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혁]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5).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연재 칼럼 중, 지난 회까지는 미국에서 직장을 찾고자 하는 경우에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이번 회에서는 이제 이미 job offer를 받고서,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자 할 때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논의하여 보기로 하자.


본 칼럼을 몇회에 걸쳐 연재로 쓰는 중에,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 원하는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몇몇은 본 칼럼에서 도전 받고서 미국에서 직장을 얻게 되었다고 감사를 표명하는 형제자매들도 있다. 감사한 일이나, 본 칼럼을 통하여 내가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본 칼럼은 미국에 이민을 하거나, 또 직장을 얻은 것이 더 좋다 또는 싫다는 식의 혹자가 말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나 반미주의’ 또는 ‘국수적인 민족주의’등에 관한 논쟁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거역할 수 없는 새로운 이민 생활과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되는 고민스럽고 절박한 문제를 신앙의 눈을 통해 조명해 보고 싶을 뿐이다. 새로운 땅을 바라보며, 여호수아가 경험하였던 고뇌를 생각하며, 미국에 유학하는 한국 유학생 형제자매의 현실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고국에서 직장을 찾거나, 외국에서 직장을 찾거나 학위취득 후에 직장을 찾는 고민은 마찬가지이며, 직장 찾는 방법은 다르더라도 원론적인 상황과 접근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호수아는 거룩할 수 없는 땅에서 신발을 벗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이방족속이 사는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땅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의 임재로 거룩해지는 어느 땅에서든지, 겸허하게 주님앞에서 종으로서 신발을 기꺼이 벗고, 주님을 참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자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승리할 수 있을것이다.


길갈에 세운 열두돌 기념비


다시 여호수아서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보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마자 요단강은 약속처럼 갈라졌다. 얼마나 기쁘고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었겠는가.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의 가운데에 굳게 섰고, 백성들은 감사에 벅찬 가슴으로 요단을 건넜을 것이다. 지난날 광야에서 수없이 겪었던 고생이 단번에 보상이 된 듯이, 지난 모든 고통들을 이 순간에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미지의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생업을 위한 새로운 직장을 얻게된 유학생 이민자와 그 가정의 기쁨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할것이다. 그 어렵게 생각되던 job 인터뷰를 잘마치고 job offer를 받아냈다는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감사에 눈물을 흘리며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감사도 할 것이다. 지난 수년동안 유학생활을 되돌아보면 감회가 깊어지기도 할 것이다. 힘든 학점이수, 연구, 연주 및 작품발표 준비로 마음 졸이며 밤을 세웠던 수많은 날들이 벌써 언제이었나 싶기도 할 것이다. 다시 유학생활의 광야로 되돌아가라면 자신이 없지만, 그 광야의 훈련을 지난 것을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할 것이다. 첫 열매는 하나님 것이라고 설교하시던 목사님의 말씀에 다소 부담을 느끼면서도, 벌써 전문인으로서 받게 될 첫 봉급을 나누어 쓸 계획에 마음이 분주해 진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감사함은 언제나 오래 지속적이지 못하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저들이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며, 만나를 공급하시고 저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곧 잊어버릴 것을 말이다. 감격스럽게 마른땅을 건넜던 요단강의 기적을 곧 잊어버릴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열두지파에게 부탁하여 요단강 가운데와 길갈에 요단의 물이 끊어진 표징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저들이 자자손손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와 보호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 감격의 순간에는, 무거운 기념비의 돌을 지고 나오는 일조차도 기쁜일이었을 것이다. 요단 가운데에 돌을 세워서 표징을 만들고, 또 길갈에 세울 돌을 들고 나오는 열두지파의 대표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을 것이다. 길갈에 열두돌로 기념비도 세우고, 요단을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하심을 되새기며 자손에게 이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가르치자고 몇번이고 다짐도 해두었을 것이다. 아무리 다짐을 했어도, 저들은 금방 길갈에서 다짐하였던 감사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하는 죄된 본성은 변하지 않은 탓에, 유학생활의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평지에 이르게되면 너무도 쉽고 빠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다. 새로운 진로의 두려움 때문에, 요단강만 건너게 해주시면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하고싶던 감격도 금방 시들해져 버리기 쉽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 힘겨운 유학생활의 광야를 지나, 길갈까지 이르렀던 수많은 크리스천 유학생 선배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가?


