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경] 지성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

가끔 예수님을 잘 믿던 학생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적 기사들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 속에 꾸준히 제기되었던 종교와 과학, 신비와 지성, 그리고 계시와 철학이라는 두 개념 사이의 갈등과 의심입니다. 이것을 보통 ‘신앙과 이성의 문제’ 혹은 ‘믿음과 지성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기독 지성인들과 구도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기독교에 지성을 무시하자니 신앙이 맹신으로 전락할 것 같고, 신비를 무시하자니 사색이 신앙으로 둔갑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와 긴장은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지성이 왜 신앙에 중요한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지성은 성도의 성화에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로마서 12:2)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해야, 즉 기존의 세계관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기존의 신념과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념과 의식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단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를 촉구 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4:23-24)


그리고 ‘성도(聖徒)’가 된다거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지성의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골로새서 3:10) ‘회개 한다’는 것은 단지 죄를 몇 마디 뉘우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한바 실재의 본질, 인간의 본질과 그의 반역 그리고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목적 등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머레이(J. Murrey)가 이점에 대해 잘 지적했습니다. “성화(그리스도인의 삶)는 인간 의식의 중심, 즉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의식과 사고가 바뀌지 않고는 성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종 예수를 오래 믿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혹시 사고와 신념 그리고 의식의 변화는 하나도 없는 거짓 성화를 좇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신앙과 지성이 통합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신앙과 지성이 따로 놀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앞의 학생과 같은 지적 의심에 노출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고,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 되게 하라”(에베소서 4:13)고 부탁했는데, 여기의 ‘하나 되게(unifying)’란 말은 1)부부가 한 몸이 되듯이 2)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로 연합하듯이 우리의 신앙과 지성도 주님의 말씀 위에서 통합하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된 사람을 두고, 비록 그 사람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장성한 사람” 즉 성숙한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믿은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따로 노는 사람을 “어린아이 같은 사람”, 즉 미성숙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요동하고 흔들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지성이 하나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성은 의심의 파도를 이기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의심의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의 신비성(神秘性)이 합리성(合理性)과 대립된다거나, 기독교의 초월성이 과학적 사고와 충돌한다고 생각하거나, 신앙에는 완벽한 합리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적인 영적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꼬인 문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전에는 파도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 의심의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들은 제일 먼저 합리성의 반대 개념은 비합리성이지 신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기독교의 신비성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에 반대되거나 거스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합리성과 신비성이 공존하는 진리인데 그것은 기독교 복음 자체가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7; 사도행전 26:15)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지 표적이나 능력 때문도 아니요 지혜나 지식 때문도 아니라 표적과 지혜, 능력과 지식 그 둘이 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린도전서 1:22-25, 표준새번역)


물론 여기에는 신앙과 지성 사이의 선행(先行) 문제, 즉 어느 것이 앞서느냐 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믿음이 지식에 선행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한복음 6:69),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것입니다.(요한복음 16:30; 18:8) 프란시스 쉐퍼는 “구원론적으로 볼 때 지식이 신앙에 선행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비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근상]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찬양에 관하여

이코스타 2005년 1월


예배 인도자로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가끔 메일을 통해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오래 전에는 어떤 곡을 어디서 났느냐, 아니면 새로운 곡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웹 상에서 원하는 자료들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기에 그러한 질문들은 많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 많았던 질문이 찬양 안에 있는 기름 부으심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 기름 부으심이라는 성경적인 단어는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무래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기에 자주 질문을 해오는 것이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름 부으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진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 있는 기름부음의 목적은 사물이나 사람을 구별해서 하나님이나, 왕에게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131번 이상과 신약에서는 18번을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기름 부으심의 최종 목적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기름 부으시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부속물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통한 부산물인 것이다.


