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공동체 다시 들여다보기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사방을 둘러보면, 각 모임마다 공동체성에 대한 관심과 열심이 있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은 요즘이다. 각처에서 열심을 내고 있는 각 소그룹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교회는 순모임, 셀모임, 혹은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가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점검해 보고,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


성경에서 우리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피로 사신 사람들을 함께 모으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인 ‘교회’혹은 ‘공동체’두 가지 모두 어느 정도 왜곡되어 사용되어 왔기에,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안수 받은 목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 혹은 조직교회를 바로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오해는 ‘성경적인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마찬가지로,‘공동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적어도 한국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공동생활을 하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늘 말썽만 일으키는 이단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청년 공동체’, ‘찬양모임 공동체’와 같은 모임을 나타내는 이름 정도로 피상적인 동아리 수준의 모임을 떠올리기도 한다.


2. 공동체의 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이런 단어에 대한 왜곡된 개념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언어는 많은 경우에 사고의 반영이고, 그 근원을 바로 찾을 수 있다면, 문제의 원인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공동체 자체가 개혁의 대상이었다.
로마 카톨릭을 영적으로 끌어 온 것은 교황이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공동 생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도원 자체가 종교 개혁의 직접적 대상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종교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공동 생활이라는 원칙을 버리고, 부패의 온상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고, 성적인 타락도 이미 수위를 넘어서 버린 수도원 공동체를 보면서, 종교 개혁자들은 ‘공동체’라는 말을 강조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마치, 성찬을 행할 때, 사제의 축사로 빵과 포도주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쳤고 (화체설), 또 그 성찬에 참예하지 못하면 죄사함이 없다고 가르쳤던 카톨릭의 의식 때문에, 지금까지도 성찬을 통해 공동체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점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2) 이단들이 공동체였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의 많은 경우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공동체에 대한 그릇된 의식을 심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정해 놓고 기다린다던가, 집단 자살을 하는 경우, 그들 대부분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 자체를 ‘혹시?’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3) 공동체를 표현하는 단어가 오용되었다.
얼마 전 소천하신 대천덕 신부님께서는, 한국교회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사라져 가는 이유로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예를 들면, 에클레시아를 표기할 때, ‘가르칠 교(敎)’를 사용하는 교회(敎會)가 아니라, ‘사귈 교(交)’로 사용하여 교회(交會)라고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성도가 함께 모여 성도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축도 시에 사용하는 ‘교통’이라는 단어의 왜곡이다. 예배 시간 마지막에 행해지는 축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 의식이라기 보다는, 그 공동체의 리더가 그 모임의 구성원들을 축복하는 의식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현재 가장 흔히 사용되는 축도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로써,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바랐던 축복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축도를 잘 들어보면,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대체로 바로 사용되는 반면,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 혹은 ‘성령님의 인도하심’등으로 바뀌어 오용되고 있다. 다일 공동체 교회의 최일도 목사님은 그의 강의(‘아름다운 교회찾기’ 1강)에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성령이 교통하심이 자주 다른 말로 대체되는 것으로 대변되듯이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 상실이 심각하다’고 하신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4) 지나친 가족 중심의 사역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사역 때문에 가족을 소홀히 하셨다는 비난을 받는 권사님 혹은 집사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족 중심의 사역의 바람은 ‘아버지 학교’, ‘행복한 가정 세미나’, ‘부부생활 세미나’등의 형태로 불기 시작했고, 이제는 목회자들도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세째는 교회’라고 당당히 외치게 되었다. 이런 가족 중심의 사역들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가정의 바른 위치를 찾게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이제는 더 지나쳐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위험 수위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든다. 더구나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와 맞물리면서, 가족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또 그것을 ‘가족 중심 사역’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를 조차도, 가족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집을 오픈하고 삶을 나누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이런 가족 중심 사역의 왜곡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5) 치유사역의 결과로 부딪힘을 두려워 함
가족 중심 사역과 더불어, 20세기말 기독교를 강타한 기독교의 심리학적인 접근, 즉 치유사역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자가 가진 ‘쓴 뿌리’혹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조하고, 또 그 손길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과의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이 시도는 분명 우리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 치유 사역이 장기화됨에 따라, 사람들은 이제 ‘쓴 뿌리’를 가지게 되거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 하게 되었다. 물론 치유 사역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구성원끼리 교제하고, 부대끼고, 또 그 문제를 통해 상호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인 공동체 자체를 꺼리게까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괜히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상처 받느니, 적절하게 신앙 생활하는 게 더 나아’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들을 수 있는가.


