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훈] 어제를 담아내고 있는 돌벽 – Western Wall

eKOSTA 갤러리


어제를 담아내고 있는 돌벽 – Western Wall


 


뜨는 해를 바라보며17년 전 기억대로 Dome of the Rock으로 들어가는 문에 닿았을때


여러개의 총구가 아무 표정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군복무를 했고 그리고 위험한 곳을 여기 저기 다녀본 제게도 생소한 분위기였습니다.


거기에는 방탄복과 총구 그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분위기에 눌려 발 닿는 곳으로 되돌아 나갔습니다.
골목길을 돌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별 생각없이 그 소리를 쫓아갔습니다.

<통곡의 벽>이라는 Western Wall이 눈 아래 보였습니다.


 


 






 


나와 내 처만 이방인입니다.


 






 






돌 벽에 두 손과 얼굴을 대고 말씀을 외고 있는 사람,
말씀을 보고 읽는 사람,
구약 말씀대로 말씀을 묶고 말씀을 머리카락에 달아 메고 있는 사람…

모두가 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용기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돌 벽도 만져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 써서 그 종이를 돌벽 틈속에 꼭꼭 끼워놓기도 합니다.

문득 우리나라 <남북이산가족찾기>로 전 국민이 같이 울어야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많은 사연들…

그리고 오늘도 오늘만큼 온 세상에 쌓이고 있는 한들.
누가 우리를 여기서 풀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이날은 초막절 마지막 날이였습니다.

조금 전 돌벽을 향했던 심각한 얼굴을 스스로 편
이제 막 청년이 된듯한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웃는 얼굴을 찍어달라고 이방인을 불렀습니다.

맑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축복하며, 예수님께 기대어 셔터를 눌렀습니다. .


다시 샬롬

[유영진] 성공한 소수 (小數)

유학생의 삶


성공한 소수 (小數)



예 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막 10:17-22)


마 가는 자신이 적은 복음서 10장에 한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관하여 적고 있다. 예수님께 찿아온 이 사람을 다른 복음서에는 부자 청년 관원이라고 했다. 그는 젊고, 관원이고, 부자이며,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으며, 또한 예수님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배경을 조금 생각해 보면, 그는 모순 투성이의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젊어서 부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관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원은 많은 돈을 벌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율법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하여 저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의 질문을 던지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관원의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의 삶속의 모순은 바로 성공을 지향하는 그의 삶의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이다. 세상 속에서는 로마의 관원으로, 그 동네에서는 부자청년으로, 회당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청년으로 살았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의 “성공”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물어본 영생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정으로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위한 잘 준비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유학생들의 모습을 또한 본다. 지극히 성공지향적이다.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그곳이 학교이든 교회이든,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주변에 힘있는 자를 위해서 살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은 바로 나보다 힘있는 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로마정부, 율법주의자, 사업가,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내가 “인정받아야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교수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친구의 가장 친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야 하고, 집에서는 부모님들께 가장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님 앞에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나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다. 나의 삶의 내면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부자청년에게 로마정부와 율법주의자와 예수님이 각각 상충된 삶의 모습을 요구했었던 것 처럼, 나의 삶속에서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와 같은 모순을 덮어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렇게 성공한 젊은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성공을 추구하고, 강한 자들을 만족시키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성 공한 자들의 주변에는 반드시 실패한 자들이 있기에 마련이다. 이세상의 법은 한사람의 최후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배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그와 같은 생존경쟁을 통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강한자는 약한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혁명적인 권유를 하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의 성공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성공은 아름다운 성공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유 학생들은 성공하려고 온 자들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공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소원은 품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유학을 오지 못하고 그 꿈을 접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유학에 성공하면, 그 유학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우리과에서는 박사과정 신입생들을 매년 50%이상 걸러내곤 한다. 2년차로 진급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뒤에는 실패한 자들의 아픔이 깔려있기에 마련이다. 학위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분야에서 교수 한명을 뽑는데 150명 정도의 지원자가 들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예이다. 한 사람이 교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149명의 실패자가 생겨야 한다. 학회지에 논문을 보내면 평균 선택율이 5%를 못미친다. 5편의 성공한 논문을 위해서 95편의 논문이 rejection의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의 환경속에서 살다보면,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나의 삶의 DNA 속에 박혀있는 것 같은 느끼게 된다.


