때문이다.


 

3. 구성원

이전에는 대학원 유학생과 교민들이 교회의 주 구성원이었지만 점차 구성원이 다양해지고 있다. 언어 연수와 조기 유학의 영향으로 단기 언어 연수생, 학부생, 1.5세 학생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교환 교수와 기업이나 정부에서 연수를 오는 사람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국어권 중 고등부 학생들도 증가하고 있다. 아빠는 한국에서 직장 다니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둔 홀 엄마들의 숫자도 만만찮다. 그리고 졸업 후 박사후 과정(Post Doc)을 하는 사람들과 미국에서 직장(Job)을 잡아 정착하는 H 비자와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렇게 다양화되고 있는 구성원들은 한국에서보다 영적으로 복음에 대해 열려져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와 학교일 교회 활동 등으로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학위의 과정과 졸업 후 직장을 잡는 문제에 있어서 공통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싱글들에게는 정서적 외로움과 연애와 결혼 문제 등이 주 이슈인 반면에 기혼자들은 부부관계의 갈등, 경제적 압박, 자녀 양육, 배우자의 정체성 문제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4. 정착과 교회 결정

학생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불신자들은 작은 교회를 선호하고 한국에서부터 교회를 출석했던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한다. 그리고 한번 교회를 정하면 떠날 때까지 옮기지 않는 (또는 옮기기 힘든) 경향이 있다. 교회를 옮길 경우 좁은 도시에서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고 불만이나 불만족이 있다고 해도 잠시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참고 교회를 나가는 것이다. 용기를 내서 옮긴다 해서 다른 한국 교회로 가기보다는 아예 미국 교회로 옮긴다. 학생들이 특정한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착시에 도움을 받은 교회이거나 인간 관계(선후배, 친구)에 얽혀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입생들은 실제로 모든 교회를 방문해서 자기에게 맞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 않는다. 이러한 현황들로 인해 이 지역 교회들은 신입생을 Home Page나 이 메일을 통해 미리 contact하고 공항 pick up과 정착(집 구하기, 자동차 구입, 운전 면허 시험, 전화와 전기 신청, 가구와 살림 도구 구입, 자녀들 학교 입학, 보험 가입, shopping 등)을 돕는 사역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하지만 비율적으로 큰 교회에 많은 수의 신입생이 정착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 3개의 교회가 있는데 한 교회가 평균 출석 인원이 100명이고 두 교회가 각각 50 명이면 평균적으로 처음에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신입생 숫자의 비율은 2:1:1로 된다.

또 다른 특이한 현황은, 구체적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실제로 많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미국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학생들이 영어도 배우고 미국 사람과 교제하며 미국 문화 속에 동화되기를 원하거나, 한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전통적 한국 교회 style에 식상해 하거나, 영적 공급 없이 봉사만 하다가 소진(burn out) 되어서 탈출구로서 말씀이 좋은 미국 교회로 옮기게 되는 등의 경우가 그 이유이다. 한국 교회에서 문제나 갈등 있을 때 작은 도시의 유학생들일수록 다른 한국 교회가 아닌 미국 교회로 옮기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big ten 지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international 사역은 물론 특정하게 한국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 미국 교회들이 있다.

5. 교회 스타일

이민자가 많은 도시에서는 교민들 중심의 사역 구조 속에서 유학생은 청년회라는 부서로 존재하는 형태가 많고, 유학생 중심 도시들의 교회들은 유학생 사역에 맞는 교회 구조와 내용을 담아 내거나 변화를 시도하는 교회들이 다수다. 유학생과 이민자들 그리고 1.5세 들 사이의 gap을 없애고 가정 교회 셀 교회 등으로 통일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유학생 중심의 도시이고 유학생이 다수이지만 전형적인 한국교회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도 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삶의 현장인 campus 안에서의 사역보다는 교회 자체로만 끌어 모으는 개 교회 중심의 프로그램이나, 체계적 성경공부보다는 공모임의 강조(새벽기도, 주일 저녁 예배, 수요 저녁 예배, 금요 전교인 기도회), 양육보다는 봉사의 강조, 소그룹 모임보다는 구역 예배와 남, 여전도회의 우선 순위, 주일학교 교육보다 성가대의 우선 순위, 은사 활용보다는 직분 중심, 그리고 교회 건축 강조 등이다. 어떤 교회가 유학생 사역을 위해서 적절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제일 기준은 “교회가 유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느냐? 아니면 유학생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느냐” 라는 질문이다. 어떤 학생들은 유학시절에 한국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좋은 공동체를 경험하고 말씀으로 잘 양육 받아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세상 속에서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 파송 받았다고 고백하는 반면, 어떤 학생들은 유학시절 동안 교회의 부정적인 면을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경험하고 자신은 교회를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다가 탈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6. 사역 구조와 내용

크게 single과 married로 나뉜다. 싱글은 청년회로, 기혼자들은 남/여 선교회나 구역 모임(속회)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는 싱글들 사역에 비해 기혼자 사역이 부진한 상태이다. 기혼자들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가정 생활, 자녀 양육 등)도 있고, 매주 찬양과 기도 성경 공부로 모이는 활발한 싱글 모임에 비해 가끔씩 식사와 친교 중심으로 모이는 기혼자들의 구역(속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복음 전도와 깊이 있는 나눔과 말씀을 통한 양육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리고 기혼자들은 미혼자들에 비해 변화하는 속도가 느리다. 싱글들은 찬양과 경배 등 전체적으로 같이 많이 모이는 것을 선호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세상적인 말로 “(어떤 교회의) 물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 눈덩이 불어나듯 그 교회로 모여든다. 그리고 청년들을 잡기 위해 식사 교제가 중요시된다 – 식사 교제는 유학생 교회의 ‘뜨거운 감자’로서 장단점을 갖고 있다. 반면에 기혼자들은 소그룹 형태를 선호한다. 차근히 앉아서 학업에서의 stress 자녀 양육, 부부 관계의 갈등, F2들의 어려움 등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깊이 나누고 말씀으로 공급받는 건강한 소그룹을 갈망한다. 기도 사역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강조되어지고 있다. 제자 훈련, 조장 훈련, 추구자 반, 초신자 반을 따로 운영하는 교회들의 사역은 훨씬 더 체계가 있고 말씀으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리더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유학생 사역의 효율성과 영향력은 목회자의 목회 철학과 역량, 교회 전체 사역의 구조와 내용, 훈련된 평신도 리더들의 유무 등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7. 학생들의 신앙 생활과 교회 활동

유학생들 중 처음 교회 출석하게 되는 불신자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평균 25%-30% 정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다른 사역에 비해 이들을 위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기존 신자들과 묶어서 구역 모임이나 청년부로 편성하고 그 안에서 교제와 활동과 봉사를 통해 믿음이 자라나가기를 바라고만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교회 출석자 중 종교적 활동 혹은 사회적 활동으로 교회만 출석하는 맹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들의 숫자도 많다. 실제적으로 한국에 출석하건 미국 교회에 출석하건 주일 예배만 출석하고, 다른 활동과 봉사와 성경 공부 등에 전혀 참여하고 있지 않은 학생들이 많은 것이다. 한국에서 일반적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던 사람이나 교회만 출석했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교회에 잘 적응하지만, 오히려 한국에서 대학부나 선교 단체에서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양육 구조 중심의 교회를 만나지 않는 한 이 곳 교회 시스템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유학생활 동안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영적인 광야와 같은 생활을 경험하기도 한다.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양육과 caring을 받지 못하기에 갈등과 불만이 생겨나는 것이다. 열심 있는 유학생들은 지역 교회에서 부서 활동이나 소그룹 모임, 구역 모임 이외에 주일 학교 교사, 성가대원, 제직, 운영 위원회, 식사 당번, 청소, 관리 등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회 봉사와 사역이 몇몇 헌신된 사람에게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은 시간적 제약이 많고 떠날 사람이라는 심리 때문에 공동체성이 떨어지고 유학 생활 동안 개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개인주의적 신앙 차원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다수의 학생들이 교회 공동체에 대한 기대감이 낮고 주인 의식이 없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소수의 헌신된 유학생과 교민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행정적 운영과 사역의 내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정진호] 한 영혼, 사랑할 수 있나요?