(6) 공동체를 경험한 참 목자가 드물다.
한 사람이 결심하고, 시험을 통해 학교에 입학한다. 소정의 수업과정을 마치면, 학위를 주고, 그 사람이 한 모임의 리더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 모임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이끌어 간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 너무도 익숙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동체에서의 리더는 다른 점이 요구된다. 바로 양을 치는‘목자’라는 것이다. 자신이 기르는 양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참 목자를 요구한다. 조직 교회가 공동체성을 외치면서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조직교회의 리더인 목회자가, 많은 경우에 있어, 양을 돌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과정 속에서 성립된 리더십이 아닐 뿐만 아니라 – 즉, 양들도 그들을 목자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 그들 스스로도 양으로써 목자의 돌봄을 받아본 경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단 조직교회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각 지역 교회 리더들의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 부족은,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심각한 원인이 되어 왔다. 더구나, 교회의 리더를 배출하는 신학교 자체가 경쟁구도로만 되어 있을 뿐, 공동체를 경험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점도,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이유라고 대천덕 신부님은 지적하셨다.


(7) 좌절을 통해 적절한 수준으로 기대치를 낮추어 버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회복에 대해 한번쯤은 고민하고 노력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늘 좌절과 실패만을 맛보게 되고, 또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기대치 자체를 낮추어 버린 듯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결국 이상이야.’라고 생각하며, 남들 보다 조금 더 잘 모이는 수준의 단체를 ‘공동체’라고 착각하고 만족하고 사는 경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수준이 안된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공동체에 관해서는 왜 이리도 넓은 마음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3. 공동체의 성경적 의미


그렇다면, 성경에서 공동체가 왜 그토록 중요하며,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자체로 공동체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어떤 신으로 묘사된 존재도 세분이 완전히 하나되는 공동체성을 지닌 모습은 없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 높고 낮음도 없고, 불일치도 없으며, 분리됨도 없으신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가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에게도 동일한 공동체성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단 한가지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완전한 공동체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혼자 있는 아담의 모습은 당연히 좋지 않게 보이셨고, 그로 인해, 하와를 창조 하심으로써 인간 공동체의 시작인 가정을 시작하셨다.


(2) 하나님은 공동체로 역사를 이끌어 오신다. (신인공동체)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과 하나님은 그 자체로 하나되는 ‘신인(神人)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인간의 원하는 바요, 인간이 바라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인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되기를 자처하며 죄를 짐으로써, 그 신인공동체는 깨지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이루는 신인공동체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여 주시듯이,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함으로 새롭고 영원한 신인공동체가 완성될 것을 약속하셨다 (계21:1-3). 이 완성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죄가 없고, 또 죄를 지을 내적 요소가 없기에 절대로 파괴될 수 없는, 또 눈물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영원한 신인공동체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깨어졌지만, 종말에 다시 완성하시겠다는 공동체,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신인 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인간들의 공동체를 사용해 오셨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옛언약을 맺으셔서 이끌어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건 이후에는, 그의 피로 사신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고 계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공동체 추천 도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예수님의 유언 (요 17장)
지상명령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18 20이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주신 유언으로 큰 의미가 있다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신 중보 기도인 실제적인 유언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8).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자신을 믿는 길을,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개개인을 통한 사역을 넘어, 믿는 자들의 연합을 통해 일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4.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


(1) 지금은 공동체의 시대이다.(에클레시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은 하나님께서 에클레시아를 통해 일하시는 시대이다. 각자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성이 중요한 만큼이나,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 또한 너무도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2) 공동체는 선택이 아니다. – 내가 공동체를 위해 죽는다.
‘왜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대답은, 장작의 비유가 아닌가 싶다. 즉 장작 하나를 따로 떼어 놓으면 곧 꺼질 수 밖에 없으니, 장작 더미인 모임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이것보다 훨씬 강하다. 다시 말해, 홀로 있는 장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장작은 그 모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관계성 자체가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는 바르게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3)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모임을 통해 받게 될 상처, 간섭, 혹은 후유증 등 때문이리라. 하지만, 본 회퍼의 말대로, 사람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바로 그 자리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동체를 시작하신다는 말을 기억 해야겠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기에, 그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열면 열 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공동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해서, 포기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결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면 일어나고 한걸음씩 전진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우리가 쓰러진 그 곳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때라도.


