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호] 빌립보서 1장. 복음 안에서의 생존 전략


8 월14일 오후 4시. 미국 뉴욕과 남동부,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한 북동부 지역에 사상 최악의 정전사태로 대도시가 호흡을 멈췄다. 교통, 통신..등 도시가 대혼란에 빠져 5천여 만 명이 암흑의 고통을 겪었으며 7조원의 피해를 가져왔다. 최첨단 시설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후진국형 대형사고가 터진 셈이다.



그 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빛이 꺼지면 세상은 암흑의 고통에 빠진다. 암흑은 모든 삶을 정지시키고 고통과 절망을 가져온다. 고통의 게헨나 ‘흑암’을 몰아내는 것은 오직 빛뿐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빛의 사명보다 소금의 사명이 먼저 요구되었다. 소금의 순결한 삶이 우선될 때 빛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휠라 코리아 윤윤수 대표이사는 최고경영자에겐 세 가지 3S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Speed. 정보의 즉시성,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Strong. 강력해야 한다. Smart.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고객과 임직원을 섬기며 부드러운 열린 경영을 해야한다.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동일한 3S 덕목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다. 세상 속에서 도덕적인 모범이 되어야 한다.



빌 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생활과 사역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복음의 세 가지 삶의 방식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순결한 삶을 살려면 ‘복음에 대한 절대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을 중심으로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의 생존과 능력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복음의 절대정신을 소유하기 위해 바울의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빌립보서 1장엔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바울이 자서전적인 고백을 쓰고 있다.



  •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첫 번째 삶의 방식. 복음의 교제(1:3-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 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합동신학대학원 교장이셨던 김명혁 목사는 “인 생에 필요한 것은 만남이다. 구원도,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우리의 삶이 복음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의 확장이 필요하다. 유학시절, 도서관에서 공부가 전부인줄 알고 생활하다가, 만남의 축복을 깨달았다. 주말엔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피크닉과 운동회를 가지면서 만남의 축복을 더욱 깊이 누리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자도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었다.”고 칼럼을 쓰셨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교회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끝까지 지속되는 만남이다.


교제의 중요성(1:6-8)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첫 번째 중요성(6절) ‘시작’과 ‘이루심’은 양끝을 의미한다.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다.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그분의 은혜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10년 전 빌립보교회가 회심했을 때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의 일을 완전케 하실 것을 주님이 보장하신다고 말한다. 복음 안에서의 참된 교제를 통해 주님께서 ‘선한 일’ 곧 구원과 인생의 완전함을 성취해 가신다.



‘ 나홀로 족’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은 결국 플라스틱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주님은 ‘따스한 관계’ 안에서 일하시고 역사 하신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속에서 고립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순결이 아니다. 도피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따른 지 수년이 지나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다. 그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간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바깥에서 숨어사는 신자들일 뿐이다. 바울과 빌립보교회에서 보여준 우정을 세상에 보여주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헨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셨다.



두 번째 중요성(7절) 빌립보 교회는 ‘다 나와 함께 참예한 자들’ 이었다. ‘매임, 변명, 확정함’은 모두 법률적인 용어다. ‘확정’은 계약이 법적으로 유효함은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마음에 있었다.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전도사역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좌절을 함께 나눈 교회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오늘 교회도 세상에 대해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 자살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자살자 숫자도 1991년 6,593명에서 2002년 1만3,055명으로 10년 사이 2배로 증가했다. 연세대 황상민 심리학교수는 “자살하는 사람은 쉽게 죽는 방법을 선택한다. 고층아파트와 고층빌딩 밀집이 음독자살하기 위해 약을 사야하는 시간이 필요 없는 투신자살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투신자살 현상을 해석했다. 또 다른 교수는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투신자살을 하게된다”고 분석했다. 카드 빚을 견디지 못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 좌절하다가 막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는 1시간에 1.5명이 자살하는 현 사회에 대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의 순결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굿 모닝시티 분양 사기 사건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대형사고였다. 자본금 7억으로 9천억 짜리 사업 프로젝트를 사기치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투자자 3천여 명의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 모은 돈을 다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인 4억2천만 원이 민주당 정대철 대표에게 대통령 만드는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국민들을 실망하게 한 사건이었다. 대선 자금 절반 이상이 돼지저금통에서 나왔다던 대통령의 말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기 사건의 주범 윤창렬씨는 기독교인이었다.



