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현]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

코스탄의 소리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


전 아직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한 구기 종목 결승전을 밤늦게 지켜보던 때가 기억납니다. 탁구 여자복식 결승전에서 중국과 맞붙게 된 한국팀이 극적인 우승을 거두고 감격해 하던 그 장면 말입니다. 솔직히 탁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국이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이 탁구밖에 없는 것도 아님에도, 전 벌써 10여년이 훨씬 지난 이 한 탁구 경기의 결승전을 잊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제 갓 예수님을 영접한 한 어린 신앙인의 눈에 비쳐진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담대한(?) 인터뷰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인터뷰 장면은 제가 TV 방송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첫 간증(?)이었습니다. 우승을 축하하며 먼저 누구에게 가장 감사하냐는 전형적인 기자의 인터뷰 질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는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당당한 모습.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한 저의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전 그 인터뷰 장면을 보면서 양영자, 현정화 선수와 같이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렀답니다. 한국이 탁구 여자복식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같이 믿고 있다는 왠지 모를 자부심과, 또한 이런 고백을 TV 방송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그 두분의 담대한 신앙이 너무나 부러웠고 또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해 12월, 전 인터넷을 통해 제 22회 한국 청룡영화상 시상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신문을 통해 누가 어떤 수상들을 했는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시상식을 보려고 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신문 기사에서 읽은 한 영화인의 수상 소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한 신인 여우상 수상자의 그 수상 소감을 제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왠지 모를 열망에 휩싸여 기말고사로 인해 여유 없는 제 마음을 달래며 그 긴 시상식을 보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신인 여우상 수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처음부터 쭉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첫 순서에 신인 남우상, 여우상 시상이 있더군요. 근데 전혀 기대도 하고 있지 않던 신인 남우상 수상자가 갑자기 이런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가) 처음인데 이렇게 신인상 주셔서 감사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엽기적인 그녀를 많이 봐주신 모든 관객 여러분들께 이 상을 돌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할머님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인 남우상 “엽기적인 그녀” 차태현)


“하늘에 계신 할머님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라는 그 말이 제 귓전에 너무나 짜릿(?)하게 들려 왔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신인 남우상 수상자의 간증에 전 괜스레 기분이 신나졌습니다. 그냥 제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이 그 순간 배부르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후에 들리는 신인 여우상 수상자의 소감.


“먼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구요. 그리고 제 생애 가장 탐나던 신인상을 제가 올해 22살인데 22회 청룡 영화제에서 타서 진심으로 기쁘구요…” (신인 여우상 “고양이를 부탁해” 이요원)


기분이 정말 째지게 좋더군요. 제가 무대에서 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혼자 신나고 좋았답니다. 제가 믿고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이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사람들 앞에 선포되어지고 고백되어졌다는 것이 그냥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은 가끔씩 스포츠 시합이나 여러 시상식에서 위와 같은 소감을 밝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보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는 동료 신앙인으로서 기분이 좋으시던가요? 아니면 믿는 티(?)를 내는 그 사람들이 왠지 겸연쩍고 민망하시던가요?