저들은 요단강을 건널 때 가져가서 길갈에 세워야 할 기념비의 돌을 잃어버리고 간 연고요, 또는 가지고 갔으되 바른 기념비로 세우지 못한 탓일 것이다. 요단을 건너며 가지고 가야되는 돌은 “주께 감사”의 돌이다. 비록 길갈에 세운 돌에 문비로 쓰진 않았지만, 평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주께 감사”를 그 돌에 새기고, 때만 되면 길갈의 기념비로 되돌아와서 그 “감사”를 되새기며, 주께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헌신”으로 돌을 닦아야 할 기념비가 아니겠는가?


학위와 직장때문에 얼마나 울고 웃었는가? 하지만 이제 그 학위와 좋은 직장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광야를 지나서, 학위취득과 새로운 전문직업을 얻은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누가 부당하다고 할것인가? 마음껏 감사함으로 기쁨을 누리자. 그러나, 나는 “누구 때문에” 오늘의 새 길을 얻게 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게 되는가? 조용히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은 답을 길갈의 기념비에 꼭 새겨두고, 게으름과 교만이 싹틀 때마다 찾아와 읽어야 할 기념비가 바로 길갈에 있는 것이다. 자녀들에게도 그 기념비에 적힌 기적과 감사를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요, 세대를 넘어 변함없이 한결같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길갈의 기념비로 돌아가보리라고 다짐해 두자.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기쁨도 잠시였다.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긴 하였지만, 가나안 이방족속과 싸우게 될 일이 벌써 걱정이다. 이미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본 가나안 이방족속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겁을 먹고 있긴 하지만, 언제 저들이 싸움을 걸어올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광야에서 출생하여, 거친 생활에 잘 훈련된 젊은 용사들이 몇 만명이나 있지 않은가? 지도력이 출중한 여호수아는 다가올 이방족속과의 전쟁에 승리할 전략을 충분히 세워 놓았을 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중 할례를 받을 수 없었던 모든 젊은 남자는 다 할례를 먼저 받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 위급한 상황에서 이 얼마나 부당하신 명령인가? 옛날 야곱 할아버지와 그 자녀들이 막내딸 디나로 인하여 히위족속 에게 수치를 당했을 때, 히위족속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고서, 낫기를 기다리던 저들을 습격하여 진멸시켰던 할례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도 수없이 들어온 터였다(창34:1-31). 지금 상황은 그보다 더 급박한 상황인데, 싸울 수 있는 젊은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가나안 이방족속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용사가 무장하고 밤낮으로 지켜도 부족한 터에, 거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고 며칠동안 낫기를 기다려야 한다니 참 걱정스러운 일이다. 히위족속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묘하신 방법이다. 그 분은 항상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살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아야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합당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다짐이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풍요로움을 다 갖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이방족속이 섬기는 더러운 우상들과 타락된 세상욕망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동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아니 저들로부터 성결하게, 썩지 않는 소금처럼 구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누리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시라는 고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할례”가 아니였을까?


광야의 유학생활 시절중에는 연구 및 강의조교로 받았던 적은 장학금이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 받게되는 거액의 연봉에 비하면, 그것은 참 쥐꼬리만한 것이었다고 생각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 물론 부모님께 미안하게 마음 조리며 받았던 생활비 보조도 더 필요없게 될터이다. 아니 도리어 지금 이미 연로해지신 부모님을 도와드릴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몇 년간 속을 썩이던 고물차도 이제 새차로 바꾸고, 그 지겨운 아파트 생활도 청산하고 정원이 있는 새집도 사 볼 작정이다. 정원은 몇 에이커 좋을까가 궁금하고,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집 앞뒤의 잔디 깎을 일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미 보랏빛 장래가 열린 듯이 보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아직도 미숙하기만한 새로운 땅에서의 직장생활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성공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내가 무엇인가 준비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생활은 자꾸자꾸 숨쉴 틈도 없이 바빠져 가고 있다. 점점 기도하기가 재미없어지고, 예배생활이 다소 느슨해진다.


