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재] 학위를 마치며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이제 대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마칠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15년 정도의 대학교 생활, 그 사이에 군대를 갔던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대학교 안에서만 생활해 왔습니다. 중간에 때때로 왜 내가 지금 이 길에 있는가라고 몇번씩 생각하고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길을 지금껏 걸어왔습니다. 그 15년 동안 내가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을 했던가 되돌아 보면 여러가지 반성이 많이 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에 대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공부하는 것이 꼭 비생산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사회에 나가서 사회의 일원으로 무슨 일을 해야지 생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은 생산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지금은 준비하는 단계, 그리고 지금 이순간도 너무나 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순간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달성된 목표뿐 아니라 순간순간 자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에서 리더 훈련을 위한 교재, “Jesus on Leadership: Becoming A Servant Leader”(1)를 읽으면서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로 교재 제목에서도 나와 있는 것 처럼 서로 모순(oxymoron)되는 듯한 Servant와 Leader로서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보여주셨고 그러한 본을 우리에게 또한 요구하심을 다시금 되새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쉽이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나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부담감을 계속 가지게 됩니다. 또 한가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삶을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목표만을 향해서 돌진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가운데에서 어떤 불협화음이나 충돌없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시는 삶을 사신 모습이 두번째로 나에게 다시금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왜 이 길로 인도하셨는가? 이런 질문들이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큰 과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학문의 영역을 어디까지 정의해야 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식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흔히 전문인으로서 하는 학문영역이라고 정의해 두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말자체가 좀 우습기는 하지만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를 말하면 좀 떨어지는 학문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세태가 말입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삼류로 되어버린 지는 오래되었고 과학이나 공학에서는 철저하게 믿음과 신앙적인 것은 배제되고 인과법칙에 따른 논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학을 공부하는 한 신앙인으로서 저 또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질문들의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저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소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를 위해서 장막을 짓는 일을 함께 하여 다른 이들로 하여금 부담을 지우지 않게 했던 것처럼, 저에게도 이런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5년동안 연구했던 것을 쉽게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제 자신도 같은 과에 있는 사람들의 세미나를 들을 때에도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할 때가 너무 많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학문이 너무나 전문화되어 몇몇 사람들만 공유하는 그런 암호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학제간 (interdisciplinary) 연구도 많이 하는 듯합니다.


“Formation and Breakdown of Chromate Conversion Coating on Al-Zn-Mg-Cu 7×75 alloys” 이것은 저의 학위논문의 타이틀입니다. 그리고 아래 있는 영화 포스터는 저의 연구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예를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보셨을 영화, “Erin Brockovich”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법정 영화입니다. Julia Roberts가 열연했던 Erin Brockovich는 PG&E(Pacific Gas & Electronic) 회사로부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3억3천만불의 소승에 승소하였습니다. 그 PG&E회사가 chromate (Cr6+)를 그들의 엄청난 시설물의 부식, 즉 녹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했는데 이 chromate가 어떠한 오염방지 시설이 없이 결국에는 식수까지 오염시켰고 회사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질병, 유산, 심각하게는 여러 종류의 암까지 유발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출처: www.erinbrokovich.com)


