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코스타 2006년 1월호

내가 jjKOSTA와 인연을 맺은 건 2002년 봄, 그러니까 처음 코스타에 “조장 코스타” 라는 것이 생겨날 때였다. 어느 간사님의 부탁(?)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순종” 해서 시작된 섬김이 어느새 햇수로 5년째 접어들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코디”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생소했고, 미국을 10개의 지역 (처음에는 1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으로 나눈 것도, 각각의 지역에 인터넷 게시판을 링크해 둔 것도 조금 특이하게 생각되었다. 한번 미국 사람들이 jjKOSTA 홈페이지에 와서 자신의 나라 지도가 1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지역마다 주지사도 아니고 무슨 의원도 아닌 “코디”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 지역이 자신이 섬기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상상을 해보라. 미국이 가나안 땅도 아니고, 코디들이 12지파를 대표하는 이들도 아닐 텐데, 왠지 처음 jjKOSTA 홈페이지에 올라온 미국지도를 보면서 나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갈렙의 기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들곤 했었다. 10개로 나눠진 지역 중 내게 주어진 “땅”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스케일 작은 나에게 넓게 그리고 황량하게 느껴지는 땅이었다. 지도상의 색이 회색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땅은 넓으나 그 땅의 넓이와 영적상태는 반비례로 느껴졌던 건 왜였을까? 마치 감당하지 못할 것을 떠 넘겨받은 어린애처럼 잠시 멍하게 있던 나에게 문득 이 땅을 내게 주신 이유가 이 땅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에 산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10지역으로 “배당” 받은 주 (State) 중에는 솔직히 처음 알게 된 주도 있었다. 그 주들의 이름을 부르며, 지도를 보며 내게 맡겨주신 땅 (적어도 내게 맡겨주셨다고 생각한 땅)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영혼을 섬길 제자들이 일어나길, 그 제자들이 코스타 조장 훈련을 통해 일어나길 사모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코디로서 내게 주어진 지역을 섬기는 방법은 기도가 우선이었지만 구체적인 섬김은 인터넷을 통해 주로 이뤄져야 했다. 개인적으로 그 당시만 해도 인터넷과 친하지 않았고 (이메일을 일주일에 한두 번 체크할 때였으니^^), 한글자판도 사실 익힌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때라 인터넷 게시판을 어떻게 섬겨야할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섬기는 대상이 되는 조장님들의 얼굴도 잘 모르면서 인터넷으로 처음 인사하고 조장훈련을 편하게 받으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것도 처음엔 좀 막막했다. 내 성격이 그렇게 외향적이지도 않고, 또 인터넷을 통해 만나는 조장님들의 반응이 어떠실 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 반으로 조장님들께 한 분 한 분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단번에 답장을 주시는 분도 있었고, 여러 번 애원하는 이메일을 보내고서야 답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입장을 바꿔 나라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제가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섬기는 코디입니다” 라고 이메일을 보내서 조장훈련을 돕겠다며 게시판에 자기소개를 올리라고 한다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내하고 계속 시도하되 최대한 친절하게 부담 느끼시지 않게 섬기려고 했다. 때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에서 얼굴을 두껍게 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인터넷으로 먼저 소개하고 친해진 조장님들과 코스타에서 만날 때는 참 긴장되고 떨리기도 했다. 마치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러 집을 나서는 사람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만나기도 전부터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던 조장님들이었기에 코스타 기간 동안에 스쳐지나가다 얼굴만 봐도 참 반갑고, 위해서 기도가 나왔다. 조장님들이 코스타 기간을 통해 영혼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의 자리로 돌아가 제자의 삶을 계속 사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보내는 코스타 집회는 또 다른 은혜로 다가왔다. 또한 함께 코디로 섬기는 분들과 멘토님들을 인터넷의 “담”을 넘어 만나는 것도 기쁨이었다. jjKOSTA 게시판은 모든 지역이 통합된 게시판이 없기에 다른 지역 보드를 엿보기(?) 위해선 담을 넘어 (다시 jjKOSTA 홈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코스타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jjKOSTA게시판은 코스타 이후 한 달 정도는 집회의 여파로 그 흥분과 활기가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대체로 8월에 접어들면서는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코디가 게시판을 무작정 지키며 도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조용해진 게시판을 보면서 왠지 나도 덩달아 조용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인적이 드물다고 아예 문을 닫아버리면 어쩌다 지나가던 사람이 인사하려다가도 머쓱해서 돌아나가게 되지 않을까? 그 중에 오늘 하루 너무 지쳐서 말씀도 보지 못하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목마른 사람이 있다면, 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에 역사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그냥 돌아나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눠주세요.”라는 부탁의 이메일보다 내가 먼저 나누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제자로 살면서 또 제자 삼으면서 느끼는 것들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다. 캠퍼스에서 성경공부하면서 기뻤던 일, 마음 아프게 한 사람들, 감동시킨 이들,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서 배웠던 맑고 순수한 신앙, 가족들, 친구들과의 대화중에 깨달은 것들, 읽다가 힘을 얻었던 성경구절, 찬양, 시 등등…….