수많은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직장을 얻자마자,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쉽게 빠져버리 거나, 힘든 세상의 일들에 파묻혀 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일이다. 이제 세상 속으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파송을 받아 나간 저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쉽게 빠져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가? 세상에 살되,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동화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구별되어, 인내하며 살고자하는 결단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나는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의 할례가” 아니겠는가?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에 굳게서서,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크리스천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한 크리스천 몇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의 도시와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고자하는 결단의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도 구별되게 살고자하는 전문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음은 빛이나고, 그 사회는 아름다워 질 것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땅에서 할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 이제 점령해야 될 여리고가 가까워져 가고있는데, 여호수아는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된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5:15),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였다. 이 말씀과 상황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셨던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와 비슷한 말씀과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다시 하시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려 하셨을 것이다.


가나안 땅은 가나안 이방족속이 사는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땅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어떻게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때문이다. 새로운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될 새땅은 어느곳이든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거룩할수 없는 땅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정착하며 살 땅이 어느 곳이든,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있으면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처럼 우리 모두도 그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신을 벗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벗어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 전도단의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은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이렇게 풀고 있다.



“맨 발이 되라고 하는 것은 겸손의 표시로서, 나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맨발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시 오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되시는 우리 예수님과 함께 열방을 소유할 뿐아니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권세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이 모든 것보다 가장 큰 특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을 취해 이기는-을 약속하셨다.”


이민 생활과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을 취해 이기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땅을 거룩하게 여기고, 겸손하게 그 땅에서 신발을 벗고 살아야 할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취득학위로 되는 것이 아니요, 진정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얻게 되는 것이다. 이민하여 사는 그 곳이 어느곳이든 거룩한 땅이 되게하고, 겸허하게 주님 앞에 자신의 신발을 벗고, 주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님으로 섬길 때에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맺는 말


성경에서 보면, 실패하는 이민자와 승리하는 이민자가 있다. 미국 이민에서도 승리하는 이민 백성(족속)과 실패하는 이민 족속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곳이 어느 곳이든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주님의 종으로서 여호수아처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신발을 기꺼이 벗는 삶은 승리하는 이민자의 삶이다. 그것은 그 간에 수고하여 얻은 전문인의로써의 전문성을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새롭게 허락된 땅에서 더욱 철저히 전문성을 발휘하고, 또 그 전문성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아름답게 기여하며, 더불어 온몸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끝내 두고 온 애굽의 기억들을 계속 그리워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을 수 없는 자는, 언제나 떠도는 이민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민자의 삶을 살 것인가는 이민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의든 타의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는 한국이민자는 지금 자신들이 사는 곳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미국이나 제3국에 새로운 직장을 찾으며 이민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이여, 어느곳이든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여호수아처럼 살자. 주님이 승리케 하실 것이다.