우 리가 찬양을 들으면서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기준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찬양을 듣고 그러한 집회에 참석하게 될 때에는 여러분도 모르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의 찬양은 너무나도 익숙한 하나의 ‘립싱크’가 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찬양에 기름 부으심이 없는 이유이다. 온전하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불순물과 함께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인도하는 인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국에 있는 동안 예배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강의해야 할 제목은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였는데, 그 날 오셨던 분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예배 사역이나 찬양 사역을 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눈빛은 모두가 이미 강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강의 노트를 덮고 나는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에게 조용히 눈을 감으라고 말하고 지금 이 시간에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 보자고 나누었다. 그리고는 한 몇 분쯤 지나서였다. 갑자기 한 분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외침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시작한 외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과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라보는 몇 분이었다. 그 후에 같이 찬양을 나누었다. 그것은 단순하게 불려지는 한 코드의 반복되는 진행이었는데, 곡의 내용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서 부르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새 노래였던 것이다. 이 날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세미나에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찬양을 멈출 수 없었고, 기도가 끊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시간을 2시간 이상을 드렸다. 모두가 탈진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 날 세미나를 드리면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정답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대충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날 식사 준비를 했던 몇몇 분들은 모임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끝내 경험하지 못하였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얼굴을 구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전심으로 구하여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면 당신의 찬양과 기도와 예배에는 탁월함이 드러날 것이다. 인도자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기름부음 받은 삶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윤택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흉내내지 말아야 한다. 마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처럼 쇼를 해서는 기름 부으심이 흘러갈 수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해서는 되지 않는다.


대 신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찬양 안에 기름 부으심을 더하는 길이다. 듣기 좋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세련된 편곡을 할 수도 있다. 엄청난 악기를 동원해서 사람들의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을 하늘의 보좌 위에서 일어나게 하고 춤추게 하는 것이다.

[조한상]예언서 정면 돌파하기

예언서 연구의 필요성


성경공부 한번 열심히 해 보겠노라고 결심한 사람에게 있어, 신약의 흐름을 잡는데 바울서신이 키였다면, 구약에서는 예언서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 봐도 그렇다. 구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첫 부분에 조금 복잡해 보이는 모세오경이 있고, 다음에는 그나마 읽고 이해가 되는 듯한 역사서들이 나온다. 그리고는 시가서와 지혜서들이 나오는데, 그 뒤의 무려 17권이나 되는 예언서는 늘 마음을 무겁게 하곤 했다. 주위 사람들은 늘 어렵다고들만 하고, 직접 내용을 읽어봐도 하나님께서 야단치시는 듯한 내용과 선지자가 본 어려운 환상들만 있어 보이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복음서 역사서 등 읽기에 수월한 내용만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대학 3학년 때 처음으로 예언서 정면돌파를 시도했었다. 사실 정면돌파라고는 하지만, 내용을 깊이 있게 보기보다는 큰 그림을 잡는데 목적이 있었지만 말이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공부 방법은 귀납법적 성경공부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입공부 방식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예언서를 공부할 때


소그룹에서 예언서에 대해 공부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1) 예언서의 배경이 되는 역사서 부분을 먼저 읽어야 한다. 예언서가 잘 이해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본문이 쓰여진 배경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서의 역사적 배경을 성경을 통해 읽는 것은 필수라 하겠다. 하지만, 만일 소그룹의 구성인원들이 역사서에 익숙치 못한 상황이라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이스라엘 역사’책을 통해 배경을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 역사 배경을 근거로, 본문의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예언서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자의 말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그러므로 본문을 읽어가면서 화자와 청자를 명확히 구분해야만 한다.


(3)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에 집중해야 한다. ‘주의 날’, ‘진노의 날’, ‘마지막 때’, ‘그 때’와 같은 단어들을 집중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 “때”가 가까운 미래는 나타내는 말인지, 혹은 메시야에 대한 시간인지를 구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언서에는 언제나 예언 당시 상황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성취된 예언과 또 예수님의 초림 때 이루어진 예언,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완성될 예언 등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악한 자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경우, 가깝게는 바벨론같은 주위의 강국의 쇠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멀게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4) ‘남은 자’를 의미하는 단어에 집중해야 한다. 예언서에서는,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백성을 향한 긍휼하심이 갈등구조로 등장하곤 한다. 그 갈등 중에서도, 늘 ‘남은 자’를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이 예언서 전반에 흐르고 있으므로, ‘남은 자’라는 의미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5)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묵시 문학 형태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는 꽤 많지만, 우리는 접해 보지 못한 문학형태 중 대표적인 적인 것이 묵시 문학이다. 그래서 본문 중에 가끔 등장하는 환상들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니엘서 후반부라던가 스가랴 등에서 자주 보이는 환상의 의미를 무시하면 안되겠嗤? 처음 공부할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그렇구나’라고 넘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예언서 공부방법