세 번째 중요성(8절)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교제는 고품격의 교제였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만들어지고 성취된 우정과 사랑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극진한 사랑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생명과 거룩함은 사랑이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술과 담배. 영화보기.. 도덕적 기초수준이 아니라 세상에 흉내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심장’의 사랑이 기독교인의 윤리이며, 삶의 스타일이어야 한다.



화 가 이중섭 선생은 앓고 있는 친구 문명을 가면서 “미안하네, 벌써 찾아오려 했는데 빈손으로 오기도..” 하며 말을 흐리자, 친구는 “빈손이면 어떤가, 자네 형편 다 아는데..” 이중섭 화가는 들고 온 물건을 친구에게 건네주며 “자네 주려고 가져왔네. 이걸 가져오느라 좀 늦었지. 복숭아 그려왔다네.. 복숭아 사줄 돈이 없어서, 그려만 왔네..” 이중섭 선생의 따뜻한 우정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그 그림은 그의 심장으로 그려온 따뜻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교회에 대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챔버스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 그분의 사랑을 다시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면 복음의 첫 번째 삶의 방식인 ‘복음의 교제‘야말로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복음의 절대정신이라고 확신한다.

[이시훈] 싸이렌의 노래

이코스타 2003년 9월호



올 여름 많은 시간을 저는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낚시에 재미를 붙여서 어쩌다 시간이 나면 선택의 망설임도 없이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바다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무척 더운 날 대낮에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서있기도 했고, 갑작스런 폭우를 만나 물고기처럼 젖은 채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도 얻게 되더군요. 이를테면 가는 장소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가 다른 것과 물고기가 몰려드는 시간을 맞추는 것, 특정한 종류의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간과 고기떼의 움직임으로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손길이 분주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기도하고, 어떤 날은 종일 허탕을 치면서 깜찍하게 미끼만 먹고 달아나는 피라미나 게 때문에 미끼 끼우기만 바쁜 날도 있고, 엄청난 대어를 만나 흥분하여 힘을 쏟으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낚시 줄을 끊고 달아나는 놈의 꼬리를 바라보며 허탈해지는 경험도 몇 번했습니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바다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점점 낚시하는 일, 고기를 잡는 일보다는 다른 것에 마음과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낚시 대를 던지기 위해 바람의 방향을 잡다가 바람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할 일을 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시간마다 변하는 바다의 색과 물결의 모양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이 더 많아졌지요.



넓은 평면의 바다는 자칫 단순한 경치 때문에 지루할 것 같이 생각되어지지만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바다는 얼마나 다른 얼굴과 표정을 보여 주는지 모릅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 바다의 붉은 수면과 해가 지는 저녁의 붉은 수면이 얼마나 다른 색조와 분위기를 그려내는지, 가슴 벅참과 어떤 애상, 희망과 애잔함, 신비함, 쓸쓸함.. 큰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게 합니다. 해가 뜨거운 날 일수록 잔잔한 바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주기도 합니다. 더위로 인한 짜증이나 불쾌감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지요.



깊은 밤이 되면 낚시하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물결 소리와 뒤섞여 묘한 화음을 이룹니다.



