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캠퍼스 사역 Q&A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왕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탈취한 재물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성경 안에서의 십일조의 역사는 시작됩니다(창14:18-24). 야곱도 역시 벧엘에서 돌단을 쌓으면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언약하는 장면을 창세기에서 볼수 있습니다(창28: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대 문명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이런 믿음의 조상들의 행동을 통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유래나 특히 제사와의 관계에 관한 측면에 대하여는 정경 외의 전문 지식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십일조에 관한 내용 가운데 핵심적인 부문 몇 가지만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야 비로소 십일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십일조를 바치고, 그 바친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기쁨으로 먹으라고 하십니다 – 희생 제사 식사(신14:22-27). 동시에 함께 유하는 레위인들, 곧 기업을 따로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하는데, 이런 행위는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매 3년마다 각 성에 십일조를 쌓아 두어 레위인이나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자기 몫을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충만히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신14:28-29). 그러면서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머지 11개 지파가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민18:20-29) . 그것은 그들의 노동, 곧 하나님의 제사를 수행하는 일에 대한 대가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매 3년마다 바쳐야 하는 십일조에 대하여만 언급하고 있습니다(신26:12-15). 그런 후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함과 동시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히스기아왕 때에 잠시나마 다시 부활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총 유동적 재산의 십일조를 드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대하31:2-8).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관하여는 두 가지 불확실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를 매년 드리는 것인지, 매 3년마다 드리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히스기아왕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느혜미야는 십일조를 매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봅니다(느10:35-39). 반면 아모스는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암4:4). 둘째는 십일조의 용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십일조는 확실하게 하나님께 바친 이후 레위인, 과부, 고아 및 체류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를 바친 사람까지도 자신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그룹들 간의 분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 왕을 세울 경우 십일조가 왕에게 바쳐지게 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삼상 8:15-2). 오늘날과 비교하면 이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세금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레위인들에게 주게 되어 있던 십일조의 일부도 그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 즉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대가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개념입니다(고전 9:3-5). 십일조는 또한 생활의 부족함이 있는 자들을 위함임도 분명합니다. 단, 이때의 부족함이란 자신의 게으름이나 잘못으로 인한 부족함이 아닌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으로 오면서 십일조의 참된 개념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지는데, 이는 곧 청지기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타락한 유대교의 십일조에 대한 관행을 모델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지도층은,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관계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해석하고 집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의 중요성 그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한 이해와 그 실천을 강조하시며 십일조를 그런 테두리 안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23:23-24). 이는 말라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말3:8-12). 십일조는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그 물질의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지는 물질을 잘 관리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바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많든 적든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만 쓰고 나머지는 주인의 것으로 계속 간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를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제외한 후 다 자신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마치 타락한 유대교의 관례와 같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과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의미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은 또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의미하기보다는 수익의 십분의 일 “이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십일조가 매년 혹은 매 3년마다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복음이 전파되어 제자들이 양육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하여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이 인정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십일조를 사용한다는 뜻은 구약에서 수 차례 언급된 것처럼 자신의 능력의 부족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 사람들(예를 들어 고아와 과부들)과 또 세상적으로 금전적 보수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목회자, 선교사, 선교단체의 간사 등)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뜻 입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십일조를 교회에 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결국 십일조를 사용할 가능성이 항상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십일조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바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선교사를 지원한다든지, 캠퍼스 간사나 주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선교 사업에 사용하는 것도 다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도 기본적인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기본적 유지도 힘든 경우라면 우선적으로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기본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그 지역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관계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책임한 신앙관입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의 지체 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가 각 “마디 마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김중안]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장점

유학생 사역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장점


* 지난 호에서는 Big Ten지역의 유학생 사역의 전반적 현황에 대해 평가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이 지역에서의 유학생 사역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기술하고 다음 호에서는 단점과 어려움들을 나누고자 한다.


1. 복음 전도적 장점

Big Ten 지역의 유학생 사역에 있어서 제일 큰 장점은 복음 전도적인 측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 공동체가 불신자들과 접촉할 기회들이 많고 불신자들이 한국에서보다 복음과 교회에 대하여 마음을 더 열고(open) 있다. 많은 수의 학생들과 배우자들이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실제적인 면에서의 필요(need)가 있고 대학촌에서의 지역 교회가 한국 커뮤니티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신입생들은 정착할 때 대부분 지역 교회들을 통해 도움을 받게 된다. 불신자들이 대학촌에 왔을 때 자연스럽게 교회와 관련을 맺게 되고 출석하게 되는 것이다. LA, Chicago, New York 같은 대도시에서는 학생들이 학업 외에 놀 거리가 많고 문화적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아 한국에서 교회에 나가던 학생들도 부모들의 간섭을 피해 교회를 멀리 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하나 중서부 지역의 대학촌 도시들은 학교 외에 학생들이 갈 만한 곳이 없다. 교회가 유학생들의 영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의 중심지인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신자들이 불신자 친구들을 쉽게 교회로 인도한다. 많은 불신자 학생들이 별 거부감 없이 미국 유학 초기에 교회의 문을 드나들고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일주일 시간표 들어 있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또한 교회는 출석하지 않지만 유학생 성경 공부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학생들도 다수 있다. 유학 시절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찾고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seeker)들인 것이다. 기존의 제도화된 교회에 대해서는 약간의 반감은 있지만 성경을 공부하기를 원하고 삶의 향기를 풍기는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고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위해서 미국인들이 인도하는 성경 공부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복음을 듣고 변화되는 학생들도 있다. 한국에 있었다면 교회에 출석하고 복음을 들을 확률이 희박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복음에 노다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촌 교회들에 출석하는 학생들의 25-30% 정도가 불신자들이다. 이들은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을 하거나 한국에서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때 혹은 군대에서 의무 종교 행사의 일환으로 교회에 잠깐 출석했던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유학 시절이 복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진리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유학 시절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역사들이 지역교회와 유학생 성경 공부 모임과 코스타와 같은 유학생 수련회 등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모임에서는 지난 1년의 사역을 통해 7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지금도 seeker들이 소그룹과 전도,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를 통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다.

