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영]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하신 일을 다른 지체에게 전하는 저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장으로 섬기는 기회의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시고, 각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에 진정 도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대학졸업 후 유학을 준비하면서 보냈던 바쁘고, 안정감 없었던 2년 동안 하나님은 늘 저에게 제가 원하는 이상의 리더로서의 책임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저의 리더로서의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최소의 믿음으로 인한 거부 할 수 없는 그러나 기쁨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늘 제가 계획한 만큼 준비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꼈으며, 조원들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은 저의 스트레스였습니다. 이런 시간이 계속 되면서, 저는 하나님께 늘 죄송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피했고, 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습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자체에 대한 기대보다는 구속감까지 느낀 것 같습니다. 받는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받는 것 같이 보여야 할 것 같았고, 더 기쁨이 있어 보여야 할 것 같고 조원들에게 사실보다 더 관심 있는 척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음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저의 영적 저항력은 참으로 약했고 영적 전쟁은 커녕 제 마음과 몸까지 아프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저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구하고 바라지 못했었습니다. 제 안의 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안아주시면서, 저를 살리시고 저를 통해 일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같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는 기독교인이지만, 뭔가 굉장히 갑갑한 인위적인(artificial)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을 한 동안 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가 빈털터리의 심정으로,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주님을 의지할 때까지 저를 그냥 놔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숨겼던 저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분께 다가가자 그 때서야 주님은 저에게 성경 말씀에 감동 받게 하시고, 울게 하셨고, 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는 강함이나 약함에 구애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제가 제 조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지 못했던 이유는 제가 주님께 얼마나 사랑 받고 있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지 그리고 그 사랑이 세상이 할 수 없는 얼마나 값지고 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사랑 받는다는 생각이 제 마음속에 자리잡자 다른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이고, 무엇보다 기쁘지 못했던 아픈 마음들을 주님은 그 분의 신실한 사랑과 주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포기함 없이 저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심으로 통해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1년 전 미국에 법 심리학을 공부하러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1년 동안 미국에서의 학교와 생활에 적응하는 동안 그 감동 받음을 또 까맣게 잊고 있다가 조장으로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조장은 왠지 마음 속에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신청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능력은 별로 고려치 않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시는 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조장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의지와는 달리 조장 훈련을 성실히 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도망가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가기 2일 전 조원들한테 메일 한 통 보낸 것이 모든 준비였습니다. 제 자신에게 실망스러웠습니다.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마음이 계속 무거웠습니다.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마음, 이번에 우리 조원들이 받을 은혜를 계속 부정하는 마음, 영적 전쟁에서의 실패를 예비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꼭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갖가지 방어기제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일주일도 안 되는데 인간적인 성의만 보이자, 그 동안 얼마나 가까워지겠어 등등. 그런데 마음이 참 안 좋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꼭 타협하는 것 같았습니다. 코디님과 멘토님들을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제 자신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준비 안 한 조장이라고 보여질까봐 벽을 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굴도 모르던 저의 지역에서 온 다른 조장들과 멘토님들 그리고 코디님은 저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저에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여 주셨던 것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들의 조원이었던 저를 정말로 아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 다른 형제 자매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던 저만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순수하지 못했던 저의 마음에 대한 회개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괴롭고 답답하지 않았고 너무 신선했고 좋았습니다. 몇 년 전 하나님께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하도 이해가 되지 않아 왜 저를 사랑하시냐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니?“라는 한 마디가 다시 제 마음을 감동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저는 다시 하나님 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서 있는 지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코스타에 대한 기대, 조원들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하나님 안에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부족한 나를 통해 이루실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단호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1박 2일의 조장수련회는 하나님 안의 평안을 누림과, 동시에 내가 조장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조원들에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동기 부여의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사님들의 강의 내용과 열정, 스태프들의 애쓰는 모습들,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해 내려고 하는 조장들의 모습, 열정, 그 과정에서 바닥나지 않게 계속해서 주시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기쁘고 힘있게 조원들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본 조원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기적들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매개로 해서 그들과 마음이 만나는 과정들이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테크닉은 없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그러나 순수히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었고, 나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계획하시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을 이루시고, 세상이 줄 없는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각 사람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수 있는 은혜를 주심에 얼마나 노력하시는지 저의 삶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조원들 스스로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각각에게 지금 계획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도와주는 일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드러내는 일 쉽지만은 않았고, 피곤한 일정 속에 저의 진심을 행동으로 보여주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순간순간 드는 인간적인 교만과 판단은 기도를 계속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이번 코스타를 조장으로 섬기는 과정에는 만난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하나님에 대한 의지함 사랑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두 배 세 배 열 배씩 그 때 그 때 갚아주셨습니다. 정말 피곤해서 한 마디 밖에 기도하지 못할 것 같았을 때였지만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단호한 마음, 그리고 많이 기도할 시간이 없으니까 나는 너무 많이 받았으니까 조원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한 마디씩이라도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한 그 마음들을 하나님께서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저희 조원들과의 교제(interaction)로 인해 오히려 제가 더 많은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하나 다 쓸 수는 없지만 조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의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경험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귀중했고, 아름다웠고, 그들이 아픈 이야기를 할 때 제 마음도 아팠습니다. 저희 조원들이 저한테 더 잘했습니다. 서로 바쁘니까 자주 연락하기 힘들 수는 있어도 아마 힘들 때, 또 행복할 때 꼭 생각나는 서로에게 귀중한 친구들이 된 것 같습니다. 육체적인 강인함도 허락해 주셨고 저에 대해서 집중하고 기도할 수 없었던 저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말씀 시간을 통해, 찬양시간을 통해 어쨌든 정신 없었던 그 5박 6일 동안 결국 저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부족함없이 다루어주시고 도전을 주시고 평안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10년 이상 해결 못하고 제쳐 놓고 있었던,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문제인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치료하시고 처방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게 주신 시간과 힘과 돈과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 받게 하셨습니다. 코스타가 끝난지 한 달이 되어가지만 저는 저의 아직 조원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결과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습니다. 이런 마음이 저는 제 안에서 나왔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 안에서 안 나온 것일수록 제 안에서 가장 영향력과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영향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장으로 섬기는 과정으로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 다시 말해서 나의 형제와 자매를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는 확실하게 맛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을 보면 소망이 없어지지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저를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주님을 믿기 때문에 저를 통한 제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과 치유의 mission”에 대한 기대가 충분히 있습니다. 조장이라는 것 제가 가지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자질과 역량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서로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믿는 마음으로 구하고, 받은 힘과 통찰력(insight)을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동으로 옮기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 만드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박소영] 초보 간사의 일기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코스타가 뭔지 잘 몰랐습니다. 아니 듣기는 들어 봤죠. 위로 둘 있는 언니들이 가는 열띤 집회라는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카고에서 열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구요. 그러나 그것 말고는 아는게 없었으므로 거의 모르는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게 참 많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코스타에 대해 알게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제 모습 또한 변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고 일을 하면서 저의 믿음을 여러각도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하나님께서는 좀 특이하게 일을 하시는 것 같다고 느낄때가 많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끔 만드시는 일이 요즘들어 더 잦은것 같기도 하구요. 제가 기대치도 않았던 곳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가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한 순간 역사하심을 나중에야 알게되기도 합니다.


