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 자유의지와 예정론의 대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캠퍼스 사역 Q&A


자유의지와 예정론의 대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의 인식의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두 가지 장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마음의 우둔함”입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원죄에 가려져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죄성에 이끌려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거나 감소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진리에 대한 명암(brightness) 을 감지할 수 있는 인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의 경우 이 감지 능력은 전적으로 마음의 순수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결정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생각의 폭이 좁은” 결과입니다. “생각의 폭”은 어떤 현상의 넓이와 깊이를 보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생각의 넓이”는 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이해와 또 그 현상의 파장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생각의 깊이”란 그 현상을 원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폭은 세상적 공부를 통해서만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많은 생각/묵상을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을 넘어설 때야 비로소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게 되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의 폭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외부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이는 결국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 없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 즉 묵상과 기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고정관념이 너무 깊게, 또 오래 간직되어질 때 점점 더 생각의 폭이 제한을 받게 됩니다.


진리는 유일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고 해서 진리가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의 우둔함과 생각의 폭의 차이 때문에 성경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이라고 해서 꼭 진리에 더 가까워지거나 생각의 폭이 넓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생각 없이 사상의 유행을 따라가는 자들의 생각을 진보적인 생각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릴 때 일찍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습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 올바로 정립되는데 가장 귀중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물어보신 하나님의 모습은 아담과 참된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궁금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인격적 교제는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미리 정해 놓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타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모든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해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30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표현인 “예정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위 두 가지 가르침이 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은 자유의지와 예정론 두 가지를 다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게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폭”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생각이 시간에 대하여 자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모든 것, 모든 상황을 활용하십니다.


Optimum Combination of Sequences of Human Decisions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시간에 구속받으며 계속되는 흐름으로 보지 않고 “짧은 토막의 시간들의 종합체”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토막의 시간들 안에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유의지의 온전한 표현을 위해서는 각 토막까지 이르는 모든 과거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토막의 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모든 토막 안에 있는 인간의 지식이 동시에 바뀌게 됩니다. 또한 한 인생의 토막 토막이 이와 같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토막도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바로 이런 토막의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 요소의 자극을 최대한 가하므로 그 토막의 시간의 종합체인 한 인간이 매 토막마다 올바른 판단하기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combination 이후 가장 최고의 combination이 결정될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역사로 굳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외부적 가능한 방법들과 토막들의 최고의 combination 을 통해서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도록 예정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굳어진 역사의 토막 토막을 연결하여 통과하는 “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대한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전도서 11장9절에서 청년들에게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모든 일을 하되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올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가 심판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매 순간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고 바로 그 결정에 따르는 행동에 의하여 우리가 심판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 토막 토막마다 긴장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는 역사로 굳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명수] 크리스천과 선거

복음과 법


크리스천과 선거


올해는 대통령선거를 비롯해 중요한 선거들을 치루게 되는데, 벌써부터 예상후보자들이 자신이 적격자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대체로 부정적이다.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소리만 크고 실천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은 입법과 법의 집행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를 일이다. 정치가 잘 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선출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뽑히도록 노력하는 행위는 애국하는 일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정치가들이 선출되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자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정당만 보고 사람을 택하는 것도 반드시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모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후보자의 됨됨이를 알아보자.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가 보자. 땀 흘린 흔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기에 부족하다. 고통 가운데 있어 본 사람들이야말로 서민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가 제시하는 정책과 비전을 살펴보자.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내용인가. 전혀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개혁자가 아니다.


이것 이외에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자. 이것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것은 사람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정당에서 미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을 공천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자. 우선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보자.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부족하다. 그가 정말 거듭난 사람인지 보자. 거듭난 후에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였는가 보자. 그가 그 직업을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자.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자.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의 정치적 지도자로 세우기에 흠이 있는 사람이다.