5. 공동체에 대한 초보적 대안


(1)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모토는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
우리가 그토록 자주 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모토의 참 의미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각 그룹의 소유까지 공유했던 실천 공동체인 초대교회!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시간과 물질, 또 공간까지 기꺼이 나누며,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실천의 삶이, 바른 공동체를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2)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예전에는 열심이 있었다가, 최근에는 교회만 출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직도 자신이 좋은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의 부딪힘 없이는 내 자신을 바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지체들을 통하지 않고는 바른 훈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각 공동체들도 이 점을 인식하고, 교제만 강조하거나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는, 훈련 지향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가야만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으리라.


(3) 열려있지만, 또한 닫힌 공동체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최고의 고민은 공동체의 성격이 아닐까 싶다. 가족같은 공동체를 꿈꾸고 가자니, 외부 사람들에게는 자기들끼리의 모임으로 비춰져 다가가기 어렵게 되고, 또 외부인이 쉽게 접근하는 모임을 갖추자니, 내부의 결속이 떨어지는 점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특징이 성령 안에서는 가능하리라 믿는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은 계속 논의되고 있고, 또 우리고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열려있지만, 닫힌 공동체’ –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이어야만 한다.


(4) 기능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공동체
한 모임은 그대로 놓아두면, 기능 중심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일 중심으로 사람을 배치하고, 또 일 중심으로 모임을 끌어가다 보면,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모임이 잘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관계성이다. 이 점은 모두 인지하지만, 놓치기 쉽기에 더 가슴에 담고 모임에 임해야만 한다.


(5) 실천적 행동에 의한 선교 중심지
늘 문제가 되는 것 중의 또 한가지는 공동체가 모여서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이다. 이런 모습을 많인 접한 사람의 경우는, 공동체가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고, 세상에 해야 할 우리의 사명만을 강조하기 쉽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른 공동체의 모습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실천적 공동체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도 또 사역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흩어 버리는 교회가 아닌 스스로 흩어지는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6) 작은 씨를 뿌리는 공동체의 개척자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일을 처음 시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를 경험해 본 리더가 드물다는 것은, 현재 공동체성의 부재 현상을 넘어서, 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걸림돌이 된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에 적당히 만족하고 지내거나, 혹은 좌절하며 포기하고 있기 보다는,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 계속 배워가며, 그 작은 일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프론티어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겠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지면이 넉넉지 않아 아쉽다. 그래서 간략히 요점만 쓰다보니, 글이 딱딱해져 버린 점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 글은 참고 도서 목록에 있는 글들을 많이 참고해서 쓰여졌다. 또한 부족한 한 유학생의 글이기에 틀린 점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애정 어린 질책과 충고를 기다리는 바이다. 또한 다른 의견도 많이 나누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한상] 공동체에 관한 책들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보고자 하신 분들께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추천해 본다. 책소개도 서평이 아닌 간랸한 소개로 대신했다. 어느 분야도 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관한 책들도 생각 이상으로 많이 출판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책들은 한정되어 있고, 또한 어떤 책들은 너무도 빨리 절판되어 버려 아쉽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 이외에 소개하고픈 좋은 책들이 있으면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신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저, 문익환 역,



대한기독교서회, 1964




공동체에 관한 책으로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책이다. 본회퍼가 2차세계 대전 당시, 지하 교회를 통한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쓴 생생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동체에 대한 간단한 이론부터, 혼자있는 삶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 또한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 섬김을 통한 적극적인 공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죄를 서로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다소 있지만, 그래도 성경적으로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책이다.

