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가족 요법 (Family Therapy-2):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

기독교사 리포트


가족 요법 (Family Therapy-2):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


지난 달에 이어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위해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치료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장애 학생들의 부모님들과 아이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 상담을 하다 보면 한결 같은 말씀들을 하십니다. “도대체 우리 아이에게 왜 이런 장애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제대로 가르치려고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책도 많이 읽어 주고 아이와 대화도 많이 했는데, 왜 우리 아이에게 장애가 생겼는지… 내가 아무래도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봐요. 우리 가족들이 무언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대신 죄 값을 치루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아이가 갖고 있는 장애는 가족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고 아이는 그 죄 값을 치루는 희생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가족 중에 있을 때 가족들은 그 질병의 원인은 하나님으로 받은 죄의 삯, 혹은 흔히 가족들의 잘못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그릇된 고정 관념을 조금이나마 바꾸고자 생긴 가족 치료 요법의 하나가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입니다. 현대적 가족 요법 (Post Modern Family Therapy)에 속하는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는 단어 그대로 ‘psycho+Educational’ 즉,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라는 뜻으로 일반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병으로 인한 현재의 상태를 이해하며 앞으로의 해결책에 대한 지식을 배우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가족들은 대부분 의사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환자의 정서적인 면에 무관심 하기 쉬우나 이 치료 요법은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환자의 치유에 함께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정신과 치료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가족요법을 통해서 그 질병이 생긴 원인이 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돕는 일을 통해서 섬김의 자세를 배우게 되기도 합니다. 한편, 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병을 이해하는 가족들 덕분에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질병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으며 가족들의 역할이 의사의 역할 만큼 중요하고 가족들은 긍정적인 시각에서 이를 받아들여 해결책을 찾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는 강조합니다.


가족 요법은 우리 기독교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유사한 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삶 속에서의 고통(질병, 장애, 고난)의 문제는 누구의 잘못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인 지를 따지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장애(질병)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둘째, 어떤 장애(질병)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니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가 서로를 위한 섬김의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룻 (Ruth)과 나오미의 예화를 보면 흉년이 들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살아가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하려는 며느리 룻을 통해서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 가족 치료 요법을 장애인 가족들에게 한 번 적용해 봅시다. 장애아이를 둔 가족들은 그 아이의 장애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죄책감 때문에 늘 고민과 근심 속에서 그늘진 얼굴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psycho-educational Family therapy를 적용했을 때 상황은 매우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다운 증후군 (Down Syndrome)을 가진 장애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아이의 가족들은 왜 우리 아이가 다운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졌는지에 대해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다운 증후군의 정의와 특징, 그리고 다운 증후군 성장 발달 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먼저 필요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운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갖고도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서 잘 적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 다운 증후군 아이를 둔 부모님과 그의 형제 자매들의 역할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다운 증후군 장애를 가진 가족들을 위한 모임 같은 곳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좀 더 유익한 정보들을 교환하며 사회적인 네트워크도 형성해야 합니다. 이는 다운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위해서 만이 아니라 그 가족 전체를 위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운 증후군이라는 장애 아이는 가족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사랑을 먹고 자라게 되고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보다 정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겠지요.


서로의 문제점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그 문제점을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에서 시작되는 이 가족 치료 방법을 통해서 장애나 오랜 질병을 앓고 있는 가족들에게 오히려 그 문제점들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씨앗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로마서 8장 28절

[최원영] 지선아 사랑해

eKOSTA 서평


지선아 사랑해


여기 한 자매가 있다. 3년전 만 하더라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고 난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었다. 이 자매의 이름은 이지선. 이번달의 책 “지선아 사랑해”의 주인공이다.


이지선 자매는 교통사고시 흘러나온 휘발류로 인한 화재로 전신의 55%를 화상입었다. 7개월간 온몸을 칭칭 감고 지옥과 같은 회복의 시간을 견디었다. 사고 전의 예쁜 모습은 사고 이후에는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단다. 왼쪽 손가락이 오른쪽보다 덜 절단된것이 감사하단다. 변형된 얼굴로 실망하기 보다 이제는 아프지 않다는 것이 고맙단다. 그 고통이 소망이 됨을 이해할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돕는 공부를 하러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다.


