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작은 섬김 큰 열매

10년 정도 여러 명의 개척교회 목사님 자녀들에게 영어공부를 가르친 적이 있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빠듯한 재정으로는 남들 다하는 영어 과외공부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를 가르친 아이 중 특별히 기억나는 재미난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성환(가명)이다. 성환이는 성격이 배우 밝고 귀여운 아이였지만 공부 중에도 일어나 여기저기 움직이고 숙제도 자꾸만 잊어버리곤 했다. 여러 말로 타일러 보지만 잘 먹히지 않아 좋은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것은 성환이가 바람직한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포착하여 마음껏 칭찬하며 숙제 해 올 때마다 예쁜 스티커를 공책에 붙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티커가 20개가 모이면 문방구에 가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3천 원 정도의 물건을 사 주는 것이었다.

성환이는 이런 방법을 너무 좋아했고 덕분에 숙제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스티커 19개 모은 공책을 잊어버렸다며 마구 우는 것이었다. 나는 성환이 말을 그대로 다 믿어주고 새로운 공책에 해 온 숙제를 점검한 후 예쁘고 큰 스티커 하나를 공책에 ‘꽝’ 붙여주었다. 바로 20번 째 스티커였다. 그리고 우리는 신나게 곧바로 문방구로 갔다. 속상한 얼굴에서 환한 밝은 모습으로 바뀐 성환이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후에 성환이는 공부도 잘하고 착한 어린이로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엄마에게 그 이유를 “영어 선생님이 나를 잘 가르쳐 줘서 그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그 말 그대로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성환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겨우 일주일에 한번 하는 영어 공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은 섬김을 큰 열매로 이루셨다.

 
김 집사님은 모시고 살고 있는 시어머니와 관계가 매우 좋지 못하였다. 양쪽 모두 피해의식과 억울함으로 서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타깝게도 시어머니가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엄청난 통보 앞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 관계를 도와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일주일에 한번 씩 김 집사님의 시어머니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구역 예배를 마친 후 발걸음을 김 집사님 집으로 향하였다. 누워 계신 할머니에게는 주로 과거에 있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질문들을 하였다. 예쁘셨을 젊은 시절 이야기, 학창 시절의 추억, 잘 자라주는 손자들 이야기,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 하나님 이야기…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이셨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행복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며느리 김 집사님에게는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매일 시어머니에게 두세 번만 말을 건네라고 하였다. 예문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 날씨가 참 화창한데 거실에 나오실래요?” “오늘은 밖에 비가 오네요.” “특별히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만들어 드릴께요.” “이번 주는 아이들 시험 기간이에요.”…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김 집사님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어머니께서 소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천하시기 전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에게 전화하여 귀한 딸 데리고 와서 너무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며느리 김 집사님에게도 “고마웠다.”며 마음을 전하셨다 했다. 그동안 가졌던 서로에 대한 앙금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훈훈한 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장례식장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위에 소개한 성환이나 김 집사님 경우 모두 큰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그저 일주일에 한 두 시간 정도 소요될 뿐이다. 다만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며 살고 싶은 소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작은 섬김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 섬김을 기쁘게 받으시고 큰 열매로 되돌려 주신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기적’이 아닐까?

[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3강] 너희가 내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하려고…이 말들을 하였다(요 16:33 a)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셋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3강(목요일). 너희가 내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하려고이 말들을 하였다(요 16:33 a)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2000
예수를 믿는 초대교회에서 육체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와 놀라운 논리에 따라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포하기를 하기를,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것이 아니라, 변화할 것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고전15:51-52)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비밀은 하나님이 이세상역사를 움직여 나가시는데 결정하신 내용인데, 그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 성경말씀을 통해 있습니다. 중에 복음과 부활이 들어있지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 삼키고서, 승리 얻었다. 어려운 말이지만, 썩을
것이라는 말은 욕스러운 말이죠. 썩을 것이란 말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셔서 지금 입고있는 육체, 우리가 벗어야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입으셨던 입으셨던 신비로운 영체를 다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사망이 승리에 삼킨 된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망이 완전히 처리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55절에 계속해서죽음, 너의
승리
어디에 있느냐? 죽음,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일생에 모여 종놀음하는 모든 인류를 풀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망을 조롱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망을 가져오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6: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죄가 죄되게 하는 것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권세를 깨뜨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에 여러분, 생각을 많이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령님이 그토록 뿌리치던 나를 체포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만지실 때에 1초전까지도 믿어지지 않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신비스럽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후에 빛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해서   깨달 있기를 바랍니다. 덮어 놓고 믿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안죽어야 하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게 되죠. 요한복음 5
28절이하의 말씀에서는 구원받은 자도 부활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부활한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 6절에서도  신약적으로 논란이
있지만,
둘째 사망이 있다고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첫창조때 받은 육체를 벗고, 부활하게 되면은 다음에 오는 사망이 진짜 사망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1 7절과 8절에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되냐면, 죽고 부활한 다음에 영원한 멸망을 받는다고 합니다. ,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이죠.요한계시록 20 12절에도 죽은자들이 사망도 지옥도 지옥에 던지운다고 합니다. 첫째 사망이라는 인간의 , 고통도 때는 처리되고, 이것은 둘째 사망, 불모시 (영원한 저주,  사망)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다시는 돌이킬 없는, 동떨어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헬라어로 겐나입니다. 구약시대에 성밖에 있던 쓰레기소각장을 말합니다. 온갖 저주받은 것들을 모두 태우는 . 저주의 장소라고도 합니다. 자녀들을 불에 태워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다던지하면서 불이 타고 연기가 나던 곳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불탄다기 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지옥과 같은 삶을 생각해 본다면 몇만배 확대된 고통을 가늠해 어렵게나마 상상할 있겠죠. 요한계시록21장에서도 계속 나오는데요, 성경에서 말씀해온 언약의 말씀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영원한 나의 자녀가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죽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사망이라고 밖에 없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 17 18절을 다시 보면, 둘째 사망이 영원한 사망이기 때문에 첫쨰 사망, 그러니까 그리스도안에서의 죽음은 잠잔다라고 있겠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잠들때가 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토록 죽지않는 영체로 살아나셨고, 영체가 있는 새땅과 하늘 (베드로후서 3, 20-21 ) 이뤄질 것이죠 .
새로운 피조세계를 새로이 창조하신다고 해도 되겠고, 첫창조의 세계를 완벽하게 회복하셔서 재창조하신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새하늘과 땅의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도의 육체적인 부활의 몸이 첫창조의 영역때의  그것과  연속성와 불연속성이 동시에 있었듯이 새하늘과 땅도 그러합니다. 그러무로, 현재의 사는 이땅에서의 삶과 자연과의 연관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소중히, 아름답게 여기며 땅에서의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셔야 합니다.

계시록 20장에서 하늘과 땅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의 사람들과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그리고,
고린도 전서 13 끝에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 알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늘에서 씻으시매 다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으리니..
지상에서 인류역사 내내 개인적인 죄로, 집단적인 , 죄행으로 인해서 내가 직접짓지 않았음에도 피할 없는 인류의 연대성때문에 얽혀서 부메랑처럼 돌아온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 3절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는
그런 새하늘과 땅을 준비하시고 여시고 예수님이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주민등록은 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완전히 들어갈 것입니다. 죽음, 영원한 사망과 고통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길 원하는데요, 예로 들어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크다는 27m짜리 문어를 바닷속에서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왠만한 작은 배는 움켜잡는다고 하는데, 문어가 자신을 잡았다고 생각하십시오. 누가 와서 문어대가리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문어다리의 힘은 빠졌고, 머리부분까지 다가가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망권세를 예수님이 깨뜨리셨기 때문에, 사망권세가 있는 현재의 고통은 이미 죽어 있는 것입니다. 설령 문어발처럼 우리를 움켜쥐고 있다 하더라도 고통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잘라서 죽일 있습니다. 나라가 열려있습니다.

