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 “하나님과 더불어 struggle하는 자” (“나는 누구인가?”- 본회퍼)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OO 자매님께,


자매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문과 고민들에 관하여 지난 번에 나누어주신 이야기들이 그후로도 참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어려운 여건들 가운데서도 헌신과 봉사로 섬김의 수고를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애처로우리만큼 감동적이었고, 일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잘못아닌 잘못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계신 점에는 참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이토록 주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자매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계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물음만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름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 주님 앞에서마저도 마음이 계속 상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공연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답니다. 자매님이 치열하게 struggle하며 살아가는 것과 병행하여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 또한 그 마음 안에서 나날이 더욱 커져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본회퍼의 고뇌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항거하다 체포된 본회퍼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연상시키듯 따뜻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간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처형되어 순교하기 얼마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한 편 지은 것이 사후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겸허함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달려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의 감회와 눈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픈 마음에 제 나름대로 한 번 번역해본 것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때로 말하기를,
나는 감옥의 갇힌 공간을 나설 때에
침착하고, 활기차며, 담대하다고 한다.
마치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유력자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에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하다고 한다.
마치 내 자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가운데에도
한결같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기품이 있다고 한다.
마치 늘 승리하는 자의 모습처럼…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피곤하고 갈망하며 병들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름다운 색들과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그리워하고 있는,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이웃과의 정다운 삶에 목말라하고 있는,
가혹함과 사소한 모멸감에 대한 분노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있는 동료들 걱정에 힘없이 떨고 있는,
기도하기에, 생각하기에, 무언가 만들어내기에 지쳐 공허해져 있는,
기진맥진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 것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스스로는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는 패잔병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다 얻은 승리 앞에서조차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WHO AM I?” (from “The Cost of Discipleship,” pp.19-20)
by Dietrich Bonhoeffer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tal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bear the days of misfortune
equab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rembling with anger at despotisms and petty humiliation,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June 1944, in the prison cell of Nazis camp)


저에게도 어려움과 고민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를 뜻하던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그 드라마틱한 장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종종 한 사람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간추려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주목한 점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되는 그 이름이 “거룩한 자”나 “복받은 자”와 같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씨름(struggle)하는 자”의 의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약하고 게으름과 죄에 미혹되기 쉬운 나이기에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을 어떻게든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struggle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고 이루실 주님이건만, 그분의 도우심 앞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기까지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struggle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 없는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감당해야할struggle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struggle이 그러하였고 본회퍼의 struggle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 또한 어쩌면 자매님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고 있는 순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 정도의 난관을 감내할 만한 삶의 실력과 성숙함이 자매님에게 이미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길을 또한 마련하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하셨으니, 말과 경주하여도 능히 이기고 요단강의 창일한 가운데서도 안전할 수 있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혹 조만간 고백하게 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이 혹시 있으시다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 안에서 존재 자체의 안식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장 이루고 얻기 원하시는 것은 자매님을 통한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자매님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찬양곡의 가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Savior on a hill, dying for my shame, could this be true? … For you so loved the world, you gave your only Son to say “I love you so. Oh, how I love you so…” (Hillsong, “Saviour”)