이번 코스타때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돈 계산을 할 때 라든가, 복사를 할 때라든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그 때. 그 바쁜 와중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혹시 코스타랑 돈이랑 복사랑 자판이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저의 신분을 밝힙니다. 저는 코스타 사무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사무일과 코스타 상관이 아주 많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코스타에서 어떤 경험을 하였을까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가 무얼 볼 수 있었고 무얼 느끼게 되었는지 글을 쓰면 혹시나 발견하게 되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생각에 이것 저것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적어도 마우스를 누르는 손가락에 쥐가 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휘튼 칼리지 도착하던 순간부터 제가 무엇을 볼 수 있었는지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휘튼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이래가지고는 강의실 묻는 학생들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준단 말인가! 나도 처음인데! 하고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피셔로 향했죠. 피셔에서 등록을 한다더라…라고 듣는 순간 짐들은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떻게 싼 짐인데 그 아까운걸 다 푼단 말인가” 하는 황당한 멘트를 제 자신에게 던지고 맙니다. 코스타중 필요한 사무용품 등등을 싸는게 저의 임무였기 때문에 왠지 싼짐을 지켜야 되는게 아닌가 하는 의무감에 불타올라 그만 다음 임무는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짐은 풀려고 싸는것 아니겠습니까? 이사를 많이 다녀 보신 유학생님들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싸는것도 막막하고 또 푸는것도 막막하고 머 그러면서 이사는 하게되지요. 아무튼 봇물 터지듯 일들은 여기저기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경험많으신 간사님들께서 이삿짐 센터맨들보다도 더 실속있게 정리하시는걸 보게되었습니다.


피셔에서 이루어진 등록 및 방배정을 물론 제가 하지 않았죠… 일년동안 그걸 위해 준비해오신 간사님들께서 다 하고 계실때 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대기는 오래 못가더군요. 코스타엔 “대기”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바로 등록자봉으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쓴 단 한개의 일기가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07/05/04 KOSTA


새벽 4시. 장난이 아니다. 아… 여기계신 분들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밤을 샌다. 놀라워라…
나는 덩달아 새고 있다. 나도 신기하다. 졸린듯 안 졸린듯.
내 정신상태는 희미-몽롱-바보-몽롱-희미의 순으로 회전을 한다.
지금 내가 보고있는 일들이 마치 꿈인듯 한 생각이 방금 들었다.
어쩌면 꿈인지도…
내일은 월요일…드디어 큰 코스타가 시작이 된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싶다. 맡길 수 밖에 없다.
생각을 여기서 멈추고 싶다.
그런데 나의 뇌는 통제를 할 수 없는가 보다.
머리는 자는데 손이 계속 놀려진다.


이걸 끝으로 일기는 더 없습니다. 더 쓰질 않았더군요…


계속해서 피셔에 조장님들 도착하시고 그리고 조원님들 도착하시고.. 하면서 삼박사일이 흘렀습니다. 저는 7월5일날 짐 쌀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일주일쯤 지낸것 같다는 착각에 갈 때가 됐겠거니 생각했나 봅니다.


근데 왠걸…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그렇게 코스타가 시작이되고 또 진행이 되었습니다. 집회, 식사, 세미나, 엑스포 …가 진행이 되고 있을때 코스타 초보 사무인 저는 이유 없이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지도 않지만 뭔가 대기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Waterboy정신이었을까? 머 그런 느낌도 있었구요. 마치 그런 기분 아십니까? 떠나버린 버스를 잡으려고 질주를 해보건만 신고있는 구두와 교복이 협조를 안해줘버리는 그런 느낌. 그런 와중에도 방향이 희미하다거나 길을 잃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왜일까… 그때 제가 볼 수 있었던게 또 한가지 있었는데요. 무슨일이든 성실히 감당하시는 간사님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뭘 할지 몰라 당황할때,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반장 혹시 아시나요?, 그게 좀 과장일진 몰라도 하여간 계셨습니다.


이렇게 2004년 열 아홉번째 코스타에서 하나님께서는 제가 돈을 세고 있을때는 헌금에 대해 생각나게 해주시고, 또 강의내용을 복사할 때에는 말씀에 도전받게 해주시고, 또 컴퓨터 앞에 앉아 등록자봉을 할때에는 형제, 자매를 만나게 해 주시더니, 당황할땐 도움의 손길도 아주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그외에 보고 배운것들에 대한 발견은 지금도 하고있습니다. 아마 줄창 하게 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무는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배움도 계속 되겠죠. 제가 머 수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재도 아니고 그럼 천재는 더더욱 아닐테므로 배울게 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년 코스타도 기대되구요.


다들 배운것들을 실천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실천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안녕히계세요.

KOSTA/USA 2004 참석자 좌담회 – 김우재, 여희영, 권오진, 최호진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  eKOSTA: 좌담회에 참석해 주신 코스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김우재: 저는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심리학을 5년째 공부하고 있고요, 코스타 참석은 처음입니다. 아내와 5살짜리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4년 전인데, 미국에 와서 많은 성장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좋은 목사님도 만나 뵐 수 있었고요. 지난번 콜럼버스에서 열렸던 gpKOSTA에 참석하고, 미국 코스타에도 참석하는 등 올 한해가 제게는 참 중요한 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여희영: 지난 여름에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international study로 석사를 마쳤고요. 교회 나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인데, 대학에 와서 UBF라는 선교단체를 통해 더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코스타는 이번이 처음이고요.


