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8. 하나님의 의
바울이 사용한 하나님의 의(義)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로서, 불의(不義)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불의는 곧 죄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도덕성이나 선행으로, 즉, 자신의 의로써 나아가 보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선(善)을 의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기 의”가 불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에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 나님의 의는 죄가 전혀 없는 무흠의 완벽한 상태, 즉, 거룩으로서의 의를 말하며, 이것은 곧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이 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기준입니다. 곧,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말은 결코 인간들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들에게는 슬픈 소식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슬픈 소식으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바울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을 알고 있던 당시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어떠했는지 좀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 조건 언약으로서의 율법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이 갖는 기능 혹은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7:26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 누구도 만일 이 율법을 항상 모두 지키지 못한다면 율법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 혹은 진노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천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명기 28장 초반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본문 전체의 문맥을 잘 살펴보지 않고 그냥 좋은 말씀이라고 좋아만 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본문의 내용들을 좋아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28장 1절 서두에 나오는 조건 부분입니다. 즉, 어떤 조건을 만족시킬 때에만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 28:1의 서두를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이하부터 그 나머지 절들과 그 다음 장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모든 명을 순종치 않을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과 저주의 내용들을, 그 끔직한 상황들까지 포함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0. 율법과 하나님의 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 11항에서 좀더 다루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하나님 율법의 모든 내용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율법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을 봅니다.“그래도 열심히 지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든지, 혹은 예수님 당시 어느 젊은 청년의 대답처럼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함으로써 종교적 형식으로서 율법을 이해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2)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으며 엄격하고 엄중한 언약서입니다. 거기에는 에누리가 없습니다. 이 언약은 조건 언약으로서 하나님 수준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불행히도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기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언약의 결과는 축복 아니면 저주인데,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듯이 죄인들 편에서 본다면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확률이 월등히 높습니다. 물론 제사제도를 통하여 회개하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역사 속에서 회복을 이루셨지만, 율법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선포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신적 계약서입니다.


하 나님의 복음은 바로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 있는 율법서에서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거룩한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율법서의 메시지입니다. 에베소서 2:3에서 바울이 명확하게 말해 주듯이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혹은 인류에게 진노하시는 것으로 끝나기 위함은 아닙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도리어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당신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조건언약인 율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구원이 율법과 연관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서 점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입니다.)


11. 율법의 목적과 기능
신명기로 다시 돌아가서 31장 16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모세의 죽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 이방신들을 좇으며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미리 예견하십니다. 20절에서도 이스라엘이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 31장 2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말로 전합니다. 모세가 생존하였을 때에도 끊임없이 여호와를 거역했던 백성들이 모세가 죽은 뒤에는 오죽하겠느냐는 내용으로 모세가 걱정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31:29 역시 참조).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순히 진멸하시기 위해서 함정에 빠뜨리신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스라엘의 타락성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적 언약체결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무조건적 언약체결, 곧 그분의 전적인 자비/은혜에 대한 복선입니다.(3) 그러면 조건 언약인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다음에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1) 신명기의 내용은 계약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 당시 속국과 종주국의 왕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당시 모세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언약의 형태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일반적으로 종교적 사고구조에 익숙하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마태복음 5장 48절의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의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도 모르게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3) 조건언약인 율법을 옛언약(구약 Old Testament)이라고 부르며, 앞으로 설명할 무조건적 언약을 새언약(신약 New Testament)이라고 합니다.

[이은희] 부모의 면류관 (성영이는 날 웃게 해줘요)

하나님이 내게 맡긴 두 아이.. 성영이와 서영이…


이름만 떠올려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두아이…그러나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아이들을 왜 낳았을까 후회 해본 적은 없다. ( 다 자라지 않아 장담 할 순 없지만.. ^^*) 아니 요즘은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점점 진짜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 때문에 참 많이 가슴 앓이를 하지만 또 그 아이들로 인해 나는 인생이 깊어져감을 느낀다.


