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혜]캠퍼스 사역

이코스타 2007년 3월호

저는 미국에 온 후 계속 필라델피아 근교에 살면서 음악을 공부 했습니다. 한 학교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도 했고 일도 하면서 몇 년 전부터는 후배들과 음대 안에서 작은 말씀 나눔 모임을 만들어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섬기고 있는 캠퍼스 사역을 통해 배우고 있는 일들에 대해 짧은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짧지 않은 시간을 한 학교에서만 있다보니 어느새 새로온 유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학교생활에 도움을 줄 얘기를 해 줄만한 여유도 생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늘 식사시간에 모여 앉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거리들이 있습니다. 연습, 숙제, 시험, 진로, competition, audition 등 음악과 학문에 관한 얘기들을 주로 나누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교회와 신앙 생활에 대한 얘기들도 자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가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인교회도 많다 보니 20명이 넘는 음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얘기를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각기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예배를 위해 필요한 반주자와 지휘자, 악기 연주자와 soloist 들이 크고 작은 교회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 입니다. 음대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크고 작은 한인 교회에서 음악쪽 사역을 돕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우리 학교 음대생들은 매주일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대생들은 교회에 가면 음악의 전문성을 통해 실질적으로 예배를 돕는 자리에서 섬기게 됩니다(대부분의 교회들은 사례비를 지급하지요). 이들 중에는 신앙생활을 우선순위에 두기 보다는 교회의 음악을 도우면서 자신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교회를 나가는 학생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많은 학생들은 어릴때부터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며 자라와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과 많은 얘기를 하다보니 신앙이 있다 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청년부나 또래 그룹 모임이 없는 작은 교회에서 반주/지휘/솔로이스트로 섬기기 때문에) 예배 외에는 말씀을 공부하며 나눌만한 적절한 모임이 없어 영적으로 열악한 환경가운데 있는 것이 음대 많은 학생들의 현실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후배들과 몇번의 이런 대화들을 통해 내 마음 가운데 내가 음대 안에서 이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하게 되었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준비를 하다가 몇 년 전 처음으로 몇 명의 후배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역 교회와 kosta 등의 모임에서 소그룹 리더로 섬겨왔었기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학교 안에서 후배들과 모임을 시작 하는것에 대한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이 아닌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교회를 벗어나 학교 안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이 학교 사람들 눈에 이상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모임을 시작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들을 모임에 오게 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함께 말씀공부 하자고 말 해야겠다.. 하는 생각에 학기 초에 연습실 에서 마주친 성악하는 후배에게 성경공부 함께 하자 했더니 돌아 오는 말은 “저는 전도사님이나 목사님 아니면 함께 성경공부 할 맘이 없습니다” 하는것 입니다. 그날 그 후배의 대답이 속된말로 “언니.. 언니가 하는거 그거 ‘야매’로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는 소그룹 인도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교회 건물을 나와서도 같은 일을 하려는 제가 그 후배의 눈에는 새삼 자격 미달자로 미덥지 않게 보였던가 봅니다. 함께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바라보는 시선도 야릇하던 처음 모임을 시작하던 그때, 가끔 이렇듯 라이센스 없이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취급을 받으면 꼭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 하고 있는 것 맞나요?” 그러나 이런 생각이 늘 오래가지 않았던 것은 지난 수년간 소그룹 나눔 안에서 제자 삼는 일로 나를 훈련 하시고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서 (어쩌면 내가 해야할 숙제같이) 이 캠퍼스에서도 나에게 제자삼는 일을 계속 하시길 원하시고 인도하실 것 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졸업을 앞둔 세명의 후배들과 함께 이렇게 나는 음대 안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마음을 먹게 되고 모임을 시작 할때는 이 일이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게 되었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추운 겨울에 코트도 한 벌 없이 길거리로 나가는 사람의 심정 이었습니다. 역시‘라이센스’ 없는 사람 인지라 유년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공부 해 왔어도 신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지식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구를 사랑으로 품을 자신도 없었기 때문 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음대 안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던 그 해 내 마음은 참으로 궁핍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몇 명의 후배와 둘러 앉아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를 시작한지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궁색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모임을 인도했던 것 같지만 일년이 지나다 보니 그런 느낌마저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여름 코스타를 참석해서 처음으로 학원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신청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 세미나를 가면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를 인도하시던 집사님께서도 본인이 실제로 현재 캠퍼스 사역을 하고 계신 분 이었고 power point presentation 을 하시면서 자신이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겪었던 은혜와 노하우를 나눠주셨는데 참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은 시간 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세미나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생각나는 집사님의 간증 같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내용을 짧게 옮겨보자면, 그 집사님께서 어느날 말씀 공부 모임을 생각 하시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캠퍼스를 걷다보니 한국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답니다. 