조명등의 빛을 받아 윤곽을 드러내는 물결의 하얀 포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있는 동물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다와 맞닿은 하늘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다투어 신호를 보내듯이 반짝이는지요 !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생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음성으로 들은 자는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이 벅찼을지,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제 자신이 최초의 인간이 되어 그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바다의 전설 중에 싸이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끝없는 바다의 지루함과 오랜 항해로 지친 어부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유혹하여 배를 암초에 부딪치게 하는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들의 전설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망망한 바다를 지도도 없이 별빛에 의존하여 길고 긴 길을 가는 어부들의 불안하고 지친 마음에 섬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모든 것을 잊고 홀려 따라갈 정도였나 봅니다. 지혜로운 어부들은 싸이렌의 섬을 지날 때 귀를 막았고, 율리시즈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밧줄로 묶게 함으로써 무사히 섬을 지나쳤다는 전설을 기억합니다.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그 변화와 느낌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있다보면 우리의 삶이 긴 항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내면서 때로는 잔잔하고 지루한 노젓기를 계속해야하고 때로는 거친 풍랑과 어둠을 견디어 내면서 자신이 가는 길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수없이 자문해야 하는 항해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이끌려 가듯 운명의 행로에 순응해야하기도 하고, 순간마다 판단과 결단을 내리며 모든 상황을 극복하여야 하는 선장의 역할을 감당하며 내 삶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야 하기도 합니다. 때론 지치고 절망하며 노 젓는 손길을 멈추고도 싶고 난데없는 풍랑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수고를 멈추! ! ! 고 평안의 섬에서 쉬어 가라는 유혹이 나를 흔든다면, 그 아름다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쾌락과 죽음의 검은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소리를 향해 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막한 바다를 건너는 우리에게 다행히도 지도 대신 빛나는 별빛이 있기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목표를 향해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폭풍우에 별빛이 가리워도 우리 마음 속에 등대가 되어주는 그 빛은 변함이 없습니다. 싸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은 어부처럼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은 율리시즈처럼 말씀에 귀를 집중하고 십자가에 나를 묶는다면 어떤 세상의 유혹도 그릇된 가치도 초연하게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배가 영원히 귀착할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돛대가 되어주시는 분, 그 분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향해할 수 있으니 우린 얼마나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인 지요.



거대한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처럼 힘없고 보잘것없는 제 자신을 느끼면서 이렇게 작은 존재가 바다와 땅의 주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격을 하곤 합니다. 그 넘치는 사랑이 물결처럼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바람결처럼 나를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깊고 아름다운 무한의 사랑의 바다에서 한껏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최영기] 대형 교회는 믿는 이의 유입을 막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 주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미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계신 방문자들은 약한 교회에 가서 돕고 섬기실 것을 권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미 믿고있는 사람들의 수평 이동에 의하여 교인 숫자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10년 전 제가 휴스턴 서울 침례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할 때부터 타 교인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자기 교회로 돌아가거나 다른 교회로 갈 것을 권했습니다. 소속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하여 그 교회 교인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음을 알렸습니다. (전화 받은 목사님들이 고마워하기보다는 불쾌해 하셔서 요즈음은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타 교회 교인들은 아예 안 받습니다. 타지에서 이주오신 분이라도 믿음이 있는 분 같으면 구두로 한번, 서면으로 한번, 다른 교회를 찾아볼 것을 권합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작은 교회에 대한 배려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주최하는 가정 교회 세미나에 참석하는 목회자들의 대부분이 작은 교회를 섬기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 중에서 대형 교회로 인한 설움을 토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껏 전도해 놓으니까 대형 교회에서 버스로 데려갔다든지, 교회 문패를 붙여놓았는데도 전도사가 굳이 찾아와서 자기 교회에 등록시켰다는 등 개척하는 목회자들 가슴에 못을 박는 에피소드를 흔히 듣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에 도움이 되어야지 피해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교회 배경이 있는 분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기독교 배경이 전혀 없는 분들을 예수 믿도록 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1-2년 정성을 들여야합니다. 그래서 급속한 교회 성장을 꿈꾸는 목회자들이 불신자 전도보다는 믿는 분들을 모아들이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안 됩니다. 큰 교회는 좋은 프로그램도 있고 인적 자원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원을 사용하여서 불신자를 교회에 오도록 하여서 예수를 믿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교인들을 작은 교회에 파송 해 주어야지 작은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 와서는 안 됩니다. 작은 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불만족스럽거나 분규가 생기면 시설이 좋고 프로그램이 많아서 편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는 대형 교회로 몰려듭니다. 대형 교회는 ‘오겠다는 사람들을 어떻게 말리느냐’ 식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믿는 이들의 유입을 막아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타 교회 교인을 받지 않는 것으로 이제는 소문이 났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싸매고 등록하는 타 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의 시책을 알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올 엄두를 못 냅니다.



