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기] 저는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합니다

행복한 교회생활


저는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재계의 거성이었던 이병철 회장의 성공비결은 사람을 잘 골라 쓰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이 회장은 사원을 뽑을 때에 아무리 말단 사원이라도 반드시 자신이 면접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필요한 사람을 골라 쓰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는 치유 공동체(healing community)인 동시에 사명 공동체(mission community)입니다. 치유 공동체이기 때문에 누구나 수용되고 용납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사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역자는 훈련되고 선별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명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서는 개인 하나 하나가 자기 사역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팀을 형성해서 일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사역자로서 요구되는 영적 자질을 이곳 저곳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행 6:1-6; 딤전 3:1-13; 딤후 2:22-26 등). 팀 사역을 하기 위하여서는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과 평화를 이룬 사람이어야 합니다.


분노나, 마음의 상처나, 열등의식으로 인하여 자신과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쉽게 섭섭해하고 쉽게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이 중책을 맡으면 교회가 성장을 멈추든지 깨집니다. 치유 받지 못한 자신의 상처로 인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무리 유능하고, 받은 은사가 많다 할지라도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은 목회자이거나 평신도이거나 상관없이 같이 일하는 것을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평화를 이룰 때까지 기다립니다.


둘째는 남과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팀이 되기 위하여서는 협조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이 있고, 받은 은사가 많고, 성령 충만하다 할지라도 혼자서 밖에 일을 못한다면 팀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또,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힘든 사람들도 어렵습니다. 이런 분들은 작은 사역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도자가 되어서 큰 사역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약화시키고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리더십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창현] 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2)

코스탄의 소리


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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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1)


2.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라!: I can do it? No, only God can do it!


39장에서 하나님만을 고지로 삼고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요셉의 인생관을 보여준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제 다시 40장과 41장에 이르러 또 다른 요셉의 특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창 40:8)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창 41:16 표준새번역)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부함으로서 감옥에 갇히게 된 요셉은 그 곳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관원장'(chief cupbearer)과 ‘떡 굽는 관원장'(chief baker)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된다.(40장) 그리고 그 계기로 인해 나중에는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되고, 결국 왕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함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41장)


요셉의 이러한 극적인 ‘인간승리’ 스토리(story)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점은 꿈을 해석할 때마다 드러내는 그의 변함없는 고백이다. 마치 39장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전환된 삶을 의도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내듯이, 40장과 41장에서는 요셉이 꿈을 해석할 때마다 드러내는 그의 고백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삶 속에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임을 이야기상의 중요한 주제로 반복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우리가 이 이야기(narrative)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그 당시 애굽의 사회적 배경은, 바로 해몽이 당시의 종교적 과학적 토대 속에서 엄연하게 인정받는 하나의 학문분야였다는 점이다. 이는 창세기 41장 8절에서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하고자 바로왕이 맨 처음 부른자들이 바로 술객(magician)과 박사(wise men)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 당시 고대 문명에서 술객과 박사라 함이 단순히 현대의 서커스 단원이나 동네 마을의 지혜로운 촌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 성경의 여러 예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단 1:4)중 일부였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바벨론 왕궁에서의 3년 교육 후,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magicians)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 1:20)는 말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을 옆에서 모시는 술객과 박수라 함은 그 당시의 지식인층 중에서도 최상의 엘리트(elite)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노예 출신으로서 이런 위대한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는 해몽(解夢)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치 현대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버금갈만한 이 기발한 이론(?)을 모든 왕궁의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발표하기도 전에, 그는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에게 달린,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고 길었던 고난과 시련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야 온 세상 앞에서 기세 등등하게 자신의 이름을 떨치며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그는 이런 김 빠지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고백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삶 속에서 철저하게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임을, 누가 그의 삶을 궁극적으로 주관하고 있는지를 온전하게 인식한 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고지론’을 바라보면서 갖게 되는 두번째 염려는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 이후 이에 영향을 받은 비슷한 부류의 고지론 설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서 ‘고지론’을 설파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에 더 집중하는 “You can do it!”식의 성공 인생적 ‘고지론’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부연설명은 지면의 한계 상 이곳에서 자세히 나누지는 못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어 필자는 90년대 후반 전병욱 목사님의 성공 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청년 인생론이나, 예수 전도단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의 책들: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자들이 되라’ ‘Never Never Never Give Up’ 속에서 이런 경향들을 엿보게 된다) 다시 말해 도대체 누가 이 고지 점령의 궁극적인 주체인지, 또 고지점령의 승패와 의미가 누구의 주권 하에 달린 문제인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면서 오히려 “올라가자!” “세상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공부하자!”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과연 우리네 인생이 그러한가? 내가 아무리 난리를 치고 악을 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인생관이다. 그리고 내가 막상 땀을 흘리고 용을 써서 그 무엇을 성취했다 해도 사실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 우리들이 아닌가? 야곱의 경우처럼 아무리 자신 스스로가 높은 ‘고지’에 올라가고 싶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난리를 친다해도, 하나님의 뜻이 나를 세례 요한과 같이 그냥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쓰기 원하신다면 그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반대로 모세처럼(출 3, 4장) 아무리 스스로는 지도자적인 고지에 올라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에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면 우린 그 고지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으로 알고 올라가야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8)