그 사랑이 자매님을 어디든 쫓아가서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놀라게 하시며 만족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매님은 귀중한 “하나님의 소유”이시고, 그 사랑이야말로 자매님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 품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OO 드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006/11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은 충분치 않다. 그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설명을 스스로에게 또 주위사람들에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 때 신앙인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상기하였듯이. 여기서 신앙의 규준인 성경 외에 개인적인 신앙 탐구의 여정을 기록한 책들이 필요한 이유는 보편적인 말씀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봄으로써 새로운 시각에서 신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변증할 수 있다. 기독교적 신앙이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는데 가장 좋은 틀이라면 그것은 모든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 일관성있는 생각, 세상의 모순적인 파괴성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적절한 해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호 ekosta는 믿음을 새롭게 점검할 수 있는 몇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순전한 기독교”, C. S. Lewis, 홍성사
루이스는 상당한 기간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로 살아가다가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꾼 사람이다. 그의 출발점 기본적으로 ‘자 우리 앉아서 잘 생각해보자’라는 것이다. 무신론이 세상을 더 잘 설명하는지, 유신론이 세상을 더 잘 설명하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적인 유일신론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기독교적인 유신론이 왜 가장 보편적인 설명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인 논변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의 전개 방식을 그 내용과 최대한 분리시켜며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 사변의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실성을 이해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고의 내적 일관성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시각을 찾아보려는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 되겠다.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박영덕, IVP
술과 도박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저자는 한국의 젊은이로서 기독교에 접근할 때 흔히 접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조언을 한 후, 신앙의 두 축으로 보편적인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의 역사성과 자신의 삶 속에 경험한 연속된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흔히 겪는 갑작스런 해방과 그에 따른 정신적 혼란 속에서 발견한 신앙을 재미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객관적 사실로서 부활을 제시한 후, 개인적인 경험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어려워 보이는 현실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통해 신앙의 확신이 커져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신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이고 이야기가 진리를 가장 잘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고 그분의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의문을 충분히 자아낼 수 있는 신앙으로의 초대장이 될 수 있겠다.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 Edward K. Boyd and Gregory Boyd, 미션월드
기독 변증학 교수인 아들 에드워드가 무신론자인 아버지 그레고리와 3년간 주고 받았던 편지를 묶은 책이다. 완고하지만 논리적인 아버지에게 예수님의 참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통해 평소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주고 받는 기회를 갖자고 제안하고, 아버지가 흔쾌히 받아드림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너는 신학자고 나는 평범한 노인이니,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말고 설명하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 쉽고 명료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왜 하나님은 네 엄마를 살려주지 않느냐?’ ‘세상에는 왜 이리 고난이 많으냐?’ ‘성경을 어떻게 진리라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이냐?’ 등의 무신론자가 기독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질문들에 대해 조목 조목 답변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무신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많은 경우에,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난 선지식과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슴을 지적하고 있고, 그런 오해와 의심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는 큰 문제가 아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기독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으면서, 의심하고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기에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책이다.


“특종 믿음 사건”, Lee Strobel, 두란노
전 시카고 트리뷴 기자 출신으로써의 특유의 논리와 필체로 ‘예수는 역사다’ ‘창조설계의 비밀’의 책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리 스트로벨의 기독 변증에 관한 책이다. ‘The case for the faith’가 원제인 이 책은, 한 때 빌리 그래함의 동역자였다가, 불가지론자로 돌아선 찰스 템플턴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찰스 템플턴은, 지독한 가뭄 가운데서 죽은 아이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비를 기다리는 한 아프리카 여인의 사진을 계기로 강한 회의를 지니게 된 사람이다.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비 뿐이었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일까라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으로 부터 회의를 가지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회의론자, 불가지론자가 가질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8가지 질문들을 다룬다. ‘사랑의 하나님이 악과 고난을 허용할 수 있는가’, ‘비과학적 기적, 믿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지옥이 무슨 필요인가’ 등의 보편적인 의문들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을 진행하면서 해답을 모색한다. 짧은 인터뷰를 통한 접근인 만큼, 깊은 신학적 접근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타당한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Fransic Shaffer, 생명의 말씀사
프란시스 쉐퍼의 접근은 두 책과는 반대이다. 다른 전제로 출발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이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제대로 구현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뒷받침받지 않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가 인간의 가치를 격상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다는 성경적 가치관이 함몰되면서 현대 사회의 많은 정신적 혼란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을 기술하면서 세속화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과연 옳은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 독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으나 절대적 표준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고 저자의 다른 책과 강연들을 통해 저자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문화 전반을 검토하려는 시도로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을 제시해야하는 기독 지성인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각각의 내용에 동의할 수는 없으나 그 문제 제기의 틀 자체는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기독교 정치 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저서로 알려져 있으며 책에 제기된 이슈 설정과 그 이슈의 논의는 깊이 있는 사고를 자극한다.