그 집사님 마음에 저 학생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학생들의 영혼이 불쌍하고 그 캠퍼스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견딜수 없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런 마음으로 캠퍼스에서 말씀을 나누었고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학원 사역자들이 이렇듯 영혼을 바라보며 마음 아프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 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간증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내겐 음대 안에서 처음 모임을 시작하고 지난 일년동안 왜 내 마음이 그렇게 궁핍하고 추웠는지 말해 주는 것 만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안타까와 하시는 그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한 영혼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성경공부는 내가 해야할‘일’이라는 의무감이 내 맘을 더 많이 채우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공들여 말씀공부를 준비하고 모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일년 이었지만 내 마음은 늘 춥고 궁핍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정말이지 그 후배의 말처럼‘야매’로 말씀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함께 말씀을 나누던 후배들이 졸업과 함께 대학원 진학, 한국으로의 귀국을 하면서 모두 흩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성경공부 모임은 다시 텅 비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함께 성경공부 할 지체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제 내겐 더 이상 자신이 없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본 지난 몇 년의 경험도, 다른 사람보다 학교 생활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상황도 별로 내 마음에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난 아직 캠퍼스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이렇게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면 내 맘이 또 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모임을 내 맘대로 없앨수 없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지요. “ 하나님, 이제 우리 성경공부 모임에 아무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연습실에서 만나는 새로운 후배들은 나이가 많이 어리고 아직 그들과 개인적인 교제도 제대로 나눠본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직도 캠퍼스를 보면 눈물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직도 제가 이 모임을 계속 하길 원하시면 한 명의 동역할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줄로 알고 계속 모임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아직도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데는 자신이 없었지만 그날은 그렇게 기도 드렸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못남과 부족한 모습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마치 내가 낙심 할까 걱정이라도 되셨다는듯이 기도를 한 그 날로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날 오후 다른 학교에서 transfer를 해온 새로온 후배에게 말씀 공부 얘기를 했더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눈을 반짝 거리면서 “언니, 우리 교회에는 청년부도 없고 저는 교회가서 그냥 반주만 하는데, 저 누구랑 말씀 공부하고 그런거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하는게 아닙니까.. 제 기도 응답이 된 그 후배와는 지금도 2년째 한 주도 빠짐 없이 말씀을 공부하고 나누는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 학기에 말씀공부와 나눔을 통해.. 참 귀한 배움과 은혜를 경험 했습니다. 더 이상의 인원은 없이 그 후배와 단 둘이 말씀을 나눴지만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 묵상과 그 후배와의 교제를 통해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후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제 마음에 알게 해 주심으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갈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나의 귀한 동역자이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후배와 한 학기의 말씀 공부를 통해 나의 메말랐던 마음에 주님의 은혜의 샘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습니다. 몇 학기를 더 지나면서 말씀 공부 고정 멤버가 조금 더 늘어났고 기도와 나눔은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아직도 저는 마음이 차갑고 부족해서 캠퍼스를 바라보며 더욱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갖길 갈망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으로 옷 입혀주시고 내 안에 채워주시는 은혜로 지금은 더 이상 마음의 추운 겨울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보여드렸더니 빈 마음을 보시고 그곳을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나의‘일’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의‘은혜’가운데로 불러주셔서 나를 생명을 살리며 제자 삼는 곳에 함께 동참 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께서 불러주신 말씀 공부라는 모임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주님을 배워가며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진용진]제자로서의 나의 일상 생활

