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지난 9월 19일, 911 참사 일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그의 Opera <Nixon in China> 로 잘 알려진 John Adams는 2002-2003 개막시즌 연주곡으로 뉴욕 필하모니를 통하여 그의 새 작품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911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고전적인 쟝르의 음악과는 달리, 희생자들의 이름들이 그들의 유가족들이나 친구들에 의해 읽혀지는 목소리, 도심 속의 여러 잡음들, 실종자들을 찾는 메모들을 가사로 해서 만들어진 합창곡들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들으면, 여객기가 타워에 부딪힌 직후 그 충격적인 순간의 혼돈감과 그 빌딩의 깨어진 창문들로부터 흩어져 내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숨막히게 다가온다. 그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이교도적인 냄새는 일단 뒤로 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 작품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말들과 소리들의 원래의 의미가 현대적 매체들의 조작과 이기적인 상황화의 논리들 속에서 왜곡되어지는 이 때에, 그 소리들을 낸 사람들의 본래의 마음들이 그 작품에 그대로 표현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오랜만에 예술이라는 매체가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속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보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올 연초에, John Adams 가 처음 그 작품의 작곡에 대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빌보드잡지의 기자가 묻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Although I had absolutely no intention of writing such a piece, the day the request came through I knew immediately that I not only wanted to do the piece but that I should do it.”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 후에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 and I have done my best to create a piece that honors those emotions without exploiting them.” 적어도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의 실험정신을 표현하는데에 그 작품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꾸밈없이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그 작품을 썼다는 그 “compassion”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의 이 “compassion”의 마음은 제쳐 두고라도, 사람들의 소리를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좀 성숙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것을 갖기 시작한다. 그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고 마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믿음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심을 제기할 때에, 정말 같은 마음(compassionate heart)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찢어놓는 충고와 경망스러운 조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아주 닫히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위 “유명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게 되는 경우, 정말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상담사례들인데,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찾아왔던 내담자의 문제들을 소개하는 그의 마음 속에 내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깊은 위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당혹감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까지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내담자들의 삶의 부족한 점들을 들추어 내어 강의에 온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강의를 진행해 나간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이다. 누가복음 7장18-30절까지의 말씀은 의심에 사로잡힌 한 인간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침(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 곧 죽게 될 것을 느끼면서 그는 정말 예수라는 인물이 메시야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답답한 심정은 자신의 겪고 있는 상황이 과거 수 세기 동안 유대왕국의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서 진행된 보편적인 상황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당혹감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많다. 헤롯에 대한 정직한 예언의 소리에 정치지도자가 심판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이 무기력한 자리로 묶여져 이제 곧 죽음을 앞두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의심”은 선지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요한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이러한 그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극한 상황의 요한이 충분히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 있음을 깊이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의 고통의 깊이를 같이 느끼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12절부터 기록된 주님의 삶을 보면서 요한의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더 깊은 “compassion”을 갖게 되셨음을 느낄 수 있다.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후, 갈릴리로 가셨다가 자라났던 정든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시기로 작정하시고 (12-13)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18)…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23)…. 극심한 고난을 받고 죽은 믿음의 동역자이며 형제인 침(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깊은 “compassion”으로 인한 감정의 교차가 주님의, 마치 방황하시는 듯한 다니심으로 나타났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마음은 “compassion”을 넘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오히려 관용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닮는 “compassion”의 마음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의 노년의 삶에서도 이와같은 위로와 관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날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쓰는 아름다은 삶의 모습을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쓴 서신, 빌레몬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성경에 암시된 대로, 아마도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로부터 도망친 오네시모가 믿음의 공동체에게, 특히 그의 옛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관용으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종이 아닌 동역자로서 그 옛종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하는 이유가 오히려 바울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큰 위로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의 영혼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그동안 정말 깊은 고통 가운데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자는 자기 자신이 위로해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넘어서서 세상사람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자리로 갈 때 그 회복되는 삶의 모습들을 보고 스스로가 위로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이 관용과 위로의 과정이 자기 의지를 복종시켜 순종해야 할 과정임을 알고 있기에, 빌레몬을 향해서 다시 한번 순종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21절).