정당과 후보자들은 미사여구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려하지 말고 진실과 정직함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거짓으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만약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선거운동을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보라. 유권자들은 움직일 것이다. 상투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책제시로 유권자들을 속이려 하지 말고 유권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만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 가면서 선거운동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당선된 후에도 반드시 법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


특히 크리스천 후보자들은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믿는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앙인인지 점검하여 보고 만약 당선이 된다면 어떻게 그 직을 하나님께 드리겠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상위의 법(the higher law)인 하나님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신앙이 있는가. 그 상위의 법에 합당한 법을 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 준비되었는지 점검하여 보라. 그 상위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어떻게 이 세상의 법을 집행하겠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런 비전을 믿는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면 믿는 자들은 그들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좋은 지도자들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 무망하며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많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은 이 땅의 정치제도, 법제도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라면 믿는 사람들도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켜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좋은 일꾼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날을 기대하여 보자.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5)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5)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3) 선지자 무함마드


이슬람의 기본 신앙의 교리나 모든 행사를 살펴보면 무함마드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어떤 신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교리를 이슬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에게 어떤 신격을 부여하는 것을 중죄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신앙이나 삶 속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무슬림들의 사고의 중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꾸란 24장 52절과 54절과 56절에 보면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과 그의 선지자(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것이 같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꾸란에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곧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알라의 뜻이 가장 완벽하게 계시된 것이 바로 무함마드 선지자를 통하여서라고 꾸란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상으로 무슬림들의 정신 속에 어린 시절 때부터 각인이 된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옴으로 인하여 참 종교인 아브라함의 종교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성을 향한 과정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킨 무함마드야말로 영웅 중의 영웅이며, 참 개혁가요 참 신앙인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특별히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서 무함마드는 그 시조로 여겨진다. 수피즘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우주의 신비한 운행의 중심 축에 놓여 있는 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꾸란에는 그를 완전하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알라의 모든 칭찬과 전권을 받아 알라의 뜻을 계시하는 데에 마지막으로 사용된 위대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perfect man)으로 다가 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혹은 하디쓰(Hadith))는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항상, 꾸란 만큼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많은 경우, 실제로 꾸란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고 가르쳐지기도 한다. 중세기 이슬람의 신비주의(Sufism)를 정통 이슬람의 경지로 승화시킨 대학자 가잘리(Ghazali)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생애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참 행복의 열쇠는 순나를 따르며 하나님의 사도[무함마드를 가리킴]를 모방하는 데에 있다. 그의 모든 출입과 움직임 그리고 조용한 시간들, 심지어 그의 식사하는 자세, 잠자는 일, 말하는 법까지 모두 그를 모방하는 것이다…. “[알라의] 사도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것들을 받으라. 그리고 그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 말라”(꾸란 54:7). 그러므로 그대는 바지를 입을 때는 앉아야 하며 터번을 쓸 때에는 서야 한다. 그대는 신발을 신을 때는 오른 발부터 신어야 하며 먹을 때는 오른 손을 사용해야 한다…. 무함마드 아슬람은 멜론을 안 먹었는데 그 이유는 알라의 사도가 그것을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에게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ragg의 책에서 인용, The Call of the Minaret.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92.)


무함마드의 일거수일투족은 이처럼 진짜 무슬림이라면 따라야 하는 삶의 모든 행동 규범이 되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의 무의식 속에 가장 중요한 세계관의 전제요 가치요 충성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꾸란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무함마드는 결코 무죄한 인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무함마드는 무죄하고 완벽한 상태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대다수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여겨져 왔다. 무함마드의 삶은 결국 알라의 뜻에 완전히 부합된 그러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슬람의 핵심은 무함마드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무함마드를 욕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을 모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 전체를 그리고 알라를 모욕하는 일이다. 중세기에 서구 교회가 무함마드를 모욕하였고 종교개혁시에 역시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무시하여 버림으로써 이슬람 세계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서방을 영원한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선교 현장에서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슬람의 세계관의 내용을 잘 알지 못 하고 또 세계관이 얼마 만한 힘이 있는 것이며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상태에서,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라고 나름대로 폭로하며 복음을 전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모든 경우 무슬림들의 분노를 샀고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한 경우도 꽤 있었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아닌가를 무슬림들과 따지기 전에, 선교사와 같은 외부인들은 먼저 무함마드가 무슬림 문화의 핵심이며 이슬람 정신 세계의 축이라는 현실과 그 정신적 역동성을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작 전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도 못 하고 그들의 세계관과 충돌만 함으로써 불필요한 소모전만 치른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실제로 역사적인 무함마드의 생애에 대한 탐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슬람의 학자들과 지성인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탐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학문의 방향성 역시 무함마드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독교 진영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나름대로 발견한 다양한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의 생애의 진위가 아니다. 모든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함마드의 순나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삶 속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함마드는 그 절대적인 위치를 이미 지난 14세기 동안 확보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과거의 인물로 끝나지 않는다. 특별히 수피 신비주의에 오게 되면, 무함마드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심지어 중보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기독교에서처럼 대속의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의 구원을 도와줄 수 있으며 무슬림들을 위하여 변호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인으로 모든 수피들은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중세 수피즘의 대학자인 가잘리는 무함마드의 사후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무함마드는 죽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바로 알라가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할 수 있는 자이다.” 그때 알라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오 무함마드여, 네 머리를 들고 말하라. 너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중보를 하여라. 그리하면 응답 받을 것이니라.”(Andrew Rippin의 책에서 인용. Muslims: Their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s. New York: Routedge, 2001:52-53.)