큰 아들 성영이는 산만한 아이다. 그 나이 또래 남자 아이들이 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엔 때로 지나칠 정도로 좀 많이 산만하다. 매사에 자기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딴청을 부려서 선생님들 속을 꽤나 태우는 모양이다. 그래서 성적표를 받아 올 때 성적보다는 난 매번 성영이의 행동 평가서 때문에 맘이 많이 상한다. 좀 크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아이는 늘 같은 문제로 몇년째 지적을 당해왔다. 그럴때마다 아이를 때리고, 타이르고, 혼도 내보고, 으름장과 협박, 심지어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못하게 하는 벌을 오랜 기간 내려 보지만 그 행동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교회에 아주 모범생, 솔직히 말하면 내 맘에 쏙 드는 성영이 또래의 아이가 새로 오게 되었다. 그 아인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여러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였다. 공부는 물론, 미국에 온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별 문제 없이 미국 학교에 적응하는 듯 하고, 또 예배 시간 이외의 시간에도 늘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어른들에게 인사성 밝고, 또래 아이들을 배려하고, 또 다른 아이들처럼 심한 장난을 치기보다는 있는듯 없는듯 자기 할일을 하는 아이였다. 볼때마다 난 어쩜 어쩜 하며 탄성을 연발했다. 그 아이의 부모님도 그런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는 듯하다. 늘 주변의 칭찬을 받는 그 아이를 보며 언제부턴가 난 그 아이와 우리 아들을 비교하며 맘이 많이 속상해지기 시작했다.. 매번 같은 상황에서 우리 성영인 내 눈살을 찌프리게 하고 모범생인 그 아이는 늘 나에게 안타까운 미소를 안겨주었으니까..


며칠전 성영이 때문에 또 맘 상하는 일이 있었다. 성영이가 또 한번 선생님의 지적을 받게 되는 일이 생겼다. 교회에서 특별 과외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성영이가 많이 산만하고 집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영이가 흥미를 느낄거라 예상은 안했지만 첫시간 부터….으흑 마음이 무너지는듯했다. 매일밤 아이가 잠들기전 그리 기도를 하는데… 밥 먹을 때마다 식탁에서 아이에게 “PAY ATTENTION”을 매번 반복하게도 해보았는데…


성영이 땜에 맘 고생을 하면서 난 그 원인을 전적으로 아이에게 돌리기 보다는 하나님께 “제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하며 묻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걸까?”


“나의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걸까?”


모든 부모에게 첫 아이는 항상 시험 대상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할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육아가 버겁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물론 모든 부모가 첫 아이 때문에 맘 고생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처음 키워보는 아이라 실수를 하게 될 확률도 높고, 그러면서 의도와는 상관 없이 부모 자식 간에 상처를 주기 쉽다.


친구와 이 문제로 서로의 맘을 내어 놓고 고민하다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이들이 내가 원하는데로 잘 자라주는 부모는 정말 행복하고 축복 받은 부모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럲게 완벽한 아이는 드물다는 것이다.


아이 때문에 맘 고생을 하면서 진짜 인생을 배우는 것 같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 같다.


아이들을 인내하면서 내 자신도 인내를 배우게 되고, 아이들의 미 성숙함을 바라보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을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또 아이들이 저지른 실수를 용서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게 된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부모는 그 잘못을 그리 맘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하룻밤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맘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다시 샘솟는다. 어쩔땐 아이를 혼낸 그날 밤부터 맘이 쓰리고, 아이가 가여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흐느껴 울 때도 있다. 하나님도 나의 허물을 이렇게 용서만 하실뿐 아니라 내 곁에서 날 위해 맘 아파 울고 계시고, 거기에 더하여 결국은 완전히 잊어버려 주신다는 믿음을 아이를 양육하면서 배우게 된다.


