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부활절을 앞두고: 희망의 십자가

기독교사 리포트


부활절을 앞두고: 희망의 십자가



고 통 속에 있는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 오신 하나님,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주님, 너희의 고통을 이해 한다고 말씀하시며 다가 오신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걸 제가 믿어요. 저는 다시 일어나요. 일어 날 수 있어요.” (인생 레슨 : 이 동원 목사 지음)


언젠가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와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데 우리들의 눈에 보기에 그 사람들이 참 행복해 보일 수 가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좋은 학벌, 경제적인 여유, 그러다 보니 넉넉하고 윤택한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며 부러운 시선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들이 사회적으로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런 문제와 고민 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그들 만의 고통과 고민거리들이 있지만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 입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 입니다. 남 보기에 늘 행복해 보이고 웃고 다니니까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다들 문제들을 갖고 사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과 또 그렇지 못한 것들을 장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장애인들이고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 즉 문제 해결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왜 고통을 당하고 사는 지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하고 문제 해결 대책 보다는 그 고통을 피할 길을 찾아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한 예화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 하려고 합니다. 일반 학급에 있는 K 학생이 학습적인 능력이 떨어지고 행동이 거칠어 지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하여 혹 장애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 테스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학습 태도 보고서, 성적표, 행동 수정 보고서 가정 환경 및 병원 기록 등과 같은 데이터를 모았고 심리 테스트를 거쳐 그 학생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판정 되었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추천하기 위한 미팅을 해서 그 학생에게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교육 프로그램을 IEP (individualized Educational Progra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팅에 참석한 K의 부모님들은 무조건 자기 아이는 절대로 장애가 없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받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또 어떻게 내 아이에게 “장애인” 이라는 label을 붙일 수 있으며, 평생 그가 성장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거라고 불평도 늘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모는 학교측과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특수 클래스에 놓겠다고 동의를 했지만 부모의 얼굴에는 만족함 보다는 그늘 진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그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또 그 아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기 보다는 무관심과 불평, 그리고 심지어 아이를 구박하고 학대도 했습니다. 이 부모님들은 K를 특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시키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 스러운 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에게 시련이 닥쳐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동원 목사님이 쓰신 인생 레슨 이라는 책 에는 첫째, 고통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평가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 장 13절에서는 “시험을 찾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 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 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위 에서 이야기한 K의 예화 속에서 그는 이미 그의 장애로 인해서 특수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K의 부모님들은 K가 장애 어린이라는 사실에 동의 하지 않았고 불만족스러운 자세로 아이를 특수 교육에 참여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K의 학교 생활에 별로 도움을 주지는 못 했습니다. 그에게 장애가 생긴 이유는 그의 잘못도 아니고 부모님의 잘못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K를 구박하고 학대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K만이 세상에서 고난의 십자가-문제와 어려움-를 지고 갈까요? 다른 어린이들과 그의 부모님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와 고민거리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K라는 장애 아이를 한 가정에 주심으로 해서 분명 하나님의 어떤 숨겨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주님은 K의 부모님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인내, 그리고 희생과 노력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K를 위해서 전혀 희생과 노력이 없었던 K의 부모님들은 계속적으로 K의 학교와 가정 생활에 무관심을 보였고 가정에서 이어지는 학대는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어서 정서 장애 라는 또 다른 장애를 낳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 리가 고통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할 때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을 만들게 됩니다. 반면에 극복한 고통 뒤에는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동원 목사님은 그의 저서 인 “인생 래슨” 애서 고통을 축복의 통로에 비유하시며 고통은 하나님의 복이고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도 성숙해 지는 가운데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K의 부모님들이 K를 위해서 좀 더 희생하고 노력했다면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K가 갖고 있는 고통 (장애) 은 없어지지 않는 십자가라서 K의 부모님들과 K가 함께 노력했다면 그의 십자가는 절망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십자가로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지금 어느 곳에서 생활하던지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낙심하지 말고 잘 대응한다면 우리들이 지닌 고난의 십자가도 희망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원영] Fresh Faith

eKOSTA 서평


Fresh Faith


by Jim Cymbala, Zondervan, 1999


내 가 짐 심발라 목사님을 알게된 것은 4년 전쯤이다. 어느 주일날 오후 서점에서 ‘Fresh Faith’라는 책을 발견하고 집에 와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에도 이 책을 두세 번 더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처음에 책을 잡았을 때의 감동을 동일하게 접할 수 있었다. 한번은 보스턴으로 가는 United 항공사 비행기안에서 읽다가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서 혼난 적이 있다. 신앙서적이라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을 만져주는 책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Fresh Faith’는 이런 예외에 속하는 책이다. 그래서 내가 아끼는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


조이 출판사에서 이 책이 “푸른 믿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일단 미국에 계신 코스탄은 서점에서 일단 몇 페이지라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문체가 쉬움에도 불구하고 행간에 저자의 파워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만 다소 감상적 서론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책에서 저자의 관심은 믿음에 있다. 믿음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치유하며 생활 속에서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크리스천에게 있어 믿음은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 상태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 할 것인가? 우리가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과 같이 했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치유하시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역사를 허락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에 예화로 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 동성연애자, 범죄자들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어떻게 이들이 회복되었는가를 저자의 목회 현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이들이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다. 2장에 등장하는 Amelia의 예를 보자.


