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련] JoJang, JeJa, Just Jesus!

이코스타 2005년 11월호

jjKOSTA는 미주 코스타 연차 수양회에서 조장으로 섬기시는 분들을 도와드리는 코스타의 파생 사역입니다. JoJang, JeJa, Just Jesus라는 모토를 걸고 조장(JoJang) 자원자들이 수양회 기간 동안 조원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수양회 이후에도 각 처소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Just Jesus)를 바라보며 제자(JeJa)로 세워질 것을 바라며 섬기고 있는 사역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jjKOSTA 웹 사이트 ( http://jj.kostausa.org)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KOSTA에서 small group (조)의 역할이 큰 만큼 소그룹을 인도하는 조장님들이 조원들을 잘 도와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코스타 이후에 활로우업을 함으로써 코스탄들이 코스타에서 헌신했던 마음을 가지고 제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은, 코스타를 일회적 수양회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코스타의 정신이 코스탄들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jjKOSTA는 계속적으로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입니다. 10개로 나누어졌던 jjKOSTA의 미국 지도가 지금은 16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각 지역별로 섬기고 있는 코디네이터가 모두 스물 다섯명, 그리고 멘토들이 열 다섯분이 계십니다. 모두들 섬기는 지역을 위해 겸손히 물심양면으로 뛰고 계십니다.


솔직히 저는 jjKOSTA 지역 코디 1년차 초년생입니다. 현재 제가 살고 있는 텍사스가 속해 있는 3지역(TX, MS, LA)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 작년 10월 말 무렵이었습니다. 오랫 동안 jjKOSTA를 섬겨 오신 분들의 노하우와 마음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부족하나마 2005년 jjKOSTA 준비팀으로 그리고 활로우업팀으로 섬기며 느끼고 배웠던 것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실은 2005년 jjKOSTA 준비팀으로 섬기게 된 것은 저의 무지함이 한 몫을 했습니다. 제가 2002년과 2004년에 코스타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조장으로 섬겨 본 적이 없고 조장 수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jjKOSTA 준비팀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대부분의 코디님들이 함께 하는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준비팀 참여를 묻는 이메일에 ‘네’라고 답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소수의 지역 코디님들만이 준비팀으로 섬기시더군요. 7월 코스타가 열릴 때까지 준비팀을 섬기며 배운 것들을 생각할 때 저의 무지함을 이용하셔서 귀한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2005년 준비팀에는 네 명의 준비당당과 또 다른 네 분의 준비지원 코디님들, 그리고 세 분의 준비자문, 그리고 코스타 지원 간사님과 웹 지원해 주시는 분이 함께 했습니다. 네 명의 준비담당 코디들과 자문을 맡아 주신 분들이 각기 다른 지역(뉴욕, 메릴랜드, 버지니아 그리고 텍사스)에 있는 관계로 컨퍼런스 콜과 이메일이 저희의 주요 의사소통 도구였습니다. 준비담당 코디들이 모두 처음 섬기는 지라 좌충우돌 잘 몰라서 실수도 있었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였지만, 모두를 함께 끌고 가기 위해 끊임없이 인내하시고 잘못이 있을 때마다 적절하게 지적해 주시며 필요시에는 솔선수범으로 본을 보여 주시며 도와 주셨던 자문위원들을 통해 섬김의 미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서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각자의 역할이 자리잡는 것도 서툴렀던 네 명의 준비 담당 코디들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각자 맡아야 할 부분들,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일들을 감당해 내는 변화의 모습을 경험하며 동역의 조화로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월 코스타까지 한 팀으로 영육간의 전쟁을 함께 치뤄내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싹트고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넷 훈련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가며 일촉측발의 상황들도 가끔 발생해 하나님은 우리가 꾸준히 그리고 열심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확인시켜 주시기도 했습니다.