이렇듯이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꾸란의 계시를 받고 그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신앙과 존경과 사랑은 그들의 세계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토속적인 이슬람의 현상을 관찰하면 (소위 민속 이슬람(folk Islam)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현상) 무함마드나 알라의 개념은 많이 약화되고 주로 정령숭배와 샤마니즘이 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충정은 모든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비무슬림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무함마드에 대하여 과학적이고도 역사학적인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할 때에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바로 무슬림 사회의 타부를 건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함마드는 단순히 그들의 역사 속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만이 아니며, 또 신앙과 충성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만이 아니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투사(projection)한 그들의 자존심이며 궁극적인 자기 정체(identity)인 것이기 때문이다.


5.2. 기독교의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의 세계관의 핵심 비교


그러나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어느 한 인물이 그토록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서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아 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복음적이며 정상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세계관의 핵심인 믿음(assumption)과 가치(value)와 충성(allegiance)의 대상으로 모신 사람이다. 즉, 참 하나님과 참 중보자 예수가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참고로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는 “영생”의 의미를 보라.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이,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슬람의 경우, 참 무슬림이란 shahadah, 즉 그들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이 이슬람의 신앙고백 역시 기독교에서처럼 두 가지 신앙의 대상을 고백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혹은 진정한 무슬림이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알라)과 그분이 보낸 마지막 선지자에 대한 신앙고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갖는 세계관에 관련된 의미들과 적용은 다음 호로 미루도록 한다.


[배헌석]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이코스타 2002년 2월호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노아시대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방주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살고, 방주를 거부한 자는 다 죽었다. 중간은 없었다. 죽음 아니면 삶 뿐이었다. 그런 절대절명의 장소가 바로 방주였다. 그런데 “이 방주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교회”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올바른 답을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고 답했을 때 그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함께 나누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교회라는 답이 틀린 답이 될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는, 그렇게 목숨이 달린 중요한 곳이라면, 그리고 그 방주가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정확하게” 파악되어야만 한다.


교회라고 대답했을때 그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교회(individual church)주의자들은 매 주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생각하며 답했을 것이고, 개인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몸이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각자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로마 카톨릭의 신도들은 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당들의 전체 모임 자체라는 의미로 교회라 답했을 것이고,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 전체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방주로 이끌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방주의 의미와 동일한 교회의 참된 의미는 분명히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나, 교파주의, 혹은 교회가 갖는 지엽적인 제한성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갖는 많은 의미 가운데 한 두 가지의 지엽적 의미로 방주의 의미를 국한시킨다면,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는 교회의 개념은 정확하게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교회 의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방주 밖으로 끌어내어 물에 처 넣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시 답해 볼 필요가 있다. “방주”는 “교회”라는 답은 개교회주의, 교단주의, 교파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지상교회시대에서는 오해되기가 쉬운 표현이다. 오히려 방주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깊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쉽게 생각해도 될 문제를 내가 이렇게 걸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교회의 참다운 의미, 사명을 다시 한번 더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오늘날 전도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교회이다”(The biggest obstacle for evangelism today is church). 부인하고도 싶고, 받아 들이고 싶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실제로 현 상황이 그러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오기를 거부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많이 있다. 이런 씁쓸한 유머가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한인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노인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중 두 노인이 싸우게 되었다. 아무리 말려도 싸움을 멈추지 않자 한 노인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가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느냐고…”


