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준혁] 아가페의 정신으로

코스탄의 소리


아가페의 정신으로


영적 성숙이란 무엇일까. 가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는 영적 성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각자의 체질과 성격이 다르고, 또 하나님이 주신 저마다의 재능과 다양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저마다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time)과 방법(mode)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에 이르는 과정에는 어떤 단일한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낙심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쉽게 속단하는 실수를 범하는 우리 스스로를 보게 된다. (특히 나는 이런 실수를 범하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이러한 실수를 가장 많이 저지른 사람의 하나다. 그는 행동주의자요, 모든 일에 자신을 던지는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경의 구석 구석에서 전하는 베드로의 성격과 행동은 그가 누구보다 자신의 열심을 통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자 했던 제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의 거침없는 열정, 대담하리만큼 솔직한 허풍과 폭풍 같은 성미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셨다. 그러했던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에서 전하는 영적 성숙에 대한 내용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각자의 개성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행동을 통해 영적 성숙의 길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베드로는 이미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버린 제자가 되어 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가 되어 있다.


첫째, 베드로는 영적 성숙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약속으로 시작한다고 고백한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후 1:4). 원어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별되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소중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형제요 자매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영적 성장의 기초요, 교회의 내용이다.


둘째, 베드로는 믿는다는 신앙의 기초 위에 두 가지를 더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 두 가지란 도덕적인 탁월성(moral excellence)과 지식(knowledge)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베후 1:5). 우리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15세기, 16세기에 흑사병과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납득하기 힘든 체벌과 강요를 일삼던 부패한 로마교회에 저항하며 일어난 종교개혁의 주인공들이 죽음 앞에서 외쳤던 표현으로 우리에게 잘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큼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결단의 내용이지, 오로지 믿음(faith)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잘못된 행위까지도 정당화 시켜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숙여지는 도덕적인 참됨과 사려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이러한 두 가지가 함께 하는 믿음은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후 1:2).


보통 우리는 지식을 하나의 장식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즉, 지식은 곧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이거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여 지식 없는 사람을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지식이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선물을 우리가 잘 관리할 때 나타나는 부지런함의 결과다. 원어로 보면 “에피그노시아”라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말한다. 즉, 인식하고 확인하여 깊이 있게 마음속에 각인된 내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덕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아레테,” 즉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행동의 결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한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믿음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해 무례하지 않다. 그리고 공격적일 이유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솔로몬의 충고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언 11:10).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과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덕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God)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세째, 베드로는 여기에 절제, 인내와 경건을 요구한다. 절제는 곧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이런 절제는 현대사회를 끝없는 경쟁이나 비극적인 다툼으로 보는 이른바 Agonistic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절제란 하나님이 주신 이성(reason)으로 다스릴 수 없어 보이는 자신의 순간적인 욕심들(eros)을 하나씩 억제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약함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이러한 한탄 속에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얻고, 이 용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용기는 절제와 인내를 함께 가져오고, 이러한 용기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태여 처세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경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얻어지는 실제적인 결과는 “유세베이아,” 즉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경건함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 나와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 스스로라면, 경건은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덕목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이러한 내용이 오랜 시간동안 행동으로 나타난 자기수련의 결과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고 권고하고 있다. 우애란 “필라델피아,” 즉 형제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자신의 것이 항상 옳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역사에 몇 안 되는 선견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서로가 필요하고 또 그러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면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가장 기독교적인 덕목인 사랑, 즉 “아가페”가 필요하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덕목의 가장 큰 내용은 자신의 행위의 보상이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보상이 없는 일에 조용히 자신의 방식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경쟁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 (Agape requires virtue without return, save in the eyes of God. Arete is an agonistic virtue, in that those who possess it must outdo others in the eyes of the world.)