 




공동체



길버트 빌지키언 저, 두란노, 1996  




 ‘Community 101’이라는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발행한 공동체에 관한 입문서이다. 빌 하이벨스 목사의 멘토로 더 알려진 길버트 빌지키언 교수의 글로, 공동체에 관한 이론 정리 부분이 특히 눈에 띄는 책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공동체의 실천 방안이 제시된 책은 아니지만,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쉬운 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공동체 신학’



김현진 저, 예영 커뮤니케이션, 1998


공동체 교회론, 공동체 교회사, 공동체 성령론, 공동체 사회론, 공동체적 기독교 교육, 공동체적 실천사학등 6개 분야에 걸쳐, 공동체에 관한 이론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한국 목사가 지은 책으로,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과 실천을 위한 좋은 지침서이다. 이상으로 그치는 공동체성이 아니라, 제자도로서 실천적인 공동체성과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교회사를 통해 실제로 이끌어 오신 성령님의 역사, 그리고 공동체 교육의 필요성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성경은 공동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송인규 저, IVP, 1996 




공동체에 관한 여러 좋은 책을 소개한 송인규 목사가 공동체에서 대한 이론을 정리하신 짧은 논문 형식의 글이다. 일반공동체로서 완전한 공동체였던 아담공동체가 무너진 후,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통해 어떻게 그의 공동체적 이상을 이끌어 오시는가를 살펴본다. 이스라엘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성경적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본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신약의 교회 공동체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들, 즉 합일성(하나됨의 표출), 친밀성(소외된 자까지 모두 형제로 받아들임),상보성(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받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교회 공동체는 결국 하나님과의 영원한 공동체를 이룰 것을 차이점으로 밝힌다. 책의 반 정도가 주석과 참고 도서로 되어 있는 이론서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송인규 저, IVP, 2000




‘나의 주 나의 하나님 2권’이라고 밝힌 이 책은,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가기 위해, 그룹 공부의 형식을 취했다. 공동체에서 겪는 갈등들 – 판단, 비판, 권고, 징계, 용서 – 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고, 소그룹 운영과 성경공부에 관한 이야기까지 포함한다. 현재의 조직교회에 속한 소그룹에는 꽤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단지, 이상적인 공동체에서는 거리가 다소 있는 눈높이를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게 남는다.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 & ‘우리와 하나님’



대천덕 저, 기독양서/예수원


한국의 공동체를 끌어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천덕 신부님의 책들이다. ‘우리와 하나님’은 공동체의 성경적 원리를 잘 다루었다면,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는 공동체 속에서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동체에 관한 책들이 쉽게 절판되 버리는 실정이지만, 이 두권 모두 절판된 것은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어른들께 여쭈어 보면 한권쯤은 가지고 계실 가능성이 높다.

 

 



  ‘목회와 신학’ 89년 9월호 특집  


두란노에서 발행한 ‘목회와 신학’은 초창기에 더 좋은 글들이 실렸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공동체에 관한 특집기사이다. 대천덕, 방선기, 정태일 등의 저자가 ‘현대교회와 성경적 공동체’, ‘신인공동체를 바라보며’같은 이론적인 글들을 비롯해서, 한국과 미국의 공동체의 모습, 또 도시 속의 공동체의 실체 등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글들이 7편 실려있다. 지금은 두란노에서 CD로 구할 수 있다.

 




‘Subversion of Christianity’



Jacque Ellul 저, Geoffrey Bromiley 역,



Eerdmans, William B. Publishing Company 


공동체적 시각에서 새롭게 쓰여진 교회사이다.

 




이디스 쉐퍼의 라브리 이야기’



이디스 쉐퍼 저, 양혜원 역, 홍성사


스위스 라브리공동체의 설립정신,생활과 사역에 관해 쓴 책이다. 현대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 모범적인 모임에 관한 글들이 거의 절판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기는 반면, 라브리에 관한 글은 새로 증보판이 발행되었다. 공동체에 관한 이론서는 아니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봄으로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서재석] 화보로 보고 읽는 루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르틴 루터』

파울 슈레켄바흐·프란츠 노이베르트 지음,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4×6배판/양장/438, 2만원


새해 첫 달을 루터를 읽으면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그것도 단지 두꺼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135면에 달하는 풍부한 화보와 함께 보면서 읽는 루터와 종교개혁이라면, 어떤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루터의 종교개혁 400주년을 기념해 나온 이 책은, 독일에서 초판 10만 부가 완전히 매진되었다. 서문에 밝힌 대로 “이 책 어느 곳에서도 루터를 미화시키려는 시도는 볼 수 없고 그의 결점과 실수가 명확하고 노골적으로 지적”된다는 점에서 일단 점수를 줄 만 하다.


