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작년이었던가요, 제가 어떤 지방에 가서 다른 교회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담임목사님으로 계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제게 주일 예배에서 간증해 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 간증을 하는 것을 늘 불편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간증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께서 워낙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형편없는 간증 동영상이 제 아내에게 입수된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그 간증을 듣더니 다시는 다른 곳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도 듣기 어려웠다나요.

그 간증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 공허함이 해결되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했던 공부를 어렵게 하심으로써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다움을 갖추어나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제 아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간증의 전반부였습니다. 소위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반감만 주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아내의 생각이 맞습니다.

eKOSTA에서 제게 ‘직장생활’에 관한 글을 써 보라고 권유했을 때, 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 생활을 하는 여러 가지 고민과 기쁨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이야기가 마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와 같은 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깊이 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허락한 것 같다는 우려가 그 후에 닥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에서 소위 ‘명문학교’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일하였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직장의 안정성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꽤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하는 내용도 소위 ‘첨단’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에서의 만족도도 매우 높습니다.

그런 제가 제 사는 이야기를 쓴다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이렇게 미리 언급해둠으로써, 제가 엘리티시즘을 추구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제 자랑을 하려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인데, 제대로 전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런 자기소개와 변명이 뒤섞인 애매한 글로 제 eKOSTA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제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를 얻기 원함도 있으나, 무엇보다 다른 분들의 충고와 조언, 질책과 코멘트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인터렉티브한 대화가 오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유정] 예배의 힘

“이제부터 너희에겐 세 가지 자유가 없다. 첫째 자유, 둘째 행동할 자유, 셋째 웃을 자유!”

1983년 초여름, 삼 사단 백골부대 신병교육대에 도착하자마자 매섭게 생긴 교관이 던진 서리에 찬 말이다. 눈썹까지 내려온
모자를 눌러쓴 조교의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인지, 그 밑에 겨우 보이는 하얀 눈은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빛처럼 매섭게 빛났다.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말이 떨어지자마자 30여명의 신병은 연병장을 구르기 시작했다. 조교는 뙤약볕 무더위에 아랑곳 않고 어리벙벙한 신병들의 사회티를 벗겨내기 위해 군기를 잡는데 혈안이었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쓰러져 거품을 정도였다. 2시간 넘도록 연병장을 뛰고, 구르는 동안 문득 이제 나는 이상 마음껏 자유를 누릴 있는 사회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자리에 있었던 30여명의 신병은 이제 사회와 격리된 군인인 것이다. 그래서 이등병으로 입대한 모든 대한한국 남자는 사회에서 가졌던 모든 지위, 출신, 배경, 교육, 신분을 떠나군인이라는 새롭고 동등한 지위로 바뀐다. 그래서 장관의 아들이건, 시골 농부의 아들이건 똑같은 입장에서 똑같이 훈련받고, 기합 받고, 차례를 받는다. 

예배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가치가 동등하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건 공사판에서 흘려 일하는 막노동 일꾼이건 상관없다. 대기업 최고 경영자이건 이십대 비정규직 사원이건 상관없다. 사성장군이건 환경미화원이건 상관없다. 순간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다. 이것이 예배의 힘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주신 예배의 그림이 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_ 4:23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예배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예배의 본질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에 어떤 대상이 따로 없다. 있다면 가지이다. 그것은 아버지께 드릴 있는 성도의 지위이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 말이다. 그래서 예배자의 조건은 하나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_ 1:12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 지위와 학력이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이상 예배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사회적 능력과 부가 사람을 차별한다면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향해형제자매라고 부르는가? 예수를 머리로 몸을 이룬 지체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없는 평등의 패러다임이다.

그래서 예배는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권력투쟁, 빈부격차, 상하계급, 인종차별의 검은 파워를 일순간 지워버린다. 모든 관계, 모든 입장, 모든 스타일, 모든 인종, 모든 형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한다. 그래서 땅에서 회중 예배 현장만큼 감사와 기쁨, 사랑과 평화, 치유와 회복, 자유와 해방, 신뢰와 소망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곳은 없다.

예배는 어떤 지위, 계급, 빈부, 종족의 사람이라도 담아낼 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그릇이다. 예배의 넓이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넓이이다. 예배의 높이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신 예수님의 높이이다. 예배의 깊이는 모든 진리를 꿰뚫는 성령님의 깊이이다. 예배 현장에 살아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뛰어넘으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_ 55:8,9

가슴 벅차지 않은가? 통쾌하지 않은가? 세상의 어떤 허울도 통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본질 자체가 인정되는 현장, 모든 가식과 껍데기, 위장과 술수가 통하지 않는 준엄한 정의가 살아 있는 , 모든 미움과 시기, 분쟁과 갈등, 경쟁과 시비가 힘을 잃고 섭씨 수천 도의 십자가 용광로 사랑으로 녹아버리는 , 연금술의 지존인 아버지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빚으시는 신비의 현장이다. 바로 그곳이 예배의 현장이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배의 그림이다.

