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일꾼과 예배자

작년에 한빛지구촌교회 예배사역 7년 만에 4개월 안식을 가졌다. 지쳤던 심신도 회복하고 지난 사역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예배 공부를 위해 도미한지 10년, 한 분야에서 10년 집중하면 맥이 뚫린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예배의 맥이 보였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진행될수록 예배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눈이 뜨였다. 예배공부 4년에 전임 예배목사 7년 된 자가 예배에 무지하다면 문제 아닌가? 그러나 예배를 몰라서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도 아니다.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예배의 본질에 목숨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반성했다. 예배보다 예배드리는 일에 더 열심을 냈다. 비본질적인 것에 바빴다. 일 때문에 가정도 희생시켰다. 아내가 수없이 지적했는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완벽주의, 일중독이란 말도 들었다. 뒤늦게라도 깨달은 것을 감사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예배 행위자체를 예배로 착각한다. 예배 세미나에서 만난 찬양팀원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주일 날 찬양 봉사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하나 때문에 교회 나올 때가 많아요.” “찬양하고 단에서 내려오면 예배에서 내 역할은 끝났다, 내 할 일 다 했다는 안도감만 남아요.” 일반 성도들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죠.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거룩한 기대감보다는 솔직히 집사로서 마땅히 성수주일 해야 하는 의무감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찾으신다. 예수님께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랑의 열병에 빠진 자를 찾으신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눅 10:2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는 행위로 끝내고,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다. 하나님을 배제한 사랑은 우상숭배로 빠진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적 사랑이 넘쳐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이것이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즉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가 예배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는 이 순서가 뒤바뀌었다. A. W. 토저의 말처럼 ‘예배자보다 일꾼이 많은 시대’이다. 하나님을 ‘일손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공사판의 감독’[footnote]A. 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 (서울: 규장, 2006), p. 66.[/footnote]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일한다. 심각한 착각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원한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삶의 현장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성경공부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자꾸 예배라는 것을 어떤 행위로 규정하려고 한다. 예배는 행위 이전의 문제이다. 마음의 문제요 본질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예배행위는 껍데기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것이다.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는 주부, 직장에서 커피를 타는 사무원, 길거리의 청소부 등 어떤 직종,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행하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평범한 주방 일을 하면서 당대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로렌스 형제(Br. Lawrence)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좋은 모델을 보여준다. ‘주방성자’로 불리는 로렌스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반복되는 연습을 통한 삶의 습관이라고 했다. 즉 임재란 하나님이 언제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만 영혼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footnote]로렌스 형제, 하나님의 임재연습 (서울: 좋은씨앗, 2008), p. 18.[/footnote].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없이 ‘내’가 팔팔하게 살아있다. 내 관심사가 하나님보다 우선한다. 교육도, 훈련도, 전도도, 선교도, 심지어 예배조차도 하나님 임재 없이 ‘일’로 행해진다. 예배자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 하는 사람은 나무, 풀, 짚을 쌓아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로 심판할 때 다 타버릴 것들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최주희] 혼전 성관계에 대한 오해와 진실

