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그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유학생활 첫 한해 동안 거듭되는 실수를 통해 배운 교훈들이 이후의 삶에서 귀한 지침이 되어주고 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아너 시스템(honor system)’이 지금은 편하지만 처음엔 생소했다. 대학원생을 동료 학자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내게는 어색했고,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막막한 자유도 낯설었다. 그러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좌충우돌 허점투성이의 말도 잘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보고 나니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방법으로 사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셨다. 생각할수록 참 감사한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일상사에서도 학업에서도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오는 유혹도 만만치 않다. 이메일로 시험 문제를 받거나 문제지를 받으면 각자의 연구실에서 답안을 작성하고, 약속 시간 안에 담당교수의 이메일 계정으로 화일을 보낸다. 우편함이나 교수연구실 문 밑으로 답안을 넣어도 된다. 내 발로 먼저 찾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말이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무얼하고 있는지 간섭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것 같은 좌절감도 맛보고, 그때마다 쉽게 가는 길이 자꾸만 눈에 보여 갈등도 한다. 시간관리에 소홀하다가 황급히 헤치우듯 써낸 페이퍼에는 본의 아닌 실수도 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보여 낙망도 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갈급한 마음에 눈물 뚝뚝 흘려가며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찬송을 부른다. 그렇게 긴 시간 배워온 영어인데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왜 이리 더디고 어색한가. 한국어가 세계공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하기까지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 연구분야에서 실력이 쌓이다보면 언어의 불편함에서 오는 의기소침한 마음이 극복 된다고 하지만, 당장은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꿈만 같다. 다른 나라 언어로 승부해야 하는 사회과학도들의 비애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낙망스런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러지는 경험을 거듭거듭하며 나의 유학 첫해도 그렇게 훌쩍 지났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했던 것이다. 갑자기 이듬해에 우수한 학생이 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때문에 마음이 평안해진 것이다. 먼 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유의 한계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1)”셨을까? 주님 말고는 부빌 언덕이 없는 외로운 광야의 삶을 살아 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에 가까와 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때에 하나님은 당신만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법을 알게 하신다. 어디에서나 형통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법도 배우게 하신다.


시험 답안이나 페이퍼를 쓸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실성(authenticity)을 지키는 것이다.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에 대해 철저히 교육하지 않는 학문적 풍토에 길들여져 온 유학생들은 서구사회의 아카데미아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종종 어기게 된다. 처음 주로 하는 실수는 자신의 문장으로 완전히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여기저기 서툰 영어로 짜집기 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읽을 때마다 인용할만한 아이디어들을 미리 꼼꼼하게 챙겨 놓지 않아서, 혹은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대충 마무리한 글들을 제출하게 된다. 이런 기억들은 상당히 오래 동안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실제로, 글의 전거를 의심 받고 나서 마음의 상처가 남아 이후의 학업에 자신감을 잃는 이들도 보았다. 심한 경우, 적절한 인용 없이 표절한 답안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학교를 옮기게 된 사례들도 있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인간은 그 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습득한다. 내가 가진 생각과 주류의 생각이 달라보일 때 내가 바꿔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그런데 그 규칙이란 것이 나라마다 사회마다 많이 다르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부정행위의 기준조차도 퍽 상이하다. 가는 곳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상대적인 가치관과 기준들을 묵상해보면 마치 움직이는 표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삶은 혼란스럽게 moving target 을 따라다니며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성경 안에서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13:1).” 사회의 법이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자고 한다면 철저히 따르는 것이 옳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2:14-15).”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빛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원칙보다 뛰어난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다. 혼란 속에 있다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흔들림 없는 기준점(fixed point)을 말씀 안에서 찾아보자.