2. 사역의 집중성

Big Ten 지역의 교회들은 대부분 지역적으로 자그마한 대학촌에 위치에 있다. 미네아폴리스와 (U of Minnesota) 콜롬부스 (Ohio State University)를 제외하고는 소도시의 큰 주립대학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들이 있으며 유학생들이 평균 출석 인원의 80% 이상이 된다. 학생들이 기숙사나 기혼자 아파트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고 이동 거리가 짧기에 소그룹 모임이나, 캠퍼스 모임, 구역 모임 등을 하기에 아주 용이하다. 우리 모임에 있는 6개의 소그룹 성경공부의 평균 이동시간은 10분 이내이다. 소그룹 모임에 기동성과 융통성이 있다. 학교에서 같은 건물에서 매일 보는 사람들과 일 주일에 한 번 점심 시간을 활용하여 단과대 모임(기도/QT 나눔/생활 나눔)을 하는데도 시간적 압박을 받지 않는다. 이동 거리가 짧고 활동 공간이 캠퍼스를 중심으로 좁기 때문에 점심 시간과 공강 시간을 이용한 일대일(one-on-one) 만남이나 기도 모임을 하기에 용이하다.

또한 문화적으로 대학촌 문화의 동질성을 갖고 있다. 구성원들을 싱글과 기혼자로 단순하며 직업은 학생과 학생 배우자 그리고 학교와 관련된 교수, 교환 교수, 박사후 과정(post doc)을 하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의 연령의 차이도 크지 않고 생활 패턴도 학교의 학사 일정(academic calendar)에 따라 움직이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계층과 나이 문화적 배경을 가진 전통적인 한국교회 사역에 비해 동질한 문화적 집단에 집중화할 수 있다. 목사님의 설교 내용도 학생층에 집중할 수 있고 훈련 프로그램이나 다른 모임들도 학기의 흐름에 따라 일상(routine)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가을학기 시작 때엔 새로운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고 봄 학기가 끝날 때에는 졸업하고 떠나는 학생들이 생긴다.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때에는 학생들의 한국방문과, 학회, 인턴십, 여행 등으로 인해 주일 예배 참석 인원이 반으로 줄기도 한다. 이러한 패턴에 적응하고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대학촌 교회들이 갖고 있는 장점이다. 학기 중에는 소그룹 모임과 구역 모임 등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봄방학(Spring Break)과 추수감사절 휴가(Thanksgiving Break)에는 말씀 사경회나 2박 3일 정도의 수양회(retreat)를 가질 수 있고 긴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훈련 프로그램과 수련회 등을 담아 낼 수 있다. 교회 전체 사역을 볼 때도 크게 학생 사역(싱글/기혼자)과 주일학교 사역으로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한국교회에 비해 비본질적인 요소, 즉 예배당 건축, 당회 내 목사와 장로들의 갈등, 총동원 주일 등과 같은 의미 없는 행사(event)성 모임, 계층화된 직분들, 남선교회와 같은 유명무실한 조직과 구조, 수 많은 회의와 복잡한 의사 결정 구조, 헌신 예배나 수요 예배 등과 같은 형식적이고 전통적인 예배들, 교인들을 교회 안으로 붙잡아 놓기 위한 프로그램 등으로 인한 시간과 에너지 자원들을 줄여 학생들을 전도하고 양육하고 교제하고 예배하며 파송하는데 사역을 집중할 수 있다.