그 런 나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내가 그 부자 관원이라는 것이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네 주변에 너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자들을 섬기라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다. 참으로 힘든 적이 많다. 그러나 주님이 그 부자관원을 보실적에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셨다는 말씀이 힘이 된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의 눈을 내가 자연적으로 보지 않는 곳으로 돌리는 훈련을 한다.


교 수라고 하는 직업은 참으로 묘한 자리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 비서, 학생, 심지어 가족들까지, 자신이 하는 연구와 강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자리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한 기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게 만든다. 내가 6년전 Case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학회를 가려고 준비하는 때였다.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는데 비서가 물어본다. “Do you have any preference?” 그래서 아무자리나 괜챦다고 말했다. 그 비서가 웃으면서 하는말이, “Youngjin, you have a long way to go to become a faculty member. As a faculty member, you should say, ‘I will never fly unless I get seat number 4C on that flight.'” 물론 그때는 웃고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그와 같은 대접을 기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수들의 삶은 deadline으로 이루어져 있다. Deadline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교수들 같다. 그래서 연구제안서나 강의안 제출 마감일이 되면 학교가 마치 동물원 같다. 마감 시간 직전까지 자신의 제안서를 붙잡고 이렇게 저렇게 고치다가, 마감 직전에 비서나 학생들이 기타 다른 모든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놨다가, 제출시간에 맞추어서 제출하기를 원한다. 모든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삶, 그것이 교수들의 삶의 모습이다.


학 교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럴수록 대접받기를 바라는 나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짜증이나고 분노가 생긴다. 그들이 나의 일을 잘 도와줬을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게 된다. 내가 늦어서 일이 지연되는 것은 아무 일없는 것처럼 지나가게 된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때, 주님은 나에게 젊은 부자 관원을 기억나게 하신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섬기기 위해서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음을 주님은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신다.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임을 주님이 생각게 해 주신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해야 할 나의 섬김의 대상임을 다시한번 기억케 해 주신다. 문득, 나의 비서의 책상에 붙어있는 그의 딸이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도 보이지 않던 그림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첫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그 그림은 최근 자주 아픈 그의 둘째딸이 그린 토끼 가족 4마리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그 딸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면서 웃어보았다.


학 교에서 있다가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몹시 피곤하다. 저녁강의를 마치고 집에 간 날은 특히 더 피곤하다. 밤 늦도록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저녁을 준비해놓고 졸린 눈으로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얼른 허기를 채우고, TV를 켜고 CNN 뉴스를 보면서 강의하느라고 긴장해 있는 나의 태옆을 풀기를 원한다. 그때 주님이 다시 한번 나에게 부자 청년관원을 생각나게 하신다. 나는 나의 가족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신다. 대부분의 유학생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내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너무나 많은 순간, 단순히 내가 남편이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위한 아내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 해야지라고… 주님은 나에게 나의 아내는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신다. 오히려, 내가 아내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함을 생각하게 하신다.


우 리집에는 두아들이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첼로 레슨을 하는 목요일과 토요일은 이 두아이들이 내차지이다. 목요일은 저녁 6시경에 학교에 가서 after school care에서 두녀석을 pick-up해서 집에 온다. 집에 오면, 나도 배가 고프고 그 녀석들도 배가 고프고, 모두다 cranky해져 있기에 마련이다.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녀석들은 가방과 겉옷을 사방으로 집어 던지면서 저희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집에서 오후내 혼자있던 강아지 Freddie는 정신없이 날뛰면서 밖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서 오줌을 뉘여달라고 성화를 한다. 둘째놈은 배가 고파서 뛰어내려와 냉장고를 열고는 먹을 것을 찾는다. 학교에서 피곤한 미팅이라도 있던 날, 신경질부터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문득 주님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자녀들이 더 이상 집안에 TV 리모콘이 보이지 않을 때, 리모콘 대신 내가 원하는 채녈로 바꿔주는 “인간 리모콘”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할 섬김의 대상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오는 생각은 아니다. 내속의 싸움이 있다. “나도 피곤한데…” 밥먹으로 식탁에 앉은 두 녁석에게 “Tonight, I am your servant. What can I do for you?”라고 물었다. 생각없는 둘째 동현이는 “Water, please!”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자 마음 좋은 큰아들 광현이가 “I will do it.”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항상 이렇게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에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은 평안한 저녁이었다.