나라는 시간개념으로는 미래의 것이지만, 현재의 역사속으로 역행해서 들어왔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원래는 구약시대에는 그것이 인류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전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유태인이 갖고 있는 the Lord day 개념인데 (주의 진노의
날의 개념).
Here and now
개념으로 현재 역사속에 역행하여 침투해서 들어왔습니다. 겹치는 부분의 초기 그리고 already but not yet, 곁치는 첫부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B.C. A.D.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역사,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도 쓰는 용어를 봐도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음이 보이시죠. 오직 십자가의 빛만이 이전의 세상을 해석해 주고, 십자가 이후의 날을 해석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가 말들을 하는 것은 내가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함이라에서
들은
13-16장을 가리킵니다.  13 초반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신의 죽음으로 죄가 속량됨으로 그리스도와 그들은 끊을래야 끊을 없는 관계가 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새하늘과 ,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서 너희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셔서 성부께 구하면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들속에는 성령님에 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순간, 즉시! 성령께서 여라분의 존재속에 영원토록 머무십니다. 여러분이 참담한 짓을 그분께 한다 할지라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다음에는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시죠. 14절에는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십니다.
다음에는 사랑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말을 지키리니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 그러니까 성령, 기도, 그리고
사랑.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말을 듣고 샬롬을 듣고 이해하고 조금이나마 즐길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안에서 샬롬이 가능합니까?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대리인격이시고,  자신을
숨기시고, 성부하나님과 성자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밤에도 동상을 있도록 조명이 있듯이, 성령님은 숨으시고, 다른 위격이 드러나시도록 역할을 다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성령님안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알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간헐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영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님이 영원히 거하겠다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기도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종말의 것들, 새하늘과 새땅에 샬롬으로 충만할 것을 미리 앞당겨 쓰는 수단인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앞의 것을 빚을 내어서 쓰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신, 하나님의 실체이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님인데, 새하늘과 땅에서 얼굴을 마주할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것들이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것을 기도를 통해 있습니다. 기도는 미래의 샬롬을 있는 수단이고, 오직 샬롬을 맛본 사람만이 사랑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맛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없습니다. 미덕이 사랑이 아니라, 샬롬을 맛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있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기도와 사랑. 이런 함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샬롬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안에서 샬롬을 누린다는 것은 다소 자명해졌죠. 뒤집으면, 예수님 밖에는 샬롬이 없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같이 더불어 살자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있던 홍익인간의 개념도, 인본주의, 박애주의자들도 공평하게 살자고 하는데, 샬롬은 단순히 사이좋게 사는 것이 아니라, 샬롬의 구성원들이 반드시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약의 관게로 복구해야 함으로써,  아담의
죄로인해 상실했던 영원한 복을 다시 받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에 같이 우리를 담근 상태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원해도 샬롬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지혜를 같이 해서 더불어 살자!라고 해도 불가능하죠.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위해 많은 것을 추구했습니다.

모든 시대마다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샬롬을 상실하고 나서는 머리좋고 뛰어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있는 길을 궁구했지요. 서양에서는 이치, 진리, 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동양에서는 같은 작업을 ()
추구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죠. 첫날, 세상에 관한 세계관을 정리할 때에, 세상은 초월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초월의 세계에서 부어주시는 무한한 생명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것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만이 부으실 있는 생명의 힘말입니다. 운명을 어깨위에 짊어지고 사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단절된 폐쇄된 공간에서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있고 누릴 있는 샬롬을 스스로 얻겠다는 것은 모순이지요.  수많은
종교와 사상이 있어 왔었지만,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러나 문제나 길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비밀번호를 잃은 복잡한 전자기기를 고치려면, 만든 곳에 가서 수리를 맡겨야죠. 번호조합을 때려 맞출 수가 없겠죠. 인간의 샬롬은 샬롬을 만드신 분께 물어봐야 합니다. 찾는 것이 아닙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역사에서 궁구해 마지 않던 길과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죠. 일단 폐쇄된 우주속에서 하나님없이 스스로 안녕과 샬롬을 찾을 있다고 자만하는 인본주의는 하나님 배제하고 우리끼리 샬롬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인데, 가능하지 않습니다. 첫날에도 말씀드렸듯이 현실에 대한 인식은 비슷하지만,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곳임을 공통으로 인정하지만, 해법에 대해서는 다르죠. 죄를 해개하고 그분에게 돌아감으로 낙원을 회복할 있다는 생각이 다르죠. 허나 인본주의적 샬롬의 개념은 인간이 점점 진화하여 지상낙원,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낙원은 하나님의 꿈이고 유토피아는 인간의 꿈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가능합니다.

불교, 유교, 힌두교,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과동양의 유교와 조로아스터교같은 많은 종교들이 있어왔죠.  신기하게도 예수님이 땅에 오시기 300 내지 600 전에 약속이라도 듯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에 반해서 나온 종교들도 있지요. 6c  이슬람교, 10c 사회주의를 들수 있겠습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와의 차이는 예식은 없으나 이념의 강렬함은 선동적이고 호소력이 있고 종교적일 있습니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20세기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것은 인류의 끊임없는 여운이 담긴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디 부화뇌동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쪽으로 치우친 같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비추어 때에 좌파, 우파,  진보, 보수, 기득권자, 사회적인 약자등등의 용어는 많이 들어보셨죠?  1789
프랑스대혁명 혁명을 평가하기 위해 주어진 사회자의 오른쪽에 왕당파 (지롱드당), 왼쪽에는자크뱅파(혁명) 앉아 있었습니다. 좌는 현실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권위를 부정하고 집단을 존중하고, 현실을 깨뜨리며 나은 상태을 지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라는
것은 공산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이아닙니다. 옛날에 레닌, 스탈린시대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었으니까요.  우파라는 것은 일단 현재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좌파와 진보를 일치시켜서는 안되겠죠. 보수는 현재상태를 지향하는 것이겠고, 진보는 좌파와 같이 개혁과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상태이겠지요.  그래서
진보와 좌파를 올바르게 규정하고 써야 합니다.  한국에서 좌파라고 하면 사회주의성향이 있다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6세기의
종교와 이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슬람과 공산주의는 절대로 무시할 없는 대단한 종교입니다. 포스트 크리스챤 릴리젼이라고 합니다. 시대와 앞으로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라이벌은 사회주의와 이슬람입니다. 참고로  사회주의는 개인주의를 무시하고 집단, 국가, 사회를 위주로 하는 마르크스가 제창한 이념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란 말은 사회주의라는
실제로 국가에 적용해서 공산당이라는 일당독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실현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근본목적은 계급없는 사회를 만들자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자를 억누르고, 가진자가 못가진자를 착취하는 것이야말로 악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나긴 과정을 밟아서 세상이 사회주의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확신하기를 역사는 내적으로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장하신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주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자체는 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따라가면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사회주의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결정론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과정에 자본주의가 생긴다고 본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데, 자본주의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불가불 많은 노동자계급이 생기게 되죠. 그런데, 계급이 의식화되어서 국가기구를 깨뜨리고 노동자국가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혁명을 통해 국가를 만들고, 일당독재하는 상태를 프롤레타리아독재라고 부르는데, 의회를 해산하고, 어떤 공무원도 육체조동자보다 봉급을 많이 못받고, 정규군대신에 시민군을 두고, 노동자평의회가 국가를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반발하면 숙청하고 죽이고 쫓아내서, 노동계급이 완벽하게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고 산업과 기업을 국가소유로 하고,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게 된다면 엄청난 국가의 부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만인이 자기의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만큼 받는 화기애애한 공산국가를 만들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의 꿈은 맞는 것이고 좋은 꿈일 있겠지만, 불가능하고, 틀린 부분이 많이 있죠.