타 교회 교인들의 유입을 막고 불신자 전도에 집중할 때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영혼 구원의 열매가 있게 해주셨습니다. 작년에 저희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분의 숫자가 한어 장년부만 163명입니다. 매주일 3명 꼴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영어부와 중고등부 숫자까지 합치면 220명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2000년도 인구 조사에서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만 3백 41명으로 집계된 것을 생각할 때에 이 숫자는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현재 어린이까지 합친 전 교인 주일 출석수는 1,400-1,500인데 대부분이 새로 믿은 분들입니다.)



둘째는 교회 생활이 행복하다는 고백이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은 보통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의 교회 관이 있기 때문에 의견도 많고 불만도 많습니다. 그러나 새로 믿는 분들은 우리 교회밖에 모르기 때문에 잘 순종하고 따라 줍니다. 그러니까 본인도 행복하고 교회도 밝습니다.



꼭 작은 교회를 배려해서만이 아니라 밝은 교회, 행복한 교회를 만들기 원한다면 중대형 교회들은 믿는 이들의 유입을 막고 불신자 전도에 집중해야한다고 믿습니다.



[박성호] 월드컵 세대를 향한 작은 생각

이코스타 2003년 9월


얼 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워싱턴 지역의 한인교회에서 활동하는 몇몇의 청년사역자들과 오랜만에 깊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우리는 청년 사역에 관한 이런저런 고민들과 생각들을 나누다가 주제는 어김없이 예배와 찬양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한 선배는 이렇게 그의 고민을 표현했다. “우리 시대에는 고형원의 부흥을 부르며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고 자신의 젊음을 돌아보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N세대들에게 그러한 정서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80 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한 다른 선배는 이런 고민을 나누었다. “요즘 불리는 찬양들을 보면 도대체가 단조, 마이너(minor) 찬양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같이 밝고 분위기 띄우는 찬양들이에요. 때때로 그런 찬양곡조들은 우리의 다른 정서를 나타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와 동시에 나는 이렇게 반론했다. “요즘 세대의 문제는 단조로 부르지 않아도 자기들의 마이너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데 있지요.” 우리는 어설픈 웃음으로 서로의 정서가 동감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맞 다.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상당히 독특하면서 전무후무한, 그래서 나와는 얼마든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세대와 함께 부대끼며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모든 새로운 세대는 전무후무한 세대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또 이렇게 생각한다. 해 아래 완전히 새로운 세대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79년도에서 84년도에 태어난 젊은이들과 함께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이제 거의 만 일년이 되어 간다. 간접적으로 지켜만 보거나 그냥 넌지시 건너뛰어서 생각하던 이들의 삶의 방식(Lifestyle)을 좀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때론 당혹감이 들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던 순간이 많이 있었다. 자유로움을 주지 않으면 거의 질식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단체적인 행동이나 막무가내의 의사결정에 대해선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을 나는?월드컵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2년도에 한반도를 붉게 물들였던 그들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엇박자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으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사귐이 매우 익숙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강한 비트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초등학생이던 92년경부터 지금까지 댄스음악이 주류음악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들과 함께 하는 예배 시간에 나는 항상 볼륨이 좀 크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멜로디 위주의 흐름보다는 비트가 강한 리듬섹션이 강한 찬양이 이들에게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볼륨을 좀 줄일 수 없겠냐?’는 고리타분한 부탁은 눈치를 보며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다. 나 역시 밝고 강한 찬양을 주로 인도하는 편이기에 이들 역시 나를 같은 편 정도로 생각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심정일까. 그러나 역시 나는 ‘부흥’의 정서와 단조음악의 정서를 이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선배들의 연민 어린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늘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축제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고백과 성찰이 담긴 묵상적인(Contemplative) 찬양을 기대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다. 나 역시 그러한 묵상적인 찬양이 갈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들뜬 금요일 밤의 열기가 아니라, 잔잔하게 가라앉은 어느 화요일 아침의 찬양을 함께 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장 바닥의 번잡함과 들뜬 마음뿐만 아니라, 적들의 화살을 피해가며 동굴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으로 퍼낸 다윗의 영성을 퍼내어 찬양으로 연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사랑하는 ‘월드컵 세대’에게 기대하는 또 한가지의 부탁과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동안 계속 되는 나의 고민과 비전일 테지만, 우리 민족(Korean 혹은 Corean)의 정서에 흐르고 있는 그 어떤 물줄기가 있다면 이제는 이들에게서 바로 그 정서와 물줄기를 담아 낼 수 있는 찬양이 어서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보아’라는 가수의 국제화를 기뻐하며 과연 이것이 우리 민족음악의 미래이기를 기대하는 것만이 대세일까.