섬 기는 삶. 나누는 삶.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짐이 된다. 나 때문에 희생하고 나를 돕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훈련, 이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오지를 않는다. 나는 평생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살아왔고 그렇게 훈련받아왔다. 내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는 훈련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남을 돌아보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오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을 돕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깨우치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주시는 민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웃사람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그사람들을 먼저 바라보는 훈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부자관원처럼, 근심하고 떠나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주 변의 많은 유학생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한다. 많은 부자관원들을 본다. 아니면 부자관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본다. 그들에게 질문해 보고 싶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훈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인간의 역사의 발전은 소수의 천재들의 탁월한 능력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소수의 리더들이 자신을 죽이는 헌신과 섬김으로 주변을 사람들을 보다 낳게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희생적 리더들을 찾고 계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수많은 사사와 선지자, 그리고 왕들의 순교적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나가셨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소수의 헌신적 섬김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 한 교회, 그리고 한 가정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은 수의 자들, 자신이 받은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자, 자신의 성공을 사명으로 발견한 적은 수의 리더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계획을 이끌어나가고 계신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려서 평등을 이루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것을 사명으로 삼고, 주변의 자들을 섬길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오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성공한 소수이다. 자신의 성공으로 자신의 주변을 섬기는 소수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부자관원을 찾고 계신 예수님의 찾음에 대답하고 나오는 자들이 필요한 때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성공한 소수를 소망해 본다.

[차문희]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

기독교사 리포트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








아 이들과 매일 생활하면서 저는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양쪽 부모님들과 생활하기 보다는 그렇지 못 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도 이들은 언제나 수업 내용과 관련 되지 않는 즉, 자기들의 생활 이야기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말다툼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나름대로 우습고 재미 있는 이야기들도 있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들도 있는데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참고: 소개 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입니다.)


전문성이 있는 도둑 (professional thief)?


지 금은 7학년이 되어 있는 W라는 남학생이 2년 전, 그가 5학년 때 저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W는 정서 장애와 학습 장애를 가진 학생으로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주위가 산만하며 학교에서는 말썽만 피우고 어느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아로 소문이 나 있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조차도 없었습니다. 한 번은 W가 제 클래스에 와서 저는 예전과 다름 없이 수업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하자 다른 아이들도 “Good morning, Ms. Cha” 라며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W는 “Ms. Cha, I am not having a good morning”이라며 책을 집어 던졌습니다. 순간 저는 이 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그러자 W 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아빠가 집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지 못 했어요.”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왜? 아빠가 어디 가셨니? 바쁘신가 보다.” 그러자 W는 저를 처다 보며 “우리 아빠는 원래 감옥에서 살아요. 아빠의 직업은 전문성을 갖춘 도둑이에요. 그런데, 어제는 우리 아빠가 자기의 전문성을 잘 살리지 못 했었어요.” 세상에! 아무리 여러 종류의 직업들이 있고 우리는 그 직업의 전문성과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는 이야기 하지만 “도둑”이라는 직업에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도둑”이라는 직업에도 전문성이 있니?” 그러자 W는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일에 대해서 전문성 (professionalism)을 갖고 일을 하듯이 우리 아빠도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특정한 기술을 사용해요. 그것은 지문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물건을 훔치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전문성을 갖춘 도둑은 경찰 아저씨한테 잡히지 않아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자기의 그 전문성을 유지해서 걸리지 않았었는데, 어제는 일반 도둑 (regular thief) 이었어요. 그래서 경찰 아저씨한테 걸려서 다시 감옥으로 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6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못 본 아빠가 그리운 듯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 음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저와 다른 학생들은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W에게 너무 미안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W가 안타깝고 가여워서 좀 더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잘 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웃고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 예화 속에 W의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의 가정 환경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별로 좋지 않으면 창피해서라도 숨기려고 할 텐데 W는 아빠가 감옥에 있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사람들 보다 친절한 동물들