성경 공부 시간에 성영이 때문에 아픈 마음들을 토해 놓았다. 모범생 아이와 비교한 내 자신을 꺼내 놓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했다. 같이 성경 공부를 하는 멤버 중에 한 엄마가 날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모범생인 그 아이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착하고 좋은 아이지만 그 아인 절 웃게 해주지는 못해요.. 근데 성영이는 날 웃게 해줘요.. 그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 성영이에게 있쟎아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많이 울었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서 내 아이의 장점을 그 누구도 아닌 엄마가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니…아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맘이 들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단점을 알고 계실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장점을 더 높이 인정해 주시고 놓치지 않으실텐데 난 성영이의 해맑은 웃음을 한번도 감사하지 못했었다.


우리 작은 딸 서영이는 오빠와는 반대로 아직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내가 원했던 자녀의 모습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팔불출 엄마라 나를 놀릴지 모르겠지만 여러면에서 늘 나를 행복하게, 기쁘게 해주는 참 고마운 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면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성영이는 날 많이 울린 아이다. 기뻐서도 날 울렸지만 상한 맘 때문에 날 참 많이 울렸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성영이가 더 감사하게 느껴진다. 만약 나에게 서영이 같은 아이만 둘 있었으면 나는 감사하기 보다는 교만한 엄마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속 썩이는 아이를 둔 엄마를 이해 하지도, 위로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런 아이를 둔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런 엄마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난 그런 성영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 아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더 겸손해질지, 얼마나 더 인내를 배우게 될지,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할지, 얼마나 많은 엄마들을 위로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럴때마다 난 성영이 땜에 힘들어 하지 않고 성영이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 아이로 인해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가 지금보다는 깊어질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렇게 너무도 부족한 나에게 “부모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청지기의 역할을 맡기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조한상] 2007년 3월에 읽은 책


2007/4




바쁘게 보냈던 3월. 그래도 5권의 책을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가볍게 나누고자 한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쟈크 엘룰, 대장간, 1992
작년 규장출판사에서 나온 “존재의 이유”라는 전도서에 관한 책을 통해, 쟈크 엘룰이란 인물이 좀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덕분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쟈크 엘룰의 책들이 속속 재판되어 구입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이냐 돈이냐”같은 책들이다. 그간 꼭 읽어야 할 책 중에서 구할 수가 없어 늘 아쉬웠던 책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 책을 접했다. “뒤틀려진 기독교”의 서문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엘룰의 사상은 어렵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사실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쟈크 엘룰의 전반적인 사상에 심하게 반발할 만한 보수적 신학 색깔을 가지신 분들 조차, 주일 예배 시간에 쟈크 엘룰의 말들을 별 생각없이 인용하시는 것만 보아도 쉽게 찾을 수 있겠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엘룰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의 버전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아직 공부도 덜했을 뿐더러, 더 공부한다고 해도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 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감소시킬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한편으?죄된 현실을 묵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엘룰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항함으로 기독교는 늘 혁명적일 수 밖에 없음을, 그래서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치, 즉 ‘무엇이든지 성공하는 것, 효과적인 것, 능률적인 것은 정당하다’는 가치에 대항하여 존재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문제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 현대 문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직접적 공격이나 거대한 변화를 위한 노력이나, 세계 전체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즉 이 전체주의적 사회 속에 살면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2007 KOSTA/USA의 주제도서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한다.


 “Battling Unbelief: Defeating Sin with Superior Pleasure”, John Piper, Multnomah, 2007
Preorder – 아직 출판되지 않은 책을 Amazon.com을 통해 밀 주문해 놓고 받아 보았다. John Piper는 Christian hedonism으로 우리에게 널려 알려진 저자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이며, 믿음이란 ‘하나님인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다.”遮?Christian Hedonism은, 현대의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에 신선한 깨우침을 주지 않았나 싶다. John Piper의 책들은 읽으면서 거의 많은 부분 공감하고 도전 받는다. 딱 한 권의 예외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숨겨진 미소”라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책으로, 나는 여전히 John Piper가 설명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아직 고민해야 할 숙제만을 남겨 주었다고 할까.