이책은 병상일기와 가족들의 편지, 그리고 본인의 생각들을 모은 글모음이다. 이 책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번째로 드는 생각은 “와, 대단하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가질수 있구나”였다. 두번째로는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아무것 도 아니구나”이다. 세번째로는 감사다. “건강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세가지 보다 우리가 이지선자매로 부터 도전받는 메세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매의 탁월한 사건 해석능력이다. 우리 앞에는 날마다 크고 작은 사건이 닥친다. 사실 이 사건들 자체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주님앞에서 재해석 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연예인으로.
아픔을 축복으로.
장애인이 된것을 그들 돕기위한 사명으로.
화상 입음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전진 할 수 있는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 믿음은 내가 선 자리에서 확증되고 증명된다. 황무지를 장미꽃 밭으로 바꿀수 있는 능력,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 저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P263


그의 말이 야고보서의 한 말씀을 떠올리게 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 2-4)

[곽준혁]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2)

코스탄의 소리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2)


– 애국심 (On Patriotism)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All a man’s ways seem right to him, But the Lord weighs the heart.” (잠언 21:2)


들어가며


두 가지 장면들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몇 해전에 뉴욕에 있는 어떤 한인교회를 방문했을 때, 광복절을 기념해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목사님의 입장으로 예배가 시작된 것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담당부장으로 지난 1년간 섬겼던 대학부에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1.5세 또는 유학 온 학생들이 한국의 전쟁반대 분위기와 이라크 전쟁 이후 고양된 미국적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 하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이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낯설지않은 ‘한국적 민족주의’ 또는 ‘애국심’의 단면이라면, 두 번째 장면은 이민 1세 부모를 가진 친구들과 부모의 학업이나 회사 일로 영주권을 취득한 학생들이 가지는 자기정체성(identity)의 문제가 노출된 것입니다.


이 장면들과 함께 이런 질문들이 뇌리를 스칩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어떤 정치적 소속감도 가져서는 안 되는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전쟁이나 민족적 갈등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과연 1.5세 이민자와 한국국적을 포기한 친구들에게 한미 간 정치적 갈등이 일어날 때 미국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좋은가. 북한을 폭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한인 1.5세나 2세들을 미국인을 대하듯 쳐다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무조건 전쟁은 안 된다는 논리로 문제들을 지나치는 것이 좋은가.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좋은 것이나, 정치는 현실이라는 이분된 초점 없고 무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인가. 모두 답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믿음과 대립될 수 있는 선택들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


학문적 토론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민족주의를 대중동원수단이나 사회 병리적 집단행동을 가져오는 원인의 하나로 취급하는 반면, 애국심은 가족에 대해서 가지는 연대 감 만큼이나 자연 발생적인 감정으로 간주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오랫동안 단일민족공동체를 유지해왔다는 자부심, 이러한 자부심이 해방과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의 동원과 민주화의 과정 속에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해 온 우리에게는 민족주의를 한갖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의아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아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일본이 서양지식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民族’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정체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수치, 기쁨과 우월감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는지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기독교인들이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하기를 오히려 주저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의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민족이 민족주의운동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이 민족을 형성시켰다는 소위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 (imagined political community)로 민족을 정의하는 구성주의 시각에서 민족주의 확산과 관련된 인식론적 변화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1) 왕과 교회를 중심으로 했던 유럽의 정치질서가 붕괴되는 가운데 성경에서 등장하는 천년왕국의 정치적 응용이 있었고, (2)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사도들의 목숨을 건 포교활동을 대중동원과 설득으로 이해한 지식인의 계몽운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대를 초월하는 정치적 충성, 수 천년 전에 이 땅을 밟았던 사람들 조차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믿게 만드는 시공을 초월한 일체감, 이런 충성을 번영(prosperity)과 영속(eternity)의 확신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로 ‘민족’이 창출되고 또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 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동시적으로 느껴지고 경험되도록 만든 바울사도의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사건에 대해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게 만든 신문의 등장과 맞물려 계몽주의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고, 갈 2:20). 만약 민족주의의 확산과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민족’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한 영웅의 죽음’으로 뒤바뀌는 과정이 서양에서 벌어졌다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동양이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민족’ 또는 ‘민족주의운동’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둘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이후에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애국심(patriotism)도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로마공화국,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품위를 제공했던 ‘조국에 대한 사랑 (amore della patria)’이라는 화두에서부터 미국인들을 일시에 숙연하게 만드는 ‘Die for Country’라는 구호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은 자기가 살고있는 터전과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애국심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회적 덕목입니다. 임금이 나라였던 시대에 君師父一體를 도덕적 근거로 여겼고, 잃어버린 자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독립 운동가들이 愛國愛族의 정신으로 자신들을 무장했었고, 신세대에게도 ‘대한민국’을 힘껏 외치며 기뻐할 수 있는 용기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고, 어머니의 언어와 자기의 생활터전을 아끼는 애국심은 개인주의로 얼룩진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을 묶을 수 있는 시민적 덕성으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아버지의 나라를 지킨다는 애국심도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 시점입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위대한 제국의 건설이라는 소명과 이기적인 욕망의 확대된 집단심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알게 된 우리에게 애국심도 더 이상 아름다운 감정일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애국심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으로 전환되었을 때 침묵하는 것이 더 이상 용납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 속 ‘민족’ (Nation)