어느 날 한 여인이 심발라목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녀의 이름은 Amelia. 그녀는 그녀의 지난 과거를 심발라목사에게 털어놓는다. 가정폭력, 성폭행, 낙태, 마약 등의 단어들이 그녀의 지난 삶을 요약해주는 단어들이었다. 마치 심발라 목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Pastor, I am really messed up. I feel really dirty in your office…Am I hopeless? Do you want to kick me out into the street?” (p33-34) .


그녀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교회의 기도회가 시작할 즈음이었다. 심발라 목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Amelia, we’re going to go into the prayer meeting now and ask God to do a miracle. Jesus Christ can cleanse you and make you into the woman he wants you to be.” (p34)


심발라 목사는 그녀를 회중 앞에 세우고 기도 요청-그녀가 삶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리도록-을 했다. Amelia의 이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불면의 밤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고 마약의 유혹에서도 해방되었다. 옷차림도 바뀌었고 인상도 달라졌다. 직업도 receptionist로 바뀌어지고 나중에는 월가의 한 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수년 뒤 Radio City Music Hall에서의 찬양 집회에서 그녀는 간증하게 되었고 그녀의 변화된 모습 (before&after)을 담은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비춰질 때 다음의 찬양이 찬양대를 통해 흘러나왔다.


There is a blood, a cleansing blood that flows from Calvary,


And in this blood, there’s a saving power,


For it washed me white and made me clean..


Oh, I stand today with my heart so clean;


Through the blood that Jesus shed I’m truly free.


유학생활 중 추락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하나님께 이것이 정말 바닥입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바닥이 아니었다). 이럴 때에, 신앙을 가졌지만 도대체 내가 안 믿는 이와 무엇이 다른가 자문해보지만 도무지 다른 점이 없을 때는 또 절망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은 절망할 수 없음을. Amelia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책을 유학생활에 지치고 낙심한 분들께 권하고 싶다.


사족1: 짐 심발라목사님의 세 권의 ‘Fresh’ 시리즈가 있는데 그것은 ’Fresh wind, Fresh Fire’, ‘Fresh Faith’, ‘Fresh Power’이다. 나는 이번에 소개한 ‘Fresh Faith’가 제일 좋았다. ’Fresh wind, Fresh Fire’에는 Brooklyn Tabernacle에 얽힌 비화/간증들을 볼 수 있다.


사족2: 짐 심발라 목사님은 정규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장인의 권유로 작은 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뉴욕의 Brooklyn Tabernacle을 30년이 넘게 목회하고 있다. 2003년에는 San Diego에서 열렸던 National Pastors Convention에서 주 강사로 섬기신 분이기도 하다. 부인인 Carol은 Brooklyn Tabernacle Choir를 이끌고 있다(그래미상을 받았었다).

[곽준혁]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3)

코스탄의 소리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3)


– 갈등 (Conflict): 현실의 벽을 넘어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1-12)


들어가며


기독교적 시각에서 갈등에 관하여 잘 서술된 책을 말하라면 저는 스스럼없이 랄프 네이버 (Ralph Neighbour)의 Living Christian Values를 꼽습니다. 이책은 이미 ‘영적성장의 정상에서’ (Survival Kit 2)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평신도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교재로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6주짜리 교재로 편집되어 다시 출판되었는데, 훈련의 강도는 약해졌지만 기간이 단축되어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훈련을 마칠 수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에 철저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한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원론에 지나치게 착념하다가 성경에서 강조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히 5:8).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전술학 (the art of war)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훈련 없이 전쟁에 나간 군인의 높은 사기는 어떤 효과도 없다.’ 다시 말하면, 훈련되지 않은 군대는 한번 승리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 승리할 수도 또 승리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vs. 현실직시


첨예한 갈등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 (integrity)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현실주의(realism)의 편견이 신중 (prudence)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소유와 안전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사실처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한 갈등해결의 한계를 강조하거나, 강제 또는 폭력을 통한 갈등의 해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은 현실주의 시각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현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인간본성(human nature)은 성경에서 묘사하는 인간의 ‘옛 속성 (the old nature)’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분쟁, 시기, 분냄, 그리고 파당과 연결된 옛 속성과 현실주의의 비관적 인간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갈 5:20). 물론 육체의 소욕은 원죄론(the Original Sin)에서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주의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가려는 세상은 출발점이 유사하더라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 (the fear of death)를 가지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갈등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또 이러한 공포를 역이용함으로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됩니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도 죽음의 공포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환경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핍(scarcity)과 경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국가며 정치사회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은 필연(necessity)입니다. 그리고, 갈등 해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의 제도화, 즉 죽음이 연상될 정도로 강력한 강제(coercion)를 통해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화는 선택일 수는 있지만, 불확실성(uncertainty)을 제거하기위해서는 폭력이 합리적인 갈등해결의 필수적인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에 기초한 소망’ (the Hope in the Eternal Life)으로부터 현실을 바라봅니다. 영생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이겨낸 사람들 만이 가지는 삶의 이유입니다. 모든 행동은 생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시기까지 이루시려고 한 것도 ‘모든 자에게 영생 (eternal life)’을 주려 함이셨고, 영생을 얻은 자의 목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 3:16). 현실주의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인간이 神을 찾는 이유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하게 되면 모두가 ‘새 사람’ (the new nature)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등을 바라보고 또 해석합니다 (고후 5:17). 여기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갈등해결의 원칙은 생명이요 수단은 사랑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이러한 원칙과 수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갈등을 두려워하지도 또 회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가혹한 훈련을 통한 인간성 개조와 지식을 통한 구원을 믿었던 영지주의자에 대항해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충고할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영지주의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몰아 세웁니다 (요일 4:1-6). 요한은 새로운 형태의 바리새인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사랑이 그의 원칙이었습니다 (요한 20:3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 진리는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 요한이 붓을 든 동기였고, 사랑은 모든 갈등을 생명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요한이 분연히 일어난 이유였습니다. 요한의 이런 태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갈등을 일으키신 이유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셨고, 목숨을 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결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요일 4:12).