말씀은 우리 마음을 일분 일초도 쉼 없이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하라 하신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교수님들의 눈도, 교수님이 돌리는 소프트 웨어의 감시도, 경쟁하는 동료 학생들의 눈도 아니다. 내가 열심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모두 무익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내면의 자아가 온갖 사회적 상과 벌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노예처럼 길들여져 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불타는 시기 질투로 동생을 죽여 놓고 딴전을 피우고 있던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그분의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여주인 사라의 학대로부터 도망하여 광야에 이르러 낙망하고 서있던 하갈을 그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오늘 나의 모습을 그 눈이 보고 계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 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139:7-10).” 다윗도 이렇게 하나님의 눈이 언제 어디서나 우릴 향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분의 눈은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내어 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이야기에서 보다 실천적 지혜를 얻어보자.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8-9절).” ‘꿈꾸는 사람’ 요셉이었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현명함과 순결함은 더욱 돋보인다. 사실 이런 결단은 굳이 하나님을 모른다 해도 도덕성이 투철하거나 자존심 강한 젊은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에 금이 가는 것이 정말 싫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드러난 결과는 같아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놓치지 말고 따져보자.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성실한 젊은이 요셉. 그가 궁극적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기 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요셉의 시선은 그 어떤 공평한 저울보다 더 정확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요셉이 시무하러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1절)”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자였기에 거듭되는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은밀히 다가온 유혹 앞에서 요셉은 옷을 버려두고 헐레벌떡 달음질쳐 나갔다. 겉옷을 버려둔 채 가식없는 양심을 가지고 환난 날의 피할 바위이신 하나님께로 도망했기에 그는 더욱 안전하였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내 공간 안에서 글을 쓸 때 시험을 치를 때, 이 요셉의 모습을 기억하자. 우리가 속한 아카데미아에서 기존의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우리는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양심을 눈감는 표절이나 부정직한 행위들은 분명 금지되어 있다. 학문을 하고 있다면,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을 순결한 혼인의 언약과 같이 여기자. 그리고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이 약속을 지키자는 것보다는 그 약속을 깨뜨리는 악한 행위로 “하나님께 득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요셉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거룩하기 원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결하기 원해
  오직 주님 앞에서 순결하기 원해
  오직 주님 앞에서 아름답기 원해

  “내가 어떻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리까?
  아무도 보는 없어도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자기를 지킨 젊은 요셉처럼 정결하게 살기 원해
  아무도 보는 없어도 거룩하게 살기 원해

  하나님의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함이라
  음란함 버리고 존귀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하나님의 바로 이것이니 뜻대로 살기 원해
  부정함 버리고 거룩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강명식,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예수 믿는 학생으로서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가? 떨리는 마음으로 찬찬히 돌이켜 본다. 내 노력보다 큰 것을 탐하고 있었는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말하고 있었는지. 누구도 보아주지 않을 때 그 과정을 허수이 흘려 보내진 않았는지. 사회의 통제적 기준에 따라 급급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세상 윤리보다도 더욱 저급한 기준으로 살면서 작은 이익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자.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상과 벌에 골몰할수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빛의 자녀된 삶에도 이런 유혹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며,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그 사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마다 세상의 모든 윤리보다 탁월하신 주의 말씀에 매여 살아보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다 (시119:9).”


하루 분량의 삶만 고스란히 내놓고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아도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과의 간격은 너무나 크다. 다시 고쳐 살아볼 수도 없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다.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어려움을 내일의 영광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 대신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신 분인데, 그가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며 우리 삶을 살아보자. 말씀의 준거가 우리의 삶 가운데로 통합되어 빛으로 드러나길 소망한다. 그 정직한 순간 순간이 모여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뛰어 넘고 하나님의 거룩으로 향해 나아가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잠2:7)”는 하나님께서 결과는 책임지신다. 우리가 할 일은 매 분 초마다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생각을 요동치 않는 십자가 위에 못 박고 우리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재석] BBC의 모델, 존 아저씨의 책들

2003/12




1977년 선배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회심을 경험한 나는 그 이후 지난 25년간 수많은 사람들과 책, 모임 등을 통해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 가운데는 내 정서와 기질에 맞아 따르거나 본받고 싶은 깊은 감동과 큰 영향력을 준 것도 있지만, 나와는 어째 영 맞지 않아 피하거나 멀리하고 싶게 만든 것들도 있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책으로 만난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이다. 존 아저씨라고도 불리우는 이 분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됐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눈뜨게 된 것 같다.


우연히 접하게 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문고판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를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 기독교의 베이직(Basic)을 견고하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애매모호하기만 하고, 아무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그저 믿으라고만 하던 죄의 정의, 부활의 확신, 그리스도를 영접(초대)한다는 것의 의미 등이 쉽고 분명하게 정리돼 있는 이 책을 통해 나는 비로소 기독교인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이 책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내수동교회 형제자매들의 신앙고전이 되면서 소그룹 모임 등에서 널리 읽혀지고 이야기되면서 사랑 받는 책이 되었다.