거두절미하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그립습니다. 무엇이 그립냐구요? 양영자, 현정화 선수의 그 인터뷰 장면이 그립고,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언젠가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게 될 때, 이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도우심이었다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드러내는 그런 하나님 백성들의 “드러내는 신앙”이 전 그립습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망신살 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한 안수집사님의 백화점이 이윤에 눈이 어두운 부실공사와 안전소홀로 무참히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했고, 또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한 유명한 기업가 장로님이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또 그 구속된 남편을 어떻게든지 빼내어 보려고 애쓰던 유명하신 그리스도인 부인께서는 ‘옷 로비’ 사건이라는 기상천외한 로비사건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벌이고… 거기에다가 교회세습이라는 엄청나고 황당한 일이 지난 1-2년 동안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에서 심심지 않게 벌어졌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작년에는 한국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맏아들이 신문사 탈세 혐의로 감옥에 구속되었고, 아버지인 그 목사님은 교회 재정 문제로 장로님들과 구설수에 오르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1월에 있었던 유승준 형제님의 군 복무 문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을 씁쓰름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신앙함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던 한 유명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평소에 당당하게 약속하고 다녔던 군 복무를 결국 이행하지 못함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래 나중에 저런 망신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조용히 예수 믿는게 낫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이야 바르게 합시다. 나중에 혹 내가 나의 삶의 여정에서 망가지고 넘어질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으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아예 조용히 입 다물고 얌전하게 하나님 신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혹 미래에 부딪히게 될지 모를 나의 죄악과 연약함으로 인해 아예 이 땅에 살면서 몸을 사리며 하나님 믿는 티를 내지 말며 살자구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우리가 티를 내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 신앙한다는 것을 삶의 순간 순간마다 억지로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그의 서신서에서도 적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자연스럽게 그 믿음의 열매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행위로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럴 때마다 우린 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루신 일임을 솔직담백하게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신앙인의 삶을 가르치고자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3절 말씀의 전후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말씀을 통해, 남을 구제하면서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외식된 자들을 경고하시고자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곧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요란을 떠는 자들을 비판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왼손, 오른손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 요셉의 삶을 볼 때마다 은근히 하나님을 드러내었던 그의 고단수적인(?) 삶의 자세를 엿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노예로 팔려가든(보디발), 감옥에 잡혀가든(전옥: 간수장), 왕의 꿈을 해석하든(바로왕) 가는 곳곳마다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의 입술을 통해 자신이 신앙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게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로만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주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 그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 땅에 와 자신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자랑합니다.(창 45:5-8) 그렇습니다. 자신이 잘나고 훌륭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뽐낼 만도 한데, 그는 그 순간에도 어김없이 하나님이 이 모든 것 뒤에 존재하셨음을,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그런 티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6-31절의 말씀도 이러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을 우리에게 권고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자”와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를 구별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9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31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자는, 곧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요,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는 자신 안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 개정판은 31절의 “주 안에서 자랑하라”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여러분… 분명 우리는 예수님 믿는 다는 것이 더 이상 떳떳하지 못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이 부족한 저희들로 인해 오히려 떳떳하게 이 땅에서 고개를 드실 수 없게 되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전 더욱 당당하고 떳떳한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그런 향기나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자신이 성공해 가고 남들에게 한참 인정받게 될 때는 오히려 자기 자랑보다 하나님 자랑 실컨하고, 혹 나중에 이웃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먹을 큰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때는, 남 핑계대지 않고 “다 나의 잘못과 부족함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그립습니다. 우린 흔히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영광이 되고, 잘 안될 때에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 왕을 한번 보십시오. 나단 선지자가 왕궁에 찾아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다윗 왕의 치졸한 죄악상을 만방에 드러낼 때, 그가 자신의 자존심과 명성을 생각해 그 누구처럼(?) 끈질기게 거짓말하고 남 핑계 대며 우기 덥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서 그러한 쪽 팔리는 삶의 순간 속에서도 믿는 자답게(?) 자신의 연약함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습니까? 전 이런 점이 하나님께서 사울왕과 다윗왕을 다르게 대하실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학업이 다 잘 되어가며, 또 졸업 후의 직장도 이 세상에서 꽤나 인정받는 곳에 가게 될 때, 아니 뭐 꼭 “잘 되고 성공했다”를 떠나 나의 지나온 삶의 여정에 대한 소감을 남들과 나눌 기회가 생길 때,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그분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혹 자신의 잘못으로 망가지고(?) 쓰러지는 때가 생긴다면 그 때는 “다 내 탓이었습니다”하며 또 다시 겸손하게, 하나님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여러 사람들 앞에 진실히 드러내는, 그런 솔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안에 넘쳐(?) 났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 인정받고 그러다가 박사 학위 받고,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는 것,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근데 그런 영광의 길목에서도 누가 항상 이 모든 일을 지금까지 운행하고 주관하셨는지, 확실하게 고백하고 드러냅시다. 그래야 동료 그리스도인도 힘이 나고, 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아 참 한가지 더 좋은 효과가 있네요. 이렇게 자꾸 고백하는 습관을 들여야 그나마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는 추잡한 교만에 빠질 확률도 더 적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저도 저의 부족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런 하나님의 한 떨기 귀한 꽃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왜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일정하게 잔잔한 향을 내는 그런 은은한 꽃 말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하나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에레미야서 9:23-24 “표준 새번역 개정판”)