상호존중 (Mutual Respect)


랄프 네이버는 갈등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1) 내적 갈등 (conflict inside), (2)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conflict with someone else), (3) 확신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cause of your convictions), 그리고 (4) 권위와 책임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tween authority and responsibility) 입니다. 여기에서는 네이버의 분류에 기초해서 상호존중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모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적 갈등, 즉 옛 속성과 새 속성 간의 갈등에서 시작됩니다. 내적 갈등의 해결은 평생을 요구하는 긴 여행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또한 내적 갈등과 함께 생활 속에서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네이버는 이 두 가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 강령들이 나온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1)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적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더불어 사는 우리에게 서로 간의 차이에서 나오는 대립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과 갈등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좌절하거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는 오류를 줄일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2) 갈등의 발생이 아니라 갈등의 해결에 성경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갈등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하고 성경을 동원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갈등이 발생한 이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성경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왜 더욱 사랑하지 못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치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서로 기도하며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 18장).


확신에서 오는 갈등이나 권위와 책임 사이에서 나오는 갈등은 교회나 단체에서 나타나는 갈등들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유형의 갈등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확신에 찬 사역자가 목회자와 빈번한 갈등을 피해 교회를 떠난 다던지, 동역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로 반목하는 경우는 성경을 통해서나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나 보게 됩니다. 랄프 네이버는 이러한 갈등의 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는 베드로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한 사도 바울 (갈 2:6-14), 롯이 아브람의 권위에 도전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리는 사건 (창세기 13),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분류되었지만)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의 동행을 놓고 서로 다툰 사건 (행 15:35-40, 디후 4:11)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갈등해결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1) 갈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2)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상대를 끝까지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에 대한 믿음만은 결코 잃지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죽기 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전한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후 4:11). 아브람은 롯의 잘못을 침묵했지만, 아브라함은 롯의 죽게된 환경을 결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창 18). 베드로도 자기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행 10:16).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1) 자기자신의 의견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 (Only God is the Master who decides what’s best), 그리고 (2)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자세 (Mutual respect through listening to people in conflict with you can bring His message to you) 였습니다. 이 같은 자세때문에 누구도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갈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또 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상호존중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마치며


최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세계는 신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비관적인 현실주의만으로 갈등을 바라볼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종교갈등의 위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민 없이 수용할 때 우리는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처럼 무책임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만 의무를 다했다며 자위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비관적 현실주의 그리스도인의 현실직시
갈등해결의 목적 죽음의 공포로 부터의 해방 (Free from the Fear of Death) 생명에 대한 희망 (Hope for the Eternal Life through God)
갈등해결의 일반적 원칙 죽음의 공포에 비례하는 처벌의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 of the Fear of Death with the Fear of Punishment) 사랑과 상호존중 (Love and Mutual Respect)
갈등해결의 궁극적 수단 폭력과 강제 (Violence & Coercion) 용서 (Forgiveness in God)

그리스도인도 갈등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첨예한 갈등을 가져오는 의견들은 서로 납득이 가는 근거들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는 결코 갈등이 용납되지 않는다거나,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사랑을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한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기독교인이 비관적 현실주의를 무슨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무분별하고 원칙 없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폭력과 강제를 통한 갈등의 해결만을 강조해 왔다면, 아마도 우리는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심으로 주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고 세상 속에 당당히 서 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성호]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찬양을 이야기 하자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편 46편)


3월17일 저녁 8시,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最後通牒) 연설이 전세계에 방송됨과 동시에 그동안 우리 모두가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전쟁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후통첩으로 던져준 시간이 72시간에서 48시간으로 줄었다는 것만 예상과 달랐지 사실 모든 내용은 언론이 예상했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번 전쟁은 나의 마음을 참으로 무겁게 한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게 되어 내가 사역하고 있는 대학부에 소속된 3명의 젊은이들은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파병되어 지금 쿠웨이트에서 전쟁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의 양들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가서 외로이 떨고 있는데 안타까워 하지 않는 목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목자일 것이다. 그중의 한 형제는 얼마 전 싱가폴의 어느 해안을 배로 지나가고 있다며 ‘바그다드의 지상군으로는 아마도 최초로 투입되는 부대의 소대장으로서 자신이 부대원들을 두려움 없이 잘 인도할 수 있도록, 또 생화학 무기가 사용되지 않도록 제발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때를 잘못 만난 까닭에 이제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하는 수많은 젊은 군인들, 가공할 만한 최첨단의 무기와 폭탄에 의해 희생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수많은 이라크의 민간인들, 바그다드 인구의 반 정도가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라는 어느 기사를 읽은 나의 마음은 더더욱 아프다. 과연 전쟁을 불가피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게 동시에 오버랩 되는 이라크의 정유 탱크들의 모습과 정치인들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연설문 속에 담긴 꿍꿍이속을 짐작하는 나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9.11사태 이후 딕 체니 부통령이 가장 많이 읽고 연구했던 분야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지금 부시 행정부가 밀고 나가는 모든 대외적인 추진력의 향방은 과연 아메리카 제국이 계속해서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열강으로 커나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 속에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2001년의 국정연설에서 이미 이번 전쟁의 서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라크에 대해 걸고 넘어졌던 알 카에다와의 관련성 이야기는 전쟁을 시작하는 지금 쑥 들어가고 없는 것이 내게는 신기할 뿐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또한 이번 전쟁이 어쨌든 끝나고 나면 지금 북한에 대해 걸고 있는 정치적인 시비가 다시금 링 한가운데로 올려져서 이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격전장으로 치닫게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한다.


