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2강]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둘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2강(수요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오늘 주제강의 두번째 시간에서는 이번
KOSTA
주제말씀중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을 살펴본다.

고통의 시대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 고통, 재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연대성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이러한 아픔과 눈물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문화, 역사, 뉴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발견한다. 물론,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선함, 참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 반창조 혹은 반생명의 증상이 발생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하므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세상의 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건, 내가 지은 나쁜 죄가 아니라, 엄청난 세력, 유사인격 혹은 하위 인격처럼 거대한 사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창조세계와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악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악이 훨씬 강하고 많다. 활로 했던 과거의 전쟁과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현대의 전쟁을 비교해보라또한, 인간성의 황폐, 물질주의의 기승으로 사람의 가치가 그가 가진 물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다.

세상,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실 , 세상이란 무엇이고 이겼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자.

세상을 이겼다십자군 전쟁을 통해, 혹은 복음 전파로 이교도에 대한 승리 혹은 개종? 질병과 굶주림의 정복?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을 이겼다는 것인가? 마디로, 죽음, 사망을 이기셨다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것은 단순히 분이 죽은 몸에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fact
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저주가 끝까지 계속되었을 일어나는 사람과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 그것이 저주임은 어제 살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들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저주
– curse
퍼붓는 것이 아니라
이다이것은 마치 태중의 아기가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영생의 복을 항상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탯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고 죽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이다. 이로부터 모든 악의 증상들
미움, 증오, 시기, 질투, 폭력, 파괴와 같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사랑해야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 그로 인한 극심한
죽을 같은
고통, 가난과 질병, 공해, 자원고갈, 환경오염 모두가 죽음의 증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들, 이것을 사주,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악의 세력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사탄이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죄로 시작된 모든 죽음의 증상은 사탄을 통해서 증폭되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 그러하다.

, 모든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살후
1
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
안식, 완벽한 샬롬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되어있다.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전까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돌이켜 회개하면 샬롬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는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불가역적으로 무한히 멀어진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죽음의 증상에 고통스럽게 시달리다가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 샬롬, 부활, 구원과 같은 성경의 위대한 언어를 이해할 , 도덕적 죄의 회개와 죄사함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파괴되고 있을 ,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악을 몰아내시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샬롬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 꿈의 부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꿈이 이루어진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혼자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과연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졌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세력의 극치, 악의 극치, 악의 세력의 궁극, 죽음을 이기셨다는 의미이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귀신을 쫓으심, 바다를 잠잠케 하심은 모두 예수님의 악의 세력을 잠재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내가 만지면 옮는데,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병이 낫는다. , 악의 결과, 죽음을 정복하는 힘을 미리 십자가 이전 부터 과시하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결정적이로 최종적으로 세력을 없애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실제적,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며 악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가? 로마정부의 하수인 빌라도, 식민통치 정부 헤롯왕의 하수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세대의 권력자들, , 악한 정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강한 힘들을 상징하는 ,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유대인 군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나님없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인본주의라는 말이 선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을 지칭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있음, 내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들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를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19:15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 소리쳤다. 창조해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있다고 하여도 믿을 없다고 주장하는 타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마태복음27:40에서,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 도전하였다. 이것은 사탄이 마태복음
4:6
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 던졌던 도전이었다.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애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의 세력들, 인류 역사 이래 그리고 십자가 이전 모든 세대, 앞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악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자기 존재와 인격의 안에 고스란히 받아서 죽음으로써 악의 무섭고 가공할 힘을 소진시켜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와 가시관 

십자가위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방법중 가장 잔인한 것이어서,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인,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가했졌던 로마의 극형이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여러 날을 매달아 두면 서서히 피를 흘리며 팔레스타인 땅의 태양의 뜨거움과 밤의 무서운 추위가운데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독특하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가시 에덴동산에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관은, 세상의 모든 악이 예수의 인격과 존재위에 얹혔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 마태복음27:51 의하면, 예루살렘 성소과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휘장은 마리가 당겨야 찢을 있을 정도로 두껍고 튼튼한 장막이었고, 금색실로  그룹, 하나님의 천사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룹은 창세기3:25, 하나님의 샬롬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죄인은 샬롬으로 돌아올 없음을 지킨 문지기, 하나님의 천사이다. 성소의 휘장이 찟김으로 이제 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으로 들어갈 있게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린 자마다
(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라고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죄목에 해당하는 형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로 맞아 죽으시게 되면, 핍박받는 선지자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고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네라고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반역죄,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거짓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간교한 생각을 완벽하게 역이용하셔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 부어서,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섭리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부활로 성취된 샬롬의 시대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메시지가 모호해진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셨고, 장례까지 치루어져서
3
일이 되셨다. 육체가 썩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셨다
(
로마서1:3-4).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구속사의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창조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창조의 시대, 육의 시대와부활 후의 시대, 시대, 영의 시대, 성령님의 시대인데, 영의 시대는 창조의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 하늘과 땅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영의 시대를 준비하셨고 여셨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첫번째 주민이 되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직 실존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민등록이 옮겨진다. 우리의 실존도 언젠가 시대, 샬롬으로 충만한 나라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시대, 영의 시대는 예수님이 처음 오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 속으로, 미래에 있을 영의 시대가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의 이중구조이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릴 것이나, 중간, 재림 전까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샬롬을 누릴 있다.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시대에는 예수님의 샬롬의 나라와, 살기등등한 세상나라가 겹쳐있어서 우리는 크리스챤이면서도 부득불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궁극적인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으로 소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증상, 질병, 장애, 실패, 두려움, 자연재해, 사고등을 인류의 연대성가운데 우리도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최종적인 결과인 죽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15
인간의 실존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준다.
죽기를 두려워 일생에 종노릇한다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고통을 경험할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그것이 죽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를 받을 , 모든 악의 현상을 경험할 우리는 그것의 본질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의 가장 자명한 증거는, 바로 먹고 사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확실히 소진시켰음을 믿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로 하여금 죽기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이 나타나면 이제 힘은 들지라도 두렵지 않다. 자유롭고 용기 있게 살게 된다. , 부분적인 제한적이나마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영의 시대, 시대의 완전하게 누리게 샬롬의 열매, 맛배기를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크기 때문에, 샬롬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영혼에 오게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충분히 살아지고 나누어 있게 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함 누리게 된다. 가질 지라도 우리는 노심초사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살기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빼앗아 먹기 위한 작은 탐욕으로 인한 다툼과 전쟁이라는 매임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진 자유함과 샬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복지, 샬롬을 위해서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샬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샬롬이 없는데 내가 죄용서 받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일그러진 것이다. 나와 모든 사람이 전체성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구원을 구체적으로 누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누리게 되는지는 내일 다루기로 한다.

[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1강]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요 16:33 b)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첫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1강(화요일):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요 16:33 b)

같이 기도 드립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주님을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신지
계시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하시되, 비록 인간의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것일 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슴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3일 
동안 이번 코스타 수양회 중심 성구인,
요한 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같이 강해하고 
살피게 됐습니다. 이 말씀 짧은 말씀이지만
부분으로
나눠서 중간 부분을 오늘 살피고,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을 내일 살피고, 오히려 첫번째 부분을 글피에
살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우리
한국 번역과 순서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논리
순서를 조금 바꿔 봤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시작,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제가 어떤 신문 칼럼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두가  막고 타협 없이
자기 말이 옳다고 막무가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그 꼴이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은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기만이 옳다며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세상에 혀를 찬다. 여당도 지리멸렬이다.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데, 집안 싸움에서 못 벗어
난다. 야당 역시 가관이다. 법치를 무시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죽은 전직대통령에게 기숙하는 수준이다.
교수 사회, 시민 단체, 각종 이익 단체들도 오로지 자기
주장에만 매달린다. 만인이 만인의 적이다. 모두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야단이고, 조금만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면불구 하며 으르렁 된다. 여기
저기서 적개심이 난무하고, 촛불이 횡행하며 서로의
생명 줄을
끊으려고 광적으로 돌진한다. 북한을 놓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다 싶히 하고, 거기다가 남과 북은 이제 바야흐로
마주 보고 달리는 괘도에 올라 탔다. 안에도 적이고
밖에도 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소통,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다. 이것은 정치
권력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이 무너진
상태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태이다. 우리에게는 제 삼의
길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리더십의 부재, 삼지 사방으로 흩어진
민심,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지도층의 욕심, 오직
반항과 파괴로만 일관하는 저소득측의 비 타협이 난무
하는 사회로는 바람직한 21세기로의 진입이 어렵다.
우리는 우리를 만인대 만인의 싸움에서 구해줄 진정한
개도론자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런 개도론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모의 공포증 없이, 마이크의
소음 없이, 욕설 섞인 저주 댓글이 없이, 매일의 안정된
생활에 매진하는 화목한 사회에 살고 싶다.