[정진호]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

코스탄 현장 이야기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때때로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들과 친해지는 일이 종종 있게 된다. 자라면서 공산주의자라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의식 교육을 받아왔던 반공 세대인지라, 처음에는 마음 한 구석에 그들을 향한 왠지 모를 거부감과 배척 심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 언저리를 배회하는 얄팍한 학생들보다는 신실하게 공산당에 충성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정직하며 믿음성이 가는 재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더러는 공산당에 평생을 바쳐온 나이 든 중방 영도 중에는 도무지 예수 믿는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인격과 합리성을 지닌 존경스러운 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해 봉사하며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공산주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결코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마르크스 자신이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으니 그 뿌리가 맞닿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공산당원이었던 인물로서 소학교에서부터 가르치며 숭상하는 뢰봉(雷鋒), 열악한 산간지역에서 티벳인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숨진 공번삼(孔繁森)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희생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자의 교과서적 인물로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세워져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능가하도록 삶으로 부딪혀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들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1)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일로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長春)시에 출장을 갔다가 K 대학에 있는 조선족 교수 S씨를 방문했다. 그는 일전에 여름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우리학교에서 계절학기 과목을 한 과목 맡아 강의를 한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 마침 내가 방문한 그 시각에 S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기계공학과의 교직원들을 상대로 매주일 있는 공산당 정치학습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무실과 같이 여러 교수들이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따끈한 중국 차를 마시며 한참을 기다리니 S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마치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출장에 관련된 도움을 잠시 받은 후, 우리는 곧바로 저녁 식사를 위해 함께 시내로 나왔다.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식당에서 푸짐한 진짜(?) 중국 요리를 시켜놓고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조선족 학자들이 그러하지만 그들에게는 험난한 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선조의 후예라는 강한 자존심이 있다. 그러나 한편 그들도 약한 인간인지라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는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과 더불어 경제적 열등의식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에 여간 해서는 진심을 털어놓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S교수는 성품이 소박하고 일단 우리학교에서 한달 이상을 한솥밥을 먹었던 과거가 있는지라 비교적 격의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술이 한두 잔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요즈음 자신이 가정에서 처한 가장으로서의 딱한 처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S 교수는 중국이 개방되기 이전에는 교수로 평생을 공산주의에 헌신하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세우며 비교적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아내가 밖에 나가 장사를 하더니 대학 교수인 자신보다 돈을 더 잘 벌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의 위치가 돈밖에 모르는 자식들 앞에서 손가락질 받는 못난 가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괴로움 때문에 요즈음 자신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 자기와 가까운 친구가 느닷없이 성경책을 한 권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그 책을 만지는 것도 겁이 났는데, 차츰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 과기대에서 만났던 교수들의 얼굴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도무지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지 궁금했었는데, 내친김에 자기도 교회를 한번 나가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때마침 내가 찾아오자 너무 놀라고 반가웠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하나님이 오늘 이 사람을 나에게 붙여주셨음을 깨닫고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술기운이 조금 더 오르더니 그는 우리 학교를 방문하던 시기에 자신이 받았던 충격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한달 간 가르치는 동안에 중국에 그런 대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의 표정과 웃음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중국 아이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지나다니는 학생들이나 외국서 온 교직원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노교수들 조차도 자기를 보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도무지 중국의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 며칠간은 S교수는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대로 피우던 담배꽁초를 복도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다녔는데, 가만 살펴보니 복도가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더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다른 교수가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난 이후에 이분이 마침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본질상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공산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과도 현상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종교 역시도 인간의 발전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종의 결핍 현상이며, 공산주의 세계가 도래하면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S교수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열렬히 신봉하고 배웠으며 지금까지 가르쳐 오고 있는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 학교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또한 이 학교를 움직이고 있는 외국 교직원들이 모두 자원 봉사자로서 중국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온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 놀라움은 가중되었다. 자신이 우습게 여기고 비판하여 왔던 기독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교직원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항상 기쁨과 웃음에 찬 생활들을 하며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자신이 지난날 그렇게 꿈꾸었던 공산주의 사회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패한 공산당의 모습에 염증과 회의를 느껴오던 그가, 자신의 청춘을 바쳐 신봉했던 공산주의 이론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S교수는 집으로 돌아온 후, 과연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의 신념과 공산주의 이론이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그가 도달한 한가지 결론이 있었다. 취중에 그가 고백한 내용은 이러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있고, 공산주의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것밖에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차 시간이 되어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2)