이 들의 음악이 얼터너티브 계열의 대학로에서 들려지는 거친 롹음악일 수도 있겠고, 홍대 앞 전위적인 음악 카페에서 들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건 간에 송창식이나 강산에의 포크 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떤 민족적인 동감, 혹은 조수미의 아리랑이나 백남준의 비디오에서 느껴지는 고급문화로 덧입혀진 조선의 정서, 아니면 고형원의 ?부흥?을 부르며 시대의 아픔에 동감하던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쏟아내던 어떤 부르짖음이 담긴 그런 찬양이길 바란다. 더 이상 ?서편제?의 성공을 생각하며 순수민족음악만이 진정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도 힘들다고 본다. 70년대에 태어난 나 역시 솔직히 고백하자면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음악을 밥먹듯이 먹고 듣고 호흡하며 자란?다른?세대이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나는 그러나 윌로우 크릭 스타일의 예배만이 최상의 예배인 것처럼 호도 되는 안타까움을 나타내 본다. 윌로우 크릭의 예배는 베이비 버스터 세대인 백인 중산층들을 타겟(Target) 삼아 시작했던 전략적인 예배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예배를 걱정하며 담아낼 새 부대와 새 술을 기다려 본다.

[무명의 코스탄] 분주함에 관하여…

이코스타 2003년 9월


얼 마 전 교회 중등부에 있는 12 살 난 아이에게 요즈음 학교 생활이 어떠하냐고 물어 보았더니 한 마디로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Busy! 또 어떤 잡지에서 보니, 현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도와 생활 능력이 이전보다 매우 향상되었는데도 평균 건강은 오히려 나빠져 버렸는데, 그 이유인즉 밥 먹을 돈은 있어도 제 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현 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늘 분주하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나름대로 다 바쁘다. 그렇다 보니, 중요하면서도 당장 급하지 않았던 일들이 상황에 밀려 희생되는 경향들이 생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 이웃과 함께 하는 일, 매일 아침 말씀 읽고 주님과 교제하는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곰곰이 살펴보니, 이러한 일들은 대개 관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분주한 삶이 첫 번째로 주는 위기는 바로 우리의 가족 관계, 이웃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되는 일이다.


