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한 영혼 이야기

이코스타 2006년 9월호

자매님,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한 자매님이 다른 자매님께 다가가며 숙소와 이름을 확인하고 가방을 함께 들며 인사를 나눕니다.
“ 네..에, 안녕..하세요? … 일찍.. 오셨네요?”
“ 조장님들은 하루 일찍 와서 조장수련회를 하고 이렇게 조원님들 맞이하는 거라고 배웠어요. 저도 처음이라서 아는 게 없답니다, 호호호! 아, 그런데 얼굴이 많이 피곤해보이시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고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된 두 자매님은 침대에 걸터 앉습니다. 조장 자매님이 다른 자매님의 무거운 어깨를 잡아주며 얘기가 계속되자 이 자매님은 벌써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못 참고 힘든 말문을 열어 마음을 나눕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는 아픔과 분노와 갈등이 자매님을 괴롭히고 있었고, 결혼하고 겪는 이런저런 현실과 예수님을 잘 모르는 양가 가족들 사이에서 이제 막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새댁의 자리는 그 자매를 충분히 혼란스럽고 지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현실을 안고 – 아직 딛고 일어서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작정하고 한번 여쭈어 보려고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착한 첫 날, 처음 만난 조장언니가 한국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환하게 맞아 주어서 긴장했던 마음이 확 풀리고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졌다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쉽게 얘기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마음에 걸었던 빗장을 이렇게 빨리 연것이 참 신기하다고 하며 눈물을 닦고 이제서야 작은 웃음을 보입니다.


2004년 코스타 화요일 저녁 집회에서 이 자매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청에 결단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인정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말씀 속에서 날마다 계속되고 기쁨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참으로 살아계시고 선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매님은 하나님이 주신 아이와 남편과 모든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는 신실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읽으시면서 이미 아셨겠지만 그 조장이란 사람이 부끄럽게도 바로 저랍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한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장수련회 마치고 숙소에 가서 조원님들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앞세워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가장 먼저 오신 그 자매님을 맞이한 것 뿐이었습니다. 제 얼굴이 그 자매님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후에 결혼식 사진을 보았지요, 참 미인이셨어요), 어머니처럼 나이를 지긋이 먹은 사람도 아니고요 (제가 비록 세파에 시달려 좀 주름이 가긴 했지만요), 뭐든 말하세요 다 들어 드릴께요 – 그렇게 감히 말씀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제 자신 또한 그 자매님과 하나 다른 바 없는 답답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첫 문을 두드린 코스타 였으니까요.


처음 등록한 코스타에서 기혼조 싱글( 결혼하신 상태이고 이번 코스타에는 혼자서 오시게 된 분) 자매님들 조의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물론 조장신청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라고 이끌어 주셔서 조장이 되었답니다. 그때는 참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당시 저에게 열심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셨던 간사님께 이제야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오타를 연발하고 backspace를 눌렀지만 남은 흔적은 피할 수 없는 아픔이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믿음 밖에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스스로를 차갑고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내버려 두었고 하나님은 그런 저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히브리서 11장 6절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음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믿음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선포하고 영혼의 파멸을 차처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씀으로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하고 수면위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신 일이 바로 처음 코스타 조장을 감당하면서 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자신없고 부끄럽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를 먼저 말씀 앞에 드러내며 만나게 하시는 조원들과 나의 연약함을 나누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것을 보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참여하게 되는 은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강하신 능력이 모두에게 임하는 통로로 사용하심을 감사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쉬니 참 좋더군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햇살을 다시 마주하며 흉터는 남아도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감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통해 받아 마신 한 바가지의 생수는 저를 살리셨고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생수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처럼 남들의 시선을 피해 한낮에 물 길러 나온 저에게 생명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의 고통 앞에서 세 번이나 주를 부인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결국 그는 그렇게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가 회개할 때, 주님을 사랑한다고 다시 고백할 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누가 뭐래도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벧전4:8).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멘 젖 나는 어미소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것처럼 저에게 충성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삼상 6). 나에게 허락하신 분깃에 감사하며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강한 용사로 훈련시키시는 대장되신 예수만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오클라호마 gp코스타에서 귀납적 성경묵상을 시작하게 되고, 2005년 어린이 코스타에서는 아들 영광이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며 위로하시고 자유함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시애틀 gp 코스타에서 follow-up 할 자매를 연결시켜주시고 한 영혼을 품으시는 아버지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Korean Bible Study에 조인하게 하시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원투원 제자양육할 자매를 만나게 하셔서 처음 원투원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하나님께 원투원 제자양육을 받습니다. 아리조나 gp 코스타에도 성령님의 섭리하심으로 잠깐 다녀오게 하시고, 2006년 코스타에서 3지역 코디로 기도하는 자리에 이끄셨습니다. 온라인 조장훈련과 조장코스타를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저를 향하신 그 시선에 참 많이 황송하면서도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나를 회복시키셔서 존귀한 자로 다시 일으켜 세워시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동역자로 여겨주심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에 묵묵히 서로를 받치고 서 있는 지체들을 허락하신 것은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부르심을 알고 있었지만 응답하지 않았고 나를 사용해달라고 하면서도 훈련은 거절하는 교만과 불순종의 시간들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고 하기보다 내 눈에 선한 것을 더 앞서 취해버리는 그런 믿음 없는 삶 속에서 메마른 진통을 겪으며 텅 빈 영혼과 마음과 육신이 소름끼치도록 싫어서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저를 찾아오신 주님은 저를 먹이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힘주시고 사랑磯鳴?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코스타는 저의 로뎀나무가 되었고 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는 처음과 마지막 이유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토록 나를 참아주시고 오래 기다려주신 주님과 절대 손을 놓치 않고 날마다 동행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학생 신앙운동의 나눔터에 미주 학생 사역의 현장 보고를 생생하게 나눌 내용이 제게는 없습니다. 이곳에 감히 부탁 받을 자격도 없는 제가 원고부탁을 받고 순종은 했지만 사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이렇게 저희 가족이 이 산골마을 샤이엔 와이오밍에 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 떼쓰며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캠퍼스 개척을 위해 보내주실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한가지 깨닫게 하시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주님을 닮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목마른 제 영혼에 한 바가지의 생수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저도 한 영혼에게 그분이 주신 한 바가지의 물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른 펌프에 힘을 실어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게 되는 그 시작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 한 영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 가처럼 버려진, 고집 부리 듯 깊이 박힌 돌덩이 가득한, 손길이 멈춰진 땅에 덤비듯 솟아있는 가지덤불 같은 이 황량한 땅, 한 영혼에게 다함이 없는 사랑과 자비로 인내하신 주님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영혼임이 참으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믿음 주신 일도 감사 드립니다. 한 영혼과 씨름하는 그 현장에 바로 주님이 오신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한 영혼의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10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권위 통찰 (Authority insights)

