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보이스 – 2008 서평] 영화평

오늘 코스타 보이스 서평에서는 최근에 발표된 영화 중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몇 가지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득력있게 영상으로 소개한 영화들은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기독교적 메시지에 관심을 가진 주위사람들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영화평은 http://www.umc.org/site/c.lwL4KnN1LtH/b.2285817/k.644B/Movie_Review_Archive.htm 에서, 추천 기독교 영화와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http://artsandfaith.com/t100/에서 참고할 수 있다.

Dogville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가장 기초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일부의 사람들, 악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고 어떤 때에 선한 의도와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Dogville은 이 죄의 문제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Dog과 달리 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는 반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다. 영화는 외부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있는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도 죄가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연극 같은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죄와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Children of Men
예수가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식민지와 피식민지 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점점 심해지는 식민정권의 억압정책으로 강제로 호구조사에 응하는 여정에서 인간이 누울 수 있는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힘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장 약해보이는 생명의 아기였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있었던 일을 현실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있어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밀양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제시하는 영화. 예수님에 대한 오해처럼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에게 퍼져있는 것 같다. 예수님 속에 계시된 하나님은 낮아진 곳을 향하고 있던 ‘숨어계신 하나님’이셨다.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이미지, 곧 힘과 영광의 실체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빈 곳과 초라한 곳, 약한 곳과 병든 곳, 낮은 곳과 조용한 곳에 비치고 있는 햇볓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영봉의 책 <숨어계신 하나님>은 이 영화를 바탕으로 기독교인들이 고민해볼 만한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소그룹에서 함께 읽고 나누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Cider House Rules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John Irving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주인공인 Homer의 가출과 귀환은 성서의 탕자의 비유를 모티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야기의 아버지처럼 Dr. Larch는 강요하지도 않고 아들의 결정을 들어주지만 끝까지 자신의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결국 어떤 규칙도 그 근본이 사랑일 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에 근거한 규칙은 사랑에 기반한 규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자연스레 예수님의 삶과 공명하고 있다. 결국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깊이있는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잔잔한 영상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Amazing Grace
영국의 노예무역제도 폐지 200주년 기념작. 노예무역폐지를 성경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William Wilberforce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윌버포스가 당시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노예무역 폐지운동을 벌이던 감리교회 공동체와 함께 인내심을 갖고 끝내 노예무역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긴 여정을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소명과 공동체적인 비전 안에 기독교적 비전을 꾸준히 추구해간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코스타 보이스 – 2008 사설] 열방에게 하나님 나라를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죄로 왜곡된 이 세상은 분리와 차별의 사회이다. 이곳에서는 서로간의 소통은 사라지고 오해와 반목과 갈등만이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세상의 나라를 거스르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이런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겸손의 하나님,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오셨고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분의 낮아지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로 주님의 목소리를 전해왔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의 죄로 갈라진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다른 언어지만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지향점은 그리스도 한 분이 될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피조 세계와 인간은 완전한 관계를 회복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창조주와 회복된 관계를 갖고 구속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는 하나님의 화해에 대답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므로 다른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완성을 향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발전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왜곡된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나라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 나라에서 그분의 뜻과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전달된 그 나라는 이어져 이제 이곳 휘튼 코스타 수양회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하나님 나라를 더 넓히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 만드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되는 완성된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을 다 내주신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에 동참하며 그 뜻을 실현시킬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 요청에 응답할 것인가? 누가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할 것인가? 누가 이 열방을 향해 나아가 그들과 하나가 될 것인가? 누가 이 열방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것인가?

우리는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겠다고 결단한다. 우리는 인간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단한다.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고 그분의 질서에 따라 살아갈 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할 것을 결심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책임과 중요성을 믿고 그 공동체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기여하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여 그것에 부응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다할 것을 결심하였다. 우리의 직장과 학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따라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우리는 우리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가정이 그분의 계획하신 질서에 따라 세워지기를 바란다. 주위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며 우리를 희생하여 그들을 돌볼 것을 결심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능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을 믿는다. 그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생을 인도하시는 그분의 주되심을 믿고 즐거이 순종함으로 그분을 기다린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려고 한다. 열방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를 애타게 찾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가 이 열방을 비추는 빛으로 살 것을 결단한다.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해 주시기를.