4 I thank my God always,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5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which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6 and I pray that the fellowship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for Christ’s sake. 7 For I have come to have much joy and comfort in your love,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brother. 8 Therefore, though I have enough confidence in Christ to order you to do what is proper, 9 yet for love’s sake I rather appeal to you–since I am such a person as Paul, the aged, and now also a prisoner of Christ Jesus– 10 I appeal to you for my child Onesimus, whom I have begotten in my imprisonment, 11 who formerly was useless to you, but now is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12 I have sent him back to you in person, that is, sending my very heart, 13 whom I wished to keep with me, so that on your behalf he might minister to me in my imprisonment for the gospel; 14 but without your consent I did not want to do anything, so that your goodness would not be, in effect, by compulsion but of your own free will. 15 For perhaps he was for this reason separa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would have him back forever, 16 no longer as a slave, but more than a slave, a beloved brother, especially to me, but how much more to you,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17 If then you regard me a partner, accept him as you would me. 18 But if he has wronged you in any way or owes you anything, charge that to my account; 19 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 (not to mention to you that you owe to me even your own self as well). 20 Yes, brother, let 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Having confidence in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since I know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what I say.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그 허물을 전혀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이시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서로 위로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세상의 깨어진 관계들을 볼 때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 관계들이 회복될 때에 기뻐하는 평화의 자녀들로 살아드릴 수 있도록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작년 이맘 때, 911 사건이 지난 약 1주일 후, 직장 동료로부터 한 이메일이 포워드되어 날아왔다. 날아온 이메일에는 그림 하나가 어태치되어 있었다. 펜실바니아의 Bouwd라는 한 어린이가 그린 그림…. 그 빌딩 안에 있었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있었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그러나 애타게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그들의 가족들, 그들도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런 질문들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한 나에게 이 그림은 진정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그 고통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 하셨던 주님의 위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911참사를 제쳐 두고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911사건과 버금가는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다. 매일 설사로 죽어가는 1,4000명의 영아들, 매일 폐렴으로 죽어가는 7,500명의 어린이들, 15억의 무숙자들, 인권탄압으로 갖혀 있는 80만의 사람들, 6천만명의 고아들, 인종청소전쟁으로 어제밤에 학살당한 마을,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수백만명의 낙태아들…. 이 지구촌의 죄악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매일 울고 계시고 같이 고통받고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사는 그 곳에서 고치고 위로하라고.

(필자 주) 한국 선교 정보 원구원 http://www.krim.org 의 자료실에 가시면 지금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에 있는가를 자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영진]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유학생의 삶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 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 1:19-20)