지도자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서 “권위”가 도전을 받는 시대 속에 살고 있고 “권위”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지만 나쁜 것은 권위를 내세우는 “권위주의”이지 참다운 “권위”가 사실상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한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참다운 권위를 가진 지도자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있다. 지도력은 참다운 권위에서 나온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지도자로서 성숙해 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권위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가 성숙해 가면서 특히 사역의 초반부에 지도력의 권위에 관하여 어떤 배움이 있어야 할까?


첫째, 한 사람이 권위를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권위에 순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 우리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철학이 다를 수도 있고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가 그 권위에 저항하고 반발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권위 질서를 세우시고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 속에 일정한 권위의 구조를 세워 두셨다. 그 지도자들에 대하여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물론 그 권위가 하나님에 대항하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이면 우리가 저항해야 하지만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도자에게 반항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권위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추종자가 지도자들에 대하여 불평을 하게 되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비판한다고 이야기하기 쉽지만 사실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추종자들은 지도자처럼 전체를 보는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 위치에 서 보면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한 지도자가 자신의 위의 권위에 대하여 순복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순복할 것을 요구한다면 누가 순복할 것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한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예는 다윗의 경우이다. 사울 왕이 그를 원수처럼 여겨서 몇 번이나 죽이려고 하였지만 자신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이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 질서를 존중하는 다윗이였기에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에 팽배해 있는,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위의 권위에 순복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즉 집에서는 부모에게,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학교에서는 스승에게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지도력 개발에서 초반부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둘째, 지도자는 권위를 스스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도력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그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하여 갈등을 경험할 수가 있다. 사실상 지도자가 바른 비젼과 목적을 가지고 움직여 갈 때 순종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정말로 힘이 들게 된다. 지도자가 권위에 대하여 도전을 받았을 경우에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그 도전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람이 나를 반대하고 공격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더욱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지도자 개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위, 즉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그 도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처입고 반응하기 보다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반응이다. 지도자가 보여야 할 반응은 자기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는 일에 정진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권위를 지키시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 어떤 추종자가 문제를 일으킬 때에 만일 지도자가 그 문제 일으킨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공격하면 다른 추종자들은 그 지도자의 모습에 실망하고 도리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옹호하게 된다. 그러나 지도자가 도리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용서하고 그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면 그 모습들을 보고 다른 추종자들이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는 결국 이런 갈등들을 지혜롭게 넘겨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에 순복하는 것을 건강하게 배우지 못하였다. 그들의 경험가운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권위에 피해를 입었기에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이 있다. 반항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쌀 때에 그들도 권위에 순복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지도력 개발에서 삶의 후반부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셋째, 지도자는 바른 권위의 사용을 배워야한다. 권위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섬기기 위하여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된 이유는 지도자들이 그 권위를 가지고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권위를 주장하는 권위주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권위주의를 세상의 이방인들의 것으로 규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속한 자들은 권위주의가 아니라 지도자들이 도리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영적 지도자들은 권위의 사용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삶과 사역속에서 지도자들이 이런 섬김의 지도력이 아니라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으로 인하여 힘든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권위의 사용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또 좋은 영적 지도자들의 모범을 통하여 권위의 바른 사용, 섬기기 위한 사용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성경적인 권위사용의 가치관을 배양하지 않으면 우리의 부정적인 경험들이 우리의 지도력 사용에 영향을 주게 되고 결국은 우리도 똑같이 부정적인 권위사용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깨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주워진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로 따르는 자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넷째, 지도자는 여러가지 종류의 권위를 가져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권위는 영적인 권위이다.
영적인 권위란 지도자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기 때문에 추종자들이 그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허락하는 권위를 말하는데 이는 주로 인격과 모범과 설득을 통하여 영향력을 발휘한다.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능력이 아니다. 다른 지적인 권위나 지위의 권위 혹은 인격적인 배려에서 오는 권위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노력해서 취득하는 능력이지만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하나님께 점점 더 깊이 다가섬으로 인하여 생기는 열매이고 부산물이다. 우리가 권위를 목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목적하여 나아가고 섬기고 동행할 때에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임재가 우리 삶과 사역가운데 나타나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영적인 지도자들이 의지해야 할 권위인 것이다. 물론 우리 지도자들에게 다른 모든 종류의 권위와 능력도 필요하다. 지식도 지위도 인간관계도 때로는 보상을 줄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역이 점점 깊어질수록 지도자들에게는 영적인 권위가 요구되는 것이다. 풀러신학교의 킬린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영적 권위의 기반 위에서 사역을 실행한다고 한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의 삶가운데 권위에 순복하는 일이 힘이 드는가? 그로 인하여 권위에 순복하지 못하여 지도자와 갈등하고 사역지를 떠나는 일들이 반복되는가? 여러분이 지도자로써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특정한 사람들이 반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가? 그것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가? 당신이 권위주의에 빠져서 권위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하는 그런 지도자 아래 있어서 힘들어 하는가? 무엇이 참된 권위요 지도력인지 가치관이 혼돈되는가? 아니면 당신의 참된 권위의 필요를 느껴서 찾고 갈구하는데 손에 잡히지가 않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든 지도자들이 그들의 지도력의 성숙을 위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권위에 대한 바른 통찰을 하고 참다운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 (7)

