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우리’ 중심의 찬양에서 ‘하나님’ 중심의 찬양으로

이코스타 2004년 9월


최 근의 경배와 찬양의 물결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 중심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사람들 중심이라는 것이다. 즉, 지나친 “우리”와 “나”의 강조로 말미암아 찬양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찬양에 쓰여지는 가사들이 너무나 자극적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는 단어들로서는 부적합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외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양을 작곡한 그레함 켄드릭은 자신의 강의 중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적극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대의 경배와 찬양은 너무나 대중을 위한 곡들을 남발하고 있다. 때로는 노래 안의 가사에서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편의상 나누는 CCM과 경배와 찬양의 개념이 이미 미국 내에서는 무너진 지 오래이다. 90년대의 호산나 뮤직의 탐 브룩밴드는 기존의 경배와 찬양을 넘어서 일반 음악가들도 놀라워하는 앨범들을 만들어 내 놓았다. 수많은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사운드, 거기에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즈 뮤지션들이 만들어 낸 앨범들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 하기에는 엄두도 못 내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일반 콘서트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앨범을 들으면서 감탄을 자아내곤 하였다.


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뮤지션을 동원하는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단, 실제적으로 웬만한 교회에서 따라 부를 수가 없고, 같이 한다고 해도 일단 사람들에게 매스미디어, 즉 비디오와 음반을 통해 확산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 할 수 없는 너무나 훌륭한 경배와 찬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국 역시, 아직 지역 교회의 현실은 성가대의 전통 클레식과 경배와 찬양이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숙제로 남아있는 교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례로 탐 브룩같이 클레식 배경에 재즈연주를 하면서, 오케스트라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미국 내에서도 몇 사람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크리스챤 음악이라는 장르에서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우리” 중심의 기성 세대의 찬양에 새로운 찬양의 방식이 접근되었는데, 90년도 후반에 젊은이와 youth그룹으로 확산된 모던 락의 예배 스타일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모던 락의 음악적 색깔들은 기존의 호산나의 경배와 찬양 스타일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음악적 감상을 많이 추구하던 스타일에서 같이 노래하고 따라부르는 젊은 세대의 절대적인 호감을 얻었다. 밴드와 악기 역시, 일렉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 이 4명만 구성된다면 바로 할 수 있는 이러한 모던 락은 패션(passion)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확산되어져 갔다. 모던 락은 “우리”중심에서 “나”중심의 예배로 바뀌어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찬양들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개념에서 모던 락은 “우리”보다는 “내”가 하나님께라는 개념을 가진 찬양들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모던 락 스타일의 경배와 찬양은 지금까지도 젊은 층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어서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앨범들은 모던 락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허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모던 락 음악의 경배와 찬양은 처음 지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쉽게 쓰여진 가사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 나머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적인 요소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과연 찬양일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게 찬양이구나 하는 곡들도 있다. 그 전까지는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혹은 연인들끼리 서로 노래하는 러브송으로 생각할 정도로, 착각할 수 있게 하는 가사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곡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나친 자신의 표현은 상대적으로 ‘거룩’이라든지 ‘순결’ 혹은 ‘신령’과 ‘진정’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가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더욱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변함없는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오고 가고 있는 것이다. 찬양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지만, 프로그램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Donald Gee라는 오순절 교파의 교사가 1929년에 쓴 논설에 있는 글을 잠깐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다.
“우리가 찬송가(Hymn)나 복음송을 부름에 있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단점은 자신이 경험한 느낌과 소망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나타낸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또는 ‘우리’끼리 노래하기 쉽다. 성경에 언급한 꿀이 약속의 땅에서 한가지 실제적 양식이 되듯이, 찬송하는 것은 아름다운 기독교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완벽하고 정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에는 ‘꿀’이 없어야 하며, 우리는 부흥적 즐거움의 감정과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참된 예배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든 꿀은 절제되어야 한다. 달콤한 형태의 찬송가나 노래를 너무 많이 부르는 것은 나중에는 영적인 구토 증세를 일으킨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와 찬양은 결코 실증나지 않는다.”

[정진호] 제 11 떡 – 거룩한 자랑 – 진설병

 

(1)


학생들과 선악과 문제를 공부하며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우리 일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세 가지 유혹 (물질, 명예, 권력) 중에서 너희는 어느 것에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자신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물론 세 가지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기도 하고,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은 없지만 역시 나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내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은 명예의 문제인 것 같다.