민족주의와 애국심 모두가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묵상해 보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성경이 전하는 ‘민족’과 관련된 내용들을 무의식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염려가 생긴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일천하지만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구약에서 민족(nation)으로 번역되는 단어 고이(gowy)는 족속과 ‘하나님의 약속’이 합해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민족이 가지는 국민주권과 정치적 통일체와 같은 의미들은 여기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혈족이 가지는 역사적 혈연적 동질성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아브라함의 핏줄이 기준이라면 이스마엘의 자손들도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로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에 상응하는 축복을 기준으로 이방인(the Other)과 우리(We)를 구별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이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보다 이방인(the Other)을 지칭할 때 더 많이 사용되는 사실도 구별의 기준이 인간적인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시편22:27).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기준을 핏줄로, 약속을 선택으로 이해해서 만들어낸 차별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 유다의 왕 다윗에게도 따져보면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에서도 민족은 ‘족속’의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할 때 사용된 단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민족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ethnos입니다.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natio와 유사하게 삶을 공유하는 집단 또는 족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 어입니다. 민족의 고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근대 민족국가 이전에 형성된 정치적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ethnicity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Gentile Christian)을 지칭할 때 ethnos를 사용했고, 개역성경에서 번역자들은 ‘족속’이나 ‘민족’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예, 마태 22:19). 여러 가지 맥락에서 ‘민족’은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이 기준에는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민족 관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고난과 위로를 받으면 모두가 같은 민족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중동의 끝없는 민족분쟁과 공격적인 미국의 애국심이 기초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1)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출 22:21, 23:9, 예레미야 7:6), (2)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 22:22), (3) 고아와 과부를 두둔해 주라는 (이사야 1:17) 말씀을 받습니다. 만약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고,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기 위해서” 일으켰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 58:6). 그러나, 미국이 이기와 욕망에 이끌려 전쟁을 했다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무한 결과로 우리 모두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로마서 3:29). 로마를 꿈꾸는 미국이 ‘힘’의 면류관(stephanos)만을 받아쓰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는 흰 말을 탄 자같이 행동한다면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6:2). 때늦은 감은 없지않지만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애국심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남다르게 강한 우리나라도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이 진지하게 토론되고 정리되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기 전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정당한지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Christ Inside & Love Outside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민교육을 세계인류의 보편적 도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정치 철학자들의 주장이 서구중심의 ‘보편’으로 차별만 가져온다고 반대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 (Love)이 차이를 극복하고 편견을 보편으로 바꿀 유일한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국가간 민족간 갈등 이전에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면 설사 총부리를 맞들고 있다 하더라도 순화시키고 또 선한 일로 이끌 그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기쁨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도, 처 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도 예수님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넘쳐 날 것이며 이 사랑은 곧 모두가 싫어하지 않는 보편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코스탄의 소리를 써오면서 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또 말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인간의 욕망과 믿음의 언어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지않는 것을 보면서 가지게 된 책임의식이 저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실패와 좌절, 기쁨과 환희를 가져 다 준 시간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저에게 격려를 아끼지않으셨던 동역들과 이코스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주님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소망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박성호]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찬양을 이야기 하자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2003년 코스타가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2002년 7월, 위튼 칼리지 에드만 채플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의 벅찬 함성 소리와 도전적인 메시지들의 파릇파릇함, 채플을 가득 채우며 수많은 이들에게 찾아가 만지시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감동이 나의 영혼 깊숙이 또 다시 이번 코스타를 기다려지게 한다.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겠지만, 바쁜 매일 매일의 수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면서 보내는 나로서는 코스타와 같은 집회는 지친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재 충전시키시며 억수로 쏟아 붓는 폭포수와도 같은 시간들이다. 찬양 사역을 맡게 된 지난 3년 동안은 아무래도 받을 은혜보다는 해야 할 일과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기회를 많이 놓치긴 했지만, 어쨌든 코스타를 통해서 내 영혼에 채워진 감동과 결심들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붙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도 햇수로 7년째가 되어가면서 집회에 참석하는 나의 마음 자세도 많이 타성에 젖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늘 다시 기억하고 다짐하는 것은 코스타를 처음 경험하면서 내 영혼에 채워졌던 숨 막힐 듯한 그 감동의 시간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또 수많은 새내기 코스탄들에게 새겨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살던 얼마 전 나는 무작정 웹 서핑을 하던 중에 어느 한국에 있는 교회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보기도 게시판에서 ‘우리 딸이 이번 여름에 시카고 코스타에 참석하는데 거기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제목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 등뒤에 흐르던 소름 끼치는 듯한 감동과 한줄기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을 기도의 제목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말씀이 좋은 사역자들과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찬양 팀을 구성해서 집회를 진행하기 때문에 집회에 감동이 있는 것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어머니와 같은 이들의 땀과 눈물의 범벅으로 드려진 기도들이 하늘의 보좌를 열며 집회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원천적인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삶으로 인정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참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코스타의 찬양 팀을 기획하고 팀을 구성하는 것도 어찌 보면 권력이요 특권이다. 코스타라는 집회의 성격이 전국에서 모이는 각 지역교회에 속한 학생들의 수련회이기 때문에, 그 집회의 찬양팀을 맡게 된다는 사실은 일종의 ‘국가대표 선수단’이라는 헛된 환상을 심어 줄 사탄의 공격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집회 시간 중에서 자주 눈에 띄고 조명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사역이다. 자연히 우리의 영원한 ‘자칼 형사’인 사탄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유혹과 달콤한 무기를 가지고 찬양 사역자들의 영혼을 삼켜버릴 심정으로 덤벼들고 있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찬양 사역 팀에서 3년째 이름을 드러내고 사역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이름 석자가 알려지게 되고, 또 그렇게 알려지는 것을 즐기게 되고,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과 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코스타의 ‘꽃봉오리’와도 같은 이 사역에서 물러나서 어디론 가 옮겨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올해 역시 ‘이번 코스타에서 찬양 팀으로 같이 섬기고 싶다’는 적잖은 형제/자매들의 연락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순수한 이들의 마음 마저도 괜스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냥 낫 놓고 ‘아 그게 기역자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첫해 2001년 찬양 팀의 기억들과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주제와 어우러졌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 속에 경험했던 섬김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다시금 첫 마음으로, 새해 첫날 찬물로 세수하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음악성과 인기와 그 모든 아지랑이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기로 작정했던 내 삶의 그 모든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소담한 마음으로 다시금 찬양을 준비하며 그 분께 올려 드릴 때 흥건히 받아주실 아버지의 품을 다시금 기대하며.