John malinier 영국의
사회주의 논객인데, 사람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르크스 주의가 다른 이데올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적 방도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계급구분을 철폐하고 착취와 전쟁을 종식시키며 세계노동자들이 지긋지긋한 빈곤과 고된 일에서 해방시키는 , 인류가 진보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현실적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이전에도 자유와 평등을 향한 갈망은 있어 왔기 때문이다. 스파르트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로 억눌린 자들은 억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사상가들은 조화로운 사회를 꿈꾸었다이들도 샬롬을 꿈꾸워 왔는데, 가장 탁월하게 정리해서 제시했기 때문에 어떤 사회주의 운동이 나온다 하더라도 원본은 마르크스사상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들어보시죠. “다른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기독교도 왜곡되어 소망이 표현된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모든 종교와 사상들이 샬롬의 길을 추구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역시 이런 갈망이 왜곡되어 표현된 하나의 이념인 것이죠. 이것은 놀라운 개념이죠. 크리스찬이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우의 대결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저는 악이고 나는 선이라는 태도가 강한 같습니다. 이분법적태도가 참여정부시절부터 두드러진 같고요. 비주류출신의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방법에 모두 동의하진 않지만, 서거소식 이후에 우리나라에 두드러진 , 우와 진보, 보수와 기득권자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이 대조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좌나 우를 편들면 안됩니다. 우리는 3 , 중도,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추구의 길이 버젓이 있는데, 편을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본주의의 대표이고, 유물론입니다. 완전한 물질주의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산다는 개념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두가 공평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인간의 인간됨. 가치에 있어서 같다는 뜻입니다. 부자나 천재나 지체장애자나 인간으로서의 가치나 존귀함과  존엄성에서 하나님보시기에 똑같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같이 주어진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입니다.  빈부의 평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특정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좌도 우도 아닌 샬롬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나 이념에서 추구하는 파라다이스, 낙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장 종교적으로 흡사한 이슬람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이유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혁명으로 이루려는 낙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와 이론이 제시하는 길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향은 가망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많은 시험을 받았겠지만, 마지막 시험은 만국의 영광을 보인 후에 사단이 십자가없이 샬롬의 나라를 이룰 있는 것처럼 속이고 권유하고 강요합니다. 

 가장 기독교와 유사한 사회주의 이론은 어떤면에서 기독교 이론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목사의 손자로 태어났고, 요한복음 15장을 졸업논문으로 쓸정도로 신학도였던 마르크스는 이미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개념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부패했다고 바라봤던 기독교는 이룰 없다고 생각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서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하메드가 만든 이슬람도 낙원개념과 구약의 많은 사상과 선지자개념을 갖고 있지만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자력으로  알라의 뜻을 이루려 하고,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많이 쌓아서 스스로 낙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   죄인된 인간들이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속량을 받지  않은채로 , 그들의 죄악된 욕망으로 이상향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샬롬을 이루려는 것은 노력은 성공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 불경한 일이기도 합니다.  샬롬의 나라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 15절에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어린아이들처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천국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내가 노력하고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폐쇄된 우주가 아닌 초월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샬롬은 세상적인 것들이죠.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얘기이지요. 그것을 중심으로 인권을 조금더 공평하게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샬롬 누리지 못한 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광을 상실한 우리들이, ,  죄인들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샬롬을 누리기 힘들죠. 인간의 타락한 본성때문에 사회주의를 통한 낙원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말리니어는 물질적 조건에 따라서 사람의 됨됨이가 달라지고, 사회에서 맺는 관계에 따라 인간성이란 달라질 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기를,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혁명이 거듭남, , 지난 시절 달라붙은 더러운 얼룩을 떼어낼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주의가 말하는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약자들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사회주의 이론이 이토록 구구절절 기독교의 진리를 비판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대부분은 말을 주로 하고는, 실천하지 못하는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내가 기꺼이 손해보고, 내가 힘들기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례로, 종로에서
the noble’s obligation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나눠야 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외침이 있는데, 정작 앞에 있는 라파엘의 집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라파엘의 집은 장애우들을 위한 시설인데, 이름없는 800명의 소액의 기증으로 운영되다가 운영난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요, 여전히 앞에서 평등만을 외치고 술마시고, 택시타고 집으로 가버린다는 것이지요.  역사를 위해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실상 사회적 약자의 삶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는 예가 되겠지요.

샬롬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는 민족적인 거부를 받고 있습니다. 샬롬의 위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부분적으로나마 샬롬/영생을 미리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중의 모든 것되시고, 천하보다 귀하시고, 인생의 궁극/목적이 되시고, 육체와 마음이 허물어갈 때에도 영원한 분깃이 되시는 분입니다.  놀라움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샬롬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민족적으로 거부당하는 지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복을 마음껏 누리고 나눠야 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주머니것을 옮기는 것을 포함해서, 여러분의 특권을 누리지 않는 것도 나눔입니다. 수입과 사회적 지위로 누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을 줄이고, 남들처럼 못살아 주는 것도 나눔입니다. 잘났지만, 못난 사람처럼, 존귀하지만, 비천한 것처럼 사는 것도 나눔입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떄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을 통해서 흘러 나가게 됩니다.  세대에서 우리의 받은 복을  
적극적으로 아낌없이 내가  바닥이 나도록 나누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번째로는 악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악을 대항하셨는데, 십자가에서 악을 받아내서 수용해서 악의 힘을 소진시키셨습니다. 악을 튕겨낸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악을 대항하는 방법은,
국가와 사회에서의 악은 악으로 규정해야 하지만, 너는 악이고 나는 선이다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악의 요소가 있으나   악과 작은 악이 있을 때에 already but not yet 시대를 살아 가면서 부득불 악과 작은 악을 선택해야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누구를 악으로 규정하게 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폭력적으로 해야 합니다.

1988 3 25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로바 국립극장앞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4시부터 촛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2000명이 되었고,   장엄한 찬송가가 불려지고,
 기도로
30분간 지속되었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집회였습니다.  2000명정도가 경찰이 터뜨리는 체류탄속에서 조용히 해산했었는데요,  전세계로 방송을 타고 나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결국에는 11월에 있었던 무혈혁명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마틴루터킹과 간디가 주장했던 비무장,
무폭력운동이십자가의 방법입니다.  내가 악을 수용해고, 망가지고, 내가 죽는 방법을 통해서 이시대와 정치에는 이런 악이 있음을 규정하고, 시대의 사회와 정치에는 악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무기력해 보이는 작은 몸짓, 이것을 하나님께 오병이어처럼 올려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령의 무한한 플러스 알파가 임하셔서 시대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  샬롬의 주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청년의 때에 예수 믿게 되신 것만으로 성공하신 것입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신다고 해도 예수 믿지 못하셨으면 아무것도 안하신겁니다. 땅에서 가진 것이 없고, 원했던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예수를 믿고 샬롬으로 초대받으신 분들은 인생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복된 메세지를 잊지 마시고,  여러분의 일생속에 구체적인 메세지가 약효를 발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참고로, 3번의 강의로 주제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계속해서 자세한 설교를 하며 화일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셔서 생각하실 있기를 바랍니다.

고 박준석 형제의 간증문


2009 코스타에서 진솔한 간증으로 많은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박준석 형제님이 2009년 9월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박준석님의 삶을 기리며 형제님의 간증문을 싣습니다. 모든 코스탄들에게 형제의 믿음의 유산으로 남기를 바라며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코스타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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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석 형제의 간증문 


안녕하십니까? 박준석입니다. 저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Tourism Management로 석사학위를 마쳤고 같은 전공으로 텍사스 A&M에서 박사과정을 이번 가을학기부턱 시작합니다. 3년 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결혼생활은 이제 만 2년을 조금 넘기고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유학생활을 영위해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학생 가정들이 겪는 학업과 생계의 문제를 저희 가정 또한 겪고 있으며 언어와 문화에서 비롯되는 어려움들 또한 저희 가정만을 비켜지나쳐가지 않습니다. 누구가 똑같은 통과의례를 지나쳐가기에 제가 여러분 앞에서 저의 유학생활을 자랑스럽게 물건들을 펼쳐보이는 보따리장수처럼 펼쳐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유학생활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저만의 독특한 경험이기에 감히 여러분앞에서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우선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제가 아무 것도 아님을 여러분께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부모님께서 주신 박준석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디애나 블루밍턴에서 Tourism Management를 전공했다지만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을학기에 박사과정을 시작한다고 한들 그래도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제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겨우 2년 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저를 위해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돌아오기만을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셨는데 말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서있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제가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때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2년 전 이맘때쯤인 것 같습니다. 2006년 가을, 인디애나 대학으로 유학을 올 때만 하더라도 저는 기독교, 혹은 신앙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꽤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중적인 가치와 행동들이 너무 싫었던 것 같습니다. 대형 교회들의 집회는 대형 백화점의 바겐세일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을 늘리기 위해 다른 이들의 시선과 편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은 실적이 인격이라고 믿는 여느 영업사원들과 똑같아 보였습니다. 주일마다 짜증나는 교통체증을 유발하면서도 주중 주차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에게 텅텅 비어있는 교회 주차장을 개방하지 않는 교회의 오만방자함도 싫었습니다. 매 주마다 교회 증축을 광고하면서 건축헌금을 들먹거리는 목사는 자신의 3억 원짜리 차는 절대 팔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교회의 병폐와 부조리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교회의 모습은 세금을 면제받는 대기업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점점 굳어져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것 같습니다. 제 평생에 교회 땅은 절대 밟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인디애나폴리스 공항에서 저에게는 실로 놀랍고 또한 소중한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그 때 저는 그 분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와 함께 유학길에 오른 친구 아버님의 친구분이시고 또 제가 다니게 될 학부에서 교수직을 가지시고 계시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 분 댁에서 하루를 신세 질 것이라는 것이 제가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그저 원님덕에 나발부는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디애나폴리스 공항에서 블루밍턴까지 차로 한 시간을 달리면서, 말을 건네고 받는 동안 교수님이 참 따뜻한 분인 것을 느꼈습니다. 이윽고 교수님 댁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거실에서 잠시 쉬는 동안 교수님께서 저에게 교회에 다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저의 대답은 “저는 기독교를 증오합니다.” 였습니다. 제가 의도한 답변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머리로 생각도 하기도 전에 이미 저는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그 분이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지켜오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기독교가 싫었으면 처음보는 교수님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헌데, 더욱 놀랐던 것은 교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근데, 준석이는 기독교를 왜 증오하니?” 이렇게 물어보시는 그 분의 표정에는 여유로움과 인자함이 묻어나왔습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미국식 teaching방법인가라는 생각도 잠깐 들기도 했지만, 이내 저는 제가 기독교에 가지고 있던 제 생각들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저의 얘기를 끝까지 다 들으신 교수님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제가 가진 생각들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한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시며, 마지막으로 제가 하나님을 영접할 것을 확신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교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흠….글쎄요….’ 