매일 아침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주도한다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이야기는 혹시나 아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사악한 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이 시작하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비추어 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계속될 중동과의 분쟁을 통해서 13억 모슬렘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왜곡되고 복음의 문이 더더욱 닫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벌어진 상처의 골이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깊게 남아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으로 요즘 마음이 매우 무겁다.


사담 후세인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도 결코 편한 것들은 아니다. 생화학무기가 없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라 치더라도, 바그다드의 병원과 학교 등의 민간인 시설에 민간복을 입은 군인들을 배치하여 끝까지 결사항전 하겠다는 이라크 측의 성명은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으론 쿠르드족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본다. 얼마 전 교회에서 있었던 선교대회에서 우리가 입양했던 종족이 바로 이 쿠르드족이었기 때문에 내게 더더욱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 이라크 지역에만 5백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는데 이들이야 말로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자신들에게도 그토록 목이 마르도록 기다렸던 민족 해방과 새로운 쿠르드 국가의 건설이 꽃피게 되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고 있는 민족도 있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터키 정부에게 눌려서 살던 쿠르드 족들까지도 다들 북 이라크 지역으로 이주해 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꿈에 젖어 있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란과 이라크와의 분쟁 속에서 미국과 서방이 개입해 왔던 중동의 80년대 정치사를 공부해 보려다 그냥 덮어 버렸던 것도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였다.


“이방이 훤화(喧譁)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6절) 본문은 딱 요즘의 중동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 하나님이 언제 소리를 발하셨다고 지금 시편 46편의 기자는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이방과 왕국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만을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인 부시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나라’에 속한 아랍 국가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8-10절)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고? 이라크 군이 들고 있는 초라한 장총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의 무기들- 스텔스 비행기와 각종 신형 폭탄들, 지하벙커를 뚫고 지나가서 통신기기들만을 감지해서 폭파시키고 통신수단을 두절시키는 폭탄과 무인정찰기, 목표물의 범위가 10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최첨단 폭탄 등-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깊이 드는 것은 잘못된 착각일까.


과연 하나님은 이 광기(光氣)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일까. 이런 상황에 노래는 무슨 노래? 무슨 찬양은 찬양? 어떻게 시편의 기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10절)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지나왔던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수백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십자군전쟁이 비 서구인들에게 준 아픔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서구 기독교 백인들이 외치는 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만을 편애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중동의 모슬렘 국가들을 쳐 죽여야 할 사탄의 무리들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시편 46편의 고백처럼 활과 창과 수레의 힘만을 믿고 까불대는 모든 바벨탑의 후예들에게 참된 메시지를 던지며 다만 하나님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이 주시는 참된 평화의 소식을 고대하는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나타내시고 드러내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은 미국 편도 아랍국가 편도 아니시다. 대한민국 편도 북한 편도 아니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이 모든 정치, 사회, 경제학적인 이념과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모든 열방이 주를 보며 주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분이시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어찌해 볼 수 있다는 헛된 자만심이 꺽이는 그날이 오면 이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모든 열방들이 주를 알게 되는 그날이 어서 오기까지 이 찬양의 메시지를 외치며 불러 보리라.

[좌담회] 빛을 들고 나아가는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 노진준 황윤엽 김홍덕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eKOSTA 우선 오늘 저녁 이 시간에 이코스타 4월호 좌담회에 참여해 주신 여러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부활절의 절기에 맞게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슈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들을 나누기 전에 우선 자기 소개를 해 주시는데요, 현재의 직업, 미국에 오신 이유, 가족 관계들을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진준 네, 저는 노진준 목사입니다. 현재 워싱턴 볼티모어에 있는 갈보리 장로교회에서 1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오게 된 이유는 1976년도에 부모님을 따라서 이민을 왔고요 1987년에 결혼을 했고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황윤엽 저는 현재 택사스 San Antonio에 살고 있는 황윤엽 이라고 합니다. 현재 택사스 주립 의대에서 니코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고 가족 관계는 자폐를 가진 정민이와 개구쟁이로 잘 자라고 있는 정현이가 있습니다. 1996년에 박사 후 연수과정(Post Doc)으로 미국에 와서 1-2년 정도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영접하고 지금까지 미국에 살면서 많은 훈련과 단련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지는 4년 정도 되었습니다.


김홍덕 네, 저는 김홍덕 목사이고 LA에 있는 조이 장애 선교 센터 (Joy center for the disabled) 을 섬기고 있습니다. 간호원으로 일하는 아내와 대학생인 아들, 고등 학생인 둘째 아들, 그리고 5살인 조이라는 딸 아이가 있습니다. 저는 1983년 초에 미국에 공부하러 들어왔다가 학위 취득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이 곳에서 하나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eKOSTA 네 감사합니다. 각 자의 삶에서 지금 현재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어려운 환경들과 시련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생활 속에서의 어려움 특히 유학 생활 속에서의 어려운 점들이 있었는지요? 어떤 어려운 점들이 있었는지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또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도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진준 다른 분들은 모두 유학생활을 해 보셨기 때문에 공부하시면서 어려웠던 점들 (고난) 이 많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사실,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이 저에게는 생소한데 저는 갈수록 어려움이 더 해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 웃음)