재밌는 것은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 주위에 일어나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더 주위를 기울이며 영적으로 민감해 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치 육아일기를 쓰는 엄마처럼 내 주위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 하나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묵상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기쁨이 참 쏠쏠했다. 작은 화분 하나에 습관처럼 물을 주다가 어느 날 꽃이 피게 되었는데 그 꽃이 나를 왜 흥분시켰는지……. 그저 ‘꽃이 피었다’, ‘예쁘다’로 끝날 수도 있을 일이 영혼을 섬기며 말씀으로 물을 주는 것과 연결이 되어 생각하니 어찌나 큰 깨달음을 주던지……. 때론 어느 분이 지나가면서 던진 말 한마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던 표정하나가 예사롭게 지나가지 않아 곱씹어 생각하다가 그것이 말씀과 연결이 되어 내 머리를 때리기도 하였다. 함께 성경공부 하며 섬기는 캠퍼스의 영혼들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느껴질 땐 그것이 너무 기쁘고 자랑하고 싶어 게시판에 써 내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가끔 올리던 게시판의 글들을 읽는 사람들이 내가 섬기는 지역 조장님들이었는지, 다른 지역 조장님들도 있으셨는지도 또는 내가 전혀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있으셨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내가 생각하는 청중은 다수가 아니고 어느 특정인도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다 내가 올린 글을 읽고 공감할 그 한 사람이다. 누군가 오늘 “좁은 문” 을 지나가다 지친 무릎을 내가 나누는 글을 읽으며 다시 일으켜 세워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섬기는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주기철 목사님의 얘기가 나왔다. 어느 형제가 그 분이 순교하지 않으시고 사셔서 말씀을 전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셨을 텐데, 하나님이 보실 땐 손해가 아니었을 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을 받고 문득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은 고작 33년을 사시면서 단 12명의 제자만을 두셨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므두셀라처럼 969세까지 살면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도 집회를 하셨다면 적어도 12명보다는 훨씬 많은 제자들을 두지 않으셨을까, 아니 제자들이 전할 필요도 없이 어쩜 전 인류가 직접 예수님을 통해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의 12제자가 또 제자를 삼고 그 제자들이 또 제자를 삼는 참으로 느리고 더딘 방법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다. 놀라운 것은 그 연약하게 느껴지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또 변색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jjKOSTA를 시작할 때 미국의 50개 주를 바라보며 감히 그 50개 주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꿈을 꾸며 땅을 나누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선포하던 갈렙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 갈렙들과 함께 “이 산지”를 바라보며 섬기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은혜이고 복이다. 그러나 그 산지를 정복하는 일, 즉 미국 전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인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일어나는 일은 오늘 그 “산지”를 품고 기도하며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한 사람의 제자에게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jjKOSTA 코디로서 내게 주어진 땅을 품고 기도하며 그 땅을 밟고 사는 이들의 마음에 제자의 삶을 풍겨주는 일. 그 일이 어느새 내 삶에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아져 있는 것은 나 같이 연약한 자를 통해서도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감을 확인하게 하시려는 그 분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한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와 기대 이론 (Expectancy Theory)