이코스타 2007년 3월호

일단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생활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잘못된 부분, 작지만 소중한 부분, 들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음성,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보게 하시고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들을 생각해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지난 달인 12월 말 즈음에 시작하여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을 하며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글을 부탁하시는 말씀을 들었을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 평소 생활을 생각하면서 써보면 어떨까’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득, 하지만 선명하게 들었던 생각은 ‘제자가 자신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써야지 ‘제자로서의 삶’이지, 제자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적어보면 그건 ‘제자의 삶’에 대한 글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직도 자신있게 ‘나, 제자입니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빡세게’ 기도 한번 하고 잘 써보자’라는 생각도 들고,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한 달㈏?시간이었습니다.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제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내지는 ‘제자의 삶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라는 글이 아닌, 제 생활을 돌아보면서 어떤 삶이 제자의 삶인지 생각해 본 것을 짧게 나눠보고 싶습니다. 제자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은 이미 eKOSTA게시판에도 여러 좋은 글들이 있고, 많은 신앙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이 많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저기에서 인용해서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제자의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긴 시간과 많은 분량으로 다가와 부담이 든 나머지, 부끄럽지만 저는 제자로서의 일상의 생활이 어떤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는가, 제 생활을 생각해 보면서 나누겠습니다.


약 3년 반 전에 결혼을 하고, 저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어느 정도 단조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보통 우리들이 살면서 겪어보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는, 그런 힘든 일들도 그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있었습니다만…) 저의 생활에서의 주 활동 반경을 생각해 보면 크게 가정, 직장, 그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캠퍼스 정도가 되더군요. (사실, 교회가 집에서 좀 멀어서 거의 주일에만 교회를 가고, 유치부 교사로 섬기는 일 외에는 여러 주 중의 다른 활동에 참여가 많지 않아 주 활동 반경에 포함하기는 조금 힘듭니다. 요즘 들어서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골3:23)


제가 늘 마음에 두는 말씀들 중의 한 구절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California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Thousand Oaks라는 곳에 있는 Amgen이라는 한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부 때 전공이 Biochemistry여서 동부에 살 때는 주로 Lab안에서 조용히 일을 했는데요, 이 회사에서 IT쪽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그것도 management쪽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환경 가운데에 있습니다. 지금은 IT Project Management Consultant로 일하고 있구요. 사는 곳이 Southern California이고 다니는 직장이 Biotech에 IT라 그런지, 회사안에서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이 꽤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꽤 있어서 가끔 성경의 한 부분들을 나눠보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금요일 성경공부를 위해 준비하는 본문의 말씀들을 금요일 성경공부 전에 또는 후에 주변 사람들과 나눠보기도 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성경공부 준비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씀을 들여다 보는 시간도 있고, 본문 말씀이나 다른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옆에서 그걸 본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고 물어보기도 하고 (한국말로 써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가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말씀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생각해 보게 되고, 또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그러면서 함께 일하는 부분들이 좀 더 자연스러워지더군요. 문득, 어느 날 제 마음 한 켠에 두려움이 급습을 한 날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생각하는, ‘잘 할 것’을 저한테 기대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알게 된 후에 더욱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조심하게 되고 하는 일에도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더군요. 저는 솔직히, 너무 제 안의 교만함이 많아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될 때, 많은 주변의 사람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좋게 평가하며 함께 나누었으면 할 때, 너무나도 무서운, 평소에 늘 있으나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제 안의 무서운 점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마다 늘 골로새서 3장23절의 말씀을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일 을 할 때 조심합니다. 저는 또한 개인적으로 제 일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지금하고 있는 일이 나한테 정말 맞는 일인가 묻는 경우도 꽤 있기는 한데요, 그러면서도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이유는이제는 제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이 직장에서의 제 생활이 제 자신안에 형성된 하나님의 디자인을 발견하는 의미있는 사역의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자리로 어떤 모양으로 인도하실지는 모르지만 이런 직장과 이런 일에 저를 허락하실 때에는 그 위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만족이라는 것이 일을 성취할 때의 희열이라던지, 나의 시간과 노력과 노동을 투자한 후에 얻는 금전적 또는 정신적 보상 등의 것으로도 물론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헌신과 정열을 다해 할 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그런 작은 일이지만 그 일을 하고 있는 나와 하나님께서는 함께 해 주신다는 감사함이 들 때 꽤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눅17:10)