우리들의 인생의 가치와 질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구별되어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또한 “청지기”라고 불리운다. ‘무엇인가를 위탁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또한 “사도”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사도라함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사”(Ambassdors for Christ)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흐르는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뚜렷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위탁받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지기로서의 삶은 타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한 성도로서 타국으로 보내심을 받은 유학생의 삶의 가치와 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유학생으로의 삶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삶이다. 이유없는 고국을 향한 향수와 이질적인 문화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고독 속에 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내심”을 받은 그 학교,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다니엘은 타의에 의해서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바벨론에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보여지는 그의 삶의 모습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도교수(1장에 나오는 환관장)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그의 유학의 생활을 보냈다. 그러한 그의 삶의 가치와 질은 “탁월함”이라는 단어로 요약이 되어진다. 성경은 그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가 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섬겼던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왕이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다니엘서 1장에 기록하고 있는 그의 탁월함은 어떤 종교적인 분야가 아님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왕에게 남달리 탁월한 조언을 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탁월함은 “세상”과 “신앙”의 경계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그의 탁월함은 그와 같은 이분론적인 세계관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이였다. 그의 “세상적”인 탁월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의 “신앙”의 결과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패배적인 타협의 결과도 아니다. 그의 탁월함은 바로 그의 신앙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모든 것을 100% 바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세상은 탁월함의 “결과”에 주목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탁월한 삶의 “과정”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탁월함의 반대는 게으름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 받은 달란트를 100% 활용한 두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부르신다. 그 두 종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의 모델이다. 그들은 탁월한 경영으로 배가 하는 성공적인 투자를 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의 초점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원래 양과 관계없이 그것을 100% 총 사용하는 삶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탁월함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100% 활용하는 삶인 것이다. 그와 같은 탁월한 삶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내가 보내어진 그 삶의 터전에까지 적용이 되어진다. 다니엘의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그가 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깨닫음으로 연결되어지고, 그것이 바로 그가 보내심을 받은 삶의 영역에서의 탁월함으로 연장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보내시는 자와의 관계가 없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왜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않고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지극히 관계 중심적이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은 결코 이원론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하도록 기대되어지기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사는 유학생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학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도록 나의 전문영역에 보내심을 받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탁월하여야 한다. 그것은 나의 학문에 100% 나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오늘날 유학생들의 문화가운데 탁월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특별히 신앙이 좋다는 유학생들 가운데 탁월한 유학생이 부족함이 안타깝다. 많은 신앙이 좋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학문의 길을 “대충”한다. 학문의 길이 마치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한 “필요악”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는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싶으나, “부르심”(calling)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학문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제자 양육과 기도에 전념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학의 학문의 길은 보다 많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렇지만 매우 불편한, 중간 단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음악을 하는 유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갈등을 겪는 경우를 자주 봤다. 신앙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없이 유학을 왔는데, 막상 은혜를 받고 보니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교수님이 주는 연습곡은 재미가 없고 지겹기만 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연주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전문 목회자, 선교자로 혹은 전문 CCM 사역자로 부르신 형제, 자매가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른바 “평신도”로 평생을 살아갈 형제, 자매들이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필요악”으로서의 직장과 “신앙”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유학생활에 성과가 더디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학생활 속에서의 공부는 점점 더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탁월함의 원리는 이와 같은 갈등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전문음악가로, 미술가로, 학자로, 경영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탁월한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따라서 탁월함과 소명의 발견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 소명의 삶 가운데 있는 탁월함에는 더 이상 “신앙”과 “세상”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소명을 발견치 못한 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게으름은 소명 의식의 결핍에서 나온다. 게으른 유학생들을 많이 봤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생각이 게으르고, 삶이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유학을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공부해야 하는 유학생들에게 생각의 게으름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이디어를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생각이 게으르다. 치밀하게 생각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를 아직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 소명의 결핍은 게으름을 가져오고, 게으름은 탁월함의 반대임을 명심하자. 나는 보내심의 소명의식이 없는 유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결코 탁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단지 유학을 왔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탁월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와 같은 지도자들은 결코 탁월한 자들을 참고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 가운데 이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다. 금요일 철야기도에서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위한 중보기도를 많이 한다. 그러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그들의 삶 전체의 영역이 영적인 전쟁이다. 결코 그들의 영적 전쟁은 금요 철야기도에서 끝날 수가 없다.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연구 논문을 쓰고 제안서를 쓰는 과정이 치열한 영적인 전쟁의 과정이다. 그래서 게으를 수가 없다. 마귀는 우리가 대충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우리가 주어진 일을 하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면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만일 C. S. Lewis가 그의 소설 작품을 대충 썼다면 오늘날의 C. S. Lewis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모든 학문과 예술의 분야에 탁월한 기독교인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란다.


미국 CBS 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Touched by An Angel”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수년 동안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많은 광고수익을 가져다 준 프로그램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작품 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성경적인 진리의 흐름이 있다. 매회 작품을 준비할 때 제작진이 기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아는 방송국에서는 여러번 그 프로그램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작품의 탁월함 때문이다. 악한 느부가넷살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이 특별히 좋아서 옆에 데리고 있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언제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십배가 능가했다고 한다. 방송국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성실한 삶은 탁월함을 가져온다. 그러한 거룩한 탁월함에는 세상이 범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나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연구자들이 그들의 탁월함으로 무기로 하여 무신론과 진화론 숭상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NIH나 NSF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오게 되길 기도한다. 창조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과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함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영적인 전쟁은 우리들의 연구실에 치열하게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과학을 하는 유학생들로부터 무신론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지도교수와 학문의 조류가운데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의 탁월함이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장래의 사회 지도자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서 탁월함의 운동을 일으키기를 소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는 “대충”(mediocrity)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예배도, 음악도, 교육도 대충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할 일은 많은데 자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탁월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안 하는 용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소수의 적은 프로그램에 최선의 준비를 하여 탁월함을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회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음악예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있다. 교회의 제직들 자녀들의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그램이다. 물론 귀여운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곳에는 탁월함이 없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세상의 권력자 앞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는 이른바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용납되어진다. 신앙서적 혹은 신앙영화를 보게 되면 그 질(quality)의 조악함에 실망을 하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만화영화와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보는 크리스천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그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남을 볼 수 있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웹사이트와 그곳에 실리는 글들의 수준은 어떤 기업체의 웹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수준인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탁월함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대충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탁월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빌1:10).