준비팀 내에서 커뮤니케이션 외에 활로우업을 담당하고 있는 저로서는 7월 코스타가 끝난 후 한 달의 공식 활로우업 기간과 그 이후의 시간에 또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코스타 이후 활로우업의 필요성과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스타를 어떤 운동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jjKOSTA의 활로우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코스타는 일주일 동안 말씀과 성령의 잔치를 벌이고 끝나는 일회성 수양회가 아니라 그 이후에 코스탄 각자의 삶에서 그 능력이 발휘되어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저였기 때문에 준비팀 내에서 코스타 전/중/후로 그 담당 역할을 나눌 때 코스타 후가 가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부수는 매일의 삶을 어떻게 제사로 드리느냐에 달렸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코스타 이후 코스탄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활로우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코디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jjKOSTA의 10년 뒤의 모습을 그리며 섬기고 계시는 한 선배님의 열정과 비젼을 통해서 저의 눈도 조금은 떠졌습니다.


jjKOSTA의 네트워킹이 훨씬 단단해지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유용하게 쓰여질 10년 뒤의 모습을 그리며 올 해 처음으로 문을 연 jjKOSTA follow-up 웹 페이지. 100명 정도의 코스탄이 궁금한 마음에 회원 가입을 했습니다. 한 두번 방문하신 후에 발길을 끊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웹페이지의 운영과 내용 면에서 아직도 미숙한 점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가 끝난 지 석달이 훨씬 지난 현재, 매일 큐티를 나눠 주시는 분이 계시고 원투원 보드를 통해서 일대일 제자 양육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속적인 발전이 있고, 웹페이지를 위해 코스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코스탄들을 섬기기 위해 웹페이지가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 지길 소원합니다.


활로우업을 위해 보냈던 이메일들과 걸었던 전화들… 여러 분들과 연락을 하며 미국 여러 곳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주의 제자들을 만났고,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가기를 소망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접할 때, 활로우업의 효율성과 필요성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시고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경제(가치)의 법칙이 이해가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코디님과 코스탄이, 조장과 조원이, 혹은 조원들 끼리 원투원을 시작하고, 지역교회나 캠퍼스의 영적 부흥을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통해 도전받은 대로 말씀 공부를 하고 훈련을 받는 분들의 소식을 들으며 저 또한 힘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끊임없이 코스타를 통한 열매가 미주 전역에서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jjKOSTA가 귀하게 쓰임받길 기도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신선묵]지도자와 고난

모든 사람은 고난을 겪는다.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특히 지도자들은 더 많은 고난을 겪는다.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으로, 생명의 위기를 통하여, 사역의 현장에서 떠나게 되는 것, 섬기는 자들의 깊은 반발로 인한 어려움 등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가 많은 지도자의 삶을 살펴보면 그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또 현재 지도자인 사람은 고난에 대한 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깊은 고난을 겪게 되면 두 가지 종류의 반응을 보게 된다. 한 가지 반응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돌아서는 욥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 있다. 왜 나에게 불공평하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사람이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은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제까지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모든 것이 하나님?주권 아래 있음을 믿고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바르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이런 고난을 겪을 때에 이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믿는지 안 믿는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난을 거친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 헤아려 볼 수가 있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가 겪는 깊은 고난을 바라본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지도자들의 삶 속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를 성숙한 지도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첫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더 나아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신앙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실상 신앙 의 부산물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주어진다. 명예와 지위, 인기와 명성, 내적인 만족과 사람들의 인정, 물질적인 축복과 번영,� 그러나 우리가 늘 기억할 것은 이런 것들은 결국은 본질적인 것의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이런 부산물을 본질적인 하나님 그 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할 때에 사람들은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 그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째, 고난을 통하여서 신앙의 역설을 배우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진리이다. 약한 것이 진정으로 강한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그런데 깊은 고난을 통하여 이런 역설적인 진리를 체험케 된다. 우리가 강하고, 살아 있고, 높기만 하다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에 즉,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가 낮아질 때,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바로 참 강함과 참 높음과 참 생명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개인적인 고난이 있었다. 그것을 없애달라고 그가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보다는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셨다. 그리하여 이를 통하여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나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역설은 고난의 깊은 골짜기를 통하면서 경험되어진다.