일곱번 째 질문, 올해 개인적인 습관이나 기술에 있어서 버리고 싶거나 습득하고 싶은 것은? Personal Habits, Skills


이 질문은 리더의 자기 관리와 성장에 있어서 자아 통제력 리더쉽 훈련에 관한 부분이다. 리더가 평상시 자기 자신의 습관이나 기술에 있어서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을 버리는 반면에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습관이나 기술을 배우고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세하게 보면 리더의 습관적인 실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상처를 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상처는 반대로 리더의 섬김을 향한 상대적인 반대와 공격을 유발시킴으로 인해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거나, 공동체의 구성원이 실족하고 떠나거나, 리더가 탈진 될 수 있는 경우의 원인이 되었던 것들이다. 반면에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리더와의 관계라든지, 혹은 섬기는 소그룹의 구성원이든지, 아니면 동료 리더쉽과의 관계에서 부드럽게 영적 영향력을 주는 요소들일 것이다.


무엇이 당신에게 자연스러운 영적 영향력을 나누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인가? 무엇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영적 영향력의 요소들인가? 자세하게 나의 장점, 단점, 주위 사람들의 장점, 단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리더 자신의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자아 반성이 필요함과 더불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결단력이 요청되어 진다. 더 나아가 새로운 습관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데에는 시간의 관리까지 필수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질문은 리더 자신의 자아 통제력 리더쉽 훈련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의 자기 관리를 위한 질문의 실행은 의외로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껏 앞에서 지도자의 자기 관리를 위한 질문 여섯 가지는 마치 소비자 (consumer) 가 필요한 물건을 가질 때 쉽게 가게에 가서 사는 것과 같이 주로 필요한 것을 외부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관리 형태였지만 일곱 번 째 질문은 이전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한 세밀한 자아 반성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윌로우 크릭 교회의 담임 빌 하이벨스 목사는 그의 책 리더쉽의 용기에서 “우리는 엄격한 자아 반성과 내적 성숙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격려하고 감독하는 것을 더 좋아 한다” 고 이야기하며 일반적으로 리더들이 자기 반성과 결단에는 매우 약함을 지적한다. 사람들마다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그 판단에 있어서 예리하고 날카로운 반면에, 자시 자신에 대해서는 판단을 못하는 모습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용이 많은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도 그러한 경향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리더쉽 전문가 디 호크 역시 대부분의 리더가 이 일, 즉 자신의 자아 반성과 통제를 피하고 싶어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일곱번째 질문은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자신의 내적 성찰을 통한 리더의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 성찰과 자아 통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부분에 리더가 실패하면 이 열매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자신의 약점에 대한 자아 성찰과 자아 통제력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열매인가?