이 chromate가 저의 학위논문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였습니다. 학위 내내 지원을 받았던 Department of Defense, Department of Energy, 그리고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는 이 chromate의 심각성을 알고 대체 물질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 지원 해 오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저의 프로젝트는 항공재료에 있어서 chromate의 대체 물질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였습니다. 기본적으로 항공재료는 가벼운 알루미늄이 많이 쓰이는데, 순수 알루미늄으로는 항공재료로서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다른 물질을 첨가하여 알루미늄합금을 만듭니다. 그 중에서 아연, 마그네슘, 구리등을 첨가한 7000번 계열의 알루미늄합금이 보잉747, 777 그리고 전투기 등의 항공재료에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알루미늄합금 자체로는 아직도 부식 등의 위험이 있기에 여러가지 코팅을 입힙니다. 그 중에서 chromate를 기본으로 하는 chromate conversion coating이 코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chromate가 사람에게 아주 유독하기에 앞으로 몇년 안에 chromate 사용이 금지될 것으로 판단되어 지금 많은 연구가 대체 물질을 발견하는 쪽으로 투자, 연구되어 왔지만 아직도 chromate와 같은 혹은 더 뛰어난 물질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구의 방향이 chromate의 특성을 분석하는 연구로 돌아왔습니다. 대체 물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Chromate의 특성을 더 완전히 이해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저의 연구는 이 7000번 계열의 알루미늄 합금에서 어떻게 chromate 코팅이 형성되는지를 연구했고 그리고 어떻게 이 코팅들이 여러 상황 속에서약화되고 결국에는 붕괴되는지 연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첨가한 물질과 불순물로 인해서 코팅의 취약한 부분이 있었고 이것이 코팅 전반적으로 치명적인 붕괴의 원인을 제공함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원인들과 결과를 찾기 위해서 여러가지 장비를 이용하고 결과를 제시했던 것이 제 논문의 큰 줄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과제를 5년동안 연구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계속 현상들을 알아갈 때 그만큼 모르는 것도 더 많아 짐을 느낍니다. 밝혀진 사실들이 언제든지 더 발달된 기술을 통해서 더 정확히 밝혀지고 이전의 사실들이 수정 혹은 변경될 수 있음을 느끼면서 겸손할 수 밖에 없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하나의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마음에 많이 남는 것은 제 자신의 능력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도 교수님과의 토론이 제에게 늘 도전이 되었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고, 실험실에 다른 학생과의 대화 속에서, 세미나 속에서 많은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학위 논문이 결코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게 힘이 되어준 많은 분들이 계심을 역시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생 고민해야 할 쉽지 않는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주제는 적어도 저에게는 주어진 일에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원론적인 결론으로 이르게 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저에게 다섯 달란트가 아닌 두 달란트를 맡기시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계신지 모르니깐요. 저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을 주어진 삶과 일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과 학문이 통합되는 시작이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1) C. Gene Wikens, “Jesus on Leadership: Becoming A Servant Leader”, Nashville, Tennessee: LifeWay Press, 2001.

[조근상] 어떠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까?

이코스타 2004년 10월


현대 예배에 있어서 찬양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는 찬양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을 했었지만 그 일들이 실제적으로 지금처럼 일어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린 것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아직도 그러한 교회가 있겠지만 처음 찬양인도를 하던 한국의 90년대 초에만 해도 기타를 들고 본당에서 찬송을 인도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드럼같은 악기는 보이는 곳에 놓을 수 있을만한 거룩한 악기가 아니였다.


허 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어느 교회를 가도 드럼이 없는 교회는 거의 없을 정도로 이러한 악기에 대한 생각들과 상황이 바뀌었다. 만약에 내르가 이러한 이야기를 지금의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한다면 거의 비웃음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시대와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다. 기독교인들이 듣는 음악역시 장르가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찬양들이 주도하였는데, 지금은 클래식 뿐만 아니라, 락스타일과 모던한 워십 스타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말 많이 변하고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이 정말 좋은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해서 여러 군데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은 늘 인도자로 있었기에 다른 인도자들이 예배인도를 하는 것도 잘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다른 예배에는 어떤 식으로 찬양이 드려질 까 하는 직업의식 비슷한 소명을 가지고 예배를 참석했다. 특히나 미국에 있기에 한국의 예배가 변형되고 있는 것을 건너서 듣기는 들었지만 실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였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예배가 전체적으로 엎그레이드가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건방지게 일개 사역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지만, 내가 한국을 떠날 때와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과 4년정도밖에는 안 된 시간이지만 한국교회의 예배는 참으로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찬양역시 이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특히 좋은 젊은 예배와 찬양인도자들이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대를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곳에서 예배와 찬양에 대한 학교와 컨퍼런스를 열어서 이제는 예배와 찬양이 올바르게 교회들안에 보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 은 점이 있듯이 역시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예배와 찬양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다 아시는 것 처럼 최근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셔서 사용하시는 호주에 있는 힐송교회를 알고 계실 것이다. 이 교회는 최근에 많을 앨범과 찬양을 보급하고 있다. 호주 뿐 아니라 현재는 이 힐송교회의 찬양과 음악들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호주의 힐송교회의 찬양곡들을 한국의 웬만한 교회나 예배 모임에 가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찬양을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니라 곡을 완전히 카피해서 그 곳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교회가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웬만한 밴드를 가진 찬양팀은 힐송의 앨범에 나온 곡을 카피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러다 보니, 한 앨범에서 나온 찬양을 여러 교회에서 똑같이 연주를 한다고 생각을 해 보라. 물론 성도가 많지 않고 조그마한 교회에서는 똑같이 연주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배 부른 소리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 정도의 밴드와 팀의 구성이라면 충분히 자기것으로 소화를 시켜서 자기 스타일로 만들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모방은 창조를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더 좋은 예배와 찬양 음악이 한국안에 흘러갈 것을 기대한다.