결국, 이 마지막 한 마디 속에 베드로의 참회가 들어있다. 예수님과 요한복음에서 서로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베드로는 Agape라고 말하지 못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21:17). 이러한 참회의 내용이 곧 그의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소금과 빛인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영적 성숙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은 바로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 속에 들어있다. 참된 믿음은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또 때로는 감싸주는 사랑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의 대립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있지만은 않는지, 우리의 영적 성숙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세상과 비극적이고 Agonistic한 대립의 연속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곳곳의 부패와 납득하기 힘든 내용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는 길을 전하는 기독교적 실천덕목들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Agape의 내용으로, 그리고 훈훈한 공기로 전할 수 있는 용기가 더없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영도자, 지도자, 가르치는 교사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즉, 상대방이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상호관계의 끈 속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눔은 상대방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참된 기쁨과 여유를 맛 볼 때, 자발적으로 따라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질 때에 비로소 내가 가진 무엇인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나눔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의 생각을 전할 때에는 결국 Agonistic한 관계에서 나오는 종교적 갈등과 상호 반목의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17세기에 관용(tolerance)의 정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먼저 제시한 덕목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할 수 없을 때, 반목과 질시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 제시한 성서적인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 덕목은 자기부정(self-negation)과 상대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에 대한 존중(respect)을 내용으로 하는 Agape의 정신이었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상호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일 것이다. 부패한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칼빈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육체가 나의 영혼을 통해 순화되고 훈련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바울을 따라다니며 적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전했던 누가도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가페의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용기를 일컬어 영적 성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생각한다.

곽준혁
고려대학교를 나왔고, 2002년 여름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정치철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에서 박사후과정에 있다. 아내가 University of Illinois에 박사과정에 있는 이유로, Urbana-Champaign에 있는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 출석하고 있다.

[강정현] 시카고의 F2 기도모임

유학생 사역 리포트


시카고의 F2 기도모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


내가 대학부에 다니고 청년부에 다닐 땐 ‘모임’이란 것은 너무도 당연히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모임의 종류도 다양하고 모여야 할 팀도 많았다. 교회 안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 모임 저 모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모임들 모두 서로에게 가르침과 도전과 격려를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내가 그런 모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교회라는 배경(Background) 혹은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모임과 함께 한 사람들을 떠나서 온 이 곳은 상황이 달랐다. 물론 이 곳도 이민교회가 있고 나이에 따른 선교회도 있으며, 나 자신이 꿈꾸던 머릿속의 큐티모임도 항상 존재해 왔었다. 하지만 이민교회의 선교회는 친교도 공부도 충분히 할 수 없는 실정이었고, 내 머릿속 큐티모임은 현실로 승화되기 참 힘들었다. 그랬지만 마침내 동네 유학생 아내들과 함께 한 기도모임을 시작하여 1년 간 지낸 이야기와 그 모임의 결과로 얻어진 많은 것들을 써보려고 한다.


한 유학생과의 결혼으로 시카고에 오기로 결정한 후 난 결혼에 대한 기대와는 또 다른 어떤 감격으로 벅찼었다. 마치 선교사라도 된 양 시카고를 위해 기도하는 한 자매와 함께 시카고를 향한 중보기도를 하며 시카고를 마음에 품었다. 또한, 남편될 형제가 중보를 부탁한 한 비기독교인 부부를 위해서도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기도하였다.


시카고에 와 보니 내 주변의 이웃은 유학생 배우자(아내)들이었다. 처음 하는 살림을 익히느라 남편이 학교에 간 후 에는 느릿느릿 집안 일을 하고 도시락 싸서 남편이랑 함께 식사하고 돌아온 오후 시간이면 나 자신도 누군가 만나서 티타임(tea time)을 갖고 싶었고, 이웃에서도 전화가 오곤 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대상이다!” 무턱대고 생각하며 좀 친해진 사람들에겐 성경공부를 같이 하겠느냐,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하며 무조건 말해 보았다. 결과는 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오기전 기도한 대상이든 친하게 된 자매이든 별로 관심 없었다. 섬김에 앞서 말로 전도를 해보고자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나 자신이 영향력 있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기 위해선 노력해야 할 부분이 무척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도, 일대일이든 성경공부 모임이든 모임을 만들고 싶었던 소망은 가시지 않았다.