셋째, 고난을 통하면서 지도자는 인격을 다듬게 된다. 고난을 겪을 때에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 특히 우리의 인격을 평가하게 된다. 평소에는 우리는 철저하지 않은 기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인격에 대하여 풍부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 그런 것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겸손과 인격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겸손하여 진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이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다. 고난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것이 극복된다면 그만큼 인격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넷째,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 특히 깊은 고난가운데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한다. 사역을 할 때에 우리가 고난의 경험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 진정으로 함께 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고난을 겪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정한 의미로 이해하고 목자의 심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겪은 고난을 통하여 사명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가 겪은 고난의 아픔을 진정 이해하고 그 아픔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발견했을 때에 같은 고난을 겪는 이들을 위로해주고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인식하고 발견하도록 돕는 것을 사명으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많은 지도자들의 삶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 할 수가 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그들의 사역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많은 고난을 겪은 지도자는 많은 사역을 감당하게 되고 지도자들이 깊은 고난을 통과 한 이후에 그 이전보다도 훨씬 영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고난이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갖는가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가에 초점을 맞출 수가 있다면 고난은 놀라운 지도자 훈련 학교이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

리더가 탈진 하는 이유 3 가지를 감시하라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각 교회의 목회자와 목회 위원회, 혹은 당회는 내년도 교회 사역을 위한 리더 세우기에 많은 시간과 정열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 이유는 세워지는 리더들이 내년도 교회의 사역이 얼마만큼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그루터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게 일꾼을 찾아다니는 부서 중 하나는 교육부이다. 내년도 교회학교 교사들을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지만 현실은 의외로 쉽지 않다. 교사로 자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선생님들이 지속적으로 교회학교를 섬기면 좋을 텐데 1-2년을 섬기다 보면 대다수가 지쳐 쉬고 싶어 한다. 교회학교 교사 지원자도 부족한데 기존 섬기던 선생님들까지 내년도 섬김에 대한 사양이 매년 교육부로 하여금 어려움과 큰 고민가운데에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은 소그룹 (속회/구역/ 셀/ 목장 등등) 리더 세우기에도 마찬가지이다. 소그룹 리더를 세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새로운 리더십의 발굴이 잘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제껏 섬겨오던 리더십들이 교회학교 교사들처럼 역시 지쳐서 소그룹 리더십 사역을 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교회의 거룩한 사역에 기존의 리더들이 지쳐 더 이상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기를 주저하는가? 기본적으로 그 이유 3가지를 들어 본다면


첫째, 한 개인이 너무 많은 사역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코스타(KOSTA)에서 기드온 프로젝(gpKOSTA)이라 하여 학생/ 청년을 대상으로 기드온의 300용사와 같은 지도자를 양육하는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이 인디아나(IN)에서 열렸다. 이때 시카고, 미네소타, 인디아나, 미시간 등지에서 학생/청년 리더들이 약 96명 정도 참석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설문지의 질문 중 한 가지가 교회에서 섬기는 개인의 사역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질문의 응답은 놀랍게도 이들이 교회에서 섬기는 사역이 대다수 최소 3가지-4가지였고 많게는 5- 6가지 사역에 적지 않은 숫자가 참여하고 있었다. 혹시 목회자들이 참여한 것 아닌가 하는 물음까지 가질 정도였다. 제한된 시간의 테두리에서 사는 인간이기에 시간의 안배와 체력의 조절이 무너지면 건강의 소진과 함께 스트레스를 가지기 마련이다. 직장/ 학업 과 가정, 교회 생활의 그 어느 하나 균형을 잃게 되면 그 결과는 다른 쪽에도 균형을 잃게 한다. 균형의 상실은 육체적, 심리적, 영적 바이러스를 가져와 건강성을 잃게 하고, 결국은 쓰러지게 만들기 마련이다. 너무 많은 교회의 사역이 리더들로 하여금 지치게 하는 주요인 중 하나이다.


둘째, 장기적인 섬김의 비전이 외부에서 공급이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이 사역에 헌신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사역에 헌신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음식을 먹어도 금방 본능적으로 변화를 좆아 간다. 이것은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에 대해서도 변화를 가져보려 한다. 그래서 자리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닦아 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붙여 보기도 한다. 새로운 기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선함을 분명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어 새로운 의욕(motivation) 을 공급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걷게 한다.