(1) 이사야서 한 권으로 흐름보기
예언서를 정면돌파하기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 대선지서 한 권으로 선지서와 친해지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그 한 권의 책으로는 ‘구약의 신약’이라고 불리는 이사야서가 좋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가 예언서의 중요한 특징들을 거의 가지고 있으면서도, 40장 이후에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그 내용이 신약을 이해하는데도 적잖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   계획: 이사야서 66장을 매주 약 5장씩을 읽어가는 걸로 정해서, 14주 정도로 계획하면 된다.
-   도입: 첫째 주에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고든 D. 피, 성서유니온)의 ‘예언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분을 함께 읽는 것이 좋다. 누군가 한명이 요약을 해 오겠금 하면 된다.
-   준비: 조금 독특할 수 있겠지만, 그룹 구성원 모두에게 같은 성경본문을 복사해서 나누어 주도록 한다. 예를 들어, MS Word 문서를 2단으로 구성하고 좌측에는 표준새번역, 우측에는 NASB or NIV를 넣어 매주 본문 5장씩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각자 색볼펜을 준비하도록 하여 그 본문이 적힌 종이에 기록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집에서 3번 이상을 정독하도록 권하면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에 빨간색으로 네모를 치고, 남은 자를 의미하는 부분은 파란색으로, 또 이미 성취된 예언은 보라색으로 박스를 치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에는 초록색, 또 마지막 때의 성취될 예언에는 노란색으로 박스를 치게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좌우의 공백에는 그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 정리 하겠금하고, 스스로 읽으면서 발견하거나 깨달은 내용도 기록하겠금 하면 된다. 리더는 귀납법적 성경공부 방식을 이용하여,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준비해야 함은 물론이다.
-   진행: 공부는 차근히 1장씩 진행한다. 구성원 중의 한명에게 지난 주 공부 내용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공부할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겠금 한다. 그리고 함께 공부해 온 색깔별 내용을 나누고, 깨달은 내용을 나누고 하라. 그러면 매 주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2) 소선지서 중심으로 흐름 잡기
예언서를 정면돌파하기 위한 또 한가지 방법은, 각 상황에서 쓰여진 소선지서들 (다니엘 포함) 몇 권을 함께 공부 하면서 흐름을 잡는 방법이다. 우선 각 예언서들을 시대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예언서 시대별 정리











포로기 이전 선지자 포로기 선지자 포로기 이후 선지자
To 이스라엘

  • 아모스 (760)
  • 호세아 (755)

To 시리아




  • 요나 (760)
  • 나훔 (660)

To 에돔




  • 오바댜 (840)
To 유다

  • 요엘 (835)
  • 이사야 (740)
  • 미가 (735)
  • 스바냐 (630)
  • 예레미야 (627)
  • 하박국 (607)
  • 애가 (586)


  • 다니엘 (605)
  • 에스겔 (592)
성전 재건

  • 학개 (520)
  • 스가랴 (520)

성벽 재건




  • 말라기 (432)


-   계획: 6권의 예언서를 약 8주에 걸쳐 속성으로 공부하는 과정이다. Introduction, 매 주 공부할 본문 분량 및 해당하는 역사서,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레온우드 저, 기독교문서선교회)의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 역사서
1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예언서
2 요나 (1-4장) 왕하 9-14장 이스라엘역사 – pp.424-35
3 호세아 (1-7장) 왕상 11-12장, 왕하 14:23-18:16 이스라엘역사 – pp.435-41
4 호세아 (8-14장)    
5 하박국 (1-3장) 왕하 22-23장, 대하 34:1-36:4 이스라엘역사 – pp.481-92
6 다니엘 (1-7장) 본문에 포함 이스라엘역사 – pp.497-508
7 학개 (1-2장) 에스라 1-6장 이스라엘역사 – pp.514-521
8 말라기 (1-4장) 느헤미야 이스라엘역사 – pp.522-531


-  도입: 이 공부 역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선지서 부분(10장)을 먼저 읽고 정리하는 것이 좋다. 물론 구성원 중 한명에게 요약을 하도록 한다.
-  준비: 소그룹 구성원들로 하여금, 본문을 적어도 3번 이상씩 정독하게 한다. 역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와 ‘남은 자’에 대한 내용, 또한 가까운 미래에 성취된 예언과 메시야 예언들을 주의해서 볼 것을 강조해야 한다. 본문을 printout해서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면 더 좋겠다.
-  진행: 그 주에 공부한 본문의 흐름을 한 사람이 요약 정리하게 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배경과 예언서 본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함으로써, 그 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장을 정리하면서, 예언서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때’’남은자’등의 내용을 정리하고, 각자 깨달은 내용을 나누면서 진행하도록 한다.
-  주의 사항: 다시 언급하지만, 리더는 귀납법적 성경공부 방식으로 본문을 준비하도록 하고, 본문의 내용 중에서 신약을 통해 성취된 부분은 정리해 주도록 해야 한다.