[주명수] 우리와 다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법과 복음


우리와 다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을 보여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죄인들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우리와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팔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조건없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저들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배반한자들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서도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하여야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사랑하기 쉬운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종교가 다르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타 종교 중에도 가장 기독교를 핍박하는 회교도인을 향하여는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테러사건 이후에는 더욱 회교도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최근에 경험하였던 작은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회교도인 한 여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 남편이 강도상해죄로 교도소에 갇혀있는데 변론을 맡아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외국근로자들입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회교도인들을 위해 크리스챤이 변론을 하여준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제 생각이 단견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회교지역에서 핍박받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들이라도 잘 대해주면 귀국해서 최소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론을 해주겠노라고 승낙하고 교도소에 찾아가 그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남편은 부인보다 더 열렬한 회교도인이었습니다. 교도소내에서도 하루 5번씩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친절하게 법적인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를 신뢰한다는 태도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를 위해서 변론을 하여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다니는 이슬람사원의 지도자가 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만나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공통의 장 (commom ground)이 있으면 누구와도 만나서 함께 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공통의 장은 섬김과 정의와 사랑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그를 위하여 변론하였습니다. 그가 구속되어 있는 중에 그의 아내는 출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돌보아 줄 크리스챤 자매를 붙여주었습니다. 통역도 하여 주고 병원도 데려가 주었습니다. 병원비가 없는 것 같아 회사에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사랑의 헌금도 전달하였습니다. 지금은 잘생긴 아들을 순산하였습니다. 마지막 선고하는날 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판사가 남편을 불쌍히 여겨서 석방을 하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목사님, 감사합니다”라며 울먹이면서 말합니다. 그의 알라신이 도와 주셨는지 우리 하나님이 도와 주셨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는 기독인도 회교도인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부는 아들을 안고 자기 나라 특산물인 선물을 손에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도 기뻣습니다. 그 즈음에 한국에서 상연하고 있던 영화 한편을 감상하였습니다. 천국의 아이들이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역시 회교국가에서 만든 영화입니다. 가난한 어느 회교도인의 가정에 어린 남매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의 신발도 사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오빠의 걸레같이 생긴 운동화 하나로 여동생과 함께 나누어 신게 됩니다. 오전에 여동생이 오빠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오면 오후에 오빠는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닙니다. 이어 달리기에서 바톤체인지 하듯이 운동화를 나누어 신다 보니 오빠가 학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여동생도 뛰어서 집에 와야하고 오빠도 뛰어서 학교에 가야합니다. 이 달리기가 반복이 되다보니 오빠는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날 운동화가 부상으로 걸린 어린이 마라톤에 출전하여 일등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는 영화였습니다. 우리에게 공통의 장이 있으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공통의 장, 사람과 인간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6)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6)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5.2.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 세계관의 핵심 비교 (계속)


지난 호에서 이슬람에서도 기독교에서처럼 유일신을 고백하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처럼, 무슬림 들도 그의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마치 요한 사도가,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요 17: 3) 구원 조건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슬람은 기독교 후에 나타난 종교 가운데 가장 기독교를 닮은 종교이다. 특별히 신앙고백의 구조에 있어서 이슬람은 기독교와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진위를 떠나서)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적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신념이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신앙고백 내용인 tauhid(알라의 유일성)와 risalah(무함마드의 선지자됨)를 무슬림들로 하여금 종교의식들을 통하여 계속 반복하게 함으로써 이 공유된 지식과 신념이 모든 무슬림들의 의식 세계뿐만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도 자리잡도록 한다. 이 지식은 자연히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된다. 이 신념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굳어지게 되고 이러한 사고의 패턴은 웬만한 충격이 아니면 변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관을 바꾸어야 하는 전도의 사역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계관의 충돌이며 곧 확신의 싸움인 것이다. 나는 무슬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는 것이 다른 비기독교인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끊임없는 사명은 그들의 신앙고백 구조 안에서 그들이 믿는 무함마드의 역할이 예수에게 원래 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충정과 사랑은 지극한 것이기에 무함마드를 손상시키는 언급은 금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바람직하지도, 건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무슬림들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그들이 나름대로 알고 있던 예수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이 생기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젠가 예수에 관한 그들의 paradigm에 변화(shift)가 일어날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슬람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무슬림들을 접하게 될 때에 복음의 전달자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무함마드가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변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다. 복음을 듣는 상대방의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는 상대방의 세계관의 내용(즉, 믿음의 내용)의 진위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즉, 상대방이 확신하고 있는 내용과 다르거나 정반대의 내용을 자신도 확신하며 이야기하게 될 때에, 이러한 내용은 상대방의 세계관을 건드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의 문제로 확산될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충돌은 예상하면서도 이러한 충돌이 인간 관계에 끼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하여 소위 “코뮤니케이션”의 기술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이 부분은 다루지 않겠다.)