맞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모든 것을 장기적으로 유지시키는 (sustaining) 원리의 기초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사역의 헌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현재적 사역에 대해 새로운 비전들이 외부에서 공급되어지지 않으면 그 일은 익숙하게 된다. 일이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사역의 새로움을 위한 도구들(training/equipping)이 외부에서 공급되어 지지 않으면, 이는 마치 전쟁터에 있는 군인이 더 이상 총을 쏠 수 있는 탄알들이 없어 무력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된다. 결국 무능력에 대한 자책감속에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리더의 자기 영적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섬김에 있어서 리더 자신의 영적 관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외부적인 조건이 좋지 않아도 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불편한 것뿐이지 불행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외부적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내적으로 건강하지 않는 사람은 늘 불평이 많고, 얼굴에 근심이 많으며,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앞에서 언급한 리더를 지치게 하는 두 이유 1) 많은 사 역 2) 외부적 공급의 결핍 가운데 서도 리더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다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 목회자와 상의하여 시간을 조절하거나 사역을 조절하거나, 혹은 본인이 외부적 공급을 요청하거나, 자신이 제공하거나, 옆에 있는 다른 사역자들을 붙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더 자신의 영적 관리에 실패하는 경우는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고, 섬김의 책임성 보다는 회의적인 신앙의 자리게 서게 되며, 사역의 거절 뿐 아니라 그 공동체를 떠나고 싶어 하게 된다. 심한 경우는 삶의 안정을 잃어 늘 불안하고 떠 있는 것과 같은 알맹이 없는 껍질의 모습으로 교회 존재자체의 무가치 성까지도 느끼게도 된다.


물론 이러한 기본적 3가지 이유 외에도 리더의 가정, 직장, 혹은 리더의 인간 관계성 문제라든지, 리더십에 대한 그룹원들의 문제 제기, 혹은 교회의 불안정한 여러 요소들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리더들로 하여금 사역의 지속성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리더를 지치게 하여 사역을 멈추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리더가 지쳐 쓰러지는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에서 제기한 3가지 기본 요인들과 어느 정도 밀접한 연관이 있고, 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 지침(burn-out)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리더의 자기 영적 관리에 그 원인이 매우 밀접하게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리더는 무엇보다 먼저 평상시 영적인 탈진의 원인이 되는 위의 3가지 영역을 늘 염두에 두면서 자기 영적 관리를 해야 한다. 만일 영적으로 지쳐 더 이상의 거룩한 사역의 사양(reject)을 가져오고 싶을 때가 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점검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지속적으로 개인적으로 영적 측면에서도 공동체적인 섬김과 더불어 성장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필요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영적 관리를 통해, 리더는 섬김 가운데에서 다가오는 위기를 방지할 뿐 아니라, 순간순간의 섬김의 위기들을 오히려 영적 성숙의 변화로 이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방선기] 지켜야할 세 가지 선


(신6:24-25, 마7:12, 잠28:19-20)


어느 날 운전을 하며 가다가 경찰이 붙여놓은 경고판을 보게 되었다. 그 경고판에 중앙선, 정지선, 차선을 제대로 지키라는 경고가 있었다. 교통질서가 무너지고 교통사고를 일으키는데 세 가지 선을 지키지 않는 것이 중요한 원인인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인생의 길에도 이 세 가지 선이 있으며 이것들을 제대도 지키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선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1.중앙선을 넘어서지 말라.
인도 캘커타에 가면 중앙선이 없는 도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동차들이 마구 달리는데 때로는 맞은 편 차가 내가 탄 자동차로 마주보고 달려올 때는 정말 아찔했다. 중앙선이 없으니까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금방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중앙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중앙선을 무시하고 뛰어든 차 때문에 대형사고가 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도로의 중앙선은 생명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도 생명선과 같은 중앙선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신6:24-25) 성경이 가르친 십계명은 그것 중의 대표적인 내용이다. 이 계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그 역할을 한다.(롬2:14-15)


그 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점차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니 문화의 진보를 운운 한다. 그래서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가정이 와해되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가 생기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그런 자유는 중앙선이 없는 도로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자유일 뿐이다. 금방 혼란스럽게 되며 결국은 위험으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급해도 중앙선을 넘어서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도 양심과 윤리의 선을 지켜야겠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선이며 그것이 우리 개인의 영혼과 가정과 사회를 지켜준다.


