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록] 깨어진 꿈

대학 1년 때부터 25년간의 신앙생활을 통해 내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성경이 잔인하리 만큼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정사정 없이 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나의 숨겨놓은 비밀, 숨은 동기를 파헤쳐 빛 앞으로 가져오게 한다.


나는 유학이라고는 생각도 못해 보던 평범한 (다소 뒤떨어진)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가담한 어느 선교회에서 하도 해외 선교사에 대한 대단한 선전을 하길래, 나도 해외에 한번 나가서 선교사적인 삶을 살면서 유학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이 생각은 곧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로 있으면서 캠퍼스내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무척 근사하지 않겠느냐는 꿈으로 이어졌다. 비단 나만이 이런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유학할 장학금을 받게 되고 유학할 분야에 맞는 학교와 교수님까지 정해지자, 모든 것이 급속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도미하게 되었다. 컴퓨터 구조와 하드웨어를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는 일이라 힘들었지만 (사실 아내가 더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 이 글을 아내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8년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남아서 연구조교수로 3년 반을 더 보내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내 머리가 거의 반백이 되도록 (모자라는 머리니까 시간으로라도 때우려고 했었다) 말할 수 없이 바쁘게 지내었지만 결국 모자라는 능력으로 무리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기간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자는 마음에 마지막쯤 되어 여기저기 학교에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실패하였다. 내게는 학교교수라는 꿈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이 먼저인가, 현실이 먼저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특히 실패를 하게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더구나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셨던가 생각하게 된다. 실패한 후에야 깨달았다는 반성은 마치 자기 합리화가 되는 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왠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내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 실패를 거듭하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단 한번의 인생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었고, 이 고민은 나에게는 엄청 중대한 것이었다. 실패의 외형적 원인이야 능력 부족 및 게으름이라고 하며 끝낼 수 있겠지만, 실패의 고비에서 나는 내 인생의 항로에서 내가 아주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사실 실패는 학교의 교수직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첫째 나는 내 인생의 꿈을 좇다가 현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유학생이기에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항상 손님이었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일들에서 항상 수동적이고 책임감없는 존재였다. 연구실이나 학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지역사회나 학생 하우징에서 필요로 하는 봉사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참여가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밑바닥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딱하게 된 것은, 신앙의 성장이 멈추어 선 데 있었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학업이라는 미명하에 나의 지극히 수동적이고 성장없는 신앙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말씀이 강조하는 바가 꿈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성실하고 충성하라는 데 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성경은 꿈을 꾸라고 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보다 오히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몇 번이나 말씀 하셨지만, 묵시가 없으면 방자하다고 경고하시지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지만, 바울에게 로마를 보여주셨지만, 그리고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꿈을 보여주시지 나더러 꿈을 꾸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더구나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간이 의미없는 것이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처한 곳에서 심지어 고통까지 포함해서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하신다. 나의 삶은 학업이 끝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만이 이 땅에서 손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특히 나같이(?) 젊은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서 평생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곳이 직장이든, 학교든, 가정이 있는 집이든, 대부분 수년 내에 다른 곳으로 기회를 찾아 쫓기듯 이동해 간다. 그러기에 마치 직장에서 임시고용된 사람들 같이 아무런 책임의식없이 살아간다. 뭐 사회의 추세가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영원성을 추구하는 신앙과 나의 실제 삶이 삐걱삐걱한다는 데 있었다.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그룹의 형제자매들이지만 얼마 있으면 공부를 마치고 또는 직장이 바뀌어 다른 곳으로 가게 되니 나는 헌신하고 기여할 수 없게 된다.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 그룹이라도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점이 방관하는 자신을 매끄럽게 변명해 준다.


그러나 곧 떠나야 하는, 또는 떠날 지도 모르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라면 나는 생각을 달리 해야했다. 내일 떠나더라도 오늘 영원히 이 그룹을 위해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지극히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지만, 나그네의 삶은 나그네로 지내는 그 자체가 삶이지 어디에 안착한 뒤의 삶이 그의 이 땅에서 영위한 삶이 될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착이란 결국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해 주는바가 아니던가.


