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전쟁-성인경

이 세미나는 2003 KOSTA/USA에서 한국 라브리 성인경 목사의 세계관 강의인 ‘세계관 전쟁’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중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사스와의 전쟁. 이렇게 전쟁의 연속이지만 진정한 전쟁은 영적 전쟁이고 영적전쟁의 최전선에는 세계관 전쟁이 있습니다. 이라크전쟁도 종교간의 전쟁이라고도 하고 문명간의 충돌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전쟁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라크의 국수주의간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우리의 삶속에 매일 일어나는 심각한 전쟁입니다. 하지만 세계관 전쟁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와 문화 배후에는 세계관의 전쟁이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와 개인간의 전쟁을 살펴보면 그 국가과 개인의 가치관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정당성이라는 가치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누가 참이냐 거짓이냐 누가 선이냐 악이냐를 구분짓는 전쟁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3절에 보면 마지막 때가 올 때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는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영적인 전쟁이 다가오는데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세계관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시대에 여러분은 얼마나 준비되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왜 필요한가입니다.
아내와 시장을 보러 가는데 어떤 아줌마가 아이손을 잡고 가다가 “얘야,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아저씨처럼 된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봤더니 우리 교회에서 믿음 제일 좋다고, 기도많이 한다고, 전도 제일 잘 한다는 아주머니였습니다. 믿음은 좋은지 몰라도 세계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사고방식, 직업귀천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믿음이 좋은지 몰라도 아주머니는 잘못된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서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청소부가 청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공부 열심했는데 나쁜짓 해서 감옥에 가있으면 어떻게 된 겁니까? 공부 잘 못했는데 지금 이웃을 도우며 훌륭한 삶을 살아가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리고 이때쯤 고려대학교 총장 홍일식 박사가 쓴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라는 책에서 한국 사람은 일상생활은 유교식으로 하고 사고방식은 불교식을 하고 신앙생활은 무당식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평생을 유학자였던 그가 지적한 이내용은 저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믿음만큼 그 사고방식이 하나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잘 가르쳤을지 몰라도 사고방식이 변화되고 세계관이 바꾸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면 너희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뜨거운 마음,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사고방식, mind,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라 라는 말입니다.


저는 라브리 선교회에서 청년대학생들을 돕고 가르치는데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성경의 이적기사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사람인데 부모나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더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한달을 방학을 줄테니 해결하고 오라 했답니다. 어느 전도사님을 찾아갔더니 전도사님이 기도얼마나 하나하고 물었습니다. 십분도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더 기도하고 와라 했답니다. 그렇게 해도 의심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 찾아갔더니 성경을 얼마나 읽어라고 물어서 하루에 한장도 못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성경 더 읽고 와라 그랬습니다. 라브리에 와서 치밀하게 공부를 하면서 의심이 풀렸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도 앞에서 이야기한 아주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것과 아는 지식이 하나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청년은 세상에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과 초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이 세상이 Closed system, 자연의 법칙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나 개입할수 없다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open system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자연법칙이 멈출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비성과 합리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렇게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합리성의 반대개념은 비합리성입니다. 신비적인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리하면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무기력과 영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고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을 극복할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바른 정신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혼돈을 가지기 쉬운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얼마전 동성애는 불법이라는 법률이 인권을 유린하는 위헌이라고 대법원에서 통과를 했습니다. 불법으로 내린 동성애 법안이 인권을 무시하는 법안이라고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동성애의 문제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돈, 윤리의 혼돈 이런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는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관 전쟁에 대처하고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할 때에 세계관을 사용하지 않다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낌의 시대이니까 감각적으로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든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하고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방해하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객관주의입니다(Objectivism). 성경은 성경이고 학문은 학문이다 성경은 신앙적인 문제에서는 진리다 내가 공부하는 학문분야에서는 성경이 권위가 없고 전문가가 권위를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과 전공분야를 분리해내는 것입니다. 아까 아주머니처럼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고 분리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아주 좋은데 사고방식은 유교적, 불교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론자가 됩니다.