3. 사역의 효율성과 영향력

유학생들은 장년 계층에 비해 빨리 변하고 성장한다. 평균 4년 정도의 유학 기간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말씀으로 양육 받아 영향력 있는 리더로 세워지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공부하는 학생들이기에 말씀에 대한 이해와 학습 능력이 빠르고 양육과 훈련도 아주 용이하다. 이들 가운데는 가르침(teaching)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에 한국 교회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말씀을 잘 가르치고 양육하는 소그룹 리더와 성경 교사들이 많이 배출되어질 수 있다. 실제로 유학생 교회에서 학생들이 강의나 설교를 할 기회들이 주어지기도 하는데 전임 사역자에 못지 않은 수준으로 가르치고 말씀을 증거한다. 우리 모임에서는 매 학기 2-3 차례 학생 리더들이 강의를 하거나 패널 토의를 인도할 기회가 주어진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주제에 관한 리서치 능력, 강의안의 구성과 전달 능력 그리고 삶과 인격을 통해 흘러 나오는 이들의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신선하고도 큰 도전을 주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장년들 주도로 이끄는 교회에서 청년부나 남/여 전도회 ‘꼬맹이’로 수동적으로 교회 사역에 참여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자신들이 직접 교회의 주인으로서 또한 영혼들을 책임 맡은 영적 지도자로서 행정과 조직과 양육과 가르침과 섬김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할 기회들을 갖게 된다. 대학촌 교회들의 학생들은 한국 교회나 이민자 중심의 교회보다도 더 교회의 많은 부분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들을 갖게 되고 목회자와 동역자로서 긴밀하게 협력 사역을 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단지 봉사라는 미명에 교회를 유지하는데 소모품이 아닌 진정한 리더십의 훈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학생들은 학위 과정을 마친 후 한국이나 미국이나 제 3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일하게 된다. 이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시키고 섬기는 지도자로 훈련시켜 파송할 때 이들이 교회와 세상에 미칠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대부분의 Big Ten 지역 유학생 교회들은 한국에 alumni 모임이 있다. 그 교회 출신의 지체들이 일 년에 한 번 모여서 친교도 하고 예배도 드리며 과거의 유학 시절에 만났던 하나님을 되새기고 소명과 비전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수로서 대기업 간부로서 정부 관료로서 연구원이나 전문인으로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교회에서의 평신도 리더십의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요즈음의 또 다른 추세는 졸업 후 미국에 정착하는 유학생들의 비율이 점차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 사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따라 살아가며 이민 1세대들이 사라진 다음 한인 교회를 이끌어 나갈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연변과기대를 비롯한 여러 선교지에서 전문인 선교사로 사역을 하고 있는 지체들도 있다. 이들이 유학생 사역의 열매인 것이다.



4. 소그룹 구조

모든 유학생 교회들이 소그룹 구조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소그룹의 내용과 소그룹 리더의 질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소그룹 구조를 확실하게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구조에 내용을 담아 내고 리더들을 훈련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그룹의 구조는 다양하다. 구역모임 형식, 나눔과 교제 중심의 목장(cell) 모임) 모임, 소그룹 성경공부(싱글/ 부부) 등. 이러한 소그룹 구조는 유학생 사역에 아주 적합한 구조이다. 소그룹은 기동성과 융통성과 배가성과 흡입력이 있다. 소그룹을 통해 예배와 양육과 교제와 전도가 일어난다. 이 구조에 제자 훈련이나 리더 훈련 등을 병행하면 금상첨화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소그룹 모임을 선호한다. 싱글들은 동질 집단끼리 많이 모이고 또 소그룹으로도 모이는 것을 선호하고 기혼자들은 자신의 삶과 어려움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재충전 받는 소그룹 모임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 모임은 주일예배 출석 인원들 보다 소그룹 참석 숫자가 더 많다.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이 교회의 전체 예배보다 먼저 흡입력이 있고 인격적인 소그룹 모임에 먼저 참여하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이 소그룹에서 이루어진다. 실제로 소그룹에서 불신자들이 복음에 대해 듣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소그룹에서 개인의 삶과 인격이 나누어진다. 개인의 어려움과 부부 사이의 갈등, 학업에서의 스트레스와 진로에 대한 고민들도 나누고 기도로 서로를 위해 중보한다. 말씀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서로 토의하며 깨달은 바를 나누면서 말씀의 풍성함을 맛보고 다른 사람들 속에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서로를 보살피고(care) 섬기며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소그룹 모임에서 제일 먼저 맛보게 된다. 따라서 기존이 소그룹 구조를 잘 활용하여 건강한 소그룹을 만들어 나가고 영향력 있는 리더들을 세워 나간다면 유학생 사역의 장점들을 십 분 더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진호] 아바의 지팡이

코스탄 현장 이야기


아바의 지팡이


한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지로 떠날 때까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은 첩첩이 싸인 고개를 넘는 산행이며, 한편으로는 가로 막힌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기적의 체험이기도 하다. 부르신 이가 친히 인도하신다는 믿음 없이는 견디기 힘든 고비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하기에, 어려운 산행을 위해 반드시 든든한 지팡이가 필요하듯이, 그 지팡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지팡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1)


영혼을 사랑하는 훈련을 통하여 새벽에 매달려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은 광활한 만주 벌판이었다. 날마다 중국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하셨고, 만주에 지어진다는 대학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도가 달아 올랐다. 그러나, 중국… 그곳은 여전히 나에게는 오르기가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태산처럼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주위 환경, 전혀 믿지 않는 가족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내가 중국으로 갈수 있을 만한 조건들이 없는 것만 같았다.