일 전에 한국에 예배앨범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시에는 앨범을 구입할 수 조차 힘들어서 가끔 나왔던 호산나의 앨범들을 구입하면서 카피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면서 이렇게 한 번 연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소원이라는 생각했던 것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마 지막으로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눌 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볼륨에 관한 것이다. 찬양은 볼룜을 가지고 승부하는 것이 아닌데 많은 분들이 보통 귀에는 과다한 데시벨을 사용해서 예배와 찬양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 악기 사용을 제한 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를 성경말씀처럼 공교히 연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아는 분에게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지적받은 적이 있다. 찬양인도할 때 너무 시끄럽다는 지적을 받고,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한 적이 있었다. 요즘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 아니야라는 말이 입까지 튀어 나왔지만 그 날 순종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 날 나이가 지긋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통해서 그 분들이 은혜를 받으시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날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 말을 언급할 때인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너무나도 연습이 안 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와 찬양은 시끄러울 수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공교함이 사라지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예배와 찬양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안테나를 돋우고 민감함을 가져야 하겠지만, 가끔 너무나도 소란스러운 찬양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가게 하는 데 오히려 방해를 가져다 줄 때가 너무나 많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음악적 찬양방법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법은 어떤가? 오늘 지는 석양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묵상하는 것은? 혹은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가을의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음과 섬세하심을 묵상하는 것은? 아니면 푸르른 바다를 보면서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해 보는 것은 더 깊은 찬양의 모습이 아닐까?

[김영봉]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 주일과 일상 (1)


이코스타 2004년 10월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 지방의 한인 교계에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교회 중 하나가 주일에 열리는 자선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기로 교회적인 방침을 세웠고, 담임 목사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동참하기로 했다. 담임 목사와 지원자들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일 예배 시간도 조정했다. 규모가 큰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의 참여는 그 모금 행사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한인교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도 좋은 변화를 줄 수 있었다. 한인 교회들이 한인들끼리 모이는 교계 행사에는 열심을 다하지만, 교회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지역 사회의 행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일반적인 경향을 고려해 본다면, 그 교회는 매우 의미 있는 결정을 했던 셈이다. 나는 영향력 있는 한인 교회들이 지역 사회 문제에 이렇듯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문 제는 교회 밖에서 터졌다. 그 지방의 목회자들이 그 교회의 결정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그 비판의 요점은 ‘주일 성수’의 원리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주일에 ‘세상적인’ 공적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그 결정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거세졌다. 그 주장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이 막강한 힘으로 그 교회와 담임 목사를 압박했다. 교계 신문마다 이 문제에 대한 찬반 토론을 게재했는데, 그것이 주일 성수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 교회는 계획대로 행사에 참여했고, 이로써 그 교회와 담임목사는 지역 교계에서 고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행사가 끝난 후, 교계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담임목사는 앞으로 교계에 미칠 영향을 좀 더 심사숙고 하겠다고 사과했고, 그 사과로써 몇 달 동안 교계를 뜨겁게 달군 논쟁은 일단 중지되었다.


이 논쟁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우리가 ‘주일 성수’라는 개념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는 쉽게 정리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천적인 면에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전개되는 글에서 보겠지만, 이 교회가 한 결정은 ‘주일 성수’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나는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결정을 비판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의 걱정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조건, 저런 사정을 고려하여 주일을 허물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고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주일을 소홀히 하는 잘못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일 ‘엄수’와 주일 ‘파괴’의 두 극단을 주기적으로 반복한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제, 이 오랜 논쟁의 뿌리를 더듬는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1.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구약의 안식일  


안식: 천지창조의 정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부터 안식을 지켰는지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지만, 그들이 안식일을 천지창조의 빛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으므로, 피조물인 우리도 그분의 삶의 리듬을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안식일 성수의 신학적 바탕이었다. 창세기 2장 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 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즉,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되어 있을 것 같은데, 성경은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셨다고 되어 있다. 일곱째 날에도 무슨 일인가를 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곱째 날에 하신 마지막 창조는 무엇이었을까?