어 려서 부 터 할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자란 K라는 정신 지체 남자 아이는 기억력이 아주 좋고 한 번 들은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관계로 자기 또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사회성 (social skill)도 부족하다 보니 심지어 특수 학급에서도 이 아이는 놀림의 대상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K에게 장난치고 괴롭히는 일을 즐겨 하고 그럴 때 마다 K는 그들과 맞서 보다가 결국 지고 맙니다. 어느 날 K가 동물들이 그려진 잡지를 저에게 가져와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Ms. Cha, 동물, 특히 강아지 좋아해요? 우리집에는 내가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나의 영원한 친구에요. 집에 가면 강아지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요.” 별로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저는 그냥 계속 듣고만 있었습니다. K는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강아지가 왜 내 친구인 줄 알아요? 강아지는 사람들 보다 나쁘지 않기 때문이에요. (Dogs are not meaner than people). 내가 아무리 바보같이 행동하고 별로 잘 해 주지 않아도 그들은 나에게 대하는 모습이 똑같아요.”


저는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처다 보았습니다. 지능이 낮은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너무 뜻밖이었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 순간순간 환경과 자신의 이익 추구에 따라 변하는 우리들의 모습,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자들과 어울리고 도와 주기 보다는 따돌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K는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인상 쓰지 마세요.


초 등학교 2학년인 남자 아이 W는 주위가 산만해서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며 그렇다 보니 가만히 앉아서 학습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 7살 밖에 안 된 W는 장난기도 많이 있어서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처음에 W와 행동 수정을 하는데 잘 따라주지 않았고 반항적일 때도 많았으며 심지어 저에게 “You don’t like me”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제 클래스에 오자마자 밖에 서 있고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과 저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교실 밖에 서 있었고 저는 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참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W에게 저는 물었습니다. “아니, 클래스에 왔으면 문을 열고 들어와야지. 왜 밖에 서 있었니?” 그러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이 저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도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런지 인상 쓰고 있었잖아요. (When I look at you, you are making bad faces at me because you think that I would be a bad boy today)” 그러자 저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인상을 썼다니? 네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W는 말을 이으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나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 또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나 하고 생각해서 그런지 인상부터 쓰셨잖아요.” 처음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기가 막혔고 어떡해 대답해야 할지 몰랐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 아이만을 빤히 처다 봤을 뿐인데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정말로 인상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건방지고 버릇없다고 느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저의 모습이 어떤 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던 고마운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집에 와서 그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미소 (extra smile)를 주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를 선물로 줄 수 있나요?


아 이들에게 협동 심을 길러 주기 위해서 행동 수정 방법 중에 하나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아이들로 하여금 영화 감상, 피자, 아이스크림 파티 등등 다양한 reward를 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 지체를 가지고 있는 B라는 학생이 손을 들고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은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정말 필요한 보상은 엄마에요. 우리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라서 우리 사 남매를 버리고 집을 나갔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를 비롯해서 나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아빠가 다시 재혼 하면 나에게도 엄마가 생기는데, 그건 아직 잘 모르는 일이고…” 하고 말을 멈추었다. 저는 그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생각이 있는 아이였는지 몰랐고 얼마나 엄마가 그리울까 하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맺으며


이 밖에도 재미 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는 있지만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시는 교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빠가 도둑이었지만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이야기 한 W,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솔직히 표현한 K 와 W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엄마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B라는 아이들 모두 거짓과 꾸밈이 없이 순수한 마음들을 지녔습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실 지라고 우리의 솔직한 생각들을 꾸밈 없이 말씀과 기도로 이야기 하고 우리들의 아픔까지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 째,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K 어린이의 강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저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소외되어 있는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K가 부족하고 어리 석게 보이며 가끔 강아지에게 관심을 덜 보일 지라도 그의 영원한 친구인 강아지는 그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 (unconditional love)을 보여 주며 끝까지 그의 벗이 되어 주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가끔 우리들이 지치고 그를 외면하더라도 그가 우리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 없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다른 이들에게, 나와 별로 친하지 않는 이웃들에까지도 변함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겠습니다.









”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 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 하시고 축복 하시니라.” (마가복음 10:14-16)

[최원영] 영적 리더십

영적 리더십


어 디를 가던 리더쉽에 대한 책, 세미나, 강연등이 넘쳐난다. 작년 한국 월드컵의 주역이었던 히딩크 열풍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리더다운 리더에 목말라 했는 지 우리는 이미 실감한 바 있다. 그의 리더쉽을 분석한 책들이 출간되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논의도 인터넷에 한동안 맴돌기도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여관까지도 등장했다고 한다. 한가지 질문이 있다면 이러한 세상적 리더쉽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단답형의 대답은 No! 이겠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것은 성경적 리더쉽, 즉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나는 최근 이러한 세상적 리더쉽에 대해 대안이 될만한 책을 발견하고 내심 기뻤다. 이미 성경적 리더쉽에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특별히 존 맥스웰 목사의 책들), 이번에 소개하려는 책은 헨리 블랙커비 목사의 “영적리더십” (원제: Spiritual Leadership, 두란노, 2002)이다. 그의 또 다른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많은 교회에서 성경공부 교재로 채택해서 쓰이고 있다.


