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행복한 교회 생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보통 기도할 때에 듣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를 하고 난 뒤에, 시작할 때의 기도와 끝날 때의 기도가 달라져 있음을 발견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도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육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보통 하나님의 음성은 생각의 형태로 옵니다. 가장 흔한 방법은 기도하는 가운데에 성경 구절이나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사건을 기억 나게 하셔서 당신의 뜻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성경 구절을 통하여서만 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직접 생각을 심어주시기도 합니다. 여기! 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악령이 심어주는 것일까? 이 구별이 힘들어서 아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구별하는 대략적인 가이드 라인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시는 생각은 보통 마음에 “평안”을 가져옵니다. 문제를 갖고 기도할 때에 마음에 평안과 더불어 해결방법이 머리에 떠오르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보아서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은 보통은 “이기적”입니다.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결정은 자신의 생각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습니다.


“악령”이 심어주는 생각은 “격정적”이고 “강박감”을 줍니다. 기도를 중단하고 즉시 일어나서 실행해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을 심어줍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하는 가운데에 갑자기 어떤 이웃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고 즉시 전화를 걸어서 한 마디 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생기면 그 생각은 악령으로부터 왔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 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여러분은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약 3:14-17 표준 새 번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3분, 5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20분 이상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저희 교회는 약 100개의 가정 교회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가정 교회를 맡아 목양하는 평신도 지도자(목자라고 부름)들은 1주일에 나흘 이상 매일 20분 이상씩 기도할 것을 연초마다 서약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좇아 목양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함철훈] 한 순간에 눈과 가슴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eKOSTA 갤러리


한 순간에 눈과 가슴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별들은 말 할 것도 없고 하늘마져 보기 힘든 도시 생활에 묻혀 지내다 <땅 끝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 젊은이들>이란 기획으로 아시아 오지를 취재할 때였습니다. 인도 캘커타 갯벌에서 배로 여섯 시간쁨 갠디스강을 거슬러 오르게 되었습니다.


새벽 한 시 쯤 되었을 까?
썰물로 강 수위가 낮어져 더 이상 배가 나아갈 수 없어 닻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쿵쿵거리며 밤 하늘을 가득 채우던 엔진 소리와, 배 앞 길을 길 게 밝히던 전조등 불빛도 꺼졋습니다. 이제 바람마저 장든 배 앞 갑판에 나 혼자 서 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득한 적막의 시공 속에 나마져 스스로 생소합니다. 까만 하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총총한 별들과 갠디스 강 수면 밑을 꼭 하늘 만한 거리를 두고 반사되는 별 바다 한 가운데 낯선 내가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 동안 나는 빛에 열려 있었습니다.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면 하나는 필름 위에,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심상 위에 그렇게 두 개의 상이 맺혀집니다. 필름 위에 맺혀진 영상은 빛이 차단된 어둠 상자 속처럼 캄캄하지만, 심상에 맺어진 영상은 자유스럽게 나를 위로 합니다.










지붕 위에 쪼그려 앉아 지난 밤에 떨어진 별들을 세고 있는 꼬마와, 그 별들을 주으려 밭으로 나가는 여인들의 사리가 바람에 날려 싱그럽습니다. 그 모두를 담고 있는 밤 하늘은 오늘 밤에도 뿌릴 별들을 위해 빛을 모으고 있습니다.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예배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예배