두번째는 성경주의입니다(Biblicism). 성경을 너무 사랑해서 세상의 지식은 필요없다. 오직 성경만 공부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주의자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만 진리고 세상의 지식은 배설물이다라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되어 학문세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지적자살을 감행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믿음만 좋으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주의라고도 하는데 특히나 유학생들에게는 공부가 잘 되지 않을때에, 시험에 떨어졌을 때에 더 큰 유혹이 됩니다. 바울이 배설물이라고 할때에는 이성에 기초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초된 바른 지식까지 다 내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는 혼합주의입니다(Synchretism). 세상의 지식과 성경을 적당하게 섞는 것입니다. 우리 유학생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비빔밥, 섞어찌게처럼. 로렌스 클레이드라는 사람은 야채샐래드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야채를 여러가지로 섞고 성경으로 드레싱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융합이라고 합니다(Harmonization). 혼합주의의 문제는 절대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되는 것이고 다원주의적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공부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무엇일까? 공부하는 방법을 이야기할때에 internal 원리라고 하는데 공부할 때에 사용되는 머리(이성)와 경험(감각)을 말합니다. External원리는 공부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물리는 세상과 우주, 사회학은 사회의 현상, 체육은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자연과 세상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인 종교적인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는 공부의 원리에 신앙의 원리를 더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각에 Internal원리인 영성과 성령이 더해져야 합니다. 자연과 세상에External원리인 하나님과 성경, 교회를 더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한쪽만 가지면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 나머지만 가지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종합을 해도 안되고 혼합을 해도 안되고 통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통용되는 것이 종합입니다. Synthesis 종합은 정과 반을 통해 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혼합은 다 섞어 놓는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세번째Integration 통합은 기준이 있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있어서 기준을 가지고 옳은 것은 다 받아들이고 옳지 않은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통합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에베소서 4장13절을 보면 믿는것과 아는것에 하나가 되어라고 나와 있습니다. Unit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남녀가 한몸이 되었다고 할때에 unity,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unity가 된다라고 합니다. Unity원리는 믿는 것과 학문하는 것에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이 통합의 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통합한 사람을 mature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예수님의 것으로 바뀌어지지 않기때문에 기독교인이 한국인구의 절반이 되어도, 국회의원의 절반이 되어도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원리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잘때까지 생각하는 화두들이 있습니다. 돈, 섹스, 권력. 세상사람들에게는 이 세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도이벨트라는 사람은 기독교인은 창조, 타락, 구원의 세가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폭넓게 설명하기를 존재론적인 원리, 도덕론적인 원리, 인식론적 원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존재론은 신이 있나? 내가 누구인가?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다룰때 가장 기본적인 설명방법은 세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신과 인간과 우주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모른다 (nothing nothing). 두번째 설명방법은 비인격적인 것(impersonal)에서 세상, 신, 인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진화론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격적인 것(personal)에서 인격적인 것이 나왔다. 성경적인 존재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중에 인간을 만드셨을 때는 자신의 모습대로 만드셨으나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지 않았지만 그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솜씨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다. 제한적이다. 제한적이지만 사는데 문제가 없다. 자연은 자연법칙도 있지만 초자연적인 법도 있는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셨다. 이것이 Open system을 믿는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기본적으로 closed system이지만 closed system을 깨고 open system으로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영화입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이성과 합리성을 닯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과학활동을 할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었다고 하고 오펜하이머는 근대과학의 어머니는 기독교라 했습니다. 현대과학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더 홈즈, 휘튼의 철학교수는 창조는 세가지 과학을 가능하게 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재료, 공간, 시간은 실험과학이 가능하게 했다. 실험과학의 데이터를 가지고 합법칙성과 인간의 이성을 이용하여 두번째 이론과학의 근거를 만들었다. 세번째 이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응용과학의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론적 원리.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타락했다. 인간이 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가? 왜 죄를 짓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기에 대해 수백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념론에서는 고통과 악과 죄는 환상과 관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원론에서는 세상은 처음부터 악과 선이 있었다. 처음부터 병과 고난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사회주의자의 결정론에서는 환경이나 교육방식, 경제수준에 의해서 악이 정해진다라고 합니다. 동양사상을 보면 불교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도교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이론은 도덕적 타락은 죄에서 왔다는 범죄론입니다. 범죄론은 세상의 고통과 죄는 실체고 비정상이고 쓰라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병과 죽음이 없이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비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덕과 싸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식론적 원리는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성의 능력을 믿던지 이성을 극단적으로 믿지 않고 체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비판적 실제론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것은 옳은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초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식론적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사고하면 판단오류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와 말씀의 도움을 받아야지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인식론은 이성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꽤가 많아서 이기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순수감정에 의해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합리적 인식론은 서양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성에 의해서만 결정하고 판단하고 진리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기반하에서 이성을 사용하고 직관들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정민] 주님의 아이 내가 키우기