코스탄 현장 이야기


한 영혼, 사랑할 수 있나요?


내 안에 과연 타인을 사랑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 특별히 고통받고 있는 이웃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영혼들을 사랑하겠다고 달려온 사역지에서도 종종 회의에 빠져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결론은 “없다”이다. 인류를 사랑하겠다고 박애정신을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인류애를 향한 철학 사상을 전개하고 위대한 저술을 남기는 일도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힘 없고 고통 받는 소자를 사랑하기 위해 내 자신을 지속적으로 희생하는 일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아원과 학교를 운영하며 더러는 영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많은 기독교인조차도 쉽게 빠지는 실패와 오류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1)


1990년 코스타의 부르심을 뒤로하고, 1991년 초 서둘러 포항에 정착한 나는 곧바로 교회 고등부 교사로 자원하여 젊은 영혼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을 불태우는 한편, 보스톤의 Gate Bible Study에서 훈련받은 대로 포항공대와 연구소 박사들이 몰려 사는 교수 아파트 단지에서 몇몇 가정들을 규합하여 부부 성경공부 모임을 조직했다. 주로 믿지 않는 가정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었다. 고등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들로 하여금 헌신케 하는 일은 정말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었고, 그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 벌써 사역자로 헌신한 열매들이 있을 정도이니, 무던히도 열심히 가르치고 또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서부터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가장 뜨겁게 준비하며 기도하였던 프로젝트 팀의 선후배들은 시작 초기부터 거센 반발과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술좌석에서 세상 철학을 논하며 그토록 가깝고 서로 말이 통하던 친구도 예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변하고 금새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술자리나 일반적인 대화에서조차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버린 나의 태도가 그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더러는 불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속된 팀은 그 당시 포항제철이 일본의 신일본 제철과 회사의 사활을 걸다시피 하며 서로 경쟁하는 차세대 신기술 개발을 위해 구성된 특별 프로젝트 팀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과 함께 일에 대한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MIT에서 특별히 스카웃이 되다시피 한, 두 사람의 대학 선배와 더불어 주로 자존심(?)이 강한 S대 출신의 선후배 박사들로 구성된 이 팀원들은 출발 당시부터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 일 중독(workaholic)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과연 저들이 100여 년 동안이나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꿈의 기술을 그것도 종합 엔지니어링의 경험이 전혀 없는 풍토에서 시험공장(Pilot Plant) 규모의 대형 프로세스 개발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업무지향적(task oriented)이던 팀원들은 심리적인 압박 속에서 더욱 일에 사로잡혀 갔다. 연간 예산이 10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모든 팀원들은 주말도 없이 매일 밤 자정을 넘어 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각 가정들은 점차로 남편과 아빠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원망과 한숨 속에서 점차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그들에게 교회를 나가자든지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우상이 되어버린 가운데 한 팀 안에서조차 다른 사람에게 서로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리가 서로를 붙잡고 있었고, 모든 팀원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강퍅하게 닫혀있었다. 나는 직장에서 맡겨진 내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일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을 지키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깊이 깨달았던 한 가지는 내가 만일 미국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분명히 그들과 함께 동일한 모습으로 일에 중독되어 경쟁적으로 치달았을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든 일을 중단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예배라는 안전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예배는 죄의 욕망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영적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새벽마다 팀원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매달려 기도를 하면서도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고 의심이 자꾸만 일어나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만 같은 답답함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군데도 영적인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M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S대 금속과에서도 항상 수석을 달리던 사람이었고, MIT에서도 함께 있어 잘 알고 지냈던 선배였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에, 나보다 1년 먼저 이 팀에 합류했던 그 선배는, 집안 배경이 불교 쪽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일에 대한 남다른 강한 집착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적으로는 기독교에 오히려 반발심리(?)까지 지닌 사람이어서, 기도를 하면서도 마치 이 팀에서 예수를 믿게되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QT 노트를 돌이켜 훑어보면 항상 그 선배를 위한 기도가 첫 자리에 올라가 있었던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첫 1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그 같은 인간적인 생각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방법을 통해 마침내 이 팀에 구원의 문을 열고 계셨다. 일이 우상이 되었을 때 가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매달려 춤추듯 희비의 쌍곡선을 오르내리던 우리 팀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사건이 발생했다. 성악을 좋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M선배의 부인이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병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 가정은 갑자기 산산이 깨어져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자 두 아이를 각기 본가와 처가로 보내고 홀로 남게된 그 선배는 이 일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며 치달아오던 그가 강제로 발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아내를 낫게 하려고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주위의 권유를 따라 부인을 데리고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도 아내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선배가 예수 십자가 앞에 세워지면서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악들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심령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도원에서 돌아온 후, 후배인 나에게 찾아와 교회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던 그 선배의 떨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던 후배를 찾아와 부탁을 했을까? 교회 문을 함께 들어설 때 마침내 그동안 쌓여있던 온갖 죄악이 눈물을 통해 하염없이 흘러나오며 회개에 회개를 거듭하던 그 선배는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면서 통곡을 하였다. 그렇게 견고해 보이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손길에 힘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일은 비단 M선배만의 일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던 우리 팀은 전원이 깊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가던 발걸음들을 제각기 멈추고 자신들의 인생을 뒤돌아 보게끔 되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유학을 위해 그리고 또 학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가? 좀 더 나은 위치와 직장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 가정과 주변의 많은 것들이 내 앞에 놓인 앞날의 영광(?)을 위해 유보되었고 희생되어 왔었다. M선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학 생활 시절 이국 땅에 홀로 데려가 유학생 기숙사에 댕그라니 남겨진 아내를 희생하며, 오직 박사 학위를 위해 밤낮으로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웠고, 그 아내 역시 학위만 끝나면 모든 것이 풀리고 행복한 장밋빛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로 생각하며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유학 시절보다도 더 영적으로 힘들고 암담했으며, 남편들은 더 큰 욕망에 휩싸이며 날이 갈수록 가정에서 멀어져만 갔던 것이다. 비록 프로젝트에는 성공하여 우리 팀의 업적은 신문 지상과 TV의 온갖 매스콤을 타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요 쓰러져 가는 가정들 뿐이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우리는 질주했던가? 마치 이상의 시 <오감도>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하던 13인의 아해들처럼(그 때 우리 팀이 어쩌면 바로 그 13인의 아해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뛰는 줄도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무작정 함께 뛰는…, 안 뛰면 불안해서 달려나가는 그런 인생들을 살아가던 우리 팀에게 마침내 빨간 정지(Stop) 사인이 걸리고 만 것이다. 퇴근 시간이 저녁 6시로 정상을 되찾았다. 각 가정이 주말에 남편과 아빠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2)


고난 가운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묵상해 본다. 폭풍우가 지나간 것과 같았던 그 시점에, 나는 조심스럽게 몇몇 동료들을 향해 함께 성경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였다. 마침내 어느 월요일 저녁 일과 후, 4명의 팀원이 처음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펴 들었고, 꿈에도 그리던 직장에서의 첫 <월요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한 명 두 명씩 그 모임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반 년 후에는 10여명으로 늘어나 그 팀의 연구원 대부분이 창세기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파일롯 플랜트를 세우는 현장 사무실에서, 그 바쁜 일과 속에서, 월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함께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나누며 또 기도까지 하는 놀라운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형성되었다. 팀장이었던 K선배는 M선배의 일로 충격을 받은 후, 비록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항상 월요일 저녁 시간을 비워주는 배려를 해 주었다. 거의 대다수가 한번도 성경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창세기에 감추어진 복음 앞에서 점차 드러나는 자신의 실존들을 깨달아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세기가 끝나고 마태복음이 시작되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모임을 인도하면서 나는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던가?