저는 참 고집이 셉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는 아닙니다. 사람들 말은 경청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미 저의 생각은 서있기 때문이죠. 제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제가 판단하기에 옳던가 아니면 저의 생각과 같던가 둘 중의 하나일겁니다. 물론, 교수님 말씀은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을 통해 제가 느꼈던 것은 ‘이 분 내공이 보통은 아닌 걸’ 그리고 ‘기독교가 제가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마도 이 정도 였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과의 첫 만남을 이후로 첫 학기가 시작되면서 교수님을 뵐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기가 종반으로 향할 무렵 교수님과 또 다시 운명처럼 재회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짐은 혼자 짊어진 상태로 말입니다. 미국에서의 첫 학기는 정말 혹독했습니다. 영어란 것이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그저 언어의 한 종류일 뿐이지만, 미국에서 영어를 언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 그 이상이었습니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며느리 냉가슴 앓듯,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Syllabus에서 제시된 과제를 제출하기에도 버거운데, 수업시간에 주어지는 과제는 왜 그리 많은지…..하지만, 문제는 과제의 양이 아니라, 언제 교수가 과제를 내주었는지 한 번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수업시간에 미국 친구들은 어김없이 과제를 제출했지만, 저는 혼자 멀뚱히 바닥만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저의 due date은 항상 그 다음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이러기를 수 차례 반복하는 동안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됩니다. 그룹 프로젝트를 위해서 수업시간 동안 group discussion을 하고 그 날 오후 도서관에서 모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저는 낮 잠을 자다 약속시간에 9분을 늦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도서관 로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서관을 뒤져볼까 아니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를 놓고서 한 참을 망설이다 저는 결국 혼자 집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도서관을 이 잡듯이라도 뒤지던가 그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을테지만, 그 때 저의 상태는 중증 영어 장애로 학교에서 장애인 퍼밋을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또 그로 인한 자심감 상실 및 대인기피증(물론 미국인에 한해서 입니다만)은 점점 더 저를 위축시켰습니다. 다음날 수업시간은 발표로 진행되었습니다. 앞의 그룹들이 발표를 다 마치고 저의 조가 발표를 준비하는 동안, 저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위에 적힌 저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조원들이 모두 앞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저는 오히려 뒤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교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조원으로서 기여한 바가 없으니 점수를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 짧은 영어로 또 직설적으로 내뱉은 저의 영어는 그 할머니 교수님을 자극하기에 딱이었던 것 같습니다. 돋보기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그 너머로 저를 쳐다보던 그 차가운 눈빛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저는 혼자 거울을 보고 삭발을 감행합니다. 제가 너무 바보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또 결심합니다. 영어가 될 때까지는 시리얼만 먹겠다고…… 