어느 국민학교에 참으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만이 모여있는 문제아 반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온 이후로 학생들의 성적이 불과 몇 달 만에 급성장을 이루었다. 교장 선생님이 이런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궁금하여 한번 그 여자 선생님을 불러 도대체 어떻게 하였길래 짧은 시간에 그렇게 좋은 학습의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느냐고 알아보았다. 그러니까 그 젊은 선생님이 하는 말이 내가 학생들의 아이큐를 적어놓은 표를 보니까 학생들의 아이큐가 모두 120-150사이인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런 아이큐 수준에 맞게 학습내용을 맞추어서 수업을 진행하였더니 학생들의 성적이 부쩍 올라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재미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젊은 선생님이 아이큐 수치인 줄 알고 학생들에게 수준을 높여서 교육시킨 바로 그 자료가 학생들의 아이큐가 아니라 학생들의 사물함 번호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하나의 우스운 이야기거리이지만 사실은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진리가 있다. 비록 선생님이 잘못 알고 한 것이지만 선생님이 학생들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들을 도전하였을 때에 학생들의 놀라운 학습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풀러신학교의 지도자학 교수인 클링톤 박사가 말하는 지도력의 이론 중에 “지도자 기대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이 말하는 것은 “추종자들은 자기가 존경하는 지도자의 진지한 기대에 부응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사람들을 훈련시키며 또 이끌면서 그들에게 정말로 기대를 가지고 하는가가 추종자들의 역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교육시키면서 정말로 사람들에게 진지하고도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기대를 가지고 하는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이점에 있어서 탁월한 지도자이셨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비록 당시의 기준으로 지도자 층에 속한 사람들을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가능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진지한 기대를 가지셨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는 사도 베드로를 보면 그가 당시의 사회 속에서 무시를 받던 어부였다. 그리고 그는 성격이 불 같아서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시몬”은 바로 이러한 그의 성격과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름과 성격을 가진 시몬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위”를 본 것이다. 강하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기초가 될 수 있는 인물을 보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초로써의 바위와 같은 인물을 본 것이다. 물론 시몬이 하루 아침에 베드로 가 되지는 않았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감정에 휩싸이고 서두르고 실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바위와 같은 견고한 사람을 기대하셨고 결국 베드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초대교회의 사도가 되어 교회를 이끌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믿어주고 기대를 가져주는 지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기대하고 믿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기대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자신을 믿어주면 그를 존경하고 자신을 믿어주는 지도자의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고 의심하고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하여 지도자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사역의 대상들이 혹시 좀 부족함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어주고 기대하면 결국은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비론 현재의 모습은 실망스럽고 때로는 우리를 좌절 시키는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갈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기대를 하고 사역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진지한 기대가 없이 현재의 실망스런 모습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향한 진지한 기대는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이다. 몰론 우리의 욕심을 상대방에게 투여하여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나의 욕심에 맞추어 버리려는 기대나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기술적으로 좋은 말을 해주는 유치한 차원의 처세술이 아니라 모든 실망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진지하게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지도자의 진지한 기대대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실망스런 현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대하여 진지하게 아름다운 기대를 가질 수가 있을까? 첫째,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눈으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금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고 할찌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맺어지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대를 하는 것이다. 현실에는 아무런 가능성의 흔적 조차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넘치는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셔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맺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기대를 갖는 것이다. 세째로 믿음의 눈으로 또 기도로 사람들에게 선한 기대를 갖는 사람은 그것을 향하여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대와 소망을 잃지않는 비젼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성도를 위한 기도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의 사역 가운데 그 기도를 모범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 속에서 사도 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바르고 진지한 기대가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든 사역자가 성도들을 향하여 이런 기대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겅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배소서 3:14-19)