한편, 나는 이제 막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한 M선배와 더불어 매일 새벽 QT를 시작했다. 유난히 아내를 사랑했던 그 선배가 병원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더러는 원망으로 힘들어할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홀로 남은 그의 곁에 있어주는 일이었고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은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이었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에는 마음이 빨리 움직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무디고 더딘 나에게, 그 선배를 통하여 상처 입은 한 영혼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일 조차도 자신의 영적 만족을 채우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가 되기 쉬운…, 그런 위선 속에 쉽게 빠져드는 그런 사람에게, 정말 고통받는 한 영혼을 사랑하며 돕는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그저 동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으로 그의 마음에 들어가 하나됨을 확인하는 순간 그 영혼을 향한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쳐 흐르는 참 아픔의 눈물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자리로 찾아가고 내려가 그의 마음 속까지 들어가기까지…,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였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깊이 탄식하시는 그 소리를 들었다. 어두운 새벽, 자명종 소리에 벌떡 일어나 먼저 기도를 드린 후, 그 선배의 집을 찾아갈 때의 심정….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초조히 발걸음을 옮기는 안타까움의 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아파트의 문을 두드려 잠든 선배를 깨우고, 함께 앉아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나눌 때마다 성령의 손길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어루만져 주었으며, 우리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었고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함께 매달렸던 것이다.


그 선배와 더불어 새벽 QT를 시작한지 약 반 년 만에 맞게된 92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우리 두 사람은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각기 하였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마무리 짓고 연휴를 보내야겠다는 심정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날 퇴근 무렵, 그 선배가 내 옆에 다가와 “정 박사 퇴근 안 해?” 라고 두 번쯤 물었고 나는 일에 빠져 건성으로 “예, 곧 할게요.”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 나 홀로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설레임은,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이건 마찬가지로 다가온 듯, 다른 날은 찾아볼 수 없는 정적이 복도에 흐르고 있었고, M선배의 오피스는 이미 잠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M선배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걱정이 와락 들어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보다가,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가 그를 찾아 온 시내를 헤매기 시작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고 반겨줄 가족이 없는 이 거리를 홀로 헤매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혹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유혹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이전에 잘 다니던 술집까지 찾아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주님이 맡기신 한 영혼도 제대로 책임을 못 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놓쳐버린 내 자신을 생각하니 너무나 한심하고 속이 상해서 가슴이 저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그가 혹 나쁜 곳으로 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친히 그의 곁에서 지켜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했다.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오니, 크리스마스 식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M선배는 어디다 두고 혼자 들어와요?” 혹시나 연락이 올까 해서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결국 우리끼리 맞이한 쓸쓸한 크리스마스 식탁에서 나는 첫술을 뜨다말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밤 열시가 지났을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마치 산타클로스나 된 것처럼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M선배가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갑자기 축제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홀로 북적대는 거리에 나서니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정말 막막하고 형언키 어려운 외로움이 몰려왔다고 한다. 음식점에서 쓸쓸히 저녁을 먹으며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예수 믿은 후 처음으로 맞는 의미 있는 성탄절에 가족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다고 생각하니 기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백화점을 오르내리며 아내와 두 아들에게 줄 선물,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줄 선물과 카드까지 고르며 사는 동안에 조금 전까지 그를 감싸고 있던 외로움은 사라지고 마치 온 몸이 두둥실 떠가는 듯한 이상한 기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간, 누군가가 자신 옆에서 바싹 붙어서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예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바로 옆에서 친밀히 동행하는 듯이 느껴지는 이상한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체험이 있고 난 이후, 나는 새벽 말씀 속에서 형수(선배의 부인)가 나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때 아침마다 한 단락씩 함께 보고 있던 고린도 전후서가 끝날 때 형수가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93년 새해에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전혀 차도가 없던 그녀가 갑자기 기적처럼 낫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 해 봄 부활절 무렵, 그녀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이 퇴원하여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우리는 말로 표현키 힘든 감사와 기쁨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성악가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가 마침내 교회에 발걸음을 하면서, <월요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한 형제의 결혼식에서 찬송가 288장 <완전한 사랑>으로 축가를 불렀던 것은 두고 두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날 성경공부 모임 가족 전원이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셨네…> 하는 찬양을 교회에서 올려 드림으로써, 교회의 믿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결혼식에 참석하였던 믿지 않는 많은 직장 동료들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며 영광을 돌렸던 것이 지금도 생생한 감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같은 기쁨의 선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느껴졌던 그 가정은, 몇 년 후 형수가 다시 병이 재발하여 그 선배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고 결국 먼저 하늘 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지금도 나는 그 선배 가정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고 안타까움에 휩싸인다 – 이제는 교회에서 칭송받는 집사로 변하여 새신자들을 섬기는데 앞장서는 분이 되었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형제요 신앙의 동역자요 후원자가 되었지만….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그렇게 아쉬워하던 그 선배와 형수의 모습…. “정 박사! 자네가 가고 나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 하며 조용히 눈물을 글썽이던 그 선배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 와 있는 동안 그 선배는 다시 이전의 모습처럼 일에 빠져 들어갔고,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수의 죽음을 통해 그 선배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대속의 피를 직접 체험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가 구원을 얻는 축복도 함께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과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 분께서 앞으로 그 선배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그러나, 그 무렵 나는 그 선배 사건을 통해 새벽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이미 중국을 향해 부르시는 그분의 강한 음성을 듣고 있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게 맡기실 또 다른 영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후기 : 이 글은 유학 생활 후 곧바로 한국에 돌아와 직장과 가정을 함께 섬겨야할 코스탄 후배들을 위해 기도하며 썼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 글로 인하여 사랑하는 M선배의 마음에 다시금 옛 상처를 기억나게 하여 아프게 할까봐 무척이나 조심하고 고민하였습니다. 부디 성령의 위로하심이 그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만져주시고, 또 새로운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이 선배의 가정과 두 아들에게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김연종] 공주와 왕자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공주와 왕자

요즘 젊은이들의 이미지는 당당하고 자신있고 개성있다는 것이다. 과거 세대와 달리 주눅들지 않고 제 할말하고 산다고 한다. 하긴 TV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이쁘다’는 것을 부끄러움없이 말한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마음껏 속내를 비추이는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문화가 참 많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요즘 이토록 당당한 ‘공주’와 ‘왕자’가 많은 이유는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비판에 이르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소위 가상청중(imaginary audience)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과대망상적 착각 징후군’은 자신이 마치 무대 위의 배우나 공주가 되는 것 같이 살지만 실제는 오히려 타인중심으로 사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당당한 왕자와 공주는 별로 없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 가치조차 확신이 없는 허약한 세대가 바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실체일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대답들을 내어놓았다. 게으르다, 끈기가 부족하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유머감각이 부족하다… 등등. 다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약점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럼 자신의 장점, 아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이번엔 대다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의 장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태껏 한번도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우리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은 무엇인지? 아니면, 좀더 단순하게 “나는 나를 좋아하는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자신있게 “물론”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한 존중감 (self-esteem)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존중감이 높은 사람은 대부분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장점보다는 약점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만족스러운 측면보다는 고쳐야 할 측면에 대해 더 민감한 편이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겸손이라고 명명되기도 하지만 실상은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미국사회에서의 침묵은 결코 겸손이 아님을 독자들은 알고있으리라). 겸손에 가리워진 낮은 자존감, 이것은 심하면 “나는 내가 싫다”라는 극단적인 감정의 간접표현일 수도 있다.