“Batting unbelief”는 저자가 이야기 하듯이, “Future Grace”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을 신뢰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상황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기뻐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죄된 모습의 예로, 걱정, 교만, 낮은 자존감, 조급함, 탐욕, 우울, 정욕 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결과로써의 죄인지를 조목 조목 다룬다.


앞 에서도 이야기했지만, John Piper의 책은 읽어서 별 손해 볼 것이 없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서, Piper의 hedonisim이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한 극단적 이론이라고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의 자아 중심적 모습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기독교의 미래”, 이문장, 앤드류 윌즈 외, 청림출판사, 2006
‘기독교의 미래’라고 하면 사실 Alister McGrath가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McGrath의 최근 작 “기독교의 미래”가 있고, 또 약 10년 전의 역작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문장 교수 외 6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이 “기독교의 미래”는 McGrath의 접근과는 사뭇 다르다. McGrath가 그의 책에서, 서구 기독교의 전체적인 흐름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단하고 있다면, 이문장 교수의 이 책은 세 삼 세계의 기독교에 대한 전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즉, 기독교의 중심 축이 이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남미로 이동할 수 있다고 진단하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은 기독교 신앙을 탈서구화하여,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도 건강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함을 역설한다.


나 는 아직, 기독교와 민족이라는 개념을 정리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과연 어디까지이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걸까? 여기 저기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리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의 고민에 또 다른 한 방향을 제시해 준 고마운 책. 얼마 후에는 기독교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정리될 날을 기대해 본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정용섭, 대한기독교서회, 2006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신앙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성숙해 있어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한 후배와 통화를 했다. 그 후배가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사이트에 대해 알려주었고, 인터넷에서 글을 읽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곧 그 분의 책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를 구입했다. 임영수, 이재철 목사로 부터, 김진홍 하용조 조용기 목사, 그리고 박옥수 김기동 목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목사들의 설교를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비평한 책이다.


우 선, 이 책이 목사의 설교가 신성화되어 있는 우스운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용기있게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계기로, 목사의 설교가 신성화되는 오류가 조금이라도 시정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애쓰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저 자의 설교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한다. 특히 임영수, 하용조, 조용기 목사 등의 설교에 대한 비평은 탁월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첫째, 그의 설교 비평에 대한 기준이 좀 더 명확히 설명되었어야 했다. 물론 편집자적 의도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선호하고, 교회력에 따른 균형 잡힌 설교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 박영선 김동호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은, 저자의 연구부족이 눈에 띤다. 예를 들어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최근 저작까지 모두 읽고 생각의 변화까지 읽어 내야했는데, 저자는 박 목사의 바뀐 생각까지는 인식하지 못한 채 비평을 한 점이 아쉽다. 또한 김동호 목사의 경우도, 몇 편의 설교로 비평하면서 생긴 많은 오류들이 보인다. 김동호 목사의 설교 비평은 결국 본질을 벗어났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정용섭 목사의 두번째 책도 구입했다. 한국 교회에 불어올 신선한 바람을 기대하면서…


 “교회 DNA”, Howard Snyder, IVP, 2006
하워드 스나이더의 최신작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표적”, “참으로 해방된 교회” 등의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 갱신에 관한 전문가이다. 이번 책 “교회 DNA”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분명이 그리스도의 형질, 즉 DNA를 가졌을 것이고, 그 DNA는 과연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룬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초창기 저작들을 보면, ‘공동체로써의 소그룹’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온다. 교회 갱신의 부분으로 소그룹을 분명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중기의 저작을 보면,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소그룹’과 ‘생태학’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로 대표되는 사회참여에 대한 강조이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예수님의 DNA를 지닌 교회의 모습으로써, 대형교회도 될 수 없고, 초소형교회도 될 수 없다고 전제함으로써, 메노나이트 신학자로써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들게 하는 부분도 있어 흥미로웠다. 그의 다음 저작을 무척이나 기다리게 한다.