이 곳은 예수님 이름으로 모이는 어떤 모임이든 필요한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유학생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교회가 친교의 중심이 되는 여느 캠퍼스도시(Campus town)과는 달리 이곳, 특히 우리 아파트의 한인 유학생들은 정말 교회와 상관이 없었다. 또한 모두가 알듯이 유학생의 아내들은 낮에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 특별한 직업이나 일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육아를 하는 때이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는 티타임은 좋은 것이다. 다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사람의 얘기가 주제가 없을 땐 한도 끝도 없이 바람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시카고에 온 지 반년쯤 지났을까, 이 곳으로 이사온 한 유학생 배우자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정말 반가웠다. 통할 것 같았고, 신앙 안에서의 얘기 상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잔뜩 기대가 되었다. 잘 알게 되고 친하게 되면서 왠지 일대일 제자 양육으로 만나면 좋을 것 같아 기도도 하고 프로포즈도 해 보았다. 역시 별로 내켜 하지 않아서 할 수 없었지만 그 친구를 만난 지 6개월만에 그 친구에 대한 내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그 친구와 일대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친구를 위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할 때마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 먼저 해결하지 못한 유학생 배우자로서의 이 곳 생활의 어려움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게으름으로 힘들었다. 일대일을 하면서 양의 인생이 말씀으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양은 자신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보려다 넘어지는 일을 반복했고, 많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력함을 보며 좌절과 기도를 함께 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반가운 일이 생겼다. 2001년 코스타의 어느 저녁 집회 때 집회 장소에서 같은 동에 사는 한 부부를 만나 우리 이웃에 코스타 집회에 나오는 가정이 있었구나 하며 반가웠는데 며칠 후 그 아내되는 언니가 나를 만나서 아파트 내 기도모임을 함께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 언니도 어떤 모임이든 모임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나를 코스타에서 만난 후 동역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음을 생각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내 양과 시카고 오기 전부터 기도했던 자매에 관해 얘기했고, 그 두 사람에게 프로포즈했을 때 둘 다 모임에 나오기로 해서 고대했던 한 모임, 기도모임이 시작되었다.


모임은 무겁지 않게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우선 구도자(seeker)들인 자매들은 사람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생각이나 고민을 나눌 수도 있고 이것을 말씀에 조명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맛보게 된 것 같다. 자매들은 먼저 이야기의 주제를 교회에 두었다. 교회를 믿음의 출발이라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있었기에 교회에 가는 것, 남편을 교회에 데려가고 적응시키는 것 등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였다.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 우리는 매주 3장씩 말씀을 읽어 와서 모임 때 토론을 하기로 하였다. 구도자들은 말씀 읽기를 거의 처음 해보거나 읽었어도 전혀 뜻을 생각하지 않아 왔던 터라, 말씀을 읽은 후 나오는 질문도 많았고, 차츰 이해해 가면서 말씀이 우리 삶과 결코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면서 함께 감동 받는 시간들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지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또한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에 대해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서로가 해 주는 기도 가운데 힘을 얻었고, 응답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맛보며 함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모임을 마친 후 가진 식사교제는 우리 관계를 더 묶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섬김의 실천이었고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겨울에는 우리를 위해 자원하여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 어떤 한인 1.5세 자매분을 통해 영어 성경공부도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의 결과로 나의 시카고 오기 전부터의 기도 대상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그의 남편 또한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또한 늦게 우리 모임에 참여한, 서울에선 남편은 다니지 않았지만 혼자서 시댁의 종교인 기독교를 따르고자 교회에 다녔던 한 자매님은 남편이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남편이 교회에 잘 적응하고 교회성경공부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었다. 이외에, 말씀에 재미를 붙인 일과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 한 노력은 말씀이 결코 경전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연관이 있고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해주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 교회에 나가기 위해 한 발짝 씩 내딛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모임이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었다. 모임을 가지고 싶어했고, 어떻게든 예수 믿는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하지만 너무나 부족했던 나에겐 정말 소중한 경험이다. 사람을 섬기기 위해선 아주 많이 겸손해져야하며 많은 나의 시간과 힘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들로 어디든 내가 다른 곳으로 갔을 땐 더 성숙하게 이웃사역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우리 모임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신 하나님, 한 명 한 명 관심 가지시고 보살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당신의 손길을 따뜻이 보여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한다.

강정현
단국대 작곡과 졸.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에서 화학(Chemistry)으로 박사과정 중인 남편과의 결혼으로 도미. 현재 McCormick Teological Seminary에서 MATS 과정 중에 있다.

[고창현] 외모 지상주의 (Lookism)

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7, 8월은 교회의 여름행사들로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군대가려고 온 모국에서도 하나님의 그 어떤 섭리가 있으셨는지 계획했던 군 입대는 연기되고, 현재 나는 모(母)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인해 지난 7, 8월은 여러 수련회들로 정신이 없었다. 특히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갖게 된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는 정말이지 신경이 많이 쓰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아이들과의 친밀감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중·고등부 사역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는 나에게 학생들의 신앙수련 못지 않게 아이들과 잘 놀아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닌 수련회였다.