[김두식] 진로 선택 이야기 하나 :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어느 젊은 기독인의 초상


진로 선택 이야기 하나 :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지난달에는 한동대 정시 면접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학교에서는 면접하러 온 지원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대학”,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등 일반인에게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는 용어들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대학이 아닌 일반 종합대학으로서는 매우 특이한 분위기라 할 수 있지요.


그 날 우리 팀에는 생명윤리에 관심이 많은 교수님 한 분, 연극연출과 번역으로 유명한 교수님 한 분, 그리고 제가 면접위원을 맡았습니다. 면접위원 세 명이 오전과 오후에 각각 2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판에 박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다 보면, 오후에는 ‘모든 것이 귀찮다’ 싶을 정도로 심한 피로가 몰려듭니다. 그런 피로감 속에 면접이 거의 끝나갈 즈음, 한 학생이 면접실로 들어왔습니다. 약간의 두려움이 감춰진 생기 있는 얼굴은 여느 학생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이 친구는 유난히 더 떨고 있었고, “한동대에 왜 지원하게 되었습니까?”라는 첫 질문에 대한 답부터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대학이라서” 아니면 “무전공 입학제도가 좋아서” 둘 중 하나입니다.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저는 사실 한동대에 들어오려고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학생은 이미 다른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고, 언젠가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시험이 끝난 후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대학 한동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한동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마음에 드는 대학에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냥 흘려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한동대에 원서를 넣지 않으려고 시간을 끌다가 마감일 12시를 넘어 그냥 한 번 한동대에 접속해 보았더니, 아직도 인터넷 접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할 수 없이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2) 그 이후에도 한동대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했고, 면접하러 올 교통편도 마땅치 않아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면접 전 날 저녁, 아는 분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한동대로 자동차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3) 이 두 가지 일을 겪고 나니 한동대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거역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동대로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거의 울기 직전인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위기를 느낀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명의 교수들은 그 때부터 면접을 뒤로 미룬 채,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학교를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학생이 가고 싶어하는 다른 대학도 한동대 못지 않게 좋은 대학이며, 그곳에 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학생은 눈물을 흘렸고, 들어올 때에 비해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면접장을 떠났습니다. 그 학생이 최종적으로 한동대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위의 (1)(2)(3)번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물론 (1)(2)(3)번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진로를 열어주시는 경우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을 통해 우리의 길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따지고 보면 젊은이들의 인생에 진로선택 이상의 큰 고민도 없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지, 어느 길이 욕심의 노예가 되는 것인지… 고민은 끝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때가 많으십니다. 명확하게 “너는 ○○(교사, 목사, 변호사, 의사, 목수, 사업가, 회사원….)이 되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그 뜻의 불명확성 속에서 고민하다 보면, 위의 학생처럼 이상한 느낌 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런 불명확성 속에서 지금까지 많은 진로선택을 해 왔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 제가 지금까지 해온 여러 진로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진로선택’하면 제일 먼저 사법시험에 실패했던 대학 4학년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 부딪혔던 고민은 간단했습니다. ‘목회자가 될 것이냐, 법률가가 될 것이냐.’ 저는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면서도 다행히(?) 한 번도 ‘서원’이란 것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법시험에 낙방하고 나니 제일 먼저 ‘목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시절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과 오간 대화 한 토막도 떠올랐습니다. 그 때 저를 무척 아껴주셨던 선생님께서는 지나는 말로 “김두식, 너도 서울 법대 갈 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하나같이 서울 법대로 목표를 정했던 시절이었으니 선생님께서 ‘너도 뻔하지?’라고 시큰둥하게 물어보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니요. 저는 목사가 될 겁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던져 선생님의 허를 찔렀습니다. 그냥 “예”라고는 말하기 싫어 무조건 삐딱하게 답변했던 것이지요. 