존 아저씨(Uncle John)의 책들은 한 마디로 BBC 신앙을 길러 주었다. BBC는 성경적이고(Biblical) 균형잡힌(Balanced) 기독교(Christianity)의 약자로, 비성경적이거나 부분 성경적인 가르침이 편만해 있고, 아무런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이상하고 왜곡된 기독교를 좋아하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성경적으로 생각하며 자라 가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신앙이라는 게 내가 알고 영향 받은 어느 하나의 사상과 흐름에 사로잡힌 채 다양하고 폭넓은 이해와 실천에 어색해 하는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데, 존 아저씨의 책들을 통해 이런 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 목회자인 존 아저씨의 성경해석과 신학사상은 건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특히 그가 책임편집자로 신구약이 거의 완간된 강해설교 BST(Bible Speaks Today) 시리즈는 성경공부와 성경묵상을 훈련받는 청년 시절에 꼭 읽어볼 책들이다. 존 아저씨는 이 시리즈의 산상수훈, 사도행전,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주로 IVP에서 역간되었다)를 특유의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저술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귀로 듣는 설교와 함께 눈으로 읽는 설교의 전범을 꼽을 때 마틴 로이드존스의 책들과 함께 첫손가락에 꼽는 책들이다. 웬만한 주석에 비해 나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구입해 가까이 두고 읽어보자.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God’s New Society)라는 제목이 보여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잘 풀어 주고 있어 성경 이해는 물론 구원에 대한 이해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존 아저씨는 설교만 잘 하는 전형적인 목회자가 아니다. 그의 관심은 현대 사회 문제와 전도와 선교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민하고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슈들과 관련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성경만이 아닌 사회로부터도 이중적인 귀기울임(dual listening)을 해야 할 필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존 아저씨에 대한 내 관심은 그의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성경관찰, 해석, 탁월한 문장에서 영향 받은 바 크지만, 뜻밖에도 그는 전도만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함께 강조해 지난 30여년간 복음주의 운동권의 이정표를 세운 로잔언약(1974)을 기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어바나 선교대회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학생사역을 방문해 말씀으로 돕고 격려한 전도와 선교의 대가이기도 하다.


이제는 80을 넘은 노년기를 살아가는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는 전기도 나와 있는데, 출생에서 1960년까지 전반부 생애를 다룬 작은 글씨에 6백쪽이 넘는 티모시 더들리 스미스가 쓴 『존 스토트』 같은 전기는 큰 맘 먹고 이 가을밤 한 주간 정도 깊이 빠져 볼만한 책이다. 같은 편집자가 존 아저씨의 50여종의 책들에서 주제별로 발췌해 만든 『진정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 같은 책은 존 아저씨의 신앙과 신학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괜찮은 다이제스트이므로 한 권쯤 구비해 두자.

[조근상] 올바른 찬양을 위한 예배인도자의 역할

이코스타 2003년 12월

  최근에 예배와 찬양인도를 하면서 내 안에 자리잡은 궁금증은 ?도대체 얼마만큼 음악적인 자유를 가져야 하는 가? 이다. 94, 처음 미국에 와서 몬타나의 국제 YWAM베이스에서 있었던 쇼크는 아직도 예배와 찬양인도를 하는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어로 노래 부르기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여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락 콘서트를 하는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저게 크리스천이 맞아? 라고 질문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은 놀랍게도 집회가 끝난 후에 많은 Youth아이들이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혼란 속에 빠졌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예배 인도자로 섬기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런 식의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한국의 경배와 찬양은 이른 바 발라드의 전성시대였기 때문에, 의례 예배에 쓰여지는 곡들은 한정되어 있고, 얌전하고 조용하게 하는 스타일이 주류였다. 결국 그 때의 경험이 후에 나의 예배인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95년도에는 이른 바, 한국의 많은 가요들이 서태지의 음악을 통한 영향력으로 랩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그 때 미국에서 가져온 앨범 중에 유명한 예배인도자인 밥 피치의 Proclaim His power라는 새로운 앨범을 듣게 되었다. 한참을 듣는데 참으로 희한한 곡이 있었다. Romans 16:19 says라는 곡이었는데, 로마서 16장의 말씀을 그대로 랩으로 담아서 만든 곡이었다. 물론, 완전한 랩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들으면서 나름대로 번역을 해서 곡을 불러 보았다. 일단 번역을 하면 같이 사역하는 뮤지션들과 같이 연습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한데, 막상 노래를 하고 마지막 랩 부분을 하려 하니, 뭔가 어색하고 찬양을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가요를 부르는 느낌이어서 번역을 했지만 한번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한번은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찬양의 구절들을 보게 되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 이 찬양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원수인 사단에게 명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찬양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단순한 노래가 아닌 기도와 영적 전쟁이 함께 선포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도 많은 분들이 강의해 왔던 사실이 내게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96년의 YWAM의 중 고등부 수련회 마지막 날 이 찬양을 처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모르는 찬양을 처음, 그것도 랩이라는 장르로 부른 그 날 집회에서 우리는 이 찬양을 12번 이상을 불러야 했다. 1500여명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원수인 사단에게 말씀으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노래했다.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랩송을 인도한 예배인도자가 되었다.