      여러분 이게  한겨레 신문의 칼럼인지,
또 조선일보 칼럼인지 머리를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잘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 역사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너무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한 시대 입니다. 자본주의
한계가 드러났고, 그렇다고 공산주의 실험을 다시 해볼 없는, 아주 어려운 그런 상태 이죠.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40
년쯤 후가 되면은 국민의
5
명중의 한명이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국민
4
사람이 한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출산율이
1.1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어쩌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여러분들이 과연 시대를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금방 조국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 현실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떠한지 인류가 역사 시작 이래 항상 추구해 왔던 샬롬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우리가 타락한 피조 세계 속에서 악에 지쳐 있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그런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있는 사람이 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주제가 샬롬 입니다. 샬롬은 평화 혹은 평강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 주로 나오는 평화의 원어는 에이르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피스죠. 평화, 평화라고 말을 하면 즉각적인 우리의 인식이 전쟁이 없슴, 편한 사이,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 혹은 어제도 우리가 배웠지마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피조세계와의 원만한 삼중구조의
관계를 우리가 평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샬롬이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이에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샬롬은 조금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야만 이번 수양회 주제를 소화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샬롬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성경 언어를 먼저 조금 공부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속과 머릿속을 싹 지우고
백지 상태로 만들고, 여기에 여러분의 개념을 한번
잘 써 보세요. 성경에는 초장부터 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창세기 1 22절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 새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들을 바닷물에 그리고 땅에 충만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창세기

1

26
절에서
28
, 유명한 인간을 창조하신 구절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할 , 그것은 물론 뒷날 신학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럴  우리를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성경적인 개념의 복이 뭔가 blessing, 우리는  하면
금방 가지고 있는 기존 개념을 버리고, 복이라는 것은
새나 물고기를 비롯한 생명체, 모든 인간을 비롯한
인간과 동물과 같은 생명체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힘을 복이라 그래요. 사람을 중심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 답게, 가장 행복하게, 정말 땅속에서
물을 함뿍 빨아 들인 장미가 활짝 피어나서 그 아름다움을
퍼센트
들어내기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지금처럼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뜻이 있지만 크게  가지가
있어요. 한가지는 동상 같은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왕들이 자신의 통치권을 들어내기 위해서 자기 나라
곳곳에 자기 왕의 상을 둬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다 나라를 왕이 다스리는 곳이구나이렇게 깨닫도록 것이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 그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신 후에,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땅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세우셔서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많은 생물을 창조 하셨지만, 중에
인간을 창조 하실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대권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걸어 다닐 때 다른 많은 피조물들이 볼 때, 우리를 보고
생각하기를 ‘아 이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구나’
깨닫도록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뜻이에요.

       한가지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세분이 굳이 셋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연합과 완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재하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뭐가 필요해? 그냥은 안돼. 그냥은 안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있는 능력을 생명력을 주셔야 되요.
생명력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신비롭고 거대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복되고 가장 충만하게 가장 깊고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을 누릴 있는 모든 생명력이 복이라는 것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생명력을 부으실 , 우리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produce 해요. 창출해요. 뭐냐 하면,
뭐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인 생명, 또 자손의
번성함, 또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 올 수 있는 능력들,
또 육체적인 힘, 성실함
, 지구력, 창의력, 집중력, 용기, 지혜, 모험심, 인내심, 희생정신, 용서하는 마음, 상상력, 심미적 능력, 열정, 동기, 의욕, 관대함, 지적 능력, 감성적 깊이, 의지력, 예술 감각, 뛰어난 운동 능력, 몸과 마음이 아름다움, 사랑과 인정 받음과 자존감과 존귀함과 원만한 인간관계, 그리고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하고 나도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행복하게 있는데 필요한 삶의 자원들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부라카 라는 히브리말 ‘부라카’ 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복중의 복, 복의 핵심은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의 DNA에요. 세포가
있으면 세포의 생명을
DNA
주장하듯이, 복의
DNA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함과
복을
받았다는 것을 같이 생각했어요. 창세기 26 28,9절에 보면은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블레셋에 그랄 땅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블레셋 민족들과 갈들이 있게 되요.
그러나
오랜 갈들에 있다가, 나라의 , 아비멜렉이 찾아와서우리 이제 앞으로 사이 좋게 지냅시다.’? ‘내가 당신의 삶을 본즉,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소. 당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말과
복을
받음이라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복은 그런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처음에 복과  다음에
의로움과
,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인데요. 의라는
말, 의는 한자말로 찾아 보면 ‘옳을 의’자, justice, 옳음,
옳고 그른 일이 있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선하고 틀리지 않은, 악하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가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죠. 로마서
3

23
4절에 보면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용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이라는
헬라말은 원래가 법정 용어에요. 그리스
,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법정 용어로써, 어떤 사람을 취조해본 죄가 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무죄 선언 하는 것을 의롭다 함이라고 말해요. 그런 이제 전통 때문에 우리들이 로마서에 특히 나오는,
특히 로마서 5장 1절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원래 의롭지
않았어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불의, 죄를
많이 졌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
받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하고 무죄 석방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은 사실은 그것을 포함하고 훨씬 깊은 뜻이에요. 그것에만 머무르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내가 죄를 지으면 나는 죄인이 다시 됐다가 의롭게 됐다가, 왔다 갔다가 하느냐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이제는 포기라는 개념에서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노트를 지운 다음에 새로 정리해 보세요. 의라는 말은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관계.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는 말은 내가 관계가 갖고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부를 충실하게 감당할 의롭다라고 말해요.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자식을 돌보고 양육할 , 의로워요. 그러면 자식은 어떠한게
의로운가 하면은 아빠 엄마를 잘 의지하고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그 혜택을 받아서 무럭 무럭 잘
자랄 , 의롭다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의롭다
라를 말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어떤
기준 이것은
옳은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의롭고 그것을 지켜 죄를 지으면 불의 하다. 그런
개념도 물론 있지만, 훨씬 더 깊어요. 관계적인 개념이에요.
관계적인
개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해도,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 없이 우리를 우리에게 다가 오세요. 여러분이 인생에 많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을 계속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뿌리쳤지만 그러나 끝내 따라와서 여러분을 잡고 항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이에요. 그
의롭다는 말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모든 사랑과 복락을 배푸시는 관계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워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느냐, 그분을 신뢰 하는 거에요. 우리가 착하게 살고 죄를  짓고
하는 것은 그것은 두
번째 문제고, 훨씬 더 먼저, 그 하나님을 받아 들이고,
내 하나님, 내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의롭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허물이 있고, 많은 죄를 지었고, 여전히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죄를 멈추지는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아무리 노력해도 선과 악의 변증법적인 이분론 속에서 뱅뱅 돌다가 죽게 됩니다. 살아 숨시는 동안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새로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떠났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관계가 있었어요. 관계를 아담 이후에 인간이 박차고 튀어 나와서 관계가 깨트려 졌는데,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justify,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신실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일단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 설혹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관계가 다시 어그러져서 튀어나오는 법이 없어요. ?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너무나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금 돌아가 앉아 있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관계를 조금 어려운 말로 성경에서 언약적 관계다 이렇게 말해요 언약적 관계. 언약이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나라말 번역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썼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약성경,구약성경은 옛날 약속, 새로운 약속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책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신약 구약을 갖고 계시죠. 그런데 언약이라는 말은 굉장히 기가 막힌 얘기에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으로 있어요. 그 언약의 선포는 이것입니다. 언약은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표현은 간단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 말은 출애굽기 19장, 레위기
26장 쭉 나오고 또 예레미야 31장,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는데, 계속 나오는 말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원래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인간이,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옛날에 한번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슴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어요.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언약을 지키시는데 인간이 박차고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역사 속에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택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스스로가 거부했던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회복해 나가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에게 하시고, 그의 국가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이제 혜택을 펼쳐 나가시는데, 항상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에요. 말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 그런 말이 필요하냐? 아담이, 우리들이 하나님 필요 없어 라고 말했거든요. 아담도 그랬고,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죄송하고 가장 죄가 뭐였냐.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라는 것이에요. 죄라는 것은 여러분이
땅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뭐 누구 나쁜 짓하고, 누구
미워하고,
누구 때리고 죽이고, 뭐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이 죄다. 이렇게 늘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라는 말은 사회학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내포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신학적으로 정의해야 해요. 뭐냐,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없다 그러고, 없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믿기 싫다. 하나님
싫어, 그런 것들을 죄라 그럽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은 하나님이 주시는 뭡니까. 복, 생명력을 받게 되요. 그런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다 보면은 이상하다 내가 예수 믿지 않던 상태를 죽었다 표현하는구나. 물론 그때 내가 예수를 믿었지만 살아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죠.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생명력 그로부터 복으로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지는 생명의 자원들을 이상 받게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때까지 받았던 복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게
되는데,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아담이 마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을 이미 받았으나 이상 공급되지 않는 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듯이,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그런 상태로 태어나요. 말하면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물학적인 생명은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래서
에베소서
2