교회 안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코 비싼 것, 예쁜 것,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회안에 있을 때 취해야 하는 당연한 자세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시대의 학문, 문화, 과학을 주도해 왔다.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살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교회의 문화 가운데 탁월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의 상실은 바로 우리의 자존감과 소명감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나를 보내심을 받은 자로 보고 사는 자, 그래서 그 소명감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자의 삶 속에는 언제나 거룩한 탁월함이 있다. 그리고 그 탁월함 속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유학생들의 문화 가운데 이와 같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게으름을 배격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최원영]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eKOSTA 서평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책과의 만남을 통해 내 안의 속사람이 바뀌어질 수 있고, 그래서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완악하고 강퍅한 나를 달래고, 어르고, 때로는 윽박질러가며 내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우리 크리스찬의 일상사라면, 좋은 신앙서적과의 만남은 이 험난한 과정을 훨씬 순탄하게 만든다.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팽동국형제의 뒤를 이어 이코스타의 서평을 맡게 되었다. 이 서평(또는 책소개)가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파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통로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10월에 고른 책은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송인규저, IVP출판) 이다. 코스탄이라면 아마 꼭 한번쯤은 숙독할 만한 책이다. 책 제목이 암시하 듯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기독청년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넘어야할 숙제와 아울러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책의 서술 방식이다. 자칫 딱딱할 수도 있는 내용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전개해 나간다. 주인공은 문희만 전도사 (그의 정체가 후반부에 드러난다) 와 그와 함께 소그룹 모임을 하고 있는 대학촌 사람들이다. 문희만 전도사의 목소리를 빌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선 ‘개념의 확장’이다. 문희만 전도사의 강의를 통해 이 책은 우리에게 세상, 선교, 사명, 교회, 예배, 일, 소명 등의 개념들을 ‘현장 중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교를 살펴보자. 선교의 개념도 확장되어야 한다. 미전도 종족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 만이 선교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나에게 적용할때 내가 선 곳은 “땅끝”이 되며, 나는 선교사요 보냄 받은 사명자가 된다. 이런 개념 확장과 깨달음을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결국 복음의 내면화이다. 여기서 잠시 문희만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내면화란 외적 원리를 자신의 인격과 삶에 받아드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처음에는 의식화 작업이 요구되지요.”


이렇게 복음의 내면화 작업을 한 이후에 한국 기독청년에게 주어진 ‘외면화’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상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 것인가?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침투조’ 모델이다 – “우리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죠….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죄악되고 세속적이며 사단적인 요소들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정화시켜 보겠다는 변혁적이상의 추구자들 입니다.” 이는 문희만 전도사의 말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교회, 소그룹,찬양모임등) 역시 그러하다. 이런 불완전한 상황에서 ‘완전’이신 주님을 지향하는 몫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내면화된 개념을 외면화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강건해지지 않을까 싶다.


사족 1: 도대체 문희만 전도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의 정체를 풀어나가는 열쇠들(이메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등)을 추적하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사족2: 이 책과 흐름을 같이 하는 책들을 소개한다면 이승장목사와 이재철 목사의 책들이 되겠다. “다윗: 왕이 된 하나님의 종”, “새로 쓴 성서한국을 꿈꾼다”, “참으로 신실하게”를 추천한다.


[곽준혁]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 누가(Luke)를 그리워하며

코스탄의 소리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 누가(Luke)를 그리워하며

들어가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누가복음 1:3-4)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Luke)다. 그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유는 그의 꼼꼼한 문체나 직업이 의사라는 그만의 독특한 이력이 아니다. 진정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그가 해야할 바를 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누가는 자신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을 오직 ‘한 사람’이 예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또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데오빌로를 로마의 기관장으로, 그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누가의 헌신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제자도의 본보기가 됨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실을 기록한 이유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의 참된 성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디모데후서 4:10-11). 모두가 병든 바울을 떠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갔을 때, 바울의 옆에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동역자를 보살피는 누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누가의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그를 사랑하셨으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곧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12).

1. 새로운 일대일 패러다임: 문지기(Gatekeeper)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 드러내는 섬김을 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아니면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양육이나 전도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피양육자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무감에서, 아니면 피양육자가 “예수님”보다 눈 앞에서 헌신하는 양육자를 더 따르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빛을 가리는 섬김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가는 이런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그에 대한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번 여름 우리 교회에서 인도자 수련회 때, 새로운 학기에 실시될 일대일 양육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루 전에 통보를 받았기에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프로그램은)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그리고, 몇 주 후에 주일예배 광고에 이 글을 올릴 수 있는지 행정서기로 일하시는 집사님께서 물어오셨을 때도 그저 담담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내가 쓴 이 글을 보면서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과연 나는 어느정도 이를 위해 조심하고 노력했던가….