교회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성장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부흥이 아니다 – 물론 교회부흥은 원리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의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부흥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개교회 부흥이 교회의 참된 목표인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개교회가 약해지고, 심지어 “없어지게 되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과연 소금과 빛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소금은 그저 소금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음식 속에서 자신이 없어짐으로 그 음식을 싱싱하게 유지시킬 때 “소금다운” 것이다. 빛도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써 어둠을 밝힐 때 빛답다고 할 수 있다. 환한 대낮의 양초불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불은 아무리 작은 양초라도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내적 성장으로 인해 그 모습이 건재하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아픔과 어두움에 별 영향을 못 미치는 성장이라면 그 교회를 참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감당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지역사회를 향해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본질적 의미의 교회,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주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을 매고, 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16:19). 즉 천국의 상황을 가장 잘 소개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소개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혹은 성도)가 잘못하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마태23:13). 또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향하여 엄숙한 사명을 주고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이 구절을 분석해 보면 맨 위에 머리되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몸 역할로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의 발 아래 만물, 즉 세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결코 세상의 정치가, 경제가, 학자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 정치가들이 운영하는 세상에 왜 이렇게 죄가 만연한가? 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이 진정한 소망과 가치관을 주는가? 왜 세상은 이토록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 다원주의로 흘러 가는가? 경제가들이 섬기는 세상에 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라고.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상을 높여 주는 것 같아서 신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어야 할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실까? 바로 교회라고 생각하는 우리 개개인(개인이 성전이므로-고전 3:16), 성도들의 모임(마18:20), 개교회, 교단, 교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보편교회 등이 공동적으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일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 훼퍼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교회를 정의하였다 –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 교회가 된다.”(The church is only the church when it is for others)


나는 개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이다. 많은 회개를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목회를 하는 순간 마다, 수 없이도 많이 “내 교회”, “내 교회” 하면서 지내왔다. 이웃교회의 성장이나 부흥, 혹은 침체에 남 몰래 이기적인 생각, 냉소적인 마음을 가져온 적이 수 없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교회의 목표가 교회의 성장”이라는 잘못된 교회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웃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때 내가 섬기는 교회가 같이 기뻐할 수 없다면 그곳에 무슨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는 말인가? 교회의 목표가 분명히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면 개교회는 교회 안의 성도 간에, 개교회 간에, 보편교회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그 개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2001년 연말에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기도를 계속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계속 내 영혼을 울렸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8년 정도의 부교역자 생활과 7년 정도의 담임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내 눈으로 생생하게 체험한 것이 있다.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어느 일정 기간 성공하게 보이고, 외적으로 훌륭하고 인기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조차 결코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평가를 받는 것을 보았다 –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평범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 듯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적인 복을 주시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의 내면은 영적 성숙과 평강, 기쁨으로 넘쳐 흐르고, 그들이 섬김는 삶의 영역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많은 영혼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능력을 소개해 주고는 하였다.


마태복음 16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진정으로 우리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그 날에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는 날이다. 그 평가는 결코 세상적 기준으로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학력, 재력, 지위 등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영역에서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했느냐 안 했느냐에 하나님은 평가의 기준을 삼으실 것이다.