“목마른 내 영혼”, Alister McGrath, 복있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에 목말라 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현재 존재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원래의 본향을 향한 영적 목마름이 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기초로, 우리의 갈망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동굴과 같은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여, 인간의 본성적인 갈망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 하고 있다. 동굴 안에서 바같의 다른 세상에 대해 동경하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바깥 세상이 감추어져 있는 것만은 아님을 이야기 한다. 쉽고 수려한 문체를 통해, 우리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에 대한 갈망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유정] 묵상의 산으로 떠나자

이코스타 2006년 11월


고요속의 경외감


Nancy Beach가 쓴 An Hour on Sunday라는 책에서 가슴 깊이 다가온 구절이 있습니다. 현대의 대중은 하루 종일 온갖 소음과 정보로부터 폭격을 받습니다. 핸드폰, PDA, e-mail, voice mail, 멀티미디어 게임, home theater 등 테크놀로지의 폭발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그들의 대다수가 일주일 내내 영혼의 고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교회에 왔을 때 그들은 현대의 현란한 문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고요속의 경외감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Nancy Beach는 미국 중부지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program director 즉, 예배사역의 총 책임자입니다. 윌로우크릭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에 비쳐진 이 교회의 모습은 세속적인 문화와 감각, 록 음악, 일반 비즈니스 마케팅 기법을 교회 안에 수용하여 성공한 모델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 교회의 예배 담당 디렉터가 추구하는 예배철학은 ‘고요’이었습니다. 비록 현대적인 음악과 드라마 영상 기법을 사용하여 최첨단 멀티미디어가 동원된 예배를 디자인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예배 원리는 ‘고요속의 경외감’입니다.


한 동안 한국교회는 윌로우크릭교회가 모델이 된 구도자 예배(seeker service)에 대한 열띤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소위 ‘열린 예배’입니다. 과연 이러한 형식의 예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비난과 수용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 안에 있는 원리를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외형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정죄의식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삶에서 출발


주 일 예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요속의 경외감은 워십리더의 개인적인 삶에서 출발합니다. 워십리더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 6:15)


(Jesus, knowing that they intended to come and make him king by force, withdrew again to a mountain by himself)


예수님은 청중의 인기나 대중의 잘못된 의도를 의식했을 때 곧 바로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 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 왕이 되는 것이 아님을 주님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묵상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능력을 위한 골방


워 십리더는 물론 모든 예배사역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추구를 계속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조용한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떠들썩함에는 너무나 많은 때가 묻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 온 성도가 모여 드리는 축제의 예배도 사역이 필요로 한 곳입니다. 그곳은 능력이 필요로 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사역을 위한 영적인 재충전의 장소는 아닙니다.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고요함과 창조적인 시간이 부족합니다.


세 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골방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면서 잘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아도,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자신을 쏟지 않기 때문입니다. 워십리더는 그 무엇보다 더 임금 삼으려는 세상의 가치관과 성공의 방식, 자기 나르시스적인 문화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홀로 묵상의 산으로 떠나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이 있는 워십리더에 의해 디자인되고 인도되는 주일예배는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것이고, 성도들은 고요속의 경외감으로 충만한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IVF 대표 김중안 목사와의 만남


2006년 7월 Wheaton College에서의 KOSTA/USA에서, 우리는 자그마한 체구의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중안 목사. 오랜 만에 코스타를 찾아온 선배를 만나는 마음으로 김중안 목사와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김중안>



  •  한국 IVF 캠퍼스 간사/ 선교부 디렉터
  •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졸업
  •  미국 코스타 중서부 지역 순회 간사
  •  유학생 사역 (KABF – Iowa City / ISM – IVF US)
  •  현 한국 기독학생회 (IVF) 대표 / 하.나.의. 교회 협동목사



 KOSTA간사.