교수들이 학부생을 위한 정치철학 입문이나 고전 텍스트들을 읽는 수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 “교수보다 저자들의 책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교수를 저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이용할 것. 교수로 인해 텍스트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를 결코 허용하지말 것(You should not allow yourself to be diverted or distracted from the great books by the professors!!).” 한편, 이런 교육을 위해 강의자들에게 제시되는 공통된 충고는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말 것,” “질문을 많이 던지고 가능하면 답을 주지말 것,” 그리고 “주입(indoctrination)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이 자신들의 스스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저자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식의 전달자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피교육자가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기보다 전달자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따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2년 전 우리 교회의 양육프로그램을 도우면서, 이러한 소위 영혼 교육(soul care)의 문제와 아울러 일대일 제자양육이 소수정예 전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되거나, 혹은 어떤 ‘단일한 인간유형’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이 없는지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 – 단일한 인간유형이란 “예수님 안에서의 다양성”(diversity in Jesus)과 대립되는 교육방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이 마치 80년대 독재 하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듯 은밀하거나 전투적인 각오로 진행되는 경우, 아니면 젊은 학생들이 목회자가 되는 길만이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버리는 경우나, 이러한 행동들을 방치하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제자훈련과 교회의 양적 성장이 연결될 때,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헌신’이라는 이름 앞에서 개인주의나 집단화라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굳어졌다.

일대일 제자훈련에서는 ‘양과 목자’라는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인도자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계설정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2-4). 그렇지만, 일대일 훈련에서 이런 설정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느냐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인도자는 ‘목자’요, 피인도자는 ‘양’이다. 즉 인도자에게는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이, 피인도자에게는 인도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미 주어져 있다. 인도자는 자신의 열매를 보고자 피인도자의 영혼과 인생을 ‘관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성도 없지 않고, 피인도자는 인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신앙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요한복음 10장 2-3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gatekeeper)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설정에서는 불러 내시는 이도 예수님이시고, 인도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문지기는 원어로는 “뒤로로스,” 즉 파수꾼이나 문 앞에서 손님을 주인에게 알리는 종이다. 즉, 문지기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문을 지키고, 예수님을 찾아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동일한 역할이라도 예수님과 피교육자의 관계가 강조되고, 인도자는 이러한 관계의 형성을 도와주는 ‘문지기’의 역할에 그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수 있다. 이 때 문지기의 성실성은 양육에 헌신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문”이신 예수님과의 거리, 즉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한 10:9). 함께 일하던 분들과 이런 생각을 나누고, 우리 교회에서는 ‘문지기’라는 새로운 일대일 관계설정을 했다.

누가는 이러한 ‘문지기’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누가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전달하기보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노력의 결실을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한 사람’이 배운 바를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즉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한 사람의 영혼’을 맡기고 있다. 이와같은 누가의 태도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문지기의 소임과 자세를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2. 겸손과 관용의 손길

다음으로 눈에 뛰는 것은 누가의 겸손한 태도다. 누가는 자신의 기록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헌신보다 크게 뛰어날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 중에 …내력을 기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나도”(누가 1:1-3) 신학자들이 인정하듯 누가의 문체나 꼼꼼한 기술은 사도 요한의 논리와 자신감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기술만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복음이 허탄한 소문들로 퇴색되어 갈 시점에 분연히 붓을 든 요한이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 21:24) 하고 말했다면, 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록은 많은 것 들 중 하나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와 아가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함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때가 종종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 7:5).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정욕과 탐심과 다툼으로 들끓는 우리의 지배욕(desire of domination)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love of recognition)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할 때가 많다. 서양에서16세기 르네상스는 이러한 지배욕에 휩싸인 부패한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정치와 인문학이 독립을 선언했고, 17세기는 이러한 욕망에서 끝이 보이지 않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절대왕정 국가라는 철퇴로 풀어가는 새로운 해법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관용(tolerance)이라고 하면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관용은 상대주의적 회의(relativistic skepticism)나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관용의 정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잠언 1:7). 이는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God behind me!)는 선지자적 전투자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감찰하신다”(God over us!)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리낌 없는 온전함을 가지고자 하는 용기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역대상 28:9)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도, 과부된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늙은 선지자도 이런 누가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경건한 눈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보였다는 누가의 차분한 기록을 읽으며, “데오빌로 각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누가 2:25-40). 유명한 마리아의 찬송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표현된 누가의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에서 데오빌로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였을까(누가 11:34).