권오진: 지금 UCLA에서 통계학을 공부하고 있고요, 코스타는 2000년에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와 있을 때 조장으로 참석한 경험이 있는데, 이제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호진: 저는 DC에서 Bioinformatics 석사과정에 있고, 모태신앙입니다. 코스타는 2002년도에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참석했었고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  eKOSTA: 이번 코스타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라는 주제가 유학생들의 처한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적절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 주제가 집회과정을 통해 잘 드러났다고 보시는지요?


권오진: 저는 이번 주제가 이 시대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매우 절실하게 필요한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적어도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기독교라는 간판 자체는 세속적인 관점으로도 더 이상 핍박이나 멸시의 요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신분과 계층을 암시하는 지표로까지 상징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세속적인 형통과 축복의 통로로 종종 잘못 이해되기도 하구요. 이런 시기에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라는 거룩한 선포는, 좁은 길을 피하고 넓은 길에만 모여 있으려는 위험한 움직임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기대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범위가 제시된 것과는 달리 “고난”에만 치중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2004 KOSTA 주제를 접하고 가졌던 기대와 생각은 공동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그리고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 공동체에게, 공동체적인 고난과 거룩함에 대한 화두를 던져줄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jjKOSTA에서부터 마지막날 파송예배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대한 내용은 아침QT를 제외하고는 다루어지지 않았구요, 따라서 “고난” 역시 개인적인 고난과 신앙의 성숙이라는 주제로 흐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고난과 공동체를 모두 다루기에는 4박5일은 너무 짧은 기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주제 선정의 의도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난과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적인 고난에까지 모두 다루려고 했던 것은 좀 무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우재: 공동체라는 부분이 전체집회를 통해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공동체라는 주제가 신앙이 꽤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코스타에 참석한 사람들의 신앙 상태를 고려할 때, 아직은 개인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코스타의 주제를 살펴보더라도, 작년에는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제작년에는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대부분 개인적 수준의 내용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이번에는 주제를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를 주제로 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신앙 1세대가 이루어 놓은 전통 아래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형통이나 혹은 기복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나아가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안전을 넘어선 고난받는 신앙을 주제를 더 강하게 다룬 것은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강사님들도 공동체라는 주제를 염두해 두셨겠지만, 전체 신앙 수준 등을 고려해서 고난에 초점에 맞추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최호진: 저 같은 경우도 대학 때 선교단체를 경험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많이 가지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코스타를 통해 메마른 상태를 벗어나 많은 회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코스타를 통해서 공동체라는 부분을 다루기는 참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조별 활동정도를 하는 상황 속에서 공동체를 깊이 다루기 는 쉽지 않기 때문이죠. 차라리 같은 지역교회 사람들끼리 앞으로 공동체를 적용할 도전을 준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전 QT와 성경 강해에서는 주제가 비교적 잘 다루어진 반면, 저녁 집회 강의는 주제를 다루는 측면에서는 좀 산만하지 않았나 생각하고요.


여희영: 공동체라는 주제가 워낙 큰 주제이기 때문에, 이번 코스타에서 다룬 정도가 참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서는 세미나에서 좀 더 심도있게 다루어졌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사실 코스타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제가 무엇인가하는 부분보다는 개인적인 신앙 회복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너무 깊고 어려운 내용을 전체 회중에 맞추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공동체라는 범위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둔 모임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즉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몸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큰 의미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고난이라는 주제는 참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 힘든데, 선포되는 설교는 왜 이렇게 쉬워 보이는가 하는 갈등 등이 있었는데, 그런 갈등들이 많이 해결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제는 대체로 균형 잡혔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우재: 제 생각에는 코스타의 주제는 결국 QT와 아침 성경 강해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녁집회는 나름대로의 주제를 가지고 진행하는 것 같고요. 제 생각에는 김진홍 목사님의 아침 강해가 이번 주제를 충분히 다루어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미나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제공해 줄 수 있지만, 주제에 관한 큰 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침 성경강해와 홍정길 목사님의 특강은 특히 좋았다고 봅니다. 더구나, 겨레 혹은 민족에 대한 큰 그림을 보지 못했던 저에게는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는 많은 도전과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권오진: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주제가 잘 드러났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솔직히 긍정적인 답변을 못 드리겠습니다. 다음 질문들에 세미나와 기타 프로그램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 같으니, 우선은 전체집회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월요일에 있었던 두 번의 말씀, 그러니까 개회예배 설교와 특강에서 주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참가자들에게는 이 두 번의 말씀이 2004 미국KOSTA의 첫인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오전에 있었던 김진홍 목사님의 성경강해에도 저는 이번 2004 KOSTA의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성경강해보다는 설교에 가까웠던 김진홍 목사님의 말씀 세 번의 제목을 보면 “경륜 있는 신앙”, “하나님 사랑, 겨레 사랑”, 그리고 “비젼 있는 교회”입니다. 내용을 종합해 보면 “좌로나 우로나(특히 좌로) 치우치지 말고, 영성과 실력을 겸비하여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중간에 한두번 고난”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기는 하셨으나, 그것은 작은 지류에 불과하였고 전체적인 흐름과는 무관했습니다.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이 오전 성경강해 시간부터 이렇게 다른 내용이 다루어짐으로써, 주제를 집회의 구심점으로 삼을 수 있는 계기를 갖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저녁집회의 경우 전통적으로 KOSTA에서 세번의 저녁 집회 중에서, 첫 집회는 구원 초청을, 그리고 마지막 날은 선교 헌신 초청을 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전 집회에서의 주제 전달은 필수적인 부분이었음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깐,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오전 성경강해 시간이 주제 전달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구요, 김진홍 목사님 말씀 자체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저희 조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오전 성경강해 시간에 은혜 받았다고들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제 전달 여부 이외의 부분에 대한 평가라면 다른 내용들이 많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나친 우 편향성을 들 수 있겠지요.


-  eKOSTA: 전체집회 이외에 더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데 다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여희영: 전체 주제가 다루기가 다소 어려웠다면, 세미나에서 그 주제를 잘 습득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했습니다.