[장이규]지도력에 대한 반발 이렇게 해결하라

리더가 소그룹을 섬기면서 자신의 리더십에 위기를 경험하게 될 때, 그 위기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리더의 자기 관리와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리더가 그 위기의 파도를 잘 타면 그 위기의 파도는 오히려 리더가 영적, 정서적으로 더욱 상승하는 기회가 되지만, 그 위기의 파도를 리더가 타지 못하면 파도에 휘 감기고 결국은 물에 빠지게 된다. 그런 면에서 리더는 앞으로 그의 리더십에 위기가 올 수 있음을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소그룹 리더의 리더십의 위기는 어디서 주로 오는가? 그것은 리더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에서 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리더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의 경우를 본다면, 첫 번째로 그룹 내에 있는 그룹 원들로부터 오는 내부적인 부정적 반응이다. 리더의 의견이나 방향에 사람들이 동의를 하지 않고, 다른 의견과 마음, 다른 비전을 가지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는 리더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는 경우이다. 이때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 권위의 신뢰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에 심적으로 부담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의 경우는 그룹 원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동조하는 다른 동료 지도자의 부정적 반응을 알 때 이다. 상황도 잘 모르면서, 그리고 리더 자신의 참된 의도도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그룹 원들의 의견만을 들어주고, 이에 동조하고, 상대적으로 나를 경계하도록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동료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혼자라는 외로움을 갖게 되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향한 의견이나 리더에 대해 부정적인 경우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는 섬김에 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때 소그룹 리더는 그의 섬김에 있어서 마음에 충격을 가지게 되고, 내면적, 외면적 갈등을 가지게 된다. 더 나아가 리더는 사역에 대한 위축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도력에 대한 반발의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주로 리더와 그룹 원들 간의 혹은 리더와 동료 리더간의 의사소통 (communication)의 결핍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충분하게 나누지 못하고, 이럴 것이라고 생각(assume) 하는 오해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혹은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다름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는 각기 다른 은사들을 통하여서 세워진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단지 이론이고 실제적으로는 리더십을 나눔에 있어서 적용이 잘 안되어 리더는 이러한 상황을 자신에 대한 리더십에 대한 반발로 착각을 하고 오히려 이것이 위기가 되고 사역의 위축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리더는 그룹 섬김에 있어서 리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기에 소그룹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는 각기 다르게 좋아하는 방법과 스타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스타일이 다른 것, 그들의 선호가 다른 것, 그들 나름대로의 요구와 기대가 리더와 다른 것은 잘못(wrong)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룹 내의 서로 다름(different)을 예측해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 가운데 서로의 다름이 오히려 창조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리더십에 대한 반발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리더는 이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


첫째, 리더는 무엇 보다고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하는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 무엇을 내 의견과 달리하고 있는지, 무엇은 동의하고 있는지를 정리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되어지는 상황을 리더가 단순한 감정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 상황에서 리더는 이 문제에 무엇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서 반발이 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 가운데서 리더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문제가 리더와 그룹 원의 누구와의 감정적이 차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온 부정적 응답이라고 하면, 리더는 그룹 원들과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가짐과 동시에, 감정의 순화를 위한 리더십 발휘가 필요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논리적인 차원에서 타당성의 문제에서 왔다고 하면 무엇을 어떻게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 할 지를 생각하고 또 의논해야 한다. 때로는 리더와 그룹 원들 간의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나아가는 방식의 문제인 만큼, 서로가 조금씩 양해를 하면서 하나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리더십에 대한 반발은 오히려 리더의 성장의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그룹 원들의 영적, 심리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둘째, 지도력에 반발하는 상황에서 리더는 섬기는 사역 목표 대상이 누구인지를 다시 점검 하는 것을 통하여 성장하라. 사람이 섬김의 초점이다. 소그룹 사역에 있어서 섬김의 목적은 사람에 있지 사역에 있지 않음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섬김은 사람을 위함인데 섬기면서 보면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늘 그 과정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리더는 섬김의 효율성에 그 초점을 두게 되고, 사람에 초점 두는 것을 소홀히 하는 실수를 종종 범하게 된다. 이 경우 리더는 관계성(relationship)을 다시 세우도록 시간을 창조해야 한다. 만남의 시간을 창조하라. 좋은 만남은 문제 해결의 키가 된다. 친교의 시간을 창조하라. 이를 통해 리더는 그룹 원의 반발을 이해 할 수 있게 되고, 그룹 원 역시 리더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차원에서의 리더십을 창조하게 된다.