하나님의 주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고지 점령자들에게는 분명한 삶의 원칙(principal)이 있다. 그들은 고지를 올라가다가 행여나 감당 못할 시련이나 핍박을 당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고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반드시 정복될 고지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또한 애굽에 와 힘든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또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은혜를 잊어버렸다가 2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을 기억했어도, 단 한번의 원망과 낙심도 없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인내하며 바라본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고 담담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의지하는 고지 점령자들은 고지에 올라간 후 행여나 자만하거나 과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고지가 자신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열정으로 점령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요셉은 자신을 ‘바로의 아비로 삼고 온 집과 나라의 주인과 치리자’로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의 노력이나 실력이 아닌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한다.


요셉의 인생관은 우리에게 ‘고지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각각의 ‘고지’를 소명으로 허락하시고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하기에 우린 고지에 올라간 후 교만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남들이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변두리(?) 고지나 아예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미답지’적 고지에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동네의 어느 고지에 소명을 받았든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삶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인도하는지, 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고 부족한 자인지를 온전하게 인정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고지 점령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주권적인 소명이 중요하지, 자신이 오를 고지가 얼마나 높고 또 얼마나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우린 사도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버리지 않고 복음전파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한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먼저는 그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그 고달프고 힘든 이방인 전도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소명으로 알고 자신의 생애를 바친 그의 인생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성실함과 거룩함으로 삶의 예배를 드려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이 곧 예배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9:3, 6a)
“전옥(典獄)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창 39:22-23a)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보증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總理)하게 하노라 하고” (창 41:40-41)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 꾸준하게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자였다는 점이다. 과연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이와 같은 인복(人福)을 누리는 자가 또 어디에 있었던가? 물론 그는 이에 못지 않은 가족적 아픔을 경험하고 또 억울한 누명까지 썼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도 그는 놀라우리만큼 가는 곳곳, 만나는 사람들의 끔찍한(?) 사랑과 신뢰를 받는다. 마치 어느 누구라도 그를 처음 만나게 되면 그의 첫인상과 하는 행동에 홀딱 반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고위 공무원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든, 감옥에 갇히게 되든, 아니 한 나라의 통수권자 앞에 서게 되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 중책을 맡게 되는 재주(?)를 보여준다.


물론 성경은 요셉의 이런 성공적인 인간관계 뒤편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변함없는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있다.(창 39:3, 21, 41:38, 39) 그러나 우린 간단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라는 어찌 보면 추상적(abstractive)일 수 있는 성경적 언어에 갇혀 요셉의 삶을 분석, 묵상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이 영적인 표현(spiritual expression)에 그냥 만족해서, 그 뒤에 감추어져 있을 요셉의 실제적인 삶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도대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의 일상생활을 통해 표출되었기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또한 그에게 끓임 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이게 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존재론(being)적인 것이었다. 그건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의 실체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에서 꾸준하게 의식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비록 직접적인 성경상의 언급은 없지만 나는 창세기 37에서 50장에 이르는(38장 제외) 요셉의 생애를 통해 그가 성실함과 거룩함을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곧 그는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론적 삶이라는 인식아래 자신의 삶을 성실함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나 감옥생활을 하던, 아니면 대국을 치리하는 총리가 되던 그는 열과 성의를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일 솜씨를 보고 경험한 자마다 결국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고 또한 맡긴 일은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그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만 일한다고 해서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성실한 면과 더불어 거룩한 면이 있었다. 주인의 부인이 아무리 자신을 유혹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아무리 자신이 대국의 총리요 또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자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명예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였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기에, 하나님이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에, 결코 불성실하거나 부정직한 삶의 모습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해석 외에는 그가 누린 인간관계의 축복을 현실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보인 전옥(典獄)의 호의나, 40장 4절에서 감옥에 갇히게 된 왕의 두 관원장을 시중들게 한 시위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변함없이 신뢰하고 아끼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 세상에 과연 어느 주인이 자신의 부인을 진정 능욕하고자 한 종을 그 자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 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감옥의 책임자가 그를 신임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아니 그것도 모자라 왕을 모셨던 죄수 관원들을 특별히 시중들게 하는 일을 맡기겠는가? 요셉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또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런 이중적이고 거짓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결코 인간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 9)