eKOSTA 우리의 삶이 계속 고난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노진준 저는 고등학교 때 왔기 때문에 처음에 공부하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생후 8개월 후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지금까지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애를 특별히 고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살아오면서 그 장애를 남에게 알리기 싫고 남이 또 나의 장애를 아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많이 감추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역을 하면서 다른 분들의 아픔과 고난을 보면서 제 경우와 비교하며 동질감이나 공감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김홍덕 저는 첫째,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생물학 박사 공부하러 유학을 왔었는데 도중에 신학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목회자가 되리라는 꿈이 마음 속에 있었는데 생물학 공부를 하다가 신학을 다시 공부하려니까 왠지 모르게 마음 속에 두려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부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식의 공부 방법이 달랐고 사고하는 방법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꽤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저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고 이 과정이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eKOSTA 네, 아무래도 한국식 교육 방법과 미국의 교육 방법의 차이로 많은 유학생들이 똑같은 어려움들을 많이 겪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황윤엽 저는 학위를 한국에서 했지만 이곳 미국에서 유학 생활도 해보았고 현재는 박사 후 연수 과정을 하고 있습니다.제가 MIS에서 경영 정보 시스템에서 석사 과정을 하는 중이나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 중에 “내가 과연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포스트 닥을 하는 과정에서는 주님을 먼저 영접한 사람으로서 실험실에서 일할 때에 전세계에서 온 동료 과학자들과의 대인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제가 일하는 실험실에는 기독교인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으로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많은 부담이 있었습니다.


eKOSTA 그럼,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들을 잘 해결은 하셨나요?


황윤엽 네. 잘 해결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인간 관계의 문제가 있으면 대부분 한국에서는 일 끝나고 나서 술을 마시면서 즉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하는데 저의 경우는 소속되어 있는 성경 공부 모임에 나가서 중보 기도 요청을 했고 저 역시 나름대로 기도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 졌지요.


eKOSTA 각 자의 일상 생활 외에도 신앙적으로도 고난의 시간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떠한 어려움이었으며 그 시련들을 어떻게 이겨 내셨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김홍덕 신학교 졸업 후 목회를 LA에서 3-4년 정도 하다가 굉장한 도전이 왔습니다.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열심히 목회를 하려고 노력했고 설교 준비도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3-4년 동안 했는데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들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가는 경향들을 많이 보았을 때 “과연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하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지내는 동안에 하나님과 더 깊은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서 깊은 영감 같은 것을 많이 받았고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아팠던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낮추시는 훈련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6년 전에 제 아내가 딸아이를 갖고 임신 3개월 만에 검사를 해 보니까 아이가 뇌를 비롯해서 척추 및 다른 신체적으로 심한 장애가 있고 태어나서도 6개월 밖에 살지 못 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참 너무나 많은 고민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주셨으면 잘 사용하시지는 않고 오히려 저를 오랜 병을 앓게 하시고 또한 장애아이까지 주신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 사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 등으로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 당시 주변에 계셨던 사람들(믿는 사람들이건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 모두)이 낙태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미련한 신앙 생활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결심은 제가 이 아이 하나만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 한이 있어도, 또 이 아이 하나만을 위해서 살아도 좋다고 결심을 하고 십자가를 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단 후에 정말로 놀라운 소망과 기쁨이 하늘에서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조이(Joy)라고 지었는데요, 그 이름처럼 아이는 잘 자라주었고 저에게 십자가가 아닌 정말 많은 기쁨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이 고통의 기간을 통해 영적으로 큰 축복을 받았으며 부수적으로 얻는 축복도 많았습니다. Joy가 매일매일 주는 기쁨을 즐기며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렇게 아프던 몸이 낫기 시작했고 장애 사역이 시작 되었으며 학위 논문 역시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계산해 보았을 때 앞뒤가 맞지않고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것 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고 성령님께서 그렇게 감동 주시면 미련하게 보일 지는 모르지만 그 뜻에 순종하면 그 뒤에는 많은 축복이 숨어있다는 것을 저의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eKOSTA 네, 감사합니다.


노진준 저는 모태 신앙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 주님을 영접하고 대학 졸업 후에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목회 일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인 갈등이 있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 뜻대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개인적인 욕심이나 자아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가 너무 형식에 치우쳐서 영적 혹은 신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상태에 안주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이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제게 너무 능력이 없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제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강한 능력을 주셨으면 하고 원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깨달은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저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는 점인데요, 그래서 지금 제가 신앙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말씀 드리기 보다는 매일 힘이 되시는 주님과 극복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윤엽 신앙 생활 시작 한지가 4년이 되어서 그런가 아직까지 신앙적으로 고난은 없는 것 긷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자폐 아이인 정민이를 키우다 보니 신앙적으로 어려운 시간들을 많이 갖고 있지 않느냐라고 의문을 갖기도 하겠지만 조금 전 김 목사님의 말씀처럼 정민이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기도함으로써 더 가까워 질 수 있고 그러므로 해서 더욱 더 큰 즐거움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를 하나 말씀 드린다면은, 정민이는 감각방어(Sensory Defensiveness) 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주변에 대해 촉각, 후각, 시각 등 감각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합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당연히 여기는 배변문제나 수면문제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아이가 그렇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오히려 정민이가 소변을 볼 때마다 그 아이와 함께 기도했고 또 많은 자폐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거의 한두 달에 한번씩 ear infection으로 힘들어 몸부림칠 때에도 아이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대 일의 관계를 허락하시고 그 속에서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정민 이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꺼라고 생각하실 텐데요. 물론 그러면 좋지만 혹 그렇지 않는다 하더라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사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즉 장애나 고난으로 부터의 탈출을 꿈꾸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에 감사할 줄 아는 자세를 배우게 되는 과정이라고 나 할까요. 물론 이런 마음의 자세가 제가 정민이가 주위의 도움이 없이 독립적인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도와주는 걸 게을리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제가 열심히 해야 할 일이죠. 과정에서의 열심과 주님의 결정에 대한 승복과 감사함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좋은 말씀입니다. 어떤 어려움을 주님 안에서 극복함으로써 내 자신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지고 영적 성숙의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모두들 믿음을 갖고 긍정적으로 주님께 순종하시면서 고난을 극복하신 것 같습니다. 각 자의 삶 가운데 고난과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해결책이 달라지는데요, 여러 가지 다른 시련을 겪으신 혹은 겪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know how 혹은 인생 철학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그 인생 철학을 나누어 주실 수 있나요?