[이유정] 내려놓을 때 역사하시는 성령님

이코스타 2007년 4월


2월 10일 토요일 5시 반, 남부 플로리다 제일감리교회 예배세미나 및 찬양 집회 차 마이애미 지역에 도착. 비행기 연착으로 8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남부 플로리다… 비행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훅 하고 느껴지는 열대아 열기에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마이애미 근교라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마중 나오신 집사님이 1년 내내 관광지인 이곳에 있는 8천 명 정도의 교민들이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이곳저곳 반팔에 반바지 차림의 현지인, 관광객들에 비해 추위에 찌들어 중무장했던 우리 옷차림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저 녁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기다리던 10여명의 찬양팀과 바로 세미나 시작. 주제는 “20분짜리 찬양 디자인 실재”. 처음 이런 세미나를 접하는 이들의 눈빛이 유난히도 초롱초롱 빛났다. 세미나 끝나고 바로 연주팀과 보컬팀으로 나누어 미리 준비한 주일찬양 연습시작. 나름대로 쉽게 디자인한 프로그램이 이들에게는 생소해보였다. 기존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키보디스트가 타주로 가면서 새롭게 조인한 키보드주자는 팝 스타일 코드연주에 익숙하지 않아 잔뜩 위축되어 있었고, 드럼이나 신디사이저 등 그 외의 연주자들도 기초가 약한 상황이었다.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연주하자고 했다. 모두들 이런 시간이 너무 귀해서 더 하기를 원해 11시 가까이 끝났다.


지 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들 예훈이는 샤워하자마자 혼자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 와이프도 무리한 여독에 지쳐 보였다. 나도 피곤했지만 주일에 있을 아침 예배 찬양과 오후 세미나, 그리고 저녁 찬양집회에 필요한 이런 저런 준비를 끝내고 나니 새벽 1시 반… 하나님께 약간의 불평어린 기도가 흘러나왔다. ‘하나님 왜 이렇게 벅찬 일정을 허락하셨나요. 일단 순종하고 가지만… 저희에겐 이번 일정을 온전히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잠들기 전,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을 읽으면서 몽골 베르흐 지역 예배처소의 벌러르 자매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잃어버린 소를 찾다가 예배에 늦을까봐 그냥 교회로 뛰어온 자매이야기이다.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소를 다시 찾게 해준 실재 사건이다. 남부 플로리다 연합감리교회를 위해 불평까지 내려놓기로 했다.


주 일 오전, 다시 한 번 기도… ‘주님, 힘주세요. 왜 이 교회로 부르셨는지 깨닫게 해주세요.’ 아침 식사 할 시간도 없이 교회로 향했다. 어제 연습 때와는 사뭇 다른 정돈된 연주팀, 보컬팀의 모습에 놀랐다. 예배시간 10분전, 찬양팀 기도 시간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다.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채우신다, 우리가 예배 나아가기 전에 우리 안에 높아있는 것들.. 다 내려놓자.” 모두들 뜨겁게 기도했다. 그 순간 성령께서 새 힘을 주심을 느꼈다. 지쳐 있었던 몸에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주 일 예배 때 전 성도들이 찬양팀과 하나가 되어 뜨겁게 찬양했다. 눈앞에 성가대원들이 누구보다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통과 현대가 무리 없이 조화된 예배, 예배 전체가 물 흐르듯 은혜가 충만했다. 1시간 30분간의 예배에 온 성도가 푸욱 빠진 느낌이었다.예배 후 1시 40분, 와이프는 “찬양팀 운영의 실재” 세미나, 나는 “성가대 사역, 전통적인 관점 바꾸기” 세미나를 시작했다. 와이프는 지역교회 찬양팀 운영의 원리와 구체적인 노하우를 다루었다. 성가대 세미나의 포커스는 2가지… 성가대와 찬양팀이 지역교회에서 서로가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연주에 집중하는 전통적 성가대의 역할이 회중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인도하는 예배인도의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강조점은 하나의 봉사 차원을 뛰어 넘어 사역이라는 관점의 변화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성가대원들의 눈빛을 보며 이 교회의 예배사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아내의 세미나는 오후 4시 반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보너스로 보컬팀은 물론 연주팀까지 한명 한명의 소리 만들기와 블렌딩 노하우도 터치했단다. Oh my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이들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저 녁 식사 후 집회를 위해 7시에 다시 교회로 도착, 아내나 나나 많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겨우 힘을 내어 집회준비에 들어갔다. 몇 곡 돕기로 한 찬양팀들도 많이 지쳐 있었고, 한 자매는 도저히 설 힘이 없어서 회중석에 남기로 했다. 키보드로 섬기는 자매 한 명은 서로 약속 시간이 빗나가 교회 밖에서 1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서너 곡 연습하려고 리허설을 했지만 무리였다. 무리하지 않고 쉽게 가기로 했다.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내려놓고, 찬양팀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가운데 또 한 번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새로운 힘을 주셨다.