연변 과학 기술 대학에서 북한을 돕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북한 과학자들이 대여섯 명씩 방문하여 학교 기숙사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가는 일이 더러 있었다. 북한이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비극적 분단 역사의 족쇄를 찬 채 건너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슴에 안고 지내던 우리 교직원들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스스로 찾아온 그들을 향해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세계에서 온 그들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다. 잘못하면 그것이 모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들이한 그들의 입장을 어렵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편하게 대화할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김진경 총장의 제의로 시작한 것이 “밥 먹이기 릴레이 작전”이었다. 더러는 보름씩 또는 한 달씩 머물다 가는 그들에게 교직원 가정에서 돌아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식사를 초대하여 풍성한 음식으로 융단 폭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그 첫 스타트는 우리 집에서 시작되었다. 즉흥적으로 일을 잘 벌이는 김 총장이 북한 손님들에게 남조선 동무 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의를 하고서는 돌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두 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으니 “당신 말고 애인동무 바꿔.”하는 김총장 특유의 카리스마가 튀어나왔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고 갈 터이니 저녁상을 잘 차려 놓으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내가 시장으로 이리저리 총총걸음을 오가며 황망히 움직여 겨우 저녁상을 마련하자 곧이어 김총장 내외와 함께 빼빼 마른 북한 사람 다섯이 들이닥쳤다. 학자들 사이에는 항상 그들을 감시하는 지도원 동무가 한 사람 끼어 있기 마련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은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 집에 들어오던 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조선 괴뢰 집에 오니 기분이 어때요? 하하하…” 하며 긴장된 분위기를 일부러 흩뜨리는 김총장의 유머에도 여전히 조심스레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이 없던 그 얼굴들…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식사 후에 아내가 오르간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르간의 페달을 신기한 듯 웃으며 구경하던 그들이 귀에 익은 가락이 흘러나오자 곧 얼굴이 풀어져서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까지 부르는 감격을 맛보았다. 김진경 총장은 북조선 동무들이 아무 격의 없이 우리 남한 형제의 가정을 방문하여 이렇듯 화기애애하게 함께 식사를 나누며 즐긴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감개무량해 하였다.


손님이 떠나고 난 후 뒷정리를 하던 우리 부부는 집안에 걸어놓았던 십자가가 사라진 것을 알고 순간 깜짝 놀라 긴장하였다. 알고 보니 북한 손님이 온다니까 그 당시 소학교 2학년 짜리 아들 다니엘이 겁을 먹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내어 자기 침대 이불 속에 감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였었다. 그러나, 분단의 오랜 장벽도 같은 민족의 언어를 타고 흐르는 촉촉한 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타고 얼어붙은 감정의 실낱같은 물줄기가 녹아 흐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서로 간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함께 어울러져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쳐 부르는 감격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3국에서 남한 사람과 접촉만 하여도 큰일 나는 줄로만 알던 그들이 우리의 가정들을 속속들이 방문하여 함께 웃으며 음식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통일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게 한 민간 외교의 쾌거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특별히 오간 이야기조차 없다. 그냥 우리의 전통적인 예절로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우리가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아마 사모님들은 쌀을 씻으면서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말은 안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사는 모습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매끼마다 기도하며 식사하는 우리들을 통해 어쩌면 식탁 가운데 함께 하신 예수를 그들이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학교 기숙사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벽이면 교수와 학생들이 어울려 운동장을 뛰는 모습들…, 활짝 핀 얼굴로 웃으며 지나가는 복도의 학생들…, 매일같이 뷔페 식으로 누구나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그곳에서 교수와 학생이 항상 함께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웃고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식탁의 풍경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부러움과 충격의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정해진 한 달이 지나고, 돌아가야만 하는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 식당에서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환송 만찬이 베풀어졌다. 사모님들이 정성껏 마련한 선물들을 한아름씩 받고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은 인사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후에 뜻밖에도 그들 중 한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 고백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를 보았습니다.”