셋째, 지도력에 반발이 생길 때 리더는 그룹 원들과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길로 인도한다.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일정시간 기도의 시간을 창조하라. 그리고 중보기도 팀에게 기도 부탁을 하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룹 기도 수련회를 가지라. 이렇게 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적절한 기도를 위한 정보를 알려 주라. 그리고 기도를 위한 방법을 알려주라.


넷째, 지도력에 반발이 생길 때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이 종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 모델 이 이었는지를 점검하라. 좋은 리더는 항상 섬기는 이들의 필요성(needs)을 분별하려 노력한다. 사람들은 모임 가운데 무엇인가 늘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필요성에 대한 응답을 기다린다. 그런 면에서 리더는 이들의 필요한 그것이 자신의 그룹에서 충족되어지고 있는지, 혹은 그들의 갈급함에 응답되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리더십을 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였다면 자신의 리더십이 그룹 원들에 적절하게 전달되지 못했음을 발견하고, 이에 리더로서의 태도 전환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리더는 성장의 계기를 창조하게 된다.


다섯째, 지도력에 반발이 생길 때, 리더는 자신이 어떠한 일을 결정하여 일을 추진할 때, 이로 인해 누가 도움을 얻고 누가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이제껏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혹은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누가 이 일로 인해 가장 큰 도움을 얻게 되는가 혹은 누가 가장 큰 소외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 일에 대한 부작용은 생각해 보았나? 충분하게 의논을 하고 이 일을 추진하는 것인가? 이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소외를 혹은 부작용을 가장 작게 만드는 길은 무엇인가? 누가 또 이 일을 알아야 하나? 등등의 질문이 있었는가를 점검 해 보아야 한다. 리더가 어떠한 사역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어서 소외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소외되는 부분에서 리더의 리더십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는 이 반발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자신의 리더십에서 소외되었던 상처 부분에서 나오는 음성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노력 속에서 리더는 새로이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여섯째, 리더는 지도력의 반발이 생길 때, 이 문제가 리더 자신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닌가를 점검해야 한다. 지도력의 반발은 리더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 부족에서 오기 때문이다. 소그룹 리더에 대한 신뢰 기초는 무엇보다도 소그룹을 인도하는 능력에 있다. 사람들을 인도하는 기술이나, 리더의 확신 있는 믿음, 혹은 리더의 성실성 혹은 도덕성, 리더의 진실성과 개방성, 때로는 리더가 말한 것을 이행하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통하여서 그룹 원들은 리더를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에 있어서 하나 씩, 하나 씩, 리더십을 인정받지 못할 경우 리더에 대한 신뢰는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지도력에 반발이 생기게 된다. 이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리더는 자신의 자존심의 싸움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리더의 반응은 ‘겸손’ 이어야 한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함과 동시에 리더 자신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소그룹 내에서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 리더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성숙화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때 그룹 원들은 반발 보다는 오히려 리더의 연약한 점을 인정하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자신이 채워 줄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그 부분에 관한 섬김의 자리를 찾게 된다. 동시에 리더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전환의 계기가 열리게 된다. 이를 통해 리더는 새로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리더는 지도력의 반발이 생길 때, 이 문제가 그룹 원들의 헌신에 대한 리더의 감사 표현과 격려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닌가를 점검해야 한다. 흔히 지도력에 대한 반발은 새로 참여한 그룹 원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랫동안 리더와 함께 섬겨온 동역 자들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리더에게 있어서 큰 충격을 안겨주게 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상심을 가져온다. 때로는 리더에게 무력감까지도 가져오는 결과를 준다. 이때 리더는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섬겼던 동역 자들 마저 주저앉게 된다. 오히려 리더는 함께 사역한 이들의 반발이 있을 때, 그 동안 그룹 원들이 시간의 압박 속에서도 섬겨온 충성에 대해, 리더 자신의 돌아봄과 격려가 부족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너무 일 지향적(work-oriented)이지 않았는가? 이들의 섬김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았는가? 를 생각하라. 그로 인해 그 동안 리더는 잃어버렸고, 무감각해진 감사와 격려의 표현을 회복시켜야 한다. 때로는 리더 개인의 시간을 나눔으로, 때로는 작지만 정성스런 마음의 나눔 등등을 통해, 리더의 감사와 격려가 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해야 한다. 이를 통해, 리더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은 리더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고, 리더는 공동체 내에서 새로운 리더십으로 세워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도력 반발에 직면할 때 리더가 풀어가야 하는 것은 문제요, 살려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방선기] 내가 좋아하는 말씀 -로마서8:28


