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소그룹을 통한 제자의 삶

이코스타 2006년 5월호

항상 그래왔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거나 준비해야 할 때 변함없이 내 자신에게 나의 자격과 능력에 대해 질문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볼 때, 늘 실수투성이고 부족한 내 모습 가운데 역사하시고 인도하셨던 그분의 손길을 다시 한 번 내 마음에 되새겨 본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거룩한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내게 있었다면 ‘제자의 삶’ 이였던 것 같다. JJkosta를 통해 가서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음을 발견했었지만, 내성적인 나의 성격으로 말씀을 전하고 외치는 삶이 크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늘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다가 내게 용기와 결단을 하게 해 주었던 것이 작년 3월 조지아 주에서 있었던 gpkosta이었다. 그 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준비하여 드디어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일이 KBS(Korean bible study)모임을 통해 시작되었다.


6명의 자매들과 QT 훈련과 나눔을 시작으로 말씀 모임이 시작되었다. 말씀의 기초가 없었던 자매들이여서 어떻게 하면 내게 허락하신 이 소그룹을 통해 효과적이고 건강하게 제자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 같다.
우리 모두가 구원의 대상자들이어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며 변함없이 영원토록 오늘도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더욱 사랑하는 지름길은 기도임을 발견했다. 기도는 그분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 모임과 제자 삼는 삶의 열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다. 한 영혼, 한 영혼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할 때,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김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각 영혼에 대한 눈높이 사랑으로 맞추어 갈 수 있는 훈련이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매, 감정 기복이 심하던 자매, 주제와 늘 어긋나게 대화를 이끌어 갔던 자매 그리고, 말씀이 어렵다고 투덜거리던 자매에게 나의 원래 모습과 감정과는 상관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 영혼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진정 섬기고 사랑하는 귀한 훈련이 되어가며 나를 더욱 성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제자의 삶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것을 우리는 다 알지만, 마음으로 느끼고 헌신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는 우리 모임의 꿈과 목적은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는 삶이었다. 나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을 때 비로소 내 안에 얼마나 말씀이 부족하고 지식이 없는지 깨닫게 되어서, 말씀을 더욱 붙잡고 씨름하며 고민하며 나중에는 더욱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입장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각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은혜를 부어주시지만, 말씀을 알고자 배우고자 갈망하는 모습들을 점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갈망할 때 비로소 말씀에 지배되며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섬김과 순종의 삶을 보여 주신 것처럼, 말씀을 인도하는 입장에서 내가 먼저 말씀에 순종하고 반응하는 삶을 보여서 그들에게 말씀에 대한 오묘한 맛과 능력을 증거하고 싶었었다. 말씀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삶을 다스리며 조정 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말씀이 내 삶을 흔들 때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고민하게 되고 결국은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 영혼씩 말씀에 귀를 기울여갈 때, 조금씩 반응하며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봤을 때 더욱 기쁜 마음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용기가 더욱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소그룹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며, 양육하고 돌보며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참된 종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영혼을 품고 사랑하며 말씀으로 함께 뒹구는 시간들 속에 함께 일하셨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여유와 믿음으로 제자의 삶에 더욱 헌신하며 씨앗을 뿌리는 삶이되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4-5)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자기성장 프로젝트 (Self-growth Project)”