결국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울 수 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진정한 섬김’의 사랑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누가는 데오빌로가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잠언 6:7)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런 누가의 손길은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마치며

며칠 전 대학부(Crossway) 담당목사님이 조장들 성경공부의 인도를 부탁하시면서 교재를 전해 주셨다. 누가복음이다. 과연 누가처럼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하나님의 소중한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의 조건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과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분의 말씀으로 매일 매일 바꾸어 나가는 삶의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들이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소명(the Call)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문지기(Gatekeeper)가 되어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이런 걱정들을 하다가 나는 이번에도 누가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부패와 악이 성행하던 시대마다 소리높여 부르짖는 의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소돔성이 멸망한 이유가 횡행하던 부패와 악이 아니라, 의인 10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오늘도 작은 일에 주목하는 열심을 가르쳐준다(창세기 18:34). 참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해야할 바를 묵묵히 했었던, 그럼으로써 믿음의 선한 싸움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낸 누가(Luke)가 그리워지는 시대다(디모데전서 6:12). 왜냐하면 루터의 말처럼 기독교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성호] 찬양으로 쓰일 수 없는 음악도 있는가

찬양을 이야기 하자


찬양으로 쓰일 수 없는 음악도 있는가



사람이 거듭나면 문화조차도 구속되는가


지난 2000년 12월호와 2001년 1월호 이코스타에는 ‘오늘의 음악, 영원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CCM에 관한 하덕규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그중에서 2001년 1월호에 실린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80년대 이후로의 기독교 음악 발전상을 돌이켜 볼 때, 크리스천 뮤지션들에게는 자기들이 지키는 ‘어떤 선’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운드가 강력한 록(Rock) 음악도 ‘믹스다운(mix-down)’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반주보다는 노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도록 조절한다. 이것은 크리스천 음악이 메시지의 음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크리스천 록이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작업은 메시지 전달을 중시하는 복음 증거에 목적을 둔 기독교 예술가로서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리스천 음악들도 현대음악의 한 장르라고 볼 때,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힙합, R&B, 랩 등의 노래형식이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크리스천 음악이 이러한 주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식컬한 교회음악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식의 크리스천 음악이 더 관능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천 음악들은 이러한 형식들을 걸러내어 그들의 것으로 정착시켜왔음이 분명하다. 내 경우에도 그렇다. 나는 회심한 후 3년 정도는 그 동안 내가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던 많은 팝 음악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한 복음전도자로서 내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셨던 것은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전과는 달리 참으로 많이 기도하며 두렵고 떨리는 작업기간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라는 음반은 그 이전의 다른 음반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이전의 노래들은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하며 동화적인 노랫말에 어쿠스틱 악기를 주로 사용하여 서정적인 면을 많이 강조했었음에도, 내 노래를 좋아했었던 사람들이 이후의 음악과 확연하게 구분하듯이, 그 노래들은 전위적인 면을 포함한 형식으로 기존의 현실들을 냉소하는 메시지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그런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변화된 이후의 노래들은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신 영감으로 쓰여지고 걸러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된다.”


개인적으로 하덕규씨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솔직히 요즘 하덕규씨의 모습보다는 예전의 ‘시인과 촌장’에서 통기타를 치며 조용히 노래하던 음유시인의 모습이 훨씬 더 기억에 남곤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앨범 ‘숲’을 낸 이후 다음 앨범 ‘쉼’으로 거쳐가는 과정 중에 보여주었던, 한 사람의 ‘가수’에서 ‘기독교 문화사역자’로 변모되는 모습이 내게 여러 가지로 도전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길게 하덕규씨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윗글에서처럼 정말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되는가? 예를 들어서 하덕규씨가 말한 대로 심한 록음악이나 힙합, R&B, 랩 등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살게 되면, 그들이 활동하는 모든 작품 가운데 온전하게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가 말이다. 질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음악인들은 무슨 음악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아무 음악이나 다 괜찮나