  그 후 한국에서 앨범을 만들 때에도 이 곡은 메인 타이틀이 되었다. 녹음을 하면서도 사단의 방해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다른 곡들은 정말 무리 없이 녹음이 되었는데, 이 곡을 녹음할 때에는 세 번이나 녹음을 하다가 중단이 되었다. 한번은 녹음을 했는데, 아예 녹음이 안 되었고, 두 번째는 녹음하는 테이프가 끊어져 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곡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이 곡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음악스타일로 따지게 된다면 처음에 소개할 당시 래디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곡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이 곡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배와 찬양곡들이 마찬가지이듯이, 원래 작곡한 사람의 의도나 혹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회중들을 자기 중심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곡을 하더라고 그 속에 담긴 뜻을 파악하고 연구한다면 곡을 부르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이와 같은 때엔?의 작곡자이신 데이비드 그레함은 이 곡을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집에 불이 나서 죽은 자리에서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직접 듣는 순간 이 곡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음악의 모습이나 형태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94년 당시 YWAM 몬타나 베이스의 친구들의 노래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 그리고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참으로 진실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복장이나 모습이 내게 익숙하지 않기에 내 마음속에 과연 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앙이 있을까 하는 판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의 하덕규 집사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역청이 노아의 방주에도 쓰였지만, 바벨탑에도 쓰여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음악이란 역청과 같아서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는 것에 따라서 완전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인도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회중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기도로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노아의 방주로 시작해서 만들다가 바벨탑을 쌓고 끝나 버리는 것이다.


  올해로 나는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 온지 꼭 13년이 되어 간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말로 예배와 찬양인도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경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나는 울리는 꽹과리로 전락하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두려운 마음으로 기타를 끄집어낸다.