퓰러 신학교의 Robert Clinton교수는 성공적인 삶을 산 지도자들을 연구하여 일곱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전 삶을 통하여 배우는 자세를 견지한다(Effective leaders maintain a learning attitude throughout life)”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 주위의 효과적인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진리이다. 지속적인 배움의 자세는 특별히 급변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도자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자질이기도 하다. 내가 대학교 다닐 시절만 하여도 대학교 교수님들 중에는 때로는 매년 같은 노트를 강의실에 가져와서 읽던 교수님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발전하지 않는 교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왜 지도자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현재 놓여있는 곳에 안주하여 그것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태도보다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삶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였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측면을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 삶의 다른 분야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자만과 나태에 빠져 그것에 안주하고 머문다면 현재 우리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할지라도 곧 영향력이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현재 부족한 상태에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배우고 연구하고 발전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가가 아니라 현재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둘째,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인데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큼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지도자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으면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나 단체도 성장할 수가 없다. 좋은 영향력 그리고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 지도자 자신이 먼저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 된 뒤에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성장 계획(Self-Growth Project)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인 교육 전문가인 Malcolm Knowles는 성장 계획을 성인 학습자가 전 생애에 걸쳐 성장하는데 주요한 수단이라고 말하였다. 성장 계획은 “성인 학습자가 자신의 삶의 특정 분야에 대해, 개인적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된 학습을 통하여 성장을 가져오도록 고안한 노력”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달성 될 수 있으며, 그 달성 후에 평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주로 어렸을 때 학교를 통하여 교육 받는 것은 다분히 수동적인 교육이다. 교육의 내용도 교사에 의하여 주어지고 그대로 따라가는 교육이다. 왜냐하면 어떤 교육의 내용이 필요한지도 스스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또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성장 발전의 필요도 다양해지고 스스로가 자기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분야를 파악하고 주체가 되어서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래 서 스스로 필요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성장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단기간 동안 실행하며 스스로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혼자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학습하는 것을 처음으로 익힌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는 학교공부를 따라가는 것이나 자신을 위한 학습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학교를 마치면서 대학원을 진학하기를 원했는데 그 당시에 우리 학부 과정에서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의 숫자가 대학원 정원의 숫자보다도 많았다.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 보다 우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공부하기 시작 하였다. 주로 그 당시에 우리의 학습방식은 영국 미국의 많은 소설들을 읽기 위하여 두 세 주에 한 권 가량의 책을 읽어오기로 한 것이었다. 대학생활 때라서 놀기도 바빴지만 스터디 그룹의 내용을 따라가기 위하여 밤을 새워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과정을 통하여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영어 원서를 사전을 찾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배웠다. 이 습관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나 스스로 현대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혼자 꾸준히 학교 공부에 상관없이 두 세 주에 한 권 씩 원서로 책을 읽었다. 이 때 독서를 통하여 현대 사상의 흐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또한 이 때 책 읽는 습관이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할 때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미국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학교공부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으므로 개인적으로 따로 공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선교학 석사과정을 할 때에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또 지도 교수님의 안식년으로 학업을 진행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때 다시 혼자 학습을 많이 하였다. 그 때는 주로 신학 책과 주석 책을 많이 읽었다. 미국에 와서 신학 과정에서 신학에 대한 기본 틀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나 스스로의 신학을 정립하기에는 힘들었는데 혼자 학습하는 시간을 통하여 나 나름대로의 신학을 정립해 갈 수가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나의 삶이 진척되지 않고 있어서 힘들었지만 사실은 나의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장기였다고 생각을 한다. 나름대로의 신학과 성경을 보는 안목이 생긴 시기였다. 그 후에 박사과정을 하면서도 학위공부와는 관계없이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소그룹 멘터링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당시에 멘터링을 통하여 글쓰기, 독서하기, 교수법, 예수님의 비유이해하기, 시편연구하기 등의 내용을 배웠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강의 초반부는 아무래도 강의 준비를 위한 내용들을 공부하는데 초점이 많이 있었다. 이미 학습한 분야에 대한 강의는 내가 추가로 조금만 연구하면 되지만 전혀 새로운 과목들은 새로이 공부를 했어야 했다. 학교의 필요에 따라 강의해야 하는 과목들을 위해서 공부를 하면서 가르쳤다. 동시에 학교 강의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도 있었지만 나 나름대로 필요를 느끼는 분야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학습하였다. 그러면서 최근에 관심을 가진 분야는 주로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와 현대 신학에 대한 학습이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하여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지도력의 분야에서 일반 지도력 이론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 외에 스스로의 계획 아래서 발전하기 위하여 학습하고 배우는 부분은 실제 지도력의 실행에 관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지도력을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사역의 현장 속에서 익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효과적인 교수법, 단기선교나 월드 미션의 밤과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법, 학교의 비전을 세우는 법, 학교의 평가 작업과 그것을 계획 속에 반영하는 법, 예산을 세우는 법, 모금을 하는 법, 회의를 진행하는 법, 사람들을 관리하는 법, 등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주로 이런 일들은 이론적인 것을 배운 다기 보다는 실제로 일을 하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또한 개인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수영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과업이다. 올해 특별히 익히려고 하는 기술은 인터넷으로 강의를 하는 방법을 익히고자 한다.