그 대답이 신기하게 생각되셨던지, 그 때부터 선생님은 저를 “김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인권 변호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고 법대에 진학한 이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대화가 하필 고시 떨어지고 나서 다시 생각난 것도 묘한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원래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자기 욕심 때문에 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 아닌가?’하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찾은 곳이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이었지요. 예수원에 2박 3일을 머무는 동안 당시 부원장이었던 주 예레미아 신부님과 함께 기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신부님은 저에게 “준비하던 공부를 계속하라”는 대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힘을 얻어 산에서 내려온 뒤의 이야기는 이미 지난달에 적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주 신부님께서 저에게 무척 지혜로운 조언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라는 새로운 길은 현재의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선택의 범위 안에 들어온 도피성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의 90퍼센트 정도는 한 번 더 시험에 도전해 보는 쪽으로 방향 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제게 필요했던 것은 진로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저의 이런 마음을 읽으신 신부님께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저에게 대언의 형식을 띤 위로의 말씀을 던지셨던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 때 제가 목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면, 한국 교계나 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시험이나 사업에 실패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단순히 공부량이 부족해서 시험에 떨어져도, 예수 잘 믿는 형제자매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고 길을 막으시는 것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집니다. 이런 고민이 심해지다 보면, 평소에 안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대개 “주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 비슷한 하나님의 음성을 몇 번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때 이미 “주의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결코 “목사가 되어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목사도, 변호사도, 교사도, 회사원도, 다른 어떤 직업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주의 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에, 덮어놓고 신학교로 가는 오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불필요한 목사님들을 양산해 낼 수 있는 취약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목회자가 된 ‘주의 종들’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일할 사람을 억지로 구하고자 그 사람을 실패에 빠뜨리는 사악한 신’으로 만들어 버리기 쉽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샙니다만, 성도들 중에는 의외로 ‘인간만도 훨씬 못한 괴팍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도가 주일 성수를 제대로 안 하면 교통사고를 당하게 하고, 십일조를 제대로 안 내면 사업이 쫄딱 망하게 하며, 이른바 ‘주의 종’인 목사님을 비방하기라도 하면 불치병에 걸리게도 하는 이상한 분입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녀가 비뚤어진 길로 갈 때, 눈물과 사랑으로 기도하며 자녀가 돌아오기를 인내로 기다립니다. 결코 교통사고, 부도, 불치병 등을 겪도록 함으로써 자녀가 돌아오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최소한 내 육신의 아버지가 베푼 사랑보다 더 높고 크다’는 확신이 제 신앙의 뿌리가 되었음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상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주의 종들’에게 당장 벼락(!)을 치지 않으시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큰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른바 ‘주의 종들’까지도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 대한 해석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들을 통해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던 어린이를 사망하게 한 교통사고를 내어 교도소에 들어간 성도가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앙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일성수하는 성도로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주신 고난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은 A성도가 성수주일 하도록 만들기 위해, B라는 어린아이를 죽이는 가혹한 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석이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목사의 길이든, 변호사의 길이든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그게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종에 따라 주의 종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제가 첫 고민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시험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그 시험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여부를 일차적으로 검토해 보고,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실패의 원인을 찾은 후 다시 도전하거나, 다른 진로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진로를 찾는 과정에서 혹시 “주의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해도 너무 쉽게 목회자의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주의 종이 되라”는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이 음성을 목회자가 되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한다면, 한국 교회는 정말 큰 재난을 만나게 됩니다. 신도는 없고 목회자만 있는 교회만 넘쳐나게 될 테니까요.