유대인 랍비들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창조하신 것은 ‘메누하'(안식, 쉼)였다’고 결론지었다.(1) 그렇다면 메누하는 무엇인가?’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의 설명에 의하면, 메누하는 ‘노동을 멈춘다’는 좁은 개념이 아니라 매우 넓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적인 사고에 의하면, 메누하는 행복, 평안, 평화, 조화 등의 의미를 가진다. 욥이 죽은 후에 얻을 것으로 동경했던 그 상태가 메누하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 표현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식은 인간이 평안히 거하는 상태, 악한 사람들이 문제를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상태, 피곤한 사람들이 평안히 쉬는 상태를 가리킨다. 안식은 갈등과 싸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과 불신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의 본질이 바로 안식이다.’2)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얻게 되는 행복을 메누하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 통찰은 진리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창조한 천지를 지금까지 운행하고 계신 분이요, 역사를 거쳐오면서 부단히 우리와 함께 일하신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활동하고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시 121:4) 분이시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막 12:27)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 모든 말씀에서 보듯,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 이신론자들이 생각했듯, 우주를 저절로 돌아가도록 만들어놓고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생명체와 함께 거하시며 함께 움직이시며 함께 활동하고 계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골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제 칠일에 안식을 창조하시고 일을 멈추신 그분은 지금까지 그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다. 안식 상태에서의 활동(사밧, 메누하, 안식)–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양식이다.


그 렇다면 창세기 2장 2절에서 말하는 ‘메누하’는 결코 일을 멈추는 쉼이 아니다.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활동을 뜻한다. 엿새 동안 구체적으로 무엇을 발생하게 했던 하나님의 노동과 일곱째 날에 안식 가운데 거하며 지속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창조는 여섯째 날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완성되었고, 일곱째 날에 지어진 ‘메누하’가 이 이전의 모든 창조의 꽃이요 정점이다. 여섯 날 동안 노력하고 수고하는 이유는 결국 ‘메누하’ 즉 온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함이요, ‘메누하’에 이르면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활동에 이른다.


창세기 2장 3절은 계속 말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


‘ 거룩하게 하다'(카도쉬)라는 말은 ‘구별해 내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摸?날로壙?구별해 내시고 그 날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궁극적인 목적 즉 ‘메누하’를 상기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삶을 재조정하도록 도우셨다. 이 땅에 사는 한 인간은 엿새의 창조 시기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메누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메누하’를 흉내내는 일 뿐이다.


그 래서 안식일마다 이스라엘은 일을 멈추고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참된 ‘메누하’를 갈망하며 그것을 흉내내며 그분을 찬양하고 인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렸다. 안식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의 궁극적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고 그 지향에 맞추어 인생의 걸음을 수정하게 하여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메누하’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다. 김용규는 이런 맥락에서 안식일의 존재론적 의미를 이렇게 갈파한다. ‘안식일은 우리의 관심이 무엇-됨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오로지 자신의 ‘있음(存在)’에 관심을 갖고,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물들의 ‘있음’에 대해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안식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이때만이 인간은 자신의 무엇-됨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걱정, 근심 그리고 불안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안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3)


안 식일과 관련하여, 7년마다 반복되었던 안식년 규정(출 23:10-11; 레 25:1-7; 신 15:1-11)과 7년의 7회 다음해(50년)에 지키도록 마련되었던 희년(레 25:8-55)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규정은 동일한 신학적 근거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의 ‘메누하’를 기억하고 축하하고 선포하기 위해 7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7년 중 한 해를 ‘안식년’으로, 50년마다 모든 것을 원상 복구시키는 ‘희년’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를 위해 시간을 구별해냈다. 안식년에는 안식일에 규정된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규모가 큰 일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희년는 안식년에 규정된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규모가 큰 일들이 요구되었다.


이 규정들을 관찰해 보면, 하나님의 ‘메누하’를 항상 기억하고 그것에 이르도록 인간을 이끌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게 규정을 마련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 모든 규정을 통해, 살아가면서 정기적으로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서서 참된 것을 갈망하고 축하하고 선포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참된 복을 찾아가도록 의도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24시간의 칠분의 일, 일 주일의 하루, 7년의 한 해, 일생의 칠분의 일을 구별해 내어 다른 노동을 멈추고 하나님의 ‘메누하’에 집중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관심은 정확히 칠분의 일을 채웠느냐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를 ‘무엇-됨’을 위한 노동으로 소비하지 말고, 상당한 정도의 시간을 구별하여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 앞에서 존재에 머물러 존재를 감사하고 축하하고 선포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은총과 명령