황윤엽 저의 가족들이 경험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한 번 나누어 보겠습니다. 장애 아이를 키우시는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수 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학교들을 찾기 위해서 이사를 여러 번 다녔습니다. 맴피스에 살 때의 일인데요, 이사 간 첫 날부터 정민이가 좀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이의 방을 놀이방으로 꾸며 놓고 아이가 놀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막 집안을 뛰어 다니고 무서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수면에도 많은 지장이 있었고요. 처음에는 이것이 마귀 장난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 보면 이사를 다시 가라는 이야기들을 하시고 해서 저 역시 심각하게 그 문제를 고려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구요. 그 당시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지 2년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이것이 정말 마귀 장난이라고 해서 이사를 간다면 매번 마귀 장난 때마다 피하고 도망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교회 구역 모임에 부탁을 해서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서 한 달 내내 구역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구역 예배 시작과 끝에 정민 이를 위한 기도도 함께 했습니다. 그런 후 아이에게 있었던 이상한 행동은 차차 사라지고 수면도 더 잘 취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의 인생 철학이라 하면 어려움을 혼자 해결해 나가지 말고 신앙의 선배분들께 영적인 상담과 중보 기도 요청도 하고 도움도 받는 등 문제해결에 능동적인 자세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 합니다.


eKOSTA 네 흔히 어려운 순간을 겪으시면서 도움을 많이 받으신 분들이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도울 수 있다고 하지요.


김홍덕 장애 사역을 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놓고 이야기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신체 장애를 가지신 분들과 정신 및 발달 장애를 가지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체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비록 신체는 불편하지만 정신적으로 오히려 큰 방황을 하게 됩니다. 장애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기 까지는 엄청난 과정을 겪게 되지요.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지능이 낮은 정신 지체장애인들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고 싶어하는데요, 반면에 정신 및 발달 지체장애인들은 신체의 결함은 있지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신체 장애인들을 부러워 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는 아픔이 다른 누구의 아픔 보다도 크다고 생각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순간들을 겪으면서 얻은 수확이라고 한다면 인생관, 즉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획득하고 성취하고 올라서기를 하면서의 기쁨을 얻었는데 아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장애아인 딸을 낳아 기르면서 내려오는 즉 낮아지는 삶을 배우면서 기쁨을 얻습니다. 특히 장애 사역을 하면서 제 자신이 그들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행복하고 잘 갖추어진 사람인가를 깨달음으로서 경쟁해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삶이 아니라 아래로 계속 내려오는 삶인가를, 즉 좀 더 겸손한 삶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 보니까 세상에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아웅다웅 하기 보다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나더군요. 물질, 명예보다는 예수 사랑을 남겨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것이 저의 인생관, 신앙관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장애사역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들을 돕는다는 생각이 가득 찼지만 사실은 제가 그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표현하는 반면에 저는 걱정하고, 계산하고, 의심하고, 많은 경우 속과는 다르게 밖으로 가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더 큰 장애인임을 깨닫습니다. 그들에게서 순수성을 배우면서 날마다 행복하게 마음 편히 사는 법을 배우며 살고 있습니다.


eKOSTA 노 목사님은 어떠세요?


노진준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고난을 통한 인생철학을 말하라면,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것과 마찬가지로, 고난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고 허락하신 소명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제가 그 동안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도 크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 것들을 제가 누리면서 사는 것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나누면서 살수 있을까 하던 중에 제 아내와 제가 결정한 것이 입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내 아들을 한국에서 입양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 만 네 살이 되는데요. 저희가 참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려고 온 아들인데 언어발달장애가 있는 것을 봅니다. 아직도 몇 군데서 검사 받고 있는 중인데요. 처음에는 좀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KOSTA 목사님, 그때 아이를 입양하실 때 아이가 장애 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나요?


노진준 그땐 몰랐습니다. 그 당시 검사 할 때는 다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검사가 끝나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 부분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시고 감당하시라고 하신 일이니까, 내가 목회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고난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너무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실패 (고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이 늦어지는 것 같고 떨어지는 것 같지만, 내가 겪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알게 모르게 다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그러한 생각/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들을 대하려고 합니다.


eKOSTA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물질적 축복이 많이 강조되고 있는 현시대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기가 힘이 드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의 방법이 아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순결하게 살아 갈 수 있는지요?