[무명의 코스탄] 무명의 선지자: 우리를 직접 만나기 원하시는 주님

이코스타 2003년 12월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는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인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직후에 있은 일이다. 북왕국의 첫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므로써,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일컬어지게 되는 악한 행실의 한 전형을 세워놓았다. 북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가 아니라 멀리 유대 땅으로부터 한 선지자를 보내시는데, 여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왕과 관리는 물론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엄격한 뜻이 있었다. 당시의 관습에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일은 연합과 승인을 상징하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에게는 북왕국의 그 누구와도 더불어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그는 여로보암 앞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메세지를 온전히 전달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북왕국의 다른 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머물기를 청하였을 때는 그 말을 받아들여 더불어 먹고 마시므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어 징계를 받아 길가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유대 선지자를 만나기 원하였을까? 한 주석서의 해설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하는 행위를 통해서 북이스라엘의 길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모양새를 얻고 싶었던 것일까? [Westminster Bible Companion: 열왕기]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떠난 곳에서 오래동안 지내다 보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단순히 무리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북왕국 선지자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건, 유대 선지자에게 내려진 판정은 불순종이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 선지자에게 내려진 처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다른 나쁜 의도나 불순한 동기가 없었더라도 하나님께 그런 징계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그 유대 선지자였다면, 다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길래 따른 것 뿐이었는데 하며 황망해하고 억울해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여로보암에게 가서 전하여야할 말도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서 알 수 있았다. 그가 만일,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조금만 더 신뢰하고 기억하였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주님께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하고 직접 여쭈어보게 되지 않았을까? 그가 만일 그렇게 질문하고 주를 간절히 찾았더라면 (잠언 8:17), 그에게 친히 말씀하셔서 보내기까지 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시켜 주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노상에서 사자에게 죽는 비극은 혹 발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꼭 징계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만나는 삶을 가까이에서 영원히 배우게 하시고자 당신의 사람을 그분 곁으로 급히 불러올리신 것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님을 직접 만나는 일. 아마도 이것만큼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구원받는 일도,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일도 다 여기에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도,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7-38)] 욥 은 온갖 이해되지 않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뵌 그 자체로 그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도 그의 질문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뛰어났던 우리의 신앙적 선배들은, 우리의 신앙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일단 주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변화와 영적 성장은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가운데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일은 그들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었고 이유였다. 그들은 면죄부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직접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 찬양음악을 정리, 보급함으로써 일반 성도들이 말씀과 찬양 가운데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의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가 뜻밖에 전해주는 교훈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주님의 백성이 그분 앞에 직접 나와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교제하며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일의 중요성은 어제와 오늘에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여로보암에게 전달할 메세지를 받아서 전한 후에도 북왕국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고려할 때, 북왕국 선지자의 교훈을 떠올리는 일도 중요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내 스스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혹시라도 다른 영혼들에게 잘못된 주님의 뜻을 전달하여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영혼들이 각자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인내 가운데 구체적으로 도와주고 권면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결국에는 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뵙기 원합니다. 오늘도 만나 주소서. 그리고, 내 주변의 다른 영혼들도 주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 주를 뵙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아말렉 족속: 천 년 동안 기다리시고 천 년 동안 이루시는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사례로 꼽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던 당사자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진멸의 대상이 되는 후손들을 생각할 때 이를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창세기 36장을 보면,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다. 아말렉 족속의 조상 아말렉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조상들에게 조카 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이후에 성경에는 아말렉 족속이 크게 세 번 등장하는데, 모두 이스라엘 민족과는 더불어 살아남을 수 없는 원수의 모습으로 나온다. 일가 친척이 원수가 되어버리는 데에는, 모세 영도하의 출애굽 시절에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들의 피곤함을 타서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치므로써 (신명기 25:17-18)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적군이 이겼던 유명한 전투가 바로 아말렉 족속과의 싸움이었는데,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는 각각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 시대를 지나 다시 아말렉의 이름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때는 사울과 다윗의 시대이다.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을 무찌르지만, 노획한 가축과 재물이 아까와서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두는 등 제한적인 순종을 하다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로부터 버림받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다. 한편, 다윗에게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의 모습은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다가왔던 그 조상들의 모습과 더 유사하다. 그들은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블레셋의 영토인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의 진지를 습격하여 그와 그의 부하들의 가족과 재산을 약탈하여 간 것이다. 결국,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들을 무찌르고 잃어버린 가족과 재산을 다시 찾아오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울왕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던 남아있던 아말렉과의 싸움을 다윗이 본의로 (사무엘상 27장), 그리고 본의 아닌 사건을 통하여 (사무엘상 30장) 계승하여 수행하고 있는 점이다.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에게 두고 계신 진노의 말씀과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말렉 민족이 성경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통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사울왕과 싸웠던 아각 왕의 후예라는 뜻의 아각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은 여기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일을 꾸미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각 족속인 대신 하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진멸하도록 왕의 조서를 꾸몄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들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영적 분별력과 에스더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오히려 아각 족속을 진멸하시어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서 하셨던 말씀을 이루신다. 인터넷 성경이나 성경 CD-ROM으로 검색해 보면, 이 이후로 다시는 아말렉 족속의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가 출애굽하던 시기는 기원전 약 1500 년 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울 및 다윗 왕의 통치는 대략 기원전 1000 년 전, 그리고 페르시아 통치 아래에 있던 에스더의 시대는 그로부터 약 500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고 말씀하신지 천 년 후에야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을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비록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 하셨지만 실제로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는 천 년이라는 세월을 돌아온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창세기 15:16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를 한 후에야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귀뜸해 주고 계신데,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울-다윗의 왕국이 성립한 때로부터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이 멸망한 때까지의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약 오백 년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죄악 앞에서는 자기 백성(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로마서 11:21)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아모리 족속이나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간 동안 기다려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죄악이 다 차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이 아직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말렉 족속의 경우에는, 약 오백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에도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만큼의 시간이 더 연장된 경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일 그들이 돌아왔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셨을까? 악의 화신처럼 기억되고 있는 아합이나 므낫세 왕같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겸손하게 회개했을 때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셨음을 기억하면, 그가 얼마나 악인이었든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다시금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있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골로새서 1:21), 아말렉을 기다리신 주님의 마음은 바로 지금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과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이사야 55:6)”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디모데전서 2:4)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가 공의로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는 천 년이 걸리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신실하게 이루고야 마는 분이시라는 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불의가 선의를 이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근심하고 낙담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가 수고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나서 그 일의 결국과 열매를 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신실하신 주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일으키셔서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일을 지어 성취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섬김의 현장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준다. 아말렉과 싸우는 일을 모세 때에 여호수아가 시작하여 다윗이 계승하고 그것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완수하였듯이, 내가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사역들 역시도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머선 하나님의 경륜과 시간대 안에서 계승되고 성취되어 그분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을 깨닫고 늘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나의 때에 주님의 일 이루어짐을 보지 못할지라도 주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이 늘 견고하게 하옵소서.


 


맺음말


주님의 섭리하심과 다스리심이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들 가운데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몇몇 예에서 보았듯이, 조연들이나 단역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주목할 때 우리가 얻는 교훈은 유명한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 비하여 작지 않은 때가 종종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말씀 묵상에 대한 풍성함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는 새로운 동기부여를 선사한다. (주관적이거나 감상적인 해석에 관한 우려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말씀들과의 상호 균형 및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여기서는 염려치 않기로 한다.)