  • 첫째,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 약점을 발견하게 된다.
  • 둘째, 겸손하게 주님의 능력을 구하게 된다.
  • 셋째, 이제껏 자신의 리더쉽을 받아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 할 수 있게 된다.
  • 넷째, 자신의 리더쉽에 대한 반대 의견의 상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 다섯째, 실망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여섯째, 다른 사람의 은사(spiritual gift)를 인정하게 된다.
  • 일곱째, 사역의 분담을 가져 오게 된다.
  • 여덟째, 내적인 용기를 얻어 새로이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자아 통제력 훈련의 열매는 바로 리더쉽에 대한 반대와 갈등 처리에 그 핵심이 있다. 리더의 탈진의 주요 원인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리더가 소그룹 내에서 경험하는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위기의 처리에 달려 있다. 인생에 있어서 여러 번 큰 풍랑을 만나게 되듯, 리더의 섬김에 있어서도 여러 번 큰 파도를 만나게 되어 있다. 이때 어떤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절묘하게 그 파도의 끝을 타면서 그 파도를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리더 역시 그 파도를 절묘하게 타고 넘어가는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이 기술이 무엇인가? 바로 자아 성찰과 자아 통제력 훈련인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리더들에게 이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동안의 리더쉽에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리더가 이 상황을 못 받아들인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내가 어떻게 섬겼는데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는 가라는 분한 마음 때문에 리더의 마음에 큰 상처가 생기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소그룹을 섬기는 능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맞다. 많은 사람들이 섬김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반대와 위기, 갈등의 처리를 잘 하지 못해는데서 왔다.


왜 사람들은 위기와 갈등의 처리에 실패하는가? 그것은 내적으로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평상시 보는 시간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쉽 전문가 디 호크는 이야기 하기를 섬김의 실패는 바로 자아 리더쉽의 실패 때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리더에게 자아 성찰을 위한 시간을 필수적이다. 아침이나 저녁 시간, 리더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 약점을 통제해야 한다. 반면에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 지 생각하며 그리고 이를 배우도록 시간을 구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리더는 관계속에서 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가지게 된다. 또한 리더쉽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에 오며, 자신에게 사역을 맏기셨음을 겸손으로 받아들여 섬김의 탈진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안상현 목사 인터뷰 – cKOSTA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

이코스타 2006년 9월호

1. 안녕하세요. 안상현 목사님. eKOSTA 독자들에게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안상현 간사라고 합니다. 현재 엘에이에 살고 있고 캠퍼스 선교단체인 IVF의 남가주 지방회와 UCLA를 섬기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코스타에서는 cKOSTA를 처음 시작할때부터 섬기고 있고 지난 11월부터 코스타/USA의 서부 순회 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2. cKOSTA가 벌써 4년이 되었네요. eKOSTA 독자들에게 cKOSTA가 생기게 된 과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마도 가장 처음 학부생들을 위한 코스타에 대한 필요가 제기된 것이 2000년 시카고 코스타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약 1600명 가량의 최대인원이 참가하면서 숙박이라던가 여러가지로 힘든(?) 코스타로 기억되는데 당시에 수양회가 끝나고 참가자 통계를 내보니 그중 약 400명이 약간 넘는 인원이 학부생으로 파악되면서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던 학부생을 위한 코스타의 사역이 수면위로 급부상(?)한 계기가 아니었나 기억됩니다. 그 후 약 2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에 2002년 3월경에 구체적으로 cKOSTA를 위한 첫 준비모임을 엘에이에서 가지게 되었고 그 후 2003년에 처음으로 엘에이 근교의 채프만 대학에서 제 1회 cKOSTA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3. cKOSTA가 4년을 지내오면서, 2년은 LA에서 그리고 2년은 Indianapolis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변화 과정을 간략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처음 엘에이 근교에서 2년 동안 cKOSTA를 가졌던 것을 뒤돌아 보면 당시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현재의 cKOSTA를 위한 귀한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처음 cKOSTA를 섬기시던 분들이 서부지역에 많았던 것과 또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중.동부로 치중되어 있었던 기존의 코스타 수양회와의 균형, 그리고 엘에이를 중심으로 한 한인 대학생들의 숫자를 감안하여 서부에서 첫 2년의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한가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은 처음에 시카고 수양회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학부생들이 Big-Ten 지역과 동부지역에서 온 학생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cKOSTA 수양회의 장소로 엘에이를 선택한 것이 학생들로 하여금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어서 참가에 주저하게 만들었던 요인이 아니었나 평가해 봅니다. 동시에 기존의 남가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에 수많은 대학과 한인 교회, 한인 커뮤니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서부지역의 참가자들이 저조했던 것은 기존에 개최되고 있는 대학생들을 포함한 한어권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많은 개교회 중심의 집회나 수양회들로 인하여 차별성 부각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두번의 수양회를 거치면서 위에서 말씀드린 부분들이 부각되었으며 특별히 지리적인 위치로서 참가자들이 cKOSTA 참석을 적극 고려할 수 있는 최종 지역으로 인디애나폴리스가 선정되었습니다.