대학생들의 혼전 성관계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2009년 알바천국 ‘성의식’ 설문조사에 의하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성관계 경험이 있고 그중 70%가 만난 지 한 달 이내 성관계를 가졌다. 2009년 학원 복음화 협의회 ‘전국 대학생의식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이 성관계를 경험하였고 기독대학생중 23.9%가 ‘혼전성관계 가능’이라고 답했다. 또한 2009년 죠이선교회 ‘대학생들의 성의식 조사’ 결과는 혼전성관계 ‘필요하다’가 67%이다. 동거 ‘반대’는 23%로 77%가 동거를 찬성하거나 인정한다. 또한 2010년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 없어서 못 판 품목이 김밥, 치킨, 그리고 콘돔이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베이비’라는 신종어도 있다.
이런 현실 앞에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느낀다. 위의 언급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집단만의 통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 젊은이들도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엡4:18-19)
혼전 성관계의 명분은 이러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사랑을 마음껏 표현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혹 ‘결혼 후 떳떳하게 성관계를 가지자’는 여자의 반응에는 ‘넌 날 못 믿니?’라고 따지기까지 한다. 여자는 거절하면 남자를 끝내 믿지 못한다는 말로 여기고 남자가 화를 내거나 돌아설까 두려워 그저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만약 여자가 성관계를 거절했기 때문에 떠날 남자라면 진작 보내는 것이 낫다. 그런 남자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 더욱이 평생을 믿고 삶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불안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널 믿지! 그리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다 알지. 하지만 우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떳떳한 사랑을 나눌 때 까지 참자!”라고 말하며 빨리 밝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야한 옷차림과 향수, 야릇한 몸짓으로 오히려 남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동기와 목적을 모두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제할 수 없는 성 충동’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한번 성관계를 가진 여자에 대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육체적 욕구만 채우려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녀 관계는 성관계를 가지기 전과 가진 후가 정반대로 변한다.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열애해왔지만, 성관계 후에는 여자가 남자를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는 격이 된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매력을 잃고 오히려 그녀를 헤픈 여자로 우습게보지만, 여자는 이미 몸을 주었기에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불안한 생각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적극적이 된다. 그럴수록 남자는 여자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나며 슬그머니 관계를 끊는다. 실제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결혼할 확률은 매우 낮다. 1달 이내 헤어질 확률이 21%, 1년 이내 헤어질 확률은 81%라고 한다. 결국 사랑은 깨어지고 서로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혼전 성관계로 인한 결과는 이뿐 아니다. 남자 여자 모두에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여자의 경우 더 심각한 아픔을 겪는다. 첫째, 자존감이 낮아지고 내면이 불안정해 진다. 도덕성은 자존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존중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늘 잔잔한 불안감 속에 우울해지기 쉽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어렵다.
둘째, 그들의 만남이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욕구 충족에만 급급한 만남이 되기 쉽다. 서로를 알아가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전인격적 친밀감을 충족하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임신의 가능성과 낙태의 위험이다. 혼전 성관계는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임신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낙태를 한다면 이는 살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생명체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낙태를 한 사람들은 불임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낙태 시 자궁벽을 긁어내는 작업은 후에 정자와 난자가 착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혹 임신하여도 유산의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만약 결혼한다하여도 서로에 대한 존중감과 신뢰도가 낮다. 이것은 혼전 성관계 경험자가 그렇지 않은 부부의 이혼율보다 3배 높다는 연구 결과에도 나타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로는 혼전 성관계를 가진 자의 특징이 관습에 덜 메이고 약속이나 언약을 적게 하며 그것을 지킬 개인적인 능력도 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며 폭력과 음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감정적이며 책임감과 자기조절 능력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과 계산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게 되어있다. 특별히 혼전 성관계, 즉 간음(십계명 중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에서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매우 엄하게 책망하시고 경고하심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고후5:9-10, 고전6:9-10, 갈5:16-21, 골3:5-6, 데전4:1-5, 야4:4, 벧전1:15-17, 계2:19-23). 이것이야 말로 혼전 성관계의 진실이다.

KOSTA/USA 2010 연차수양회를 기대하며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작년이 되어서야 코스웍을 마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이 아니라, 오래 공부해서 장(長)학생인 셈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학생처럼 좋은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랜 시간동안 갇혀있는 듯한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젠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청년/학생으로, 혹은 그들을 섬기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마땅한 배우자를 찾지 못한 청년들의 고민보다 더 심각한 고민이 있을까. 이미 바닥을 친 통장의 잔고로 인해 시름에 놓인 친구도 있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놓인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후배와 제자들의 절절한 눈물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청년/학생의 때를 지나 장년이 된다면 그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손에 잡힐 듯한 삶의 일상적인 영역에서의 어려움들이라고해도 이런 종류의 고난도 무시할 수 있을만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해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도 급급한 마당에 복음과 민족과 나라는 어디있으며, 땅의 끝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86년 여름, 고물차를 끌고 또 아이들을 들쳐업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든 젊은이들이 있었다. 폐차장을 연상케하는 주차장에 세워진 참석자들의 고물차들은 당시 아무런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조국의 암울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첫번째 코스타 수양회에 참석했던 코스탄들 역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던 유학생으로 고뇌를 고스란이 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일 수 밖에 없었고, 눈물을 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선배들이 처해있던 시대적인 문제 속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과 현실에 짓눌렸던 총제적인 어려움은 어쩌면 사람의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으로 인해 감사하며, 눈물로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 의탁함으로 마침내 그들의 땅끝을 발견할 수 있었다.  