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아더 홈즈의 책 제목처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라는 명제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덕규씨가 회심하고 난 뒤 처음 3년 동안은 전혀 팝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이후로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들”은 모두 헛되게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 안에서 핵심적인 일들을 담당하며 모든 공예배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내게는 하덕규씨가 다시 이전에 좋아하던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사명임을 깨닫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 말이 여전히 특별하게 들린다. 오늘 나의 이러한 고민은 주로 음악적인 장르에 대한 고민이다. 이렇게 글을 전개하려고 하는 이유에는 몇 달 전에 이코스타 ‘독자 오픈 포럼’에 한 분이 올렸던 질문에 미흡하나마 답을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지난 9월3일에는 ‘대일’님이 745번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런데 (개인의 취향을 일단 뒤로하고) 그런 생각 뒤에는 “every forms are neutral”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롹(rock)이든 hip-hop이든 뭣이든 그 자체는 중립적이며, 그걸 꼭 의심의 눈으로 볼께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이면 (즉, 음악의 주제선정을 잘하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입니다. 전, 이런 생각에도 그 뜻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subjects justify forms”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의문의 근원입니다. 연관되는 질문은, 과연 그렇다면 (if subjects indeed justify forms to use), 각 형식에서 (롹이든, 힙합이든, 메탈이든) 예배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멜로디, 박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질문이 째째해지나요?^^] 즉 주어진 장르 안에서, 어떤 멜로디가 다른 멜로디보다, 어떤 박자가 다른 박자보다, 어떤 악기구성이 다른 악기구성보다 더 좋은(??), 맞는(??) 멜로디, 박자, 악기구성이 있나요? 아님, 이것마저도, 어떤 박자든, 멜로디든 상관없나요? 즉 모든 음의 흐름이 다 가치 중립적인가요? 즉, ‘Hotel California’ 원판 그대로에다가 가사(주제)만 바꾸어 부른 것과, ‘부흥’ 찬양 두 곡을 놓고 볼 때, 음악만을 보고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나요?….”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와 ‘부흥’의 음악 자체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아마 똑같은 악기 구성에 하나는 미국의 록밴드 ‘이글스'(The Eagles)가 크게 히트시켰던 70년대의 대중음악이고, 하나는 고형원이라는 한국인 찬양사역자가 만들어서 크게 히트(?)했던 90년대의 찬양음악이란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아마 뚜렷한 구분을 짓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부흥’이 숱한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한 사람이 빚어낸 곡조있는 기도였다면 ‘호텔 캘리포니아’는 그 음악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팝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알고 있었는가? ‘호텔 캘리포니아’ 앨범이 처음 출반 되었을 때 나왔던 앨범의 자켓의 속지 그림을 보면 호텔 안 2층에 있는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최초로 ‘사탄 교회’를 창설한 안톤 라비라고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이러한 말들은 몇 년 전에 ‘록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상징’, 혹은 ‘백워드 매스킹'(Backwards Masking)에 관한 주제들이 한참 우리 주변에서 시끄러울 때 자주 듣던 사실이다.) <각주>


자, 만일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실제 록음악과 헤비 메탈을 하는 음악인들의 일부가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서 영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매를린 맨슨(Marilyn Manson)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은 사탄을 위해서 또 청소년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음악에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밖에 없다.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본다.


역사 속에 담긴 찬양에 대한 갈등들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가 탄생할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제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322년 요한 22세가 ‘아르스 노바’라는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에 의해 쓰여진 모테트에 반대하는 칙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새로운 학파의 제자들이 멘수라 음표를 억제하고 새로운 음표형식에 기울어서 잘 전해져온 옛 것 대신에 자신들이 새로 만든 것을 연주한다. 교회노래들이 짧은 음표로 연주되고 작은 음표로 넘쳐난다. 노래하는 이들이 멜로디를 호케투스로 잘라놓아 디스칸트들을 통해 성부를 많이 만들어서 가끔 천박한 제3성부와 모테투스 성부를 강요하여 안티포날레와 그라두알레의 원곡을 무시하여 자기 음악의 기본이 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교회선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 선법들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혼합시켜버린다. 이는 음표로 범벅시키는 것이 성가선율의 절제된 상승과 온건한 하강을 통해 교회선법이 구분되어야할 것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노래하는 이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경건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신에 청각을 마취시킨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으로 대신 표현하려고 한다. 그 결과, 본래의 목적인 경건심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책망 받아야할 경망함이 펼쳐진다. 그러나 축일 또는 축제적인 미사에서는 옥타브, 5도, 4도 등의 선율적 협화음 사용을 금하지는 않겠다.”