5.3. 이슬람의 세계관과 무슬림들의 세계관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만나게 될 때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은 단순히 종교적인 충돌이나 Samuel Huntington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이라고 하는 비인격적인 이념의 충돌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확신 곧 세계관의 충돌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복음전달자는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그것을 신봉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이슬람 자체보다도 무슬림들의 생각들을 더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의 생각과 그 구조에 더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사고방식, 인식방식, 또 인식한 내용들과 그 내용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 등이 이제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 이슬람 연구에 있어서 세속 학자들이나 기독교 학자들이나 심지어 무슬림 학자들조차도 이슬람의 종교적 내지 철학적 이데올로기에 더 관심을 쏟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슬람에 대한 역사와 교리와 정치적 이념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 공부하면서 무엇인가 한 가지가 빠진 것을 많이 느꼈다. 그것은 내가 문화인류학적 현장조사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인데, 무슬림들, 곧 “사람들에 대한 연구”이다.


즉,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믿는 이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즉, 앞에서 언급한 환경들) 어떠한 해석과 대처를 하고 있는가? 무슬림들은 자신들 주변의 환경들을 이슬람의 이념에 기초하여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가? 이슬람의 이념들이 무슬림들의 삶의 문제들을 어디까지 풀어주고 있는가? 만일 이슬람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삶의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무슬림들은 어디에 호소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경우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한 무슬림 평민들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을 갖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다루는 이슈들이다. 이렇게 무슬림들을 이해함으로써 접근하는 이슬람 연구는 이슬람 세계의 구체적인 사회적 정신적 현상들을 규명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 사회와 무슬림들의 삶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내가 자각하게 된 점은 이슬람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신봉하는 무슬림들의 삶을 이슬람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서는 이슬람 연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사변만으로 끝나기가 쉽다. 특별히 선교를 수행할 때에 무슬림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 잘 아는 것은 사랑을 기초로 한다고 하는 선교에 오히려 위배될 수도 있다.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이념을 다 신봉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무슬림 사회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만이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다 형성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관을 구성해주는 세계관의 전제(assumption)와 가치(value)와 충성(allegiance) 등의 내용이 무슬림 사회에서는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만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토속적인 전통적 세계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으며, 어떤 삶의 영역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슬람 이전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더 지배적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 역시 여느 다른 비무슬림 사회처럼 그 세계관이 복잡하며 인간 사고의 심연과 그 창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잠시 여기서 이슬람에 대한 내용을 접어두고 다시 세계관의 주제로 돌아가서 “세계관의 주제(worldview themes)”와 “세계관의 보편요소들(worldview universals)”을 다루어야 하겠다. 이 부분을 다룬 뒤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때에는 내가 사역하고 리서치한 동아프리카 해안의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실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계속)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이코스타 2002년 3월호

구원받은 삶 이후에 나의 삶은 분명히 달라졌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 눈을 뜨고 나서는 주님이 원하시는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를 고민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나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기만 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나를 괴롭게 한다. 주님을 믿은 다음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 이 이런 것이었던가? 깊은 회의에 잠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 밖’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 같은 나… 때로 이러한 삶의 정황들이 가져다주는 절망감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시 일어나기 위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있는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오늘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 극적으로 구원받은 한 여인, 기생 라합에 얽힌 사건들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라합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여호수아서의 문맥을 끊어버리듯이 시작된다(수2:1). 성경은 그녀의 ‘기생(harlot or prostitute)’이라는 신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끄러운 과거의 삶의 모습들을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갑작스럽게 그녀의 인생의 대 전환점을 극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그 극적인 전환점에서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표현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부모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한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그처럼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그 고백이 지난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행하신 기적 같은 승리들, 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수2:10). 더구나, 그 고백의 마지막에서 보여지듯이, 그녀는 역사 속에서 이해된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굳이 변론하지 않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방인이라도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라합의 삶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거기에 이미,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 역사는 이미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는 과정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2:9에 있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하는 라합의 고백도 어쩌면 그녀의, 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통찰력에 근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을 탐구할 때 그 탐구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 중의 하나는 ‘현재를 이해하는 안목과 미래에 대한 합리적 예견’ 이다. 이는 매우 값진 열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자체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역사적 안목은 인간의 어떤 다른 사관(史觀)으로도 제공할 수 없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라합의 구원에 대한 요청과 고백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에 근거하듯이 우리의 구원도 오로지 십자가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어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또한, 라합의 경우와 같이, 주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으실 때에 나의 과거의 더러운 죄악과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은혜로 받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의 절망적인 정황에서 다시 힘있게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어떻게 절망적인 죄악의 상황가운데에서 은혜를 입었던 자임을 기억해 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다시 감격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앞에 용서 받은 나는, 비록 구원받은 이후 현재의 모습 속에서 잠시 넘어져 있더라도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일어선 후에 같은 죄악에 습관적으로 빠지지 않게 되는 삶의 동력도 이 감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솟아나게 된다.