이 책은 21장으로 나눠 서술한 전기, 화보, 주요 문헌자료, 인명·지명 색인 등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독특한 매력 가운데 하나는, 책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384점의 진귀하고 다양한 화보를 보는 재미인데, 회화·도화·동판화·목판화·메달 등에서 저자들이 직접 고른 신뢰할만한 사진 자료들은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구입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책 가운데, 이 정도로 방대하고 풍부한 루터 관련 화보집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루터와 관련된 주요 문헌자료에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논제’(1545)를 비롯해 루터의 주요 편지들이 수록돼 있어 쏠쏠하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화보 못지 않게 방대한 인명·지명 색인으로서, 100면 가까운 분량에 루터 시대 인물 134명과 30여 지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수록돼 있어, 이 책 한 권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습득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서재석] 새벽을 열었으니, 다음은 무엇인가?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벽사람 전성기』

(규장, 2003), 오정현 지음, 207, 8천원


지난 가을, 서울 강남 사랑의교회엔 새로운 일이 여러 가지 생겼다. 1978년부터 이 교회를 개척, 성장시켜 온 옥한흠 목사에 이어 25년 만에 그의 애제자 오정현 목사가 새 담임목사가 된 것과, 오 목사가 부임하면서 연일 만당(滿堂)을 이룬 40일 특별새벽기도회(2003. 9. 8-10. 18, 이하 특새)를 열어 교계는 물론 일반 뉴스에서도 다루어지면서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40일간의 특새, 그 기적 같은 부흥의 비밀이 궁금하던’(뒷표지 문안) 터에 신속하게 그 전말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 주는 책이 규장에서 『새벽사람 전성기』란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은 새벽 불길, 새벽 축복, 새벽 성령, 새벽 믿음, 새벽 대첩이란 ‘새벽’(at Dawn)으로 시작하는 5개의 큰 주제 아래 오 목사가 전한 18편의 메시지를 나눠 수록하고 있으며, 각 장 말미에 특새에 참석했던 이 교회 성도들의 이런저런 짤막하지만 감동적인 소감과 간증을 ‘새벽 감격우리는 새벽파’란 꼭지로 묶어 소개한다. 이와 함께 규장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챕터별 요약이 ‘새벽 신앙 불멸의 법칙’이란 꼭지로 곁들여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오정현 목사는, 한국교회의 7, 80년대 고속성장을 주도한 1세대 유명 목회자들의 명예로운 은퇴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에 의한 리더십 이양을 제대로 준비하지도, 단행하지도 못한 채 꼼수와 무리수를 두고 있는 일부 그러나 영향력이 적지 않은 대형교회와 단체들이 세습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한국교회 전체를 우울하게 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면서 비교적 건전한 세대 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합동측 교회갱신 운동의 모체요 실질적 본산이며, 교계연합운동에서 제3의 기구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한국목회자협의회의 중추적 구실을 하면서 복음주의권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교회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바톤을 이어 받아서 어떤 목회, 어떤 사역을 전개할 지 전례 없는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부흥회 식 전도를 넘어 교회성장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8, 90년대를 풍미한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이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6, 70년대의 전통적인 목회방식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특새란 뜻밖의 카드를 꺼내 일단 성공을 거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펼쳐질 본격적인 사역을 준비하는 워밍업 훈련으론 제격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그래도 강남기독중산층을 대변하면서 나름대로 균형감을 잃지 않았던 이 교회가 점점 오른편으로 향하는 신호탄 아니냐는 염려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오 목사의 메시지들은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개척하면서 짧은 시일에 대표적인 이민교회로 성장시킨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주로 개인 구원의 감격과 대를 잇는 가족의 평안, 그리고 전도와 선교를 통해 교회의 성장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보수 신앙에 충실해 특새와 같은 시간대에 전달하는 메시지로 손색이 없다. 문제는, 그것들을 넘어 이미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가 되어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이 교회가 세대 교체 이후 앞으로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에 걸맞는 메시지가 전해지고, 새로운 교회상()을 정립해 나갈 것이냐에 있는데, 이제 새벽을 연 데 불과하기 때문에 좀 더 느긋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한편 이 책에는 ‘새벽기도 로드맵’이란 재미있는 상자 기사들이 군데군데 나오는데,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같은 새벽기도 구호, ‘내 믿음의 전성기를 주옵소서’ 같은 새벽기도 격문, ‘저녁 9시 이후에는 절대로 영화나 TV시청을 하지 말라’ 같은 새벽기도를 위한 몸 관리 프로젝트, 12가지 건강비결, 새벽기도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5가지 습관, 영적 부흥을 위한 9가지 열쇠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 압권은 171면에 나오는 40일간의 특새에 개근 또는 정근한 성도들에게 수여한 기념 동판으로, 일명 ‘영적 마패’로 불리면서 평강과 은혜 마패, 제사장 마패 같은 위력이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 책과 함께 특새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테이프를 묶은 오디오북(테이프 4, 1만원)도 나와 있다.