물질은 한번 건너뛴 경험이 있기에 – 비록 여전히 잔 펀치로 괴롭힘을 당하고는 있지만 –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놓을 수 있겠다는 신심(信心)이 있다. 또한 권력의 문제는 아직 내가 심각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 경험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를 잡아끄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명예심, 다시 말해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다.


명예심을 어떻게 정의할까?
생각나는 대로 브레인스토밍을 해보자.


보암직한 것, 보이고 싶은 마음?
프라이드, 프라우드한 마음?
뻥 튀기를 하고 싶은 마음?
실제보다 더 크게 더 잘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노출증, 귀걸이, 화장, 섹스어필?
허영심, 명품, 안목의 정욕?
좋은 집, 멋진 자동차?
성적, 일류 대학, 박사학위, 허탄한 자랑?
논문, 집필, 연주, 그림, 공연?
설교, 영적 교만, 성전 꼭대기?


어쨌든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에 분명하니 우리의 눈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만일 소경 아니 시각장애인들은 안목의 정욕이 없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TV 토크쇼에 나온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하고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나온 것을 본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추상적인 명예욕은 시각과는 무관하게 나타나는 일반 현상인 것 같다. 명예심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심층부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죄성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너구리 때려잡기 게임처럼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것이 튀어나오고 그것을 잡으려하면 또 다른 녀석이 고개를 내미는 게릴라성 욕구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멋진 글을 통해 내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출렁이는 욕망의 파도 언저리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스타 집회에 가서 간증설교나 세미나를 할 때에도 종종 이것이 내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에 싸이기도 한다. 다른 강사들과 비교하여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하고, 집회 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은혜를 받았다고 인사를 하면 내면의 파도가 더욱 거세어진다. (물론 감사하게도 그 욕망의 파도 뒤에 따라오는 은혜의 더 큰 파도가 있기에 이글을 계속 쓸 수 있으며 코스타에도 계속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일, 설교를 하는 일, 연주를 하는 예술 활동 등의 본원적 가치를 무시하고 모두 명예욕을 위한 것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여인의 아름다움 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도 아니며 화장하는 여인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꽉 막힌 사람도 아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단장한 여인의 순결한 모습 淡【?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의 은혜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쓸 때도 있고, 학문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자연 세계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기뻐할 때도 있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나타나는 비전의 통로가 되는 설교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성 깊은 연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수시로 명예욕이라는 뿌리치기 힘든 함정에 쉽사리 빠져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2)


명예심(Pride), 자랑(boast)은 스스로의 우월감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그것이 심중에 있건 입이나 행동으로 표출되건 간에 인간은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로 우리를 유혹하던 사단의 말은 궁극적으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함정에 깊이 빠져버렸다.


결국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둘이 되실 수 없는 분이기에 가짜는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죄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죽음 언저리로 몰고 간다. 그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은 곧 죽음의 씨앗인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이 있다.
사람만이 자기 이름을 가진 존재이다. 종족의 이름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이름을 가진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만이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 세계에 60억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이름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후손에게 남기는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많은 민족이 조상의 묘소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또한 족보를 통해 그 이름을 보존하기도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함께 다니던 동급생이 갑자기 죽은 일이 있었다. 출석을 부르던 교수가 그 학생의 사망 소식을 듣더니 무심하게 출석표에 자를 대고 그 이름을 두 줄로 지워버렸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없었으며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만큼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인격체인 사람에게는 이름이 곧 자신이다. 이름이 사라지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름이 올라가면 그 자신이 올라가는 것이요 이름에 먹칠이 가해지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이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저 유사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가 사람처럼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동물도 죽은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을 한다. 


남들 앞에 화려한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을 많이 하는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수없이 발생하는 허위적인 행동들을 생각해보라. 명분과 이름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는 더더욱 이 병이 깊다. 양반과 가문을 따지던 옛 습관이 요즈음은 뿌리 깊은 학벌사회로 변질되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 뜻 그대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직업을 택하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한다. 마치 과거에 장원급제하던 시절처럼 사법고시에 청춘과 전 인생을 거는 법학도들, 학문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그들이 법관이 되고 교수가 되었으니 사회가 온전할 리가 없다. 온갖 타이틀을 명함에 새기고 이력서에 한 줄 더 넣기 위해서 기를 쓰다보니 가짜 박사요 가짜 자격증이 난무한다.