사실 위에 언급한 공부방법으로는 예언서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림으로써, 구약의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예언서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동의할 경우, 책별로 깊은 성경공부를 시도해 보는 것을 권한다.


<참고할 도서>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든 D 피, 성서유니온: 이 책의 10장 선지서에 관한 내용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  ‘이스라엘 역사’, 레온 우드, 기독교문서선교회: 기타 다른 구약역사 책도 무방하다.
-  ‘IVP 성경배경주석 – 구약’, 왈턴 매튜스, IVP: 본문과 관련해서 당시 상황적인 특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든 D 피, 성서유니온: 각 책별 특징과 주의 할 점을 간략히 집어준다.
-  ‘성경사전’: 이거야 필수!

[임혜정] 한 코스탄의 솔직한 나눔


여느 때처럼, 컴퓨터 앞에서 회사 업무를 하던 어느 날, eKosta에 기고할 글 한편을 써달라는 email을 받았다. Kosta라는 이름만 봐도 반가운 마음이 앞서긴 하지만, 막상 내가 다른 Kostan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지 난감했다. 많은 Kostan들보다 오히려 짧은 유학 생활을 보냈고 단 한번 Kosta에 참석했던 나를 OB Kostan이라고 부르는 게 좀 멋 적기도 할 뿐더러, 본래 글쓰기와 거리가 먼 이공계 출신인 탓도 있을 것이다.


결 국 글쓰기를 차일 피일 미뤄오다가 내린 결론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유학생 출신 사회인인 나의 삶과 한국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솔직하게 나누기로 했다. 이외엔, 달리 뾰족이 더 좋은 contents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으시면 이런 글도 어떤 Kostan에겐 유익할 수도 있으리라고 담대히 믿으며 말이다.


2002 년 봄, 미국에서 2년간의 석사 과정을 마칠 즈음, 박사과정으로의 진학과 취업이라는 진로 선택 앞에서 많은 고민을 하던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기회를 통해, 취업이라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로를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받아둔 Job Offer가 있었기에 취업으로 마음을 굳힌 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처 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쁨, 답답했던 언어 문제로부터의 해방감, 모든 환경들이 익숙한 데서 오는 편안함으로 인해, 한동안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푸근함을 만끽했던 것 같다. 직장 생활의 경우, 낯선 업무와 동료들과의 관계 등으로 스트레스가 있긴 했지만, 이런 어려움들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문제라고 여겼었다.


그 러나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즐기며 시간이 차차 흐를수록, 유학을 가기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불편함도 느껴졌다. 예를 들어, 유학시절이 광야같이 적막하고 외로운 생활로 힘들었다면,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은 따뜻하고 언제나 대화가 넘치는 삶인 반면 나만의 개인적인 영역은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미국식 기준으로 본다면 굳이 가족에게 알릴 필요가 없는 개인적인 문제들, 또는 성인인 나 혼자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들인지라 나 혼자 처리하려고 해도, 한국의 부모님은 여전히 한국식 기준을 가지고 주도적 권한을 행사하기 원하셨고 그렇지 못할 때는 매우 섭섭해 하셨다. 또한, 미국에서는 몇 시간이고 방에 틀어박혀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주말에 마음먹고 조용히 책 몇 권을 집중해서 읽거나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혹시 지금 이 순간, 홀로 하는 유학 생활이 너무나 외롭고 황량해서 힘든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런 광야 환경조차도 학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상황이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한 국의 직장인이 된 이후, 생활의 차이점을 한가지 더 들자면, 학생 때에 비해서 숙제와 시험이라는 압박에서는 벗어났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24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학교에 비해, 직장인이 되면서부터 조직의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출,퇴근은 물론이고 어디를 가더라도 미국에 비해서 교통시간,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많이 드니 말이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살다 보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충만한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매일 경험한다. 유학시절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기 전에 QT부터 하면서 말씀에 감격할 수 있었고, 주중에도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성경 공부 모임을 갖거나 식사하면서 교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의 사회인으로서 그런 영적인 행복(?)을 누리려면, 학생 때보다 더 많은 commitment가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마 지막으로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며 가장 심각하게 느낀 건, 현대인들이 미래를 굉장히 불안해 한다는 것이었다. IMF이후 우리나라에도 이제 더 이상 평생 직장 개념은 사리진지 오래 이기에, 언제 있을지 모르는 구조 조정에서 과연 나의 고용상태(employment)은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 만약 실업자가 된다면 뭘해서 먹고 살 것인지…사람들은 지극히 불안해 보이고 관심은 온통 나 혼자 잘 먹고 사는 문제에 맞춰져 있음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나 역시 주변 사람들과 분위기에 많이 영향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 사랑을 다시 한번 묵상하며 내 삶을 돌아보곤 한다.