이렇게 깨달은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유익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첫째로, 깨달은 성경 말씀을 더욱 큰 기쁨과 열정으로 증거하도록 도울 것이며, 둘째로, 우리 주변에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있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발굴하는 시야를 키워줄 것이며, 셋째로, 나 자신 주님 뜻 안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이 시대의 조역과 단역을 맡는 일을 더 의미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

[반영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IV – 다시 만들어 쓰기 (Recycle)



이코스타 2003년 12월

글을 시작하며

 

지난 호까지 우리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를 위한 방안으로서 줄이기 (reduce)와 다시 쓰기 (reuse)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환경보호의 용어는 앞의 두 가지 용어가 아니라 ‘다시 만들어 쓰기-재활용 (recycle)’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방송과 교육의 효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다시 만들어 쓰기를 잘 하면 환경보호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해 간다.  이러한 대중교육은 아마도 필요한 물건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 두되, 다 쓰거나 흥미를 잃게 된 물건은 다시 만들어 쓰면 된다는 편의주의적 사고를 부추길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앞의 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실 환경오염의 방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시 만들어 쓰기’가 단연 앞의 두 가지 방안에 비해 그 효과가 뒤처지기 때문이다. 즉, 더러워진 것을 씻고 가공하여 쓸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과정에서 천연의 재료를 쓸 때와 비교하여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에너지가 소비되고 부수적으로 환경오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 만들어 쓰기는 차선의 환경보호 방안

 

다음은 영국의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옮겨온 글로서 다시 만들어 쓰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들어온 내용이다. 

 

The definition of recycling is to pass a substance through a system that enables that substance to be reused. Waste recycling involves the collection of waste materials and the separation and clean-up of those materials. Recycling waste means that fewer new products and consumables need to be produced, saving raw materials and reducing energy consumption.

(http://www.doc.mmu.ac.uk/aric/eae/Sustainability/Older/Waste_Recycling.html)

 

 

위 글은 다시 만들어 쓰기의 정의를 한 다음, 그 과정과 장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다시 쓰기를 하려면 쓰레기를 모아서 분리하고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과, 새로운 제품을 적게 만들고 천연원료를 절약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글의 어디에서도 쓰레기를 모으고 분리하고 깨끗하게 하고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양과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수적인 환경오염의 우려를 하고 있지 않다. 

 

앞 에서 다시 만들어 쓰기에 대한 조금은 부정적인 설명을 먼저 한 이유는 다시 만들어 쓰기가 줄이기와 다시 쓰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환경보호를 위한 최선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근본적인 생활의 변화까지 유도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다.  즉 현대 도시사회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익숙해져 있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방식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러한 삶의 방식의 부산물인 오염물질을 화학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처리하거나 버려지는 쓰레기들 중에서 쓸만한 것을 골라서 다시 만들어 쓰는 방법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환경오염의 속도를 조금 늦출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맞게될 오염의 결과를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만들어 쓰기의 필요성

 

필자가 유학 시절에 살던 필라델피아와 지금 살고 있는 배튼루지의 가정용 쓰레기 처리 시스템을 보면서 미국이 아직은 한국이나 유럽처럼 쓰레기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한국과는 달리 규격 쓰레기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다든지,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든지, 개인 집이나 아파트 단지 내에 쓰레기 분리 수거를 위한 통은 없고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버릴 때, 특별히 선별하지 않고 쓰레기 처리회사에서 운영하는 쓰레기 통이나 트럭에 그냥 한꺼번에 넣어서 버린다. 이렇게 한꺼번에 모아서 회사에서 직접 쓸만한 것들만 선별하고 나머지는 쓰레기 매립지에서 매립하거나 소각로에서 불에 태운다. 몇몇 조사에 의하면 매립을 시작한 지 30년 이상이 된 매립지에서 썩지 않은 음식물이나 기타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물품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 환경청).  이렇게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이 그냥 쓰레기로 매립되고 있는 것과 매립된 것들 중에서 썩을 수 있는 것들이 썩지 못하는 문제들 때문에 다시 한 번 다시 만들어 쓰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야할 필요를 느낀다.

 

 

다시 만들어 쓰기의 방안

 

다시 만들어 쓰기는 천연의 재료를 써서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생겨난 쓰레기를 무작정 버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환경보호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을 급격하게 바꿀 수 없다면 다시 만들어 쓰기 정도는 실천할 수 있어야 환경보호에 최소한의 참여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이러한 다시 만들어 쓰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다시 만들어 쓰기의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정에서 다시 만들어 쓰기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째는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을 골라서 다시 만들어 쓰는 것이며, 둘째는 다시 만든 제품을 골라서 사는 것이며, 세째는 개인 집의 뒷마당이나 마을 공동 장소에서 음식물 찌꺼기나 기타 정원 손질한 것들을 썪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다. 