탁월함의 추구, 성경적인가?


둘째 나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시대 유행의 희생자였다. 아니, 희생자가 되려고 자처하며 나섰던 것이었다. 이 시대의 성공적인 삶을 탁월함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물론 공부를 하고자 나섰던 것이니 나의 탁월하려는 노력은 논문쓰기와 특허출원, 그리고 펀드레이징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능력의 부족을 인식하게 되면서 과연 그리스도인의 세상적 탁월함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신명기 28:13)”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인가? 일등은 하나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특히나 학교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두뇌들을 보면서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지만, 감사하게도 첫번째 문제에 대한 반성으로 내 안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성경적인 관점의 그리스도인의 삶 – 즉 성실하고 충성하는 삶 – 으로 인해 새로이 조명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다! 성경 어디를 둘러봐도 일등하라고 하지 않는다. 신명기의 말씀은 순종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하심의 표현이다. 탁월함은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의 부산물이지 목표가 아니다.


탁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낀 그 자유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탁월하지 않은 자신을 올가미를 씌어가며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약속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되었다. 최근에는C.S. Lewis가 이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표현한 것을 발견하였다:


“저는 ‘난 특별한 존재야”라는 느낌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그러나 ‘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그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특별한 존재야’라는 느낌으로 그리하려고 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 탁월하지 못함을 안위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는데, 적어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성할 때를 가정하는 것이니만큼, 탁월하지 못함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더 이상 열등감이나 경쟁에 뒤쳐진 불안이 아니게 되었다. 더구나 발빠른 주변 사람들의 행보에 늘 뒤쳐지던 나는 이 씨애틀 땅에 쳐박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씨애틀에 사는 동안 충성해야 할 것이 무엇이지 이미 몇 가지 눈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나를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잃어버린 10년, 그 이후


성경이 나의 붕 뜬 생활을 지적하였을 때 나는 지나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하루를 살든지 평생 미국에서 살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하여야 함을 깨달았다. 물론 그 10년을 실패한 삶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렵게 생활하는 많은 분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농담이 될 까 두려울 정도로 나의 실패는 그분들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10년을 통해 섬세하게 내 마음을 아주 낮추어 주셨고 그 10년을 되찾는 길을 열어 주셨다. 물론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훨씬 더 그분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만, 작은 일에, 현재의 일에 충성하는 진리가 주는 기쁨과 감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잊게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선아] 하나님의 쉼표

유학생의 아내로 살아 온 지 벌써 8년이다. 아주 간단한 짐 꾸러미 네 개만 들고, 처음 미국에 발을 내려 놓을 때는, 마치 여행이나 소풍을 온 것 같이 홀가분한 기분이었었다. 그리고 한 삼,사년은 그런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연 수가 많아져 가면서 나에게 들기 시작한 생각은 이제 이쯤에서 이런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혼 때의 군대생활, 그리고 연이어진 유학생활, 난 참 많이도 이사를 한 편이었다. 십일년 동안 아홉번을 이사했으니 말이다. 늘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은, 나쁘지 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새로 시작한다는 것에는 ‘적응’이라는 부담이 적잖이 있었다. 큰아이는 지금 겨우 4학년이지만, 공립학교를 4번이나 전학한 경험이 있다. 큰 아이에 대해 감사한 것은, 재미있는 성격 덕에 가는 곳마다 친구를 쉽게 많이 사귀었다는 것이지만, 미안한 것은 좋아하는 친구가 생길 적마다, 친구를 추억에 담아두고 이사를 해야 하는 일을 겪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심하게 몰아붙일 때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려온 유학생 가족으로서의 이곳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심정이 정점에 달할 때마다, 하나님은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도록 하셨다.