한 달 무렵이 지날 즈음, 도서관에서 우연히 교회 소그룹 성경공부를 같이하던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다녔지만 한국 유학생 사회의 특성상 참여하는 사회활동 일환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형이 저의 머리를 보고 놀라면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저는 행간의 얘기를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 형님이 교수님을 한 번 뵙고 상의 드리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형과의 대화가 다 끝난 후 저는 약속도 없이 교수님 연구실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시던 교수님도 제 머리에 흠칫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교수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의 첫 말씀은 “준석아!, 우선 밥부터 먹어라.” 였습니다. “밥을 먹고 힘을 내야 공부도 하는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을 마주하면서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로 눈물을 훔치지는 말자’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오늘 여기에서 또 한 참을 울겠구나……’라는 생각말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제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정말 하염없이 나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석이 너를 참 사랑하시는가보다!” 어금니를 악다물고서 참으려고 했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더군요. 서러웠는지, 답답했는지, 혹은 억울했는지 무슨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터지는 눈물을 의지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무슨 감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시간 이 곳에서 또 여러분앞에 서있다고 해서 억지로 하나님을 끼워맞추기는 싫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기는 더욱 싫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그때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고 생각하지 못했고, 또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할 것은 유학생활 시작 후 그런 평안함은 처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수님과의 만남은 종종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도움으로 첫 학기를 마친 후 두 번째 학기를 보내는 동안 저는 또 한 분과의 귀한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학업 이외에 집안문제로 고민하던 와중에 같은 교회에 계시던 집사님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지만 그 때는 그저 스처지나는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어서 저의 문제를 들어주신 집사님께서는 저와의 일대일 성경공부를 제안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서야 모든 일이 원만해질 것이라는 집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주 토요일 늦은 저녁 4시간을 성경공부에 할애했습니다. 하지만 집사님께서 내시는 그 시간은 훨씬 더 귀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박사과정 논문 proposal을 앞두고 정말 바쁜 시간을 보내시고 계셨는데, 선뜻 4시간을 내어주신 집사님께 예의를 지킨다는 생각에라도 성경책을 펴고 예습을 했습니다. 본문이 4과를 지날 무렵, 질문 중 “당신은 하나님을 구주로 믿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4주를 지체했던 기억이 납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그 때 느껴본 듯 합니다. 4 주가 지난후에서야 자의반 타의반으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크게 변한 것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한 확신같은 것을 느껴보기를 원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짧은 대답 이후로 제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관점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이후에도 기독교에 대한 저돌적이고 냉소적인 저의 질문들에 항상 성실히 또 시원하게 답변해 주시는 집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반기 방학이 끝날때까지 성경공부는 계속되었고, 성경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본인의 경험을 나누며 같이 고민해주시던 집사님의 모습에서 정말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공부가 끝나갈 무렵부터 가지게 된 생각 ‘내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내가 기독교를 혹은 기독교인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구나’라는 것이없습니다. 철옹성 같던 저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단 1년 사이에 단 2명에 의해서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무렵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에게 결혼 후 미국에 오게되면, 같이 교회에 다닐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여름 방학동안 한국에서 결혼을 준비하면서 저는 다시 성경과 교회에서 멀어지게됩니다. 교회를 나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들이 불현듯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외면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 지금의 아내와 결혼 준비에 몰두하였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미국에 돌아온 후 저는 저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경험을 하게됩니다. 블루밍턴에는 매주 목요일 찬양 모임이 있는데, 계속 나와보라는 친구의 권유를 대놓고 무시하며, 학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일 년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않고있었습니다. 새 학기가 3분의 1선을 지나갈 무렵,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갑자기 목요 찬양 모임에 나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공부가 따분해서였는지 계속 모임의 참석을 권유하던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었는지 전혀 종잡지도 못했지만, 그저 그곳에 가봐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찬양 모임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울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두가 일어나 찬양을 드리는 동안 의자에 앉아 흐느껴 울기만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또 죄로 가득찬 저를 사랑하신다는 생각에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또 그때까지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며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계획하신 시간표중 일부임을 느끼며 저는 제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제가 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보낸 지난 세월은 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삶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였으며, 저의 고집불통 자존심은 손에서 놓을 수없는 저만의 성경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을 것이란 죄송함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함에 또 이제껏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신 그 끊없는 인내함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유학생활을 뒤돌아보면 인내와 겸손을 배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시간이란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에서야 교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준석이 너를 참 사랑하시나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영어의 문제로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영어를 못해서 답답합니다. 돈의 문제로 힘이 듭니다. 통장의 잔고가 하나도 없어서 아내와 16년 된 중고차를 팔아야 할지를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자만심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제가 머리가 나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다음 수업에 제출해야 할 숙제도 알아듣지 못해서 또 Incomplete을 받으면서 힘이 들었습니다. 저의 고집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만 밀어붙이면서 깨지고 박살이 나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들은 하나님안에서 축복의 통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축복이고 주님의 은혜이고 주님의 계획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제가 저를 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또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하겠지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할 따름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더 느끼려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고 한 번도 놓으신 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준석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박준석 형제님을 기리는 글을 이영길 교수님께서 써주셨습니다. 코스탄들에게는 믿음의 유산이, 유가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이코스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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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2시 30분 준석이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나도 몰래, 말없이… 늘 그러듯 “교수님, 먼저 갈께요!”라는 인사도 없이 떠났다. 괘씸한 녀석! 녀석이 나보다 먼저 천국 갔기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녀석이 어디 있어. 천국에서 만나면 혼내준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한없이 울었다. 천국서 만나면 허그 (Hug) 하기전 굴밤부터 한방 먹여줄거다. 이 버릇없는 준석이를 생각하다가 바로 정란자매에게 전화 했다. 어제도 오늘도 수없이 전화 했지만 첫번째 통화 되었을때는 함께 말없이 울기만 했다. “정란자매, 그냥 같이 울자!” 오열하듯 울어 대는 정란 자매와 전화 통화하면서 나는 길에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준석이가 너무 그리웠다. 옆에 손을 잡아 주지 못해 미안하였다. 
준석이를 만난 것이 벌써 2년도 넘었다. 한국에서 내가 아주 잘 아는 어느 교수님의 아들과 함께 인디애나대학으로 유학 온다고 하여 사실 그 교수님 아들을 공항으로 라이드 갔다가 함께 동행하고 있던 준석이를 만난것이었다. 유난이 몸이 커 보였지먄, 인상이 아주 착한 곰 같이 생겼다. 팬더 곰 같이 귀엽기도 하였다. 두 학생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약 이틀 정도를 함께지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던차에 준석이가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고 입을 열자 거의 방어적으로 “내게는 복음 전할 생각조차도 마십시오!”라는 녀석의 허풍에 어깨 두드려 주며 “너는 곧 예수 믿게 될거야!”라고 되 받아 답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 보았고, 하다 못해 유학생 신분의 청와대경호실 출신의 공무원도 만나 복음을 전했지만 준석이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대하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준석이는 드물게 착했다. 공손하였다. 모든것이 깔끔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달리 태도를 취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준석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시작하여 교회도 나가고, 같은 교회의 어느 집사님과, 그리고 나의 미국인 친구 Darwin과 성경공부도 하며 이 아이는 그리스도인으로 되어져 가고 있었다. 보통 열심이 아니면 나가기 어려운 목요모임에도 나왔다. 앞에서 말씀을 전할때면 이 아이의 눈에서 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만져가심을 자주 확인하곤 했다. 사무실에서나, 복도에서나, 혹 캠퍼스 어느곳에서 만나든 함께 이야기 할땐 준석이는 예외없이 운다. “준석아, 내가 너 때렸냐?”라고 물으면, “그냥 교수님보면 눈물 나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말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아내가 가게 할때 조그만 도움이 필요하여 부탁하면 두팔 걷어 올리고 굵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도왔던 준석이다. 가게를 띁어서 모든 가구와 기구들을 미시간에 가져 올때 돈을 주고 일을 시킨적 있다. 돈을 줄 별다른 이유가 없어서 준석이를 고용하였다. 그냥 일을 부탁하면 돈을 안받으니까 고용해 버린것이다. 준석이는 무섭게 일한다. 남의 일도 자기일 같이 한다. 아내와 나, 그리고 나의 큰 아들 상민은 그냥 놀라기만 하였다. 정성껏, 몸을 아끼지 않고, 땀을 흘리며, 즐겁게, 그리고 정열을 가지고 일한다. 
공부도 그렇게 정열적으로 하였다. 참으로 열심히 도서관을 드나 들며 공부하는 성실한 학도였다. 그러나 준석이는 자신의 이기적 성공만을 추구하려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학도가 아니였다. 내 눈에 보인 준석이는 아주 진지한 크리스쳔 학도 였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준석이의 고민은 자신의 학문과 신앙을 통합하는 문제였다. 미시건에 있는 내게 여러번 전화도 하였고, 또 집으로 방문하여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으며 준석이는 크리스쳔 학도의 진지한 면모를 내게 보여주었다. 아래의 글은 지난해 9월 14일 준석이가 내게 보낸 미멜중 하나이다. 
“… 앞부분 생략… 저는 대학에서도 관광개발을 전공하였고 이곳 인디애나에서도 역시 Toruism Management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학업의 관심분야를 이제서야 조금씩 찾아가는듯 합니다. 관광이라는것이 관광객과 관광자원,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 주는 제반 모든 요소들을 다루고 있지만, 저의 관심분야는관광자원입니다. 또, 자원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임펙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속가능한 관광 (sustainable tourism), 대안관광(eco-tourism, green tourism, rural tourism…), 자원의 경제적 가치 및  문화적, 사회적 영향 평가, 관광객의 태도 및 그에 따른 관광지의 선택, 자원해설(interpretation)의 영향 등이 주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교수님! 코스타를 전후로 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다시 말해 기독교인으로서 저의 학업의 목적과 여정을 어디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기전에는 미국에서의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좋은 학자가 되는 것이 그저 저의 목적이었는데요, 지금은 제가 살아서 숨쉬는 것도, 또한 이곳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주신 학업의 기회이기에 설사 제가 박사 진학에 다시 한 번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해도, 그저 저의 부족함을 돌아볼 뿐 개인적인 자조나 타인에 대한 원망은 없기를 소망합니다.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혹시라도 박사과정에 진학한다면주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크리스챤 Scholar로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학문을 하고싶습니다. 요새Leisure and Aging이란 과목을 들으며 한국인 이민 노인들의 여가 만족도와 social support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전혀 관심밖이었 leisure나 recreation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또 minority, ethnicity, and nationality, 또 사회적 약자 (노인,장애인, 경제적 소외계층 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도전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솔직히 제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관심분야들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관광자원분야와 행복, 다소 쌩뚱맞은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어보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또 솔직히,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소그룹에서 뵙게된 노령의 권사님 내외분을 보면서 점점 더 제가 해야 할 공부가, 또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위 주제의 페이퍼을 쓰면서, 또 이러한 생각 중에 권사님 내외분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주님이 원하시는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경제학을 위시한 모든 학문이 어떻게 파이를 크게 만들고 또 그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하는가에 촛점을 맞춘, 오로지 일만을 생각하는 음울한(dismal) 학문이라면, 관광학이라는 학문은 일이 아닌 여가에 바탕을 두고 어떻게 사람들을 잘 놀게, 잘 쉬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행복한 학문이라고 합니다..굳이 leisure나 recreation이 아니더라도, 제가 이제까지 공부했던 관광이라는 학문과지식을 통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만 정작 배운 지식이란 것이 너무도 얇아 깊은 생각에 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다만, 관광을 통해서 사람들을 성장, 성숙시키고 또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만 도달했을 뿐입니다. 평생의 연구주제를 행복으로 삼고자하는 석사생을 과연 어느 누가 받아 줄지 불안함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행복한 확신도참 오래간만인듯 합니다..^^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 뒷부분 생략…”
그뒤 준석이의 생각은 많이 발전하여 크리스쳔 학도로 박사과정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막연하나마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듣는 나로서도 그 그림이 많은 생각, 고민 및 기도가 있었음을 눈치챌만치 잘 그려져 가고 있었다. 학자로서 자신의 성공보다 자신의 공부로 이 세상을 섬기고 싶은 그의 뜨거움을 대화때마다 감지 할 수 있었다. 
석사학위가 마쳐지면서 박사과정 진학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박사과정을 추진하는 준석이를 위해 쓴 추천서가 제법 된다. 낙방의 소식이 계속적으로 날라왔지만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기다렸다. 그리고 돈이 없어 박사과정진학을 심각히 고민되어 장학금을 위해 또한 함께 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미시간에 와 있었기에 전화할때면 의례히 전화로 기도 하곤 했다.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Texas A & M (준석이가 하던 전공 분야에서는 제일 좋은 프로그램이 있는 대학)으로 부터 입학허가서가 왔다고 전화를 받았다. 함께 기뻐하며 전화로 아우성치며 축하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후 장학금까지 받았다고 말을 하여 함께 “할렐루야”를 외치며 기뻐하였다.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준석이가 바로 엇그제 같다. 
텍사스로 이사 가기전 코스타에도 참석하여 많은 코스탄들 앞에서 자신의 간증을 진솔하게 한적이 있었다. 간증이 있기 하루 전날 저녁, 집회가 있던 휘튼대학의 Alumni Gym에서 함께 손을 붙들고 기도 하였다. “하나님, 준석이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간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라고.. 많은 간증들이 혹 하나님 보다 자신을 높이는 자기자랑이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였다. 다음날 준석이는 강단에 섰고,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된채 하나님을 높이는 간증을 하였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 냈다. 얼마나 감사하였던지. 그리고 준석이의 간증은 많은 코스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이토록 준석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용감하다. 그리고 하나님 믿은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하나님 높이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래서 그 간증을 들으며 녀석 보다 내가 먼저 울었고 기뻤다. 왜냐하면, 나는 준석이가 유별나게 선하고 좋은 아이라서 하나님을 그렇게 높인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어려움 뒤에 늘 함께 계셨던 하나님, 그리스도를 주저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준석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토록 높이는 것임을 가까이 있었던 나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본인이 가고 싶었던 대학으로 얼마되지 않은 짐을 싫은 트럭을 몰고 가며 전화 하였다. “교수님, 저 지금 칼리지 스테이션을 향해 가고 있어요! 가면 또 전화 할께요!”라고 말하던 준석이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 그제 같다. 떠나면서도 자신의 아픔 보다 내 관절염의 아픔을 더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던 준석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건강보험이 없어서 머리가 아픈데도 꾹 참고 보험 살때 까지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험이 시작되는 그제 병원에를 찾아 갔었고, 준석이는 그 다음날 수술대에 올랐다. 그러나 흐르는 피를 막을 수 없었던 의사는 절망을 선언하였고, 가족들이 산소호흡기를 뺄것을 제안하였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준석이는 새벽 2시 반에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준석이가 하늘나라 가기전 늦음밤까지 이아이를 위해 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많은 대화들을 기억하였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 울먹거리며 나의 건강을 묻던 그 입술, 웃을때는 유난히 밝았던 눈가의 눈웃음… 그리고 준석이가 전에 내게 보냈던 이멜도 다시 열어 보며 이이를 그리워해 보았다. 
“교수님!  참 보고 싶습니다… 잘지내시는지…안부를 묻는 인사보다 보고싶다는 말이 먼저 나오게 되네요…^^ … 준형이 형을 통해서 교수님 가정의 평안함을 들으면서 제가 왜그리 기쁜던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성정에 앞으로 얼마나 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실지 짐작은 합니다만, 건강 유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교수님을 뵈면 주책없이 눈물을 훔치고는 했는데요,,, 요새는 교수님 생각에 짠~~ 하고는 합니다… 같이 기도해 주시던 교수님 손이 참 따뜻했었는데요..”
텍사스 갈때처럼 “교수님, 나 지금 천국 가요! 가서 전화 할께요!”라고 하면 안되었나? 나쁜 녀석! 네 손을 잡고 밤새 기도 하고 싶구나. 너를 이땅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너무 크지만, 너를 그 누구 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께서 계신 그곳에 갔으니 오히려 네가 부럽다. 준석아, 돌아 보니까 네게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진것 같구나. 준석아, 네게 사랑의 빛을 진 많은 이들가운데 회개의 운동이 일어 나고 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함이다. 네가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갔던것을 알지 못했던 나였고, 또 이웃이었기에 과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는가를 되묻게 되는구나. 네 아픔을 감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다오. 뿐만 아니다. 우리들은 영혼구원을 뒷전에 쳐박아 둔것을 통회하며 무릎꿇고 있다. 네 삶이 구원의 기쁨으로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산 삶이 었기게 우리에게 더욱 큰 도전이었다. 우리들이 더 영혼을 사랑하며 너 처럼 구원의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도록 우리들이 주안에서 애를 쓰마. 준석아, 잘 가거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See you later!