김우재: 아까 권오진 형제님의 말씀대로 주제를 바로 전달하려면, 제 의견으로는 코스타의 주제를 정하신 주최측에서 한 분이 집회 시작 때 주제에 대한 취지를 간단히 전달하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목사님들께서는 그 주제를 선택하게 된 배경을 잘 모르실 수 있고, 또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으시기 때문에, 코스타 주제를 정확히 전달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 면에서도 젊으신 코스타를 준비하신 분들 중에서 주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시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권오진: 사실 교재에도 주제 선택에 대한 취지문이 있기는 하지만, 잘 읽지 않으시잖아요. 그 취지문의 내용을 코스타 준비하신 분들 중에서 간략히 설명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최호진: 세미나 중에 치유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내적 치유에 관한 내용이 전체 집회에서 다루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현실성에 있어서는 좀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치유에 대한 세미나들을 통폐합해서 규모있는 시간으로 운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학교 때 선교단체에서 여러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보면, 가정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 만나는데 혹은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김우재: 저도 동의하는데요. 2년 전 치유를 주제로한 코스타에서 이 부분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적 치유라는 내용이 좀 깊이 다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최근까지도 기독교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한다는 면에서 내적치유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몇 권의 책과 코스타의 세미나 등을 통해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선교지가 물리적이고 지역적인 곳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내면이 바로 선교지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통 혹은 고난이란 것이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현대의 청년들에게는 많은 경우에 내면의 상처라는 부분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코스타에서 내적 치유에 관심을 더 기울여 주신다면, 복음이 전파된다는 측면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  eKOSTA: 세미나 내용이나 tmKOSTA 등에 대해서 좋았던 점이나 보강되어야 할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호진: 세미나는 전체적으로 좋았습니다. 다만, 제가 들어간 세미나 중에서 김승태 목사님의 ‘한국교회의 공동체와 고난’에 대한 강의는 너무 신사참배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전공이시긴 하시지만, 독재체제나 현대의 한국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tmKOSTA의 경우는 과학일반으로 들어갔었는데요, bioinformatics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stem cell에 관한 것 등 윤리적이 문제들이 더 깊이 다루어 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eKOSTA: 그런 부분은 코스타의 후속 프로그램에서 채워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요. 최호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여희영: 세미나에 100,200,300번로 번호가 붙어 있었기는 한데, 그 구분이 좀 모호하지 않았나 합니다. 코스타를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좀 더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오진: 제 생각에는 각 세미나별로 미리 읽어오면 도움이 될 만한 추천도서가 미리 공지가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세미나의 경우에, 미리 책을 읽어 왔다면 더 깊은 내용을 다룰 수 있었을텐데, 사전 정보가 부족해서 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김우재: 그렇게 책을 미리 추천하다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도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부분인 것 같네요. 그리고 또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공별 모임을 넘어서, 직업과 삶이라는 면이 코스타에서 좀 다루어졌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은 경우도, lab에서 보내는 많은 시간들이 과연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그런 구체적인 부분들이 코스타 전체집회에서 다루어졌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관 기초강의가 한번쯤 모두에게 다루어지면 좋겠다는 거지요.


-  eKOSTA: 전체적인 프로그램 진행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여희영: 솔직히 저녁집회가 좀 긴 편인데, 휴식시간이 너무 없어서 좀 불편하기는 했습니다. 사람들이 중간에 그냥 다니기는 한데, 문이 한쪽만 열려 있어서 특히 자매들 경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권오진: 저는 서점 운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양적 질적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적어도 추천도서만이라도 충분한 양의 책이 구비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서점 운영을 두란노서원에 위임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코스타 본부에서도 좀 더 관심을 가져주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저녁 집회 설교를 세 분이 한 번씩 하신 것에 대해 찬반 양론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결국 3번의 주제는 미리 정해져 있다면, 다양한 분들의 설교를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의견입니다만요.


김우재: 저도 다양한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여희영: 저도 동의합니다. 최호진: 저 같은 경우는 한 분이 저녁집회를 담당해 주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선교단체 수련회의 경우를 보면, 한 분을 통한 저녁 집회 설교가 주는 유익이 꽤 많았던 것 같네요.


김우재: 음… 제 개인적인 의견일 수 있겠지만요… 식사가 너무 풍성하지 않았나 싶거든요. 영양적인 면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좀 간소하게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여희영: 저같은 경우도, 음식이 너무 풍족한 것을 보면서, 어려운 형편 가운데 오신 몇몇 강사님들 보기에 조금 민망한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디저트같은 경우는 그렇게 다양할 필요는 없었던 것 아닐까 싶네요.


eKOSTA: 제가 알기로는 식사가 저희 KOSTA집회만을 위해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Wheaton colloge의 기숙사 음식을 저희가 이용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네요.


최호진: 이번에 Handbook은 너무 잘 만드신 것 같아요.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handbook 안에 조별 활동을 위한 공간이 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월 목요일까지 조원소개, 기도제목들을 위한 페이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권오진: 저는 QT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QT가 좀 어려웠다는 피드백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주제와의 연관성이나 내용의 깊이, 그리고 적용의 구체성을 볼 때, 제가 지금까지 본 QT 가이드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어려웠다는 의견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런 면에서, 조장들을 위한 QT 가이드가 좀 더 있었다면 더 효과적으로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김우재: QT에 관해서는 내용보다는 그 양을 좀 줄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모든 내용을 다 다루기는 좀 힘들 것 같고, 취사선택을 해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안내가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조장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정도는 좀 더 보강될 수 있을 것 같네요.


-  eKOSTA: 그럼 KOSTA 이후 후속 조치 (follow up)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면 좋겠습니다.