성경의 이야기는 일관되게 요셉에게 허락된 인간관계의 축복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삶을 통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와 이웃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생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요셉이 매일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듯(골 3:23) 열심과 진실함으로 감당했다는 말이다. 마치 이는 하나님을 열심히 신앙하며 매일 매일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가 자신의 가정을 소홀히 여기고 학교와 직장에서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곧 하나님을 올바르게 신앙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과 신앙이 괴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고지론’ 설교가 지난 10여년간 한국교회의 젊은세대에 큰 자극과 도전을 주었던 이유는 바로 이 ‘삶과 신앙의 괴리’를 개혁신학(reformation theology)적 관점에서 질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영적인 언어에 갇혀 교회에서는 다들 은혜와 감격에 휩싸여 세상을 뒤엎을 듯 흥겨워 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무기력하고 이중적인 삶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기성세대와 젊은세대들에게, “삶(학업)이 곧 예배요. 우리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영적싸움의 현장이다”라는 메시지(message)는 그들의 가슴을 뒤흔들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원론적(dualistic)인 사고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는 강조하면서도, 막상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한국교회의 병폐 속에 ‘고지론’ 설교는 삶의 현장에서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이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관점이요 개혁신앙적인 관점이다. 단지 앞에서 반론한 것처럼 이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개혁신앙의 인생관이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의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무리하게 선동될 때, 일반 세속사회의 “I can do it!”식의 ‘성공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는 변형된 기복주의 신앙과 허탈감을 기독 청년들에게 안겨 줄 수 있다는 염려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 이제 ‘고지론’ 설교는 단순히 영적 매너리즘(spiritual mannerism)에 빠져 있는 기독 청년들에게 ‘모든 직업이 성직’이며 ‘삶이 곧 예배’라는 진취적이고 성실한 ‘기독 세계관’을 심어주는데 멈추지 말고, 이 길을 걸어갈 때 쉽게 봉착할 수 있는 사단의 유혹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경고해야 한다. 고지를 올라가며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의 유혹과 올라간 후에 생기는 ‘안주’의 유혹, 그리고 요셉의 경우와 같은 실제적인 성적, 물질적 유혹에 대해 경고하면서 고지 점령자의 ‘거룩한 삶’을 선포해야 한다. 이는 ‘고지론’ 자체가 가진 역동성과 영향력에 못지 않게, 막상 고지 점령자가 믿는 자의 ‘거룩함’을 훼손시킬 경우 세상에 미치는 그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는 현실 속에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분이다. 비록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하고 대처해 나갔지만, 사단의 이러한 공격은 쉬지 않고 고지를 점령해 가는 자들의 삶을 뒤흔들 것이다.


요셉의 생애를 정리하며…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 (감리교 수장자리를 포기하며, 조지 휫필드)


“정치적인 편의라는 문제에 있어서 내게는 시기와 때를 고려할 만한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밀어붙이기에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다른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우리의 노력을 보류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같이 실제적인 범죄 행위가 문제 될 경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없다.” (1793년 노예 무역제도 폐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윌리암 윌버포스)


“주저함 없는 헌신으로 내 자신과 나의 삶, 나의 친구들, 내 모든 것들을 제단 앞에 내어놓을 때, 나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며 그 확신이 나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울 때에 경험했던 깊은 엄숙함을 나는 익히 기억하고 있다… 나의 헌신을 어떤 봉사를 위해 받으셨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삶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엄숙한 의식이 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 의식은 그 이후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한 1849년을 회상하며, 허드슨 테일러)


우리가 익히 아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구두수선공 윌리암 케리, 하나님 앞에서 녹슨 나사가 될 바에는 닳아 없어지는 나사가 되겠다던 지칠 줄 모르던 옥외설교가 조지 휫필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인기와 야망을 버리고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정치가 윌리암 윌버포스, 기도의 사람이자 영국 고아들의 아버지였던 조지 뮬러, 중국 내륙 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 등등. 이 중에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명성과 이름을 ‘고지’로 삼는 유혹과,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망발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을 게으름과 거짓으로 가득 채우는 신앙인의 위선을 보였던가? 그들은 비록 부족했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위대한 뜻을 그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 나갔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소명으로 준 ‘고지’를 정복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자신들이 올라갈 고지의 높이나 명성 때문에 허황된 ‘망상’이나 독한 ‘야망’을 품고 고지를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고지’이자 ‘비전’이며, 또한 그분과 동행하는 존재론적인 삶이 최고의 가치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명’을 ‘고지’로 알고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높고 낮은, 중요하거나 안 중요한 고지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만이 우선될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영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구별된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삶 속에는 ‘성실’과 ‘거룩’의 향이 잔잔하게 배여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게으른 삶의 예배를,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면서 죄와 거짓으로 더럽혀진 삶을 그분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고지 점령자들이 되어야 한다!


Epilogue: 나는 수정과 보완만을 주장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고지론’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도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를 통해 나를 도전하셨고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하기에 더욱 ‘고지론’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르게 선포되고 전달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고지론’을 뒤집어 엎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고지론’의 수정과 보완을 제안한다. 국어사전에 보니 ‘수정’은 그 뜻이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고 ‘보완’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와있다. 나는 딱 이 정도 만을 원하다. ‘고지론’의 의미가 회중들에게 바르게 전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해의 소지들을 바로잡아 고치고, 또 설명이 미비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보충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 ‘고지론’이 온전하게 세워져 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단순히 ‘고지론’ 그 자체를 향한 외침이기 보다 오히려 ‘고지론’을 받아드리는 청중들을 향한 외침의 의미가 더 크다. 곧 ‘고지론’을 인위적으로 해석함으로서 행여나 성경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오도하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본 원고는 뉴욕 맨하탄 헌터 College의 K.C.F.(Korean Christian Fellowship) 모임과 로체스터 연합 장로교회 청년부 수련회(2002년 4월 5-6일) 세미나 등을 통해 나누어졌던 생각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주님의 교회’를 개척, 사역하시고 몇 년 전 스위스에 교단(장로교 통합) 선교사로 헌신하시다가 귀국하신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비전의 사람'(장신대 신학대학원 사경회: 2000년 3월 29일-31)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은 원고임을 밝혀 둡니다.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사랑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사랑