California에서 살게되면서 UCLA에서 UCLA학생들, 또는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싶어하는 UCLA주변의 자매님들, 형제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3년여가 지난 지금은 LA서쪽의 Santa Monica에 있는 Santa Monica College(SMC)라는 Community College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시는 많은 지체들과 각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열정과 계획을 갖고 참여하는 지체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전을 받습니다. 성경공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성경공부를 통해서 만나게 된 여러 자매님들, 형제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배우기도 하구요. 성경공부를 함께 하다보면,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지체들의 숫자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고, 저를 포함해서 성경공부 식구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듯 하다가 멀어지는 듯 하기도 하고, 멀어지는 듯 하다가 가까이 나아가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서, 믿음이 잘 성장하는 경우도 있고, 안타깝게도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아서 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구요. 함께 성경공부를 통해 섬기시는 간사들 가운데에 저는 딱히 UCLA에 소속을 두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서, 지금은 옆 동네 학교인 SMC에서 섬길 수 있는 특권도 누리고 있는데요, 이 성경공부 모임은 이제 막 (2006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 시작한 모임이라, 서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나누기를 소망하며, 그런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서로 ‘모이기에 힘쓰는’ 모임입니다. 캠퍼스를 섬기며 갖게되는 작은 소망은 이런 저런 작은 모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일꾼들이 길러지는 하나님의 귀한 캠퍼스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에 미국에 와서, 처음에 영어에 익숙하지 않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아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에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의 보살피심이 있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고생스럽지 않게 적응할 수 있는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캠퍼스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함께 발견하고, 또 발견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바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이 정말 쓸모 없는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사라져 또 어느 곳으로 옮기실 지는 모르지만 그 준비를 겸손하게 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곳을 향하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거룩함과 겸손함과 순종함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여러 곳에 여러 모양으로 흩어져서 곳곳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한 마음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계속하여 세우시고 성령의 끈으로 연결시켜 주시는 그 일에 계속 동참하고 싶습니다.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전9:9)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신 6:5-7)


저는 제 아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UCLA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어서, UCLA학생 아파트에서 약 3년 정도 살다가 지금은 LA에서 약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제가 다니는 회사로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Calabasas라는 꽤 시골 분위기가 나는 조용한 곳에 살고 있는데요, 제 아내가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직 아이가 없어서인지 집안 분위기는 꽤 조용하고 차분한 편입니다. 항상 서로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하고요. 매일 금요일에 있는 성경공부를 서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공부가 있는 금요일 전 후로 그 주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도 하구요. 제가 좀 TV를 오래 보거나 잠깐 졸려고 하면 가차없이 지적을 (꽤 부드러운 표현입니다만) 하기도 하구요. 사실 결혼을 하면서 전도서 9장 9절의 말씀이 새삼 감사하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사는 동안에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라는 말씀. 이 구절, 사실은 저희들의 주례설교를 해 주셨던 목사님께서 주신 칼라 성경책에 빨간색 밑줄이 쫙 그어져 있는 구절이거든요. 꽤 오랜 기간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해서 그런지, 전 제 아내를 많이 사랑합니다. 제 아내도 저를 많이 사랑하구요. 저의 생활의 다른 주된 공간인 직장에서나, 성경공부를 하는 캠퍼스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쉼을 허락하실 때에 참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함께 나눌 때도 물론 그렇구요. 그런데, 전도서 9장 9절의 말씀이 전도서라는 책의 본문의 위치나 앞 뒤의 내용 구조를 볼 때, 그리고 또 그 때에는 아내와 더불어 즐기는 것이 아닌 다른 첩들 내지는 다른 방법으로 즐기는 것들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잠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원하는대로, 이 한 구절 말씀만으로 ‘가정에 대한 의미를 ‘힘든 삶 속에서의 쉼터’, 내지는 ‘아내와 즐기는 곳’으로 한정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는 믿는 사람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당연하게 매우 기본적이며 또한 당연히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서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다른 부분들을 생각할 때,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바로 그 도를 전수하는 터이며 (신4:9-10, 신 6:5-9),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행10:2), 바로 ‘부부’라는 두 사람이 동역하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역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제 생활의 주된 부분의 단면들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며 제가 하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생활을, 이런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제 삶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별 큰 어려움이 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들 마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임을 깨닫게 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그 사랑의 바탕위에서, 직장에서 진실되게 충성하기를 원하시고, 저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에서 거룩하고, 겸손하고,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시고, 제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헌신하는 사역의 출발점이 되도록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데려가실 때에 디모데후서 4장7절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늘 원합니다. 그리고 밑에는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 434장입니다. 1, 2, 3절 다 감사하고 좋은 데요, 1절 만 적습니다.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중간 중간의 말 뜻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던 때 부터 좋아하던 찬송이라, 어른들께서도 이상해 하셨던 기억이 있는데요…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항상 인도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조한상] 2007년 1,2월에 읽은 책