 1989 년 졸업하고 93년까지 한국 IVF간사로 일했습니다. 3년은 캠퍼스간사를 했었고 2년은 선교부 간사로 일했었습니다. 주말에는 구로공단에서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했습니다. 그당시 수십만이 들어와 있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인권이나 의료 문제등에 대해서 전도하고 예배하고 성경공부하고 했습니다. 의사들의 도움으로 의료진로도 하고 인권상담도 하면서 외국인들이 초창기에 들어오던 때여서 기업주들과 싸우는 그런 일들도 했습니다. 희년선교회라는 곳을 통해서 일을 했었는데 처음이라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후1994년부터 유학을 했습니다. 그런 사역을 했었기 때문에 미국에 유학을 와서도 international ministry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Trinity신학대학원에 와서 3년간 MDiv과정에 있었구요 아내가 Northwestern에서 파이프오르간을 공부했습니다. 97년에 공부를 끝내고 F-2로 바꾸고 아내 지도교수가 이동하면서 University of Iowa에 transfer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미국친구 아버지인 뱃롱목사님 부부, 미국네비게이토 간사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외국, 특히 중국 유학생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역시international ministry 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교회 사역팀navigator, IVF, CCC간사님들과 교제하며 사역을 했습니다. 운동을 통해 외국학생들을 성경공부로 이끌고 한국인 세가정으로 부부성경공부 모임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한인교회가 두개있었는데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한국인 성경공부인 Korean Adult Bible Fellowship이라는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가운데Urbana 2000선교대회에 한국간사로 참석하면서 Urbana대회를 돕게되었는데 코스타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때에는 코스타가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모임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Urbana대회 때에 코스타를 초청했는데 강동인 간사와 유은성 목사님이 참석하셔서 알게 되었고 코스타에 대한 순수성과 열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KOSTA는 EXPO에 Urban대회를 홍보하러 왔다가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코스타 김경수 간사님이 연결을 시켜 주셔서2001부터 2003년까지 3년동안 코스타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Urbana대회를 마무리하면서 중서부 순회간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중서부 지역 한인교회를 돌면서 교회현황과 사역을 조사했습니다. 지역 gpKOSTA같은 작은 모임을 가지면서 지역교회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가서 한국에 IVF에 다시 사역을 하게되었습니다.


2002년이후 코스타의 변화된 모습


2002 년 당시 코스타에서 추구했던 것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행사로 지역교회와 학생들의 삶의 현장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이었는데 그것이 잘 발전된 것 같습니다. jjKOSTA나 gpKOSTA등의 사역을 통해서 더더욱 잘 진행이 되고 있는 것같습니다. 지역교회 목회자님들도 예전에 순회간사로 돌아다닐때 만해도 방어적인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협력하려는 분위기로 많이 바뀐것같습니다. 대회자체로 보면 예전에는 참가자들도 흥분되고 그랬는데 이제는 여러가지 면에서 안정된 모습들이 된것 같습니다. 프로그램, 시간운영이나 모든면에서 간단하면서 집중된 모습으로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스타의 발전을 위한 바램


한 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해OB KOSTA를 시작했었습니다.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코스타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지역교회 출석을 못하거나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화나 상황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고 한국교회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영성을 유지하고 공동체에 소속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신앙의 모습을 키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자기의 삶속에서 영성을 키워가며 자신의 직업이나 전공속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야 하는데 학위만 가지고 돌아와 한국사회에서 삶에 묶여버리는 모습들이 안타까왔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OB코스탄들의 관심사가 코스타에서 추구하는 관심사와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OB코스탄들은 학위를 마치고 돌아가면 교수, 연구원, 정부관료, 기업체에서 특권층으로 위치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과 소명이 부족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그저 안정된 직업속에 안주해 버리는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미국에서 접했던 대형집회, 뜨거움같은 것을 바라지 삶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성을 키워가는 모습들에는 의식들이 부족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대회보다는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gp, jj, eKOSTA여러사역들을 통해서 정신을 공유하고 실제 할수 있는 노하우를 공유해서 한국과 제삼세계에 나가는 운동의 핵심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 있는 코스탄의 문제점