 

첫째로 지역적으로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물품으로 지정되어 수집되는 물품이 어떤 것인지 확인한 후 그러한 제품을 중심으로 구매를 하는 것이다. 

 

많은 마을에서는 유리, 알루미늄, 철, 신문지를 비롯한 종이와 카드보드와 특정한 종류의 플라스틱 종류 등을 수집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각 community 관리나 자원봉사 단체나 실제로 다시 만들어 쓰기를 담당하고 있는 회사에 연락을 해서 해당 물품의 목록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나 시청이나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통해 이러한 목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시스템이 없으면 사실상 특정한 물품들에 한해서만 다시 만들어 쓰기를 할 수 있을 뿐 대부분의 물품들은 대책없이 매립장으로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지역 공동체에서 다시 만들어 쓰는 시스템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즉, 길 옆에서 분리한 물건을 가져가는 프로그램이거나 주민이 직접 일정한 장소까지 가져가는 프로그램들을 말하는 것으로 각 지역 공동체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물품들을 분리 수거하는지 확인한 후 그에 따라 대처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 공동체에서는 신문지에 끼어 온 광고지는 수거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캔 종류도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캔과 기타 철로 만들어진 캔을 분리하여 수거하곤 한다. 한국에 있을 동안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각 아파트 단지마다 수거하는 물품과 수거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어서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일반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지역에서는 이러한 분리수거가 효과적으로 시행되는 것 같지 않았다.  미 국의 경우 작은 지역 공동체별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이러한 쓰레기 분리 수거를 시행하는 관계로 집 옆에서 물건을 가져가는 경우에는 정해진 날짜에 맞춰서 지정된 물품을 내어 놓으면 되고, 분리한 물건을 가져다 놓은 경우에는 장소를 알아놓고 그곳까지 가져다 놓아야 한다. 만일 지금 살고 있는 지역 공동체에 이러한 프로그램이 없으면 그냥 있지말고 적극적으로 관련단체나 주민들을 만나서 다시 만들어 쓰기의 필요성을 알리고 적절한 시스템을 도입하도록 요청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물품들을 다시 만들어 쓸 수 있을까?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 목록

 

 






























제품 목록

다시 만들어지는 내용

오래된 신문 및 잡지류

오래된 신문은 수거되어서 다음과 같은 용도로 다시 만들어 진다. 신문, 동물을 위한 침대, 섬유단열재, 섬유판, 펄프 제품, 전화번호부 등의 종이 제품 등.

종이 상자류

주름잡힌 판지나 종이 상자용 판지 (피자 박스, 선물용 상자, 기타 상품 상자) 등은 수거되어서 시멘트 부대에 쓰이는 종이, 지붕을 잇는 펠트재, 새로운 상자를 만드는 판지, 종이 티슈와 종이 타월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플라스틱 병

수거된 플라스틱 병은 카페트, 플라스틱 덮개, 섬유로된 단열재, 보우트의 선체,  사무실용 바인더 등의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 제품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플라스틱 용기

수거된 플라스틱 용기 (보통 플라스틱 우유통, 쥬스 통)는 플라스틱 판재, 농업용 울타리, 플라스틱으로 된 얇은 판, 해양 말뚝, 그리고 플라스틱 벽돌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알루미늄 깡통

알루미늄 깡통은 녹여져서 다른 알루미늄 제품 즉 알루니늄 호일, 새로운 알루미늄 깡통, 알루미늄으로 된 차 부속품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철로 만들어진 깡통

철로 만들어진 깡통은 녹여져서 새로운 다른 철 제품, 둥근 쇠막대, 보강 막대, 그리고 차의 부속품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유리병

수거된 유리병은 새로운 유리병, 고속도로에서 쓰이는 페인트, 유리섬유, 그리고 기계절삭용 모래 등으로 다시 만들어 진다. 

건전지

재충전 건전지의 일종인 니켈-카드뮴 건전지는 일단 수거되면 니켈, 크롬, 주철등으로 분리된다. 재생된 니켈은 스텐레스 강 합금을 만드는 데 쓰인다. 그리고 재생된 카드뮴은 새로운 니켈-카드뮴 재충전 건전지를 만드는데 쓰인다. 