클린톤 교수에 따르면 효과적인 성장 계획을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 배우고 성장하려는 깊은 열망이 있어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요구가 아닌 스스로 동기 부여된 행동이어야 한다. 둘째, 학습의 목적을 도달하고자 선택한 학습수단에 헌신 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다고 해도 목표한 것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주어진 한정된 시간 안에 실현 가능한 계획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큰 계획을 세우면 뜻은 좋지만 주로 작심삼일로 끝을 맺게 되는 경우가 많다. 넷째 경험이던지 학습이던지 관찰이던지 최선의 학습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성장이 필요한 부분에 적절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다섯째, 실제적으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상의 계획이 필요한데 너무 길면 도중에 포기하기가 쉽게 되고 너무 짧으면 계획을 온전히 수행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습한 내용에 대한 평가와 삶에 적용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채찍질할 수 있는 습관은 지도자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가? 이제 나이도 많은데 무슨 공부를 하나?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가? 어떤 분야에서 성장의 필요를 가지고 있는가? 컴퓨터, 인간관계, 자녀 교육, 전문 기술, 운동과 취미 생활, 다양한 성장의 필요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까? 학습을 통하여 혹은 관찰을 통하여 혹은 경험을 통하여, 아니면 그냥 포기해 버리고 있는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김두화 목사

이 세미나는 2001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님의 강의 내용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이 세미나는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갖느냐라는 주제의 세미나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주제가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 Gospel이라고 하는데요.

먼저 세상에 있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죠. 세상에서 기쁜 소식이라는 어떤 것이냐, 공통적으로 다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기를 갖는다는 것, 매우 기쁜 일이죠. 우리 교회에 애기를 기다리다가 갖게 되는 경우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갑니까? 밤잠 못자고 짜증나서 어떤 때는 아기도 집어 던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연애시절 너무 좋죠. 결혼하면 허니문 기간이 얼마나 가나요? 여기 와서 고생하며 학위를 땁니다. 학위를 따면 기쁘죠. 그러나 얼마 안 갑니다. 새로운 차, 새로운 집, 잠깐 지나면 또 다른 집, 또 다른 차가 나옵니다. 진급했다, 샐러리 올랐다 기쁩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갑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이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흘 만에 죽은 후에 갑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때 반가움도 있었지만 서운함도 있었습니다. 주님 왜 이제 오셨습니까?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사흘은 혹시 모르지만 나흘은 너무 늦었습니다. 왜 더 일찍 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앞으로 부활할 것은 알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시면서 ‘나는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기독교의 핵심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믿는가가 확실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해야지 막연하게 교회 왔다갔다하면 되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백 속에서 I’m sure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내가 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는 이 몸을 떠날 때 죽음 저편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저는 이 확신을 의외로 갖고 있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뭔가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에 대한 배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내가 죄사함 받았는지, 내가 죽으면 천국갈 수 있는지, 주님이 오늘 오시면 들림받을 수 있는지 불확실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교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부터가 그랬었습니다. 저는 원래 교회 다니는 집안이 아니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제사가 다달이 있었고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굿하고 복 나간다고 못하는 일도 많은 그런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제사 안 지내면 집에 액운이 있다고 두려워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뭔가 그곳에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제가 보니 교회 나가시는 분들이 뭔가 다른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교회 생활에 충실히 했습니다. 교사생활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교회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제 일주일 생활이 교회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새벽기도 한번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를 만나서 ‘학생, 지금 예수님 오시면 들림 받을 수 있어요’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매우 불쾌했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돌아서 오는 마음에 뭔가 의문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왜 이런 두려움이 있는가? 왜 아직까지 흔들림이 있는가? 신비한 체험도 있었고 경험도 많았는데 왜 이런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처럼 표현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런 혼란 속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그런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시기 바라고 주위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을텐데 이런 분들을 여러분들이 도와 주실 수 있는 지식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나는 부활이다’ ‘죽어도 산다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가 죽습니다. 그런 육체가 부활함을 얻게 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것입니다. 썩지 않을 육신을 갖고 다시 살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 대한 확신을 성경적으로 갖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듭남, born again, 다시 태어난다, 중생, 회심 이런 단어들이 사용됩니다.