여희영: 저의 조 안에서도 카페같은 온라인을 통해 계속 교제를 하자는 의견이 있기는 했지만, 저같은 경우에는 그런 교제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솔직히 좀 의심스럽거든요. 그런 면에서 gpKOSTA가 좀 더 활성화되는 것이 좋은 후속조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권오진: 동의합니다. 온라인을 통한 교제가 길어야 일년 정도 존속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사실 많은 KOSTAN들은 지역교회와 성경공부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데, 공동체의 수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KOSTA가 지역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안이 아니라, 이를 돕는 위치로서 자리해야 함을 생각할 때, 결국 KOSTA는 KOSTAN들이 미국 전역에서 바른 신앙인으로서 여러 가지 섬김을 잘 할 수 있도록 source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eKOSTA나 gpKOSTA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이 부분은 KOSTA 집회의 성격과도 연관된 부분인데요, KOSTAN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훈련이 아닌 소위 “신앙의 부흥과 영적인 회복”에 치중한 집회에 이어질 수 있는 follow up은 KOSTA 집회를 더 자주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KOSTAN들이 영적으로 지칠 때마다 KOSTA conference를 해야 하는 거죠. 따라서 저는, KOSTA가 참가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재: Follow-up이 잘 안된다고 해서 그 면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코스타가 개인적인 영적 부흥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코스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학생활을 통해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을 제 위치로 올릴 수 있는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최호진: 저같은 경우는 gpKOSTA가 정말 많은 도전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삶에서 살아야하고, 제자를 살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결국 gpKOSTA가 코스타의 follow-up으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각 주제별 추천도서 목록이 handbook에 포함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eKOSTA: 마지막으로 이번 코스타를 통해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거나, 특별히 좋았던 점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우재: 코스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사실 복음 그 자체만이 전달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코스타를 통해서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복음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현모 교수님의 강의같은 경우, 차가운 머리로 듣는다면 또 한번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겠지만, 마음에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또 이일형 권사님의 제자의 삶에 대한 세미나가 현실적이고 해서 참 좋았습니다.


권오진: 집회 기간 중의 프로그램 중에서는 목요일 점심시간에 있었던 금식기도회가 저에게는 가장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제시되었던 기도제목들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으며, “김선일 형제의 핏값을 이라크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 제목은 그 날 저녁 시간의 유은하 자매의 영상 간증 시간에 한층 더 뼈저린 제목으로 제 가슴에 남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희영: 저도 금식기도회가 기억이 많이 남네요. 또 강사님들 목사님들의 섬김도 보기 좋았지만, 뒤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간사님들의 모습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권오진: 개인적으로 많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조별 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도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호진: 오전에 있었던 김 진홍 목사님의 성경강해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eKOSTA: 오랜 시간 함께 해 주신 여러분. 너무 감사합니다.

[조근상] 겸손한 예배자 vs 속물 예배자

이코스타 2004년 8월


예배안에서 우리는 많은 현상과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예배안에 찬양과 경배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리 낮설지 않은 모습이다. 2주 전에 새들백에서 열리는 워십컨퍼런스를 다녀 왔다. 6월말에는 칼리지 코스타를 섬기고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그 후에 열린 이 워십컨퍼런스는 나로 하여금 예배와 찬양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첫 날 들어가는 순서부터 마지막 모든 순서까지,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준비되어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찬양팀들이 와서 예배와 콘서트(Festival)로 드려졌다. 전 세계에서 모인 3500여명의 사람들은 이들을 통하여 예배안에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보았다. 헌데 둘째 날, 기대치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젊은 대학층과 Youth들에게 인기있는 한 밴드의 시간이었다. 미국내에서 앨범을 5백만장이나 판매한 이 밴드를 편의상 J 밴드라고 하자. 개인적으로 나 역시 많이 좋아하고,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둘 째 날 저녁시간, 그리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잡혀있는 이 J 밴드의 첫 멘트는 이것이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들이 노래를 좀 한다는 데, 얼마나 하는 지 한번 들어보자”. 순간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순서에 있던 다른 S 밴드의 멘트가 아직 사람들의 귀에 생생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선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저희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허나,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같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S밴드의 멘트와 전혀 다른 J 밴드의 첫 멘트는 곧장 회중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워십컨퍼런스에 참석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순서가 끝나기 전에 나가 버렸던 것이다. 나 역시, 거기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곡들, 자기들만 아는 곡들을 연달아서 해 대는 이들에게 이미 겸손한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세상에서 보여주는 한 공연뿐이었다. 우연하게 컨퍼런스에 참석한 한 미국인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날 J 밴드만 유일하게 자기들만의 곡을 불렀던 밴드였다는 것이다. 다른 밴드는 회중들과 함께 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는데, 이 날 이 밴드의 태도는 교만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사 역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일로서 부담감으로 찾아 올때가 많이 있다. 늘 하는 것이기에 준비하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아직도 찬양인도를 하기 전에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 해야 할 정도로 긴장을 한다. 내 나름대로 예배와 찬양인도를 그만 두어야 할 때라고 할 그 시기는 두 가지 현상을 늘 생각하는데, 하나는 스테이지, 즉 예배를 드리는 무대에 익숙해져서 연예인처럼 행동할 때 나는 예배와 찬양인도를 그만 두어야 하고, 끝나고 나서 짐 정리를 할 때 하기 싫어서 도망다니기 시작할 때 나는 찬양인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게 처음 예배와 찬양인도를 가르쳐 주신 좋은 선배들은 항상 그 일들을 마다 하지 않으셨다. 예수전도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찬양인도를 가르쳐 주셨던 고형원선교사님은 늘 허리에 통증이 있음에도 항상 무거운 것을 나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 분은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배안에서 찬양의 역활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많이 있다. 일단 나 자신부터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예배안에서 찬양이란 한 가지의 필요요소이지 절대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10년이 걸렸었다. 그 전까지 찬양인도자였던 나는 찬양을 인도하면서 가졌었던 모든 자존심이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순서를 위해서 예배가 존재한다고 믿는 분들이 계신다. 허나, 이러한 착각이 있는 이상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예배를 받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의 예배를 원하신다.

[정진호] 제 10 떡 – 갈멜산의 한 판 승부 – 같은 성정 다른 능력

 

(1)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선지자들…….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사무엘과 다윗과 엘리야와 이사야, 그리고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일종의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불가능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꿈과 환상을 좇아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환란에 빠진 자기 민족을 기근과 속박과 전쟁에서 구해낸다. 거짓 선지자와 우상 앞에서 담대히 맞닥뜨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싸워 이기는 용기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순교의 피를 뿌리는 그들의 믿음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우리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믿음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 자신이 왜소해지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항상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을까?