[이일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단순한 “들러리”입니까?

캠퍼스 사역 Q&A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단순한 “들러리”입니까?


성경은 (예: 이사야 43:7절, 골로새서1:16)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어느 정도 윤택한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 크게 거침돌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수월함이 이런 사실을 크게 문제로 삼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힘들거나 특정한 목적이나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현존의 고통과 이에 따른 노력과 인내가 결국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한 들러리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연히 생겼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자체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 주기 때문 입니다. 이런 양면성에 자신이 어느쪽에 속하든지 관계없이 위의 질문에 대한 올바를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1)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2)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1.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


인간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러나 현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 용도에 의하여 가치가 부여됩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용도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모든 창조물 위에 창조하셨고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이 결정하셔야 하는 인간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잘못된 자아상을 심어 줍니다. 우리는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에 대한 가치부여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인 인간의 가치부여까지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도를 얼마만큼 충족시키느냐의 기준이 아닌 인간 자신들의 용도의 가치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즉 능력 없이 세상을 가난하게 살기 위하여 창조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열심히” 살았다면 하나님께는 A 학점의 가치를 부여받게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가치기준으로 그런 사람에게 F 학점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A 학점의 가치를 부여받은 사람이 사람에 의하여 F학점의 가치로 대우를 받아 스스로 F학점의 가치를 가진자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인간이 세상의 기준으로 이웃을 판단하며 그렇게 사람을 대하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5:22; 약4:11-12).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가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독립적 가치의 역량이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실이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 타인에 자신을 억지로 높이려는 노력없이 하나님으로 부터 가치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교만한자,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에게는 큰 거침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힘듦니다.


2.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해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살펴볼때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게 하셨습니다.무엇보다도 바로 이 선택권의 최고의 표현은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ㄴ. 하나님은 인간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시편8편에세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합니다. 즉 존귀한 존재로서 비천하게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시기하지 않는, 자신의 본능에 사로잡힌 동물과 같이 않게, 존귀하게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신다고 하십니다. 즉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시고 방문하신다는 뜻입니다.