[박성호] 예배가 자꾸만 시각화 되어간다

이코스타 2004년 1월


종 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만일 서슬 퍼렇게 살아 있어서 요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면 맨 처음에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물론 그가 늘 다니었을 루터파 교회 말고 일반적인 현대 예배(Contemporary worship)에 참석한 소감을 물어본다면 말이다. 생각건대 충격,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가 애써서 없애 놓았던 각종 이미지와 아이콘, 상징물들이 그냥 창문에 붙어만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앞에 있는 커다란 화면에다가 큼지막하게 잘 보이도록 쏘아대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정도도 단순한 아기예수나 성모마리아의 석고상 정도라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온갖 ‘잡스런’ 영화 나부랭이랄지, 아름다운 풍경이랄지, 아니면 직접 예수가 되어서 연기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이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아마 충격도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번에 다시금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며 어딘가 대문에다가 내다 붙일 반박문의 첫머리를 이미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음 세대를 향한 준비를 갖추자며 장년을 위한 ‘현대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물론 20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질 찬양과 경배 시간, 그리고 각종 드라마와 동영상, 자막과 예술적인 업그레이드를 꿈꾸며 준비하는 다양한 ‘꺼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 ‘현대 예배’에 몰두하는 요즘, 나는 ‘만일 마틴 루터가 내 옆에 앉아서 함께 예배드린다면 어떨까’는 질문을 해보면서 이 예배를 준비하곤 한다.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시작했던 종교개혁의 거친 물결으로 시작해서 이루어 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심과 권위들은 2003년을 마감하는 오늘의 예배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담겨져 있을지 궁금한 요즘이다. 조금 오래된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설교자가 작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높은 강단을 바라보면서 ‘회중들이 앉아서 얼굴 쳐다보려면 목이 좀 아프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높이 올라갔던 강단은, 요즘으로 바꾸어서 말하자면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에 비쳐지는 설교자의 큰 얼굴 정도가 아닐까 하는 비교를 해본다.


확 실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예배가 말씀 중심의 듣는 예배에서 점점 더 시각화(visual)되어 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만족하지 않고 다차원적인 감각으로(multi-sensory) 나아가는 것이 우리 예배의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역시 시각적이고 다차원적인 감각에 익숙해진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편한 방식의 예배를 더 선호하는 것이 요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두가지, 많아야 세가지 이상의 색깔이 들어간 교과서를 구경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정말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눈에 쏙 들어오도록 잘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본다. 다 자기가 숨쉬고 있는 똑같은 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편할 따름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예배의 흐름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막아야 할 퇴행적인 현상인가?


물 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시각화되어 가는 예배가 조심해야 할 요소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예배의 구경거리’를 많이 심어줌으로 인해서 예배 참석자들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시켜 버릴 가능성이 매우 짙다. 이른바 ‘예배의 엔터테인먼트’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자꾸 커져만 가는 설교자의 얼굴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 목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반드시 거두어 들여야만 할 것이다. 물론 워십 리더의 모습도 마찬가지이고. 종교 개혁 당시의 지적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우상화되어 버리는 현상을 정말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의 영성이 점점 퇴색되어 가기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배 잘 보았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어찌 예배를 볼 수만 있는가? 잘 드려야지, 아니 말 그대로 예배(禮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새 로운 현대 예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시각적, 청각적 매체를 통한 효과를 나는 거부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우리가 마틴 루터의 숨소리까지도 잡아낼 수 있는 귀한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요즘이다. 우리의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그런 예배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만져주는 그런 예배가 있다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성찬식에는 딱딱한 빵의 가련한 모습과 그윽한 포도주 냄새가 장소를 가득 채우는, 그 뒤에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갈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동영상이 스크린에 가득 담기면서 고요한 찬양이 우리의 귓청을 자극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이끌어 가는, 그런 예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영성을 가르치는 파워 포인트 조작법’이란 이 세상에 없음을 기억하곤 이내 주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