[최주희] 신뢰성(Faithfulness)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늘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사랑을 마음껏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의 공동체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의 설교나 좋은 책들, 또한 구역이나 셀 모임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였건만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숙제들이 남아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교회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기독교 상담의 좋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공동체 가운데 자기를 개방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며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또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결여된 것이 있다. 바로 ‘신뢰성(faithfulness)’에 대한 문제이다. 신뢰성은 믿을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타인의 믿음으로,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어느 공동체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섬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이간질 하거나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얌체처럼 말만 잘하고 이기적으로 자기의 실속만 차리며 져야할 공동체적 책임을 회피한다면 과연 그들이 깊이 있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공동체는 시간이 가면 무너진다. 처음에 서로 잘해 줌으로 친밀한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곧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뢰성이란 무엇일까? 수업시간에 신학생들과 ‘신뢰할 만한 사람’의 특징에 대해 토론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정직한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비밀을 지키는 사람,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 성실한 사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 옳은 일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뒤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롭게 하지 않는 사람, 겸손한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모두 맞는 말 이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신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뢰성 중에서도 특별히 정직, 성실, 진실은 으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직은 구체적으로 돈에 대한 정직과 말에 있어서의 정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돈에 대한 정직은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 비록 남의 돈을 훔치거나 사기 치지는 않을지라도 공금을 개인 돈처럼 사용하거나, 마땅히 내야 하는 세금을 편법이나 여러 가지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내지 않는다면 정직하지 않는 것이다. 말에 있어서도 사실이 아닌 말을 하거나 혹은 내용을 빼거나 덧붙임으로 나의 목적을 위하여 본말을 왜곡시킨다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아들이 운전면허를 딴 후 몰래 아빠의 차를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들켰는데, 그 후 언어의 정직을 스스로 훈련하면서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었다. “엄마, 정직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 같아요.” 언어를 정직하게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언어에 정직하지 않았는지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2)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실함의 수준을 “사람을 의식하여 행하는 눈가림질”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를 두려워하여 주께 하듯”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다.(골3:22-24)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의 자유함을 나도 평생 누리고 싶다.

진실은 거짓이 없이 참되고 말과 행동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 수년 전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 강의를 하였는데 그날이 찬양을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유학을 위해 마지막으로 섬기시는 날이었다. 그 목사님이 찬양인도를 마무리하면서 교인들에게 작별인사하신 내용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찬양을 인도하면서 진실치 않았던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까지 찬양을 하며 많은 멘트를 했지만, 솔직히 제가 멘트 한 내용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고 찬양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20분이 2시간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향하는 그의 간증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르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연약한 공동체를 세우며 나아가 그것을 사랑과 성숙한 공동체로 만든다. 하지만 돈이나 말에 정직하지 않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며 진실치 않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깨트리고 무너트린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서로 용납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매우 시급한 일인 것 같다.

[이영길]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아내와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자매가 하나 있었다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자매의 사랑을 흠뿍 받아왔다자매는 또한 교회에서 열심히 하나님과 지체들을 섬기고 있었고, 그 섬기는 모습은 볼수록 아름답기도 하였지만 은혜가 충만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자매를 형제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자매는 교회에서 어느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져 갔다. 나또한 이 커플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제법 흐뭇해 하였고다른 지체들도 둘의 사귐을 기뻐하고 있었다선남.선녀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쌍같아 보여서 흐뭇해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늦게 자매로 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자신과 별거중인 남편이 미국에 막 도착하였고자신을 찾고 있으며, 만나게 되면 자기에게 해를 가하게 될것이라는 이야기 이다전 남편이 대화중 자매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는 전화협박이 있었기에 자매와 남자 친구는 얼른 경찰에 신고도 하였고경황을 따질것 없이 형제는 자매를 보호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더우기 별거중인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성격이 포악하기도 하여 같이 살 수가 없었다고 하며 염려를 하고 있었다자매가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우선 자매를 보호 하는것이 급하다는 생각에 유학전 자매의 삶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 문제 수습에 골몰해 있었다.