셋째 아기를 사산한 것이 벌써 이년 반 전의 일이다. 칠개월을 뱃 속에서 잘 자란 아기를 잃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보질 못한 일이었다. 걱정 보다는 호기심과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걸어 들어 갔던 병원의 복도를, 사일 뒤에는 애기 대신 소국화만 한 다발 가슴에 안고 휠체어에 앉아 되돌아 나왔었다. 병원 밖은 막바지 가을의 단풍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아기가 죽었는데, 하나 변한 것 없는 사람들의 행복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하나님, 전 참 욕심 없는 사람이에요. 늘 하는 한 가지 기도는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족이잖아요. 근데, 왜 그것을 가져가세요?… 감사가 되질 않던 기도의 시간들이었다. 태어났지만, 한번도 떠 보지 못했던 눈, 소리 없던 입, 너무 조그맣던 손, 가만히 내 볼을 대 보았을 때 아직도 따뜻하던 작은 볼… 눈에 사진이라도 새겨 넣듯 그렇게, 죽은 아이의 모습을 열심히 보아 두었었다. 쉼표는 한번쯤 숨을 고르고 주위를 돌아 보라고 주셨을 터인데도,난 더욱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쉼표의 타격은 정말 마침표를 찍고 어딘가 정착하고 싶은 열망만을 더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채 일년이 지나기 전인 여름에, 한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유월까지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지병의 악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또 한번의 이사를 앞에 두고 있었던 난, 짐 꾸리는 일 대신 대기표를 들고 한국을 향했다. 언제 돌아가신다 해도 같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다행이 아버지의 병은 고비를 넘기고, 호전되어져서, 일반 병실로 옮기셨고, 일주일 후에는 퇴원을 하게 되셨다. 병실에서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흘동안 하루종일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같이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성경도 같이 읽고, 산책도 모시고 나가고,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실 때는 그 옆에서 나도 누워서 쉬곤 했다. 유교집안에서 자라셔서 표현하시는 일에 약하신 아버지는, 가쁜 숨을 고르시면서도, 내 이야기에 크게 소리 내어 웃으시곤 하셨다. 열흘 후 며칠만 더 있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대기표라서 다음의 가능한 탑승 날짜가 구월 십일이 지난 뒤라는 이야기에, 그때까지 미국에 돌아오지 않고 거기 있을 자신이 없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짐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에 걸렸고, 애들이 새로 전학하는 학교에 처음 가는 날, 마음으로라도 의지가 되도록, 엄마가 거기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반년만 지나면,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는 삼월이 되면, 시댁의 행사로 온 가족이 한국에 다시 나올 예정이었고, 그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자고 그랬다. 아버지는, 내년 봄이면 나올 외 손주하고 체스를 같이 할 수 있도록 연습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때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연장된 생명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열심히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사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눈물로 드렸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연장해 주신 삶은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으셨다. 구월에 다시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끝내 내게 유언 한 말씀 남기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왜 하나님은 아버지가 증거 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셨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을까? 그리 빨리 거두어 가실 거면서, 다시 살았다는 희망은 왜 주셨을까?… 한국을 떠난 세월동안, 부모님들은 늙어 가셨고, 함께 많이 시간도 보내지 못하시고는 돌아가시는 구나 하는 생각에, 날 한국을 떠나게 한, 공부하는 남편이 미워지기도 하고, 미국생활이 서러워지기도 했다. 이쯤에서 쉼표는 차라리 숨 막힘표 같은 것이 되어져 있었다.


셋째 아기의 일주년 날, 내 머리에는 아버지를 추도하는 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날 난, 의외로 우리 아이들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만져 보았던 뱃 속 아기의 움직임이 어떠했었는지, 그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웃었었는지, 어떻게 이름을 불러 주고, 노래를 불러 주었었는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동생이 지금도 얼마나 그리운지, 이야기들을 하였다. 추수감사절 프로젝트로 터어키 모양의 종이 위에 감사의 내용을 적고, 온 가족이 다 같이 털실을 짤라 꾸몄었는데,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주일날 아기는 사산되었고, 월요일 날 그걸 들고 학교를 간 큰애는 ‘new baby’란 항목을 읽을 때 ‘in the heaven’을 덧붙여 말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했다. 외할아버지랑 한국가면, 같이 낚시 가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섭섭해 하기도 했다. ‘하늘나라 갔다’는 말을 ‘하늘 날아갔다’로 이해해서, 동생이나 외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날개 짓을 하던 둘째 아이는, 일년 새 많이 커서 ‘하늘나라’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와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난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추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감사했다. 셋째 아이가 비록 뱃 속에 있는 동안이었지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생각하며 감사했고, 살아 태어나지 못할 만큼만 계획되어졌던 그 아기를, 이렇게 많은 것을 추억해 줄 수 있는 우리 가정으로 보내주신, 그 아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감사했다. 한 달도 채 안된 아버지의 연장된 삶이었지만, 그 허락해 주신 기간을 통해, 열흘이나 함께 지내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신 사랑에도 감사했다.