[코스타 보이스 – 2008 기획기사]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주권 – 하나님 나라와 악의 문제

My bones suffer mortal agony as my foes taunt me, saying to me all day long, “Where is your God?”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d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Psalm 42:10-11)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전 우주에 미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온 시간을 규율하신다고 우리들은 믿는다.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주권을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세상의 나라의 질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된다면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 고난을 하나님은 왜 허용하시는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신다면 왜 세상의 나라가 번창하며 이 우주에는 왜 죄와 악이 번성하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악과 무질서, 그리고 세상 나라가 번창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세상 나라의 질서, 그리고 악의 주권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그 질서를 유지하는 분(sustainer)이라는 믿음, 역사를 전지와 전능 그리고 전적인 선하심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갖는다. 그러나 자주 우리들은 심각한 악의 존재에 이런 믿음을 포기하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분이라는 믿음을 버리거나,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거나, 그분의 전적인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적으로 해결하기는 힘든 것 같다. 성경에서도 이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욥,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전제되어 있다. 심지어 사탄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욥은 하나님께 항의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답한다. 욥의 항의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다렸다가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에게 닥쳤던 일들에 대한 설명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대답은 욥과의 관계에서 과거에 있었던 많은 일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형성되었던 믿음과 신뢰에 대해 지적하신다. 우주와 세상의 운행은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을 알려주시고 과거에 그에게 쌓인 믿음과 신뢰를 다시 되살아나게 하신다. 지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고통 당하신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의 악과 그 악의 결과에 의한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한 하나님이신가. 세상에서 생기는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인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며 죽음을 경험하실 때 예수님 뿐 아니라 그와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계시던 성부 하나님도 죽음을 경험하신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성부 하나님에게도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악의 결과인 죽음을 스스로 감당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신,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는 하니님이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주권
하나님 나라의 운행의 구체적인 원리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들의 지적인 한계로 역사와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발전되어 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고 영적인 결단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 관심이 있으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이 그런 믿음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고 그 승리를 향한 역사의 발전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하에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는 그 믿음으로 산다. 그 믿음으로 산다.

[코스타 보이스 – 2008 기획기사] 교회,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우리는 기획기사를 통해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 그분은 십자가를 지신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그리고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그가 주장하고 보여주었던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의 확증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임재한 하나님 나라와 승리할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사명을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에 대해서 살펴본다.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님은 당시의 세상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거스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그것에 걸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원했다. 그 새로운 공동체는 다른 종교 운동을 추구하는 공동체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폐쇄된 집단, 분파가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초대되는 곳이었다. 심지어 죄인이라도 손가락질 받던 세리들과 창기들도 초대되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신분과 직업, 종교적 성향, 지역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셨고 그것에 반응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베풀어 주셨다. 곧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다양성과 예수님의 관심인 가난한 자와 약자에 대한 관심이 예수님이 원하는 공동체, 교회의 기본 성격이라 하겠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그가 특별히 구별하여 자신의 사역에 언제나 동참하도록 부른 열두 사도 공동체도 비슷한 성격을 띤다. 그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하여 그 안에는 강한 민족주의자(zealot)들 뿐 아니라 세리라는 식민지 정부 관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열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 전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했는데 세상에는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사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하여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임재하는 장으로 삼으심으로써 자신과 그 공동체를 동일화하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인 하나님 나라와 그 공동체를 동일화하는 것이었다. (마 18:17, 20)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 교회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충만함이 이루어지는 장이 된다고 사도 바울은 증언한다 (엡 1:22-23 –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골 1:18-20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실재이며 교회를 통해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비전은 죄로 인해 분리되고 분열된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갱신되고 통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 7:10-11).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는 분열과 분리, 소외와 배타, 갈등과 반목을 극복하려는 모든 성도들의 노력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나라’라는 이상은 그리스도라는 실체로 전이하며 역사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점을 공동체가 공감하고 추구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된다는 비전은 현실의 교회의 모습을 지도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만들어 내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며 우리들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화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노력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죄가 그것을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며 나아갈 때 그것은 가능한 미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우심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실 것을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