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기]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


우리의 전통적인 말 중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우리 옛사람들의 직업관과 재물 관을 보여주는 말이다. 지금도 종종 사용하는 말로서 얼핏 들으면 멋진 말인 것 같지만 성경적으로 따져 보면 양면성을 지닌다. 


“개 같이” 버는 것을 부정한 일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부정하게 번 돈은 아무리 좋은 일에 사용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크 리스천으로서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해서 번 돈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도 그 돈이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구나 떳떳하지 않은 일을 포장하기 위한 헌금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적으로 돈을 세탁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떳떳하지 않은 일”이 어떤 일인가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는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우리 사회의 법적에도 저촉이 되는 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해당된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크리스천의 양심에 거리끼거나 덕이 되지 못하는 일들도 해당이 될 것이다. 유흥업이나 도박 등과 관련된 일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좀 더 예민하게 따져본다면 로또에 당첨된 돈이라든가 투기를 해서 번 돈 같은 것도 그런 범주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크리스천 직업인들에게 “정승같이 쓰라”는 말을 성경적으로 적용해서 헌금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것 못지않게 그것이 “개같이 번 것”인지를 지적해 줄 책임이 있다.


그 러나 “개같이”버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이른 바 “3D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말은 아주 성경적인 말이 된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4:12)” 크리스천들이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비록 사회에서 별로 존경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라도 괜찮다는 말이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런 일도 주께 하듯 성실하게 임해서 돈을 번다면 그 돈은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돈이 된다. 물론 그 돈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면 당연히 정승같이 쓰는 것이 되겠다. 사실 할머니가 김밥을 팔아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할 때마다 그 분이야 말로 정말 돈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셨다고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요즈음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청년 실업”인데 엄밀히 따지면 이 말은 청년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들 돈 많이 버는 일,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 장래에 안정이 보장되는 직업들에 몰리다 보니까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덜 벌더라도, 조금 불안정하더라도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고, 경제적인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일에 일단 뛰어 들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천들도 사회의 보편적인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제 교회는 크리스천 젊은이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개같이 벌라”는 도전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이 말의 양면성을 생각해보니 크리스천의 자세가 분명해진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결코 개같이 벌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사회의 통념적인 면에서는 개같이 벌어야겠다.

[이유정] 거룩한 영적 낭비

이코스타 2006년 4월

2006 년 코스타에서 자주 들었던 문구 중 하나가 “영적 낭비”이다. 30명이나 되는 많은 강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영적 포텐셜에 비해 일주일 동안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주강의 한번, 또는 강의 몇번에 상담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례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비, 가족 등록비까지 책임지고 자비량으로 섬기는 것이다. 언듯 보면 일리가 있는 말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 연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달려 오신 강사들의 경우는 거의 10일 가량이 강의 몇 번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것을 낭비가 아닌 거룩한 투자로 본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다. 명령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사막길로 무작정 떠나라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고 있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고, 아직 회심 이전의 사울은 보이는 교회마다 파괴하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복음전도 사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으나,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세워야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대의 위기였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는 것은 시간낭비는 물론, 뻔뻔스러운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태풍으로 교회가 침수되어 정신없을 때 교회의 지도자가 갑자기 성령께서 지시하신다고 먼 시골로 떠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다. 사막 길에서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 밑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큰 권세를 지닌 내시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까지 주게 된다. 이 내시는 분명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를 깃점으로 빌립도 나타나, 카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에서 복음을 전한다. 때때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못미친다. 이사야 55:8,9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했다. 코스타에서는 4번의 저녁집회가 있다. 미주에서 경험하기 힘든 천여명의 예배자들이 드리는 감격의 예배의 향연이 매일 저녁 드려진다. 1,000여명이 뛰면서 드리는 열정적인 찬양과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상상해보라. 그 안에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소명, 평신도와 목회자, 교파와 교회, 세대 간의 문화를 초월한 진정한 찬양과 예배의 축제가 드려진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진정 천국의 모형 아닌가? 이 예배를 통해 올해도 100여명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200명 넘게 2년 이상 단기선교에 헌신했다. 그뿐이 아니다. 성인 참석자 반이나 되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강사들과의 1:1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는 최고의 상담실이 코스타 내내 운영된다. 우리 인간 편의 ‘낭비’가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결실’로 바뀌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유학생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이처럼 1세대가 자신의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눈물과 땀과 사랑을 투자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포기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미지의 땅을 향해 회중의 5분의 1이 자리를 박차고 무대위로 나아가는 그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보았는가? 2006년 현재 전세계 16개 지역 즉, 남미, 러시아, 남유럽, 북유럽, 토론토, 벤쿠버, 시카고, 인디아나 폴리스, 북경, 상해, 동북차이나, 일본, 대만,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에서 이 ‘거룩한 영적 낭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21년 전, 이처럼 말도 안되는 ‘영적 낭비’를 감히 꿈꾸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우리의 1세대 영적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영적 축제는 지금까지 이땅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그분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