2.정지선에서 반드시 서라.
요즈음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통위반 딱지를 뗀다고 한다. 나도 가끔 정지선을 위반한 적이 있어서 마음이 쓰인다. 정지선은 중앙선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지키지 않으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진다. 정지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네거리로 나온 자동차들 때문에 파란불이 켜졌는데도 지나가지 못해서 교통이 엉킨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리고 정지선을 지키지 않으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된다. 그런 장면을 생각해보면 정지선은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지켜야 할 사랑의 선, 배려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 리의 삶에도 그런 정지선이 필요하며 그 선을 지켜야 한다. 정지선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는 선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나 생각을 절제하게 하는 선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마22:39)이나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마7:12) 이 바로 인생의 정지선이다. 이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 때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지듯이 서로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인간관계가 어려워진다. 이 정지선을 제대로 지킬 때 교통질서가 지켜지듯이 우리들의 삶에서 인간관계가 제대로 유지된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을 할 때 정지선을 인식하자. 정지선을 넘어서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을 절제하도록 하자.


3.차선을 자꾸 바꾸지 말라.
언제가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운전을 하는데 내가 가는 차선이 밀려있고 옆 차선은 비어있는데도 차선을 바꾸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울 같았으면 나는 물론 내 앞의 차들이 벌써 차선을 바꿨을 텐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고 좀 답답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서 차선을 자주 바꾸는 내 모습에서 그들이 누리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차선은 우리 삶의 여유를 지켜주는 여유의 선, 절제의 선이다. 


물 론 차선을 바꾸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차선을 바꿀 수 있는 선이다. 그런데 차선을 바꾸지 않고 여유 있게 달리는 모습과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차선을 바꾸는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우리 자신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물론 급한 일이 있을 때 차선을 바꾸면서 빨리 가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은 정말 아쉽다. 때로는 차선을 바꾸어서 열심히 갔는데 나중에 보면 그냥 한 차선을 따라 간 차보다 별로 앞서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때는 정말 머쓱하기까지 하다.


우 리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다양한 차선이 있다. 사람들은 빨리 성공하려고 차선을 자꾸 바꾸려고 한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28:19-20)”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면 그런대로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지면 그 차선만 따라가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자꾸 옆 차선을 보게 된다. 그래서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의 능력과 관계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다가 오히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리고 혹 돈을 벌게 되고 일이 잘 풀리더라도 삶의 여유를 잃고 살기 쉽다. 물론 꼭 차선을 바꾸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냥 한우물만 파는 것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선을 바꾸고 싶을 때마다 정말 바꿔야만 할 상황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무작정 빨리 가려고만 하지 말고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자. 


이 세 가지 선은 교통질서를 위해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운전하면서 이 세 가지 선에 대해서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이 세 가지 선을 항상 의식해야겠다. 선을 잘 지키는 것이 도로에서 안전하게 운전하는 길이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조근상] 요즘은 스피커 날라 줄 사람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이코스타 2005년 11월


오래 전에 이코스타에 ‘찬양을 이야기하자’는 타이틀로 잠시 글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찬양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별로 말할 만한 지식도 사실 내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내게 밑천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사실은 과연 누가 이런 유의 글에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요즘이다.


요 즘 우리 젊은 세대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찬양’이라는 음악 을 듣고 ‘워십콘서트’라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을 훠얼씬 더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도 청년 사역한다고 이들과 함께 어울린 날들이 꽤 지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만 드는 생각은 본인을 포함하는 우리 세대가 본질보다는 피상적인 겉모습에 점점 더 연연해 한다는 생각만 들어 한숨지을 때가 있다.