파멜라 버틀러 (Pamela Butler)라는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갖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파괴적 믿음 (self-destructive beliefs)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파괴적 믿음은 우리의 생각 속에 만연해있는 몇 가지 강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강박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완벽하고자하는 강박’이다. 일이든, 학업이든, 신앙이든, 운동이든, 외모든 사람들은 가능하면 완벽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능력 이상의 수준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늘 닥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종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성공한 사람들, 최고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치가 되고 당연히 나는 늘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란 말처럼 난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만족치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두 번째는 ‘빨리 이루고자 하는 강박’이다. 주어진 시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이루려는 욕심은 느리게만 보이는 나 자신을 게으르다고 타박하게 되고 더욱 초조함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러한 강박은 때로 정해진 시간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두려움이 되어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석사 2년, 박사 3년 등으로 시간표를 정하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큰일이 날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은 빠르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맞은 때가 중요한 법이다.

세 번째로 ‘강하고자 하는 강박’을 들 수 있다. 약한 것은 부끄러움이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스스로 학대하게 했는지. 난 남자이기 때문에 강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러한 강박에 때로 과장된 행동은 물론 가식된 행위를 해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넷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대의 기쁨을 위해 나의 기쁨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때로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나의 존재의 가치나 의미, 리듬을 파괴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면 그건 이미 정도를 지나쳐 위험한 지경이 된다.

다섯째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단 한번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얻게되었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한다. 가령 밤을 새운다고 하고 한두 시간을 자게될 때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등이다. 결코 잠을 자지 않았어야 했고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극단의 기대로 자신을 채찍질하다 보면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느리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모든 이의 소원이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는 것일까.

자기존재가치에 대한 잘못된 신념들은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다. 실수없이, 빨리,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용서도하고 여유도 부리고 한순간 한순간을 감사하며 즐기면서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 비해 모자란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늘 피곤하고 자기 외에 주변의 사람들조차 숨막히게 하는 경우가 많음을 보게된다. 자기 존재에 대해 만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되는 것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조차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만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학대하거나 다른 것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치는 이미 지불한 예수님의 몸값을 말하고, 나의 존재의미는 나의 기쁨이 곧 그분의 기쁨이라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 만큼 나의 존재가 가치있다는 것이고 내 삶에 대한 내 스스로의 만족이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만족을 넘어 부정에 이르는 많은 젊은이를 보면서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수많은 문화상품들을 보면서 이 사회에 사랑이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 사고가 없는 사람에게서 남을 사랑하고 사회를 밝히 비추는 일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긍정적 자아상을 갖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일 뿐 아니라 그의 이웃을 바꾸고 이 사회를 바꾸는 근간이 되는 일임을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김혜진] 유학생 배우자의 소고

F2 이야기


유학생 배우자의 소고


열시 쯤 연구실로 출근하는 유학생 남편에게 맞추어 아홉시 쯤 기상.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서 점심식사 준비. 열두시 쯤 칼같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는 남편과 점심식사. 주섬 주섬 설겆이와 청소를 마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스런 미국 토크쇼 두 개를 보고 나면 어느새 저녁식사 시간. 여섯시 삼십분에 수업을 들어가는 남편을 보낸 후에, 한국 TV의 드라마 몇 편을 보면서 집안 일을 하고 있노라면 남편이 돌아온다. 그날의 수업 내용을 리뷰하는 남편 옆에서, 인터넷을 이용하여 한국의 소식을 접한다. 가끔 괜찮은 레서피도 다운 받고, 여러 개의 사이버 카페에 들러 수다를 떤다. 그리고 한 시 쯤 잠자리에 든다. 일주일에 두어 번 근처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무료 영어수업을 받는 걸 제외하곤, 매일 매일이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없다면, 대부분의 유학생 배우자들의 사는 모습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간혹 남편의 도시락을 쌀 때도 있고, 남편이 일찍 출근한다면 같이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드물게는 남편과 함께 학위를 밟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와이프들은 요리와 TV 시청, 인터넷과 함께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런 생활 이면에도 갈등과 문화적 충격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학생인 남편을 향한 배우자의 배려 속에서, 때로는 피곤한 남편의 외면 속에서, 이러한 갈등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날이 갈수록 증폭되기도 한다. 훈련과 사역의 장에 가정의 영역이 포함되는 것이라면, 유학생들과 같이하는 유학생 와이프들의 삶과 생각이 그 장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다음의 글에서, 유학생 와이프로서 가지고 있는 나의 갈등과 불만들, 문화적 충격 등을 나누고 싶다.


1. OO 씨 와이프, 내 이름은 어디로?


결혼과 동시에 나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학 졸업식도 전에 결혼한 나로서는, 이런 풍토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민) 교회에 가니 부인 성을 남편 성과 갈아 치우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는 사실. 다른 곳도 아닌 한국 교회에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살려고, 진학도 직장도 고려치 않고 유학생인 남편과 결혼한 내게, 내 남자의 와이프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억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누구 누구에게 얹혀 사는 누구’라는 인상을 주는, 씨 와이프, 이 호칭이 전혀 달갑지 않다. 배우자는 달랑 이름과 생년월일만 기재하게 되어 있는 KOSTA 신청서를 받고 나서, 내년에는 내 이름으로 신청한다고 남편을 달달 볶던 일이 생각난다. 내게도 관심 영역이 있고, 전공이 있고, 훈련받은 공동체가 있는데, KOSTA 역시 배우자는 유학생에게 얹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두고 두고 서운했다. 물론 배우자들을 배려해서 통곡의 방까지 운영하는 KOSTA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김혜진이라는 개인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 교회 공동체나 유학생 공동체에 나 역시 관심을 갖게 될 리가 없다. 남편 때문에 시카고로 오게 된 것, 남편이 다니는 교회에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다니게 된 것, 내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었던 것마저 억울한데 말이야.


2. 영어, Culture Shock의 시작


남편의 학교는 흑인 주거지역인 시카고 남부에 위치해 있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학교 도서관 안. 이 학교는 어떻게 된 건지 도서관에 사람이 없다. 갑자기 접근하는 흑인 아이 두 명.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이웃집 아줌마는, 이런 경우 무조건 내 빼라고 하였지만, 나, 영문학 전공자다. 내 비록 영어는 서툴지라도, 다가오는 도전(challenge)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곰곰히 뭐라고 하나 귀 기울여 듣는다. 돈을 달라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아이들 표정이 험상궂다.



헤이, 레이디, 나 너의 태도가 맘에 안들어!


이쯤 되면 도망갈 채비를 한다. 아무래도 “돈을 좀 주세요”가 아니라 “돈 내놔!”였었나보다. 사전과 책을 주섬 주섬 챙기는데, 진땀이 흘러 손이 더디다.



어쭈? 도망가려고?


끝까지 날 협박하는 지긋지긋한 아이들. 더 험한 꼴은 안 당하고 빠져 나왔지만, 옆에 다른 인도인 남자도 있었는데, 내게 접근한 이 흑인 아이들이 어처구니없다. 동양여자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소리도 못 지르고 도망갈 생각만 한 나도 참 담력이 없다.


그 후론 한 동안 영어가 싫었다! 텔레 마켓팅으로 걸려오는 전화도, 가끔 찾아가야 하는 하우징 오피스의 아줌마도, 무료 ESL 코스의 사무실 직원도, 길을 묻는 아랍인도, 마주하기 싫었다. 영어로 따라가는 수업이 고달프다는 남편들의 한숨은 오히려 사치다. 한국의 아줌마들은 요즘 강력하게 목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이곳의 유학생 와이프들은 그냥 숨 안 쉬고 산다. 날마다 무능해지며 작아지는 자신을 느낀다.


3. 예기치 않은 Culture Shock, 한국인 유학생 커뮤니티


72년생인 남편은 유학 4년차이다. 하지만, 불과 일년 전만 해도 과 한인 학생회에서는 막내였다. 아무리 막내라고 해도, 나에게는 하늘같은 남편인데, 이것 저것 시키는 과 선배들의 태도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반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불러내는 것은 물론, 꼭 하기 싫은 일들은 나이 어린 사람을 시킨다. 한국인 유학생들이야 늘상 겪는 일이기에, 구태여 내가 길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유학생 와이프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다는 것.