 

그 외 가정용 위험 쓰레기 중에서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페 인트, 살충제, 제초제, 각종 독극물, 휘발유와 각종 연료, 자동차 엔진 오일 및 필터, 방향제, 부동액, 브레이크와 트랜스미션 오일, 차 건전지, 수은 함유제품 (온도계 및 자동온도 조절기 등) 등의 제품들은 특별히 지정된 곳에 가져다 주거나 허가를 받은 회사에게 넘겨서 처리하도록 한다. 일단 넘겨진 제품들은 전문회사에 맡겨져서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데 쓰여지거나 매립된다.  참고로 차와 관련된 것들 즉 자동차 오일이나 트랜스미션 오일, 차 건전지들은 일정액의 처리비용을 지불하면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만일 본인이 부품을 교체하는 일을 직접할 경우나 위험 쓰레기가 발견될 경우에는 위험물을 어린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고 빠른 시간 내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둘째로 다시 만든 제품을 사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시 만들어 쓰기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려면 위에서 살펴본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물품이 반드시 새로운 제품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다시 만들어진 제품은 소비자에 의해 구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 네 가지의 원칙을 지키면 좋겠다.




  1. 물건을 구매할 때 제품이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많 은 병, 캔, 종이 상자, 포장지, 과자 상자들이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물건을 구매할 때 꼼꼼하게 살펴서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진 제품을 구매하도록 한다. 
  2. 할 수 있는 한 다시 만들어진 내용물을 가진 제품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많은 종류의 종이, 유리, 철, 플라스틱 제품들, 즉 문구류, 포장지, 컴퓨터 인쇄종이, 많은 종류의 유리, 철, 플라스틱 용기들이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제품들은 식료품점이나 약국이나 여러 상점들에서 구할 수 있다. 문구류 가게나 인쇄소나 우편주문을 통해서도 이러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3. 다시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때는 반드시 다시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했는지를 밝혀주는 문구를 찾고, 가능하면 다시 만들어진 재료의 함량이 가장 많은 제품을 선택한다.  그리고 좀 더 시간과 열의가 있다면 해당 제품의 회사에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어 그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후 구매해도 좋을 것이다.
  4. 각자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개인적으로나, 지역의 국회의원을 통해서나, 지역단위의 조직을 통해서 각 지방정부와 지역 산업체와 기타 관련 업체에서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제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각 지방 정부에서는 각종 사무용품이나 차량관련 제품이나 건축관련 제품 등을 구매할 때 정해진 규정에 맞게 구매하도록 한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다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개인 집의 뒷마당이나 마을 공동 장소에서 음식물 찌꺼기나 기타 정원 손질한 것들 (개인 집이 있는 경우)을 썩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다. 



퇴비를 만드는 것의 장점과 방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만일 음식물 찌꺼기와 정원이나 뜰을 정리하면서 생긴 나뭇가지, 풀 등을 퇴비로 만들면 상당한 양의 쓰레기가 줄어들어서 결국 매립을 덜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퇴비를 만드는 과정에서 땅이 기름지게 되어 잡초가 잘 자라지 못하게 되고 토양의 손실을 막게되고 화학비료를 적게 사용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2. 적절하게 퇴비가 만들어지면 다시 정원이나 잔디에 뿌려서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혹 화분을 키우면 화분의 흙갈이에 쓰이는 좋은 퇴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파트에 살 경우에는 아파트 공동 정원이나 화단에 가져다가 퇴비로 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주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썩히는 일을 삼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퇴비를 만드는 중에 쥐나 다른 해충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3. 만일 퇴비를 만들 공간이 없으면 퇴비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수거해 가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참여하거나 실제로 퇴비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가까운 지역 공동체에게 재료를 제공한다. 만일 그러한 프로그램이 속한 지역공동체에 없으면 해당 공공기관에 연락을 하거나 주민 대표를 통하여 퇴비재료 수거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해당 지역공동체에서 퇴비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글을 맺으면서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 이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차서 곧 멸망할 것이며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이런 이들은 현세를 등진 채 미래에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어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정말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인가?

 

필자의 이해로는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예수께서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다시 살 것이라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복음의 내용이 자신의 양심 깊은 곳에서부터 더욱 깊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현세에서 부활의 삶과 천국의 삶을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그러셨듯이 기독교는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현실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며, 고난을 통한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이땅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신앙의 내용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켜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 예배가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활을 내용으로 채워갈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명령이 명제가 되리라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범주는 단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포함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고 있는 환경보호의 노력은 아주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방법이자 만물의 관리자로서 사람에게 부여된 중요한 책임을 다하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에서도다시 만들어 쓰기’는 환경보호의 방안 중에서 최선은 아니라 할지라도줄이기다시 쓰기 실천한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있는 하나의 환경보호 방안이다.  조금은 귀찮고 힘든 과정이 있긴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다시 만들어 쓰기’ 실천함으로써 한 걸음 더 가까이 주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편린이라도 경험해 보길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