정의를 내려본다면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전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걸어가다가 삶을 살아가다가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것이 죄의 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십자가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지불해주시고 죄값을 지불했다는 증거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가지고 부활하셔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확증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비우셨습니다.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분을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와 함께 하나님을 벗어간 길을 걸어가던 피조물이, 양처럼 그릇되어 가던 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사건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과 Personal and wholesome relationship을 갖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더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다, 구원받은 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사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인간적인 선행이나 지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이 아니에요. 그것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번째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나옵니다. 죄사함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받을 것이 아니며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내가 볼 때는 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완전히 의롭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 “진실로 내 말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지금 내가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personal relationship을 갖는다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삶이 영생이고 그것을 영원히 갖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보면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었고 누구든지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네번째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지으시고 인격을 주실 때 지정의를 주셨습니다. 지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은 미를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의는 의지의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하나님의 숨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는 순간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탄과 인간과 대립하는 순간이 있죠. 인간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만은 먹지 말아라, 이것은 사랑의 약속입니다. 먹는 순간 죽을 것이다. 그날 죽는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900년 동안 살았죠. 그러면 이때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았다는 것, 죽었다는 것은 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한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조직적, 구조적 죄만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영접한다고 할 때는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영으로 들어오십니다. 성령으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마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바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부는지 모르는 것같이 거듭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내속에 들어와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령의 세례 baptism of holy spirit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성경적으로 제가 볼 때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신비하게도 하나님의 몸의 일부가 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기적이에요. 어떤 사람은 드라마틱한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냉정한 가운데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가 신앙하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오시고 그 때부터 영원히 내 안에 계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내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이 얼마나 나를 지배하느냐를 볼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7, 고린도전서 3장 16절 이런 구절을 통해서 이미 나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예배당의 빌딩이 거룩한 성전이 아니에요. 성전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은 성전이 되는 거에요.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죄사함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이 거하십니다.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보시는 거에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새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 가졌던 개성, 지성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보아주시고 그렇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못 볼 때 혼동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네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의 외적 증거, 성령의 내적 증거, 성도들의 외적 내적 증거, 성별된 삶의 외적 내적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경말씀이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고, 구원을 받은 자는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인데. ‘너희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을 모른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저는 그 말씀에 망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솔직하게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썪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들에게 … 영생을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지금 내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말씀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는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얻었나 깨달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영생을 갖고 있나, 중생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거하시고 그 성령이 증거해주십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6장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요한일서 3장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이분이 우리에게 주관적인 증거, 개인적인 내적인 주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도들의 내적 외적 증거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이 기쁨의 삶이에요. 즐겁고 좋은 날씨에만 기쁜 것이 아니라 먹구름 아래서도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성도들 간의 교제가 즐거워집니다.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 내가 달라집니다. 진정 구원을 받으면 성령을 통한 교제가 이루어져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 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런 성도간의 교제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 요한일서 4장를 보십시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은 나와는 다르지만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변화를 점점 느끼는 것입니다. 주관적 객관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네번째가 성별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성별된 삶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전에는 행동이 아주 쉬웠어요. 이제는 내가 뱉은 말, 행동 이런 것들 지나치지 않을까 조심해야지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가 구체적으로 조금씩 생긴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옛 성깔 ‘내가 왜 이래’하는 것이 아직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이 지체가 아직 나를 괴롭혀요. 나의 자아가 점점 주님을 닮아가면서 작아져가는 거에요.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 변화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이것을 계속해서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이하에 그 의미가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말을 그만 두는 것뿐 아니라 진실된 말을 하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분을 낼 수가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모르고 있는 것조차도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화해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삶을 다스릴 때 이런 변화가 하나 둘씩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에게는 용서와 화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도둑이 도둑질을 멈춘다고 도둑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행동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는 이런 변화가 조금씩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번째 특별한 경험을 추구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구원받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파에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디모데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는 모를 수 있지만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다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경험, 기적이 구원의 증거가 아니고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증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서서히 깨달아 가는 수가 있습니다.