2007/3
 


“이 책을 먹으라”, Eugene Peterson, IVP, 2006
2006년도 말,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보면, 유진피터슨의 책이 눈에 띈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의 두 번째 책 “이 책을 먹으라”를 올해의 첫번째 읽을 책으로 선택했다. “Eat this book”이라는 원제가 한국 번역 제목에 그대로 잘 드러난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 (Dr. Scott Dudley)의 2006년 여름 추천도서 목록에서였다. 아마 Scott Dudley목사도 유진 피터슨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다, 최근 ‘관상기도’나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많아진 걸 보면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 첫번 째 책인 ‘현실, 하나님의 세계’ 에서 유진은, 영성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령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영성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이 책을 먹으라”를 통해 성경을 피상적이 아닌, 몸에 소화될 수 있을 만큼 읽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나눈다.


“렉티오 디비나 (lectio divina)”


저 자는, 최근 성경읽기의 텍스트가 ‘자아’로 대치되어, 자신의 느낌대로 읽는 현실을 개탄한다. 특히,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있다. 다름이 아니라, ‘시장 헬라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약 5000개의 단어 중에 500단어는 신약성경에만 고유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단어들의 의미를 영해하려는 노력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다른 헬라어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였기에, 오리겐 같은 초대교부는 이 단어를 영해하여, ‘실체를 초월하는 떡’이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옥시린쿠스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문서를 분석한 결과, 이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일상 가운데 서민들이 사용한 헬라어로 문헌에는 남겨져 있지는 않은 저급한 헬라어였다고 한다. 그 의미는 그저 ‘신선한’ 또는 ‘오늘 먹을’의 의미였다고… 이렇게 실생활 속의 단어로 쓰여진 성경을 우리는 무엇인가로 덧입히면서,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경고한다. 모두들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고픈 책이다.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 송인규, 부흥과개혁사, 2006
“저희 젊었을 때는 송인규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송인규 목사의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 2003년 KOSTA/USA에서 ‘크리스천의 책읽기’라는 세미나를 통해, 당시 복음과상황의 편집장이었던 서재석 대표의 표현이다. 내가 지내온 대학 시절은, 송인규 목사의 그런 영향력의 막바지에 있었다고 할까…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라는 기독교 세계관 입문을 위한 소책자라던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QT관련 책들은, 나의 대학 시절에도 필독 도서로 꼽혔었으니까 말이다. 그 이후에도 ‘세마리 여우 길들이기’라던가,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 등의 책으로 청년들에게 꾸준한 도전을 주고 계신 송인규 목사의 최근 도서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맹목적인 신앙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성경을 기준으로 바른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 예를 들면, ‘십일조는 꼭 교회에다 내야하는가’, ‘고지 점령론과 낮아짐’과 같은 현실적인 주제부터, ‘가계의 저주’, ‘악의 문제’ 등 기본적인 기독 변증법에 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무려 40여 가지의 주제를 짧은 책에서 모두 다루다 보니, 깊이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분별력’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넘어 ‘왜 해야하는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으로 넘어가지 못한 점도 아쉽다.


 “내려놓음”, 이용규, 규장, 2005
2006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읽지 않을 수 없어서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고, 평이한 간증문이기에 쉽게 마칠 수 있었다. 나도 평탄치만은 않은 유학생활을 한터라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던 만큼, 답답한 면도 많았던 책. 그냥 많이 아쉽다.


 

“교회사를 통해 본 성령의 표적”, Howard Snyder, 나단, 1994
이 책의 일차적인 자료는 노르트담 대학에서의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며, 출판을 통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문에서>


하 워드 스나이더의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몬타나이즘을 시작으로 해서, 각 시대에 성령의 표적이 어떤 형식을 통해 나타났는지를 짚어가면서, 현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들을 이야기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 진센도르프 백작의 모라비안주의, 존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 등의 시작과 상호 관련성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 가면서, 만민제사장직의 중요성과 소그룹의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기존 조직을 인정하는 ‘교회 안의 교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책을 읽어보면서, 왜 하워드 스나이더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나 ‘참으로 해방된 교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교회 DNA’ 등에서, 교회의 갱신을 기존 조직을 강하게 부인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꼭 한번씩은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김영사, 2004
우리 둘째 아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현서와 함께 보던 책에는 세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서로 관련된 것을 연결하라고 했다. ‘꽃, 엄마, 나무’ 중에서 관련된 것을 고르라는 문제에 대해 현서는 ‘꽃’과 ‘엄마’를 골랐다. 이유는 엄마가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뭐… 딱히 틀린 접근은 아닌데, 문제를 채점한다면 분명 오답이다. 문제에서 요구한 것은 식물이라는 관련성 속에서 ‘꾳과 나무’를 연결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를, 동양과 서양의 사고차이를 통해 설명한 책이 바로 ‘생각의 지도이다.