1
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를 살리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적인 관계 속으로 복귀해서 원래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고 또 인간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답게
살수
없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받게 됐을 그것을 살았다라고
말하고 혹은 영생을 얻었다라고
도 말합니다. 같은 뜻을 구약에서는
주로 복이라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주로 영생이라고 말해요. 영생이라는 말은 그냥 시간적으로 길고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원래 문자적으로는 오는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는 시대라는 것은 우리 지금 타임 테이블로 말하면은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지금 인간의 역사는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실 텐데, 그때 누릴 인간들의 삶 원래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때 그 풍성한 삶을
계속 누리게 될
텐데, 그 시대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지금 땡겨서 누리고 있어요. 그것을 이제 내일
우리가 다루게 될
텐데.

      , 그럼 이제 샬롬이 뭐냐 서론이 너무 길죠. 샬롬,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하는 것과 같이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 만날 마다 샬롬
이렇게 말하죠. 아주
단순하고, 평화로은 좋은 관계 이런 느낌도 있지만 깊은 영적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은 그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받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언약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놀라운 직분을 감당하기에
가능한
RESOURCE
받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 하셨어요. 그런데 샬롬이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복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그게 같이 뿌리를 내고 같이 발을 담그고 살고 있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영생 없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나만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공유 하면서 같이, 같이 복을 누리고 사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단어 중에서는
가장
맞는 말이 CONVIVIALITY 말은 원래 대잔치 마을 전체 사람이 같이
참여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까 말씀드릴
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생명력을 받고
그분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전인. 여러분 전인 교육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인교육,
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INTEGRITY
있는 매사에 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학과 공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도, 미술도 체육도 리더십도 가르쳐서 아주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전인교육
이렇게 말하는데, 원래 그 전인이라는 말은
개별적으로는
완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타인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전인이라고 그래요.. INTEGRITY가 있는 사람. 그 전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삶을 샬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는 또 한가지 TOTALITY 전체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의 핸드북에 작은 글을 실어놨어요. 리코스 카잔차스키가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불경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아주 진지한 구도자였어요. 이런 글을 좀 읽어
드릴께요. 이 사람이 밤에 꿈을 꿨어요. 크레타
사람인데 원래, 크레타 민요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동굴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매를 걷어 붙힌
그의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더니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노래는 그만해요 내가 일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내 보였다. 뭘
빚으시나요?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동굴에서 나는 구원 받은 자들을 빚어 낸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외치는데 가슴속에 상처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리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을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니체도 추종해보고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추종해 보고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에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동굴의 노인이 내가 진흙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빚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에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노인이
전체성을 파악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성을 파악하고,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반드시 모여 살수 밖에 없는 그룹에 사람임을 깨닫는
전체성
, 이것을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 그리고 동료 인간들 관계에도 의로운 관계, 머물러 사는 것이 이 샬롬인데, 샬롬은 그야말로 너무 너무 좋은 상태, 너무 좋은 상태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을 못하겠어요.
Too good to explain.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좋았더라 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일장을 보면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 하시고 다음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 하나님이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다음에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음에는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하시죠. 좋았더라는 히브리말로 토우브 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에요. 토우브라는 단어, ‘좋았더라 이런 뜻입니다. 즐거운, 유쾌한, 좋은, 선한, 귀한,
탁월한
, 적적한, 올바른, 탐스러운, 준수한, 충실한, 후한, 선대, 총명함, 보배로운, 길한, 아리따운, 번영, 복지, 은총, 은혜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샬롬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퀄리티에요. 단순히 전쟁이 없고,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 하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나위 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치밀함 같이 완전히 연합되어 사는 그런 퀄리티의 삶을 샬롬이라고 그렇게 하고 원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우리가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도저히 옛날 일을 기억할 없을 만큼 됐지만, 그러나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언어 정리가 끝났고.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들어가겠어. 이건 짧게 끝낼  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너희가 세상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와
고난
, 환란이라는 단어 가지를
잘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세상에서 라고 말하실 때에는 굉장히
슬픔을 담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두시고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 , 굉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속에 있는 것이에요.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그
모습이 아니거든. 너무나 깨지고,
너무나 망가지고, 너무나 왜곡되어서 샬롬은 커녕 샬롬의
정 반대인 죽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뉘앙스로 사용
되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말할
우리들은 그 세상이라는 말은 썩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죠.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할거 없다.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벌써 나를 미워했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자라면은 너희가 같은 부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나에게 선택을 받아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이에요. 하나님이 너무나 아름답게 샬롬으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을 인간의 범죄로 깨어버리고 살벌한 고통과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고통스러운 장소라는 뜻이에요. 동시에 세상은 하나님을 적대시 하고 하나님을 몰라라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있어요. 제가 사실은 이번 수양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 그렇다
치고라도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들이 외치는 사회개혁을 부화내공 따라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격분하고 있는 상태에요. 여러분
여기에 아마, 우리나라 용어로 좌파들도 있을 거에요.
그 좌파들 제가 좀 구박을 할 것입니다. 물론 우파도
구박해요.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양파에요. 저는
민주당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교회당입니다. 예배당이에요. 세상의 현실을 보는 해석은 비슷해요. 이세상이 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이구나.
이것을
우리가 회복하자. 우리가 탈피하자.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세상이 원래 낙원이었던
때를 기억해요.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paradise 낙원.
그래서 낙원이 있었다가 상실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무어냐 하면, 아담이
인본주의자였어요 처음에.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은 좋아하나 싫어하나 인본주의자에요. 말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나서 하나님 없이 살수도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 인간 이외에
초월적인 존재가 없슴
선포하는 존재를 우리는 모두다 인본주의자라 부를 있습니다. 휴머니즘,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시작이고 끝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치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에요. 인간 인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 하면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은 비슷한데, 낙원 개념이 없어요. 대신에 이상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점점 진보하고 인간은 점점 진화해서 점점 좋아져서 마침내 지상 천국에 이르게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라는 개념이에요. 현실을 보는 시각은 비슷한데, 그것의 해법이 달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인본주의자들은 원래는 없었고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무지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 좋아져서 역사의 진보의 원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인간은 지상천국,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하고 우리의 삶을 받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비슷하지만 철저히 다른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후자를, 인본주의적인 사회개혁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숭고한 뜻을 품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던지고자 하는 열정이 있더라도 그것은 틀린 것이에요. 그러냐, 우리 인간이 낙원을 잃어 버리게 것이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에요.
인간이 미개 했기 때문에,인간이 원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창세기
3