수련회 기간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서서히 좁혀 가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등부 안에 끼리끼리 뭉치는 소그룹들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다른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레 나의 주 목표대상이 되었다. 쫄래쫄래 중2 여자아이들을 따라 다니며, 이런 저런 추파(?)를 던지기도 하며 접근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이들의 멋쩍어 하는 분위기에 나는 차일피일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찾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외모’였다.


중2 여자아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영주라는 아이는 자칭 ‘폭탄파’라고 불리는 중2 조직의 보스(?)다. 별명이 ‘핵폭탄’인 영주의 왼팔과 오른팔은 ‘다이너마이트’와 ‘지뢰’라 불리는 혜수와 정원이. 그리고 이 세 아이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중2 여자아이들은 쉽게 말해 이 ‘폭탄파’의 조직원들인 셈이다. 여하튼 이러한 중2 아이들의 재미있는(?) 조직 분위기를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던 나는, 아이들과 일단 친해지고 봐야겠다는 간절한 소명의식 속에, 결국 이렇게 접근하게 되었다.


“야 내가 이 폭탄파 고문을 맡으면 안 되겠냐?” ^^;


충격스럽게도 아이들은 그 흔한 오디션이나 인터뷰도 생략한 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나의 고문직을 수락해 주었다. 뭐, 나이에 안 어울리는 나의 여드름과 촘촘하지 못한 머리카락 분위기를 볼 때, 고문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나? 여하튼 고문이 된 기념(?)으로 나는 7명의 자칭 폭탄파 멤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중에 돈 생기면 성형수술하고 싶은 사람?”


“저요~~~!”
“저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들 손을 들었다.


“야 이유가 뭐냐?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다 이뻐 보이는데…”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다양한 제스처 – 멀쩡한 머릿결을 한번 쓰다듬거나, 예쁜 표정을 지으며 -와 함께 모두 공주가 되었다.


“저도 알아요~”
“당연하죠~”
“전도사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제가 한 미모 하죠!” ^^;


그리고 나서 몇몇 아이들은 14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답변들을 늘어놓았다.


“전도사님이 뭘 모르시네.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능력이 있는 거예요~”
“나중에 취직할 때도 미모가 돼야 취직이 된다니까요~”
“일단 수술을 해서라도 이쁜게 중요해요”


글쎄… 그날 아이들과의 즐거운 대화를 마친 후, 아이들과 손쉽게 친해졌다는 성취감 뒤에 왠지 모를 허(?)한 기분과 찜찜함이 느껴진 것은 왜일까? 과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도 얼굴 예쁜 여자를 보면 솔직히 눈길이 가고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형수술까지 해야되나? 과연 14살의 어린 중학생들이 벌써부터 이렇게 난리를 칠 정도로 ‘외모’란 대단한 것인가?


2.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은 지난 8월 11일, 13-40세의 우리나라 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전화면접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간단하게 조사결과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사회의 13-43세 여성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78%는 외모 가꾸기가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외모 가꾸기에 하루 평균 53분을 투자하며, 거울은 평균 8.3회를 본다고 한다.


조사자 중 69%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출하면 타인이 더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으며, 56%는 또래의 여성을 보면 외모부터 비교하게 된다고 답해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연령층별로는 13-18세의 경우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쓰며 용모보다는 운동화, 가방, 장신구 등에 치중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19-24세는 다른 세대에 비해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추구하며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25-34세의 여성들은 외모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겨 헬스, 피부관리,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을 통한 외모 관리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35-43세의 중년여성들은 외모를 부의 상징,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제일기획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외모에 대한 높은 관심이 미국사회의 ‘루키즘'(Lookism:외모 지상주의)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연합뉴스 8월 11일자 기사 )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먼저 ‘외모 지상주의'(lookism)에 대한 나의 넋두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나는 외모가 갖는 개인적 가치와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심지어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특정한 이해관계에 의해 자본을 창출하는 것까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함(?)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외모 지상주의다. 마치 외모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것처럼 은근히 우리 안에 권력화 – 성공과 차별의 수단으로 – 되고 보편화되는 작금의 현실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