4. 2006년 cKOSTA는 감사하게도 많은 성장이 있었던 집회로 평가되고 있는데요, 2006 cKOSTA의 특징이랄까, 변화랄까 하는 점들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무엇보다도 먼저 학부생 중심이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해서 미주 한인 젊은이와 대학생들을 섬기는 수양회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코스타 20주년을 맞이하면서 코스타가 더 이상 유학생들만을 섬기는 집회가 아니라 미주 한인/청년을 섬기는 수양회로서 그 성격을 달리하면서 가장 먼저 두드러지게 참가자들의 변화를 볼 수 있는 부분이 cKOSTA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cKOSTA의 참가자들을 분포를 보면 유학생과 이민자가 각각 반반씩을 사이좋게(?) 양분하고 있는 것만을 보더라도 미주 코스타 사역의 방향성이 자리잡히고 있는 집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가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주에 있는 학부생과 젊은이들을 위한 수양회이고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위한 영적인 가려움을 긁어줄 수 있는(?) 수양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데에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일단 강사 선정에 있어서도 한국에서 오시는 강사님들이 아니라 이곳 미국의 대학생활이나 직장생활을 이해하실 수 있는 분들을 모시고자 노력함으로 강사와 참가자들간의 갭을 줄이고자 노력했던 것이 참가자들에게 우리들을 위한 수양회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소그룹과 상담을 통한 크지만 작은 수양회를 지향함으로서 혹여나 큰 대형집회에서 놓칠 수 있는 개인적인 나눔과 그 나눔을 통한 치유와 성장에 치중했던 점이 자리잡히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행이라던가 등록등 세밀한 부분에 미숙했던 점들은 아직 개선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고 이 자리를 빌어 그런 미숙함을 인해 불편을 겪었던 참가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과 또 계속 cKOSTA를 위해 기도해 주십사 하는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5. KOSTA하면, 한국말을 하는 청년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요, cKOSTA에는 어쩔 수 없이 영어가 더 편한 학생들도 있을 법 하거든요. 언어의 문제들은 별 장애가 되고 있는지 않은지요?


실제로 많은 수는 아니지만 영어가 더 편한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라고 해서 더 불편해 하지는 않습니다. 참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선 이 수양회가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참가해서 ‘언어의 불편을 감수하겠다’라고 다짐(?)하고 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참가자들과 강사님들이 이런 참가자들을 위한 배려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단 참가자들이 여기서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또 대학을 졸업했기에 한인 2세를 포함한 다문화권 사람들과의 교통에 그리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권에 있는 참가자가 와도 소그룹 모임등에서 잘 배려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영어권 참가자가 편안함을 느끼는 점도 있구요, 동시에 위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강사님들이 1.5세들 혹은 이 곳 미국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비록 전체 예배등에서 한국말로 진행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영어권 참가자들의 어려움을 개인적인 상담등을 통하여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올해 성경강해를 섬기셨던 장성욱 목사님(Steve Chang)만 하더라도 9살에 미국에 오신 분이라 한국말이 서투르시다보니 쉬운 한국말로 설교하시고 또 단순히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서 강사가 자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다고 하는 점에서 영어권 참가자들이 쉽게 동화되어 상담 신청을 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6. 21년을 지나온 KOSTA의 중요한 목적이라면, ‘복음, 민족,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cKOSTA가 시작하기 전에는 학부생 참석자의 숫자를 제한하기도 했었고요. 이제 학부생이라는 제한을 넘어 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있는데요. 그런 과정 중에서, 아직은 학문의 전문분야로 들어오지 않은 학부생들에게 ‘복음, 민족, 학문’이라는 KOSTA의 중요 정신들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요?


먼저 ‘민족’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cKOSTA에 참석하는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민족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복합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전에 코스타가 태동한 후 초창기에 가졌던 내 나라, 내 조국, 내 민족, 내가 돌아가서 발을 디디고 살아야 할 땅으로서의 민족의 개념과 비교하자면 현재 cKOSTA에 참가하는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의 개념은 그보다는 좀더 지리적,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확대된 것으로 보입니다. 꼭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내 나라로 돌아가지 않아도(실제로 참가자들의 반 이상이 이민을 나온 사람들이구요..) 한민족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충분히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듯 합니다. ‘복음’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개인의 구원이라든가 천국, 혹은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복음에 관하여는 분명한 인식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 측면의 복음에 관한 이해는 좀 약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복음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에 관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강조가 적은 듯 해서 이 부분에 많은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가치인 ‘학문’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사실 시카고 코스타에서 강조하는 학문은 말씀하신대로 아직 전문분야로 들어서지 못한 참가자들이 대부분이라 실제로 관심을 갖는 부분 역시도 진로상담이라든가, 혹은 전공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 분별하기’로 치우치는 것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미나나 상담을 통하여 현재 참가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들에 관하여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사역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를 넘어서서 더 학문의 분야로 나가려는 사람이나 혹은 졸업후에 곧바로 직장을 갖고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골 3:23)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인생을 준비하고 풀어나가는 준비를 돕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7. 그렇다면, 현재 cKOSTA에서 중심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은 어떤 점들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점들이 실제로 cKOSTA에서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점들입니다. 기존의 시카고 코스타에서 핵심가치로 지니고 있는 것들을 지키되 그 안에서 강조점이 조금 다른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의 것들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꼭 cKOSTA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사역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개인적인 회복과 치유에 관한 필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춘기 혹은 20대 초반에 이민이나 유학을 온 사람들 많아서인지 이민 가정에서 보여지는 정서적, 영적 방치가 개인의 성품등에 영향을 미쳐 이를 말씀으로 치유해야 할 필요가 많구요, 동시에 유학생들 역시 새로운 환경(이는 이민자도 마찬가지)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여러 상처나 갈등들, 아픔들에 관한 사역의 필요는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8. 그런 가치를 공유하고, 미국 내 청년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강사님들을 찾고 함께 섬기는 것이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어떤 분들이 함께 일하시고 또 어떻게 새로운 동역자를 찾고 계신지요?