17
이후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저주 하십니다. 사탄, 뱀을, 사탄으로 상징되는 ,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너는 나의 명령을 어겼슴으로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대단히
위대한 존재에요. 인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백배 배, 위대한 존재, 영광스런 존재로
창조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버금가는 그런
존재로 창조 됐는데, 그래서 창세기 2 초반부터 보면은 소위 에덴동산의 모습들, 너무나 풍성한 삶의 조건들, 그리고 거기에는 강이 흐르고
강에서 흐르는 4개의 강들이 지구를 덮었다고 말해요. 고대 세계의 세계관에는 강을 떠난 인간의 삶이란 상상 없었어요.
근데
그것도 무려 4개씩이나 있으니까 얼마나 완전한 삶인가. 거기에 보면 아주 좋은 질의 금이 생산되고, 여러 가지
보석이 생산되더라. 이런
얘기들이 창세기
2
초반에 나오는데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엄청난 직분에 걸맞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허락하셨슴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은데, 그러나 너와 나와는 절대로 넘을
없는 한
개의 선이 있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자유는 나에게 종속되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 선악과의 의미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그 의로운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이고, 그것을 violate할 때,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No Thank you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관계 없슴 선포, 이것이
선악과 먹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우리가 자꾸 이 성경에서 보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 하셔야 되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사용하는
language
사용할 밖에 없어요. 그러나 많은 언어들이 우리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언어로 복구해야 됩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우리끼리 하는 저주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우리는 그냥
FFFFFXX
하는 말이 저주에요. 제가 있어요, 저는 누구보다 욕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거룩한 장소에서 수가 없어서 여러분의 풍성한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겠어요. 저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따가운 말을 붙고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 그럼 잘해봐라. 이거에요. Let him go, 그럼 한번 알아서 해봐라. 너가 없이 있다고? 너는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복과
영성을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나를 떠나서 있다고? 너가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 있다고? 한번 해봐라
이것이
저주에요. 하나님과 멀어짐, 하나님과 멀어짐, 그래서 저주는 정확하게 보호의 반대말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함이 뭐라 그랬어요? 보호 하나님과
멀어짐을 저주.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학자인 김세윤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조그만 책자, 구원이란 무엇인가? 혹시 안본
계시면 보세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두란노에서 개정됐어요.
제가
두란노 책을 팔아줘야 되나? 거기에 보면 저주에 빠진 인간을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로 표현했어요. 나무가 있는데, 폭풍이 불어서 뿌리가 뽑혀 버렸어요. 그러면 나무는 금방 죽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무는 개월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누렇게 되고 메마르게 되고, 잎이 시들고, 마침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적으로 봤을 때는, 그 대지에서 뿌리가
뽑힌 순간 죽었다고 해도 되요. 그러나
아직은 살았다고 있어요. 그러나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는 고난과 결핍들이 있습니다. 이세상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이 바로 고난과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에요. 하나님의 저주에 빠진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결핍과 고난들의 증상들을 악이라고 그래요 .
Evil
그런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열거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불의, 탐욕, 시기, 질투, 증오, 살인, 다툼, 사기, 악독, 험담, 비방, 모함, 음란, 교만, 악을 도모함, 불효, 신의 없슴, 몰인정함, 무자비함,
이제 그것이 때를 지어서 그룹을 형성해서 서로 다투고 당파 짓고,
소외시키고 집단 이기주의, 공직자의 권력 남용,뇌물수수,
인신매매, 고문
, 인권유린, 전쟁, 인종청소, 인종 차별, 대규모의 기아, 전염병, 우리가 상상할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정신적인 물리적인 현상들, 개인과 집단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전부다 악이라고 말해요 . 뿐만 아닙니다. 이것이 이제 크게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요.

      아마 20세기에 가장 엽기적인 사건, 지금 동유럽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일 거에요.
세르비아에는 정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크로아티아에는
침례교가 있었어요. 크로아티아의 침례교들을 죽이기 위해, 없애기 위해서 남자들은 죽이고 크로아티아의 침례교 여자들을 강제로 임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종족을 말살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 르완다의 후토와 투치족의 종족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명도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들이에요.
2
대전 때 나치 독일의 600만 명 유태인들 학살 이라던지 또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실험은 약 1억
명 정도를 죽였어요. 1억
정도가 죽거나 유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1500만

정도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죠. 흑인의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베르뎅과
솜이라는 두 곳에서 1주일 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군 50만
명과 프랑스군 45만 명이 죽었어요. 하루에 어떨 때는 4-5만 명이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라서
그 기관총 한
자루에 어이 없이 목숨을 잃는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상상할 수 없어요. 역사책에서
읽으면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는 백만
가량의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한과
눈물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 라이프라는 사진 잡지에서 1 대전의 장면들을 search 것을
봤어요. 거기
바윗돌에 기념관에 바윗돌에 전사한 청년의 어머니의 말이 불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불어를 모르니까 밑에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My son, 내 아들아, since your eyes were
closed, mine, 내
눈은, 내 눈이 감겨진 후로부터 내 눈은
한시도 눈물을 그쳐 본적이 없다. 역사책에서
보면 솜과 베르뎅 전투에서 45 50 명이
죽었다. 이렇지만, 그 깊이 들어가 보면은 수백만
명의
눈과 한이 어려 있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악. 샬롬이
깨어진, 샬롬이 상실되고 샬롬이 해체 되어 버린, 인류의
현상이 그런 것이고 현재 여러분과
제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삶의 부정적이고 팍팍한 모습들은 바로 샬롬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나의 힘과 의지로 어떻게 해볼 없는 불행과 비극이 굉장히 많죠.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질병으로 지체를 잃거나 상해서 연약함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음주운전 때문에 다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서 한번도 유복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임신되었으나 태어나 보기도 전에 성인들에 의해서 중지된 생명들, 공해 때문에 담배 한번 피워 보지 않고도 폐암을 걸린 사람들. 수백년전에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갖다 버린 산업폐기물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오염된 음식을
먹고 암에 걸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의 불행들이에요.
츠나미
, 2004년에
2007
년에 중국 스촨성의 지진, 이런 것들을 보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어버려.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
,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그 지진 때문에 평화롭게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던 그 도시 인구 30만 명중
삼분의 일이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에서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 때문이다. 나의 혹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탄의 . 우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계를 맡겨 주셨는데, 자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반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자연 재해,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래요
, 예수 믿어도 우리는 같이, 혹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많은 고난을 경험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병에서 났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헤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개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 난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여전히 환란을 당할 것이다. 물론 해법이 이제 내일과 글피에 나오게 되요. 그래야 되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연대성 때문입니다. 제가
2007
코스타에서 조금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 사람 안에 들어 있게 창조 하셨어요. 사도행전
17
장에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는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한 걸로 카운트
됐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아담의 죄가 나에게 영향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인류의 연대성의 원리, solidarity principle 이라
부릅니다. 하나다
,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가족에 태어난 가족이 있죠. 여러분이 선택합니까? 가족의 연대성 속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보니까 아버지가 찢어지게 가난해요. 이거 뭐야 이거, 집에 태어날래. 꼼짝없이 그 가족에 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연대성의 원리에요. 기가 막히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문화,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자란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에요. 너희들은 원래 가족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너무나 커지고 많아져서 도저히 우리가 가족으로 생각할 없는데, 아니 하나님은 너희가 가족으로 지어졌다 말합니다.