76년생인 내가 미국에 왔을 때, 만 23세였던 나는 명실상부한 막내였다. 막내라고 귀여움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그토록 무시를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이가 어린데 결혼부터 덜컥 했다고 생각없는 아이라고 무시함, 직장 경력이 없다고 무시함, 공부를 하고 싶다니까 어려울 거라고, 철이 없어서 그런다고 무시함, 요리를 못 한다고 무시함, 아이를 돌볼 줄 모른다고 무시함. 한국에서 그래도 전문직에 있던 사람들이 남편 때문에 이 곳에 오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 스트레스를 다 푸는 것은 아닌지. 여자 싱글 유학생 역시 와이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이다. 그럴 때는 자신들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큰 자랑이 된다.


며칠 지나니 모임의 맏이쯤 되는 한 언니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80년대에 유학 온 남편의 졸업이 예상보다 한참 늦어지게 된 것. 또 한 언니가 안 보였다. 남편이 박사과정 자격시험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진 것. 유학 때문에 고생하는 남편들도 그렇겠지만, 남편들 때문에 와이프들 역시 맘 졸이고 몸 상하며, 와이프들 사이에서의 눈길에 민감해진다. 지난 학기 남편이 석사 디펜스 했을때,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


얼마 전, 자주 들리는 유학준비 사이트에 유학생 와이프들을 위한 게시판이 생겼다. 고달픔을 토로하는 유학생 와이프들과, 정신과 상담이나 받으라는 싱글 여학생들과, 와이프들의 글에 불만이 가득한 남성 유학생들의 글로 연일 싸움판을 방불케 한다. 정녕, 해결책은 없는 걸까?


4. 네 이웃을 사랑하라구요?


남편이 다니는 학교는 유독 인도인들이 많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도 열 두 가구 중 여덟 가구가 인도인들이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이웃집에 세 명의 인도 처자들이 이사왔다. 인도인들이 가까이 살 경우, 그네들 집에서 나오는 솜털 먼지가 복도를 돌아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예사이고, 때때로 그 집의 바퀴벌레 등의 설치류들이 침입하기도 한다. 그래도 여자들이 이사를 왔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며칠 후, 건장한 인도인 남자 두 명이 큰 트렁크를 들고 그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어떤 키 작은 인도인이 학기 내내 열쇠가 없어 그 집 문을 두드려 누군가가 열어주길 기다리는 걸 보게 된다. 도대체 이 집에는 몇명의 남녀가 동거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워낙에 지저분하기로 소문난 인도인들이지만, 더욱 분개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불친절하다는 것. 미국인들에게 무시 당하는 것 역시 억울한데, 학교 편의점에서 일하는 인도인 직원은 거스름돈을 잘못 주고도 상대편 잘못이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 남편이 들어가는 수업의 TA 역시 인도인인데, 질문에 불친절하게 대답했다가 교수에게 보낸 남편의 이메일로 단번에 수그러들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 아니 영어를 못하는 자에게는 강한 척 하는 그들, 포용하기 힘들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도인들도 있다. 유학생 와이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인도인 여성이 한 명 있는데, 이 사람은 늘 자기는 다른 인도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문화에서 오는 다른 점들을 극복하고, 각각의 문화와 사람들로부터 장점들을 배워야 외국 생활의 잇점들을 진정으로 누렸다고 할 수 있을텐데, 이러한 이웃사촌들과 같은 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꺼려지니 어쩌면 좋을까. 수업에서 이들과 부대끼는 남편들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웃을 사랑하기란 뼈를 깎는 고통이다.


5. 무인도에서 표류하기


유학생 와이프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무인도에서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공동체의 소중함. 대학시절을 부대낀 공동체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15년을 동고동락한 지역교회의 동기들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다가올 줄 알지 못했다. 어학연수 때문에 일년 간 떨어져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외로움. 언제 돌아갈 지 모르고, 갈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고 있는 삶.


무인도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이전에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큐티시간은 얼마나 감미로우며, 혼자 드리는 찬양의 재미는 또 어떤가.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가끔은 공동체 안에서의 사역이나 내 신앙에 대해 깊이 점검할 수 있는 값진 시간들. 내게도 광야가 필요해! 하고 절절히 외쳤던 때도 있었으니. 그러나, 신앙생활은 역시 무리지어서 할 일인 것 같다. 대학시절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큐티를 나누고, 기도 모임을 갖고, 후배들 때문에 울어도 보고, 그 때처럼 열심히 성경 연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세워 주고 세움 받는 공동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격려받는 공동체, 정말로 필요한 것 같다. 오랜 광야 생활, 무인도 생활 속에서,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때로는 잘못된 생각과 상상력을 쌓아간다.


문제는 어떻게 공동체 생활을 시작할 것인가이다. 여러 군데 찾을 것 없이, 지금 속한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겠지만, 한인 교회에서도 내가 설 곳은 없다. 교회 청년회의 사역 대상은 분명 유학생이며, 유학생 와이프는 인원을 채우기 위한 덤일 뿐이다. 하긴,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유학생이 사역 대상인 것도 절대 아니다. 그저 궂은 일을 시키기 위한 일꾼들일 뿐. 어쨌거나 이름뿐이라도 유학생들을 위한 청년회가 존재하는 반면, 그것들도 싱글인 학생들을 위한 청년회이며, 더군다나 유학생 와이프들은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의 결과로 참여하기는 하지만 내 공동체로 삼기에는 이질감을 느끼는 그런 청년회이다.


내가 아는 것은 시카고에서의 상황뿐이다. 한국의 대학 선교단체에서 수년 간 간사를 하신 분(역시 유학생 와이프)도 소그룹 시작하기를 어려워하는 곳이 시카고라고 하니, 간혹 유학생 와이프들이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6. 남편은 화성인, 난 금성인


신혼부부에게는 누구나 깨어질 환상이 있다. 사랑만 있으면 서로의 어떤 부족한 점도 감싸안을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은 금방 지나간다. 2년 여를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으며, 대학에서의 성 관련 수업과 각종 데이트와 결혼에 관련된 서적, 남성과 여성 심리, 가정생활에 관한 서적으로 무장을 하고 결혼했던 우리 부부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열린 도은미 사모님의 아버지 학교에 참여한 남편의 노력과, 여러 가지 좋은 책들을 함께 읽은 결과로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유학생 사회를 보면, 유독 특별하게 결혼한 부부들이 많다. 많은 유학생들이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 있다 보니, 선이나 소개팅을 통해서 한 두달 사이에 급속으로 결혼을 진행시킨 경우가 잦다. 이런 경우에, 서로의 단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고, 이것이 고달픈 유학생활과 더불어 냉담한 부부관계로 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꼭 유학생 부부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유학생 부부에게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하는 이유는 남편은 시간이 없기 때문. 가령 아버지 학교가 모 교회에서 열린다고 하자. 금, 토, 일요일에 있는 이 학교에 꿈같은 주말을 할애할 유학생 남편들이 얼마나 될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부부가 같이 딱 한 번만 읽어봤으면 좋겠다 싶어 권하면, 와이프들은 그것에 호의적인 반면, 공부하는 남편들은 학업 외의 또다른 책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와이프나 남편들이 자신들의 문제에 무뎌지고, 포기할 때까지 그들의 서로에 대한 불만은 쌓여만 간다.


1999년 전공별 모임을 잊지 못한다. <여성학>이라는 이름 하에 모인, 유학생 남편으로 인해 상처받은 많은 와이프들. 아무런 이야기 하지 않아도, 자신의 하던 일도 버리고,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이들 기르며 고생하는, 때로는 한국에서 방문, 유학오는 다른 가족들까지 수발해야 하는 와이프들에게 불만이 없을 리 없다. 2000년 KOSTA에서는 참으로 좋은 부부관련 세미나들이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참여가 저조했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남편들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근거없는 내 생각일까?