노진준 저희들이 전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과 실력을 의미하기 보다 그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 또,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에 대한 점, 이런 것들이 더 문제가 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성공의 동기보다 어쩌면 성공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 자체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보통 얘기하고 그 frame 에서 생각하고 말하면서 거기서 겸손하자고 말하고 낮아지자고 말하는 자체가 내가 높아진 것을 전제로 말하는 것인데 그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피바디 음악학교에서 성경공부를 인도 하는데 한 competition 에 여러 명이 참가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한명은 1등하고 나머지는 떨어 지는 것 인데, 그 중에 한명은 성공했고 나머지는 실패했기 때문에 그 성공한 한 명에게 섬길 수 있는 더 귀하거나 큰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저는 섬기는 것은 절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동일한 위치, 같다고 생각 되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가 높은데 올라가서 섬기게 되자, 최고가 되서 밑에 사람들한테 주자, 그래야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 수 있다 해서 내가 이미 높아졌다고 생각해서 주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턴 정말 섬기는 부분에서나 받는 부분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아닐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어떤 위치에 우리가 있게 될지 모르지만, 그 어떤 자리든지 그것이 섬김의 자리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되고 또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을 성공이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황윤엽 물질적인 축복이라 하니까 많은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인 명예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리고 자녀와 본인의 질병, 경제적인 어려움을 하나님의 저주나 징벌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의외로 많이 발견 되었어요. 실제로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도 몇 주전에 사회적/경제적 부유함이 축복으로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고 설교하시는 것을 테이프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덧붙여서 어려운 와중에서도 십일조와 새벽기도를 계속하면 기도 하는 것들이 앞으로 꼭 이루어 질 거라고, 본인 때에 아니더라도 자식 때에 꼭 이루어 질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많은 경우에 저희 식구가 참석하는 기도모임에 간혹 이런 기도나 말씀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정민이 부모의 믿음이 강건해서 정민이 같이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를 저희 부부에게 주셨다고.. 또는 고난이 믿음을 단련 시키는 줄은 알지만, 본인 자신은 믿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니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고난으로부터 지켜 주 십사 하는 말씀도 하시고… 사실 저도 쉽지 않는 삶을 살면서 또 그게 순간순간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아는 처지에 이런 고난의 삶을 누구에게 권해 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누구나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아까도 말씀했지만, 고난 중에서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허락해 주시쟎아요? 그리고 아직 고난과 절망을 통해서 주시는 영적인 단련을 경험해 보시지 못 한 분들과 또 그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 제 경험 한 가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통과 절망 한 가운데 계신 분들한테 특히 기독교인 분들에게 ‘기도해보세요’ 라고 충고해 주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대신 ‘제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하시거나 아니면 그분 모르게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 하시는 게 훨씬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 또는 제 주위의 경험을 비추어봐서 가령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 오신다던가 해서 이런 저런 부흥회나 각종 기도모임에 참석을 권유 받을 때마다 참 힘들 더라구요. 또 그 이후의 후유증도 작지가 않고요. 물론 그 권유해 주시는 분들의 호의를 깍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 아이를 가진 부모의 심정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거든요. 정말이지 해보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게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의 부모의 기도나 장애를 가진 본인의 기도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거든요. 근데 그 기도하러 오라는 권유가 힘든 도전을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저의 피해의식도 한 몫을 하겠지요.


또 한 가지는 많은 경우에 저희 식구들에게 호의적인 분들 가운데, 가족 중에, 혹은 가까운 분들 가운데 어려운 고난을 겪고 계시거나 겪으셨던 분들이 많이 있더군요.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주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눈을 열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또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은사라고 생각이 들어요.


김홍덕 물질적 축복에 대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축복으로 생각하는 것 – 돈, 명예, 학식,권력- 등을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치 최고의 축복인 것처럼 하는 가르침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근데 저는 생각하기를 돈, 명예, 학식, 권력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그러한 조건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이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 지면 그것은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돈과 명예, 학식, 권력을 빼앗아가시면서 까지 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축복이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부인하는 삶, 순결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저도 끊임없이 이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중세시대에 깨끗하게 살고자 고행을 했던 많은 수행자들이 결국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말씀에 굴복한 것처럼, 깨끗해지려고 하고 부인하려고 노력해 봐야 순결해지거나 자신이 부인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폭 싸이는 것이 부인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의 보자기로 우리를 덮는 것이 참된 부인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사역초기에는 정의감에 까발리고 지적하는 것이 순결한 삶이며 청명한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역을 하면 할수록 십자가의 순결은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라고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이웃들의 허물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eKOSTA 좋은 말씀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분 모두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요즘 유학생들의 추세도 역시 성공지향적 혹은 흥미 지향적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진준 유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성공 지향적인 생각과 흥미 지향적인 생각의 삶이 어쩌면 지나치게 “suffering phobia 에 걸리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두려워 하고 무서워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인생을 kingdom perspective 에서 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가질만한 가치관, 인생관이 뭘까 하는 생각을 유학생들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그리고 그 사고에 의해 행동을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기복적인 모습을 당연시 하게 생각하고 의아한 모습들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기독교에서의 추세라고 한다면 이는 세속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화와 영적인 것을 더 이상은 종교 적인 것과 비 종교 적인 것으로 나누려 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을 의식하고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보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우리 인생을 보는 것으로 나누어 좀 더 깊게 사고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 했으면 하는바람입니다.


황윤엽 저는 유학생 여러분께 이런 것도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자기 분야의 프로로서 실력을 갖추고 주님을 향한 열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실제로 성공 지향적인 생각과 흥미 지향적인 것을 우려 하시지만, 저는 자기 분야에서 일정부분 성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때 발전소에서 전기가 생성되듯이 높은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섬길 때 많은 영적인 전기가 생성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주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 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학생들이 그런 성공 지향적인 생각과 흥미 지향적인 것을 궁극적으로 그 목적을 주님께 영광 돌린다는 자세로 임한다면 과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KOSTA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가 전공한 분야나 기술을 사용한다는 말씀이 되겠네요.