한 국에 돌아온지도 어언 2년 3개월이 지났다. 이젠, 미국에서의 유학시절이 꽤 아득하게 느껴지고 우리나라의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많이 길들여진 느낌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좋은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삶을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하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방향에 대한 고민을 잊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문득 깨어나서 새로워지기를 다시 한번 소망할 수 있는 가장 큰 Motivation은 주님의 청지기라는 소명의식이라고 믿는다.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이, 세상에 속한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충성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그런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말이다.


지 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유학 생활은 참 힘든 고난과 시험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유학시절 동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기에 가장 큰 은혜의 시간이었으며, 내 삶의 폭과 뿌리가 깊어지는 축복의 시간이었다고도 확신한다. 혹시라도 지금 힘든 유학 생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 고난마저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만 허락하신 축복”이라고 진심으로 격려하며 글을 마친다.

[안상현] 내가 가진 것들이 강점으로 들어나는 삶을 살도록 시작하라!




간난 아이들을 보면 그 모습들이 참 많이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불긋불긋하며 접힌듯했던 피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뽀얗고 뽀송뽀송한 피부로 변해가는 아이들이 생김은 어느새 같은 모습을 잃어간다. 눈이 큰 아이, 코가 오똑한 아이, 보조개가 있는 아이, 귀가 작은 아이, 곱슬머리 아이 등등… 외모의 독특함은 지나가는 시간의 양과 비례해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 각각에게 외모의 독특함뿐만 아니라 재능과 은사를 통해 내적인 독특함 또한 주셨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재치있는 생각을 잘 하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 논리적이고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 책임감이 강한 사람, 사람들을 잘 이끄는 사람 등등… 우리 주위에는 다른 재능과 취미를 지닌 사람들로 가득하다. 외모의 독특함이 드러나는데 시간이 걸리듯 내적인 독특함이 들어나는데 또한 시간이 걸린다. 아마 더 오래 걸리는 듯 싶다.


대 학생이 되기 전까진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갓 태어난 아이처럼 다 비슷비슷한 삶을 산다. 초등학교, 중고등 학교를 거치면서 다들 대학이라는 곳을 오기위해 비슷한 노력을 하며 비슷한 모습으로 산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곳은 그런 비슷한 성장을 해온 사람들에게 깊이 있는 학문의 선택과 진로의 전공을 통해서 드디어 인생의 내적인 톡특함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대학생이면 누구나 한번쯤 전공과 진로 고민에 빠진다. 대학생으로서 그런 고민을 하는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성장의 단계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인정해야 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 고민을 통해 더욱 성숙한 본인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다. 인정해야 할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하나님이 내 안에 심어주신 내가 지니고 태어난 나의 내적인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적인 모습이 독특함을 확실히 나타낼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것을 자꾸 발전시켜 강점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우 리는 사람들에게 눈이 큰 이유, 코가 오똑한 이유, 보조개가 있는 이유, 귀가 작은 이유, 그리고 곱슬머리인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재능과 은사들도 외모의 독특함의 이유가 없듯이 각각 다양한 능력과 재능의 차이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데는 외모의 다양함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스스로가 가지고 난 재능을 보지 못하는 사람, 그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 누군가에 의해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재능을 부담을 갖고 만들어 가는 사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때로 우리에게 부담감을 준다. 우리가 타고난 외모의 생김에 이유는 묻지 않지만, 더 잘 생기고 더 이뻐지기 위해 누군가처럼 우리의 외모를 바꾼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모습 위에 우리가 닮기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의 외모를 쓰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내적인 모습도 탈을 쓴다. 내가 이미 잘하고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이 바라는 내가 갖고 있지 않는 어떤 모습을 취하기 위해서 나의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꾸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다.


하 나님이 지어주신 나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 모습이 나의 강점이 되도록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날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있을때 나를 만드신 하나님 창조의 기쁨과 은혜를 더욱 느끼며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능력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다른 누군가가 되라고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모습이 강점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대학교육을 통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는 하나님의 대학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