주변을 보건대, 많은 유학생 와이프들이 ‘이러한 고민들은 시간이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랜 유학생 와이프 생활 끝에 고민과 긴장에 대해 무뎌지고, 익숙해지며 포기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유학생 와이프들의 문제 해결은 자신의 노력 뿐만 아니라, 유학생 남편들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유학 사회 안에 제대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유학생 와이프들의 정체성 회복, 가정 안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 인식, 그들의 잠재력을 하나님께 헌신된 사역으로의 인도하기 위한 대안이 기독 유학인 사회 안에서 고민되어져야 한다.


유학생 배우자로 2년을 채 살지 않은 나의 경험들이, 모든 유학생 배우자들의 경험을 대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 다른 선후배 유학생 배우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tmKOSTA의 F2/배우자를 위한 웹 보드를 활용하여, 안으로 숨겨져 있던 문제들을 고민하고 나누면서 해결점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시 기대하는 것은, 이런 열려 있는 공간을 통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선배 배우자들의 모범을 접할 수 있으리라 하는 것이다.

김동호 목사와의 대담

eKOSTA 인터뷰


김동호 목사와의 대담


eKOSTA 김동호 목사님, 거의 매년 이렇게 코스타에 참석하시는데, 코스타 첫 참석의 계기와 당시의 느낌을 말씀해 주십시오.


김동호 제가 89년도에 한국에서 학원 복음화 협회를 만드는데 참여했었어요. 홍정길 목사님과 함께 참여했었는데, 89년말 첫 집회에서 그 당시 워싱턴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식사하면서 코스타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까지는 저는 구제같은 것에만 목회의 관심이 많았었는데 그때 당시 드는 생각이 구제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사람을 키워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목회를 할 때에 구제하는 만큼 사람 키우는 예산을 세우게 되었지요. 그래서 89년도에 코스타에 대해 처음으로 듣고 92년도부터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92년도 워싱턴하고 LA에서 할 때인데, 와서 보고 이것은 평생을 바쳐서 할 만한 사역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첫번에서부터 올해로 꼭 10년인데, 한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제가 목회하는 목사로서 참 시간내기 어려운데,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일년에 한 달은 코스타를 위해서 쓰겠다고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일년에 한달 정도는 코스타를 섬기고 있죠.


eKOSTA 목사님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옳다고 느끼기만 하시면 곧바로 순종하시고 그 간증들은 정말로 늘 들어도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두번째 드리고 싶은 질문은 코스타에서 늘 만남의 축복을 얘기하는데, 목사님도 다른 강사님들이나, 혹은 학생들과의 만남 중에서 특별한 기억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요.


김동호 아무래도 이동원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만난 것을 저는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10년을 같이 다녀보지만, 그분들이 어떻게 보면 이 코스타 창립자이시잖아요. 그런데 그분들 자신이 그 의식이 없어요. ‘내가 이런 것을 만들었는데’ 하는 오너쉽(Ownership)이 없어요. 그러니까 참 좋지요. 이동원 목사님 가만히 보니까 그 분 설교도 안 하시더라구요. 그냥 뒤에서만 다니시는 것을 보고 참 훌륭하시구나 하고 생각하지요. 홍목사님도 이제는 여기 오시지도 않는데, 남이 얘기하기는 쉽지만 그렇게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구요. 그런 만남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기 좋은 강사들이 많잖아요. 내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고 그래서 참 좋습니다. 학생들은 아무래도 개인적으로는 관계가 유지되지는 않고, 가끔 한국에 가면, 제가 코스타에 참석했었습니다 하는 사람이 많고, 이번 캐나다 코스타에 갔었는데, 어떤 학생 부부가 ‘저희가 8년 전에 코스타에서 목사님 설교 듣고 예수님 영접해서 이렇게 예수 믿습니다’ 하더라구요.


eKOSTA 그럴 때 가장 기쁘시지요? 이제 코스타를 10년 동안 참석하셨는데요, 코스타에도 변화와 흐름이 있어 왔고, 이제 홍정길 목사님과 이동원 목사님도 오시지 않고 하는데, 앞으로 코스타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지, 그리고 어떤 리더쉽이 요구되어지는지 김동호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동호 코스타는 어디를 가던지 코스타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참 감사한 것이지요. 코스타의 기본 정신과 밑바탕이 있어서 두 목사님이 손을 떼시는데도 크게 흔들림이 없잖아요? 교회 같으면 담임목사가 빠지면 흔들리는데, 코스타는 그렇지 않아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제가 이제 인간이기 때문에 우려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전에는 코스타가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볼 때 말이지요. 그럴 때는 강사들이 많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코스타 강사로 오는 일이 이제는 자기 경력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해졌어요. 이것은 위험한 때에요. 코스타에 한번 강사로 가는 것이 어떤 이력서에 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순수해지지 않을 수도 있단 얘깁니다. 그렇다고 코스타를 없앨 수도 줄일 수도 없고, 코스타는 계속 성장하면서도 어떻게 초기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가 큰 숙제인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러나 조심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제 개인적으로는 작년 코스타와 올해 코스타가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는데요. 좀 더 학생들이 많이 강단에 서기도 하며 좀더 순수해졌다고 해야하나요? 어쨌든 방향을 조금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간사들과 강사들이 많이 수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코스타가 16회가 되었습니다. 코스타에서는 목사님 말씀처럼 기독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고지를 점령하라는 고지론도 있었는데요, 코스타가 지금까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목사님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은 얼마나 되고, 아쉽거나 아직 부족한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요.


김동호 지금 우리가 아직 추적해 보지는 않았지만, 혹시 홍목사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코스타 출신들이 정부 계통이나 학교 계통에 꽤 많이 퍼져 있어서 영향력을 꽤 끼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변 과기대, 참 귀한 사역이잖아요. 교수들 중 많은 분들이 코스타 출신입니다. 또 한국의 한동대학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워진 학교인데, 학교가 좋다는 것은 학생이 좋고 교수가 좋다는 뜻인데, 한동대 자랑은 교수가 좋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코스타 출신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한동대에서 한 일년 정도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코스타 출신 교수들이 한 10명 정도 학생들과 함께 제 강의를 들었어요. 그런 학교가 어디에 있어요.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 학교가 말이예요. 그런 영향력들은 신선한 충격이고, 이제는 한국에 코스타 본부가 생겼고 그래서 코스타 출신들을 네트워킹(networking)을 좀 할려고 그래요. 그렇게 되면 점점 구체화 되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있었지요. 세력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일년에 한 번 정도 모여서 옛날 코스타를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다시 헌신하고 다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KOSTA 최근에 일년에 한 번 하는 일회적이거나 단회적 부흥회적 성격을 극복하고자 작년부터 티엠코스타나 이코스타를 시작해서 하고 있는데, 그 방향성과 자리 매김을 좀 해 주시고 전반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부족한 점이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김동호 글쎄, 하나님이 주신 참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힘을 규합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만을 위한 풀타임(Full time) 전임 사역자가 나와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일을 하면 인간적이 되어, 하나의 세력이 되고 또 어떤 특별한 권력이 생기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코스타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지요. 규합하기만 하면 힘이 엄청나요. 우리가 세속화되거나 타락하는 것을 막기만 하면 말이지요. 그렇다고 힘을 규합 안 할 수도 없고 말이지요. 조심하면서 해야지요.


eKOSTA 이제는 코스타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것은 여기서 마치고, 목사님 사역과 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몇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한국에서 교회 개혁하면 이제는 김동호 목사님을 연상하게 됩니다. <생사를 건 교회 개혁> 책을 보면서 참 좋은 교회인 동안 교회에서도 ‘생사를 건’이란 말을 써 가면서 교회 개혁을 했어야만 했구나 하고 생각하며 좀 충격적이었었는데요, 현재의 교회 세습이나 교회의 타락을 보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한국 교회, 교회 개혁에 있어서의 문제점과 극복할 수 있는 방법과 더불어 전망을 좀 말씀해 주시지요.