두 번째로 어려운 선택에 마주친 것은 군법무관으로 3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 갈 때였습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저는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변호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판검사 되는데 목숨을 건 연수생들의 분위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이왕이면 남들이 기피하는 직종으로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일찍이 이런 마음을 먹은 탓에 사법연수원 2년간은 다른 누구보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진로를 결정짓는 연수원 2년차 시험을 목전에 둔 시기에 아내를 처음 만났고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연애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법원 시보, 변호사 시보 등으로 일하며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대학 후배들을 모아 신앙서적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런 편안한 마음으로 연수원 2년을 보냈기 때문에 좋은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첫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감옥까지 다녀온 후 고시 3과에 합격한 L형과의 만남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수동교회 출신인 L형은 가끔 신앙이 오락가락해 보일 때가 있기는 했어도, 그 마음 깊은 곳에 본질적인 순수성을 간직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형식화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많이 불편해하던 L형이었지만, 억지로 팔을 붙잡고 연수원 신우회 모임에 가자고 하면 못이기는 척 웃으면서 따라나서곤 했습니다. 가급적 술 먹는 모임에는 가지 못하도록 제가 억지로 붙들고 있기도 했는데, 하도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나중에는 저를 ‘수호천사’로 부르기도 했지요. 신우회 모임에 L형을 끌고 다닌 대신에,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형의 탁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비범한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사법연수원 마칠 때쯤에는 형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변호사 일을 해보자는 약속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 때, ‘L형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한 번 맡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듬직하고 신중했고, 지혜로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무엇보다 욕심 없이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 미필자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저는 먼저 군대부터 다녀와야 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면서 저는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아야 했고, L형은 제3세계 국가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판검사, 변호사의 길 대신 세계여행을 떠난 L형의 선택은, 늘 공부 안하고 노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이번에도 선두에 속하는 성적으로 연수원을 수료했다는 전설과 함께, 연수원에 큰 화젯거리를 남겼습니다.


군법무관 3년은 제대 후를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저는 “L형과 함께 변호사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침 딸 희수가 태어났고, 갑작스럽게 늘어난 가사노동의 부담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많지 않았습니다. 강원도와 대구에서 군법무관으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갈 기회도 찾기 어려웠습니다(이 시기에 저의 책 <칼을 쳐서 보습을>의 단초가 된 여호와의 증인들도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저에게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훌쩍 3년이 지나가 있었습니다.