간단하게 말하면 14세기에서 15세기로 가면서 당시 종교음악에서 가장 큰 이슈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정통성이 점차 흔들리면서 단성부 음악에서 다성부 음악으로 가는 큰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멜로디만 있는 찬양이 몇 백년 이상 교회 안에서 불려져 오다가 점점 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화음이 찬양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깨버리는 반동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두 손으로 막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옛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나타났던 세대와 세대간의 갈등과 저항은 역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일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교회음악, 찬양이 늘 아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 가운데에서 탄생되었다고 보는 것도 사실은 착각이다. ‘종교 음악’하면 바하의 미사음악을 떠올리고 잘 갖추어진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을 생각하는 것이 사실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예를 들어서 고난주간에 많이 불리는 ‘오 거룩하신 주님'(찬송가 145장)의 경우 그 찬양의 원래 멜로디는 ‘내 마음에 안정이 없네, 그 처녀 때문일세’라는 중세 당시의 대표적인 유행가의 멜로디였다. 여기에 중세의 수사 끌레보의 버나드 수사가 쓴 성시(聖時)가 덧입혀져 바하의 편곡을 통해 아름다운 종교 음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뭐 이러한 역사가 있는 찬양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너무나 많이 담겨 있다. 당시에 유행하는 가요들의 멜로디를 따다가 가사를 붙이는 이른바 ‘노가바’를 통해서 거룩한 찬양으로 둔갑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빈번했던 것이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든지 ‘나같은 죄인 살리신’등의 찬양은 너무나 유명한 민요에다가 가사를 붙인 찬양들이다. 심지어는 ‘Battle Hymn of Republic’이라는 남북전쟁 당시의 유명한 군가는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놀라운 영적 전쟁의 찬양으로 바뀌지 않는가.


노가바만 잘 하면?


‘노가바’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된 것을 보면, 모든 시대마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들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모습들이 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찬양으로 드릴 곡조들이 없었으면 유행가 가요에서 멜로디를 따다가 그 찬양들을 곡조로 붙이겠는가. 처음 그 유행가 멜로디를 듣는 작사자의 참담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교회 안에서 얼마나 찬양이라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를 회중들에게 주지 못하고 훈련된 성가대에게만 국한시켰었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었음도 깨달을 수 있다. 마틴 루터가 했던 큰 일이 있다면 ’95개조 반박문’을 비튼베르그 성당에 내다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뿐만 아니라, 바로 이 찬양을 성가대의 몫에서 회중의 몫으로 돌려줌으로 인해서 엄청난 예배의 갱신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회중들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로 찬양을 예배시간에 직접 올려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종교개혁자들 가운데는 구교(舊敎)가 남겨 놓은 이 음악적인 악습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쯔빙글리처럼 ‘앞으로 모든 공예배에서는 찬양 음악을 금지하고 오직 말씀 듣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인해 오르간을 교회에서 내다 부수고 모든 음악을 금지시켰던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다. 칼빈도 처음에는 다성부 음악이 예배시간이 불려지는 것을 금지했고 오직 시편으로 된 찬송만을 단성부로 부를 것을 권장했고 처음에는 예배 시간에 악기 반주도 금지시키지 않았는가. 물론 나중에는 그 의견을 수정했지만.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 음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정신없는 랩음악이나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음악도 가사만 잘 전달하면 얼마든지 찬양으로 쓰일 수 있는가? 시끄러운 슬래시 메탈이나 헤비 메탈 음악도 그 세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니 더 뜨겁게 마음에 와닿게 찬양할 수 있으므로 한 20년쯤 지나면 교회의 주된 찬양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음악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프리카나 피지 같은 데서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지금 19-20세기 서구 기독교 음악에 푹 젖어 있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마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오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무슨 음악이건 찬양이 될 수 있는가? 음…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아마 많은 논란 끝에 결국은 그 세대의 찬양으로 자리잡게 되겠지? 그런데 잘 모르겠다. 필자도 이미 귀가 찢어지게 시끄러운 록음악이 거북스러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내게 한가지 드는 결심은 이것이다. 또 수많은 찬양들이 ‘노가바’로 때워져서 코메디처럼 되기 전에 미리 미리 좋은 찬양을 열심히 만들자는 결심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여, 좋은 찬양 시들 좀 많이 써달라. 곡을 쓰는 사람들이여, 제발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찬양들 좀 열심히 써달라. 무슨 일을 하건 주께 하듯, 믿음과 삶이 일치된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다. 가요계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그 사람들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로 잘 할지 몰라도 가요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걱정된다. ‘노가바’ 해도 은혜 안될 사람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