2009 KOSTA/USA 참석자 좌담회 – 박소현, 조선우, 최장환, 황원태






eKOTSA: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조선우 자매 (이하 조선우): 안녕하세요.
11
지역 조장을 했던 조선우입니다. 현재 필라델피아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고,
미국 온지는 3, 그리고 코스타는 두번째
참석했습니다
. 작년에는 조원으로 참석했구요.

박소현 자매 (이하 박소현): 안녕하세요.
저는 박소현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온지는 11년 되었는데, 처음 3년동안은 유학생이었고,
그 이후에는 주부로 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업스테이트 뉴욕이고,
코스타는 지금까지 세 번 참석했고, 그 중 두 번을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황원태 형제 (이하 황원태): 저는 황원태라고
합니다
. 12지역을 섬겼고, 박소현 자매의 남편입니다.
미국에 97년에 와서 12년째 살고 있고,
코스타는 두 번 참석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최장환 형제 (이하 최장환): 작년에 유학
나와서 현재는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코스타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2
지역에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반갑습니다.

eKOSTA: 코스타 집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해주시겠습니까?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 특히 아쉬웠던 점을 건설적으로 비판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우: 주제에 있어서는 굉장히 필요하고, 적절했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특히 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절망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데
, 절망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세상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더라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 될 거리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가 채워지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오는 것이며
, 평화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오는 것이라는 메세지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집회 이후에 조원들과 나눔을 할 때에도 샬롬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눠지고 있구요.

그러나, 기도와 관련해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목요일 밖에 없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금식기도와 기도의
밤이 다 목요일이어서
, 화요일, 수요일에 기도 시간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 조원들 중에는 새벽기도를 위해서 조용한 기도실을 기대했던 분들이 있었는데요, 가능한 방이 조별 중보기도실 뿐이라 오전 630분 이후에는
중보기도와 겹쳐서 조용히 기도에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 그리고 중보기도 신청했던 시간에 시끄러워서 기도하기
쉽지 않았고
, 한 번에 네 개의 조가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여섯 조 까지 함께 했던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박소현: 주제에 관해서는 2007년부터 올해의
주제까지 연결이 잘 되었던 것 같아요
. 주제가 매년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2007년에 이 시대와 하나님의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면, 2008년에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배웠고
, 올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배웠는데요
, 특히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용기있게 세상 나가는 자세에
대해서 배워서 좋았습니다
. 올해의 주제를 따로 떼어놓고 볼 때도, 나라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 방안을 배운 것 같아서
, 주제가 잘 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주제가 전체 프로그램에 잘 반영되었다고 보시나요?

박소현: 오전 주제 강의의 경우, 손희영 목사님의
강의가 대다수 분들에게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하는 인상을 받았구요
. 저녁 집회 때 세분의 설교,
특히 복음을 소개하는 설교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미나의 경우 모든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전체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세미나 리스트를
볼 때에 주제를 프로그램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였습니다
.

황원태: 조장으로 훈련을 받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해서 그런지
집회 처음에는 주제가 잘 와 닿지 않았는데요
, 화요일과 수요일을 지나면서 주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주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잘 와닿았습니다. 조원들의 경우에는
조장처럼 주제를 미리 묵상할 시간이 없어서
, 처음에는 주제에 대해서 어려워하고 궁금해 하셨는데
2,3
일 후에는 주제에서 연속성을 찾으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살아가는
것이 도전이지만 그 도전을 어떻게 감당해야하는지
, 어떻게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좋았고요, 나중에는 조원들이 그런 평화를 누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


eKOSTA: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황원태: 집회의 느낌이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구요,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차분했습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들 평가하시는 것 같구요.
혹시 미혼 코스탄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그랬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찬양 시간에도
차분했고
,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제와 연관이 있는지
찬양팀이 바뀌어서 인지 잘 모르겠네요
.