안 식일은 이처럼 은총으로서 주어진 선물이었다. 즉, 벌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행해야 하는 율법이 아니라 참된 인생을 위해 선택하도록 주어진 선물이었다. 인생이 무엇이며 인생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배려에 감격하여 정기적으로 일을 멈추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메누하’를 갈망하고 기도하며 삶의 길을 바로 잡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깨달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엿새 동안의 노동에만 함몰되어 ‘메누하’를 잊고, 인생을 즐기는 일에만 몰두하여 하나님을 잊고, 땅만 보느라 하늘을 잊고 살아가게 되었고, 이러한 타락을 되돌리기 위해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 3 계명으로 천명되었다. 식욕이 없어 음식을 먹지 않아 쇠약해지는 아이에게 부모는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도록 명령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건강이 회복될 것이고, 따라서 식욕도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언제까지나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을 훈련시키는 장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십 계명에서 안식일 ‘성수’를 규정한 세 번째 계명(출 20:8-11; 신 5:12-15)은 그 위치에 있어서나 그 내용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위치 면에서 본다면, 세 번째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1, 2 계명)과 인간에 대한 계명(4-10 계명)의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이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고 그분의 은총에 응답하는 의미를 가지는 한 편, 본인 자신과 타인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요청하는 계명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기억하게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 이어 세부적인 지침이 따라 나온다. 엿새 동안에는 정성을 다해 힘써 일하고 일곱째 날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메누하’를 기념하되, 자식과 노예와 가축과 손님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이끌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관심이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있음을 드러낸다. ‘메누하’의 복은 선택된 일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메누하’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생명이 그 은총을 깨닫고 그것을 갈망하도록 이끌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신 명기 본문은 출애굽기 본문과 약간 다르다. 제 3 계명을 말하면서 출애굽 사건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5:15). 이 말씀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된 역사를 하나님의 ‘메누하’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즉, 출애굽의 역사는 종국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하시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에 이르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인생의 광야 생활을 통과하여 영원한 ‘메누하’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안식일을 기념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은총을 입도록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메누하’에는 남자도 여자도, 주인도 종도, 사람도 동물도,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이용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은총을 입도록 배려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은총을 입은 자의 마땅한 태도다.


하 나님의 ‘메누하’를 기억하고 축하하고 열망하고 누리도록 이끌기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장치가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밧'(sabbat)의 동사형 ‘샤밧'(shavat)은 ‘중지하다’, ‘멈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밧'(안식일)은 일차적으로 ‘일하지 않는 날’이라는 뜻이다. 내 어릴 적 할머님께서는 일요일을 ‘공일'(空日)로, 토요일을 ‘반공일’로 부르셨다.(4) 매우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이 말을 통해 토요일과 주일이 어떤 날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밧’이라는 말이 주는 표면적 의미가 바로 ‘공일’과 같았다.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어있는 날이었다. 왜 그 날을 비어두도록 명하셨는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다. ‘다른 일’이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하신 ‘메누하’다.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메누하’에 대해 묵상하고 그것을 모방하고 그것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선포하는 것이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안식일을 이렇게 쉬고(즉, 일하고) 나면, 그 하루는 나머지 엿새의 삶 전체를 성화시키는 생명수의 샘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축일을 위한 공일


  법은 한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규범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강제 규정’으로서의 법은 한 사회를 위한 안전 장치인 동시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지향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법을 최소한의 도덕으로 이해하고 도덕적인 삶을 추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법대로 산다’는 말은 좋은 뜻이지만, ‘법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으로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법대로 산다’는 말은 부정적인 뜻이 된다. 이처럼 법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위 에서 본 것처럼, 안식일 규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누하’를 늘 기억하게 도움으로써 지상에 살며 하늘을 보고, 노동하며 참된 쉼을 갈망하며,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도록 이끌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율법의 목적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는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여호와]의 율례'(겔 20:13)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안식일 규정을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의 ‘메누하’를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메누하’의 복이 선택된 일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마련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이웃에게 선포하고 나누도록 명령하셨다. 그러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공일’로 만드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었다. 축일을 만들기 위해 공일로 만들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십계명의 하나로 선포하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만들었다.