버거웠던 쉼표들은, 마침표를 향해 정신 없이 달려 가고 있던, 정착을 향한 내 열망에, 감사의 눈을 띄워 주었다. 생명이 참으로 유한하다는 것,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 뒤에 ‘하늘나라’라고 하는 더 행복하고 큰 축복이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사랑하는 셋째 아이와 아버지가 계신 그곳이.


내 집에 도착해서 정착하기 전까지는 이곳은 뜨내기 삶 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의 삶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축복이라면, 지치고 힘든 삶이 아니라, 정말 여행이나 소풍 같이 여유롭고도 짧은 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했던 천 상병 시인의 <귀천> 한 절이 떠오른다. 처음 시작하던 마음은 ‘어디든 보내시는 곳에 간다’ 였는데, ‘정착’하고 싶은 내 욕심이 그 동안 그걸 덮었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었던가 보다. 정말 마침표를 찍는 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날일 터이니, 그 전까지는, 난 쉼표를 자주 찍으며, 쉼표 때마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하고, 그 곳이 어디든지 참 행복해 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과,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진정 내 집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알아 가고 노력해 가야 할 나를 향한 계획과, 내가 누리고 기뻐하며 감사할 축복이, 이곳에 이미 예비 되어져 있기에….

[조근상] 무엇을 묵상하며 노래하는가?

이코스타 2005년 8월


오늘 날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에게 빼앗긴 것 중에 한 가지가 묵상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그 뜻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 묵상의 원어인 ‘메디칼루스’는 약이란 단어의 원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약을 먹으면 몸 안에 약이 들어와 온 몸에 퍼져가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 가운데 생각하는 것이나 사실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가 많이 읽는 시편에는 묵상하는 사람의 형통함에 대해서 나와 있다. 사실 시편이란 찬양과 관계가 많을텐데 굳이 시편 기자가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찬양과 묵상에는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급한 것처럼 현대 예배의 특징은 음악이 많은 경우에 예배에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보면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세상의 음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지에 대해서 혼동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을 구별하는 방법 두 가지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그 가사가 누구에게 집중이 되어 있는가이다.


일전에 캘리포니아의 갈보리채플의 예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나이가 중년이 넘은 예배인도자 한 분이 우리가 많이 부르는 ‘빛되신 주(Here I am to worship)이란 곡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이 찬양을 대할 때 사랑스런(Lovely)같은 단어들은 연인들에게나 하는데 이제는 이런 단어들을 하나님께 부르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없이 쉽게 하나님을 대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경외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예배 중에 부르는 찬양에 쓰이는 단어의 변화는 이 세대의 워십에 커다란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의 찬양의 단어들은 묵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보다는 음악적 색깔이나, 좀 더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단어들을 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글을 쓰는 내가 점점 더 나이가 먹어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전에 많은 선배들이 로마서 16장 19절을 부르면서 외치던 나에게 경고해 주었던 이야기를 내가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곡을 부르면서 예배에 몰입할 수 있고 때로는 그 곡과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수가 있다. 나는 한 번도 로마서 16장 19절을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모인 실버대학에서 주제곡으로 선택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 곡들을 통해 이 세대가 가지는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예배 중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가사보다는 다른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곤 한다. 이 새로운 곡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이 빠른 곡을 과연 회중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도 의심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찬양의 문을 지나 주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다. 주님을 묵상하도록 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음악적인 뛰어난 곡을 하는 예배인도자들을 종종 보곤 한다. 뛰어난 음악과 그리고 그들이 가진 너무나 아까운 은사들, 그리고 새로운 곡을 열망하는 회중들의 간절함,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중심인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음악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음악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 탁월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인도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음악을 전하는 음악전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는 예배중보자가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새로 쏟아져 나오는 신곡들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묵상이 잘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풀어헤쳐진 단어들 속에서 무엇을 건져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오한 진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배해, 찬양해, 노래해 같은 가사들은 많은데, 뭘 경배하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깊은 묵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단순한 진리들을 나열해 놓은 것 같은 노래들, 그러다 보니 원래 약이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온 몸에 퍼져야 하는데 퍼지지를 않기 때문인지 요즘 예배 안에 불리는 곡들은 많지만 의외로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곡들이 줄어들고 있다.