‘사랑’이라는 말처럼 남용되고 오용되는 말이 없다. 그 혼란스러운 사용의 결과로,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숭고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그림들을 머리에 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처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것이 없기에 그 옛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희랍인들은 현대인들이 그저 뭉뚱그려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개념을 굳이 여러 가지로 구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물들의 본능적인 행위에서도 볼 수 있는, 부모의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쓰는 동사, stergo(성경에 쓰이지 않음), 남녀간의 주로 이기적이고도 육체적인 감정을 말하는 erao (성경에 쓰이지 않음), 지식에 대한 열망이나 친구간의 우정, 형제간의 친밀감을 말하는 phileo (성경에 24번 등장), 그리고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자기 희생적이며 책임감을 동반하는 agapao (성경에 125번 등장), 이렇게 희랍인들은 다른 종류의 사랑들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눈 높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예로 등장하는 본문, 요한 복음 21장에서 이 두 가지 다른 동사, agapao와 phileo의 개념 차이를 더 확실히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 첫 두 번은 agapao로 물으셨고 베드로가 계속 수준 낮은 사랑, phileo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두 번 대답했을 때에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께서는 agapao대신 phileo의 동사를 써서 다시 물으신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 현대인들은 이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굳이 구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기 희생적이거나 책임감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미 현대인들의 삶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사랑의 개념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온통 말초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야기나 노래 따위들로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보면 동물의 원초적인 보호본능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그 이야기들을 감동으로 채색해버린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어린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의 이야기라든지, 가난한 주인을 위해 금조각들을 날라주다가 지쳐서 죽어버린 제비라든지…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이 험한 인간세상에서 사랑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동물들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그 사랑을 보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하는 인간 스스로의 절망적인 절규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혼돈스러운 인식은 비단 세상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가운데에서도 만연되어있다. 우리가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산다고 생각하고, 조금 선하게 그리고 자기만족의 감동을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사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해주시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이다. 한 목자가 백 마리의 양을 넓은 들판에서 먹이다가 해질녘에 자기 양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매우 당황하게 된다. 자기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새끼 양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이다.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던 정말 소중한 새끼 양 하나가 사라졌다! 너무나도 자식같이 소중한 양이기에 앞이 캄캄해지면서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냥 들에 팽개쳐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험한 계곡이나 산지를 뛰어다닌다. 사랑하는 새끼 양에 대한 거대한 상실감은 그 목자가 다른 아홉 마리의, 역시 소중한 양들을 그냥 팽개쳐버리는 그 비합리적인 행동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감동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들, 특히 나에게 주신 육신의 자식들이나 혹은 말씀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인 “자녀”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비록 때로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내가 이들을 잘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나의 이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고 이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수년 전, 나는 내 아들이 한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어느 밤길에서 이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후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나와 내 아내는 정신없이 헤매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녔다.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를 마치 팽개치는 심정으로 어느 누구에게 맡기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온 마을을 헤매며 다녔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아이를 다시 찾았다! 이 잃은 양의 비유를 떠올리며,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본문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한 구절의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What man among you, if he has a hundred sheep and lost one of them, does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open pasture and go after the one which is lost until he finds it?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 그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얼어붙은 가슴을 가진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아니, 가슴에 주님의 사랑이 없는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지극히 본능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사람임을 말씀 속에서 깨달았다. 그 수많은, 자식을 잃어버리고, 그 상실감으로 울부짖는 부모들을 향해 무관심하게 살아왔지만 내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고 헤매는 나의 이기적인 사랑…


두 번째 비유에서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비록 자식과 같이, 목숨같이 소중한 새끼 양은 아닐지라도 여인의 생명을 건 명예와도 같은, 정말 소중한 열 드라크마중의 하나를 찾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온 집안을 쓸고 닦은 후에, 혼신의 노력 후에 찾아진, 그 소중한 한 드라크마를 들고는 기뻐 뛰며 즐거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주님은 분명 우리가 이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 일이야말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정말 귀중한 일이다.


그러나 세 번 째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는 앞의 두 비유에서 느낄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먼저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기쁨이며 자랑인 두 아들 중 둘째가 그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자기 재산의 분배를 찾기 위해 찾아온 아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아비는 그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였다. 그 아들은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내 재산을 좀 빨리 갖고 싶은데 당신은 왜 이 나이가 들도록 아직까지 살아있는 지 모르겠어…” 이 둘째 아들의 요청을 듣고는, 아버지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재산을 받은 그 둘째는 재빨리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나버린다. 사실 인간이란 본래 이렇게, 나를 창조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죽이고 내 자신만을 위한 욕심으로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 인간의 실존이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배반자이며 그러므로 소중히 여김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비유는 계속, 파멸의 길로 들어서서 추락해 가는 아들과 그 배반자이며 살인자인 아들이 그래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가 그 돌아온 아들을 다시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죄인과 세리들, 그리고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이었다.