하나님의 선물로 만난 두 아들이 문득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기 위한 도구같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금 처음 첫 아들 대인이를 만나게 된 시간들을 되돌아 보곤 한다. 온몸이 온전한 아기의 첫울음을 듣게 되던 그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며 매달렸었는지, 믿음의 첫발을 내딛는 나의 간절한 기도를 귀히 보신 주님의 선한 손길에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 첫 아이 대인이는 자라가면서 늘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서 엄마인 나를 당황하게 했다. 동생 솔인이가 태어나고도 시샘 한번 하지 않는 너그러운 아이, 늘 엄마, 아빠의 훈계를 달게 받는 순종적이고 온유한 아이, 잘 울지 않고 떼를 부리지도 않던 그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실상 단순한 조숙함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대인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학교생활 속에서의 어려움이 단지 언어소통의 문제 때문이리라 일축하며 의도적인 느긋함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던 세월이 한해 두해 쌓여가던 중 문득 대인이가 왜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른 아이에게 안 좋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믿을만 했지만, 어째서 친구들을 가까이 사귀지 못하는지,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이런저런 내용을 어려워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일상적인 생활의 틀을 익히는 데에 어려워 하는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예를 들면 방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든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오른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든가 등등…-을 제대로 못할 때 반복에서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느린데다 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마는 아이를 보면 나는 늘 인내심의 한계에 부딛히곤 했다. 작은 잘못을 바로잡아주려는 좋은 의도는 온데간데 없고 늘 필요이상의 야단을 맞고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를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평범하리라는 기대(착각) 속에서 늘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엄마의 무지함에 있었는데도 늘 피해는 아이에게로 돌아가곤 했다. 자기 반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 그리 관심이 없고, 자신이 뭘 챙겨야하고,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지내는 대인이를 보며 이 아이를 위한 새로운 대안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수십번 마르고 닳도록 보는 아이, 좋아하는 것은 읽는 순간 다 외워지는 아이, 누군가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에 따라가는 것을 즐기지도, 잘하지도 못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은 너무도 집중해서 오래 할 수 있는 아이, 자기가 만든 만화책을 읽으며 좋아라 키득거리고 함께 보기를 원하는 아이,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 아이, 그래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하고 야단 맞지 않을 상황에 스스로 매를 버는 아이… 남편과 종종 대인이를 놓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대인이는 너무도 사고가 자유롭고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창의적인 아이이며, 주변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다 할 만큼 자기세계에 쉽게 빠져드는 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너무도 긴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인이를 대하는 태도와 방향이 달라져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대인이의 독특함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기까지 둘째 솔인이의 몫이 아주 컸다. 갓 태어나서 솔인이는 참 많이 울었다. 그때 대인이는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솔인이는 왜 그러냐며 남편에게 푸념을 하는 순간, 솔인이가 보통의 아기이고, 대인이가 독특한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말을 익혀가는 속도도 오히려 솔인이가 빠르고 발음도 정확했다. 옹알이와 자기식의 표현이 많았던 대인이와는 달리 솔인이는 일부러 연습을 시키며 가르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스스로 말을 익혀갔다. 솔인이가 프리스쿨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아이의 상반된 모습은 물과 불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솔인이는 학교생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다. 학교 친구들간에 일어난 일이며, 누가 어디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오고, 누구의 아빠가 하는 일은 뭐고… 시시각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심지어 차 안에서 남편과 나누는 대화 속에도 순식간에 끼어들어 참견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늘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형이 야단을 맞으면 스스로 조심하며 눈치있게 굴고, 자신의 잘못한 정도보다 늘 덜 야단 맞는 길을 잘도 찾아내곤 한다. 온 몸의 감각이 밖을 향해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깨어있는 듯 솔인이는 잠을 자다가도 너무도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즐겁게 놀 수 없는 아이가 솔인이이다. 텔레비전을 봐도 혼자서는 재미가 없어 금방 꺼버리고 마는 이 아이는 너무도 사교적이고 주어진 과제는 틀에 맞게 잘 해내지만, 방향이 제시되지 않은 일은 금새 울상이 되어 엄마나 아빠의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그렇게 뭔가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에 대해 막막해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기분이 든다. 반면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에 두려움이 없는 대인이는 아빠를 많이 닮은 아이이다. 주변에 대한 관심의 양극단을 보이는 것도 우리 부부를 각각 닮았기 때문이다. 생김새나 식성부터 성격, 성향, 재능까지 모두 놀라울 만큼 대인이는 아빠를, 솔인이는 엄마를 닮았다. 하나님은 자녀가 물려받는 수많은 부모의 특성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사랑도록 만드신 걸까.