그러나 조금만 더 성경을 들여다보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요 동일한 성정을 지닌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 역시 목숨의 위협을 느낄 때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거짓말을 하였고, 자신의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물질과 성의 유혹에 넘어가 불륜을 鄕嗤8? 자녀교육의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기도 하였으며, 옥에 갇혀 절망하며 의심하기도 하였고, 사역에 대한 갈등과 욕심으로 동역자와 다투어 갈라서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성경 기록의 진실성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삶의 모습을 전혀 과장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한계를 가감없이 여과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한결같은 죄인이요 부족한 인간들임을 오히려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인 성정에 의해 그들이 어떻게 실패하였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달랐다. 그들의 삶에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 역시 떡의 전쟁 속에 휘말려서 고민하고 몸부림치며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 전쟁의 승리자들이 되었다. 그 비결을 알고 싶은 것이다.



(2)


구약시대의 선지자 중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엘리야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명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하늘로 승천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신 순간 모세와 함께 나타났던 두 사람 중 다른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만큼 하나님께 특별대우(?)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예수가 세례요한을 가리켜 구약의 선지자와 율법을 통해 “오리라 한 엘리야가 바로 이 사람이다.(마 11:14)”라고 밝힌 것과, 예수의 놀라운 기적을 목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러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마 16:14)을 미루어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뇌리에 엘리야는 그 누구보다도 뚜렷한 인상을 남긴 대 선지자임에 분명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세례요한-예수 사이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의식주를 초월하여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며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어 불의한 부자와 권세자들에 대해 맞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는 데에 있다. 엘리야……. 그는 물질적 풍요와 권세를 누렸던 구약시대의 대부분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광야 생활을 하며 떡과의 전쟁에 대해 최초로 공개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정면 승부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선지자 엘리야가 후세에 남긴 이미지는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개혁자의 모습이다. 엘리야의 인생을 통 털어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갈멜산에서의 대 접전, 떡과의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바알(Baal)신과 여호와의 한 판 승부를 이끌어내어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숭배하던 거짓 선지자 팔백오십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를 통해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잊을 수 없는 불후의 명성을 남기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갈멜산의 전투를 전후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 상황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전투를 벌였던 바알신과 아세라신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을 육체의 떡으로 미혹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도록 하던 물신(物神)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는 백성들을 질타하며 그 바알신을 추종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엘리야…. 그 승리의 비결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편, 물신 바알을 물리치고 엄청난 승리를 거둔 엘리야의 사역이 어째서 갑자기 위축되었으며, 결국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에 의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본격적인 바알 숭배와 사유재산제도가 도입되고 말았는가 하는 이유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제시하여 깨닫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토에서 하나님의 주권 즉 그 거룩한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다. 다시 말해 국가의 3요소인 주권-백성-영토가 모두 하나님께 귀속된 나라이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통치되는 나라. 모든 풍요와 배부름과 생명이 넘치는 나라. 에덴동산에서 잠시 선을 보였으나 곧 상실해 버린 나라.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천국에서 마침내 완성될 나라. 그 사이를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 나라의 모습을 여러 가지 모형으로 보여주신다. 가정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말씀을 통해,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모습을 통해, 성도들의 삶을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역사다. 그러나 그 땅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그 땅의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선택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나안을 지배하고 있던 물신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려고 내세운 사단의 군대장관이었다. 가나안은 떡의 전쟁을 치루기 위한 전쟁터였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삶의 양식, 존재 양식을 지배할 신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호와냐? 바알이냐?” 하는 이 선택은 떡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선택이기도 하다.


바알신은 가나안 지방의 생산신(生産神)으로 농경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서 믿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바알의 배우신(配偶神)으로 함께 숭배되던 아스다롯(더러는 아세라라고 불려짐)역시 다산과 생산의 신으로 성적인 해방과 쾌락을 추구하며 바알과의 성적 교접에 의해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산당에서는 풍요를 기원하는 행위로서 창기들과 미동들에 의한 문란한 성적인 행위가 주술적으로 함께 행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경문화를 받아들일 때 팔레스타인 지방의 타락한 바알 숭배를 함께 받아들임으로써 여호와 신앙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것은 물질 우상 숭배와 성적인 타락을 동시에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대 왕들은 깊은 우상 숭배와 음행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조상들이 믿어왔던 여호와 신앙을 전부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숭배하는 혼합주에 빠져있었다. 아무튼 바알 숭배 사상은 물질과 성을 사유화하여 마음대로 소유하겠다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악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끌어내신 후 40년간 광야생활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을 시킨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계명과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경제법칙을 상세하게 충분히 제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 가운데 다스려지는 청지기 경제(oikonomia)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치 방식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그 나라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정정치였다. 신정정치와 청지기 경제의 핵심은 모든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재부의 소유는 창조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청지기로서 살아갈 것에 대한 요청이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타락한 죄성으로 인한 권력의 불평등과 부의 불균형이 발생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조정하여 다시 재분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와 제도를 마련해 두었다.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십일조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명령과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통한 절제와 희년 제도들은 물질의 재분배를 통해 영구적인 빈부의 격차가 확대재생산 되는 것을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기업(inheritance)은 토지였다. 12지파를 통해 각 가족 단위로 분배된 토지는 대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기업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경제적 기초였다. 따라서 토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해 놓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본권이었다. 인간 사회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토지의 사용권이 매매되고 토지의 주인이 노예로 팔려감으로 정치 경제적인 불균형이 발생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 희년(the year of Jubilee)이 돌아오면 노예는 해방되고 토지는 다시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토지 되무르기를 통한 경제 정의의 회복이었으며, 성경전체를 통해 흐르는 구속 사상(redemtion)의 현세적 실천이었다.(레 25 : 10, 24) 즉 해방의 나팔소리(yobel)와 함께 50년 마다 임하는 희년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고편이요 예행연습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이 희년 사상이 선포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시작했던 것이다.(눅 4:18-9) 그리스도의 초림은 죄에 빠져 육체적 영적 가난에 허덕이는 웅크린 자들을 십자가의 피로 다시 사서 해방시키는 구속(redemption)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신분 해방과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의 회복이기도 하다. 따라서 구약 시대 희년 되무르기의 핵심 내용이었던 노예 해방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영적 해방으로, 토지 되무르기는 경제 정의를 위한 기업의 회복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과 부르심을 통한 직업(calling)에서의 청지기 직분을 감당하는 새로운 삶으로의 거듭남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경제 활동의 기초는 땅에 있다. 토지의 사유화가 유지되는 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는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희년 제도를 통해 토지 되무르기를 실시하도록 명한 이유이며, 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경제 개념이다. 사회적 경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토지의 사유화를 막고 토지의 공개념을 실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토지 사유화를 통한 사유재산제도의 뿌리 깊은 권력 구조가 거대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되무르기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 체제가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세기의 사회주의 국가를 통한 실험을 통해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르고 입증된 바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 다스려지는 어떤 사회 체제도 가난의 확대 재생산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나 국가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체제 모두가 결국은 사유재산제도(chrema- tistike)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오히려 거대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집단주의적 통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가난의 균등 분배만을 낳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희년 제도가 실시되며 경제적 신정정치를 이루었던 기간을 600-700년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시대의 신정정치가 왕정으로 바뀐 후에도, 비록 혼합주의에 의한 바알 숭배가 부분적으로 진행되기는 하였지만, 토지의 기업 사상이 이어지고 되무르기가 실시되었던 흔적과 기록이 남아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왕이 농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을 때, 나봇이 담대하게 여호와가 주신 기업을 왕에게 줄 수 없다고 저항한 것으로 보아 왕권을 초월한 신정정치의 기업사상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본격적인 바알 사상 즉 사유재산제도가 국가적으로 유입된 것이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의 시대였던 것이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 이세벨은 열열한 바알숭배자로서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왕상 16:31-2) 여호와를 따르던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탄압하였다(왕상 18:4). 그때 그것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여 대항하였던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였던 것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는 여호와냐 바알이냐를 선택하는 한 판 승부였고, 타락한 떡의 유혹에 대항하여 생명의 떡을 선택하는 치열한 전쟁 마당이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이 선지자를 택하실 때에 처음부터 준비된 사람을 택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두가 부족하고 겁이 많은 사람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 삶을 체험케 한 연후에 점차 훈련과정을 통해 그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마침내 전투장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야는 느닷없이 막강한 권력자 아합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징벌을 선포하는 역할을 명받는다. 엘리야 자신의 말이 다시 있기 전에는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당돌한 예언을 한 이후에 그는 그릿 시냇가로 도망간다. 그리고 삼년 반 동안의 광야 생활이 시작된다. 그릿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릿 시냇가로 몸을 피할 때 느닷없이 까마귀를 통해 내가 너를 먹이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엘리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속되는 가뭄 속에서 아합왕은 군사들을 풀어 엘리야를 잡기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실 그릿 시냇물조차 말라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비가 내리지 않기를 간구해야 했던 엘리야의 처절한 심리 상태가 어떠했을지 우리는 짐작키 힘들다.