기도하기는 앞으로 많은 곡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가운데 인도할 수 있는 깊은 묵상 가운데 나올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인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역시 시편 114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예배 가운데 흘러넘칠 것이다.

[조한상]왕.암.호-크게 보기

소그룹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각 모임들이 어떤 형식으로 공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크게 두 부류가 있지 않나 싶다. 첫째, 조직 교회나 선교 단체에 소속된 모임의 경우, 리더에 의해 선택된 특정 교재를 사용하거나, 목회자가 만든 문제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둘째, 비교적 독립성이 보장된 소그룹의 경우, 성경 통독을 하거나, 많은 경우 귀납법적 성경공부 방식을 따라, 성경 본문을 1장 이내로 자세히 공부하곤 한다. 이전에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필자도 귀납법적 성경공부를 선호하고, 또 현재 속한 소그룹에서도 이 방법을 따라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성경공부를 처음 해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성경을 좀 크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과, 그것도 말씀 자체를 통해 배경과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큰 그림을 보는 공부방법은, 후에 자세한 성경공부를 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아직 성경공부의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에, ‘큰 그림 성경공부’ 방법의 하나로 ‘왕.암.호’를 소개하려고 한다.


1. 도입
막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구약의 역사서들이 비교적 읽기에는 용이한 반면, 때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막막할 때가 있다. 또한 구약 후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언서들이 그 구약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만일 한 소그룹에서 역사서를 매주 1장씩 귀납법적 방법을 통해 진행한다면, 너무 장기로 진행된다는 점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더욱이, 그런 방법으로 공부하다 보면, 비슷한 내용인 두 역사서인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와 같은 큰 흐름을 놓치기 쉽다. 그러므로 때로는 역사서와 선지서를 묶어서 단기에 큰 그림을 그려보는 공부도 도움이 된다.


2. 계획
모든 성경공부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하듯이, ‘왕.암.호’ 공부의 목표도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역사 설화를 보는 법을 배운다. 역사서들은 주로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특정 사람의 특정 행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예를 들어, 솔로몬도 부인이 많았으므로 지금도 일부다처가 유효하더던지, 혹은 다윗이 군대 계수를 하지 않았으므로, 지금도 비지니스에서 재고를 정리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던지 하는 해석들 말이다. 구약의 설화를 읽고 해석할 때에는, 고든 D. 피가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에서 설명하는데로, 그 이야기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또한 송인규 목사가 ‘성경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서 언급했듯이, 구속사적인 흐름을 놓치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이미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관점에서, 구약을 구속사 속에서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솔로몬에게 주신 ‘부와 지혜의 복’은, 신약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한 ‘기쁨과 평안의 복’의 그림자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물질로 백성을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도 그 물질적인 복을 받아야만 한다는 해석은 구속사적 흐름을 놓친 자의적인 해석이라 하겠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복을 맘껏 누린 사람들 중에, 단 한명도 물질적 풍요함을 누린 사람은 없다.)