그 때 받을 상급을 신약성경에서는 면류관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약에 모두 몇 개의 면류관이 등장하는지 아는가? 그리고 그 면류관은 어떤 자들에게 주는 것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까지 포함하면 모두 6개의 면류관이 나온다.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영광의 면류관(벧전5:2-4), 의의 면류관(딤후4:8), 그리고 가시 면류관(요19:2). 이 면류관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면류관은 “인내”와 “절제”로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나머지 네 개는 “전도”와 “양육”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미국 전역에 목회자와 개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 있다. “Prayer Summit”이라고 한다.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에도 이 Prayer Summit 모임이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도하며, 일 년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기도만 하는(?) 이상한 수련회를 한다. 이 때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올해 이 모임을 참석하면서 한 번 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각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물론 서로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회자가 이 Prayer Summit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coordinate한 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사역이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의 연합(unity)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열성적으로 뛰신 분이시다. 정말로 열심히 헌신한 분이셨기에 누구나 다 그 분의 마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 분의 열정을 알고 있었다.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나와서 그 분의 머리에,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가장 뜨겁고, 가장 열정적인 중보기도, 감사기도의 순간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 건설은 누구에게나 감사한 일, 감격적인 일이다. 반면 내 나라 건설은 나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다. 교회가 그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최선을 다할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세상에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개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유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진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로의 결정마저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맡긴다면 그는 참다운 의미의 방주를 이룩한 것이다. 학사에서 석사, 석사에서 박사과정에로의 진급을 학문과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계속하려고 한다면 그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상급학교로 진급하려고 하는 나의 동기 속에는 내 인생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평강과 기쁨 속에 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학비 때문에 진로결정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성적 때문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어느 정도 고난에 대한 인내가 따른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 속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성도 간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다른 성도가 잘 할 때 그 성도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성도 간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된 것이다. 이웃 교회를 위하여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섬기려는 노력을 할 때 교회는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 건설 목표는 단지 지역교회, 한인교회 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에는 4-5천여개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한다. 수많은 이 한인교회에는 미국교회는 없는 커다란 영적 장점이 있다. 곧, 기도의 열정, 봉사의 열정, 그리고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열정 등은 여느 미국교회가 따라오기 힘든 큰 장점이 된다. 물론 미국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도 많다. 그들은 좀 더 오랜 역사 속에서 정립된 성숙함, 합리성, 경험 등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한인교회들이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인교회들은 보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안 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와 흑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 간에 그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전통과 문화가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융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아시안 교회가 들어가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아시안 교인들은 백인들과도 관계를 가질 수 있고, 흑인들과도 동감의 면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문제도 아니고, 정치 문제도 아니다. 그 깊은 내면 속에는 날로 다양하게 되어가는 인종들을 어떻게 융화로 이끌어 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숨어있다. 진정한 의미의 “United States”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이코스타(eKOSTA)에 게재하려고 쓰고 있다. 유학생이 주 대상인 코스탄들에게 내가 왜 이민교회, 미국교회를 이야기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코스탄들이 코스타를 잘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목표설정이다. 코스탄의 목표는 코스타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이 목표가 동감이 된다면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앞으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하나님 나라 건설 자체에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탄들은 이민교회, 이민성도, 2세, 영어권, 아시안 교회, 미국교회 등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모여서 3박 4일동안 기도만(?)하는 Prayer Summit 수련회 장소이다. 오늘 아침 마지막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나는 이런 헌신의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제가 섬기고 있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하기를 헌신합니다. 학교를 지날 때는 그 학교를 위해서, 교회를 지날 때는 그 교회를 위해서, 식당을 지날 때는 그 식당을 위해서, 병원을 지날 때는 그 병원의 직원들과 환자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될 때까지 먼저 기도로 헌신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구체적 지혜, 용기, 능력, 실천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다음 해 Prayer Summit을 할 때까지, 일 년 동안 나는 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기도를 계속, 간절히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없어지는” 한 줌의 소금, 한 개의 촛불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이보다 더 귀한 생이 어디 있겠는가?

[반영운] 기독교는 과연 환경파괴의 주범인가?

이코스타 2002년 2월호

기독교는 과연 환경파괴의 주범인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


요즘 방학을 이용하여 그간 가르치던 학생들과 <Design With Nature >라는 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고 있다. 내가 학부시절 건축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바로 이 책을 통해 생태적 환경계획에 눈을 뜨게 되었기에, 혹시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도해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성경의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이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수 차례 설파하고 있다. 저자인 Ian McHarg는 캘빈의 장로교가 융성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유대이즘은 물론 서양사상의 대부분이 위 구절에 근거하여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견지하고 무차별한 정복과 약탈을 자행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로서 모든 개발계획에 있어서 생태적인 계획방법을 이용하여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으로 인해 미국은 각종 개발계획에 있어서 환경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을 의무화한 환경정책기본법이 제정되고 환경영향평가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저자를 미국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게 해 주었고 미국 환경운동에 새로운 동기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성경과 기독교를 마치 환경보존에 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고 심지어는 진화론적인 입장마저 고수하면서 생태적인 입장은 반 기독교적인 입장임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그간 환경을 공부하면서 읽은 많은 책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면서,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환경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조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창세기 1장에 근거하여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환경파괴와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 환경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다분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자구해석에 깊이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이 구절의 앞 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기자는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공중의 새와 땅 위의 것들과 바다에 사는 고기들을 다스릴(have dominion over) 수 있게 하실 계획을 기록하고, 27절에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1장 28절에서는 지으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할(subdue) 것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라고(have dominion over). 여기까지만 읽으면 앞에서 말한 대부분의 환경 학자들의 의견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자연보다 우월한 지위를 주어서 잔인하게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게 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본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본 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어원적으로 26절의 ‘다스리다’는 28절의 ‘다스리다’와 같은 단어로서 (radah)라고 하는데 미완료시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스리다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절대자의 지배나 통치의 개념보다는 전지하고 전능한 입장에서 사물을 통찰하고 그에 맞게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더 문제시 되는 단어는 바로 ‘정복하다’로 번역된 (kabash) 로서 단어 자체로만 보면 다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보인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정복자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이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장 문맥 전체와, 같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2장 15절과 그 외 관련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시각을 볼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당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셔서 그로 하여금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하는 것이 그 주된 요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것이 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잘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당신께서 지으신 세상을 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셨고,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을 구속하시기까지 하신 세상의 보호자이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간혹 구약에서 나타나는 냉정하고 몰인정한 것 같은 모습은 모두 다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기 위한 채찍의 손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존재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창세기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성경의 잘못과 기독교의 잘못을 논해서는 안 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정복하다는 단어가 다분히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표현상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참된 평화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투적이고 잔인한 표현은 뭔가 원어적인 표현을 영어나 우리 말로 옮기는 데 어색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쓰인 다른 성경을 찾아 보니 이 말은 다른 민족과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무릎 꿇게 하는데 쓰이고 있다(역대상 17:10, 시편 47:3, 이사야 45:1, 다니엘 7:24). 바로 어그러진 관계, 즉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새롭게 하고 정돈하는 의미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향한 죄악을 이기고 주께 돌아가는 것을 촉구하는 장면에서 사용되기도 했다(미가 7:19). 즉 이 단어는 무언가 행위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위적인 모습에 쓰이기 보다는 관계적이고 질서를 나타내는 데에 쓰이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보다 더 잘 뒷받침해 주는 곳이 바로 창세기 2장 15절에 설명된 에덴에서의 인간의 역할이다.