집 회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면서 예수님께 모든 포커스를 두고 찬양과 간증을 진행했다.아내는 특유의 입담으로 7년 만에 새 앨범을 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간증했다. 아내의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회복되었다. 내 간증에서는 언투유에서 경험한 Simple Life, Simple Ministry의 포커스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으로 양을 먹이는 것임을 말하며 “아버지 내 삶의 모든 것 되신 주”의 아버지 대신 예수님으로 바꾸어 찬양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복음을 전했다. “당신을 향한 노래”를 부르며 예수의 사랑으로 서로를 축복하는데, 순간 억제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내 온 마음과 전신을 적셨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더 이상 멘트도 노래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개인적으로 처음이었다. 회중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임했지만, 바로 눈앞에 있던 반주자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집회 초반부터 계속 눈물이 보였는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신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역사했다는 것이다.


그 때 주님께서 이런 마음도 주셨다. 사실 그 지역의 개 교회 관계들이 초창기에는 좋았는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깨어졌다고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가득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남부 플로리다 지역의 한인교회들이 하나 되고, 부흥하는 초석이 되기를 회중에게 부탁했다. 최근 동부지역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부흥의 조짐들을 담대하게 나누었고 이 교회가 또 하나의 부흥의 불씨가 되기를 도전했다. 뜨거운 기도와 찬양으로 집회를 마쳤다. 집회를 마치고 많은 교우들이 찾아와 기쁨을 나누었다. 처음 집회 시작할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교우들의 밝은 얼굴모습에 담임이신 장찬영 목사님도 기뻐하셨다. 조금씩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힘든 일정으로 부르셨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약함을 들어서 강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더 세미하신 하나님의 사역은 다음 날에 이어졌다.


다 음날인 월요일은 사실 가족과 함께 쉬기 위해 추가로 잡은 일정이었다. 교회 측에서는 한 번이라도 더 세미나를 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 가족도 오랜만의 쉼이 그리운 상황이었다. 잘 설득해서 월요일 하루를 쉬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상황은 ‘꿈 깨’였다. 일단 그렇게 화창했던 날씨가 주말부터 갑자기 비구름이 끼면서 월요일은 세찬 비바람까지 동반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배사역 책임자이신 양 권사님 내외분과 찬양팀 리더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찬양팀 상황을 듣게 되었다. 풀어야 할 숙제들이 보였다.


아 침에 권사님께 전화 한통이 왔다고 했다. 바로 어젯밤 그토록 눈물을 흘리던 반주자였다. 어제 집회 때 남편이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와이프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그동안 아내의 반주사역을 이해 못하고 핍박만 하던 남편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아내를 이해하게 되었고, 전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했단다. 반주자가 흘렸던 어제 눈물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찬양팀 적응도 쉽지 않았지만, 가정에서도 고통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그녀의 중심을 하나님께서는 그날 축복해 주셨다.