      solidarity
principle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인류와 관계가 있어요.
너무나 약
오르게도, 너무나 약 오르게도 기독교에서 이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것을 먼저 선수를
쳤어요. 공산주의 선언, 세계 공산주의 선언의 중요한
내용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사람들의 일은
나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선언입니다. 공산주의
, 사회주의는 우리가 무신론 적이고, 유물론 적이기 때문에 절대고 그것은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병행할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자기들이 선포를 버렸어요. solidarity 그래서 인간의 연대성을
가장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고난의
문제 입니다. 내가 병들었어요. 병들었을까요? 그것은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간의 고난을 죄의 문제라고 말할 때, 나의 개인적인 ,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내가 고난을 겪는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굉장히 적은
것이에요. 굉장히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가 고난을 겪을 가서
회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안되요. 그거 염장
지르는 거지, 아니 내가 암이 걸리고 막 이렇게 있는데,
집사님 아마 회개
죄가 있을 것입니다. 뭐 은밀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회개 하세요
이러면 안 되요. 그런 경우는 있지만 아주 드물어요.
인간의
대부분의 고난은 내가 지은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에요. 어떻게 아담의
죄이기도 하고 우리 조상
중에 누가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질병이나 사고나 공해나 자연재해나 그런데 내가 그걸 당해야 해,
왜 왜 당해야 돼요? 어쩔 수 없는 거미줄처럼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섥혀서 우리가
추적할 수도 없는 연대성 속에 얽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연대성 속에 태어났다는 것을 가장 끔직하게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요.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 아무리 작은 것이든, 아무리 것이든 간에 낙심하기 이전에 배우셔야 됩니다. , 인간은 하나이구나. 인간은 원래 샬롬으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것이 여러분의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번 수양회를 거치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남은 생애 동안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 이것은 다른 사람이 겪을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겪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내가 겪는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동료 인간들을 위해서 내가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처해야 되는 고난이라고 조금씩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성공한 것입니다.

      샬롬은 그런 것입니다.
내일, 모레, 샬롬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샬롬이 깨어진 결과,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이라고
말했고, 세상의 정체를 말씀 하셨어요.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샬롬을 복구하는
일에 들어가기 앞서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고 고난을 겪을 , 우리가 가장 힘든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도무지 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것이에요. 그런 질문을 강하게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이번에 말씀들이 많이 들어올 것이에요. 그러나 고난은 우리는 고난이 있을 고난 자체도 괴롭지만 괴로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에요. 다음에 이유를 없기 때문이에요. 이유를 없기 때문에, 여러분 애기 낳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세다고 그러죠 제가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애기 낳는 고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애기
낳는 산모들이 그토록 힘들어 하지만 애기 낳고 1년쯤 지나면 그러잖아요자기야 하나 낳을까?’
이러잖아요
. 그거 그래요. 고통이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에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고난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 버림 받은 거 같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에요.
Why? Why me? 그래서 괴로운 거에요. 그런데 만일, 그 애기가
태어난다는 헤피엔딩처럼 우리도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난을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견뎌 나갈 있다면, 그런 것을 두고 우리가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입니다.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 저는 되게 병약한 사람이에요.
60
평생 살면서 한번도 건강해 본적이 없어요. 최근에는 지병이 망막에 도져서, 눈을 수가 없어서 여기 참석할 있을까가 의문시 됐었어요. 저의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심하진 않지만 장애가 있어서 학교를 제때 들어가지 못했어요. 우리 둘째 아이는 저희 도시에 지금
15
년째 살면서
high school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7
번을 쫓겨났어요. 저의 엄마 아빠가 상당히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렇게 염려를 했습니다.
애가 태어나서 공부를 너무 잘하면 어떡할까 난 그런 거 못 봐주거든요. 그래서 얘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주려고 그랬어요. 근데 애를
낳아보니까 전혀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전혀 그런
말 할 필요 없이 충분히 못하기 때문에 고난이에요.
고난 아니, why me?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은 다 학력을
중요시
하는 사회기 때문에 목사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는
굉장히
핸디캡이에요.
참 쪽
팔린
일이라고,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why me? 그러나 제가
그런 고난이 다른 인류가 겪는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겪는 샬롬이
깨어졌기 때문에 겪는 고난임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내려 오셔 고난을 자기 손으로 짊어지고 같이 당하심으로써 샬롬을 복구해 주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고난 받음이 불가피 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 저는 고난의 존엄성을 부여했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거나, 기쁨을 잃어 버리거나, 그러지 않아요. 제가 눈을 못보고 있을 , 어떤 분이 찾아 왔을 ,
그리 편안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우거지 상을 짓고 있어야 마땅한데, 평화로워요, 기쁨이 늘 있습니다.
샬롬이. 왜? 그 고난은 샬롬을
이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샬롬을 회복시키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 하실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있는 비결이 뭔가를 기다리세요.
사모하세요
. 여러분이 말씀은 기대해야 됩니다. 기대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밥도 야트막한 접시에는 요거밖에 안되지만
움푹
파인 그릇에는 머슴 밥처럼
많은 양이 들어가듯이,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만드시고 끝날까지 말씀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땅의
실체를 바라봤습니다. 왜 이
땅에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지를 왜 그렇게 되는지를 저희들이 살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외 없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슴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회복하실 샬롬을
이룸에 있어서 이미
샬롬을 맛보기 시작한 저희들이 마땅히 주님의 발자취를 쫓는 저희들 신자들로써 겪어야 하는 즐겁게 때로는 내가 자처 해서라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임을 깨달았고 존엄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자리에 머리 숙인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비밀, 복음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십자가의 부활로 이루신 샬롬의 놀랍고 충격적인 임팩을, 그리고 또한 복을 이미 이땅위에서 당겨서 누리고 있는 누릴 있는 우리들의 복됨 놀랍기 그지 없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 누릴 있는 귀한 기회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최주희]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훈련

나에게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있었다. 출산 시 호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생아 황달을 심하게 겪으면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동생 정원이는 평생을 누워만 있었으며,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야
했고, 밥도 안아서 먹여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언어 장애도 심해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저 Yes, No 만
눈치로 표시하였다.

정원이가 10살 되던 해 까지 어머니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없이 방황했었다. 좋다는
의사, 좋다는 약, 좋다는 종교는 다 거치며 동생의 회복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셨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로 기억되는데, 우리가 대구에서 살 때 어머니는 추운 동지에 팔공산에 올라가 찬물로 목욕을
하시고 불공을 드리셨다. 그리고 집에 오신 후 온몸을 쏘아대는 추위에 견딜 수 없어 다리미로 다리를 찜질하셨는데, 퇴근 후 이
모습을 보신 아버지가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서로 껴안고 우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동생이 10살 되던 해에 애쓰시던 모든
것을 그만 두시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셨다.

정원이는 온 가족의 사랑 속에 밝은 모습으로 가정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차지했었다. 예를
들어 TV 프로그램 선택권이 항상 정원이에게 있었으므로 서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었고, 자장면이 먹고 싶을 때에도
정원이를 꼬이면(?) 되었다. 하다못해 설거지 당번을 누구에게 명하는지도 모두 정원이에게 달린 일이었으므로 우리 세 자매들은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했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매일 재미있고 코믹하게 반복했으며 이로 인해 많이 웃기도 했다. 손님이
오시거나 친척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정원이에게 먼저 인사시켰다.

특별히 동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의 깊이는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나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준다. 친척과 주변의 사람들은 혼자 앉을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동생을 큰 골칫덩이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들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당신들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동생이 세상을 뜨는
것이었다. 즉 신체적인 어려움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그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으며, 동시에 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능력도 없이 오히려 고통만 안겨주는 아들을 향해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하시며 짙은 애정으로 평생을
대하셨다.

정원이는 내가 하나님을 믿은 후 처음으로 전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제한된 환경에서 지낸 동생이었지만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어떤 불리한 조건도 막힘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20살이 되던 해, 동생 정원이는 어처구니없이 감기로 주님 곁에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은 중증
장애인의 경우 저항력과 면역이 떨어져 엉뚱하게 감기나 설사로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주님 곁에 갔을 때 온 가족은 너무나
슬펐다. 특히 여동생은 자기도 정원이 따라 죽겠다며 그의 몸을 부둥켜안기도 했다. 또 아버지께서는 천국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라고
예쁜 운동화 한 켤레를 사서 평생 걸어보지 못했던 동생의 관에 넣어 주셨다.