이 현상은 크리스천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한 수 더 뜬다고 해야 옳지 않을지? 유교적 계급의식에 물든 한국인들에게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하는 타이틀 보다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것을 자신의 이름 위에 붙여지는 타이틀이나 계급장으로 인식하여 사회적 존경이 뒤따라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사카린을 녹여 만들어 먹던 뽑기와 같이 그것은 잠시 입안에서 달지라도 금세 부서지고 녹아 없어질 사이비 명예요 가짜 계급장일 뿐이다. 그 같은 명예욕의 연장선상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사람은 없을까? 교회 안에서도 높아지려는 경쟁심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일부 교회와 교단에서 장로를 돈으로 사고 총회장 선거에 온갖 부정부패와 금품이 오간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이 되어있다. 영적인 명예심은 세상적인 명예심보다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것은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려 이목 집중을 받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결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를 성전 꼭대기로 몰고 간다. 뿐만 아니라 옆집 성전과 높이를 견주어보게 한다. 경쟁심을 부추겨 끝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시대 같으면 완전 핵가족 시대가 되어서 도시화된 사회 속에서 사촌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길만큼 사촌은 가까운 이웃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옛날 농경 사회와 씨족 사회에서의 사촌의 의미는 가장 가까운 가족은 아닐지라도 적당히 가까운 그래서 매일 얼굴을 부딪치며 살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의미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잘 되는 것을 도무지 우리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배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지라도 만일 그의 전문성이나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이 된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동료나 후배가 먼저 승진하면 옷을 벗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일부 직업의 이상한 풍토는 우리 사회만이 지닌 악습 중 하나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멀리 있는 원수 국가의 국민들도 아니요 잔인무도한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일상 속에서 매일 부딪히는 동역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도 한 부서나 한 팀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바로 업무적으로 교통할 수밖에 없는 상사나 직속 부하가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 부딪힘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온갖 죄성이 다 튕겨져 나온다. 교만한 사람이 상사가 되면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부하 직원을 착취하고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이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상사가 호락호락해 보이면 상사의 권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랫사람들의 교만이 이제 고개를 쳐든다. 상사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온갖 덜미를 잡아 비판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같은 위치에 오르면 한 수 더 뜨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그 같은 속성의 정체는 자신이 더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 즉 사단이 넣어준 하나님이 되기까지는 쉼이 없는 교만이 그 본질인 것이다.


<디어 헌터>나 <하얀 전쟁>과 같은 전쟁 영화를 보면 전쟁터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이 드러나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상태에 있는지 깨닫는다. 그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감추어진 연약한 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은 떡을 사이에 둔 전쟁터요 직장 동료들은 전우들이요 더러는 적군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떡 앞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한다.


더러는 뭔가 큰일을 이루었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마귀는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칭찬하고 추켜세움으로써 내심 자신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마침내는 왕을 삼으려 한다.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은 도무지 뿌리치기 힘든 것임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대형 교회나 큰 선교 프로젝트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한 크리스천 리더 가운데 결국 이 유혹에 넘어가 말년에 실패하고 오명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경우 처음부터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드물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이나 박정희처럼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과업만 완수하면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실지로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높아지려는 본성을 죄의 뿌리로 지닌 인간들에게 마귀는 달콤하게 집요하게 속삭인다. “너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어. 그냥 못이긴 체하고 그들의 말에 맡기라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전술은 정말 단순하였다. 뿌리치고 달아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도한 무리들이 몰려들어 예수를 왕 삼으려 했을 때 예수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글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라고 말하든지, “아마도 나 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사정이 급하시다면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제가…” 라고 한 다리를 걸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 이 유혹은 예수가 달아나야할 정도로 심각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3)