그 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인 “제자를 만드는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영적리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자신이 제자가 되어감과 동시에, 주위에 영향을 미치는 생활은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리더쉽은 곧 영향력이다”란 말 만큼은 성경적 리더쉽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검증될 수 있다.이 책은 이러한 영적 리더를 위해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리더”의 정의가 세상적인 책들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세상적인 리더는 기업의 CEO 처럼 여러사람을 이끄는 사람으로 자신 또는 이익집단의 목표와 야망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일반화 될 수 있겠으나,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영적리더가 추구해야할 5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하고 있다. (1) 영적 리더쉽은 사람들을 움직여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가게한다. (2) 영적리더는 성령께 의지한다. (3) 영적리더는 하나님께 책임진다. (4)영적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 뿐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5) 영적리더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한다.


이 책은 어떤 리더쉽 테크닉을 전하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야곱이 그의 생의 갈림길마다 벧엘로 돌아갔듯이, 영적리더가 되려는 이들에게 기본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따라서 성과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노력보다는 기도가 강조 된다. 결과물을 빠른 시간안에 완성할것을 요구받는 시대에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을 정말 주님께 드렸다면 그 결과조차도 주님께 드려야 할 일이다. 나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린 뒤에, 그 빈 자리를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는 정말 버린자만이 느낄 수 있는 주님의 상이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리더(leader)는 하나님을 따르는 추종자(follower)이므로.“예수님이 제시하신 영적 리더쉽에서 열쇠는 리더가 자기 조직의 비전을 만들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리더는 하나님 아버지이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의 비젼은 그분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은 리더들에게 당신대신 큰꿈을 꾸라거나 당면한 문제를 알아서 해결 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실때 즉각 그 분의 뜻대로 자기 삶을 조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말이다. 오늘날 기업리더는 고사하고 종교리더들 조차도 따르고 있지않은 성경적 리더쉽의 모든 것은 바로 이것이다.” (p46)


사 족1. 리더쉽 씨리즈로 유명한 존 먝스웰 목사의 책 중 하나를 고르라 한 다면 나는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 (두란노, 2000,원제:Failing Forward)를 택하고 싶다. 수많은 실례를 통해, 실패를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있는 책이다.


사 족2: “번역은 반역이다” 란 말이 상징하듯이 번역서의 단점은 때로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 지 모를때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적 리더쉽”의 경우는 안심하시라. 문장이 매끄럽기 때문이다. “영적 리더쉽”을 번역한 역자 는 전문 번역가 윤종석이다. 그의 번역서를 대할 때 마다 감탄 하는 것은 그의 번역의 유려함과 아울러 책 선택의 탁월함이다. 몇가지 에를 든다면 “놀라운하나님의 은혜”, “심플 라이프”, “영혼의 창”등을 들 수 있다.

[곽준혁]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

– 고결함 (Integrity): Christ Inside & Love Outside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마가 9:50)

들어가며

평소 존경하던 김인수 장로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故人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셨고, 타협과 관용을 철저하게 구별하셨고, 늘 진지했던 장로님의 선한 청지기 같았던 삶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 깊이 살아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미주 코스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셨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자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지금도 그리고 이후에도 살아 숨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로님은 세상의 소금으로 늘 우리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소금” (halas)이라는 단어는 4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조건들을 열거하신 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이 그 첫번째 경우입니다 (마태 5:13). 누가복음 14장 34절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할 인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주인되시기를 늘 소망하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후 13:16).