오 랜만에 읽은 비기독교 서적.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성경공부 모임의 한 형제를 통해서였지만, 결국 책을 구입해 읽게 한 것은 작년 코스타에서 양희송 실장의 ‘기독교 세계관’강의를 듣고 나서였다. ‘원숭이-바나나-사자’ 중에서 관련된 두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동양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원숭이-바나나’를 고르는 반면, 서양사람은 ‘원숭이-사자’를 고른다고 한다. 이유는 동양사람은 ‘관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반면, 서양사람들은 ‘분류’의 차원으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란다. 또한 서양사람은 세상을 직선 구조로 이해하는 반면, 동양사람은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다나.


미 국에 나와 살면서, 경험하는, 동서양 사고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동서양의 차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철저하게 서양적이었으니, 동양적 사고를 바로 해석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폴 스티븐스, 죠이출판사, 2005
이 야곱의 이야기는 당신과 내가 하나님께 발견되고 생명으로 가득 차기 위하여, 어떤 다른 장소에 있거나, 다른 가정에서 성장하거나, 다른 특별한 관계를 가지거나, 다른 일터에 있거나, 다른 조직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영성은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 삶의 어떤 경계선 안으로 제한되?않는다. 영성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섦의 어떤 경계선 안에 있는 특정한 구역이 아니라 매일의 삶 한복판에서 우리는 찾으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 땅에 뿌리내린 영성을 지닐 때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며 온전한 인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야곱에게서 살펴본 것 처람) 일생에 걸려 일어나는 과정이다’ – 후기에서…


작 년에 폴 스티븐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복음과 상황에서는 그를 인터뷰해서 기사화했었다. 그 인터뷰 내용 중에 ‘평신도는 왜 설교할 수 없나’는 질문에 대해, 평신도 신학의 대가답게 ‘평신도도 당연히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던 내용이 기억난다. 그 인터뷰 중에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하필이면 야곱입니까’하고 물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는 ‘야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답했다.


폴 스티븐스는 이 책에서, 야곱의 인생을 통해 삶의 각 부분에 – 출생, 결혼, 섹스, 일, 죽음 –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구약의 인물을 중심으로 쓴 책에서 흔히 발견되는 실수라면, 그 사람이 했기에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하겠는데, 폴 스티븐스은 야곱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뒤에서 일하시는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놀라왔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지금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고 있지’라는 착각을 계속할 만큼 필체의 유사성을 느꼈다. 그 만큼 이전의 폴 스티븐스의 책 (예를 들어, ‘평신도신학’이나 ‘그 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의 필체와는 사뭇다르다고 할까.


 “부흥”, 마틴로이드 존스, 복있는사람, 2006
“다른 모든 책은 덮어두고 이 책부터 읽으라!” – 책의 표지에 적혀 있는, 조금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이 문구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나 자신의 표현이 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다른 모든 책을 덮어두고 이 책부터 읽’었으면 한다.