조지 바나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 소위 베이비부머들이 중년의 나이에 들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이 다시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한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교회들이 첨단 문화적 장비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아져야할 복음의 메시지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왔지만 강단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지만 리더십들은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기독교 인구의 이러한 감소는, 비록 양상은 어느 정도 다를 지 몰라도, 이와 거의 비슷한 이유, 즉 강단에서의 복음선포의 약화와 리더십의 질적 저하로 인해 지금의 한국교회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기독교인구의 감소를 뒤늦게나마 깨닫고 한국교회들은 ‘구도자 품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그 해결의 열쇠인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삶의 갱신보다는 전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예배와 접목시켜보려는 피상적인 해결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미 미국인들의 주류 교회에서는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사용이나 연극과 같은 문화적 시도들을 도입하는 일을 전도의 기본수단으로 하려는, 소위 ‘열린 예배’ 바람이 뒤늦게 불고 있다. 불신자(혹은 구도자)들과의 문화적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의도로 많은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이 ‘열린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열린 예배’는 본래 의도대로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거두어 한국교회들 안에 자리를 잡았다기 보다는 이를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직도 성장의 정체 가운데에서 고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교회들은,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성장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신자가 믿게 되어 새 신자로 등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보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열린 예배’가 본래의 목적인 불신자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앞서 미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지적한 대로, 그 예배 속에 생명력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충실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 혹은 예배를 섬기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전달하는 여러 유형의 메시지 속에 복음의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준비하는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예배의 생명력이 없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 생명력을 인간의 열심과 자의적인 열정으로 창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우에는 ‘개인의 인격을 전격적으로 바꾸신 성령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적으로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열린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그가 어떠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주고 성장시킬 수 있는 교회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사와 제도의 껍데기를 벗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는 그 회복의 탈바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 ‘열린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그 예배의 프로그램을 얼마나 세련되게 만드는 가에 달려있다기보다는 먼저, 그 예배를 준비하고 섬기는 교회가 먼저 ‘열린 교회’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교회가 이렇게 ‘열린 교회’로 거듭나면, 이 ‘열린 교회’의 살아 숨쉬는 복음의 생명력은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연스럽게 넘쳐나, 예배 속에서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러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그 예배가 열린 예배이든 “닫힌 예배”이든 연령과 문화적 배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구도자들은 이 복음의 생명력 앞에 회심하게 되어있다. 예배가 복음전도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건이 되어 그 경배 속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분, 하나님의 임재가 심지어 구도자들에게도 강권적인 은혜로 체험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예배의 일차적 목표는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를 준비하며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예배의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만들어 가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삶이 먼저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 그 삶을 주께 드리는 데에 있다. 이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란 예배에 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포함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예배의 프로그램 속에서 섬기는 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 생명력이 넘쳐나 예배의 모든 순서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흘러 넘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진다. 그러므로 감격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예배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로 나아가는 예배자의 진정한 모습은 다윗의 찬양시, 시편 68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양시는 삶의 충만한 은혜의 경험을 갖고 예배로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을 잘 나타내준다. 이 예배하는 삶, 삶 속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다윗의 생애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윗은 그가 아직 소년 때에, 사울 왕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기까지 적어도 20년을 많은 위험과 환난을 통해 연단을 받았다. 그를 죽이기 위해 맹렬히 추격하던 사울 왕이 죽은 때에 그의 나이는 이미 30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에도 약 7년 동안을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려는 세력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해진 때에 그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헤브론 산지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또한 정해진 때가 되어, 새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게 되었다. 그 때에 그가 이 때의 기쁨과 감격 가운데 노래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찬양시이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그 험난한 세월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있었다. 처음에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격하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자로서 올라가는 다윗은 이미 회중(백성) 가운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며 올라가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법궤가 그들과 함께 들어간다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신실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께서 허물 많았던 다윗 자신과 백성을 지난 20여 년동안 어떻게 인도하시고 존귀케 하셨는가를 감격하는 기쁨이 담겨있는 고백이다.



18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our burden,
The God who is our salvation. Selah.
19 God is to us a God of deliverances;
And to God the Lord belong escapes from death.
24 They have seen Your procession, O God,
The procession of my God, my King, into the sanctuary.
25 The singers went on, the musicians after them,
In the midst of the maidens beating tambourines.
26 Bless God in the congregations,
Even the Lord, you who are of the fountain of Israel


그러므로 다윗과 백성들은 공동체로서 드리는 예배의 처소로 나아가면서 (in His procession) 이미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감격적인 예배가 되느냐 않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된다고 하는 귀한 간증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공동체의 예배의 회복은 나 하나의 삶 속에서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이 감격은 성령님의 폭발적인 능력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순종의 예배를 드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격이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갖고 모이는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에는 반드시 성령님의 폭발적인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회복과 치유와 성결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은혜로 인한 회심이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공동체의 예배갱신을 말하려면 먼저 나의 삶 자체를 돌아보자.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을 예배하는 삶인가를 먼저 돌아보자. 감격적인 예배로의 회복은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로마서 12장에 있는 명령처럼 나의 몸, 나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속한 지역교회, 혹은 공동체의 예배 속에서 감격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나의 예배생활이 회복되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드리자. 그리고 주변의 형제들도 같은 예배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로 서로 서로를 격려하며 섬기자! 강단의 메신저도 이러한 예배생활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가운데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믿음과 인내로서 간구하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12:1)