미 국보다는 한국이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가기에 어려운 곳입니다. 시간들이 너무없고 직장에서도 여러가지 회식, 조직문화가 있는데 직장에서 이를 이기고 삶을 살아가려면 영성을 키워나가고 실력도 자라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10년정도 걸리는데 너무 힘들뿐만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현재 성도들이 교회안에서 어떤일을 할수있을까에만 관심이 많고 성도들의 삶속에서 어떤일들을 할수 있을까에 관심이 없습니다. 직장인들이 중심을 지켜가고 현실을 품어내며 영성을 지켜나가는 것에 견뎌내기 어려운 모습들이 있습니다. 물질주의같은 세속주의적인 흐름을 거스려 살아가는 것이 굉장한 믿음과 신념이 요구되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생활동안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통해 양육되고 인생을 영향력있게 살아가려는 모습을 준비해야하는데 미국에서 살동안은 한국과 달리 환경이 너무 좋기 때문에 순진하게 준비하지 못하는 현실의 모습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하는 동안 어떻게 영향력있는 삶을 준비할수 있을까?


그 리스도인의 삶은 소명에 따라가는 삶이라고 표현하고 싶고 일상생활속에서 영성으로 자라고 발휘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교회활동은 일부이지 전체는 아닙니다. 왜 미국땅에 부르시고 내 삶의 목적과 비젼은 무엇인가가 소명가운데 발견되어질 때 자녀를 기르는 것이나 공부를 하는것이나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것이나 교회생활이나 모두가 큰틀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대일관계를 이루어가는 광야적인 영성과 삶의 현장가운데 나타나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저 가족은 먹여살리고 살아가는것에만 국한되어져서는 안됩니다. 성경공부와 예배의 모습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영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모든것들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두가지가 분리될때 세상속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데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모습들이 됩니다. 유학기간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어려운 점들을 해결해 나가며 영성을 키워가는 훈련들이 되어야 합니다. F-2의 경우에는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개인과 가족의 소명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자녀를 기르고 가정을 꾸려가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목적과 비젼을 찾고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IVF와 대안교회


한 국 기독학생회(Intervarsity)에서 전체대표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역의 모토가 캠퍼스와 세상속에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캠퍼스 복음화와 한국 사회속에 하나님 통치가 임하는 비젼을 가지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주사역은 캠퍼스사역이인데 150개 대학 7000명 정도 학생들이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졸업생 사역, 출판부사역(IVP), 미디어 사역, 선교사역등의 분야가 있습니다. 다른 단체와 차이점은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기독교 지성, 신앙과 학문을 강조합니다. 사역방식에서 소그룹중심의 양육을 강조하며 총체적인, 전인격적인 사역을, 지성과 영성, 감성의 균형잡힌 사역을 하기를 원합니다. 50주년을 맞는데 캠퍼스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로 영향력을 넓혀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영국에서 생겨난 단체가 협력체 IFES(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국에 토착적인 운동을 협의체로 만든 것이라 같은 비젼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운영되며 이름도 다릅니다. 따라서 현장에서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이끌어가는 학생리더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역도 협동목사로 돕고 있습니다. 대안교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신촌지역의 젋은 사람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회, 사람들을 준비시켜 세상으로 보내는 교회를 추구하며 팀사역중심입니다. 목회자 권위나 직분이 없으며 전통적인 교회행사들을 줄이며 건물을 주장하지 않고 사역자들에 대한 재정을 최소한으로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쉽게 와서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다시 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몽골사역, 탈북자 사역, 장애아동사역, 대안학교사역, 직장사역등등 각자의 분야에서 일하는 성도들을 교회는 돕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200명이상이 되면 분리하고 유기적인 모습을 유지해 나가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후원하며 사역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교육시키고 리더십있게 이끌어 감으로써 그리스도인이 교회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않고 사회와 단체를 향해 봉사하고 섬기는 모습들을 키워가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대형교회 중심이 아닌 작은 규모이지만 다양한 형태로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많이 일어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