외모가 출중한 남녀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고, 또 그들의 그 아름다움에 ‘멋있다’ ‘야~ 예쁘다!’ 라고 평하는 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가꾸려고 노력하듯, 나름대로 자신의 외모를 멋있게 가꾸고 챙기는 일 또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외모 지상주의는 하나님이 아닌 외모를 우상화하고 숭배하며, 또한 획일화된 외모로 하나님이 창조한 다양한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사회현상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닌가? 성형수술을 패키지(package)로 하거나, 친구들을 3명 이상 소개해서 데려오면 수술비를 싸게 해 주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외모가 안 따라온다고 직장면접에서 노골적인 거부를 당했다는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도 외모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영어학원 면접에서 말이다) 요즘에는 외모를 비관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한 방송작가 선생님을 통해 들은 적도 있다.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쩌면 더 가슴아픈 일은 바로 이러한 사회, 문화적 흐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신 스스로와 남들까지도 이런 기준에 의해 평가하며, 차별하게 되는 현실이다.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더 당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부족하다고 믿게 하는 것. 내면의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알고자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상대방의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외모의 우상’을 쫓아다니는 남자, 여자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병폐가 아닐까? 나는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는 결코 여성이라는 어느 한 특정한 성이나,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위에 소개된 ‘세상 돌아가기’의 이야기들이 다 여성들을 그 주체로 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외모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주된 관심거리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결국 외모 지상주의라는 것은 ‘보아주는 사람’들과 ‘보여주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한 남성의 외모에 같은 남성이나 여성이 호감이나 반감을 표하고, 또 반대로 어떤 한 여성의 외모에 동성이나 이성이 반응을 보이면서, 평가되고 가치화하는 것이 바로 외모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외모라는 것에 별다른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주변사람들의 외모를 평상시 어떤 자세와 관점으로 보는지, 또 스스로의 외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present)데 있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가 모여져서 현시대의 ‘외모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 지상주의는 단순히 여성들이라는 특정한 성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다고 여기는 소수 사람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외모에 대한 획일화된 반응과 평가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손쉽게 한국의 길거리에서 엿볼 수 있다. 아리따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이 지나갈 때 이들을 뚫어지게(사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쳐다보는 것이 단순히 우리네 중년 아저씨들과 젊은 청년들뿐이던가?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지나가는 미모의 여성들을 쳐다보며 그들의 화장법, 옷차림 등을 살펴본다. 한마디로 ‘보아주고’, ‘보여주는’ 역할에 있어 성별이나 사람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아주는’ 쪽과 ‘보여주는’ 쪽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바로 외모 지상주의이다. 그러므로 성별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나 책임을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자세이다. 게다가 이제는 여성들 못지 않게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이 자신들의 외모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지 않는가?


마지막 셋째, 다른 많은 사회, 문화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외모 지상주의 또한 우리가 속한 지역, 사회, 문화권에 따라 각각 다른 경향과 입장을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더불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경계하는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한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이에 비해 ‘상호비교’에 의한 차별적 양상을 지나치게 띠고 있는 것 같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보여주기 위한 ‘과시적 경향’과 이를 통한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들로 인해 외모에 대한 관점이 미국보다 더 공개적(or 노골적)이고, 또 차별의 기준으로 오용되기가 쉬운 사회구조라 보여진다.


필자는 유학생활 중에서도 방학을 맞아 한국만 방문하면 외모와 관련된 수많은 평가를 들어야 했다. ‘살이 많이 빠졌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는 등의 평을 들으면서 확실히 한국과 미국사회가 외모에 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 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동료 유학생들의 옷차림과 외모를 통해서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difference)를 확인하게 된다. 학기 중에는 간편한 옷차림에 헤어스타일이고 뭐고 외모에 별 관심 없이 공부에 찌들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새 학기를 맞아 오랜만에 학교에서 보게 되면 왜 이리 다른 사람들로 변신해서 나타나는지… 이는 아마도 미국사회의 실제적(practical) 생활관의 영향으로 외모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공개적이고 상호 비교적인 외모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돌아온 탓이리라. 하긴 때때로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매들이 ‘왜 이리 한국 여자 애들은 날씬한지 모르겠다’라고 투덜(?)대던 대학 때의 기억을 되새겨 보아도 한국에 있는 동안 그들이 받았을 ‘상호비교’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


아무튼 이러한 지정학적, 세계관적 차이로 인해 이번 ‘고독의 세상 읽기’는 미국사회보다는 한국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주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행여나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사는 미국동네는 안 그런데 하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차피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고·독·의 ‘세상 읽기’가 아니던가? ^^;


자, 그럼 이 정도로 ‘세상 바라보기’는 이만 필하고, 그리스도인 고독의 ‘세상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


[박성호]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

[박성호]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