마 침 찬양사역에 관여하고 계신 전도사님 부부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교제했다. 오후엔 플로리다 지역에서 가장 크고 젊은 교회인 갈보리 채플과 전도폭발의 창시자인 제임스 케네디 목사로 유명한 코랄릿지 장로교회를 방문했다. 만 오천 명 교인인 갈보리 채플의 예배사역 자원봉사자 규모가 우리교회보다 작은 것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전문적인 미디어 사역과 찬양사역, 방대한 건물과 교육시스템의 규모에 놀랐다. 코랄릿지 장로교회는 전형적인 백인교회인데 전통예전을 고수함으로 성도 대부분이 장년층과 노년층이다. 미국교회의 전형적인 구세대와 신세대 교회문화가 교차하는 재미있는 지역이었다.


저 녁 때 찬양팀과 식사를 함께 나누고 교회 강대상 카펫에 둘러앉아 나누는 자유토론 시간을 가졌다. 시작 전까지 육신적으로 지치고, 마음도 잡히지 않아 막막했는데 막상 발제를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내용이 ‘관계’ 이슈였다. 어떤 부분은 아주 깊게, 매주 구체적인 사례로, 때로는 터져 나오는 폭소로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토론이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드러나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결국 팀워크와 리더십의 이슈들이었고, 경배와 찬양 사역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일어나는 혼란들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언투유 예배사역의 핵심원리가 팀 사역이었고, 그동안 사역과 관계에 대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온 터라 이 찬양팀의 상황 하나하나가 더더욱 피부로 다가왔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올려드리고 통성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향후 이 교회의 예배사역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세 미나를 마무리하면서 찬양 팀원들의 한결같은 반응을 보았다. 그냥 집회만 하고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자기들과 삶을 나누고, 사역을 나누며, 문제를 들어준 것이 너무나 힘이 되고, 구체적인 회복과 도전이 되었단다. 우리 부부에게도 지역교회 예배사역을 어떻게 컨설팅하고, 회복하며, 섬겨야 하는지 정리할 수 있었던 참으로 소중한 2박 3일이었다.


모 든 순서를 마치고 호텔 로비까지 따라온 드러머 형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이번 주말에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혼 승낙을 위한 중요한 미팅 때문에 뉴욕으로 가야 했었단다. 그런데 왠지 성령께서 그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도록 하셨는데, 이번 2박 3일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모델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며 예배사역에 재 헌신한 마음을 구구절절 나누었다. 비전을 품고 자신을 헌신한 새벽별과 같은 젊은이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흥분이 되었다. 두 손을 잡고 이 젊은 청년의 앞날을 마음껏 축복해주었다.


남 부 플로리다 제일감리교회의 필요에 대한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듣지 못하고, 쉴 생각만 했던 아직도 부족한 우리 부부의 인간적인 성향들을 날씨까지 움직여 막으시고, 예배 팀 회복에 올인 할 수 있도록 하신 세밀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전율이 느껴졌다.


(진짜 후기)


버지니아에 돌아온 뒤, 한통의 전화가 왔다. 찬양팀 부장이신 양 권사님이셨다. 우리가 떠나자 마자 화창한 날씨가 회복되었단다. 플로리다 년중 놀기에 가장 좋은 날씨로…?&%


1 주일 후, 또 한통의 전화가 왔다. 제일감리교회 담임이신 장찬영 목사님이셨다. 내년도에 언투유 예배컨퍼런스를 그 지역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예배 컨퍼런스를 통해서 플로리다 지역을 위해 교회를 오픈하고, 관계 회복을 위한 계기로 삼고 싶다는 고백을 하셨다. 놀라웠다. 주일저녁 집회 때 주님께서 주신 마음을 나눈 것이 실재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성령님께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역사하시고 열매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