앞에 기차가 가는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기차는 믿음입니다. 앞에 나아가는 팩트를 믿을 때 감정이 따라갑니다. 사실, 믿음, 그리고 감정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앞세울 때 뭔가 된 거 같다가도 또 생각이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인격적인 삶의 현장에 왔을 때는 불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세요. 말씀을 바탕으로 이지적으로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증거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방황 속에서 교회를 떠나서 세상에서 찾다가 마지막으로 조이 선교회에 영어를 배우러 나갔습니다. 영어를 배우면서 사람들이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보겠다 하고 마지막으로 수양회에 따라 갔습니다.


들어가면서 나는 절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이렇게 결심하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저는 자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마지막이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평화를 되찾는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메시지를 들으면서 저를 많이 되돌아보겠습니다. 허물에 사함을 받고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에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저는 아니다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날 왜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1970년 1월 예수님을 거듭하면서 저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때는 사실 저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영접하고 나서 내 인생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나를 얼마나 학대했는지 몰라요. 공손하게 종교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너무 싫었어요. 공부해서 뭐하겠는가. 가와나리 야스나리 설국이라는 책을 쓴 작가, 자살했어요. 일주년 추도식에 그 소설을 읽던 한 학생 또 자살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자살하고 정치인도 자살했습니다. 자살을 각오했을 때 굉장히 비판적이고 냉정하게 있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주님이 알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것 그것을 모르고 아직도 뭔가를 더 보탤려고 하고 있는 것이 그날 처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불신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 그저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 추구하고 회개하고 다시 실패하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험은 개인적입니다. 경험 위에다 신앙을 쌓으려고 하면 경험이 바뀌어질 때마다 교리가 바뀌게 됩니다. 말씀을 우선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경험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 자체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본 천국, 이 책이 잘못된 성경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경험은 점진적입니다. 기는 애가 있고 뛰는 애가 있는데요, 기는 애가 뛰지 못한다고 실패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것으로 증거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극동방송 상담실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5시간 상담하는데 4시간 동안 저에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리고 나서 잠깐 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 그러시더니 주체를 못하고 우시는 겁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비로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접할 때 깊은 감동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조용한 가운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깨달음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불신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사람을 죽인 자도 살인입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자이고, 실제로 간음한자도 간음자에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지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내가 누구인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죄를 깨달을 때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믿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죄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은 구원 후에 올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점점 그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합니다. 커가면서 알게 되지요. 나중에 부모가 되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구원받고 나서 이 사랑이 너무 감격하고 고마운 거에요. 성화라는 것은 죄를 더 깨닫고 죄를 더 미워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를 깊이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자신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구원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큰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떤 믿음을 가져야하는가. 구원받을 때 큰 믿음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열 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이죠. 어떤 사람은 문설주에 피를 아주 많이 발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적당히 발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많이 눈에 확 띄게 발랐습니다. 믿음의 사이즈가 한 사람은 좀더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크기가 구원에 영향을 주었나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양의 피를 의지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우리가 믿는 믿음은 어쩌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보혈을 의지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피를 의지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번째 자신이 내린 결정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살펴볼 때 결심이 작심삼일이었고 또 지나니까 그냥 그렇고 그래서 구원에 확신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결심은 우리를 상대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날 때 하나님과 함께 내리는 결정입니다. 내가 의지했던 분은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죄를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에 믿음을 두는 한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의지함으로 나는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만일 죄를 범하면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불순종할 수 있으나 구원이 취소되고 아들 딸 된 것이 취소되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죄로 정직하게 고민하는 것, 죄 때문에 갈등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서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설 수 있는 그 사랑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들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제가 막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거듭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신분 자체를 변화가 없는 것이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그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비추어 내가 거듭났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경 두 곳을 찾아보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10장 17절, 주님께서 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고 영원히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주님이 이 손을 잡았습니다. 주님이 잡았고 여러분이 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로마식 인사였습니다. 가끔 여러분은 이 손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놓을 수가 있어요, 확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다시 잡으면 됩니다.