A.W. 토저가 쓴 <예배인가 쇼인가!> 라는 책이 있다.(1) 그 책에서 토저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조차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쇼로 전락할 수 있음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들이기 위함임을 설파하며 참 예배의 본질을 되찾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는 강단에서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위해 각색되는 온갖 문양(紋樣)들이 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카인의 예배와 모르는 것을 예배하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차치하더라도, 진정 알고 믿는다는 공동체에서 조차 온갖 부수적인 치장들이 십자가를 가려서 도무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광 받기에는 여유가 없는 교회가 대다수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헌금, 자신을 나타내기위한 성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설교,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선교와 구제……. 모든 것이 사람들의 이름을 내고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신경과 에너지가 집중된 교회에서 어떻게 참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일찍이 자신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이후, 참 예배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다. 성막은 장차 오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모형이요 대속의 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함축적 가시적으로 담고 있는 신비의 구조물이었다. 성막 안에서 제사장에 의해 행해졌던 제사 행위는 그와 같은 구속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깨우치기 위해 주어진 사랑과 교훈의 리허설이었다. 단번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성막과 제사의 형식은 폐하여졌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성막 문을 들어서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피의 제단(alter)이 먼저 눈앞을 가로막는다. 제사장들은 몸을 씻고 옷과 성막의 모든 기구에 관유(anointing oil)를 뿌려 성결케 한 후 희생될 번제물을 안수하여 제단 앞에서 잡아 그 피를 단 사면에 바르고 나머지를 단 밑에 쏟은 후 단 위에서 불살랐다. 성막 안뜰을 오가며 더럽혀진 수족을 물두멍(laver)에서 깨끗이 씻은 후 비로소 성소(holy place)로 들어간다. 성소 안은 왼쪽에 놓인일곱 갈래의 금 촛대에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빛에 의해 온통 황금으로 빛나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 놓인 상에는 열 두 조각의 떡이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것이 진설병(showbread)이다. 이 떡을 먹은 후라야 비로소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의 휘장 바로 앞에 놓인 향단(alter of incense)에서 분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제사는 여기서 멈추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향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예배 행위, 그것을 위해 거쳐야할 단계 중에서 마지막 관문이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먹는 것이었다. 구약의 제사장은 이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인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참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소 안의 진설병을 맛보아야만 한다. 과연 진설병이란 어떤 떡인가?


진설병, SHOWBREAD!
이 무슨 희한한 이름의 떡인가?
나는 무심코 영어 성경을 보다가 진설병이라는 단어가 showbread(2)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보이기 위한 떡? 자랑하기 위한 떡?
도대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떡이며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한 떡이란 말인가?


남을 의식하며,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기에 급급하여 살아가던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진설병을 먹으라고 명하신다. 이름하여 “자랑의 떡”이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방신의 신전이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하여 성막의 안뜰은 너저분한 흙바닥으로 노출되어 있어서 제사장은 날마다 물두멍에서 더럽혀진 자신의 수족을 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떡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게 되는 그 상황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상징인 피의 제단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며 그것을 통과한 이후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성막의 성소를 만든 재료는 외피가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되어있으며 그것을 우중충한 해달의 가죽으로 덧씌우고 있다.(3) 마치 겉으로는 아무런 흠모할 만한 점도 없이 세상 속에서 버린바 되었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막 안은 온통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는 사람마다 황금 촛대에서 비추이는 황금빛 물결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진설병을 먹으라는 것이다.


예수와 만나는 장소, 성소! 그곳은 세상의 어떤 자랑도 소용이 없고 빛을 잃어버리는 곳이다. 오직 예수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곳, 내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 예수를 자랑하는 그 떡을 그곳에서 먹으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어떻게 내 행위와 내 이름과 내 학벌과 내 직위와 내 믿음과 내 신학과 내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자랑의 떡 진설병을 먹으며 너희는 내 앞에서 한번 자랑해 보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내어준 내 아들 예수의 살을 먹는 너희들아! 진정 너희가 내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단 말이냐?” 그 자랑의 떡을 먹는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던지며 통곡하고 오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쳐 고백할 것이다. 예수 주여, 당신만이 내 인생의 자랑거리입니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자랑합니다. 그 뜨거운 고백이 있은 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성소 안에서 그렇게 뜨겁게 만나기를 원한다. 미지근한 신앙, 자기 자랑에 급급하고 세상의 휘장으로 십자가를 가려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 19)” 그리고 성전된 우리 마음의 성소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4)


예수와 더불어 먹는 떡, 진설병. 그 떡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자랑의 시작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


세계 도처의 공동묘지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화려한 비석으로 치장한 사람이건 명성도 빛도 없이 무명으로 살다가 사라진 사람이건 사람은 비석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비석에 남겨진 이름에는 아무런 자랑도 의미가 없다. 더 이상 그것은 죽은 자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될 자랑거리는 생명책에 적혀진 이름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예수와 더불어 진설병을 나누었는가 하는 그 행위가 적힌 그 이름이 될 것이다.(계 21:12)





(1) A. W. Tozer, 예배인가 쇼인가, 규장, 2004
(2) KJV, NKJV 및 ASV 등 여러 성경 번역에서 진설병을 showbread로 번역하고 있다.
(3) M. R 디한은 그의 저서 <성막(tabernacle)>에서 성막의 신비한 구조와 상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4)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아직 예수를 영접치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들어가시기를 원하여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아니다.