새벽 제단을 통하여 중국을 향한 부르심의 음성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내가 넘어야할 고개로 처음 떠오른 것은 아내였다. 그 무렵 아내는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로, 대학의 강사로 활약하며 한창 전문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추구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 시키고 무작정 중국으로 떠나자고 말을 꺼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에 반 농담 삼아 중국에서 한번 살아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속셈을 감추고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떠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무슨 낌새라도 맡았는지 펄쩍 뛰면서 아예 말도 꺼내지 못 하도록 가로 막는 그녀의 태도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말문이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1993년 2월 아내는 서울의 세종 문화회관에서 기대 이상의 성황리에 파이프 오르간 독주회를 마쳤다. 어쩌면 조만간 자신의 전공인 오르간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할 그녀를 위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은 배려이셨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아내는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전공인 오르간을 최고조로 만끽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아내의 심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최소한 오르간 독주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채 기도로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독주회가 끝나고 서울서 다시 포항으로 내려온 후 아내가 약간의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나는 기회를 타서 마침내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내었다. 비로소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내는 긴장하여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그 같은 반응을 바라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리 서로가 사랑하는 부부지간이라 할 지라도 이 일은 설득하거나 강요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움직이시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다가왔던 것이다. 더불어 만일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분이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


그 시절 곧바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소설 ‘아바’를 쓰도록 밀어 붙이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설득하는 일을 지속하지 않고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4월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K일보의 문학상 공모가 출근길 내 발에 밟혔다. 그러자 지난 날 학창 시절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던 글쓰기에 대한 내면의 욕구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면서 그날 저녁 컴퓨터를 마주하고 첫 문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 역시 글 쓰는 일이 중국행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도 모른 채 시작한 작업이었다. 내가 더 이상 중국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아내는 내가 중국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 나의 글쓰기 작업에 대해 희망을 품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글이 중반의 고비를 넘기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의 윤곽이 잡혀가자 나는 곧 이 일이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하신 계획 속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고된 하루의 일과 후에 시작되었던 한밤의 깊은 대화 속에서 주님은 어김 없이 나를 만나러 찾아 오셨고,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이 컴퓨터의 단말기 속을 헤매면서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 분의 자애로운 눈길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고야 마는 지난 날의 추한 단상들을 생각하며 매일 밤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직도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모르겠느냐?” 글쓰기를 시작한 후 하루에 평균 4시간의 수면을 취하면서도 내가 새벽마다 일어나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도 곧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 기도 시간에 모세 오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곧바로 나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 곧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아바’가 바로 모세가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께 받았던 그 지팡이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하고 반문하는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하고 말씀하심으로 나에게 말씀의 징표를 주시기 시작하셨다. 장남으로서 퇴직하신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 등 현실을 돌이켜 보며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싸인 채 “주여, 정말 이것이 당신의 뜻이 분명합니까?” 라고 재삼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는 장면 앞에서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라는 말씀을 통하여 내게 주신 지팡이가 무엇인지 우리 가족이 건너야 할 바다와 육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살펴보게 하셨다.


그 시절, 나의 질문 섞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나는 새벽마다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기쁨과 황홀감이 파도처럼 몰려와서 내 심령과 온 방안을 가득 채우는 체험을 하곤 하였다. 또한 그 당시보다 내가 깊고 넓은 중보기도를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직장 동료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새벽마다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눈물로 매달리는 중보 기도를 하였다.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결국은 그 기도의 열매들을 거두시고야 마는 하나님을 후일 경험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오히려 그 분에게 “당신의 뜻일진데…, 이러이러한 것을 해 주십시오” 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요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미리 받았던 확실한 기도 응답 중 두 가지가 부모님들의 구원과 약속의 자녀로서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둘째 아이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아내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쓰고 있는 소설 ‘아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책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내에게 보여 줄 분명한 징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성령님의 반응은 너무나도 즉각적이고 확실하여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기쁨과 확신으로서 그 요구를 들어 주시겠노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3)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한 가지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강형수라는 한 젊은이를 통하여 마치 나의 지난 날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갈등과 방황 속에서 아바 아버지를 발견하기 위한 긴 여로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려 가는 동안, 나는 가능한 한 신앙적 메시지의 무절제한 표출로 인하여 믿지 않는 독자들의 반발 심리를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작품의 문학성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흔히 신앙적 메시지를 앞세우다 보면 작품성이 떨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신앙 소설들을 읽어 오면서 평소에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형수가 천신만고의 고통 가운데 회심하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과연 구원의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여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지닌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의미를 생각할 때, 복음을 과감하게 선포하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K일보사의 기독교 신앙적 배경을 생각할 때 그와 같은 점이 크게 문제시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마침내 문학성을 약간 양보하더라도 복음의 메시지를 직접 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 같은 생각 가운데에는 K일보사의 문학상 공모라면 복음 선포가 하등 문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은 K 일보의 문학상 공모는 종교부가 아니라 문화부에서 주관한 행사로서 기독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출애굽기가 끝나고 소설이 완성되자 나는 당선을 확신하며 그 원고를 프린터로 뽑아서 K일보사로 보내었다. 6개월간 신들린(?) 듯이 써 내려가던 원고지 2,600매 분량의 장편 소설을 탈고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성령님께 약속 받은 글이었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원고가 내 손을 떠나고 더 이상의 숨 가쁜 집필 작업이 없어지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이전과 같은 기쁨과 확신에 찬 성령님의 응답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히려 머릿 속에는 자꾸만 소설 당선의 상금이 오락 가락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잡념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먼저 응당 십일조부터 해야 할 것이고, 분명 하나님께서 부모님들도 책임지신다 하셨으니 부모님 부양비로 얼마를 떼어 놓자. 그리고 아내가 이전부터 말해 오던 대로 좋은 전자 오르간을 한 대 사서 중국으로 가지고 가자. 그러면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위로 받겠지. 그래 틀림 없이 약속을 하셨으니, 아마 당선금을 통하여 내가 당면한 여러 가지 현실적 난관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것이다 등등….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생각들이 한 번 머릿 속을 스치기 시작하자 불붙었던 중보 기도의 문이 막히기 시작하였고, 기쁨도 점차 사라지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며칠간을 그와 같은 상태로 보내던 중 나는 출애굽기에 연이어 읽기 시작한 레위기 말씀을 통하여 내가 쓴 소설 ‘아바’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지팡이일 뿐 아니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레위기 2장에서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라는 대목에서 문득 내가 드린 제물 속에 어느새 누룩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매일 아침 레위기를 읽을 때마다 등장하는 흠 없는 수컷, 흠 없는 수양, 흠 없는 수송아지…들을 태워서 바치는 제사를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길이 얼마나 순결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다.