초보 엄마 시절,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의욕으로 어설프게 엄하기만 했던 나는 아이들이 주님의 아들로 잘 자라게 해달라고, 주님의 지혜를 구한다고 기도는 했지만 정작 늘 판단의 중심에는 내가 있곤 했다. 아이가 엄마를 우습게 아는 듯한 태도나, 똑바른 대답을 하지 않을 때면 쉽게 분을 드러내게 되었고,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아이를 위해 정한 듯했지만 때때로 나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영 다른 반응을 보인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두 아이를 재우고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어리고 귀여운 아이들을 참 많이 야단치며 키웠었다. 그 시절 내 머릿속에는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강하게 박혀있었기에 나 스스로 얼마나 잘못 흘러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회개의 간구는 한참 후에서야 나 자신을 바꾸게 해 주었다.


아직도 가끔씩 그런 나쁜 옛 습관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할 정도로 마음 아픈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각각에 맞는 도움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조금씩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도 다른 두 아이를 같은 방법으로 키워왔던 옛 모습도 버려가고, 원인 모르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대인이를 대할 때에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여전히 그 아이의 깊은 세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르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내 마음과 생각을 채우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아이들은 바르게 자란다는 걸 뒤늦게사 깨닫게 된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길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귀한 영혼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키우는 길이라는 걸 알기에 이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늘 느끼기를 구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아이들이 내게 있음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내게 속한 물건처럼 다루지는 않도록,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느껴지는 사랑을 나 스스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날마다 다짐한다.