김동호 똑같은 얘기인데, 힘이 생길 때 문제가 되기 쉬운데, 한국 교회는 지금 너무 부해지고 강해졌다는데 있습니다. 옛날에 가난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교회 안에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이 엄청나게 되고 돈이 많아지고 그러니까 이제 세습 문제까지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개혁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나 개인에게서 권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기득권 층이랑 마찰이 생기게 되는데, 나는 그런 경우 싸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싸우지 않고는 절대 공짜로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싸움을 회피했기 때문에 40년 걸렸거든요?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싸움을 요구하시지, 싸움이 없는 거짓된 평화를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너희들에게 화평을 주러 왔는 줄 아느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죠. 정말 참 평안을 얻으려면 검이 있어야 되요. 그래서 나는 편안한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죠.


사람이 사는 곳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득권이 있기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생사를 건’ 바로 그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괜히 겁을 주는 거예요.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건데요. 조금 용기를 갖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고, 그런 것이 교회 안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뭐든지 은혜 은혜 하면서 거짓된 화평을 은혜라고 하는데, 그것은 거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 보니까 절망스러운 것도 많지만 희망이 많아요. 장로님들에게 몇 년 동안 수 천명, 많게는 만 명 가까이 제가 강의를 했거든요. 근데 장로님들이 받아줘요.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지만 실제로 그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교회 개혁도 한국 교회가 잘 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제일 희망을 갖는 것은 청년들이에요. 청년들이 한국처럼 모이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어요. 이 코스타 모이는 것을 봐도 그렇구요. 몇일 전에 우리 한국 복음화 협회하고 부흥 컨써트팀 하고 함께 주최한 경희대학교의 집회에서 3만명이 모였어요. 그날 청년들을 보고 흥분되더라구요. 망할 나라가 아니구나. 정치, 경제, 교회 등을 보면 참 답답하고 곧 망할 나라 같지만, 이렇게 청년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망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국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희망을 가져요.


eKOSTA 덧붙여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목사님께서 코스타에서 말씀하신 ‘고지론’에 관련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고지론이 몇 년 동안 코스타를 대표하는 표어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최근에 많은 사람이 엘리트 주의가 아닌가 하며, 또한 저지론과 미답지론도 나오며 비판되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고지론은 무엇이며, 또 한국 기독 지성인 혹은 엘리트들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한계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죠.


김동호 오래 주제가 ‘낮아지신 그리스도, 섬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제 설교가 고지를 점령하라는 그 설교에요. 그런데, 왜 내가 그걸 주장하냐 하면 – 이제는 고지론이라는 말이 생기기까지 했는데, 섬기기 위해서는 높아져야 한다는 거에요. 낮은 자는 낮은 자를 섬길 수 없어요. 예수님이 낮아지셨다고 하는데, 낮아지신 것과 낮은 예수는 다른 거예요. 실력이 없으면 낮은 예수 그리스도이고요, ‘낮아지신’이라는 말은 무얼 포함하고 있느냐 하면,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신 거예요. 그렇다면 땅으로 낮아지신 근거는 하늘에 있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사람만이 내려올 수 있어요. 땅에 있는 사람은 내려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이지요. 종이지요. 낮아지기 위해서 실력은 높아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트 주의가 아니에요. 엘리트 주의는 높은데서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엘리트가 되어서 내려올 때 힘이 생기지 않느냐? 그렇다면 섬김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전제가 높아짐이예요. 실력을 갖추어야 됩니다.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신 것이 자세지 실력이 아니지 않아요? 근데 사람들이 실력을 얻으려면 고생과 희생이 있어요. 그렇게 힘들면 나태해져서 낮아져요. 그걸 겸손이라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은 낮아지기 위해서 높아져야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고지론은 내려오기 위한 거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변화산으로 데려가셨어요.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했어요. 그것은 하늘에 올라간 거에요. 얼마나 좋았던지 세상의 왕궁보다 거기에 천막 치고 사는 것이 좋겠다 한 것이 그게 하늘에 올라간 거에요. 그런데 그게 필요해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내려가자고 했어요. 내려 갈거면 무엇하러 올라가냐고 할 수 있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과 밑에서 낮아진 것과는 다른 거에요. 그래서 기독교인은 변화산에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늘을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이제 고지론이에요. 근데 고지론은 수단이고 목적은 낮아짐이에요. 섬김을 위한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엘리트 주의가 되는 것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돼요. 말인즉슨 낮아지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올라갔을 때 안 내려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으니까 나는 그런 비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내가 얘기하는데서 비판받을 것은 없어요. 그러나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eKOSTA 유학생들이 학위를 가지고 한국으로 가니까 지위가 있고 그렇게 되면 기득권 세력으로 들어가는데, 실력은 높지만 태도는 낮아져서 섬겨야 되는데, 태도까지 높아지고 자세까지 높아지고 그러니까 경계해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김동호 고지론이 엘리트 주의는 아닌데, 고지론의 약점이 엘리트 주의로 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경계해야 되지요.


eKOSTA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이 동안교회 사임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까 그 이유와 과정을 좀 설명해 주시고, 더불어 어려웠던 점을 좀 말씀해 주세요.


김동호 첫째는 교회가 너무 커지기 시작했어요. 우리 교회 건물지은 지가 얼마 안 되고 꽤 큰 건물을 지었는데, 이제 그것이 부족해서 건물을 확장해야 되고 또 땅을 사야 될 처지가 되었어요. 그럴 바에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어요. 출석 교인이 5천명 넘어가면 분립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몇 년 걸릴 줄 알았더니 올해 그것이 되게 생겼어요. 그래서 그것이 첫째 원인이고, 그 다음에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분담된 역할에 의해 건강하게 성장하면, 난 만 명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서 커지는 것이 많다면, 물론 꼭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주된 원인이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 의해서라면 그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예요. 동안교회가 그런 면에서 건강치 않은 성장이 시작되었다고 판단이 되어졌어요. 여러 가지 동안교회 약점이 있는데, 밖에는 좋은 점만 나타나기 시작했고, 현재는 출석 교인들이 천명씩 느는 일이 이년째 계속되고 있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가속이 붙게 되고 그렇다면 만 명 되는 것이 금방이지요. 그렇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보니까 교역자들도 나태해지기 시작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장로님들도 긴장 안하고, 교인들도 가만히 있고 기도 안 해도, 노력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좀전에도 말한 것처럼 동안교회는 생사를 걸었다고 했는데, 정말로 10년을 하루 같이 싸웠어요. 갈등하면서 말이지요. 나는 그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그 싸움이 어느 정도 끝났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내가 승자에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승자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갖춘 것이지요. 근데 내 나이가 자리에 앉아서 영감 노릇 할 나이는 아니다. 그래서 한번 더 일을 해야 되지 않나 하는 것이 떠나는 이유에요.


그리고 아까 청년들 3만명 모였다고 했을 때 무엇을 생각했냐 하면 지금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아요. 무슨 생각을 하냐 하면 교회 할 사람은 많지 않나? 그런데 청년들을 보니까, 그때 부흥 콘서트 팀을 보니까, 나는 처음 알았는데, 한국 찬양 사역 중 최고인 것 같아요. 영적으로나 실력으로나, 그런데 그분 들이 다 마누라 덕에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생활이 되지 않잖아요. 완전히 목사나 똑같이 사역자인데, 저 사람들 생활을 하게 해 주어서 그것만 헌신하게 하면서 crusade를 조직하면, 설교하는 사람과 팀을 짜서 믿는 아이들 모아서 부흥 집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청소년들을 모을 수 있는 전도 집회를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그거에요. 내가 나가서 목회를 하면 나는 담임 목사는 더 이상 안 할 거예요. 목회는 설교하는 것만 빼고는 당회장이나 담임 목사를 세우고 이제 헌법으로 하면 나는 부목사 하는 수 밖에 없겠지요. 부목사가 되어도 좋으니까 나는 설교하고 주로 선교 사역하고, 그 생각을 실현해 보고 싶어서 그만 둔 거예요.


eKOSTA 목사님 창립 주일 사임 표명 하신 설교도 읽고, 뉴스앤죠이에서도 목사님의 글을 읽었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비유를 들어서 늘 갈등을 건전하게 보시던데요. 한국교회에서는 특별히 저희 같은 평신도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건전한 것임에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기에 토론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교회 세습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성도들이 세습을 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로서 건전한 건의와 비판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목사님처럼 늘 포용하셔서 건전하고 좋다고 하시는 분들이 참 적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동호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맞다고 생각해요. 내가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 말이에요. 그 검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 진짜 화평이거든요. 지금 한국 교회에 있는 화평은 거짓된 화평이에요. 거짓된 은혜, 그러니까 한국교회에서 은혜롭게 하자는 것은 적당히 하자는 거에요. 대충 대충 하자는 거에요. 그리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우민화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집권층들, 권력자들, 목사와 장로가 권력자들이지요. 자기들의 자리나 일을 편안하게 하려는 우민화이거든요. 그것이 교회처럼 많은 데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부패해요. 청년들이 웃기기 위해 하는 이야기지만, 김일성과 재벌총수와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똑 닮았다고 하는 것이 그냥 우스운 소리가 아니예요. 사실이거든요.