레위기 10장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려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멸망을 당하는 장면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는 제사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11장에 이르러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내시는 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무슨 특별한 사명을 감당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 가운데 건지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시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고 엄숙하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묵직하게 내 심령에 다가오자 결국 우리가 떠나는 이 길이야말로 내가 거룩하게 되기 위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레위기 20장을 통과하면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는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우리를 구별하여 불러내신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날은 그와 같은 상념 가운데 휩싸이며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당치 못 하는 심정을 토해 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굽어 보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사장의 세족(1993년 11월 25일 아침 QT)


주여 저의 발을 씻겨 주옵소서
저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내어 주옵소서
주의 성소를 밟아 더럽힐까 두렵사오니
주여 저를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내 마음은 주가 거하는 성소
먼지 묻은 발자국으로 얼룩이 질 때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예수님 수건을 두르시고 다가 오시네


그가 물을 받아 내 발을 씻기시네
주여 내 발을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여 그리 하오면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느니라


나는 다시 성소로 들어가네
휘장을 젖히고 지성소로 들어가네
기다리시던 주님과 마주치네
보고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네


그 순간, 내 눈가엔 기쁨의 이슬
주님의 입가엔 수정 같은 웃음
주가 내 눈물을 닦아 주시면
내 입가에도 환한 웃음


(4)


내가 다시금 회개의 기도를 통해 회복되고 정결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후, ‘아바’를 통한 증거를 보고서 중국행을 결정짓겠다고 하던 아내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아내 역시 매일 아침 기도로 매달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 차리고 있었다. 아내의 힘들어하는 모습 속에서 그저 중보로써 말 없이 도우며 지나던 어느 날, 퇴근 후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모습이 환하게 빛나며 광채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 느닷 없이 아내가 웃으며 다가 앉더니 내게 줄 좋은 선물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하며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 확실한 증거를 받았다며 중국으로 떠날 것을 순순히 제의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물론 그 이후에도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계속 힘들어하였지만, 한 번도 중국으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철회하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만큼 하나님은 아내에게도 철저히 역사하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기도 가운데 같은 날 동시에 <믿음의 글들>을 출판하는 홍성사를 떠올려 주셨고 그것이 바로 소설 ‘아바’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아내의 결단으로 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 부부는 이제 중국으로 떠나는 것을 기정 사실처럼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 다음 넘어야 할 고개인 교회와 부모님들을 향해 기도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승낙을 받아 내기 위해서 한 달 이상을 기도로 준비한 후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반주자로서 고등부 반사로 제각기 한 몫을 담당하던 일꾼들을 놓치는 아쉬움으로 목사님과 당회에서는 절대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꼭 기독교 교육이 받은 소명이라면 곧 포항 근교에 개교하는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학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며 당장 한동대학의 지원서를 써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부부의 결심과 그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 때마침 소설 ‘아바’의 출간 소식 등과 더불어 결국 우리 부부의 중국행이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 차리고, 교회에서도 결국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짧은 양가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내가 미국서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후, 거의 강제로 이끌다시피 하여 얼떨결에 교회 생활을 시작하신 본가의 부모님도 그럴 것이었지만, 더욱이 처가의 부모님은 아직 교회도 나가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그 같은 결정을 양가에서 절대 받아 들이지 않으리라는 걱정이 앞섰고, 아마도 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는 설득과 투쟁을 동반한 장기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구정을 기하여 단단히 마음의 무장을 하고 찾아간 양가의 부모님은 너무나 뜻밖에도 단번에 우리의 중국행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를 몰고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오히려 어리둥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함께 자리를 같이 했던 동생들을 통하여 나중에 들어 알게 된 사실은, 양가의 부모님이 모두 내가 마치 그 동안의 닦아 왔던 전공을 모두 포기하고 신학으로 다시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선전 포고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싸인 추측들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국 대학으로 간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안도하는 착각(?)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미국서 돌아온 이후 내가 너무 교회 일에 빠진다고 내심 거리껴하던 그분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자세한 진상을 파악하고 섣불리 허락한 것을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아무튼 부모님들의 눈을 살짝 감겨주신 일 조차도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이요 그 동안 우리 부부의 끈질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깊이 깨닫고 있다.