두번째, ‘왕.암.호’ 성경공부를 통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열왕기서의 관점인 ‘신명사관’과 역대기서의 관점인 ‘역대사관’의 차이점이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두 사관을 간략히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약 대부분 역사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의 관점인 ‘신명사관’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거역하면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포로 생활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인이, 유대민족의 불순종으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회개하고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열왕기서에는 다윗이나 솔로몬을 비롯한 왕들의 죄악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반면, 역대사관은 실의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힘을 주고, 예루살렘 재건을 독려할 것을 목적으로, 유대의 정통성과 선민의식을 강조한다. 그래서 역대기서에는 다윗이나 솔로몬의 죄악상이 빠져있고, 유다의 정통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왕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진행함으로써, 각 사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세번째, 열왕기서를 공부한 이후에, ‘정의의 선지자’라 불리는 아모스와 ‘사랑의 선지자’라고 불리우는 호세아를 공부함으로써, 예언서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쓰여졌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소선지서 중에서 분량이 적지 않지만, 각각 특성이 분명하고, 또한 북이스라엘을 향해 쓰여진 유일한 선지서이기에 열왕기서와 함께 다루기에는 더없이 좋다.


3. 계획
성경공부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은, 새로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준다는 면에서 도움이 된다. ‘왕.암.호’ 공부는 약 15주 정도로 진행하면 적당하다. 첫 주는, ‘창세기부터 사무엘하까지의 역사’와 ‘신명 사관과 역대 사관의 비교’를 구성원 중 두 명이 각각 미리 조사해 오도록 하고, 열왕기상 1 2장의 내용을 노트에 정리해 오도록 한다. 시간이 허락하면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의 5장 ‘구약의 설화들’을 요약하도록 하면 더욱 도움이 된다. 둘째 주부터는, 약 5장씩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그러면 왕상 5회, 왕하 5회, 암 2회, 호 3회로 마칠 수 있다.


4. 진행방법
매 주 다섯장씩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본문을 반드시 미리 읽고 요약해 오겠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노트나 컴퓨터를 사용하여, 각 장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가지고 오도록 한다. 각 모임의 초반은 각 사람이 미리 해온 내용 요약을 무작위로 발표하면서, 본문의 이야기를 정리하도록 한다. 또한, 공부 진행을 원만히 하기 위해, 리더가 함께 생각할 문제를 미리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 문제를 만들 때에는 앞에서 언급한 ‘왕.암.호’ 공부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각 인물과 사건의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하고, 역대기서를 함께 읽음으로서 각 사관의 차이도 놓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 또한 구약의 설화들을 통해 구체적인 적용을 하되,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기 보다는 구속사적인 흐름을 놓치지 말고 적용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그를 위해 문제지와 함께 본문을 표준새번역이나 NIV등의 현대어로 된 해석으로 나누어 주되, 연관된 역대기서 본문도 함께 나누어 주면 좋겠다.


5. 평가
‘왕.암.호’와 같은 큰그림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자세한 신학적인 내용이나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공부가 끝날 때 구성원들이 처음에 목표한 세가지, 즉 ‘신명사관과 역대사관의 차이’를 알게 되었는지, 아모스와 호세아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는지를 파악했는지, 또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 그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는지를 평가해야만 한다. 그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지금도 우리 삶의 주권자되시는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그 앞에 내 의지와 욕심을 얼마나 내려놓으려고 애썼는지를 서로 점검해 주어야만 한다.


6. 참고도서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든 D 피, 성서유니온: 이 책의 10장 선지서에 관한 내용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   ‘이스라엘 역사’, 레온 우드, 기독교문서선교회: 기타 다른 구약역사 책도 무방하다
-   ‘IVP 성경배경주석 – 구약’, 왈턴 매튜스, IVP: 본문과 관련해서 당시 상황적인 특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든 D 피, 성서유니온: 각 책별 특징과 주의 할 점을 간략히 집어준다.
-   ‘챠트 구약’, 존 H 월턴,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의 왕들의 특징과 전쟁들의 전개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각종 도표들을 제공한다.
-   ‘성경사전’, ‘신학사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