또 사람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쳐요. 오른손 잡이가 있으면 왼손 잡이가 있어요. 오른손은 오른손이지 바른손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바른손이라고 하거든요. 그럼 왼손은 틀린 손인가요? 그건 아니거든요. 왼손은 왼손이고 그것을 인정해 줘야 돼요. 그래야 건전하게 나아갈 수 있어요. 얼마 전에 외국인 노동자가 신문에 건의했는데, 살색이라는 것을 가지고 건의했어요. 우리는 이것(얼굴을 가르키며)을 살색이라고 하는데, 그럼 자기는 뭐냐는 거에요. 자기 주관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살색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야 건전하고…. 제가 이제 철학책, 역사책을 공부하면서 한 가지 배웠어요. 역사는 좌로 치고, 우로 치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나는 한쪽만 보기 때문에 늘 널뛰기를 하는구나.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말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에요. 균형 감각,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얘기해 주면 내가 균형을 잡게 되잖아요. 내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말, 균형 감각. 그렇게 하려면 비판을 받고 수용을 해야 균형을 잡지요.


eKOSTA 목사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복잡한 것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특별히 복음을 단순하게 공식화 시켜서 잘 설명하시는데, 그 비결이라도 있으신가요?


김동호 저 같은 경우 교육 전도사가 되었을 때,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설교를 했어야 되었어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말이죠. 설교를 해서 아이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되겠는데, 그게 거의 불가능해 보이더라구요. 기도 많이 했어요. 1학년 아이들도 은혜받게 해 달라구요. 밤낮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면 저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한번도 놓치지 않고 했던 씨름이었어요. 그러니까 애 쓰니까 되더라구요. 그런 전달 방법이 하도 애를 쓰니까 꿈에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메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자기도 했어요. 꿈에 생각나면 쓰려구요. 그렇게 꿈에서 생각난 것을 써서 설교를 하니까 1학년 아이들이 알아듣고 은혜를 받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쉽지요. 나는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얼마나 더 잘 알아 들어요? 초등학교 아이들도 잘 알아 들으니까 말이지요. 난 정말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안 되면, 울고 소리 지르고 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몇 년 그러니까 되더라구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헨리 포드가 그랬다 그러더라구요. 그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되니까, 손전등을 놓고 잤다고 하지만, 나는 손전등 필요 없이 글이니까 몇 자 적을 수 있는 연필과 메모지만 필요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신비롭거나 영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 집착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eKOSTA 그 외에 존경하는 분이나 목사님께서 영향력을 많이 받은 분을 좀 소개해 주시죠.


김동호 제가 자라나던 교회의 목사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받았지요. 여러분 계시지만 주선애 교수님 같은 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eKOSTA 그리고 목사님께서 영향력을 많이 받은 책은 어떤 책들이 있는지요?


김동호 저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도 다독하려고 하지 않고 정독하려고 하고 있지요. 제가 역사책, 철학책 많이 읽었어요. 저는 기독교 교육을 공부했지만,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들면 기독교 교육을 공부한다면 기독교 교육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역사를 잘 알아야 됩니다. 철학을 하면 철학사를 잘 알아야 되지요. 신학을 할려면 교리사같이 말이죠. 그런 식의 책들을 잘 알아야지요. 모든 것을 공부할 때에 역사를 공부하여 이것이 어디로 흘러가나, 어째서 그렇게 흘러가나 하는 흐름의 방향을 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덕경 열심히 읽었어요. 논어같은 것도 읽었지만 나는 도덕경을 참 좋아했어요.


eKOSTA 참 의외입니다. 목사님이 도덕경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이요.


김동호 그것이 서양 철학보다 깊어요. 동양 사상이 치우침이 없는 것이지요. 즉 중용을 강조하죠. 나한테는 더 맞고 좋아해요. 도덕경은 참 절묘해요. 균형 감각에 참 좋아요.


eKOSTA 끝으로 이코스타 독자가 주로 유학생인데,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조언을 좀 해 주시죠.


김동호 제가 사탄에게 두 번 속으면 망한다고 늘 하는데, 사탄은 공부할 때 일하라고 하고 일할 때 공부하라고 해요. 두 번 속으면 인생 망해요. 그래서 공부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거든요. 나는 청년 때 한번 속았어요. 공부할 때 일하라는 속임에 속았어요. 그래서 나는 일은 참 잘하고 빨리 했어요. 공부할 때 일을 했기 때문에 막상 일할 때 힘들어지는 거에요.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봉사도 참 중요하지만 봉사로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어요. 전공으로 이루는 거예요. 나는 월급 받고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그래서 교회 봉사, 교회 봉사 하는데 봉사는 그냥 봉사에요. 봉사로 헌신하는게 아니에요. 전공으로 헌신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라고 권합니다. 내가 한동대 가서 가르칠 때 너희들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다 했어요. 농담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위해 공부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공부할 때 딴 핑계 대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나님이 마음껏 쓰시게 공부 열심히 하세요.


eKOSTA 저 개인적으로는 봉사를 안 하거나 교제나 예배를 하지 않으면 답답함을 많이 느끼거든요.


김동호 물론 그렇지요. 봉사를 전혀 안 하면 죽죠. 그렇지만 청년 때는 봉사가 지나쳐요. 보람이 있고 그래서 그러는데, 봉사하는데 절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걸 무시하면 안 돼요. 봉사 안 하면 사람이 죽지요. 그러나 우선 순위가 늘 공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봉사가 지나쳐서 봉사하고 남은 시간에 공부하거든요. 그러면 공부가 안 되잖아요. 유학 생활이라는 것이 만만한게 아닌데.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은 월급 받고 봉사하고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못 받고 봉사하니 우리가 더 순수한 것 아닙니까?” 하더라구요. 그래서 “장로님은 아마추어이고 나는 프로에요” 라고 맞받아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봉사할 때, 진정한 봉사는 전공으로 봉사하는 거에요. 월급 받으면서 말이지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프로라는 말이에요. 나는 목회에서 프로거든요. 목회는 누구한테 양보하거나 해서는 안 되고 내가 제일 잘 해야 돼요. 의사는 수술을 잘 해야 돼요. 그런데 의사가 수술을 잘 못 하고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하면 그것은 조연을 잘 하는 거에요. 주연 노릇을 잘 해야지요. 청년때 그것을 잘 깨달아야 되요. 청년 때는 봉사가 지나칠 때가 많아요. 또 교회가 그것을 요구하구요. 나는 그래서 청년들한테 무리하게 요구 안 해요.


eKOSTA 예, 이코스타 독자들이 학문과 신앙 사이에서 그리고 진로 문제 등에서 고민이 많은데 그런점에서도 도움이 많이 되었을 줄 압니다. 바쁘신 중에서도 이렇게 장시간을 내어 인터뷰 해 주신 것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