많은 동역자들께서 이 젊은이들을 향한 마음을 품고 기도해 주시고 섬겨주십니다. 초창기부터 엘에이 지구촌 교회의 이현수 목사님, 뉴저지의 이진석 목사님, 조경호 목사님, 백은실 집사님, 김종필 권사님, 이일형 권사님 등이 섬겨주고 계시고 감사하게도 계속적인 네트워킹을 통하여 젊은 세대를 향하여 마음을 품고 계신 귀하신 분들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9. 지금까지 cKOSTA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또 어떻게 인도해 주실지 많이 기대가 되는데요. 목사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기대하시는 cKOSTA의 10년 후의 모습을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계속적으로 섬겨주시는 동역자들의 기도와 섬김이 이어진다면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한인 대학생,청년을 위하여 1회성이 아닌, 구체적인 도움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cKOSTA 사역이 되리라 기대하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10년후를 예상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한 것 같구요, 처음의 초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사역에 집중한다면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하나님이 쓰시는 그 순간까지 잘 쓰임받는 사역이 되리라는 점에는 확신합니다.

2006 cKosta 집회를 마치고

이코스타 2006년 9월호

만 서른이 넘어 미국에 유학오곤 만 2년이 되던 여름, 그러니까 약 11년전 즈음 시카고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한 뒤, 깨달은 바가 많아 그후로도 세번을 더 다녀오면서, 나도 언젠가는 평신도 지도자로서 코스타에서 청년들을에게 내게 임한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하는 기도를 하늘에 올렸었다. 그리고는 10여년을 남들 알아주지 않는 자칭 코스탄으로, 한인 유학생 교회에서 대학부, 청년부 교사로 섬기면서, 청년들에게 코스타를 소개하고 참석하도록 종용하면서 지내다가, 작년 늦여름 미국 중서부 gpKosta 개회 예배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꼭 10년전 드렸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이렇게 코스타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고. 그리고 또 다시 1년이 지나, 06 cKosta에 조장 멘토로, 그리고 세미나 강사로 참여하게된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큰 감격으로 다가왔다.


세미나 준비를 위해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대체로 두가지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곤 비교적 힘든 기도의 시간을 가졌었다. 하나는 대학생 나이의 어린 청년들과 생활한지 3년이 지나면서 그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조금은 보수적 관점을 벗어난 개혁적 관점에서의 ‘직업 영성’에 대해 강의하려니 (제목: 기독 청년의 직업 준비), 혹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근심이었다. 이런 고민들과 함께, 조장들을 위한 3주간의 큐티 나눔은 시작되었고, 멘토로서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관심이라고 판단되어, 그들의 큐티 나눔에 한줄 기도문을 덧글로 남기곤 하였다. 코스타 주제에 대한 말씀을 적용하고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멘토로서 그들의 내면은 물론 외면을 알아가는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뽀족한 방업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 외에는.