김홍덕 황 박사님의 말씀에 대해 동의를 합니다. 성공 지향적인 것과 흥미 지향적인 것이 동기 유발 측면으로 볼 때는 좋은 요소가 있습니다. 크리스챤도 성공해야하고, 하는 일에 재미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고 저도 믿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동기가 중요하겠죠. 성공 자체가 동기가 될 때 갖은 편법을 쓰게 되고 거기서 또 다른 죄악을 낳습니다. 근데 전 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각 방면에 크리스챤 전문가가 부족 하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사회, 문화, 예술 모든 방면을 점령하고 굉장히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지금은 특별히 잘 나가는 남자 형제들은 다 목사, 선교사가 되고 그리고 또 갑자기 은혜만 받으면 회사 내에서 성경보고 옆 사람 전도하려고만 합니다. 자기가 몸담은 직장을 발전시키고 사회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관심을 두기 보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 때에 전도자의 삶을 살라고 하는 그 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좁게 적용 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세상의 문화발전을 위한 명령에 등한시 하는 모습은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이 각 방면에 전문가가 되어 큰 목적을 가지고 주님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KOSTA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문명의 발달과 모든 일을 쉽게 이루려는 개인 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특히 기독 유학생 혹은 전문인 그리스도인들 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황윤엽 저는 우선 유학생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 분야의 프로로서 실력을 갖추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한편으로 주님의 향한 열정도 함께 유지하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자기 전공 분야에서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과 가치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을 것 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며 그에 맞는 가치관과 기독교인으로서의 가치관이 한 몸에 서로 별개로 존재해 필요할 때 마다 편하게 바꿔 쓰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민과 기도를 통해 기독 전문인으로서의 일관된 가치관 정립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저같이 life science 을 전공한 사람의 경우 인간복제나 각종 유전자 조작 식물에 의한 식량난 극복 같은 것이나 진화론에 대해서 기독교인이자 또한 전문인으로서 입장정리를 하는 것이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KOSTA 김 목사님은 어떠세요? 아까 계속 공부하는 방식이 다른 점을 말씀해주셨는데요.


김홍덕 특별히 전공선택에 있어서 쉽게 학위 딸 수 있는 학교, 전공, 교수, 또는 job을 쉽게 딸 수 있는 전공, 이런 것들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나중에 포기하는 사태가 많이 일어납니다. 사실 자기와 적성도 안 맞고 재미도 없는데 하기 쉬운 전공을 택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가 권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자기가 전공을 한 후에 평생 즐겁게 enjoy 할 수 있는 전공, 정말 평생 enjoy 할 수 있는 그러한 부분, 분야를 전공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결국엔 공부하는 과정이 학위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렵게 학위를 받는 과정 속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이 받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 자랄 수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진준 네, 제가 코스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영생을 천국에 두려고 하지 말고 믿는 순간부터 누리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살아있는 능력으로 받아 들이시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 할 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 하지 말고 부활의 소망이 정말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면 좋겠습니다.


황윤엽 조금 덧붙이자면, 근래에도 인간 복제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는데, 미국 언론에서도 많이 떠들고 또 각 지역 교회 목사님들도 그런 문제들을 설교 말씀 중에 많이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한 입장 정리는 사실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구체적이거나 과학적인 데이터도 없고 해서 입장정리가 참 어렵 잖아요. 가령 유전자 조작 식물에 의한 식량난 극복 얘기도 나왔지만, 결국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생명에 인간이 손을 대서 유전자조작을 통해 식량난을 극복하는 것이 이게 과연 옳은 것인가. 실제로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식량난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들. 또 진화론에 관한 얘기도 저 같은 경우는 아주 보수적인 분들과는 입장이 다르지만 결국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할 때, 해당 분야의 전공을 하신 분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입장 정리를 해서 목사님이나 주위의 기독교인들한테 제대로 된 의견을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설명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가령, 예전에 밀레니엄 버그 같은 경우도 실제로 IT 관련 전공하신 분들은 크게 별일은 없을 거다 라고 예측을 하셨는데도, 많은 목사님들이 2000년이 넘어가면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씀을 하셨고 결국 두려운 마음에 실제로 강대상에서 적절하지 않은 말씀들을 하시는 것들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각 분야에서 실력 있는 기독교인들이 각종 새로운 사건들이나 이슈에 적절한 입장 정리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탕은 역시 주님에 대한 신뢰이겠죠.


eKOSTA 마지막으로 하시고 말씀이 더 있으신 가요?


황윤엽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아버지가 주님께 부탁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하시니깐 이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는 말을 했는데, 저는 이 말이 저에게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머리 속으로는 깨달아도 가슴이 달궈지지 않으면 변화가 힘들고, 또 가슴이 달궈진다 한들 제 몸 속에 40년이나 가지고 있던 버릇들을 깨뜨려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게 하는 것도 참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1년 넘게 새벽기도를 하면서 느낀 것인데 저 개인적인 열심으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다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내가 열심히 해야지, 내가 빼먹지 않고 기도를 해야지 라고 하며 이런 것들로 인해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을 했지만, 한참 지나고 나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열심이나 그러한 환경들도 주님께서 주선해 주셨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eKOSTA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부활절을 바탕으로 삶과 신앙 생활에서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요, 늦은 밤 까지 참여하셔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