세상일이 인간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3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L형은 워낙 살기 어려운 나라들만 골라 돌아다닌 덕분에 몸이 약해져 여행을 중단하고 얼마간의 휴식기간을 가진 뒤 귀국하여 조그만 로펌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법조계가 너무 복잡하고 재미없는 동네임을 깨닫고, 고시 특강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생계를 해결하는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지요. 처음의 약속대로 저와 함께 변호사를 하기는 어렵게 된 셈이었습니다. 저도 군법무관 생활을 하면서 법조계의 어두운 뒷모습을 알아가던 시절이라 그런 결정을 내린 L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L형과의 만남을 통해 저는 굳이 남과 똑같은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는 가르침을 받았고, 나중에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L형의 사는 모습에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군을 제대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진로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내내 한국 사회의 높은 벽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손꼽히는 대형 로펌이든, 이른바 ‘운동권’ 변호사들이 모인 조그만 로펌이든 한결같이 공개 채용 대신 ‘알음알음을 통한 사람 찾기’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알려진 로펌이 서울대 출신만을 뽑는다는 사실은 공개된 비밀에 속했습니다.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돈을 많이 버는데 목표를 둔 변호사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로펌의 파트너였던 잘 믿는 기독 변호사님 한 분은 “로펌에서 일하는 것도 국익과 공익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수입은 적어도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로펌에 합류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로펌들은 운동권 선후배 관계로 연결된 저의 동기생들이 일찍부터 빈 자리를 채운 뒤였습니다. 기독변호사 운동이 태동되고 있기는 했지만 젊은 신참 변호사를 맞아들일 역량을 갖춘 사무실은 전무했습니다. 결국 변호사가 되기 위해 남아있는 길은 독자적으로 개업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개업하기에는 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지요. 마음으로는 동네 어귀에 부동산중개소처럼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용기도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 의뢰인들에게 직접 돈을 받아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차마 의뢰인들에게 “수임료는 얼마입니다. 사무장에게 내고 가주세요”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하는 저의 태도를 보면, 이 연재물의 제목도 ‘어느 겁 많은 기독인의 초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저런 길이 다 막혀 있다고 느껴지는 답답한 상황에서 저는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판사 또는 검사로 임용을 받기 위해 서류 접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판검사 임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에서 받은 성적이었습니다. 성적이 가장 좋은 그룹은 판사를 지망했고, 그 다음 그룹은 검사를 지망했습니다. 판사들은 성적에 따라 서울-수원-대전 등의 순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있었고, 검사들 역시 성적에 따라 서울-부산-대구 등의 순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판사로 가장 순위가 밀리는 사람들과 서울권의 검사들이 보통 비슷한 성적대를 형성했습니다. 지원을 앞두고는 치열한 눈치작전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적 때문에 바로 변호사로 나가야 하는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가끔 판검사를 포기하고 대형 로펌을 택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그룹은 절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관심 밖으로 생각하고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저의 연수원 수료성적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게 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제 성적은 중간을 약간 웃도는 성적으로, 판사를 하려면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고, 검사를 하려면 서울 근무가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한 사법시험 성적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유지된 등수였습니다. 대학원을 막 시작했던 아내는 아기를 키우기 위해 1년간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하기 위해 준비중이었습니다. 딸아이를 키워주기로 하신 아버지께서는 판사로 지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연좌제가 폐지되었다 해도 검찰 쪽은 좀 어려울 거라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복잡한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일단 검찰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 큰외삼촌 문제로 인한 임용 탈락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므로 임용에서 탈락되면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의 변호사를 택하겠다는 생각과 (2) 아내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저라도 서울에서 딸아이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결심의 주된 동기였습니다. (3) 군법무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리 수사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던 ‘제대로 수사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발동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좋게 말하면 ‘제대로 수사 한 번 해 보고 싶다’였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무시당하지 않고 일해보고 싶다’는 편에 가까웠을 겁니다. 제 인생의 여러 선택 중 가장 인간적 동기가 강했던 결정이었습니다.