ㄷ. 우리의 뒤를 쫓아오셔서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셨습니다. 바로 타락한 인간의 육신의 모습까지 (요1:14) 우리를 쫓아 오셨습니다. 우리의 차원까지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바꾸셨습니다 (요3:16).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시는 어떤 “신”의 모습과는 도저히 일치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ㄹ. 영원한 삶을 예비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영역의 가장 깊은 곳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태양이 필요 없음은 하나님 스스로가 태양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계21:23). 태양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가능케 하는 Framework 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이 이 Framework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자신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해 질 때, 인간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와 같이 회복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인류의 창조에 대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합리화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식을 낳지만 일단 낳고 나면 자식을 위하여 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려고 생각하시는 그 순간부터 인간과 사랑에 빠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은 바로 인간이 자신과 같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으로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예술품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까지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기울였을 정성과 섬세함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 우리의 눈, 눈매, 손, 손톱하나 하나 까지 정성 드려 창조하신 예술품입니다 (엡2:10). 이런 예술품을 우리의 타락한 가치관과 용도에 의하여 계속 평가한다면 그 죄를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외모, 능력, 그리고 한 사람을 둘러쌓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한 사람을 대하고 속으로 판단하는 행위는 무서운 죄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이러한 기준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한다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뜻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뜻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우주 한 복판에 세워진 하나님의 예술품, 즉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박찬영]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유학생 사역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미국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은 아마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미국에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참 귀한 시간을 허락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한국에서 날 준비시켜 주셨다.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준비 하면서 오랜만에 생긴 자유시간에 난 교회에서 세꿈이라는 모임에 가게 되었다. 세꿈이는 세계를 꿈꾸는 젊은이의 모임의 약자다. 우리교회의 선교 중보 기도모임이다. 매주 모여서 선교사, 선교지를 놓고 기도하는 아주 귀한 모임이다. 그곳에서 여러 나라와 민족을 놓고 기도했다. 그리고 직접 선교지로 떠난 선교사님의 기도편지를 받아 중보기도했다. 직접 가는 선교사도 있다. 그리고 남아서 기도하는 우리도 선교사라고 생각했다. 난 모든 크리스찬은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가 현재 서 있는 땅이 선교지라고 생각한다. 직업적으로는 아닐지 모르지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정이 있었고, 사명도 있었고, 소명도 있었고, 그래서 미국에 오면서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기대를 하고 왔다. 그래서 기도 편지도 쓰고, 기도 부탁도 드리고 왔다.


아리조나 주립대에 처음 왔을 때 학업 외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캠퍼스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많은 훌륭한 믿음의 친구들을 허락하셨고, 그들 덕분에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었고 믿음도 성장했다.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와 말씀을 배우는 것이 참 좋았다. 친구들 중 몇몇이 Intervarsity 나 CCC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서 내가 다시 대학에 가게 된다면 꼭 가입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리조나에 와서 처음 찾은 것이 그 두 단체였다. 당장에 가입하여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난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ISI (International Students Inc.) 였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듣고, 친구들을 따라 welcome party에 갔다. 그냥 저녁도 주고, 멋진 미국 저택에서 모인다고 하니 구경도 갈 겸해서 별 생각 없이 따라갔다. 정말 많이 모였다. 그때 약40개국을 대표하는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렇게 해서 ISI를 알게 되었다.


ISI는 모든 외국 유학생에게 열려 있다. 주로 많은 문화체험을 제공하고, 필요를 채워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 단체다. 그래서 ISI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을 많이 하는데,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종교의 학생들이 많이 참여한다. 농장 마당에서의 스퀘어 댄스,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구경, 미국인 가정에서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하이킹, 여행 등등…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행사들이 많다. 언제든지 신청해서 참여하면 된다. 이런 행사를 통해 스탭이나 학생리더들은 안 믿는 학생들과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을 통해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더 관심이 있으면 성경공부에 나오거나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작한다.