바쁜 초여름 회사일을 정리하고, 부랴부랴 세미나 강의 내용을 마무리하고, 드리어 인디아나 폴리스로 향하던 날. 난 뭔가를 놓고 있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기도 부족이라는, 언제나 있어온, 정답외에도 한두가지 무언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인디아나 폴리스 대학 캠퍼스로 들어섰다.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시작된 조장수련회에서는,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접해온 4지역 조장들의 참신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즐거움과 50여명의 젊은 리더들이 기도로 준비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기쁘고 셀레는 마음이었다. 여기 저기서 집회를 성실하게 준비하는 간사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즐거움과 함께. 멘토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 스스로 준비하고 싶었던 여러 부분에 대한 준비는 부족했지만, 조장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자 보여준 충성된 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귀한 시간이 되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같이 움직여야할 가족이 없는 대학생과 취업 초년생인 cKostan의 구성원 성격상, 조별 모임은 전체 집회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조장의 역할은 시카고 코스타에 비해 더욱 중요한 비중을 갖는다. 코스타 일정이 시작되고 분주해진 조장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멀리서 보면서 그들의 수고함에도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성장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확인할 때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감추기도 힘들었다. 때로는 여러 다양한 문제로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조장들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는 것보다는. 이를 영적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한걸음 물러선 뒷자리에서 서 있었는데, 이러한 나의 태도가 조금은 그들에게 아쉬움을 사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멘토는 성령님외에 그 누구도 될 수 없음을 멘토나 멘티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한인 유학생 교회를 떠나 미국교회 생활을 해온 지난 몇년동안 청년이란 단어에 대한 그 두근거림이 다소 줄어든 듯 했다. 지금 믿음의 생활을 함께 하고 있는 한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체들이 대부분 서른 아래 위의 대학원생들이어서 그런지, 그리고 처음 코스타에 강사로서 참여하게 되어서인지, 설레임보다는 어찌 감당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었나보다.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조장수련회를 마치고, 개회예배로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게다가 월요일 밤 처음으로 가지게 된 강사모임 시간.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던지. 미국 전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이 땅에서 헌신하는 30여명의 목사님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 내가 앉아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겸연쩍은 마음에 가장 구석진 곳을 찾아 앉았는데, 그곳 지역 교회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주신 간식을 받아들고는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가 하는 질문을 쉬 놓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겸손으로 포장한 나의 교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이 30여명의 강사진들 개개인의 신앙의 기저가 무엇인지, 코스타를 향한 그들의 시각이 어떠한지, 또 각자가 담당한 설교나 세미나 등의 내용에 대해서도 조금은 궁금증 이상의 의구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경계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무너졌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는 그들과 직접 대화하는 기회가 늘어날수록, 은밀히 표현되는 그들만의 지혜와 겸손과 청년을 향한 사랑이, 나 스스로 먼저 쌓아두었던 돌담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뭐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마음으로 화요일 첫번째 세미나를 인도하고, 그날 저녁때까지 조장 멘토로서 그리고 강사로서, 그리고 상담을 통해 만날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뭐랄까 그저 분주한 마음으로만 다녔다.


화요일 저녁 집회 시간.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 소리치며 춤추는 어린 청년들을 보며, 나도 그 한사람이 되어 찬양하다 울컥 가슴에 뜨거움이 내려앉았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다 두고 떠나온 서른 명의 젊은이들 대신, 이제는 여기 이 450의 청년을 네 가슴에 품으라”그 순간 거짓말처럼, 몇년전 경험해야했던 아팠던 상처와 하나님 함께 하신 회복의 과정들이 영화처럼 지나가고, 북받쳐오는 감동을 참지 못해 통곡하며 울었다. 처음엔, 잊었던 30명 청년의 얼굴이 떠올라 그리움과 보고픔에 울다가, 회복의 과정에 동행하셨던 하나님이 고마와 엉엉 울었다. 그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말씀 들려주심에 어찌할 바를 몰라 울었다. ‘하나님, 이 작은 자의 가슴에 어찌 이 많은 영혼을 품으라 하시나요?’ 밤 10시경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쉬지않고 흐르는 눈물 훔치면서 되묻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내내 은혜의 미소만 지으셨다.


그 밤부터 집회 기간 동안 내내, 조금이라도 기뻐하는 청년, 근심하는 청년, 슬픈 기색의 청년, 도움 청하는 청년,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청년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빨갛게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일 조장들이 제출한 평가서를 읽으면서, 조장과 조원들 이름 하나 하나에 손을 올리고 기도하곤 했는데, 언제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영혼들과 함께 하는 특권,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내게 있음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랑하는 영혼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왔고 어쩌면 주님의 아픔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까이서 마음 문 여는 대화도 나누지 못했지만, 청년 한사람 한사람을 이해하며 기도하고자 했던 마음만은 성령님을 통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다가갔을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렇게 하나께서는 무언가 빠트리고 참석하게된 준비되지 않은 나를 만지시며 다시금 준비시켜 주셨다.