돌이켜 보면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악몽 같은 일이 기억난다. 대학시절에 연애를 하다가 몇 번 여자들에게 채인 것이다. 그때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혼자 끙끙댔다. 아마 그때 술을 마실 줄 알았다면 엄청 술에 취했을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니 말이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조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말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던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던 성경구절이 하나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일어난 일들이 불행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그 일 때문에 혹은 그 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한 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절망에 빠져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말씀인데 그것이 내 마음에도 다가왔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현재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일이 나중에는 오히려 합력해서 유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 당장 내 마음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때부터 당한 현실을 새로운 각도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누군가 만나게 될 텐데 그 여자가 내게 훨씬 적합한 여자일 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에 나를 찼던(?) 그 여자와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25년간 잘 살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나를 보면서 그 말씀이 내 생애에 그대로 적용이 된 것 같다. 지금 내 아내가 내게 가장 어울리는 여자이며 그 아내와 한번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더욱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를 위기 가운데 구해준 말씀이 그 후에도 여러 번 그 효력을 발휘했다.


유 학시절에 신학교 공부를 마친 후에 박사코스를 공부하기 위해서 몇 학교에 입학신청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이유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일이지만 모든 학교에서 거절 내지는 다음 해로 연기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 정말 충격이 컸다. 더구나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학금까지 준다고 했는데 나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다른 학교들에 입학을 신청하기에는 시간도 늦어져서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내게 다가온 것이 바로 이 성경말씀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는 순간 절망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기대를 하게 되었다. 이 말씀을 따라 기도하면서 교수 한 분과 의논했다. 그 교수가 딱하게 생각하면서 입학신청마감시간이 아직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학교 중의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그 학교가 내가 먼저 입학신청서를 냈던 학교보다는 한 등급 위의 학교이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곳에 입학신청서를 내고는 정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느 날 그 학교에서 입학이 허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이란. 그 교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날보고 행운아라고 했다. 처음 신청한 학교에서 거절당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좋은 학교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이 롬8:28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이 말씀은 종종 작용을 했다.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또 한 번 위력을 발휘했다. 귀국해서 기독교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 너무 즐겁게 또 보람 있게 일했는데 단체 내부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실직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부될 수 있다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올라갔었다. 내 딴에는 무언가 해결책을 찾으려고 기도원엘 갔는데 일주일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했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답답해 할 때 다시 한 번 이 말씀이 찾아와서 내 마음을 두드렸다. 물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의 내 삶을 돌이켜 보면서 롬8:28의 약속은 결코 헛소리가 아닌 것을 실감한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