왜 하필 까마귀인가? 까마귀는 성경에서 항상 불결하고 불길하며 은혜를 모르는 새로 인식되어 왔다. 노아가 방주에서 물이 빠진 상태를 알고자 하여 먼저 까마귀를 날려 보냈을 때 까마귀는 은혜를 저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자고로 까마귀를 길조로 숭상하는 민족과 흉조로 생각하는 민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노아의 홍수 사건과 거의 유사한 홍수 기사를 다루는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까마귀를 오히려 길조로 취급하고 있다. 아무튼 죽은 시체를 향해 몰려드는 불결하고 부정한 새 까마귀를 통해 먹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아마도 엘리야는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엘리야가 깨달아야 했던 것은 가장 천한 짐승 까마귀를 통해 연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한 실존의 체득이었으며, 까마귀까지도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을 것이다.


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은 다시 엘리아를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 보낸다. 그것도 바알 숭배가 극심한 시돈 땅의 가장 가난한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이다. 그 과부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가난 속에서 절망하여 이제 막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자신과 아들을 위해 떡을 해 먹고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세상과 결별하려고 불을 지필 나뭇가지를 모으던 중이었다. 하필 그런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어 그에게 떡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 떡을 먼저 바치라는 엘리야의 명령을 순종해야 했던 과부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그러나 거기서 엘리야는 다시 절망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통의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는 신기한 기적을 통해 자신과 과부의 집이 다시 소생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또한 과부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한 생명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게 하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마침내 엘리아는 이방 여인의 입에서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왕상 17:24).”는 유명한 고백을 듣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갈멜산의 전투에 임하는 것이다. 갈멜산의 승리는 이 광야 생활에서 준비된 것에 불과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앞서 행하는 선지자에게 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거대한 영적 프로젝트를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의 가치를 먼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이 연변에 오기 전에 받았던 삼년 반의 포항 생활을 통해 체득했던 가장 중요한 훈련은 결국 돌이켜 보니 한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먹이신다는 일상적 떡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탈피였다. 일상적 삶과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이 단순한 믿음을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 받아들이기가 그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평양과기대를 준비하는 가운데, 2003년은 정치 경제적인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조치와 한국내 정치경제 상황의 동결로 인해 아무도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 그 프로젝트를 위해 물질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자금이 없어 더 이상 평양 현장에서 건설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 중요한 영적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떡을 떼어 도울만한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하는 원망도 생겼다. 그러던 가운데 부활절을 앞두고 어느 날 새벽에 평양과기대를 위한 물질 후원자를 붙여주시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던 중, 느닷없이 마음속으로부터 “네가 먼저 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후원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처지를 뻔히 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먼저 물질을 내라는 것인지…….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단호했고 다음 순간 내가 한국의 어머니께 맡겨두었던 통장이 떠올랐다. 중국 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통장이요,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받아 넣었던 통장이었다. 장남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으로 눈물짓는 어머니께 무언가 마음의 위로가 되도록 연결고리의 역할로 맡겨두고 떠났던 통장이었다. 그 속에서 어머니 생활비와 용돈도 조금씩 드리며 어머니께는 아들의 통장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애틋한 그 통장이 생각난 것이다.