나 는 이상하리만큼 마틴로이드 존스의 책을 별로 읽은 것이 없다. 이유야 여럿있겠지만, 우선 로이드존스 목사의 책은 양이 많다. 강해 설교를 묶은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한 두 문장으로도 표현될 주제를 한편의 설교로 풀어 놓았으니 분량이 방대해 질 수 밖에… 하지만, 나의 신앙 성향을 잘아는 형제 한명이 내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권해주었다. 내가 가진 구원관 등이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주장과 비슷하다나.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장 눈에 띄는 책이 바로 ‘부흥’이라는 책이었다. 평양부흥 100주년인 2007년을 맞아, 모두들 ‘부흥, 부흥’하는 시점에 ‘부흥’이라는 책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척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부흥’이라는 관점을 바로 안다면, 내가 가진 ‘부흥’에 대한 선입견들이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 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른 접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정의한 ‘부흥’ – 하나님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 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런 부흥이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임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결국, 부흥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 부흥을 기대하며, 회개하고 경직된 교리에서 자유로와져야 하며, 부흥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절차를 거치면 부흥을 올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라는 로이드존스 목사의 목소리는 귀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철저하게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이 결여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말로 메마른 무엇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대하며 엎드리련다.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배기찬, 위즈덤하우스, 2005
작년 어느날, 높은 뜻 숭의교회 웹 사이트에서 문희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설교를 마친 문희곤 목사는 뜻 밖의 책을 한권 소개했는데, 바로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였다. 담임 목사인 김동호 목사가 강력 추천하는 책이라고 하면서, 출판사와 계약해서 조금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로 했다고 까지 광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책은 결국 2006 성서한국 추천도서 목록에 조금은 생뚱맞게 올라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책 의 뒷면에 큼지막하게 나와있는 추천인 이름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말에서, 일단 현 정부의 통일 정책과 어느정도 일치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경공부 모임의 한 형제에게 빌려서 읽었는데, 컴퓨터를 전공하는 그 형제가 말하기를 ‘한국 근대사를 잘 몰라서, 책을 읽는데 상당히 어려웠어요’했다. 결국 이 책을 읽다보니, 그 형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한국 역사에 대해 무식했었던가. 한국 역사를 이스라엘 역사만큼만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어떤 책을 읽어도 자신이 가진 선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선지식의 부재에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역사에 대한 각 평가들을 평가할 어떤 명확한 기준도 가지고 있지 못한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런 평가가 옳은 것일까, 아닐까… 답답함을 꾹참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만큼 시간도 많이 걸렸고…


내 용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려고 한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그냥 놔두면 대륙세력인 중국으로 기울기 쉬우니, 의도적으로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 쪽과의 균형을 잡아 나가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아시아의 중립국의 형태로 나가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한다. 북한과의 문제에서도, 북한을 고립시키기 보다는 밖으로 나오게 하여 진화시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을 아직 잘 정립하지 못한 나였기에, 이 책의 주장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한민족’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네가지 사랑”, C.S. Lewis, 홍성사, 2005
C.S. 루이스의 또 다른 책 ‘네가지 사랑’. 작년에 ‘인간폐지’를 읽고 오랜만에 C.S. 루이스의 책을 접했다. 그냥 제목만 봐도 추측할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한 네가지 정의를 설명한 책이다.


선 물의 사랑이란 자신이 희생하면서 댓가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필요의 사랑이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듯이, 선물의 사랑은 고귀하고, 필요의 사람은 저급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필요의 사랑이 어찌 저급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한가지 사랑의 형태를 덧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감상의 사랑 (appreciative love)라는 것으로, “대상을 좋다고 판단하고, 일종의 의무감으로 그것에 주목하며, 설령 즐길 수 없다 해도 그것이 그대로 존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은, 단순히 사물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하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첫번째 종류는 ‘애정’인데, 이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아이의 동네 아저씨에 대한 사랑 등에서 나타난다. 애정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결점을 눈 감아 주며, 다툼 후에도 쉽게 되살아난다. 그런 면에서 자비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애정은 때로는 선물의 사랑을 위장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애정이 사용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은 그런 애정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선물의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하니까. 사랑의 두번째 종류는 ‘우정’으로, ‘뭐! 너도?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사랑이다. 주로 공통의 관심사와 목표를 가질 때 생겨나게 된다. 서로의 사적인 문제보다는, 공통점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좀 더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 소속 자체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독선으로 나타날 위험성이 많다는 내용은 무척 와 닿았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의견보다는, 그 모임의 친구 한명의 의견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니까. 그리고는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네가지 사랑’은, “역시 C.S. 루이스!!”라는 감탄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책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랑에 대한 오해와 위험성을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이유정] 성령이 오셨네

이코스타 2007년 3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작년 말, 예배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김도현 형제가 “성령이 오셨네”라는 2집 음반을 들고 버지니아를 방문했습니다.