[권오승] The Passion of Christ –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상상력?

이코스타 2004년 9월


대히트를 친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 교회에서도 그 시리즈의 설교가 계속되고, 그 영화를 기초로한 성경공부 교재들이 나오는가 하면 전도용으로 이 영화가 사용될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을 자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참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보다. 나는 보고 싶지만… 여태껏 여러가지 사정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영화의 대 성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위 ‘거룩한 상상력’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고난등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내가 어릴때 부터 들었던 말은,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글로 읽으면 머리 속에서 각종의 상상을 해 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다채롭고 다양한 장면들을 그려낼 수 있는데, 일단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모든 상상력을 죽여버려 스토리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 된다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소설 ‘소나기’를 TV 방송에서 단편 드라마로 보고나서의 내 느낌이 바로 그랬다. 그전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시골의 풍경 등이 이전엔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머리속에 그려졌었는데, 그 TV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해당 배우들로 고정되어 버렸고 모든 장면들이 매우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을 했다.


혹시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하여 이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거룩한 상상력


성경공부 훈련을 받다보면 성경을 읽을 때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성경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하여 때로는 감정이입을하고, 때로는 논리적 분석을 하고, 때로는 상황을 상상해 냄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더 사실적(graphic)으로 머리속으로 그려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매우 자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제안이다.


예수님을 10년쯤 믿은 고학력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몇번이나 묵상했을까. QT, 성경공부, 설교, 기타 다른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적어도 일년에 2-3회 정도는 이 내용을 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20-30회 정도 같은 내용을 묵상했다는 이야기인데…


소나기와 같은 소설을 10년에 걸쳐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도 그냥 가볍게 읽는 것이 아니고 밑줄도 그어가면서, 고민도 해가면서, 내 삶에 적용도 해 가면서,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다음 기도도 하고, 따로 노트도 작성하고.


그리고 아주 훌륭한 감독이 만든 소나기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 영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아, 저기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표정이 저렇게 그려졌구나… 하면서 무릎을 치고 감탄을 하고 그럴까. 몇 장면에서는 ‘그래 저런건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감독이 참 잘 그렸네’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가 그렇게도 충격이겠는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식이 어쩌면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내가 기억도 나지않는 어린시절, 아마도 성경을 읽어온지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정기적으로 QT도 하고 성경공부도 한것은 약 15년 가량 되었다.


그런데도 나 같은 그리스도인들도 헐리우드의 한 액션배우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새로와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이 정상적일 것인가.


물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멜 깁슨이라는 사람의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내 마음에 이미 가지고 있던 그분에대한 사랑이 다시 마음속에 새겨져 눈물이 흐를수도 다시 묵상에 잠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뇌가 너무도 새로와서, 주님의 고난이 너무도 새로와서 ‘영적인 도약’을 경험했다면… 한편 감사한 일이겠으나 한편 매우 안타까운 일은 아닐까.


성경을 제대로 읽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정말 그 내용을 내게 보이시도록 기도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자. 그저 한 종교의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이신 내용으로 읽자. ‘내가 아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말씀으로 읽자. 혹시라도 성경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밥을 굶으며라도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다가오도록 바래야 할일이 아니겠는가.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본 후, 그 내용을 보면서 다시 감사하고 감동하는 기쁨이 있어야하겠으나, 혹 조금이라도 내가 이미 ‘알고’있던 성경의 말씀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을 경험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나 스스로 그 영화를 쉽게 보러가기는 어려울 듯 하다.