어머니께 E-MAIL을 드렸다. 그 통장에서 돈을 찾아 부활절 헌금으로 평양과기대를 위해 서울 후원회에 입금시키도록 부탁을 드렸다. 아내에게도 힘들게 동의를 구하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기쁨이 있었다. 이미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 장남과 맏며느리를 갑자기 중국으로 보내놓고 상실감에 빠져 있던 중 어떻게든 대화할 길을 찾으시던 어머니는 뒤늦게 E-MAIL을 배우셔서 자식들에게 넋두리 겸 종종 편지를 보내시곤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때 답장도 못하였지만 내가 편지를 드리면 곧바로 답장을 해주시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 일주일이 다 되도록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메일을 미처 못 열어 보셨나? 궁금해 하던 중 마침내 답장이 왔다. 그것을 읽자마자 나는 가슴이 아프고 쓰려 한동안 눈을 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도무지 너희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무런 장래 대책도 없이 살아가면서 아들은 덜컹 토론토로 유학을 보내놓고 등록금은 어찌하려고 이제 남은 이 돈을 헌금을 한단 말이냐? 네가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보냈다마는 어제 밤 이 애미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돈은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마지막 남은 통 속의 밀가루와 같은 그런 돈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위해 마지막 떡을 해 먹일 그런 돈, 그것을 바치라니……. 그 돈을 찾아 후원회에 입금시키기 위해 은행 창구에서 아픈 가슴을 무릅쓰고 전표를 쓰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는 또 한번의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한 것임을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의 국제 코스타 본부에서 코스타 리더쉽 포럼에 와서 간증을 하라는 초청이 왔다. 코스타의 주요 책임 목사님들과 간사님들 앞에서 간증을 하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이 간증을 하도록 강하게 요청함을 느꼈다. 자신의 치부를 또 드러내는 것 같아 좀처럼 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으나, 결국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간증이 끝난 직후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으신 듯 했다. 특별히 K목사님께서 다가오시더니 큰 감동을 받으신 듯 앞으로 큰아들 다니엘의 학비를 당신이 책임지시겠노라고 장학금을 주실 것을 제안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그 통장 안에 돈이 입금되기 시작했다. 더러는 보낸 분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돈도 입금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정말 밀가루가 마르지 않는 기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은 사르밧 과부의 심정이었던 연약한 믿음의 어머니께도 큰 체험과 용기를 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손자를 직접 먹이시고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신 것이다. 요즈음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평양과기대 건설 현장에서 건물들이 올라가는 장면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 돈이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갈멜산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낸 엘리야, 기도로 삼년 반 동안 비를 그치게 하고 또 간구로 다시 비를 내리게까지 했던 대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할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엄청난 승리를 거둔 직후에, 한 여자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도망가며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는 나약한 모습이 갑자기 어떻게 튀어나왔을까? 자신이 열조보다 못함을 고하는 엘리야는 완전히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기까지 하다. 그 엘리야를 위로하며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시고 떡과 물을 먹이신다. 사십일간의 광야길을 행해 다시 호렙산의 굴 속에 숨어있던 엘리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실존적 질문이 임한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어찌하여 굴속에 숨어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연거푸 두 번의 이어지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엘리야의 대답은 여전히 두려움과 불평에 싸인 대답이었다. 내가 여호와를 위해 열심이 특심이었으나 이제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만 홀로 남았으며 저희가 내 생명마저 취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이 대화를 기점으로 엘리야의 역할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엘리야의 대답을 지켜보던 하나님은 엘리야를 대신할 후계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을 것을 명한다. 엘리야는 오해했다. 그 전투 이후로 자기만 홀로 남았다고 오해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순간 자아 도취감에 빠져 그는 그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한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러자 곧 하나님 중심 사고에서 자기중심적 사고로 전환이 되었으며 여호와를 의지하던 그 믿음은 흔들리고 사라지게 되었다. 이세벨의 손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자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튀어나오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홀로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이 엘리야 외에도 칠천 명이나 남아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광야 생활에서 엘리야를 지켜주었고 아합왕 앞에서 여호와의 권능을 펄럭이며 달려가던 그 능력의 겉옷이 엘리사에게로 넘어가고 만다.(왕상 19:19)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과 오해가 여기에 있다. 위대한 일, 큰일을 행한 직후, 자신이 그 일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기가 닥친다. 그리고 이전의 그 놀라운 믿음은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깊은 회의와 패배감이 몰아닥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듯이 엘리야 역시 동일한 성정을 가진 약한 존재였다.(약 5:17)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갈멜산의 위대한 승리를 일구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엘리야를 향한 사랑은 그야말로 특별했다. 엘리야가 지치고 힘든 상태로 빠져들자 그를 위로하여 먹이면서 곧 그의 후계자를 세우고 마침내 그를 신속히 하늘로 불러올리기까지 했다.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도 역시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가나안의 모세는 망령된 행동으로 그 이전에 행한 업적들조차 까먹게 될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순교자로 미리 데려가신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이 퇴진할 때를 찾지 못하여 결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더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도록 명하신 일들의 경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갈멜산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바알신의 허망함을 만 천하에 나타내고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임을 선언하는 큰 이정표로 남게 되었다.(왕상 18장) 그러나 그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 여호와 신앙을 빼앗기고 그 땅에는 바알신앙과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왕상 21장) 엘리야의 움츠려든 태도와 비겁한 퇴각이 부른 결과인지 우리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그 모든 일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국지전에서 졌다고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며 장렬한 갈멜산 전투에서의 승리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역할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십자가에서 모든 구속(redemption)의 역사를 단번에 다 이루신 예수의 승리는 완전하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누가 선지자인가? 홍수를 미리 알고 예언했던 에녹이 최초의 선지자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라고 인준하셨던 아브라함이 더 큰 선지자인가?(창 20:7) 아니면 갈멜산에서 팔백오십인의 거짓 선지자를 죽인 엘리야가 가장 큰 선지자인가?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희미한 그림자를 기대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에 속한 자요, 그중에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이 예수에 대해 알았던 것 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더 큰 선지자들인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성정이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보다 연약해서가 아니다. 같은 성정을 가진 그들이 남다른 능력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 당시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이요, 다음 순간 그들이 실패했던 것은 그 믿음이 닫혔기 때문이었다.


평양과기대가 과연 세워질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어쩌면 우리의 믿음에 의해 그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평양과기대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세워진다면 그곳은 갈멜산의 전투만큼이나 치열한 떡의 전쟁을 벌이게 될 전쟁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큰 관심사는 대학이 세워지느냐 하는 것 보다 이 모든 구속의 역사 가운데 뛰어들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 속에 나타나는 생명을 살리는 과정들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