[팽동국] 상한감정의 치유

eKOSTA 서평


상한감정의 치유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를 주제로 했던 2002년도 KOSTA-USA에서는 선포되는 말씀과 조별모임, 상담 등을 통해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있었다. 특히 인생의 커다란 아픔과 어려움을 경험하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일터의 현장을 통해 들으며 도전을 받아, 우리의 커다란 상처와 아픔들은 작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커다랗게 느껴져서 새로운 소망과 헌신과 다짐을 하며 우리의 자아가 치유되기도 했다.


이번 코스타에서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기도 했고, 우리 영혼의 상처와 아픔들이 치유되고 회복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삶을 장단기로 주님께 헌신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서 말씀에서 다루어진 상처와 아픔과 치유가 전체적이고 일반적이었던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성령님은 각자의 삶에 맞게 조명하셔서 개인 하나 하나의 자아를 치유하셨지만 말이다. 이제 코스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헌신까지 한 우리는 데이빗 씨맨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 책을 통해 여러 상처와 아픔들을 좀더 세분화하여 자기 자신의 문제들을 진단하며, 그 문제에 맞는 치유의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알아가며 계속해서 치유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다.


<상한 감정의 치유>는 기독교 상담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에 사실 대다수의 기독교인이 읽어 봤을 것이다. <좌절된 꿈의 상처>, <탓> 등의 여러 양서를 쓴 데이빗 씨맨즈 목사의 초기 책으로 “명료한 성서적 신학과 심리학의 튼튼한 기초 위에 실제적인 일반 상식이 섞여진 책”이라는 추천을 받았다. 누구에게든지 어떤 모습으로든 있게 마련인 분노와 죄의식, 낮은 자존감과 완전주의, 그리고 우울증과 열등감을 다루고 있으며,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감정적인 아픔의 핵심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줄 뿐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내적 격동과 감정의 상처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20년 간의 목회 사역을 통한 많은 사람들과의 상담 사역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이 책은 많은 실제적인 일화들로 엮어져 있으며 그래서 그 일화에 나온 사람들의 경험이 독자 자신의 경험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은 복잡한 여러 문제를 단순화 시켜서 정확하게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지만, 그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답을 주기보다는, 깊은 사랑과 이해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함께 다가가면서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아픈 상처들이 아물고 치료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또한 깊은 성경의 진리를 바탕으로 하지만, 경건이라는 구실로 책망을 하거나 문제를 단순화시키거나 획일화시키지도 않는다. 구원이 우리의 정서적인 문제들을 즉시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성령충만 하기만 하면 모든 정서적인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며, 성화의 과정으로의 치유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성령님의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켜 준다. 열심있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지만 자주 깊은 회의나 절망상태로 빠져 들거나,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불씨와 같은 부부 간의 갈등문제나 깨어진 인간관계, 또한 자신도 모르게 자녀들에게 깊은 감정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여러 실제적인 경우를 다룬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늘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죄의식을 느끼며 계속해서 목표에 도달하려는 지나친 완전주의자,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지나치게 애쓰다가 쉽게 상처받는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 그래서 결정을 못 내리고 그 핑계거리를 남에게서만 찾으려는 사람들, 이 모든 것과 관련해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성의 문제들.