International ministry – Min J. Chung목사




KOSTA/USA 2004기간동안 편집팀은 강사로 섬겨주신 Min Chung목사와의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그는 펜실바니아의 Biblicak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였고, 현재 일리노이의 어버나-샴페인에 위치한 커버난트 휄로쉽 교회 (CFC)에서 시무하고 있다. One in Love (OIL) Network and Conference 강사로 활동하혔으며, 미주 한인 2세들의 영적각성 운동을 섬기고 있다.


eKosta: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셨고 특별히 어떻게 international student outreach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Min J Chung: 네, 제가 12살에 미국에 와서 한국학생으로 미국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다니면서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하게 되었고, 1.5세로서 적응하면서 일리노이 주립대학의 선배님들에게 신앙을 더 배우고 다시 모교로 돌아와서 교회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코리안 펠로우십 교회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영어로 예배를 진행하니까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정도 지나니까 더 이상 코리안 펠로우쉽 처치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커버런트 처치로 이름을 짓고 계속 다른 아시아 국가의 유학생들이 모이고 백인학생들도 오게되어서 인터내셔널 교회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러는 동안 한국 학생들이 적응하는데 쉽지는 않았습니다. 잉글리쉬 스피킹 코리안이지만 그들이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차이니즈 크리스챤만 되어도 교제를 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고 미국 사람들과 소그룹에서 생활을 나누고 교제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많은 트래이닝을 시도했고 아직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인정하고 한국문화를 너무 드러내지 않도록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생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복음을 위해서 조금 희생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Kosta: 목사님께서 강의에서 전달해주신 seven doors of cousin evangelism을 강의를 듣지 않은 이코스타 독자들을 위해 잠시 소개해주십시요.


Min J Chung: 이 것은 제가 보기에 전도를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한다고 보지 않고 각자의 삶의 여정에서 각기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같습니다. 내가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한다는 것보다는 계속적인 사역 중에서 어떤 사람은 뿌리고 어떤 사람은 거두는 것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한 사람이 완전히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할 때 이 전체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모든 구속사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특별히 인터내셔널 스튜던트들에게 전도하는 것에는 이러한 과정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열매를 거두지 않고 사역했던 선지자들의 노력이 예수님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첫 째 단계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고(make a connection), 둘째 단계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personal testimony), 셋째 단계는 교회에로의 초대 (Jesus Film and Church invitation) 넷째 단계는 친숙한 문화를 매개로 한 증거 (cousin friendly version of the Gospel), 다섯째 단계는 온전한 복음의 증거 (full version of the Gospel), 여섯째 단계는 신앙 고백을 얻음 (obtain verbal profession of faith), 일곱째 단계는 교회에서 제자화하는 것입니다(Plug them into the Church).


관 계를 만들 때는 단순한 미소라도 친밀감을 줄 수 있고, 친해지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교회에서 예수 영화 같은 교재를 동원하여 눈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각자의 세계관에 맞게 가령 이슬람 배경의 사람에게 친숙한 복음, 무신론자에게 맞는 복음 설명, 일본문화에 맞는 복음 설명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점차 온전한 형태의 복음을 설명하고 그들의 입술의 고백을 얻어내고 무릎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제자화하는 과정을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노력을 하여서 그들이 모국으로 돌아갈 때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런 생각을 갖고 어떤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첫번째, 두번째 단계를 심었다면 우리가 릴레이에서 바톤을 받듯이 다음 단계에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람이 거두는 자로서 승리를 얻지만 이는 그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다르지만 결국 복음의 승리입니다.


eKosta: International ministry를 경험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만나셨을텐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사건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요.


Min J Chung: 여 러 사람들이 떠오르는데요, 중국 자매 한 분이 있었습니다. 박사과정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는 분이었는데요, 남편은 사업가였습니다. 자매님이 신앙을 갖고 그 삶의 변화에 큰 감동을 받아서 그 남편분이 그 자녀의 세례를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 남편분은 아직 신앙을 갖지 못했지만 신앙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고 점차 복음에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또 생각나는 한 사람은 일본인 교수입니다. 그분은 교환학생으로 저희 대학에 왔는데요, 그분은 음악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지나가다가 우리 모임을 보고 그 음악을 좋아해서 들어와서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찍어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조금 당황했지만 그가 예배와 말씀을 듣고 그분이 영어를 잘못해서 언어로 이해는 못했지만 예배를 통해서 점차 마음을 열고 드디어는 부활절에 세례까지 받고 전체 모임에서 간증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분의 영어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 듯지 못했지만요.(웃음) 그분이 일본으로 떠나시면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고 저희는 선교사를 보내는 심정으로 그분을 보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eKosta: International students들은 모국의 기독교적 리더쉽을 세운다는 중요한 선교적 의미가 있는 것같습니다. 한편 그들은 그 사회의 엘리트 층이라는 점에서 저개발국 사회구조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들이 각 사회에서 모범적인 낮아지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자화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Min J Chung: 마 태복음에 나오는 탤러트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탤런트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도 고난 당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자원입니다.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리소스라고 생각합니다. 이땅에 온 사명과 뜻과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왜 살아야하는가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서 내 자신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있도록 훈련을 하려고 합니다.