정원이를 향한 우리 부모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차원에서
발견하게 한다.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늘 부모에게 짐이 되고 어려움만 안겨주는 그 아들을 향해 “나는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 말씀하시며 짙은 사랑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얼마나 높고 깊으신지…

사람을 대할 때 마다 연습을 한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시나요? 저도
그렇게 보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 사람의 얼굴에 오버랩 시켜본다. 이것은 때로 하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나의 ‘안간힘’이고 ‘절규’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능력이 없음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무시 하고 싶고 하찮게 여기고 싶은 사람들이 가끔 있다. 더욱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치와 존엄성조차 평가절하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눈과
마음을 구한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개개인에게 부여해 주시느냐 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생 정원이를 통해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내 평생 지치더라도 끝까지 해보고 싶은 훈련은 바로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훈련”이다.

[유상준]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지구/환경/해양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KOSTA 2009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Task-Major KOSTA

GTM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유상준

 

개요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등의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환경오염문제는 국지적인 영향을 지나서 지구 전체 생태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대기오염의 경우를 보면, 1950년대에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피해 정도만 전체 지구를 오염시킬 수 있는 물질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성층권 오존, POPs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수은등을 비롯한 많은 오염물질들이 지구지역으로 골고루 이동되어 영향을 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1).

 

 

Figure 1. Evolution of the perceived spatial scale of air pollution problems in the United States. (Keating et al, 2004)

 

 

해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육지에서 유입된 폐기물이 바다의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다 (Figure 2). 특히 태평양에 떠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의 경우 그 규모가 텍사스주의 넓이보다도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 이 물질이 분해되어 정화되기까지는 수백년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계산된.

 

이렇 인간활동에 의해 지구환경으로 배출된 오염물질은 Environmental Fluids인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이들은 다시 기권 (Atmosphere), 수권 (Hydrosphere), 암권 (Lithosphere), 그리고 생물권 (Biosphere)까지 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환경오염문제는 지구의 전체 시스템 오염시키는 Global Problem이 되었다.

 

 

Figure 2. Great Pacific Garbage Patch. (oceans.greenpeace.org/en/ the-expedition/news/trashing-our-oceans/ocean_pollution_animation)

 

 

인류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은 기후변화와 자원고갈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보다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해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산화탄소등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며 (Figure 3),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서야 할 선진국과 강대국들은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4). 이처럼 기후변화문제 역시 환경오염과 더불어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고 말할 수 있다.

 

 

Figure 3. Recent Global Monthly Mean CO2. The
dashed red line with diamond symbols represents the monthly mean
values, centered on the middle of each month. The black line with the
square symbols represents the same, after c
orrection for the average seasonal cycle. (www.esrl.noaa.gov/gmd/ccgg/trends/)

 

Figure 4. Carbon Tracker shows Atmospheric Concentrations of CO2. (www.esrl.noaa.gov/gmd/ccgg/carbontracker/)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Figure 5). 전세계 인구수 또한 증가하는 추세여서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 추세는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의 기술로 미루어 볼 때 석유는 앞으로 30, 석탄은 120여년의 여유분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각국이 앞다투어 청정 및 재생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고갈문제 역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 할 수 있겠다.

 

 

Figure 5. World Marketed Energy Consumption, 1980-203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이렇듯 지구는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자원남용으로 인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생존의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3) 지구환경문제해결을 위한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근본원인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환경오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 모두 인류의 탐욕과 무절제함이 초래한 결과이고 국제사회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무한경쟁에 따른 비협조적 태도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 (Figure 6). 자원을 무분별하고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물질이 자연정화능력을 초과하여 배출되었, 오염물질은 아니지만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조절하는 온실가스대기중 농도가 한계농도를 초과함으로 극심한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18~19세기의 철학 및 사상조류를 주도한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 발로되었다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유토피아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진화론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인간의 능력만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사상결국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같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등이 팽배해진 가운데 인류는 지구환경 전체에 걸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Figure 6. 지구환경문제의 근본원인

 

 

 

해결방안

 

그렇다면 위기의 지구환경에 대하여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절제와 협력 통해 문제의 근본원인인 무절제와 비타협의 문제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Figure 7). 실제로 세상 리더쉽은 소비와 생산의 구조적 변화와 기술개발등을 통한 자원남용 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 환경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배출 저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 글로벌 협력 필수요소로 제시고 있다. 이미 국경을 넘은 지구환경문제는 Global Agenda가 되었고, 이는 Global Collaboration을 통한 Global Solution에 의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논리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결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와 같은 위기가 초래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국가와 같은 기존의 질서와 지성 혹은 윤리와 같 절대적 사회기준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 이는 모든 기존의 질서와 기준 부정하고 해체하 그로 인해 다양화 된 것들을 새롭게 혼합하여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세우려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환경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새로운 글로벌 리더쉽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리더쉽은 지식/정보화 사회에 걸맞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형태가 될 것으로 예된다. 결국, 남보다 앞선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개인 또는 집단이 글로벌 리더쉽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 리더쉽은 모더니즘의 시대보다 좀더 글로벌화되고 강화된 권력인 동시에 지성과 윤리보다는 감성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띄게 될 가능성이 높다.

 

 

Figure 7.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방안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지구환경문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모든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건져내기 보다는 글로벌 리더쉽을 중심으로 협력 세력들만이 혜택을 누리게 되나머지는 소외되며 오히려 핍박받는 구조 재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은 감성적으로 친화력은 높이겠지만,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리더쉽이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Figure 8과 같이 이런 리더쉽의 형태와 시대의 조류를 성경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창세기의 바벨탑 시대를 살펴보자. 하나의 언어를 가진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 건설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열방으로 흩으셨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침묵의 시대를 보면, 모든 길을 연결한 로마의 토대위에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세계가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로마가 닦고 연결한 이 길을 따라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날, 인류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터넷, 휴대폰등의 네트웤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가 세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고 있다. 결국 시대에 따라 얼굴을 바꾸어 세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이끄는 글로벌 리더는 사탄인 것이다. 어떤 개인, 집단, 혹은 국가가 글로벌 리더쉽으로 나서더라도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사탄이다. 이런 사회에서 절제와 협력을 통한 인류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제와 협력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바벨탑모델로는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구할 길이 없다.

 

 

Figure 8. 지구환경문제 해결의 세상적 모델: 바벨탑 모델

 

 

 

성경적 대안

 

그렇다면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여기에서는 노아의 모델을 통해 살펴보았다. 노아의 시대는 대홍수라는 지구환경의 격변으로 인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놓이게 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와 생태계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인류와 생태계 또한 멸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노아의 방주와 같은 대안을 제시하여 인류를 멸망에서 건질 노아와 같은 글로벌 리더만 있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노아의 리더쉽 모델을 잠시 살펴보자. 노아의 모델을 전문성 (Specialty), 영성 (Spirituality), 그리고 글로벌 리더쉽의 세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첫째, 노아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Figure 9).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 수 있었고, 방수재로 역청을 사용하였으며, 생물종의 (Seed) 역할을 할 수 있는 짐승을 분류할 수 있는 생물학적 전문성이 있었다. 성경적 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 육식과 채식을 하는 새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지표면의 상황을 모니터링하였다.