(5)


중국행을 결정하고 난 후, 비로소 사역지의 상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고려하신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였다. 한국의 60년대에 해당한다는 말을 듣고 최소한 공해 없고 물 맑은 시골이 아니겠는가 하고 막연히 추측하던 중, 현지에서 잠시 귀국한 분의 보고를 들어보니 웬 걸…, 여름철에는 수시로 수돗물이 끊어져 고생하고 그나마 나오는 물은 뻘건 흙탕물이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겨울철에는 섭씨 영하 25도의 맹추위와 온 도시를 자욱이 덮는 유연탄의 매연으로 시야를 가린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곳에서 고생할 아내와 아이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솜뭉치로 틀어막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함께 떠나기로 결단한 아내야 어차피 자신의 믿음으로 극복해 나간다 치더라도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 나서야 하는 아이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한단 말인가? 막 학교에 입학하여 아름답게 단장된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활기 찬 생활을 하고 있는 철 모르는 7살짜리 아이에게 과연 부모의 이 같은 결정이 받아 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후로 아이에게 가능한 한 중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넣어주기 위하여 만리 장성이 그려진 그림 화보를 보여 주기도 하고,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대하여 동경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에게 최대한의 과장된(?) 설명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평소에 쾌활하고 말이 많던 아이가 중국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일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충격을 줄까 보아 중국행에 관한 일은 일체 비밀로 붙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우리 부부 사이의 대화들을 조금씩 엿들어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미루어 짐작컨대 그 무렵 부모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통하여 어느 정도 눈치를 채어 가고 있던 아이는 혼자만의 두려움과 고민에 싸여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주일 예배가 끝난 후, 교회의 담당 장로님이 다가오면서 마침내 우리 가족의 중국행을 둘러싼 이야기를 했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정말 우리 중국으로 가는 거야? 난 안 갈래….” 하며 얼굴이 하얗게 되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아서서 찻길을 향해 막무가내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아이를 붙잡으려고 내쳐 달려가 손목을 낚아챘다. 울먹이는 아이를 겨우 끌고 와서 차에 밀어 넣고 무작정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살아온 동안 그때처럼 당황했던 적이 없었다고 회고될 만큼 그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아이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히 우리 아이가 평소에 아빠인 나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감을 보여 왔으며 한 번도 그 아이가 내게서 도망치는 것을 상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운전을 하는 동안 줄곧 입술이 바싹 말라 오고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뒤를 힐끗 돌아보니 아이는 물기 있는 눈을 껌뻑이며 달리는 차창 밖의 거리를 처량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침대 머리에 앉혀 놓았다. 어떻게든 잘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훌쩍이는 아이는 완강히 고개를 내저으며 좀체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무작정 아이의 손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시작했다. 내가 무엇이라 기도했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지만 그저 성령께서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만을 눈물로써 매달려 간구했던 것 같다. 아멘, 하고 기도를 마치자 아이가 따라서 작은 목소리로 아멘을 하였다. 한참 만에 눈을 떠보니 아이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평안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도하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는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침묵이 잠시 흐른 후에 아이가 말했다. “아빠, 그럼 우리 꼭 다시 돌아올 거지?” 나는 아이를 품 속에 깊이 껴 안았다. 그 순간 위로의 성령께서 우리 두 사람을 어디론가 사정 없이 휘몰아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허락하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이 임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의 불씨로서 자식을 고대하게 한 이후로 자식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향한 통로가 되어왔다. 자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식이 받는 고통을 바라보는 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치밀하게 계획하신 것이며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그 절정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실 때 겪게 하신 이 모든 일들조차도 처음부터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일이었다고 지금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이 체험과 믿음이 우리를 중국 생활의 어려운 고비 고비에서 지켜 주었다. 직장 선후배들의 반대와 교회 어른들의 반대들(대부분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지만….), 더러는 믿는 분들 가운데도 “아니 당신 나이가 몇인데, 지금 직장을 그만 둔단 말이야? 노후 대책을 생각해야지?”하며 극구 말리던 분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생각하면 할 수록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고,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비록 우리는 연약했지만 우리 가족의 걸음 걸음을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준비해 주신 아바의 지팡이가 있었던 것이다.