[조한상] 2007년 4월에 읽은 책들


2007/5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올해의 코스타 주제 때문인지, 지난 달에는 유독 복음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사조에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다. 쉽지 않게 읽었지만 그만큼 도움이 되었던 책들을 간략하게 나누고자 한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Alister McGrath, IVP, 1997
‘미래’에 대해 논한 책을 출판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읽는 일은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Alister McGrath가 2005년에 ‘기독교의 미래’라는 비슷한 이름의 책에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들어선 기독교의 미래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는 20세기를 지나온 복음주의의 특징들을 정리하고, 이제는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버린 복음주의의 매력과 잠재된 어려움 등을 이야기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10년이란 세월은 한 저자가 사용한 ‘미래’라는 단어가 ‘과거’ 혹은 적어도 ‘현재’가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저자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리하고 많은 장점들을 이야기한 후에 (이 정의는 이 책 이후에 출판된 많은 책들에서 복음주의의 정의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복음주의가 미래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영성’을 개발해야 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파주의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고 보면, 최근 10년간 유진 피터슨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계열에서 영성을 그토록 강조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와 대항하면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이론화하고 지성화하면서,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을 소홀히 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 중의 하나가 영성신학이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복음 자체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던 복음주의.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너나없이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진정 복음주의는 무엇이고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Lesslie Newbigin, IVP, 2005
작년,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열흘남짓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 기를 쓰고 기독서점을 다녀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서점에서 눈에 띄어 구입해온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레슬리 뉴비긴의 ‘포스트모던시대의 진리’이다.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라는 호칭이 늘 붙어 다니는 레슬리 뉴비긴의 책은 현대 다원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늘 읽기 쉽지 않아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적은 분량과 김기현 목사의 깔끔한 번역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한 역자의 표현이 탁월하여 그냥 빌려본다.


“선교사로서의 현장성과 학자로서의 학문적 분석과 적용이 탁월한,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의 지도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번뜩이고 탄탄한 논리로, 현대와 탈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권위의 원천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가 이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권위에 관한 모든 주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는 교회가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신적 권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뉴비긴은 이것의 올바른 사용 방법과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이야기로서 성경을 말하며 그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살아갈 때에야 현대 사회에서 복음의 적실성을 주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책 뒤 표지에서>


다소 이론적인 글에 이어지는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아갈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이지 나도 이렇게 하고 싶어졌다.)


“최종적인 요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만약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그건 당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합니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이는 복음 이야기를 인증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여 몇가지 더 근본적이고 좀더 신뢰할 만한 진리를 제안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분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 이야기가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그 이야기의 일부분일 때에만 확실해진다. 결국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 공로와 무관하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이 이야기를 말構? 이 초대를 전하도록 부름받고, 위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도, 내 초대도 아닙니다. 강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가 만약 구세주의 은혜가 역사하는 공동체로부터 온다면, 매력적으로 다가 올 것이다. 받아들여질 지의 여부는 우리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안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의 표시다. 우리가 아니라 오직 초대하는 분에게 통솔권이 있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Alister McGrath, IVP, 2001
책을 읽고 나서, 관련된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 있다. Alister McGrath의 복음주의에 관련된 또 한 권의 책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지성’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 이 책의 원제이다. 제목으로만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복음주의의 지적인 토대와 정합성, 학문적 타당성을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에서 고찰함으로써, 복음주의가 전통적으로 학계에서 보였던 부정적, 소극적 태도를 극복하고 주복할 만한 사상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저자는 복음주의의 신학의 지적 정합성을 다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를 이야기하고는, 현대에 복음주의와 경쟁 선에 있는 후기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 등을 다룬다. 하지만, 내공이 많이 부족한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후기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저자도 ‘지켜보자’고 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왜 후기 자유주의라고까지 불러야 하는 걸까? 그저, 스탠리 하우워어스를 후기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언급한 것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눈에 띈 한가지는, ‘계몽주의가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에서, 현재 내가 하고 있을 법한 성경공부를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다소 냉랭하고, 초연하며, 합리적으로 성경게 접근하게 만드는 영성관’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읽으면서 감정을 개입시키거나 인간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본문에서 주제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방법이 상당히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내용은 눈으로 확인한 기쁨을 누렸다고나 할까. 그나 저나, 이런 배경에서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같은 책들이 나오게 되었지 않을까 싶다.