큰외삼촌 문제를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보겠다는 괘씸한 동기를 가지고 지원한 검사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봄과 여름의 6개월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국가조직이 운용되는 과정을 내부에서 지켜보는 기회가 되었고, 대전과 의정부의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생활화된 부패 관행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면서 사람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고 덕분에 일 잘하는 검사 소리도 들었습니다. 초임 검사가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을 벌여놓고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수사수단을 활용해 볼 기회도 가져보았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경험하고 느꼈던 많은 것들과 검사직을 사임하게 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지면에 담기에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생략합니다. “아내가 미국 유학 중이었고, 딸아이를 키워주시던 부모님께서 너무 연로하셨기 때문에 아내를 돕기 위해 검사직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저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였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적어놓겠습니다. 당시 묵상하고 있던 성경말씀은 열왕기상이었는데, 마침 17장을 읽던 날에 사표를 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으로 떠나 초기에 많이 고생할 때에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 이야기는 우리 부부가 힘과 용기를 되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검사를 그만 둘 때에는 참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표를 낸 다음날, 검찰청 내의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가 사임했다는 것이 알려졌지요.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데, 몇 명의 일반직 직원들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평소 안면은 있었지만 이름도 잘 모르던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김 검사님. 참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신우회에 참석하는 우리 일반직 아줌마들 몇 명이 어제 점심식사를 같이 했거든요. 그런데 ○○○씨가 그 자리에서 전 날 밤의 꿈 이야기를 했어요. 글쎄 김 검사님이 자기 꿈에 나오더라지 뭐예요. 그런데 꿈 속의 김 검사님이 어딘가 멀리 떠나시더래요.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오시는데 글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하늘에서 온 것이 너무나 분명한, 오색 영롱한 음식들을 잔뜩 그릇에 담아서 들고 오시더랍니다. 우리가 어제 그 이야기를 듣고 유부녀가 딴 남자 꿈을 꾸었다면서 한바탕 웃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에야 김 검사님께서 사표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어디 가시든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분들은 제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장난스러우심에 미소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려운 선택을 하고 우리 나라를 떠나려는 저를 위로할 방법을 억지로 찾아보다, 결국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 꿈이 무슨 의미가 있든지 간에 저는 이 자매님의 꿈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을 때마다 제가 굉장히 이상한 신비주의자로 비칠까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것이니 읽는 분들도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검사직 선택과 그 사임을 경험하면서 저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동기로 선택한 직업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직업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복 주려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로를 선택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 또는 두 개의 선택 가능성을 놓고 갈등합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면 괜히 한 쪽은 하나님의 뜻인 것 같고, 다른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면 한없는 복을 받을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로 점철된 좌절의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은 ‘오직 하나’일 것이므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정도 되면 표적을 구하게도 되지요. 제가 “하나님, 큰외삼촌 때문에 검사 임용이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검사에 임용된다면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습니다. 만약 임용이 안 된다면 거리의 변호사로 나서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런 때는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 이야기가 많이 인용됩니다. 기드온의 경우처럼 표적을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검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에서 2년 동안 아기를 키우면서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머물며 인터넷을 통해 우리 신문들을 읽어볼 때마다, 저는 저와 함께 검찰청에서 근무하던 검사들이 유난히 잘 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검사장 승진이 좌절되어 실의에 차 있던 지청장은 정권교체로 인해 청와대에 입성하여 상종가를 치고 있었고, 직속상관이던 부장 검사와 다른 동료검사들도 검찰 내 꽃 보직들을 찾아가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검사를 택했든, 변호사를 택했든 양쪽 길 모두에 복 주실 작정을 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검사로 남았다면 검사로서 잘 커가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고, 검사를 그만 두고 집에서 애를 키우는 동안에는 또 그걸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로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직업이냐 저 직업이냐가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법률가로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은 것이 됩니다. 반면에 제가 이 말씀에 반하여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아무리 좋은 직업을 선택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런 새로운 발견은 저에게 큰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검사직 선택 여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복 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것이 선한 동기에 기초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마도 검사직 선택보다, 그걸 그만두는 쪽이 동기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범위가 적은 결단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검사를 그만 두었고, 하나님께서 그런 작은 헌신도 선하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검사를 그만둔 이후, 저는 보다 모험적인 인생에 뛰어들어 삶을 즐기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감사드리는 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진 로선택을 눈앞에 두고,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고민중인 분들에게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에게 그런 헌신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헌신의 길에 나설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줄 아는 분이십니다. ‘이 길에도, 저 길에도’ 모두 복 내릴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알고 나면, 진로선택은 고민과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축제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