내가 ISI에 학생리더로 섬기기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한학기 정도 지난 다음 오월 여행에서였다. 매해 5월에 여행을 간다. 2000년 5월에도 콜로라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약 30명 가량의 학생들이 함께 갔다. 대부분 안 믿는 친구들이었는데, 이 여행에만 처음 참여한 친구도 많았다. 14일을 함께 자고 먹고 하니까 처음 만났어도 금방 친해지고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중 태국에서 온 자매가 있었다. 그들은 불교신자였는데, 내게 기독교인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기독교에 관해서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누구를 믿으며, 우리가 식사 때 기도하는 신은 누구냐고. 그래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멋진 자연 속을 함께 걸으며 찬양도 함께 부르고 식사 때 기도도 같이 하면서 마음이 많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믿는 자가 안 믿는 이들과 친구 할 때 그들이 복음을 듣는 기회가 생기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여행을 통해 역사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참 사랑하시는 사역임을 보았다. 그래서 학생 리더십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찬양과 기도 그리고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각국 학생들 40여명이 모인다. 그 중엔 아직 믿음이 없는 친구들도 상당수 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사람이 좋아서, 저녁 식사 때문에, 이유도 다양하지만, 지속적으로 나오는 친구들 중엔 아직 믿어지진 않지만 무언가 있음을 알고 궁금해서 계속 나오는 이들이 많다. 찬양할 때 어떤 친구는 잠시 자리를 뜨는 친구도 있었다. 자신이 믿지 않는 신에게 찬양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으로 그는 찬양이 단순한 노래가 아님을 제대로 아는 것 같다. 그 친구가 믿게 되면 그가 드리는 찬양이 얼마나 향기로울지 그려진다. 기도할 땐 참 다양한 기도제목이 나온다. 각국의 친구들이 모였으니, 각국의 그때 그때의 위기상황이나 사회적 정치적 현안이 기도 제목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사실 케냐에서 일어난 민족분쟁이 우리에게 먼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케냐에서 온 우리 친구와 관련된 일이므로 내 일처럼 마음을 다해 기도하게 되는 게 참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또 아픈 자를 위해, 재정문제의 해결을 위해, 또 중간고사, 학업 등등 여러 가지를 기도하고, 또 그 기도가 이루어 졌을 때, 함께 감사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한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함께 식사하는데 그때 질문들이 참 많다. 특히 복음을 처음 듣는 중국 친구들은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대화를 통해 그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성장하게 되는데, 대답하면서 나 자신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질문들을 통해 나 자신의 믿음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중국에서 정부관리들이 교육차 몇 개월간 파견된 적이 있었다. 너무나 짧은 기간이어서 그 기간동안에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하는 마음이 급했는데, 감사하게도 그중 세 명이나 돌아가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어떤 경우엔 믿기까지 너무나 오래 기다리고, 어떤때는 결실을 즉각 보게 된다. 고국에서 처음 복음을 전해 듣고 여기에 와서야 영접하는 경우도 있고, 여기에서 복음을 들었던 이가 고국에 돌아가서 예수를 영접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기도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분의 시간에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다양한 개개인의 삶에서 하시는 멋진 일들을 내게 보여 주시고 그 사역에 불러 주심이 너무 영광되고 감사할 뿐이다.


난 처음에 미국에 와서 참 많이 실망했던 사람중의 하나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기대가 많았는데, 내 눈에 비춰진 미국의 대중문화는 기독교 신앙아래 세워진 국가다운 면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ISI를 통해 미국 크리스찬의 저력을 보게 되었다. 여기 피닉스지역 모임은 ISC (International Students Club) 라 부르는데, 이 지역의 후원자가 900명 가까이 된다. 그들은 기도로 물질로 식사 제공 등으로, 또 모임의 장소 제공, 영어 자원 교사 등등으로 후원을 한다. 또 대 다수는 학생의 host family로 학생들을 자식처럼 맡아서 그들의 가족 모임이나 행사에 초대하고, 교회에도 데리고 가고, 가족과 떨어져 외로울 수 있는 학생들의 현지 가족이 되어준다. 많은 지역 교회들이 새학기때 오는 학생들을 위하여 가구등을 모아서 기증하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서 모아두었다가 새학기가 되면 새로 도착하는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다. 생활에서 베푸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고, 자신의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도 함께 협력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존경스럽다.


많은 미전도 지역의 학생들이 미국에 많이 온다.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면 대부분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경우, 그들을 통해 믿게 될 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참 전략적으로도 효과적인 사역이 아닌가 싶다. 미국에 오기 전에 내가 기대했던 선교지를 보여주시고, 학생으로 현재 선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방법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나의 믿음도 성장시켜 주시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또 한국에서 막연히 기도했던 나라 사람들을 지금은 직접 친구로 사귀게 되었으니 그것도 참 복된 일이다.


한동안 ‘야베스의 기도’가 크리스찬 사이에서 많이 읽혀졌다. 야베스는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역대상 4:10) 라고 기도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국에 보내주셨다. 이미 물리적인 지경은 넓혀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에서와 똑같은 삶을 기대하고, 살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땅을 못보고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야베스의 기도처럼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내 마음이 넓혀져서 나와 아주 다른 사람들도 품을 수 있게, 또한 우리의 지경을 넓혀서 한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주님이 필요한 다른 민족의 필요도 볼 수 있게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3:19)에서 기도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온 세계와 온 민족에게 미치는 사랑-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한다.