기도하며 그 다음날 사태 수습을 위해 하나님께 묻기 시작 하였다하나님왠 날벼락 입니까어떻게 해야 이 날 벼락을 피할 수 있나요뭐 이렇게 다급한 기도를 했던것 같다아침이 되어 자매로 부터 또 전화 왔다.어느 어느 호텔에 있으니 이 자매가 찾아 오던가아니면 자매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그 별거중인 남편이 찾아가겠다는 것이다그 상황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세가지 뿐이었다호텔 이름폭악하다는 별거중 남편그리고 이들이 만나면 위험할 것이다 라는것. 다시금 기도하다가 평소에 없던 용기가 솟아 낫다이 방분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얼른 한국어로 된 사영리 두권을 찾아서 주머니에 넣었다그리고 그 호텔을 내가 찾아 가겠다고 하였다자매의 남자 친구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내 안에 솟아나는 용기는 형제의 경고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결국 형제는 내게 부탁을 하나 하였다그 방에 들어가면 문을 닫지 말고 조금 열어 놓으라는 것이다쿵쾅거리며 몸 싸움이 나면 자기가 곧 바로 뛰어 들어 상황을 제압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평소 나는 선한일을 위해 위험한 일에 뛰어들 용기와 배짱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당시 내게 딸린 두 아이가 있었고, 또 사랑스런 아내가 있어서 그같은 위험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피해가고 싶을 정도로 안전을 택하는 그런류의 사람이다몸싸움이 나면 몸을 방어할 정도로 힘도 넉넉히 있다고 생각치도 않았고, 더우기 멀리서 부터 원한을 품고 달려온 사람의 힘을 당해낼 자신이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그러나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용기를 낸것은 분명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나는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았던 것이다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배짱은 나의 선함으로 나올턱은 전혀 없고분명 하나님의 복음전파에대한 열심이 내 안에서 느껴진 것이다내 안에 솟구치는 사랑특히 아픔을 가지고 미국 까지 달려온 그 방문자에 대한 불쌍함이 내게 가득차 있는한 가만히 사태를 불구경 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온 방문자의 호텔을 향해 운전해 갔고, 그의 방 번호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리면서 방에 들어 서는 순간 방이 참으로 어둡다라고 느꼈다그 방문자는 문을 열어 주고는 침대가 둘 있는 방중 구석 침대로 얼른 걸어가서는 침대위에 곧곧이 앉아 있었다그리고 침대 중간에 전화를 놓는 탁자위 불이 조금 어두운 빛을 내고 있었다어색함을 깨려고 얼른 나의 소개하였더니이미 나에 대해 들었다고 하며 아내를 잘 돌보아주어 고맙다고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뒤 나는 바로 그 방문자에게 약 5분간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뒤에 사영리 하나를 그의 손에 들려 주고나는 다른 사영리를 들고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그리고 페이지 마다 간단한 설명을 더해 주었다.순한양 같이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방문자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세번째 영적원리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분을 다룰때 방문자의 얼굴이 이그러 졌다.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드디어 참기 어려워 이 막 폭팔하려나?”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다행히 아무런 저항도 없어서 네번째 원리까지 진행 시켜 나갔다나는 용기를 내어 네번째 원리를 직접 소리내어 읽으라고 부탁하였다그 방문자는 또박 또박 읽어 내려 갔다.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접하겠습니까?” 물었다. 1-3원리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침묵이 있었다 1분 이었겠지만 내게는 제법 길게 느껴 졌다그러던 그가 한참만에 !”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인기척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나는 얼른 정말요?”라고 하며 당황하며 영접기도를 인도하였다” …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 

얼굴에 가득한 그의 눈물을 보며 축하해 주었다눈가를 타고 흘러 내리는 그의 눈물은 설움과 섞여 있었는지 하염없이 솟아 내렸다내가 축하하는 의미로 시간은 좀 이르지만 점심을 사겠다고 하였다한국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타며 분노로 인해 식사도 하지 못하고또 미국에 도착해서는 먹는둥 마는둥 하여 배가 몹시 고팠다고 하며 우리는 함께 중국집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를 따라 오는 형제 (“방문자”라는 호칭에서 “형제”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의 얼굴을 장난스레 쳐다 보았다거짓말 같이 그의 딱딱하고 분노에찬 얼굴이 펴지고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햇살이 너무 이쁘다고 말했다그러더니 평범한 도로변의 가로수 나무를 보더니 나무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함께 아점 (아침 점심)을 먹은뒤자매를 만나겠냐고 물었다고개를 양쪽으로 저의면서 만나지 않고 한국으로 바로 되돌아 가겠다고 하였다그러나 부탁이 몇개 있다고 하였다첫째로 자신을 공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두번째는 자매와 사이에 세살짜리 딸 아이가 있는데다른 날은 몰라도 생일은 기억하여 꼭 선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해주라는 말을 아이엄마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었다세번째는 자기가 선물을 살 기회가 없었는데 자기가 현금을 조금 줄테니 나의 두 자녀에게 선물을 사주라는 이야기 였다첫번째와 두번째 부탁은 수락 하겠지만 세번째는 굳이 안해도 된다고 강하게 사양 하였다. 그러나 형제의 간구가 너무도 진지할뿐 아니라 형제를 자유롭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결국 돈을 받았다.  

나는 공항에서 돌아오며 한참을 울었다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먼곳에서 이렇게도 보내시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에 감동해서 였다. 마침 차안에 틀어 놓았던 CD의 곡중에 송정미 사모의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라는 찬양이 흘러 나와 따라 부르며 이상한 방법으로 그 형제를 이곳에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우리의 생활의 주된 터전인 이곳 미국 캠퍼스로 보내진 많은 청년들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전에 만났던 그 형제에게만 그같은 구원을 위한 열심이 있는것 만은 아니다.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캠퍼스의 청년들 또한 하나님께 돌아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있으시다. 상한 마음, 빈 마음, 지친 마음에 필요한것은 복음이다. 오늘날 캠퍼스에 가장 중요시 여겨져야할것은 학위가 아니고 복음이다. 이것이 뒤 바뀌는한 우리들의 캠퍼스는 계속 죽음의 행진을 하고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