우 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일꾼이 적다는 말씀이 제가 사역을 시작할 때 새벽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꾼을 만드는 것이 저희 교회를 목표입니다.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적고 여기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꾼이 적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코 스타에 참석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이곳에 계신 많은 분들이 좋은 탤런트를 받았는데, 두 가지 선택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나를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의 결정에서 옳은 결정을 내리기 바라는 마음이 많이 듭니다. 어디에서 살고 있든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확실히 깨닫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비젼을 찾아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eKosta: 목사님을 뵈면서 한인 1.5세 또는 2세의 영적 자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한인 diaspora에 있음을 느끼게 되는데요, 1.5세나 2세들에 대한 비젼은 어떠하신지요?


Min J Chung: 제 가 15년 전쯤에 하용조 목사님께서 빛과 소금에서 쓰신 아티클을 읽었는데, 그때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을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앞으로 1.5세들이 미국의 한인 교회의 지도력을 인수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과연 미국 교회 목사님들이 한인1.5세들에게 리더쉽을 넘길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제 친구들이나 목사님들이 교회를 받고 시니어 패스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목회자로서뿐 아니라 선교사 세계에서도 1.5세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고 있습니다.


선 교사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이 동원하는데 가장 좋은가 조사를 했는데, 코리안 아메리카가 가장 적당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패스포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패스포트의 얼굴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저도 어디를 가면 꼭 끝까지 물어봐요. 제가 미국인이라고 말해도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고 저를 한국인으로 취급합니다. 이슬람 세계에 미국인들이 더 이상 사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인의 얼굴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자 원이 있고 미국 여권이 있지만 한국 얼굴을 갖고 있고 영어를 할 수 있고, 또 미국에서 공부한 기술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1.5세들이 정말 할 일이 많습니다. 미션 무브먼트에 큰 기여가 있을 텐데, 제가 보기에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런 측면에서 제가 분명히 Right Place and at the Right Time에 있는 것같습니다. 제가 아마 Wrong person일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그러나 지난 일년간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이런 과정에서 제가 해야할 일이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1.5세, 2세와 유학생들을 잘 연결하여 시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 국에서 교육받는 사람들은 좋은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잘 연결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내일이면 선교사들이 전세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계신 분들과 선교지를 네트워킹하고 한편 1.5세들은 1세와 2세를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분들이 미션 동원을 할 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반면 현재 선교 헌신에서부터 선교지 파송에까지 이르는 일을 미국 선교단체가 하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선교 동원 사역도 1.5세들이 해야하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이들이 1세와 2세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어떻게 해야할 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교회는 한분은 일본에 한분은 태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선교에 헌신하신 때부터 선교지에 도착하실 때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이러한 노력을 통해 여러가지 자원을 계발 중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숙제라고 하겠습니다.


eKosta: 마지막으로 코스타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한인 유학생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Min J Chung: 항상 코스타에 참석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강사로 참여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많은 분들이 매우 많은 자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는 분들입니다.


비 젼을 크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잘 살고 잘 되는 비젼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쓸 것인가하는 큰 비젼말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해야하는데, 북한도 생각해야하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두가지 큰 과제는 이슬람과 중국입니다. 이슬람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때 이 시대의 마지막 땅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땅끝이라고 봅니다. 백인들이 못들어가기 때문에 동양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리더쉽 트래이닝이 필요한데, 중국에서는 아직 그런 훈련이 충분치 않음을 생각할 때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사람들이 정말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주 목회자들을 트래이닝하는 리더쉽 컨퍼런스에 가곤하는데 이런 접근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가까운 다른 나라에 신학교를 세우고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각 국가의 토착적 지도력을 훈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코스타에 오신 분들이 눈을 크게 뜨고 이슬람 세계에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제 가 무슬림 국가에 들어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술이 없기 때문이죠. 기독교인임을 알지만 노라고 말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여러가지 사역을 한다면 복음 전파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분들은 Right Place at the Right Time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eKosta: 장시간의 인터뷰가 힘드셨을텐데요, 귀한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Min J Chung: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