코스타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욕심때문에, 내가 원했던 속도로 강의했다면 아마도 4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70분의 분량으로 줄이는 것이 첫시간에는 어렵다 싶어, 강의 녹음을 다음 날로 미루었는데, 다음 날 강의시간에는 마침 녹음기계에 이상이 있다며 그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날에도 녹음을 하지 못하게 되어, 전체 집회와 세미나를 통틀어 나의 강의만 녹음이 되지 않은 해프닝이 일어났다.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처음과 두번째 강의에서는 강의실이 모두 채워져 나름대로 힘을 얻어 강의했지만, 마지막 날 두번의 강의에서는 절반 정도만 채워졌다. 게다가 그 가운데 절반은 피곤한 일정탓인지 잠을 청하고 있어 그리 흥은 나지 않았지만, 한두명의 청년이 부릅뜬 눈으로 경청하여 주어 그들덕분에 강의를 마칠 수 있었다. 강의 내용의 한부분이라도 그들의 미래에 적용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한 강사분은 이렇게 말씀을 나누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준비과정도 그랬지만, 여기 와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영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저의 깊은 내면은 참안식을 누리고 있답니다.” 한 분께서 나누어주신 말씀이었지만, 사실은 30여명 모든 강사들이 느끼고 있던 심정을 그분이 대표가 되어 말로 표현해 주신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루 하루를 정신없이 청년들을 만나고 설교하고, 강의하고, 상담하면서, 새벽 1시가 되어야 공식적인 일정이 마무리되던 날들속에서, 그들 모두 참평안을 누리고 있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표현할 밖에. 바쁜 일정속에서 ‘청년 사랑’으로 붙들린 바된 빚장이가 되어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갚기 위해, 그 먼 곳까지 달려와 주었던 강사님들. 종된 마음으로 섬기러 왔음을 그들의 언행과 눈빛에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혹 부족한 나의 모습을 비기기도 하면서, 강사분들과의 만남이 축복으로 다가왔다.


한번은 여러가지 문제로 상담하러 온 학생으로 부터 이런 말을 전해들었다. “강사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러니 저도 따라 눈물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팽창과 긍정과 부유함과 초자연으로 때묻은 현대 교회사안에서, 복음을 말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지도자들이 청년들 곁에 있는 한, 참소망은 하늘을 향해 되살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Kosta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20여명의 강사분들은 서로 전체 이메일을 통해 감사와 감격과 은혜를 함께 나누는 기회를 가졌는데, 모두들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과의 만남과 충만히 경험한 은혜에 감복하고 있었고, 나는 또 그들의 모습에 내려앉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엿볼 수 있었다. 청년들과 함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축복 누림에 감사 기도하는 나에게, 그리도 많은 믿음의 선배와 후배와 기도의 동역자들을 알게 하시니, 난 참으로 복있는 사람이다.


코스타가 중반을 거쳐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청년들에게서 조금은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처음 시작할 때 가졌었던 두려움이나 기도 응답의 불확신, 진로에 대한 고민 등이 하나씩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도 그러했지만, 상담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학생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중반이후에 상담을 하게 된 학생들의 대부분은 이미 기도의 응답을 얻었으며, 그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마치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현상이라 여겨졌다. 무엇보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처럼,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꿈꾸고 간구하면서, 이 땅에서 화목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 그 잠겨져 있던 화목의 자물쇠를 열게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때 상담받으러왔던 학생들의 미소가 그립다.


학생시절 코스타에 다니면서 간사들의 수고를 짐작한 적이 많으나, 강사가 되어 그들과 가까이서 그들의 움직임을 더 자세하게 보게 되니, 그들의 노고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식사는 물론 잠을 설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그들을 보며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끔은 학생들로부터 조금은 불친절하지 않느냐는 불평도 듣지만, 내가 보기에, 나라면 화부터 내었을 주변 상황임을 알고 나면, 그들이 감당하고 섬기고 있는 그 자리는 분명 큰 자리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것도 큰 행복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들의 섬김을 보며 참섬김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코스타 사진을 스크랩하다 코스타후 간사들의 회식 사진을 발견했는데, 그 자리에 나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마도 그들의 섬김을 배우고 싶은 부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날 아침, 조장들과 식사를 하면서, 그들이 이때에 읽었으면 하는 책을 한권씩 구입하여 이별의 선물로 건넸다. 또 한해가 가면서 더욱 자라갈 그들이, 그 성장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님과의 체험이 간접적으로나마 책을 통해 경험하면서, 내년에는 더욱 성숙한 리더가 되기를 소망했다. cKosta에서 청년들을 만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가슴속에 한가지 믿음의 꿈이 있다. 그들의 지금 모습이 조금은 연약해 보이고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로 그리 오랜 세월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 나의 멘토가 될 것이라는 믿음. 그들 모두 나의 멘토가 되어 있을 그날을 꿈꾸어 본다. 그날에는 그들은 더 큰 꿈을 꿀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 만들기에도 충성을 다하는 청지기적 화목자로 살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청년 예수의 모습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코스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한 형제의 수고로 온라인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약 180여명의 cKostan들이 회원이 되어, 서로의 믿음 생활을 나누는 연락처로 삼고 있다. 코스타 기간동안에 가졌던 은혜와 감동을 간증하고, 코스타 이후에 변화되고 체험하는 삶의 모습들도 나누며, 혹은 중보기도를 나누면서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참으로 기쁜 일이다. 지금은 조금 분위가가 가라앉긴 했지만, 코스타 follow-up에서 가져온 규티 나눔도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더욱 흐뭇하다. 이번 cKosta를 통해 나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아직은 온전히 헤아릴 순 없지만, 청년 그들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알고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함으로 그들을 품으라시는 음성에 더욱 귀 기울이고 살고 있다. 이토록 미련하고 약한, 천한 자를 들어 쓰시고자 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오늘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의 단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