 

 

Figure 9. 성경적 대안: Specialty

 

 

둘째, 그에게는 영성 (Spirituality)이 있었다.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6:8)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미리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홍수는 시작되었으며 (7:1), 그가 제사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8:20-22). 영성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본질 혹은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 그리고 영성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었다. 비록 여덟명이었지만 모든 인류모든 생태계를 하였던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11:7). Global Leader라는 단어는Global + Lead + er로 분해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글로벌 리더는 전체 (Big Picture)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올바른 방향 (Vision)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영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리더쉽이다. 코스타 강사이신 앤아버대학촌교회의 박상춘 목사님께서 리더쉽 훈련셨던 말씀을 잠시 인용해 보면,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여 눈이 밝아지게 했다. 바로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눈을 다시 타락 이전의 눈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전체를 보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이 없는 사람 영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글로벌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리더쉽을 생각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명성 또는 직위에 의한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작은 요소라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시작될 때까지 최소한 무시당하는 존재였다는 사실 (24:38-39)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글로벌 리더쉽은 세상적인 명성 또는 신분을 통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Global Heart,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 자를 의미한다. 진정한 글로벌 리더쉽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성과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머리 (Specialty), 주님의 눈 (Spirituality), 그리고 주님의 심장 (Global Leadership) 시고 노아처럼 사용하신다고 확신한다.

 

 

Figure 10. 세상모델과 성경모델의 비교

 

 

 

도전

 

지구환경문제에 직면한 위기의 인류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비용편익분석 (Cost-Benefit Analysis)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비용편익은 “Cost from Me, Benefit to Me”이다. 하지만 세상을 품는 글로벌 리더쉽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Follower of Christ)가 가져야 할 비용편익의 새로운 개념“Cost from Me, Benefit to the World”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따라 결국은 침몰할 타이타닉호 건조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감당못하는 믿음의 용사로 서서 또 한번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것인지 말이다.

 

 

 

참고문헌

 

Bible

Keating,
West, and Farrell (2004), Prospects for International Management of
Intercontinental Air Pollution Transport, The Handbook of Environmental
Chemistry, Vol 4 Part G, Springer-Verlag, Berlin p 295-32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International Energy Outlook 2009, U.S. Department of Energy, Washington, DC.

International Energy Agency (2007), Renewables in Global Energy Supply: An IEA Fact Sheet, OECD.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2008 Annual Report, 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Year Book 2009, New
Science and Developments in Our Changing Environment, UNEP.

Day,
Shaw, Ignell, and Steven (1988), Quantitative distribution and
characteristics of neustonic plastic in the North Pacific Ocean. Final
Report to US Department of Commerce, National Marine Fisheries Service,
Auke Bay Laboratory. Auke Bay, AK, pp. 247–266.

 

 

Sang-Joon Yoo

 

[이영길] 내 이름으로 사랑해 보거라!

캠퍼스에서 지체들을 만나면 그들의 손에 이끌려 자주 별다방 (Starbucks Coffee Shop)으로 가곤 한다. 구석에서 커피 홀짝 꺼리며 나누는 여러 대화들이 있지만 그중 흔한 문제가 관계에 대한 것이다. 여러 지체들을 만나 그들의 대인관계의 여려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움을 격고 있는 씨름 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지도 교수, 교회의 어느 집사님 혹은 지체, 같은과 학생, 실험실의 어떤 괴팍한 녀석, 아내 혹 남편, 소그룹의 리이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경험한 어느 동료 교수와의 문제가 늘 생각난다. 그래서 인지 그들이 격고 있는 아픔을 잘 이해 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의 블로그에 이미 다른 제목으로 나왔지만 “유학생활”이라는 카테고리에 없었던 것이라 이곳에 소개해 본다.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 때문에 사랑 하게 된적이 있다. 지금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고 있다. 내가 기적을 일으킨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말씀이 기적을 시작하였고, 그 말씀이 나의 순종을 통해 구체화 된것 뿐이다.


그 기적은 오래전 사랑이야기다. 당시 나는 어느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그곳에 부임하던 첫해에 같은 전공을 지도하던 어느 여자교수가 정년 (tenure)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사건이 생겼다. 워낙 성실했던 동료였는데 나는 제법 놀랐다. 나중에 누가 귀뜸해주기를 그 교수는 연구 실적이 많이 부족해서 테뉴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간 나는 졸지에 동료를 그렇게 잃어 버린셈 되었다. 

결국 후임을 뽑아야 하였고, 시간이 부족했던 관계로 급속한 속도로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어 교수를 뽑기로 하였다. 제한된 시간속에 광고 되었으니 제한된 숫자의 응모가 있었다. 그러나 적은수의 응모자 중에서 청빙위원회는 어떤 두 applicants를 학과장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학과장은 청빙위원회의 추천을 무시한채 어느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응모자와, 청빙위원이 추천한 두명과 함께 초대하여 인터뷰를 진행 시켰다. 물론 청빙위원의 추천에 속하지 않았던 세번째 그 여교수를 모두 기뻐하지 않았다. 결국 학과장은 세번째 여교수에게 좋은 조건으로 오퍼를 하였다. 이유인즉은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채용된 여자 교수의 이름은 티나 (가명) 였다. 나와 티나는 그렇게 만났다.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 금발머리였고, 목소리는 우렁차고 공격적이었다. 표정은 항상 경직되어 있었고, 자기 주장이 몹시 강한 사람 같았다. 교수회의에서는 유독 자기 생각을 분명히 나타내기도 했고, 어떨때는 심각히 따지기도 하는등 다른 교수로 부터 적개심도 유발할 정도였다. 강의실에서도 여전하여 학생들로 부터 환영 받지 못하고, 여러 학생들이 강의를 더 들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티나의 시작은 많은 잡음을 내고 있었다. 

티나가 나보다 대학에 더 오래 있었던 이유로 인해 그녀는 나의 전공분야에 코디를 맡게 되었다. 둘이서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나의 의견을 수렴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냥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동료 교수들도 힘들어 하였고, 학생들과 나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전공이라 티나를 advisor로 둔 학생 30여명은 티나를 찾기 보다 나를 찾음으로 나의 생활은 더 바빠 졌다. 티나로 부터 받은 어려움과 부당한 대우를 호소하는 학생들을 매번 상담해야 하였다. 나또한 티나로 인해 어려웠음으로 나도 상담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 기도때 나는 하나님께 강하게 호소 하였다. “나를 그곳 대학에서 떠나게 하던지 티나를 떠나게 하던지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대들기도 했다. 몇달을 기도했지만 티나도 그곳 주립대학에 있었고, 나도 그대학에 있었다. 무너지기를 갈망했던 나의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고 그냥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을 맛이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의 어려움은 더 어려워져 갈 뿐 호전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말씀을 읽는데 “티나를 사랑할 수 없겠는냐?”라는 세미한 내적 음성이 들리는듯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티나가 내 이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동의 하는 움직임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하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즉시 뿌리 쳤다. 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내 학생들은 사랑할 수 있지만 티나는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좌우로 저의며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 그날의 기도는 중간에서 멈추고 교회를 뛰쳐 나왔다.

문제는 그 뒤에 또 생겼다. 매번 새벽 기도시 읽는 본문 말씀중 “사랑”이라는 단어는 나로 하여금 티나만 생각나게 만들었다. 나는 괴로 웠고, 또 부정하며 교회를 나왔다. 세번째에 똑같은일이 반복해서 생기자 나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위해서도 나는 더 이상 도망다닐 수 없었다. “주님, 싫지만 순종하겠습니다!”