이 바쁜 현대인의 삶 가운데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마도 예수님 역시도 바쁘게 사역하셨을 것이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제자를 키우시고… 어쩌면 평신도로서 목수 일도 계속 겸직하셔야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셨다면 사역을 감당하느라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도록 방치하거나 택하여 가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성 경을 보니,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등 (막 1:21-39),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실제로 바쁘게 사역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행하여지고 있는 한 가운데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대목이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분주한 사역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시는 주님… 그렇다면,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는 중에 계셨더라도 주님 자신은 그리 바빠 하지만은 않으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아 마도 주님이 안 계시는 동안에, 아직도 많이 남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그리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아침부터 주님을 만나고자 몰려와 아우성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저리 당황해하며 주님을 찾고 있었을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정작 이 모든 이들을 뒤로 두고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과 옳은 일 자체에 몰두하시기 이전에, 지금 아버지께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며 순종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수 있을 법한 일을 행하는 것 그 자체보다, 매 순간 아버지께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고도 볼 수 있다.


오 늘 하루의 일을 손에서 놓고 잠들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죽을 때에도 이 땅에서의 일을 놓고 가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양의 옛 선인들이 말했던 盡人社 待天命 (진인사 대천명), 즉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나면 결과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일의 주재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겸손히 품어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러나 살다 보면,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할 일을 다한 후에 모든 뒷일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겸손히 물러나는 일이 늘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우선은, 시급히 결과를 요구하거나 사회경제적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적 요인들 탓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집착이나 완벽 추구 심리, 조금만 더! 하는 욕심, 그리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기인하는 이유들이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오천 명이 먹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전부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는 일과 우리 스스로가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을 혼동하기 때문인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동기부여에서 벗어나 주님이 중심 되시고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린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주님께 온전히 맡겨지지 않는 한은 주어진 삶을 잘 감당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그 가운데 평안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아 버지께 맡기는 삶과 사역의 표본은 역시 예수님이시다. 헨리 나우웬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특별하였던 한 가지 면모는 그분의 최후의 사역인 십자가 구원을 이루시는 과정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님은, 사람들이 심문할 때 심문 당하셨고 매를 때릴 때 매 맞으셨으며 십자가에 못박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였을 때에 죽으셨다. 그리고는 성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올리실 때 부활하셔서 그분이 앉히시는 보좌에 앉으셨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역을 완전하게 이루셨지만, 그 과정 자체는 외면적인 노력이나 분주함과 무관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내면적으로 치열한 고뇌 가운데 순종과 헌신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지만, 외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안 하셨다.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수고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귀하고 잠잠히 따라가는 것도 귀하되, 이 모든 일은 나를 향하신 그분의 뜻을 그분 스스로가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보다 큰 컨텍스트 안에서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만, 내가 한다고 해서 꼭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지 못했다고 해서 꼭 안 되는 것이 아닌 현상들을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일과 분주함에 관련하여,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관점 아래에 우리의 기회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기여라는 측면들을 겸손히 내려놓을 때에만 비로소 이 문제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다.


우 리에게 열심히 감당할 일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에선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부르셔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의 표현으로서 주신 바에 대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혹 지나치게 바쁘다면, 예수님처럼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 속의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독대하는 가운데 주님의 시각을 회복하여 스스로를 재점검해야 한다. 나의 영적 상태는 건강한지, 나를 둘러싼 관계들은 온전한지, 다른 영혼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목표를 위하여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나 아가야 할 때와 멈추어 서야할 때를 온전히 분별하여 조화된 모습으로 실천하며 사는 삶은, 분명 단순한 결심이나 노력으로 당장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일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영적인 집중력과 분별력, 매 순간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종함, 인생의 거시적인 계획들이 세워지고 실행되는 자리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내가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내려놓고 그분께 기대어 맡길 수 있는 전폭적인 믿음과 헌신 가운데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드렸던 기도를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에서 지속적으로 드리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분주함이라는 영성생활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우리의 앞에는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가 동시에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하는 열쇠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며 따르는 일에 있음은 물론이다.


여 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시 127:1-2)


(본 글의 예수님 사역 부분에 관련하여 헨리 나우웬의 Out of solitude 및 Adam: Gods beloved에 있는 내용 일부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