“축복의 혁명”, 박철수, 뉴스앤조이, 1990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말은 기독교적 축복관을 갖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축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축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무엇보다도 회개는 복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사도바울을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중에서)


기독교 서적 사이트에 들러 베스트셀러 순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 몇년동안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성경적인 복과 세상의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책들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 상황 속에서, 그런 세속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책들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더 커지는 웃지 못할 일도 경험한다. ‘축복의 혁명’은 꽤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어쩌면 작금의 한국과 미국의 주류 기독교에는 더 필요한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물질주의의 물든 기독교, 종교화하여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신성시하는 왜곡된 기독교의 문제점을 대단히 쉬운 필체로 이야기한다. 논조가 다소 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유정] 뉴욕의 아픔

이코스타 2007년 5월


또 다른 회개의 첫 단추…


왠 지 잠이 오질 않아 PC를 켰는데 한 사이트에서 “뉴욕의 아픔”이라는 글을 접했다. 뉴욕의 N교회 A목사의 “제7계명을 어기고 간음했다는 고백” 기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해당교회의 한 성도가 아픈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낸 글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어떻게 대형교회 목사가 이런 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A 목사의 자발적인 고백은 필자에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이 미 년 초에 당회에서는 거론이 되었고, 올해 말 사임하기로 했던 A 목사가 3월 18일 주일예배 강단에 갑자기 선 것은 당회와 상관없는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일단 이 고백은 A 목사님의 자발적인 용기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점, 그리고 “지난 2개월 이상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며 참 지옥이 무엇인가를 실감하고 주님의 심정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느끼며 지내왔다”는 통한의 고백을 주일 예배 시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라 본다.


그 동기의 진실 여부도 지난 22일 교회를 사임하고 뉴욕을 떠나시겠다고 공식 발언한 것을 보면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지 않고 교회 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개회개라는 극적 반전을 노렸다는 일부 분석은 오판인 듯싶다.


박 용규 교수님의 ‘1907 평양 대부흥’에 의하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 600여 명이 새벽 2시까지 남아서 기도하는 도중 길선주 목사는 자신이 은혜를 막는 성령의 임재를 막는 아간이라며 많은 회중 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숨은 죄를 고백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한 것을 성령께서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이 고백은 마치 뇌관에 불을 붙인 것처럼 그날 모인 성도들의 회개가 이어졌고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말씀 앞에 부복하여 자신들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하였다고 한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개적으로 고백되었다. 이러한 회개와 부흥의 물결은 선교사들은 물론 평양시 전역에 교파를 초월하여 흘러갔다. 평양의 남산현 감리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 선교본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 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이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 (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한 길선주, 헌트, 블레어, 이길함, 스왈른, 편하설은 부흥의 불을 가지고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 졌고, 성령께서는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한반도 전역에 부흥의 불을 지피셨다. 서울, 대구, 대전, 공주, 신의주, 선천 등 전역에서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랐고, 이 부흥의 불길은 다시 만주와 중국으로 놀랍게 번져나갔다.


“1907 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에 교계에서 어느 때보다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이 같은 일이 터져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있다”는 일부 기사는 오히려 평양 대부흥의 실체를 오해한 소치 아닐까? 충격이 아니라 부흥의 전조로 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조명해본다.


우 리의 시각을 어떻게 대형교회 목사가 “그런 죄를…”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죄를 드러내었는지….”에 둘 때 용기 있는 A 목사님의 고백은 또 다른 회개와 부흥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 곪은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는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이며 부흥의 시작이다.


한인교회 치부를 빛 가운데 드러낼 기회


처 음 뉴욕 N 교회의 A 목사님의 소식을 접했을 때 충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진 않은 세월 살아오면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목회자들, 찬양 사역자들이 아류의 죄 가운데 실추되거나, 쓰러지는 경우를 여러 번 접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나도 “어떻게 그럴 수가!!”와 같이 ‘비난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엔 죄로 여기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일까. 나 자신도 그러한 죄를 실행만 못했을 뿐이지 언제 쓰러질지 모를 똑같은 연약한 존재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고백은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잘 표현해준다.