그날은 순교할 각오로 학교에 출근했다. 아침 부터 가슴이 쿵쾅거리며 견딜 수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티나의 방을 노크하였다. 티나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랬지만 불행히 그녀는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크를 했기에 문은 열렸고, 문을 열어 주었기에 나는 들어가 앉아야 했다. 나는 몹시 경직 되어 있었다. 평소 만날때도 경직 되었는데, 그날 사랑을 고백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내 얼굴을 응시 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고백해야 하니 우선 사무실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래서 문을 닫아도 되겠냐고 경직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이지”라는 대답과 함께 문을 닫았지만 긴장 떄문에 좀 세게 닫은것 같다. 화난 동양 녀석이 인상쓰고 아침 부터 들어와 문을 쾅 닫았으니 티나의 표정도 긴장으로 가득해 보였다.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사랑한다고 말은 해야 하는데 정말 당황 되었다. 차라리 화장실에서 거울 보며 연습이라도 할것을 그냥 들어온것 같아 후회 막심이었다. 그같은 많은 생각으로 인해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냥 티나의 얼굴만 긴장하여 째려 보았고, 그런 나를 티나 또한 노려 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떠듬거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것 같다. “나는 크리스쳔이라 매일 아침마다 기도 하고 있다. 너하고 불편해서 계속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한다라고 말하러 왔다. 내 하나님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고등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마치고 놀고 있는 자녀 하나를 더 둔 이혼한 티나 앞에서 이같이 말을 했으니 이제 과격한 티나가 어떻게 나올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그 말을 내 뱉어 버리자, 이번에는 티나가 나를 노려 보았다. 처음보다 얼굴이 더 긴장되어 보였다. 쥐 구멍이 있으면 들어 가고 싶었다. 꼭 이렇게 해야 예수 믿는 것일까? 주립대학에서 하나님 이야기에다가, 남자 교수가 이혼한 여자 교수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니 결과는 어떨까? 그동안 나로 인해 자신의 마음도 몹시 상해서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터인데 내가 하나님때문에 고스란이 당했다고 생각했다. 

등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며 나는 괴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티나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었다. 나는 “이제 하고 싶은 말 했으니 난 자리를 뜨겠다”라는 말을 남기도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티나의 눈이 젖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정이 풀려 감을 목격했다. 젖은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맙다, 영길아!” 라고 말하며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는 말이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티나는 울고, 나는 어찌할줄 모르는데 어색하게 앉아 있었고. 

티나는 입을 열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25년전에 만나서 결혼했고 아이도 둘 있는데 남편을 떠나야 했었다. 남편으로 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살고 있었고, 부부 관계는 너무 어려웠다고 고백하였다. 아이를 하나씩 나누어 헤어지자고 하여서, 남편은 큰아이를 데리고 살고, 자기는 둘째 아이와 살고 있다고 하엿다. 그때의 상처가 너무 컷다고 한다. 남편이 너무 싫었고, 큰 아이는 너무 보고 싶었고… 이후 우울증이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삶은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 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한다고 하여 믿기 어려울 만치 기쁘다고 한다. 전에 남편이 프로포즈할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한적이 있을뿐 아무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침을 그렇게 보내고, 각자 강의 하러 가야 했기에 우선 헤어졌다. 

나를 위해 중보하던 아내에게 오전에 티나와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저녁 아내가 빨간색 장미꼿 24송이 (two dozens)를 사들고 티나네 집을 찾아 갔다. 문을 열어 주던 티나는 24송이 빨간색 장미를 받고 또 울더라는 것이다. 남편이 프로 포즈 하며 사랑한다고 할때도 빨간색 장미 24송이 였다고 한다. 아내는 그날 어느 가게에서 장미꽃을 대폭 세일을 하기에 two dozens를 산것일 뿐인데… 아내를 꼭 껴안으면서 고맙다라는 말을 연실하며 흐느끼는 티나를 뒤로 하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우리 부부는 티나의 집을 또 방문하였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 하였다. 우리 부부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대학때 철없이 어느 남자를 만나서 관계를 갖고 딸 아이를 낳았지만 키울 수 없어서 입양기관에 넘겨준 아픈 사건으로 자신의 삶은 죄의식과 아픔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 부터 시작하여 많은 삶의 이야기를 큰 보따리를 풀듯 털어 내었다. 울고, 웃고, 또 울고… 우리는 이렇게 친구가 되었다. 주말에는 우리 두 아이를 돌보아 줄테니 영화를 보던 데이트를 하던 놀다오라고 하여 아이들도 몇번 맡아 주었다. 우리아이들에게 책도 읽어 주고 샌드위치에 꿀 발라 먹는 것도 가르쳐 주며 아이들을 아주 잘 돌보아 주었다. 

티나는 편집을 아주 잘하는 은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글을 써서 좋은 저널에 논문도 몇편 내기도 했다. 수년 동안 출판한 논문이 한편도 없었던 티나는 나와 글을 쓰면서 몹시 의욕에 차 있었다. 워낙 글을 잘 다음어 주어서, 나의 글이 티나의 손에 들어가면 아주 깔끔해 지는것을 보며 많이 놀랐다. 물론 나는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했고, 티나는 그같은 나의 피드백과 저널 편집장으로 부터의 칭찬으로 글쓰는 일에 매우 의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티나로 인해 학생들의 불평도 적어져 가고 있었다. 동료 교수들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의 평가가 여전히 나쁨으로 인해 티나를 내어 쫓느냐 아니면 기회를 주느냐 토론하며 각각의 교수들을 학과장이 만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티나를 내보내는것에 동의했지만, 나는 티나가 처음과 달리 아주 잘 하고 있음을 여러 근거를 사용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동안 둘이서 1년간 출판한 논문 세편은 학과 교수 15명이 쓴 논문 숫자의 합한것과 같았다. 결국 학교는 티나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즈음에 나는 다른 어느 주립대학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래서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다. 오퍼 받은 대학은 티나가 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이라 아주 기뻐 하였다. 물론 섭섭함으로 실망도 하였지만… 그곳에 집을 팔지 못한채 새로 이사갈 곳에 집을 사야 하였기에 금전적으로 아주 어려웠다. 사고 싶었던 집은 방이여섯개라서 학생들이 편안히 와서 쉬어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2-3분 걸어가면 공원도 있어서 청년들에게 너무 좋을것 같아 꼭 사고 싶었다. 그러나 그집에 누가 조건부 오퍼를 이미 넣은 상태이었다. 오퍼를 넣은 사람은 자신의 집을 팔면 그 돈과 융자금으로 사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기에 우리가 은행의 융자를 얻을 수 있으면 그 오퍼를 제끼고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은행에서 융자가 나왔지만 약속된 수일내 까지 현금 $5,000이 있어야 부동산 (집) 구입이 체결 (closing)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5,000이 나올길이 없었다. 

티나는 아내와의 교제 속에 우리의 이같은 실정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사를 앞두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학교 사무실에서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짐을 싸고 있었다. 한참 짐을 싸는데 티나가 얼굴에 땀이 범벅이 된체 내 사무실을 급히 들어섰다. 4층에서 부터 더운날 걸어 왔으니 더웠을 것이다. 그런데 씩씩 거리는것 보니까 뛰어 온것 같았다. 반가워서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더니 두툼한 두 주머니에서 쌍권총을 빼듯이 현금을 빼어 드는 것이다. “내 부모로 부터 거저 받은 돈이니 나도 네게 거저 주는 돈이다. 몇일 후 집 closing할때 사용해라! 갚을 생각 안해도 된다. 내가 너희 집 방문 하며 그냥 공짜로 잠만 재워주면 된다!”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가 버렸다. 

결국 새로운 곳에 집을 샀다. 그리고 먼저 집은 한달 후 팔 수 있었다. 덕분에 $5,000을 티나에게 되돌려 줄 수 있었다. 근사한 선물과 더불어. 새로운 곳에 이사간 이후 어느날 집 고칠때 사용하는 도구가 100개가 있는 파란색 도구박스 (Tool Box)를 문앞에서 발견했다. 티나가 5시간 운전해서 새로산 집 문앞에 도구박스를 두고 간것이다. 그 도구 박스 위에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집고칠때 필요로 할것 같고, 네 집에는 그같은 도구박스가 없는듯 하여 네 집에 놓고 간다. 잘 사용하도록 해라!”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주님때문에 억지로 사랑한다고 말한것 뿐인데, 너는 네 마음을 담아 내게 사랑을 주고, 또 돈도 주고, 보너스로 툴 박스 까지도 주고… 

이 기적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조그만 순종으로 경험한 이 사건은 내게 하나님의 크심을 늘 상기 시킨다.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신다. 그 이웃이 내게 어려움과 해를 끼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은 댓가를 지불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같이 형편 없는 인생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면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로 부름 받고 그곳에서 훈련 받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가 가는곳 마다 사랑의 기적, 사랑의 혁명을 이르켜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요 13: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