[김연종] ‘테러리즘’ 다시 보기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테러리즘’ 다시 보기

오늘 텔레비전 뉴스는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 붕괴 현장에서 열린 ‘9.11 테러’희생자 추도식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슬픔을 가누지 못했고 그 장면을 보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는 빌딩 피폭시 현장에 출동했던 911 소방대원의 생전의 모습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그것도 예고 없이 죽는다는 것은 가족은 물론 그를 알았던 주위 사람들을 참으로 황망하게 한다. 911 테러로 죽은 사람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픈 사연을 가졌을까 생각하면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데 오늘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파괴 현장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겠다 싶어졌다. 그러다가 미국 사람의 슬픔은 크고 애절한 반면, 사막의 한가운데서 먼지더미에 파묻혀 버린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에는 무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미국인은 나와 같은 사람 같고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쉽게 동감이 되면서도, 왜 아프간이나 아랍 사람들의 슬픔은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미국의 눈으로 보고 미국의 입장에서 보아 온 것은 자그마치 50여 년에 이른다. 그 동안 미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혈맹이어서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의심조차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 온 것 같다. 더구나 세계인의 눈과 귀가 되는 언론의 대부분을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어 미국의 눈과 입이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911 사태만 하더라도 우리는 미국의 CNN을 통해 테러의 잔인함에 분노하고 슬퍼했으며 아랍인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을 키워왔던 것 같다. 왜 테러가 일어났는지, 아랍인들은 왜 그토록 미국에 분노하는지를 냉철하게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저 흥분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시각을 만날 수 있다. 주지하듯 테러리즘은 폭탄을 지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살상행위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즘’, 즉 ‘주의’이다. 가령 우리가 맑시즘이나, 휴머니즘, 시오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양심이나 신념에 기초하여 나름 대로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슬림들이 선택한 삶과 저항의 방식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테러리즘은 이슬람이란 종교와 자기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정신은 오히려 성결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아랍인들은 테러리즘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서구 세계에 의한 오랜 식민의 경험과 최근 한 세기 동안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의 누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랍계 내부의 경제적 빈곤과 좌절도 커다란 몫을 했다.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이슬람인을 동물 취급하며 적대적으로 대했으며 미국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아랍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기지만 이슬람 종교와 문화, 사람은 존중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유와 인권을 내걸었지만 중동의 부패한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민중을 외면했으며,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부패한 정권을 지지하고 군대까지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미국은 항상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으며 아랍의 이익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국이 테러리즘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미국은 자꾸만 테러리즘을 문화적 충돌이나 종교적 전쟁이 아니라 빈 라덴 등 극소수 테러 조직의 무력 행위로 축소시키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테러리즘의 근본을 애써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전(지하드)을 준비하고 전사를 모으는 일에는 수 백 수 천의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어제는 1만 여 명의 파키스탄 의용군이 소총과 흉기를 들고 아프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형제 자매가 죽어가는데 우리가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테러리즘의 실체가 있다.

신앙과 민족과 적개심에 뿌리를 둔 테러리즘을 군사적 보복 공격으로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빈 라덴이 사라진다 해도 그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끝도 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행사하고 있는 또 다른 폭력은 테러를 더욱 부추길 뿐이다. 테러리즘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배양한 문제 상황을 어떻게든지 개선해야 한다. 911 사태는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통해 미국에 보낸 경고의 메시지이다. 거대한 제국, 미국이 제3세계 민족들의 권리와 생명을 함부로 유린해온 폭력과 억압의 체제를 청산하라는 것이다. 911 사태를 통해서도 그 메시지가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테러가 계속될지 모른다. 테러리즘은 단순히 누구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테러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러리즘의 배후에는 이슬람 민중의 절박한 생존 현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자살 테러를 재미 삼아 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하긴 누가 전쟁을 원하며 죽음를 바라겠는가. 살고 싶은 욕망, 가족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근본 의식이 아닌가.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지만 우리조차 전쟁을 바라 보거나 즐기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 파괴의 현장에서 불안에 떨고 굶주리며 스러져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귀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기독교인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아랍인을 적대시하고 미국을 편들고 이스라엘을 지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종교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를 받아 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과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이러한 ‘공존’의 방법이다. 전쟁이 신념을 포기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혜진] 귀국을 앞두고