불 행하게도, 세월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을 오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두 종류의 전형적인 오용 사례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첫째의 오용은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자로 기록될만한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조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종교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의 종교 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은 안식일 성수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안식일 전날부터 만 하루 동안 예루살렘 성문을 닫아둠으로써(13:19) 안식일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사고 파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안식일 성수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유대 백성들에게 전하며, 하나님은 안식일 성수 여부에 따라 복을 주거나 화를 내리실 것이라고 말한다(렘 17:19-27). 에스겔 선지자도 안식일을 더럽힌 죄에 대해 신랄하게 책망한다(겔 20:10-26). 그만큼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고 분별 없이 노동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인 간의 마음이 한 번 탐심에 사로잡히면 눈이 어두워지고 판단력이 마비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영적 차원이 헛것처럼 느껴지고, 인생의 행복이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 결과,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공일’로 규정된 날을 노동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도 힘드는데 ‘안식’ 같은 한가한 얘기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면서 끊임없는 노동으로 자신을 타락시켰을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을 이해해 줄만도 하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탐심에 사로잡힌 소치였다. 참된 안식 없는 삶은 결국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고 불행으로 이끈다. 쉼이 없는 노동은 육신에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망각하고 이웃도 망각하고 결국 하나님까지 망각하는 심각한 잘못에 빠진다. 인간의 생명이 먹고사는 데 있을 뿐이라는 치명적 오해에 빠진다. 먹기 위해 사는 식충(食蟲)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생령'(生靈)이 식충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안식일 규정은 이 참혹스러운 타락을 막기 위해 주신 고귀한 명령이다.


두 번째의 오용 사례는 ‘법대로만 사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주일에 하루를 공일로 만들라는 명령은 단순히 일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었음에도 그 깊은 의미를 무시하고 단순히 일을 멈추는 일에만 몰두함으로 안식일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된 관심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가 있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착했다. 그 결과, 초기 유대교 시대에 이르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이 정리되었다. (5) 각각의 항목은 또한 세부적인 규정으로 보완되었다. ‘물건 나르는 일’의 항목에는 ‘어떤 물건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얼마까지 옮기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안식일에 제외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등의 세부 규정이 따랐다. 율법 교사들은 이 질문에 답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유대교인들은 이 규정에 걸리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그 결과, 안식일에 해야 할 ‘메누하’의 축하는 까캅?잊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 뿐 아니라, 노동을 멈추는 일에만 집착하느라 안식일 규정이 이끌려했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이사야 선지자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는 하나님의 책망을 전한다. 안식일 규정은 정확하게 지키지만, 그 안식일 준수가 그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의 ‘메누하’를 축하했다면, 그 ‘메누하’의 이상이 불완전하나마 그들의 삶에 나타나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하나의 율법으로 지키고는 ‘법을 지켰으니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는 제 방식대로 살아갔다. 그 모순적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역겨움이 되었다.


안 식일 규정에 담긴 하나님의 선의는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무시되었다. 그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매 주일 정확하게 규정을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상황을 목도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3-14).


여기서 드러나듯, 안식일 규정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지키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상을 주시는 식으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공일이기 이전에 ‘즐거운 날’이요 ‘존귀한 날’이다. 그 날을 즐거운 날이요 존귀한 날로 만들기 위해 노동을 멈추고 오락을 멈추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오락은 인간을 진정한 의미에서 즐겁게 할 수 없다. 참된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그 목적지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축하하고 선포하고 누릴 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김용규가 말하는 바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6)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보내지’ 않으셔도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된다.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련하신 것이다.




(1) Abraham Joshua Heschel, 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rn Man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s, 1951), p. 22.

(2) 위의 책 p. 23.


(3) 김용규, <데칼로그> (서울: 바다출판사, 2002), 137쪽.


(4) 충청도 사투리를 쓰셨던 할머님은 ‘굉일’ ‘반굉일’이라고 발음하셨다.


(5) 39가지 금지된 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파종, 경작, 추수, 추수단 묶기, 탈곡, 키질, 곡식을 씻는 일, 곡식을 빻는 일, 체질, 반죽하는 일, 빵 굽기, 양털 깍기, 양털 씻기, 양털 손질, 염색, 물레질, 뜨개질, 실 감기, 베에 실을 걸기, 베에서 실을 내려놓기, 고리 매는 일, 고리 푸는 일, 바느질, 허무는 일, 사냥, 도살, 가죽 벗기기, 소금 뿌리는 일, 건조시키는 일, 무두질, 가죽 자르는 일, 글을 쓰는 일, 글을 지우는 일, 집 짓는 일, 집 허무는 일, 불끄는 일, 불 피우는 일, 망치질, 물건 나르는 일.


(6) <데칼로그>,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