외국인 유학생 사역에 참여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우선, 팀사역을 권하고 싶다. 혼자도 좋지만 외국 유학생 사역에 뜻이 있는 믿음의 동역자와 함께 사역하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또 안 믿는 친구에게 영향력도 더 많다. ISC 같은 외국 유학생 전문 사역단체나, 다른 캠퍼스 사역 단체 (InterVarsity, CCC, Navi)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운동모임에 안 믿는 외국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운동도 하고, 식사도 하고 하면서 친구가 되는 것도 좋다. 또 불고기나 비빔밥 등은 거의 누구나 좋아하는 것 같으니, 이것을 대접하면서 집에도 초대하고, 그렇게 친구가 되면 된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난다면, 그는 그것을 맡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면 믿음을 강요하지 말고, 성심껏 대답해주고, 교회나 성경공부 모임에 초대하면 좋다. 한국 교회 중 영어예배가 있는 곳은 친구들을 교회에 초대하고, 교회차원에서 외국유학생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금상첨화겠다.









박찬영
이화여대에서 영어영문(학사)을 공부하였고, 아리조나 주립대(ASU)에서 TESOL 석사를 마치고, 현재 언어 교육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International Students Club 학생 리더로 섬기고 있다.

[주명수] 양심적 병역거부

법과 복음


양심적 병역거부


최근 특정종교인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의 당부문제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KNCC에서 개최한 종교.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관련 토론회에서 찬반양론의 열띤공방이 벌어졌다고 한다. 특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이다보니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여기는 기성교회에서 이를 반대하면 합리적인 연구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쳐질 우려도 있다.


주로 기독교계 인사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도외시하고 이를 빙자한 병역기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특히 이단을 비호하고 양성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어 막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여호와의 증인교리를 반박하면서 국가를 마귀로 보고 병역을 포함, 수혈과 학업조차 거부하는 교리에 협조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경우 이는 병역 거부의 기피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에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되지 아니한 나라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종교간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을 따르는 소수자의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공론화 될 수 조차도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닫혀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그 주장 자체가 터부시 될 정도의 폐쇠된 시대에 우리가 살았던 것을 고려하여 보면,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고 자유롭게 찬.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되어 있고 또 그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어 필자가 어느 편을 든다하더라도 양편의 무게는 그리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어느 편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도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문제점들을 짚어 보는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는 우리 헌법상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 19조에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는 내면적인 사상과 양심을 외부에 표현하도록 강제되지 아니할 자유와 자기의 사상 및 양심에 반하여 어떤 행위를 강제 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와 함께 인간내심의 자유로서 정신적 자유의 근본으로 인정된다. 이 양심의 자유에는 양심의 형성의 자유와 양심의 유지의 자유가 포함된다. 예컨데, 국가가 어떤 특정한 사상과 도덕만의 홍보에 노력한다면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강제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로운 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이는 양심의 형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유지의 자유에는 어떤 사상 및 양심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는데 만약 직접적으로 양심을 표명하도록 강제하는 것도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충성선서나 십자가 밟기등 행위를 통해 내면의 양심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행위도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당하지 않는 자유도 이 침묵의 자유에 포함이 된다.


바로 우리의 주제인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이 침묵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심의 양심이 형성되어 있고 만약 그들에게 법으로 병역의무를 지운다면 총을 드는 행위는 필수적이 되고 바로 이 법으로 부과된 의무행위가 바로 자신들의 침묵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서 특히 양심형성이 진실이냐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는 이미 법원의 도마위에 올라온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1969.7경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신도들의 양심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행위는 응당 병역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판시하면서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었다. 이제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종전 결정과 반드시 함께 갈 필요는 없으므로 이제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 보아야한다. 대법원에서 합헌결정을 한 것을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으로 결정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