F2 이야기


귀국을 앞두고


내일이면 한국에 들어간다. 학기 중이라 바쁜 남편은 물론 함께 못 들어가고, 오직 나만의 휴가를 갖게 된다. 겨울 내내 있다 오겠다고, 겨울옷 몇 벌 싸고 나니 어느새 거실에 놓여진 커다란 이민가방 두 개. 한국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 비행기 티켓은 6개월간 오픈으로 끊었다. 신혼여행을 못 갔던 것은 물론이고, 1년 10개월 간 시카고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거의 없던 나에게, 이번의 한국행은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 들어가는 공식적인 이유는, 한국에 계신 교수님께 직접 추천서를 받아서, 오랜 기간 질질 끌어 왔던 유학 준비를 좀 쉽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근 2년을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교수님께 도무지 미국에서 추천서를 요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너 누구냐?라는 반응을 보이실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차라리 한국에 들어가서 부탁드리기로 작정했다. 이런 이유로 결심하게 된 한국행이지만, 이번 한국행에 대한 기대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먼저, 나는 이번 한국행이 나의 무력감을 깨어 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유학생 와이프 생활이 2년이 다 되어가는 근래에는, 스스로에게 느끼는 무력함이 극도로 치닫고 있다. 바닥을 치고 있는 자존감. 유학생 배우자의 단조로운 생활이야 기혼자 유학생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기에, 나의 생활 패턴을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생활이 쉽게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내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할 텐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변함 없는 나태한 신앙 생활과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감정의 무너짐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보니, 지극히 조용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더 내버려 두면 영영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함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보다는 나은 자아상을 가지고 있던 그 장소로 돌아가, 그 때를 기념하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맛 보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다. 물론 새로운 멤버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기는 하겠지만, 예전의 그 공동체를 다시 경험하고, 그 때 함께 하던 동기들과 잠시라도 다시 교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새로운 자극제가 되지는 않을까, 그렇게 기대한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또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 동안, 유학에 필요한 시험 준비들이 내가 내 자신을 위해 한 일의 전부라고 해야 할 듯. 결혼 이후에, 또 미국에서 철저히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기회를, 그리고 결국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할 나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니, 애써 고민을 회피했다고 이야기해야 함이 맞을 것이다. 아무런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뭔가 하고 있다는 대리 만족감은 유학생 와이프 생활에서 오는 폐해라고 말할 수 있다. 외국 생활에서 오는 생활 자체의 스트레스가 상당해서, 하루 하루를 의미 없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학위는 남편이 따는 것이지만, 물론 그러한 남편을 잘 지원함으로서 돕는 것이 와이프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만, 결국은 진보하고 있는 남편과 퇴보하는 자신을 비교하며 허탈해 하는 모습들을 빈번히 본다. 나 역시, 오직 남편의 진행 과정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환경 속에서 내 자신의 꿈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금 내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미국 생활은 더 힘겨울 것이 될 것임에 틀림 없다. 모처럼 갖게 된,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러한 짧은 기간을 통해서, 나는 앞으로의 미국 생활을 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싶고,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체적으로 이끄는 삶으로 만들고 싶다.


또, 나는 한국에서의 몇 달을 통해서, 나의 무너져 있던 생활 습관이 바로 잡히기를 기대한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던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또한 한국을 향한 그리움으로 밤새 붙들고 있던 인터넷으로 인해 얻게 된 불면증은, 한국에서 가족들과의 생활을 통해 바로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늘 집안에만 갇혀 있느라고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이 좀 좋아지지 않을까도 기대해 본다. 언제부턴가 학교의 체육관은 유학생 배우자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용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그나마 운동하던 기회를 박탈 당했던 것이고, 또 의지를 내어서 운동을 하지 않게 된 것인데, 결과는 체중은 늘었지만 체력은 떨어져 약간의 노동에도 쉽게 지쳐 떨어지는 상태. 의도하지 않아도 몸을 움직이게 될 한국 생활이 내 생활 습관들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지 않을까. 물처럼 들이켜고 있는 커피와 다이어트 콜라도 끊을 수 있을 지 모른다. 이러한 나쁜 생활 습성들은 몇 번이고 돌이키려 노력했던 것이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들이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자신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는 것처럼, 나 역시 내 자신의 습관에 대해서 때때로 그렇게 느낀다. 자신을 성결히 지키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들에 사로 잡히고는 한다. 내 자신의 의지를 내어서 고치기 힘들었던 악한 습성들이, 한국에서의 생활로 조금이라도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저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기대하며, 더불어 소망하는 것은 내가 다시 되돌아 와야 할 시카고에서 어떤 관계들을 맺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터넷 중독의 후유증이라고 장난 삼아 말하고는 하지만, 나의 대인 관계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주일마다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생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경계하는 나의 마음이 그들을 나와 삶을 나눌 동역자로 인정하기를 꺼려지게 한다. 공동체 안에서 회개에 대한 권면과 책망은 없이, 환대와 위로만을 이야기하는 청년회의 리더와 멤버들을 끊임 없이 정죄하게 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의지인 것 같다. 이제는 함께 해야 할 공동체에 대해서 고민할 때라고 생각한다. 어떤 공동체에 들어갈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공동체에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모든 소망들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도하시기를 원하는 소망이 있다. 1년 10개월간, 경제적 어려움들과 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 감정의 기복들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선 순위 밖으로 밀려 있던 것을 회개하며 고백한다. 어쩌면, 전체적인 내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경이 행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환경이 나의 나태함을 변명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든 묵상과 기도와 학습의 훈련을 통해, 나의 영적 성숙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내 안에서 하나님이 내 삶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항상 의지를 내어 그 사실을 되새기지 않으면 나는 다시 환경 가운데 매몰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를 붙들어 주시기를 소망하고, 또 나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싶다. 아마도 졸업 이후 학사로서 고민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동기들의 모습이 내게 훌륭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쓴 글을 읽어 보니, 마치 수련회에 들어가기 전에 쓰는 선언문 같다. 어쩌면, 이번 한국행은 나만의 작은 수련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강사도 없고, 함께 기도하는 무리들도 없지만, 그 어느 수련회 때보다 커다란 소망과 기도를 품고 간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바꾸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