소중함의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으신 아가페의 사랑,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고 그리고 나도 이 사랑의 사람의 되려고 몸부림치며 살고있는가? 십자가에서 아직도 주님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몸을 아낌없이 내 주시고 고난 당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나도 그 사랑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열망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내 꿈틀거리는 자아의 자존심과 이기적인 모습에 날마다 좌절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야 쓰러지지 않는다.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해야 살 수 있다. 내가 삶 속에서 사랑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나의 본능적이며 감상적인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자! 나의 마음을 찢는,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감동적인 사랑을 부을 수 있는 자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자! 나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가 죽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고백하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자아를 죽이는 순종을 통하여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자! 전도자는 삶을 섬기는 사랑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의 섬기는 사랑으로 세상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십자가 뒤에 숨어야 한다. 주님의 그 사랑만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

[안종혁]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니 말라”(수 23:5-6).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는 칼럼을 본회로 끝맺고자 한다. 특별히 미국이나 타국에 이민을 고려하며 고민하고 있는 유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썼던 칼럼이었기에, 고국에 돌아가서 직장을 얻길 원하거나 그래야만 되는 유학생들에게는 다소 공격적이요 이해하기 힘든 글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생들은 고국을 떠나 타국의 문화속에 살면서, 타국에서 자신과 고국과 세계를 바라볼수 있는 눈이 열린 사람들이다. 자신의 밖에서 자신을 보길 원하며 또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유학생이 보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향한 시각과 사고의 폭은 필연적으로 넓고 깊어야 할 것이다. 미국에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들이 크리스천으로서, 미국 땅에서 어떻게 삶과 예배의 균형을 유지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해 썼던 수많은 논제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들에게 더 절실히 필요한 논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정직하고, 성결하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Integrity를 갖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기로 결단하라”는 촉구는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보다는, 도리어 고국에 돌아가는 유학생들에게 더욱 간절히 부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강력으로 무너뜨려야할 여리고성들은 미국보다는 우리의 고국땅에 더 많은 것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평양을 건너서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더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건너야 될 요단강 건너기가 될 수도 있겠다.


다시 여호수아서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자. 이민자의 땅이 저들과 저들의 자손이 진정으로 차지하는 땅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나누어 보자.


아이성은 정복되었다. 거의 모든 가나안 지방을 결국 정복되게 된다. 정복이 완료된 후에, 요단의 서편과 동편에 걸쳐서 가나안 지경을 12지파에게 분배하며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한다 (수13-19장).


저들이 기업으로 분배된 땅을 차지하며, 실제로 저들의 땅이 되게하기까지는 감내해야 될 책임과 지켜야될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을 잡고 생업의 터전을 마련한 유학생 크리스천들은, 이제 막 12지파에게 분배되었던 것과 같은 기업을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그 기업의 약속이 진정으로 유학생 이민자의 것이 되어서, 그 땅을 차지하고 그 자손들이 번성하기까지는 꼭 지키고 따라야 할 약속의 말씀이 있다. 즉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24:15)는 가나안 땅의 이민자였던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백이 유학생 이민자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브온 거민에게 속지말라


기브온 거민이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과 화친의 언약을 맺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여호와께 묻지 않고, 그들과 화친의 언약을 맺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것으로 인하여, 가나안 족속의 완전정복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흠집을 내게된다. 뿐만아니라, 이 실수에 기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먼 훗날에 큰화를 입게된다. 다윗왕 시대에 까닭없이 삼년간의 기근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사울이 기브온과의 언약을 어기고 기브온 사람을 죽인 것을 인함이라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14).


새로운 직장을 미국에서 얻게되고, 열심히 일하여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이민생활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이민생활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민생활을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나서, 이민 생활에 적응할 때쯤이면, 자칫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거민에게 속은 것같은 실수를 저지르기가 쉽다. 항상 화친하자고 유혹하는 물질, 명예, 학문과 교만이라는 기브온 거민의 속임수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이 속임수를 바로 분별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분별하고, 항상 하나님께 묻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여호와께 묻고 새로운 진로를 결정하며 나아가게 되면, 때론 더딘 것 같으나 가장 믿을만한 이민길이 된다. 쉬지말고 기도하며, 항상 하나님께 묻고 나아가는 길이 가장 쉽고 탄탄한 이민길이다.


영주권 취득 – 첫 번째 기업(Inheritance)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남아있긴하지만, 정복한 땅들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주어 이제 저들의 기업이 되게하라고 한다 (수13-19장). 유학생 이민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야할 첫 번째 기업은 취업에 이어서 미국의 영주권 취득이 될 것이다.