이 책은 이러한 사안들을 다루면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롬8:26)이 고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우리의 상처난 감정들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알게 해 주며, 그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안해 주고 원리들을 알려 준다. 먼저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고, 어떤 문제이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고, 문제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어떻게 문제의 핵심을 알고 어떻게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성령님께 구하라고 권한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는 첫째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데 있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늘 우리는 서로 상대방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만 요구하게 되어 상대를 용서해 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빚진 사람으로서 죄책감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은 용서할 대상이 있는지를 테스트 할 수 있는 세가지 방법을 제시하며, 빚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끌고 간다. 계속해서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꿈과 이상을 파괴하고, 대인관계를 해치며,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 낮은 자존감의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며, 그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치료를 2장에 걸쳐 다룬다. 이어서 완전주의의 증상들과 그 치료 과정을 보여주며, 우울증에 대한 오류와 진실들을 밝혀주며 그 처리를 알려준다. 그리고 끝으로 치유를 경험했던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상담자들로 부르며 책을 맺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을 흐느끼곤 했다. 책을 읽다가는 더 이상 읽어나갈 수 없어서, 책을 덮고 기도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 내 깊은 감정의 상처들이 치료되어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준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가장 강하고 인상적인 십자가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예수님이 나와 어떻게 개인적인 인격으로서 만나 주시는지도 알게 해 준 책이다.


두껍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면서 가슴 벅찬 감동과 예수님의 사랑의 품 속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코스타를 통해 우리 속에 시작된 치유의 역사가 심화되고 확산되어 미국 각 지역과 캠퍼스 내에 치유된 자아들의 모임이 생기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개인의 치유에서 시작되어 작게는 우리 자신들이 속한 교회와 학교와 직장, 더 나아가 사회와 민족과 조국 위에 회복되어 나가기를 소망한다.

[차문희] 섬기는 기독교사

코스탄의 소리


섬기는 기독교사


글로리아,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때? 많이 힘들지 않아? 요즘 애들이 워낙 말을 안 들어. 정상인 아이들도 그런데, 장애 아이들이야 오죽하겠어? 쯧쯧…. 이렇게 어떤 분들은 혀를 차신다. 사실 이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요즘은 교사의 권위가 몇년 전에 비해서 많이 상실되었다. 교육대학을 지원하는 학생수가 해마다 주는 실태이고 여름방학 동안에 빈 학급의 교사를 채용하느라 교육청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심지어,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교사를 찾지 못한 학급에서는 교육경험이 전혀 없는, 소위 임시교사라 불리는 Substitute 밑에서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교사의 이직률은 해마다 늘고 있고 – 보통 5년에서 7년이 한계라고 한다 –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돈이 비싼 사립학교만을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조지아주의 한 공립학교에서 내가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5 년째 들어간다. 나는 학습장애, 정서장애,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서 장애가 심한 아이들은 특수 학급에서만 수업을 받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비장애 학생들과 통합교육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일반교사들과의 접촉이 많은 편이다. 아이들의 장애와는 상관 없이 미국의 학교는 심한 장애를 갖고 있다는 점을 나는 그 동안의 교사생활을 통해서 발견했다. 교사의 이직률이 많은 이유와 많은 부모님들이 사립학교를 선호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 친엄마 친아빠와 함께 한 집에서 사는 학생을 거의 찾아 보기가 힘들다. 계부(Step father), 계모(Step mother) 혹은 조부모님들과 함께 사는 아이들, 그리고 편부모(single parent) 밑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가정에서 마땅히 배워야 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늘 정서불안으로 행동에 문제가 있게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환경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회의 중심인 가정의 무너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분이 가정 속에서 점점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주 월요일 수업 시간 전에 아이들이 주말을 어떻게 지냈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주일에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거나 주일학교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은 1달에 2-3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이의 취침시간 전에 베드타임 스토리(bed time story)로 성경을 읽어 주는 부모님들도 찾아 보기가 힘들고 취침시간 전에 축복기도를 해주는 부모님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을 이유로, 개인기도는 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기도는 할 수가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부활절과 성탄절에 대해서 가르칠 때도 종교적인 내용들을 다룰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탄절에 대해 가르친다면, 산타클로스와 루돌프는 가르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고, 또 부활절에 대해 가르친다면 이스터 버니(Easter Bunny)에 대해서는 가르쳐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진정한 성탄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진정한 성탄과 부활의 의미도 모른 채 우리 아이들은 이 날만 되면 공휴일로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인 교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성경을 가르칠 수는 없지만, “teaching”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간 한 시간 영어, 산수, 사회, 과학 등을 가르칠 때 정성껏 수업계획(lesson plan)을 세우고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즉, 전문성을 갖고 지도하는 일이다. 둘째, 아이들의 문제점을 귀 담아 들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 자신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학생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다른 사람들을 섬겼던 것처럼 기독교적인 교사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