『만 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0-24)


목 회자라고 다르지 않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 바울 사도의 처절한 고백처럼 우리 인간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단지 목회자는 문제가 터졌을 때 사람들에게 더 큰 비난과 더 큰 충격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크게 다를 뿐이다.


그 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경고 했다. A 목사는 바로 이 차원에서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수많은 영혼을 실망시켰고, 그 부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은 죄 문제에 대해 결코 희망이 없을까? NO! 명백하게 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인류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대 선언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롬 8:1-2) 이것이 복음이다.


문 제는 이 복음을 한 번 듣고 또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는 자세로 주님께 달려 나가며,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빌 1:19) 바울의 고백처럼 성령께 순간순간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 제는 이러한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있다. 여기에는 명백한 성경의 질서가 있다. 첫째로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사 도 바울도 로마서 2:1-10에서 동일한 지적 한다.『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둘 째로, 그럼 이 목사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아니다. 성경은 강도 높게 징계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징계는 질서가 있다. 해당교회, 노회, 교단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그 이상의 비판적 여론은 자제해야 한다. 때때로 인터넷은 우리의 위치를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놓는다. 인터넷 언어의 특징이 얼굴 없는 글이기에 글에 아무런 인격도 없이 하고 싶은 말, 평소에 싸였던 불만 등이 아무런 제지나 여과 없이 그냥 올라온다. 책임질 수 없는 언어들이 난무하다. 그 결과 우리가 원래 목표했던 타겟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적어도 책임 질 선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언론을 보면 이 목사님의 공개 고백 진의를 의심하는 무책임한 논의들이 많아 보인다.


적 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L목사의 삶을 비난하고 그의 죄를 시인 받아 내야 할 권위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힘과 권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L목사를 위해 중보 해야 한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뉴욕교회 교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이 문제를 주님의 방법 대로 해결할 수 있도록 중보해야 한다. 이미 당회와 노회, 교단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해당교회 교인이 아닌 분들이 L목사를 규탄하는 것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특성을 무기 삼은 명백한 월권 이다.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정도 이상은 칼을 휘두르는 언어폭력이요, 무언의 살인이다.


마 지막으로 적어도 이 목사님은 용기 있는 분이다. 그 동안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도덕적인 죄를 짓고 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앎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에서도 쉬쉬하고, 외부로도 굳이 긁어서 부스럼 낼 것 없는 것처럼, 교회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상례이다. 목회자만 그런가? 교회의 평신도 리더십들도 이중적인 죄 된 삶이 드러난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는가! 사회에서 터지는 대형사고 마다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썩어 문드러졌다. 죄가 눈에 보여도 말을 못하는 수준까지 몰락했다. 결국 기독교가 일반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마구 도마질 당하는 양상까지 왔다. 일차적인 죄는 교회 지도자에게 있음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있다. 종교의 도덕성이 일반 사회의 도덕 수준보다 떨어질 때 그 사회는 위험하다. 기독교의 도덕성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면 교회는 최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이다. 뼈를 깎는 회개와 부흥이 필요하다.


그 래서 더더욱 N교회의 치부가 드러난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를 사인으로 한인교계의 회개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평양 대부흥 때 성령께서 지도자들의 치부를 드러나게 하실 때 그들이 순종함으로 드러냈다. 솔직하게 회개했다. 이번 기회에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죄악을 회개했으면 좋겠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더러운 치부를 드러냈으면 좋겠다. 뉴욕의 아픔을 통해 동부 부흥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L목사의 진실여하를 떠나서 ‘뉴욕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공개회개’라는 기독교 환부의 가시화가 오히려 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우리 한인교회 들과 목회자들의 죄악과 치부를 빛 가운데 드러내어 성령의 강력한 치유의 광선, 골고다 십자가 보혈의 강력한 용서의 능력을 통한 회복과 부흥을 향한 하나의 작은 사인이 될 수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조명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