대학이나 연구소, 또는 기업에서 tenure position을 얻었든지 또 임시직을 얻었든지간에, 유학생 이민자가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미국내에서 자신의 거주신분을 확정시키는 일이다. 결국 미국 영주권은 이민자로 살기 위해서 얻어야 할 첫 번째 기업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미국이민을 고려하며, 몇 년간의 임시직이나 방문고용직에 취업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가장 우선적으로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유학생 출신의 박사후 연구생이나 임시직 취업자들은 취업이 시작되면 본인의 거주신분 조정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연구 못지않게 자신들의 영주권 취득에 즉각 골몰하는 중국 및 인도계 유학생들의 지혜를 한국 유학생 이민자는 꼭 배워야 될 것이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중국 및 인도계 유학생의 이민 개척정신이 대학생 수준이라면, 한국유학생은 이제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대체로 영주권 신청이나, 시민권 신청은 이민전문 변호사를 통하여 하는 것이 통례인데(자신이 직접 할 수도 있음), 능력있고 신뢰성있는 이민변호사의 선택은 무척 중요하다. 제한된 시간과 싸우며, 거주 신분조정을 확정하고자 할 때, 책임감있고 신뢰성있는 이민변호사의 조언과 도움과 서류작성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학생활중에 전공한 전공분야의 취업을 통하여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긴 하지만, 다른 수많은 합법적인 방법이 있음을 숙지하고, 이민 변호사와 상담하면 좋을 것이다. 만일 학위취득 후에 미국 이민과 해외취업에 뜻이 있다면, 유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좀더 적극적으로 영주권 취득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새로운 직업관


우리의 고국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관념적인 선비주의와 권위적인 관료주의가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본다. 미국에 수년간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한 한국유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전공분야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한국유학생들은 고국이나 미국에서 대학교수의 직업을 얻기를 원하는 듯싶다. 물론 가르치고, 연구하고, 창의적으로 학생을 지도하길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학교수는 어디서건 권장할 만한 직업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미국에서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모든 전문직 종사자에게 인기있는 직업이거나 선망이 되는 수입 좋은 직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대학교수직을 얻기가 쉽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학교수나 전문연구직은 도리어 개인의 적성과 개성에 따라 선택되어야 할 직업이라 생각된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기 원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직업관에 관한 새로운 의식구조와 인식의 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대학교수직이나 전문연구직보다 더 좋은 직업과 기회가 즐비한 미국에서, 수입도 낮고, 일도 힘든 대학교수가 선망이 될 이유는 별로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능한 직업의 다양성을 적극 고려해야 될 것이다. 교수나 연구직 말고도, 수입도 좋고, 평생 자기계발도 할 수 있는 전문직이 얼마든지 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고국에서 굳어진 전통적인 직업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물론 고국에서 직업을 찾는 사람도, 관념적인 선비정신과 권위적인 관료주의적 직업관으로는 이제 세계속에서 경쟁하는 한국인으로 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평생에 보장된 안정된 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한달에도 몇번이고 기업을 통합하고 쪼개는 것이 다국적 미국기업들의 실상이다. 기업을 위한 고용인의 기여도와 분야에 관계없이, 미국의 전문직 종사자의 60%가 기업의 통폐합 때문에 해고를 당하거나 타의적인 이직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고자하는 거의 대부분의 유학생 이민자들도 몇번의 해고나 타의적 이직을 꼭 경험하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직업윤리가 이민자들을 압박해 온다면, 이를 대처하며, 뛰어넘고, 새롭게 적응하고자하는 정신력을 갖는 자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해고사태도 많고, 상응하는 재취업의 기회도 많다. 따라서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미국에서 박사보다 더 좋은 석사학위


내가 이미 박사학위 소지자요 또 대학의 현직교수인 까닭에, 논란의 여지가 있긴하지만, 미국에 유학하는 거의 모든 한국유학생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히 미국에 취업이나 이민을 하고자하는 유학생들은 석사학위 취득 후에, 미국에서의 더 많은 취업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일이다. 박사학위 수학능력과 자질은 논외로 하더라도,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시간도 오래걸릴 뿐더러, 이에 상응하여 학위취득 후에 기득권자가 되던 시대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더 이상 존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간에 공급과 수요의 균형적인 원리를 깨뜨리기는 쉽지 않다. 가정과 사회에 책임있는 크리스천 전문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게될 전문직업의 안정적인 수요와 공급의 균형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수년간 부모와 고국에서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받고, 힘든 유학생활을 감내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한 많은 유학생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전문성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가슴 아픈 일이다. 최근 보고된 바에 의하면, 많은 해외 학위취득자들이 고국에서 전문직업을 얻지 못하고 택시운전자들의 직업을 빼앗고 있다고 하니, 이는 결코 생산적인 해외유학 투자라고 볼 수 없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곧 미국직장에 취업을 하는 것은 전공분야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여러면에서 장점이 있다. 특별히, 수년이 더 걸리기는 박사학위 과정을 고려한다면, 석사학위 취득후 취업은 궁극적으로 박사학위 취득자와 동등하거나 아니면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자 한다면, 박사학위보다 석사학위로 더 취업하기 좋은 분야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직장을 얻고자하는 경우, 석사학위 취득 후의 취업은 다음과 같은 여러장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권장할 만한 것이다.


첫째, 미국에서는 석사학위 취득자가 박사학위 취득자보다 취업이 쉽고 기회가 많다는 점이다. 박사학위 취득자는 대학교수나 회사나 연방정부의 제한된 연구직에만 고용이 필요하지만, 석사학위 취득자는 비전문적이든 연구직이든 더 많은 고용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2년이라는 짧은 수학기간 때문에 부모님의 경제부담도 줄이고, 경제자립을 속히 이룰 수 있다. 취업후 몇 년간 일하며 경제자립과 실제적인 경험을 한후에, 본인이 원하면 부모의 도움없이 박사학위 수학을 계속 할 수도 있다.