물 론 많은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어떤 ‘공부의 문화’보다는 단지 앉아서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누림의 문화’가 누구에게나 다 편한 상대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누림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고 어떠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면 남는 것은 의문부호뿐일 때가 많다. ‘WOW Worship’이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는 것처럼 정말 와우! 하고 한 번 외친 다음 그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는데? 물어보면 답변을 듣기까지 꽤 오랜 적막이 흐른다. 예를 들어서 느낌이 무지하게 좋은 워십 콘서트- 말하자면 조명도 기가 막히고 콘셉트도 좋았고 안개효과에다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회중들이 함께한 워십 실황-를 함께 시청하고 나서 연이어 있는 어떤 행사에서 섬겨 줄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크게 목소리를 높여도 자원봉사자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들 선약이 있거나 개인적인 일들 이 어찌 그리 많은지 이들과 깊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서울 하늘에서 가끔 별 들을 보게 될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기회가 되면 찬양팀에서 꼭 같이 싱어나 연주자로 무대를 장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시간을 위해 함께 스피커를 날라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은 그냥 스피커만 날라줄 사람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배 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만사형통인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인가. 아니면 우리 세 대에 유난히 눈에 띄는 현상인가. 혼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나 했더니 이미 다른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 세대를 연구하고 있었다. 최근 연합 뉴스에 실렸던 글이다.


“1990 년대 중반 ‘X세대’로 불리며 국내에서 세대 연구를 촉발시킨 2635세대(1970∼1979년생)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을까. 제일기획은 올 5월부터 7월까지 26∼35세 남녀 640명과 36∼45세 남녀 16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해 10년 전 X세대였던 2635세대의 특징을 담은 ‘우리 시대의 미드필더, 2635세대’ 보고서를 30일 냈다. 보고서는 현재의 2635세대가 △자기중심적(Individualized) △진보적(Innovative) △현실적(Into the reality) △ 유행 추구적(Inclined to fashion) △다양한 문화에 개방적(Inter-cultural)인 5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2635세대를 ‘5I세대’로 이름 지었다.”


아하! 바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네. 얼추 비슷하게 다 맞췄는데?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 국내 전체 인구의 17%, 경제활동인구의 24%를 차지하는 5I세대는 1970년대 경제성장기에 태어나 1990년대를 거쳤다. 정치적 안정(Integration) 정보화(Information Society) 다양화(Inter-nationalization) 외환위기(IMF) 자립(Independence) 등 ‘5I’의 시대경험을 공유한다. 해외여행이 자율화돼 ‘배낭여행 1세대 ’인 동시에 경제적 풍요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품을 소비한 ‘문화 향유 1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념이 약화된 뒤 대학을 다녀 386세대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집단 경험은 없다.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으로 방황하기도 했다.”


그 렇지 바로 그렇지 내가 두 눈 크게 뜨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8-90 년대의 일들이 쏜살 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나의 눈은 기사의 다음 구절에서 멈추고 만다. “자기중심적(Individualized) 가치관 = ‘우리’를 강조하는 386세대와 달리 2635세대는 ‘나’가 우선인 세대다.’사회규범보다 내가 원하는 바가 중요하다’는 질문에 54.2%가 긍정했으며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개성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물음에는 52.5%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같은 질문에 대해 386세대는 각각 45%만이 그렇다고 답해 차이를 보였다. 또 2635세대와 386세대 중 자기개발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각 각 36.1%와 26.3%로 조사돼, 2635세대의 자기중심적 성향이 자기 개발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첫 번째 I에서 어느 정도 나의 고민에 대한 가닥이 잡혀가는 느낌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진보적(Innovative)인 이성관ㆍ결혼관, 현실적인 소비관(Into the reality), 유행에 민감한(Inclined to Fashion) 세대, 개방적인(Inter-cultural) 세대,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한 풀이도 첫 번째 단추에서 다 호박 줄처럼 쑤욱 하고 연결이 되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동의하는 마음으로 끄덕이게 된다.


*기사 참조
( http://news.empas.com/show.tsp/cp_yt/soc00/20051030n00564/)


중 요한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를?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제일기획도 포기하지 않는 2635세대를 왜 내가 포기하나? 누구말대로 포기는 김장할 때만 쓰는 용어가 아닌가? 찬양을 좋아하는 소비자로서의 회중은 많아도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는 제자를 보는 것은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처럼 어려운 이 시대에 2635세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이러한 기사는 자연스레 기도문이 되고 만다.


” 하나님, 이 세대를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림은 알아도 섬김은 구경하기 힘든 이 시대에 국내 전체 인구의 17%,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24%를 차지하는 조국의 젊은이들을 섬기는 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현실적이고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개방적이면서 또한 자기에게는 보수적인 이 세대에게,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는 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글은 2005년 11월, 여전히 찬양을 이야기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가 서있는 현재의 주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