최장환: 저는 이번에 처음 코스타에 참석해서 주제에 대한 연관성을 볼 수는 없었지만,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제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첫 참석이다
보니
, 코스타의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장 수양회에서
코스타의 목적이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코스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길래 이런 프로그램과 일련의 스케쥴을 짰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데 아직 코스타의 목적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코스타 프로그램 중에 선교 헌신 시간도 있었고, 좁게는 하나님의 샬롬으로 승리하는
삶의 초청과 각자 위치에서 선교사적 삶을 사는 것을 초청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코스타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구현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고요, 통일성,
전체적인 흐름의 일관성이 다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드네요
.


eKOSTA: 전체집회 강의와 설교에서도 통일성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셨나요?


최장환: ,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강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체적으로 주제가 잘 반영이
되었지만
, 한편으로 주제 강의를 제외하고, 요일이 지날수록 주제인 샬롬에
대한 강의 내용이 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그리고 전체 집회의 강의를 맡으신 분들이
본인이 생각하시는 샬롬에 대해서 말씀하시다보니 중복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

조선우: 저도 샬롬이라는 주제가 잘 와닿았고, 조장 훈련 중 있었던 2주간 묵상과, 조장 수양회 말씀을
통해서 더욱 그랬습니다
. 손희영 목사님의 말씀은 처음 듣고 전체내용을 쉽게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추상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녹음된 CD를 가지고 있으니 다시 들어볼 계획입니다.
아쉬웠던 점은 조원들이나, 교회에서 함께 간 분들이 가장 육체적으로 피곤해했던 시간이
오전강해 시간이었는데
, 그러다보니 주제가 가장 잘 전달되어야 했을 오전 강해시간을 통해 샬롬에 대한 이해가
코스탄들에게 잘 이뤄졌는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 아침 묵상이 잘 이뤄졌다면 그것을 통해서 각 조에서 주제가
잘 전달 되었겠지만
, 오전강해를 통해서 주제가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원태: 손희영 목사님의 세번의 강의가 어렵고 추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의 중에 드신, 구체적인 예들이 도움이 되어서 연속성이 있었구요. 샬롬으로 시작하여 용기로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녁 설교 중에 최장환 형제가 말씀하신대로
각각 다른 강사가 오셔서 말씀하셔서 그런지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 연속성이 부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손희영 목사님의 말씀은 어려웠지만 연속성이 있었는데, 저녁설교에서는 그것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작년에는 두 분이 저녁 설교를 각각 두 번씩 하셔서 연속성 면에서 좋았습니다.
또 화요일 복음을 소개하는 구원초청 말씀에서는 복음의 핵심사항이 다뤄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유진소 목사님의 복음 세미나에서는 그 내용들이 잘 요약이 되어서 전달되었구요. 작년에
노진준 목사님 말씀이 무게가 있고 재미도 있었고
, 정민영 선교사님 말씀도 좋았는데요, 작년과 같이 두 번 두 번의 포맷이 좋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둘째 날에 구원초청이
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셋째 날에 구원초청을 하고, 선교와 헌신에
대한 초청을 넷째 날에 하면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 조장으로서 첫 날 조원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나를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 화요일 저녁까지 인도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소현: 손희영 목사님의 전체집회 설교는 역시 어려웠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주제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주제였구요
. 손희영 목사님의 첫번째 설교가 지난 코스타 주제와의 연속선 상에서는 이해가 좀 더 쉬운데,
올해 첫 참석자에게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쨋날 구원초청 설교에
대해서는 흡인력이 있었지만
, 구원의 당위성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설교의 요약이 저에게는 “구원에 있어서는 중간 지대는 없다. 믿거나,
그렇지 않거나이다”로 요약될 수 있었는데 이 말씀이 도움이 되지만 구원 초청을 하는데 있었서는 구원이 왜 꼭 필요한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eKOSTA: 오후에 있었던 세미나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겠습니까?

박소현: 세미나를 많이 들을 수 없었기에 전체 평가는 어렵지만, 저는 이일형 장로님의 예배에 대한 세미나, 코스타 간사님들이 복음주의 학생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신
세미나
, 그리고 F2를 위한 세미나와 그 세미나와 이어진
TM
세미나를 들었는데요, 지금 F2는 아니지만
오래동안
F2였기에 관련 세미나를 많이 들었습니다. 올해 기혼 코스탄이
늘었고
, 거기에 따라 F2 분들도 많이 늘었는데요, 그분들이 미국 땅에서 정체성이 약해서 상처 받기 쉬운 자리에 있는데, 학생,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코스타에 와서 더욱 상처 받으시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비율이 커졌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구요
, 그것이 단순히 그분들에 대한 측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대부분 아이를 키우신다는 측면에서
, 올바른 신앙 안에서 건강할 때에 코스타 정신을 파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F2를 위한 세미나와
TM
세미나의 내용이 잘 짜여져 있다기 보다는 모여서 서로의 사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는데,
좀 더 창의적인 세미나가 준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황원태: 두 개의 세미나에 참석을 했습니다. 구원 초청을 받은 조원과 함께 구원에 관한 세미나에 들어가서 구원의 기본사항을 점검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변명혜 교수의 자녀 교육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 구체적인 사례 가운데 자녀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힘들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 아쉽게도 이번에는 세미나를 많이 듣지 못했는데요, 조에
아이들이 있고
, 세미나 시간에 아이들을 맡아주기 때문에 그 시간에 중보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약간의 혼선이 있어서 중보기도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조원들을 상담으로,
중보기도로 인도하느라 세미나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해마다 인기 있는 세미나에 등록이 금방 마감이 되는데, 복수의 강사가 비슷한 세미나를
개설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고요
, 이번에 처음으로 전체집회를 mp3로 만들었는데, 세미나가 고음질로 녹음되어서 용량이 커졌는데요, 음질을 줄이면 용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최장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미나의
종류가 많다보니 처음 참석하는 입장에서 각 강의에 대해서
, 강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처음에 세미나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세미나 선택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이해 (2+1+1으로 관통하는 성경의 맥), 공학분야의
TM
과 학업과 교회 사역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요, 강의 내용이 한결 같이 좋았습니다.
유학 올 정도이면 다 지성인인데 그 눈높이에 맟줘서 잘 해주신다는 생각을 했구요, 개인적으로도 세미나의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조선우: 제가 선택한 세미나의 경우,
거의 모든 세미나에 너무 적은 인원만 참가하시거나, 늦게 오시는 분들이 많거나,
들어오셔서 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선택한 세미나 몇 개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았는데
, 집에 와서 녹음 CD들을 많이 듣고 나서 보니,
제가 단순히 세미나 선택을 잘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 참여도가
낮았던 건
, 아이가 있는 기혼자 분들의 참여가 힘들었던 이유도 있지만요, 어떤 분들은 어차피 CD가 판매 되니까 안들어도 되겠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시간을 초과하는 세미나도 좀 있었습니다. 전체 집회 때 세미나 참여를 좀 더
강조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 예를 들면 세미나 때 영상을 사용하시기도 하는데 CD를 통해서는 그것을 접할 수가 없고, 질문이 잘 안들리기도 하며, 질문을 직접 할 수 없는 단점과 같은 얘기를 해주어 세미나 참여를 더 활성화 시켜도 좋을 거 같습니다. 참여도가 낮을 경우 강사분들이 힘이 빠지는 거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박소현: 저는 코스타 운동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세미나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코스타의 궁극적인 목적이 궁금하시면, 이렇게 요약해서 해주시는 세미나를 듣는게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훨씬 더 잘 알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

 

조선우: 저도 작년에 코스타가 어떤
모임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 그런 점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 같은데요, 세미나로 하시는 거 보다는 첫 날 오리엔테이션 때 간략히 소개를 해줘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장 수양회때 코스타 운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듣고 작년에 처음 코스타에
와서 궁금해하던 부분들이 많이 해결됐습니다
. 그 소개가 전체 코스타로 확장되는 건 어떨까요.