셋째, 기업의 창업(start-up company)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수 있다. 몇 년의 미국 직장생활 후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곧 창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마도 박사학위를 취득할 만큼의 시간을 투자한다면, 창업한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이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특별히 미국에 정착한 한국유학생 출신 이민자는 자신이 창업하고, 기업가로 성공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중국계 및 인도계 유학생 출신 이민자와 비교해 볼 때, 한국 유학생 출신 이민자의 창업은 너무도 미미한 편이다. 미국에 정착하고자하는 수많은 한국계 유학생 출신 이민자들이 이제 눈을 돌려, 창업에 새롭게 도전하였으면 한다. 좋은 아이디어와 열정만 있으면, 수많은 정부지원 무료 창업자금이 널려 있다는 것에 눈을 뜨기 바란다. 유학생 이민자들이 이제 창업을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라고 권면하고 싶다. 어느 이민 사회이든 경제를 장악함이 없이는 결코 바른 주인행세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계 미국이민자 협회(ACO)에서 주최하는 Chinese American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Korean American의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더 많은 프로그램들을 지원하는 길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부터는 많은 유학생 출신 이민자와 기업가들이 한국유학생과 Korean American 젊은 세대에 적극 투자하여, 하나님 나라와 이민세대를 위한 큰 꿈을 키워주는 많은 지원 프로그램들을 개발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네가 개척하라


각 지파에 분배한 땅을 소유하는 것은, 그저 가나안 지방의 지도에 선을 그어서 지파의 기업이 되게하는 것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계속적으로 그 곳 땅에 사는 거민들을 쫒아내며, 자기분파의 땅이 되도록 개척하고 일구어야 했던 것이다. 예를들면, 에브라임 산지를 기업으로 받은 요셉의 족속은 자신들이 큰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땅을 분배받았다고 여호수아에게 항의를 한 듯하다. 이에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 스스로 개척하라”(수17:15)고 책망하면서, “그 산지가 네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한자라도 네가 능히 그를 좇아내리라”(수17:18)고 권면하고 있다. 그저 기업으로 받았다고 저들의 땅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지키고, 개척하여 그 지경을 넓혀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약속 가운데에, 미국 이민자로서 생업의 터전을 얻은 유학생 이민자들은 이제 막 미국 땅에서 기업을 얻은 셈이다. 기업의 약속이 저절로 요셉지파의 분깃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유학생 이민자는 삼림이라도 올라가 스스로 개척하여, 하나님께 받은 기업이 자신과 후손들을 위한 분깃이 되도록 힘써 개척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의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 주신지 오랜 후에, 이제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은지라, 온 이스라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과 유사들을 불러놓고 그들에게 마지막 부탁의 유언을 남기게 된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한 그 땅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니, 꼭 힘써서 말씀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니 말라고 부탁한다 (수23:1-6). 오직 스스로 조심하여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권면하며, 여호수아는 자신과 자신의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수24:15).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은 후에 미래의 세대를 생각하며 유언과 같은 다짐과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막 가나안 땅에 이민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어느곳이든 이민 1세는 고난의 세대이다. 이민 1세는 수많은 고난을 감내하고서도, 새땅에 태어나는 새로운 세대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소수점이하로 나누어진다는 이민 1세, 1.5세 및 2세간의 세대차이와 의사소통의 간격은 여느 동질문화 속에 늘상 존재하는 그런 세대차이와는 다르다. 나이와 문화와 언어의 3중적인 격변을 단번에 격게되는 이민 세대간의 갈등을, 나는 격변적인 갈등이라고 분류하고 싶다. 이런 격변적인 갈등을 넘어서,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여호수아처럼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고 보여주고 또 가르칠 것인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염려하였던 것처럼, 미국에서 어떻게 우리의 자손들이 믿음을 지켜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게 할 것인가? 이는 한인 이민자들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다. 모이면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여호와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한인이민 1세들의 굳건한 믿음의 유산을 미래의 세대에 걸쳐 어떻게 전수해 줄 것인가? 지금 우리는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한인 이민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당면하는 수많은 이민자로서의 힘든 삶과 싸우면서도, 어떻게 하면 다가오는 세대의 Korean American 크리스천들이 “오직 여호와만 섬기게” 할 것인지 여호수아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다.


결론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의 유언과 같은 권면과 부탁을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수24:24)라고 다짐한다. 이에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큰돌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워서 “증거의 돌”로 삼는다. 즉 우리 자손들은 만대에 걸쳐 “오직 여호와만 섬기자”는 언약을 하고 이의 증거하기 위해 세운 돌이다.