라합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 구원의 감격을 그의 평생동안 유지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은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경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라합이 경험한 구원의 첫 번째 신비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경험한 것이었다. 여리고 정복전쟁 직전에 라합이 두 정탐꾼을 자기 집에서 도피시킬 때에 성경은,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수2:15).” 라고 기록한다. 또한 정탐꾼들은 그 집에서 떠나면서,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위하여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2:18).”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 때에, 그 지시대로 라합은 자기 집안에, 그 무너져 내리는 성벽 위에 있는 자기 집안에 가족들과 함께 모여있었다! 비록 공포의 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집을 신실하게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붙드시는 손’을 경험했던 것이다. 성벽이 모두 무너져 내린 폐허의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라합의 집이 있는 성벽의 한 부분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그것은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보다 더 놀라운 신비의 현장이다! 라합이 체험한 두 번째 신비는 “하나님의 한 사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다. 라합을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은 마치 그 한 여인만을 생각하시는 관심으로 그 성벽의 한 부분을 붙들고 계셨다. 하나님은 인간 모두를 다 사랑하신다. 그러나 한 사람의 구원의 순간에는 매우 개별적이며 특별한 아버지의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부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의 무한성에 근거한다. 이 라합의 경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가운데에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경험을 하면서 이 사랑을 실제로 느끼게 된다. 설령, 짧은 시간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 감격의 정도가 미약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구원의 사건이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민감하게 되면 그 구원이 경이로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느끼게 되어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적 섭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 그 집에서 구출된 후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영(陣營)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수6:23).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갔지만 (수6:25) 그들은 아직은, 전쟁이 끝나고 정해진 규례의 절차를 마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진밖에 거할 수 밖에없는 이방인들이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같은 정황이 펼쳐진다. 이 땅에서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여전히, 아직은 이 세상 가운데에 살도록 남겨두신다.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좌절과 갈등을 겪기도 하며 치열한 싸움속에 던져지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가까운 미래에 확실히 무너져버릴 어떤 조직이나 상황속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경우에 처하기도 한다. 그 때에는 진실로, 라합의 경험과 같은, 주위의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 자녀들을 보호하신다는 믿음을 견고히 붙들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이 상황에도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단단히 붙잡자.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갖고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진(陣) 밖에 노출되어서, 마치 노획물처럼 취급될 수도 있는 그 자리에 있던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처럼 우리도 세상속에 노출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노출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하기에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켜야 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세상사람들이 다 좇는 것들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경험을 감격적으로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때로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이 순종이 요구되는 삶 가운데에서 여유있는 웃음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여호수아의 군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들이 보인다. 거짓과 어두움 (참소,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지배하는 도성들이 보인다(롬8:33-35).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귀로는 이 도시들의 성벽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자. 그리고 그 어둠의 도성들이 무너지면서 회복되는 라합과 같은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모습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내게 맡겨주신 전쟁의 몫이 끝나기까지는 여기 이 상황 속에 있으라고 하시며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게 하는 일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리고는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의 그 크신 팔에 안기는 그 날을 바라보고 기뻐하자! 핍박과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주님과 다시 만날 날을 그리며 그 소망으로 끈질지게 견디어 냈던 초대교회 형제들을 생각나게 하는 한 시인의 노래처럼…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허형만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티끌보다 연약한 삶 하나
떠나시온 그 순간부터
이어진 끈으로 지탱하고 서서
애오라지 견고한 만남을 위하여
젖어드는 비바람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깨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부터
감사 찬송으로 끝맺는 밤중까지
때로는 고달프고 때로는 서러우나
오실 날짜 그 순간 기다리면서
휘날리는 흙먼지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