창세기 2장은 천지창조사역의 완성, 안식일, 에덴 동산 완성, 인간 창조의 구체적인 과정 묘사 등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나서 인간을 에덴에 들여 보내시면서 일하고 돌보는 역할을 지정하신다. 그렇다면 동사로 되어 있는 이 두 단어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 단어는 바로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의 다스리다와 정복하다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첫번째 단어인 ‘일하다’로 번역된 단어인 (abad) 는 동사로서 serve, work, worship의 뜻으로 쓰이고, 명사로는 servant, worshippers, labor 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위의 예들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첫번째 권한은 바로 에덴 동산에서 노동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편 하나님과의 관계는 섬기는 자, 즉 예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규명할 때 사용되는 소중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노동이 곧 예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돌보다’로 번역된 단어인 (shamar)는 동사로써 keep, observe, heed 등의 의미로 쓰이고 명사로써는 keeper, watchman 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용례에 근거하여 보면 두 번 째로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은 에덴동산을 지키고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에덴동산의 관리를 위임 받은 아담은 후에 에덴의 모든 생물들의 이름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으니 가히 하나님을 닮은 제2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자연(세상)에 대한 권한이 혹자가 지적하는 파괴자로서, 폭압적인 전횡을 휘두르는 압제자로서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환경)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 그대로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의 관리를 위임 받은 존재로서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노동을 함으로써 위임자를 예배하며, 자연과의 관계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관계임을.


내용이 이러할진대 인간이 과연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이미 지배와 정복의 패러다임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더 더욱 성경의 창세기가 환경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주 근시안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질서와 조화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께서 애지중지 만드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것은 아마도 자연과 인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섬김과 돌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인간은 자연을 돌보고 일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수직 수평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학 구도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의 중간에 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인간의 위치가 적어도 인간의 타락 전에는 잘 유지되었으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대로. 인간의 타락이 기록된 창세기 3장 이후에는 2장까지의 기록과는 상반된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이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 자연의 관계도 역시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으로 해석할 때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로서, 자연에 대한 관리자로서.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깨어진 환경을 보듬고 돌보는 데에 적극적인 자세를 제공해 준다. 자연을 사랑해야 할 대상, 섬기고 아껴야 할 대상, 아니 몸을 드려 희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환경보존에 대해서 이보다 더 강한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기독교 국가의 후손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작금의 기독교가 처해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상 성경 자체를 볼 때는 모순을 발견할 수 없으나, 현실적인 면에서 너무나 많은 모순과 괴리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성경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없이 남들이 한 얘기를 옮겨 적다 보니 이러한 우를 범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은 문제를 지적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오만과 불순종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좀 더 겸손히 성경이 말하는 진실과 우리의 상식과 이성이 밝혀내고 있는 사실들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 고쳐가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는 환경에 대한 크리스천의 자세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