하나님의 사람 (Divine Individuality)이라는 주제에 이어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나머지 두 경우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경우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경우들은 관계 형성의 원칙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고결함 (integrity)이라고 압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과를 나름대로 Christ Inside & Love Outside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Christ Inside

고결함은 영어로 Integrity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integer로부터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전체(entirety), 완전함(completeness), 또는 흠 없는(blameless) 조건이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어떤 사람이 삶에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켜나가는 태도를 나타내거나 또는 이런 사람의 도덕적 순결함(purity)을 지칭합니다. ‘높다'(高)와 ‘깨끗하다'(潔)는 의미가 합성된 고결이라는 한자어와 마찬가지로 영어의 integrity도 구별되는 삶과 이런 삶의 기준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고결은 오만이나 거만과는 다릅니다. 오만이나 거만이 우월함을 고집하는 태도라면, 고결은 비교 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는 어떤 원칙들을 지켜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결은 안팎의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적한 바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이때 고결은 열 사람이 옳다고 우겨도 원칙에 기초해서 틀리면 틀리다고 주장하는 소신있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즉 고결은 자기존중이며 자기완성임과 동시에 구별됨입니다. 이 구별됨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도 있는 용기도 포함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이 어떤 원칙들 위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가지 사건들과 연관시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며 토론한 사건입니다 (마가 9:33-37). 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로 생각한 이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자기자신들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다툼은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까지 예수께 가져간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 18:1-5). 이에 예수님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질문이 그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을 구성하는 첫번째 원칙 ‘겸손’이 있습니다. 성경은 겸손은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이 가져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가 9:37). 바울의 말을 빌자면, 성도의 구별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구별됨을 자랑치 못하며, 이런 은혜를 기억할 때 성도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 겸손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의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의 고결의 첫번째 원칙은 구별됨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Love Outside

마가복음에서 소금과 관련된 두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않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빌어 귀신을 쫓을 수 없도록 금지한 것입니다 (마가 9:38). 이와 같이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남용하자 예수님께서는 기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런 이유에서 “반대하지 않는 자”는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가 9:39-40). 이것이 고결함의 두번째 원칙 관용입니다.

관용 (tolerance)은 무원칙이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먹어야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옆에 있는 사람의 의사를 따라 음식을 시킨 것을 관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 바로 이것이 관용입니다. 원칙이 없는 관용은 타협이나 무관심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상식 밖의 불의가 반복되는 가운데 묵묵히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관용은 무원칙과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용은 고결함 그 자체이자 곧 고결함의 한 원칙입니다. 기독교적 관용은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즉 사랑(Agape)에 기초합니다. 양보하고, 용서하고, 인내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결국에는 바꾸는 것이 관용입니다. 타협은 요령이나 처세를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은 관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 가치관이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제자들의 마음 뒤에는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향유하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마가 10:38).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킴으로써 자신들만을 돋보이게 하려 한 행위와 결코 다르지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금으로는 너를 깨끗게하고” (have salt in yourselves), “다른 사람과는 평안과 기쁨을 나누어라” (have peace one with another)는 두 가지를 명령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철저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지는 평화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충고하고 이어 “너희 말을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Let your speech always be with grace, seasoned, as it were, with salt)”고 부연하고,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4:5-6). 다시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토론에서 격론으로, 격론에서 격분으로 치닫을 마음을 억누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의를 다하고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절과 존중(respect)하는 마음을 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은 모두와 화목할 수 밖에 없는 책임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단하게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고결함 (Christian Integrity) 오만함 (Arrogance)
존귀함의 원천 하나님의 은혜 (grace)에 기초한 자기존중 (self-esteem)과 자부심 (pride) 자기자신의 노력에 기초한 자기 중요성이나 지나친 우월감 (self-importance or overbearing pride)
내적 열쇠원칙 내재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로부터 나오는 겸손 (humbleness)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만족 없는 욕구 (insatiable desire)
외적 열쇠원칙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Agape)와 관용 (tolerance) 획득(acquisition)과 투쟁 (struggle)

마치며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소모임을 이끌 때, 불신자들과 토론을 할 때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독재자처럼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떨어진 이야기로 공전하는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어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역으로 갈등을 피하고 부담을 줄이는 관계를 선호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워 할 때도 있습니다. 제직 수련회나 인도자 교육을 가서 마피아식, 교통순경식 등의 이름들이 붙은 경영학적 원론들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유대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이 아니라,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고결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매일 이렇게 돌아가다 보면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 속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故 김인수 장로님의 소천소식을 접하며 오늘 다시한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여기신다던 故人처럼 매일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갈등에대해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