그 의 프로필을 참고하면 80년대 주찬양 선교단원을 시작으로 주찬양 10집 ‘회복’, ‘송명희와 함께 하는 시편 23편’ 등 당시 복음성가에는 드물던 장르와 메시지를 선보이며 작곡, 편곡자로 왕성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4월 팔복의 김우현 감독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온 라인상에서 쉼을 주는 커뮤니티 버드나무(birdtree.net) 그늘 아래서 진실하고 소박한 풍경들을 노래하고, 작고 소박한 이들의 친구로 지내는 한편, 팔복 김우현 감독의 작품에 음악 프로듀서로 동역하는 과정에서 조용히 다가온 성령의 바람을 경험합니다. 도현 형제는 이미 고등학생 때 주님을 만났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이후 오랫동안 다시 화석화되어 가는 신앙 속에서 갈증 가운데 있었는데, 최근 말씀을 통한 깊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성령이 오셨네”라는 음반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개 인적으로 김도현 2집 앨범은 지난 여름 뉴욕 뉴저지 예배컨퍼런스를 마치고 박규태 목사 가족과 함께 머리를 식힐 겸 맨하탄을 다녀오는 러시아워 길에서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배 안의 성령의 역할에 대해 컨퍼런스 때 진지하게 나누었던 차라 “성령이 오셨네”, “예수는 나의 힘이요” 같은 곡들이 가슴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개 인적으로 몇 달 전부터 교회의 예배사역 안에 뭔지 모를 갈증을 느껴왔습니다. 사역을 시작한지 4년 만에 예배사역 시스템과 사역 원리, 그리고 사람들은 세워질만큼 세워졌고, 타 주로 확장되는 언투유 예배학교 사역과 600명 출석 성도에서 27개 팀, 40여명의 리더십, 150명의 평신도 예배 사역자라는 열매를 말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예배 안에서의 하나님의 깊은 임재와 성령의 역동적인 운행에 대한 갈증은 손에 잡힐 듯 말듯 했습니다. 사실 이 갈증이 작년 말 제 발목을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 내 안의 영적 부흥에 대한 목마름이 자라가고 있었는데 마침 성령님의 임재를 회복한 도현 형제가 저희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도 현 형제는 2004년 저희 교회에서 한 사랑나누기 집회 이후 해마다 한 두 번씩 자기 집처럼 1 2주씩 머물다 갔지요. 이른 아침마다 함께 산책하며 나눈 많은 대화를 통해 버드나무를 통한 그의 내적 외적 변화들을 감지했지만 이번 처럼 급격한 변화는 처음이라 처음에는 적응이 되질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변할 수 없는 그의 모습들에 와이프와 함께 놀라고 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5 일간 함께 지내면서 나눈 대화 가운데 선명하게 남는 것은 ‘성령에 대한 민감성’입니다. 그 이후 제 삶에 일어난 변화들은 작지만 소중합니다. 매말랐던 눈물이 회복됐고, 성령을 제한했던 사고 습관들, 관념 속에 쳐 박혀있던 복음과 성령에 대한 개념들이 하나 둘 회복되었습니다. 화석화 되었던 말씀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아울러 제안에 묶여 있던 사역, 미래, 관계의 짐들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 러한 내 안의 작은 변화들이 교회안의 예배 사역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습니다. 사역의 포커스가 관계 중심적으로 바뀌고 있고, 실재로 팀 안에 수 년 동안 쌓여왔던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변화들이지만 이러한 회복의 끝은 말씀 안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 ‘성령충만’과 ‘성령의 열매’에 이르겠지요. 성령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변화들… 도현형제를 통해 버지니아에 시작된 성령의 일하심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유정 목사 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디렉터, 좋은씨앗


P.S. 도현 형제가 쓴 2집 앨범의 서문…


“오 랜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15년가량을 전임 사역자라고 생각하고 지내온 시간들이 있었지만, 어쩌면 제 열정으로 제 욕망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발버둥쳤던 시절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름대로 진실한 풍경에 시선을 두려고 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믿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허무한 마음은 거둬지지 않더군요. 그 허무한 시절이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령님은 그러한 시절을 바라보시고 같이 탄식하시고 내버려두지 않으시더군요.


성 령님이 나의 삶에 강하게 임재 하셨을 때 제 안에 피상성은 날아가고 내 안에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를 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 보혈, 내 안에 화석화 되었던, 그저 그리워하기만 했지 한 번도 만지려고 노력도 안 했던 그 하나님 나라… 하나 하나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신.. 너무나 기본적이라 생각해서 건방지게 돌아보지도 않았던 너무나 귀한 단어들을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배우게 하셨고, 이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셨고, 노래로 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은 “부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