이것까지도 십자가로 용서해주심을 감사하고 다시 잡으면 됩니다. 신앙이 자라면서 이 횟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이 멈출 때가 있겠죠. 이 몸을 벗어날 때입니다. 영원히 보장된 구원이에요. 힘있게 잡는 것입니다.


내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 (4)

소그룹 리더의 탈진을 방지하고 지속적으로 섬기게 하며, 재생산을 이루게 하는 리더의 자기 관리 방법 두 번째는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리더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 물어보자.


둘째 질문: 올해 나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올해 나는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이 두 번째 질문은 리더로 하여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현재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를 점검하게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는 리더는 자신의 탈진과 허무감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가 있으나,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 않는 리더는 섬김 가운데 중간 중간 다가오는 탈진과 허무감을 벗어날 수 있는 무기가 상대적으로 없는 것이다.


전쟁 이론가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ON WAR (전쟁론) 에서 이야기하기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목표라 했다. 그리고 이 목표가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지에 대한 승전 전략의 청사진(draft) 을 제공하며, 더 나아가 이 목표가 정해져야 승리를 위한 여러 행동(actions) 들이 나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목표 없는 전쟁은 무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 전략이 세워지지 않았기에 전략적으로 다가오는 적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올해 이루고자 하는 삶의 목표는 올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재 어디까지 왔는가? 무엇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인가? 등을 점검하고 그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을 다시 세우도록 하는 힘이요 방향성이다. 올 한해 목표는 현재 섬기는 이 소그룹 사역이 나의 올해 목표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올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게 하는지를 일 년이라고 하는 큰 그림 속에서 보게 한다. 더 나아가 섬김 가운데 어려움 일이 생길 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기거나 화를 복으로 바꾸려는 애씀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올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그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내가 이까짓 것 하지 않지. 시간 없으면 그만 두지. 내가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등등의 소극적이고 비판적이며, 회의적인 환경이 어려움이 생길 때 마다 우리의 감정과 영성에 생기게 된다. 밭을 갈기 위해서도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앞으로 나갈 때 삐뚤지 않고 곧은 골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고 하면 가는 길도 바르지 않게 되거니와 중간에 돌과 같은 장애물이 생기면 가던 길을 쉽게 포기하고, 길을 돌아가 방향이 바뀌어 지는 것과 같다. 목표가 없으니 아무데나 가게 되는 것이다.