나는 최근에 청교도들이 미국 이민의 첫발을 내디뎠던 Massachusettes주의 Plymouth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Plymouth에는 미국 이민의 첫발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기념물이 많이 있지만, 특히 “Plymouth Rock”이라는 돌은 대서양을 건넌 첫 이민선인 Mayflower에서 내린 청교도들이 미국대륙에 첫발을 디딘 돌이라고 하여, “1620”년이라고 새겨놓고 저들 선조의 이민사를 기억하고 있다. 별로 크지 않은 돌이지만, 미국 첫 이민을 기념하며, 미국 이민정신의 원류를 기억토록 하는 “증거의 돌”인 셈이다. 물론, 이 Plymouth Rock 자체보다는, 그 돌을 볼 때마다 그 돌에 담겨진 청교도들의 이민 개척정신을 기억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있는 Korean American은 거의 3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제 미국의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느곳에서나 Korean American을 쉽게 만나게 된다. 몇 사람만 모이면,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민족, 위기 앞에서 쉽게 단결하는 민족, 그러면서도 열심히 서로 싸우는 민족- Korean American!. 짧은 미국 이민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능가하는 억척스러움으로 미국에서 번영하는 자랑스런 민족이요, 또 후세대의 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지혜로운 민족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축복받은 민족이다. 그러나, Korean American의 이민사는 그러한 현세적인 성공과 억척스러움만 가지고는 올바르게 쓰여질 수도, 결코 세대를 넘어 지속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Korean American은 다가올 세대와 무엇으로 언약을 삼고, “증거의 돌”을 세울 것이며, 미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진정으로 차지하는 이민사를 쓸것인가? 가나안 땅에 이민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쓴 이민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할 때”에만 바르게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배웠다. 이제 우리는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아주 멀리 수백년 후를 바라보며 온세계를 품에 안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Korean American의 다가올 세대와 하나님 말씀으로 언약을 세우되, “Korean American과 그집들은 여호와만 충심으로 섬기자”라고 증거의 돌 위에 써야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한민족을 세계 각곳에 복음을 들고가는 이민자로 흩으셨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흩어진 한국 이민자를 통하여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실 것이다.

[이일형]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참된 제자란 아주 쉬운 개념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산상수훈의 8복에서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이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형성됩니다. 복의 개념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여건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건들이 주어질때 다음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나열하고 계십니다.


“… the poor in spirit, …those who mourn, …the meek,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the merciful, …the pure in heart, …the peacemakers,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NIV)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태는 일시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나,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 잠시 마음이 겸손해지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과 연결이 될 때,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려 연결될 때, 즉 원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될 때에만 체험되어질 수 있는 상태입니다. 가난할 수 밖에 없고, 또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재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비뚤어진 마음과 왜곡된 세상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입니다. 또 무서운 욕심과 야심 속에서 살고있는 잘못된 사람들의 핍박과 탈취에 선과 정의로 대항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천국의 소유자들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고 바로 복 받은 자들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같이 제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쉬우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 시점에서 제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는 알지만 실천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회피하여 첫 번째 문제로 다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생각 뒤에 숨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단계”에 까지 갈 때에만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실천 없이는 위에서 언급한 8복의 마음상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변화하려면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순종이 이루어 져야 하는데 순종은 곧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운 방법을 택합니다. 즉 제자의 삶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간혹 눈에 띄어도 참된 제자로서 세상에서 굳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만나 볼 수가 없습니다.


실천하는 삶은 각 개인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삶 입니다. 구체적 실천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수 있으나 다음과 같은 2가지 공통점을 항상 내포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즉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일제자 삼는 일 입니다.


1.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능동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마5:13-16). 수동적으로 겁에 질려 악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사랑과 정의로 악을 맞서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혹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를 능동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는, 즉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는 데는 3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ㄱ. 세상의 핍박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와 정직, 순결과 자비를 따라 생활할 때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혹시 이런 우리들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이권에 부딪치게 될 때는 가책 없는 핍박이 가해져 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가 저항을 받은 것도 바로 종교적 문제보다는 이런 세상적 이권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마6:25 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하시지만 결국 우리들을 제자의 삶에서 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세상에서의 “상대적” 생존 문제입니다.


ㄷ. 세상에 대한 욕심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지만 (마6:19-24)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열심히 제자의 길을 가다가도 친구중 누구 하나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뒷걸음질하는 자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제자의 삶을 살려면 위의 세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곧 두려움, 염려, 그리고 욕심 입니다.


2. 제자 삼는 일은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또 제자를 양육하도록 돕는 일 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듯이 우리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제자 삼는 일 보다는 종교적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임무/의무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ㄱ. 참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적 복을 받기 위하여 계명은 지키려고 노력하나 참된 순종은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20)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순종은 자신이 종교행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 행위가 아니고 자기가 예수님처럼 되고 다른 사람도 예수님처럼 되도록 도와주는 삶, 즉 제자 삼는 일 입니다.


ㄴ. 인간 앞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종교적 행위를 합니다. (마6:1-7)에서 언급하고 계신 것처럼 구제, 기도, 금식까지도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행합니다.


ㄷ.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무시하고 (마5:22) 이웃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즉 사람을 “정욕”의 대상으로 봅니다. 악한 자까지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지만 (마5:44) 실질적으로 자신의 이권이 개입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양육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참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종교생활로부터 자유해야 하고, 사람의 평가에서 자유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로 합니다. 제자의 삶은 쉽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마7:14) 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때문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참된 제자, 즉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서 생기게 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