 

eKOSTA: 그러면 이제 조활동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조선우: 저희 조는 너무 신앙적으로
헌신된 분들로 가득 차서
, QT 나눔이나 기도 나눔, 기도회가 굉장히
풍성했습니다
. 반면에 아주 헌신된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떻게 전할까 고민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 전체적으로 조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적었습니다.
조장 모임 때문에도 그랬고, 밤의 조모임도 그리 늦게까지 할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내년에 다시 조장을 한다면, , 목 정도
밤에 강사분들을 초청해서 조모임을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 이번에는 아침 QT 시간에 강사 분들을 초청했던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끼리 하면 답이 안나오는 부분에서,
강사분들께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최장환: 저는 조모임이 너무 좋았는데요,
조편성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녀가 있고 없고에 따라 스케쥴과
관심사가 완전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저희 조는 아이 없는 부부가 세 커플, 있는 부부가 한 커플이었는데 아이 있는 부부는 약간 겉돌다시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유무에 따라 조를 따로 나누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 또 한 친구는 본인만 학생이고 나머지는 직장인이라
어울리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 등록을 받으실 때 학생들 조에 가고 싶은지, 직장인의 조에 가고 싶은지 우선순위를 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등록시 조 구성에 대한 기호를
표시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황원태: 저희는 작년의 경우,
반 정도 아기가 없었고, 반정도가 있었는데, 조모임이 잘 되었습니다. 올해는 아이가 다 있어서, 조모임이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 의외로 잘 되었습니다. 아쉬웠던 건,
큐티를 저녁 조모임 때 나누자 하고 합의를 봤었는데요, 별로 안좋았던 거 같아요.
피곤하기도 하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묵상하는 것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저녁
때는 여러 가지
sharing을 하는건 좋은데, 말씀 묵상한 걸 나누기는
좀 힘든 거 같습니다
. 행정적인 면에서, 저희 가정들이 모두 같은 층에
있었고요
, 가운데 있는 라운지에서 조모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옆에서 놀기도 하고 들어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조장 핸드북에 보면 ‘따로 또
같이’ 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 저희는 자매들은 따로 한 번 모이긴 했는데 형제들은 따로 모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있는 가정은 ‘따로 또 같이’가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조장의 역할에 있어서,
조원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확인하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저희 조의
경우
, 목요일 밤에 새벽 3시까지 얘기한 결과, 한 형제가 그동안 교회에서 잘 섬겨왔지만, 사실은 구원의 확신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빨리 알았으면, 상담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복음에 대해 깊게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조장들은 조원들의 영적인
상태를 빨리 확인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

 

박소현: 아쉬웠던 점은,
아침에 아이들 맡기는 시간이 8:30이고 전체 집회 시간이 9:15라 현실적으로 그 사이에 큐티가 힘들었습니다. 기혼 자매들이랑 같이 큐티를 굉장히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난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아침 뿐만 아니라 모든 조모임 때 시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항상 남았습니다

 

eKOSTA: 이어서 찬양, 금식기도, 상담 등 운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박소현: 저는 상담이 코스타의 귀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좋은 상담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부부가 같이 가서 상담을 받았을 때 도움이 많이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올해 찬양이 조용한 곡 위주로 된 것 같은데, 조금 신나는 노래가 섞여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최장환: 저는 개인적 기도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금식 기도회나 기도의 밤이 있었는데, 그때는 전체적인
기도제목을 제시하고 같이 기도하는 방식이었죠
. 코스타의 주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대처해야 할텐데
, 개인적인 기도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중보기도자들 한 사람씩 기도제목을 제시하셨는데, 그때마다 인도자들의 톤이 달라지고,
변화가 심하니까 기도하는데 맥이 끊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사람이 인도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강사님들과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 컨택하곤 하는데, 그 과정이 조장의 재량에 따라서 달라지는 점이 걸렸습니다. 어떤 조장은 여러 강사를 초청하고,
어떤 조장은 한 사람도 초청하지 못하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강사님들과의 교제,
식사, 저녁 모임에서 만남이 너무 규모가 없는 것같습니다. 상담의 경우처럼 제대로된 절차를 만들어서 조장들이 신청을 하고 강사님들의 시간을 배정하는 것을 건의드립니다.

 

eKOSTA: 강사님들 초청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매우 동의합니다
.

 

조선우: 사람들이 엑스포에 대해서 기대하는
점도 크지 않고
, 엑스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지 않고, 엑스포에서
부스를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도 적은 것 같습니다
. 개인적으로 전체 집회를 통해서 홍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상담은 예년처럼 너무 좋았고, 몇몇 조원들의 경우 정말 치유가
되었다고 했고요
,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도제목을 상담자들을 통해서 알게 되고 기도하게 된 점이 좋았던
것 같고요
. 약간 아쉬웠던 점은 장소에 대한 것인데, 저는 따로 상담실이
있었어요
. 그런데, 조원들이 식당 지하를 배정 받았는데,
너무 공개된 장소라서 상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개선 가능한 일있지는
모르겠지만
, 좀더 좋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원태: 찬양팀이 바뀌어서,
또는 주제곡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 조용한 곡 위주로 된 것같고, 엑스포는
좀 작아진 것 같고
, 상담은 처음 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광고를 더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담자들에게 연결시키는 조장들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 기혼조에 속했지만, 싱글들이 숙소, 식사에 있어 불편한 점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중보기도팀으로부터 중보기도를
받은게 참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 릴레이로 하시는데 부담이 되시니까 미안하기도 한데,
시간을 정해서 또는 표를 만들어서 중보기도 받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장님들이 멘토님들을 많이 만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장들이 어려운 점이 있을
때 멘토님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KOSTA: 내년의 주제가 ‘어그러진 세상,
하나님의 긍휼’로 발표되었습니다.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코스타가 비젼을 제시하고 이끄는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건의사항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우: 코스타에서 내년 주제가 소개됐을
, 조원들이 ‘와 너무 좋다’라고 반응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샬롬이
파괴된 상태가 어그러진 세상이라면
, 이 상태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라고 할 때, 올해 주제와 잘 맞는 주제라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으로 코스타가 저를 깨워주고, 파라다임 전환을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알지 못했던 것을 알려주었다기 보다,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다시
확실하게 환기시키고
, 약간 잘못 알고 있던 것에 대해서 바르게 알도록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 코스타에 돌아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코스타가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코스타에서 훈련받고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코스탄의 소명이니까
, 내년 코스타에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 내년에 다시 참석한다면 성장한 모습으로, 조원으로 갔다가 조장으로 간다든지, 코디로 간다든지 뭔가 성장하는 모습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건의사항은 11지역 같은 경우, 지역이 매우
넓어서 같은 지역에서도 어차피 지역 내에서 팔로우업 하기는 힘들거든요
. 조장 수양회에서 다양한 지역을 섞어서
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최장환: 매년 코스타 주제를 보면서
사사기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 사사기를 보면 비슷한 구조가 있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데요,
주제도 약간 비슷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매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관심있는 부분은 코스타 후속프로그램인데, 이런 후속 프로그램이 교회나 학교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과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을지 더 고민하면 좋겠구요
. 코스타 마인드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 예를들어 코스타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멘토님들이
주도를 해서 코스타 마인드를 되새기는 모임이 있어야하겠고
, 비슷한 관심 주제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신 강사님들과
지속적으로 만난다든가
, 코스타 기간 중에 소개된 책들을 중심으로 코스타 마인드를 다지는 독서클럽을 운영한다든지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황원태: 주제는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올해가 예수님의 평화니까 한 바퀴 원을 돈다는 느낌이 듭니다. 후속 프로그램은 조별 게시판을 신청했고, 개인적으로 원투원을 하려고 하고 있고요.
코스타에서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박소현: 주제를 처음 봤을 때 받은
느낌은 주제가 부정적인 표현으로 시작되어서 마음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 저는 코스타에 참석할 때마다 삶이 변하는
것같거든요
. 그래서 다시 참석하고 싶습니다. 일회성 집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돌아가고 싶습니다.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 코스타가 고령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학생들이었는데, 참석하는 사람들이 코스타를 떠나지 않으니까 아이들의 나이도 많아지고
참석자들의 나이가 많아지는데
, 이게 바람직한 건지 약간 의문이 있어요. 코스타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참석하고 싶습니다.

 

eKOSTA: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좌담회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