힘과 용기 그리고 기쁨은 가치 (value) 속에서 나온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치 있는 일이 면 이마의 땀을 씻어가며 기뻐한다. 가난해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기뻐하는 것이다. 젊은 날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의 고생이 내일의 복으로 변화 되리라는 가치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일하면서도 힘이 들고, 어려움이 생기면 더 이상 일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다. 올해 리더 자신 삶의 목표가 있을 때 그 목표 속에 오늘 섬기는 소그룹 사역에 가치가 평가되어지고. 그 가치 가운데서 힘과 용기, 기쁨이 솟아나 능히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리더는 하나님이 왜 올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시간과 공간, 건강을 주신 이유를 반드시 묻고 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대답이 오늘 리더의 탈진을 방지하고 지속적으로 섬기게 하며, 재생산을 이루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세 번째 질문: 올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리더는 자신이 영적으로 탈진을 방지하고 지속적으로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며, 지속적 영적 재생산을 이루게 하기위해서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세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을 점검하게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리더의 영적 무너짐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리더의 자기 관리의 한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도 우리 자신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안다. 우리 자신만이 느끼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다. 우리 자신에게 기도 응답의 경험이 부족한지, 성경 통독이 필요한지, 전도 경험이 부족한지, 체계적인 성경 지식이 부족한지, 복음의 확신이 부족한지, 믿음의 인내가 부족한지, 경건한 믿음이 필요한지 등등.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영적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게 될 때, 섬기는 가운데서도 우리들의 마음에 늘 믿음의 부담으로 얹혀 있다. 그리고는 이것이 우리의 영적 콤플렉스가 된다. 그래서 모임을 인도할 때 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피해 가려고 하나 쉽지 않다. 오히려 모임을 이끌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자 하면 영적 콤플렉스 부분이 자꾸 자극이 되고 리더 자신의 심적 부담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런데다가 소그룹 리더는 항상 그룹 원 들보다 영적으로 더 낳은 상태로 보여야 한다는 환경적 부담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리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룹 원들에게 보여 함께 그 연약함을 서로 이해해 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며, 서로를 채워주는 공동체의 모습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소그룹의 모습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리더에게는 그것이 이론일 뿐일 때가 많다. 실제적으로 많은 소그룹의 환경이 리더는 뭔가 좀 나아야 한다고 생각을 대다수가 하고 있는 환경이기에, 여전히 리더는 영성이 깊은 척, 성경을 많이 아는 척, 믿음으로 삶의 문제를 잘 풀어 가는 척, 항상 기쁜 척 등으로 자신을 가면 씌우는 적이 더 많다. 그러다 보니 리더 자신도 소그룹 내에서 누군가를 통해 돌아보아져야 할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만 돌보고 자신은 돌보아지지 않아 결국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분명 리더는 이 세 번째 질문 올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섬기는 소그룹 원들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위해, 리더는 자신의 영적 영양 결핍 부분에 대해 어떻게 영양 보충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의도적 훈련 계획을 가져야만 한다. 일주일에 몇 시간의 계획을 정하라. 아니면 하루에 10분 씩 이라도 이 영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시간을 정하고 집중하라.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채워지지는 않아도 조금씩 이 영적 콤플렉스가 해결점을 찾아가는 성장의 느낌 속에서 영적, 심리적, 환경적 자신감이 생기게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계속 생산해 낼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생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과정 가운데 리더는 섬김 가운데 환경적으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 여건들을 능히 영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리더는 섬기는 소그룹을 자신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훈련의 장으로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일 리더 자신이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면 소그룹의 커리큘럼을 ‘ 기도’ 에 관해서 잡고, 이를 공부하라. 함께 소그룹에서 나누라. 그리고 함께 시험해 보라. 서로의 기도 제목을 기록하여 한 달에 한 번씩 그 응답 여부를 체크하라. 만일 리더 자신이 성경 전체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하였다면 소그룹 모임의 커리큘럼에 매주 성경 통독 스케줄을 넣으라. 그리고 매주 서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라.


이처럼 리더가 섬기는 소그룹을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커리큘럼으로 창조하면 섬김과 함께 자신도 영적으로 성장 할 뿐 아니라, 섬김의 탈진을 예방하고, 장기적인 섬김의 능력과 재생산의 능력도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