25년 전  코스탄들의 어려움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 사이에는 큰 괴리감이  있는 듯 하다. 그 동안 강산이 두 번이 넘게 바뀌면서 시대도 달라졌고, 사상과 가치체제 그리고 세대의 폭도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미국 내 한인 학생/청년들을 향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삶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눈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셨고, 우리로 민족과 세대를 끌어 안을 소명과 소망을 알게 하셨다. 또한 편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그것에 만족하며 안주하는 것이 아닌, 삶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는 땅끝을 향한 도전을 부어주셨음에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KOSTA/USA를 통해 수많은 헌신자, 그리고 일상에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현해가는 숨겨진 보석같은 코스탄들이 있다. 이제 25년을 맞이하는 2010년 KOSTA/USA 연차수양회를 통해 코스타 운동을 이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세워갈 한인 청년/학생 디아스포라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귀한 복음의 축제와 부르심의 현장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KOSTA/USA

총무간사 김동민

[이인엽]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기독교의 역사속에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가 침투해 들어온 것에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민족적, 인종적 관점’으로 오해해온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구성원의 대부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열 두 아들의 혈연적 후손으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은 혈연 보다는 언약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였습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수차례 반복됩니다. 동시에 혈통적으로 비 이스라엘일 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를 사모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다말, 라합, ,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등 다수가 이방출신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누구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36-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렘18:27-29]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개정개역)


[이사야 5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에스겔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아모스 9:7]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디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들을 보면, 출애굽 당시부터 다양한 족속들(이집트 내의 피압박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발했었고,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라기 보다 (그들중 다수가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일 지라도), 언약에 기반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 할 경우 백성중에서 끊쳐진다는 것은, 단순한 혈연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약의 땅(The Land of the Covenant)’, 즉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 땅이며,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앞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게 된 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극에 달해 땅에서 뽑힐 정도로 관영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시고, 그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십니다. 러므로 그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을 무조건 적으로 보장하신다는 ‘선민사상’과 정확히 충돌합니다. 심지어 성궤를 가지고 나가도 죄가 있으면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어떤 ‘상징, 명칭, 이름, 혈연’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가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원칙을 현재 국제관계의 상황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현재 민족국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는 눈을 감는, 미국과 한국 기독인들의 입장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세계 많은 민족 국가중 하나일 뿐인 국가 이스라엘을, 성경 예언의 성취로 확신하거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언약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였던 구약의 이스라엘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인종이 아닌 언약의 순종여부를 보고 심판하셨던 성경의 역사를 볼 때, 팔레스타인 땅이 무조건 인종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가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지원과 강력한 힘에 기반해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가는 이스라엘은, 다윗 보다는 골리앗에, 피해자 보다는 압박자와 가해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적절한 재판도 없이 구금되어 있고, 지난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 전쟁때는 무방비 상태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400명 가량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2010년 1월에는 모사드 요원으로 추청되는 암살자들이 유럽과 호주 등의 여권을 위조해 두바이의 호텔에서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기도 했고, 2010년 5월 31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의 승선자들에게 발포해 10여명을 숨지게 하는 등, 이스라엘의 정책은 말 그대로 국제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국가 테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의 기독인들은 반유대주의에 기반해
, 유대인들을 처절하게 차별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재 보수적 기독인들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반대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스라엘이 핍박과 차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역사상의 학살들보다 특별하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이나 (실제로 북미와 남미의 원주만들에 대한 학살은 숫자나 처참함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에도,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무시되다 시피 한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문제제기도 곧 ‘반유대주의’로 취급되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라는 식의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팽배한 것도 상당히 기이한 현상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몇몇 국제정치 학자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스라엘의 로비에 의해 납치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예전에 한 유대인 친구와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웃으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유대인들보다도 오히려 이스라엘 문제에 열을 올리고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보이는 것이 자기도 신기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실제로 미국의 팻로버트슨 목사 같은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완전 점령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극우파의 입장을 지지해 왔는데, 지난 1995년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개념 아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시도했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암살과 2006년 샤론 전 총리의 뇌출혈로 인한 사망을 하나님의 땅을 나눈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까지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조악하고,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상당수 미국 기독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이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마음과, 마지막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독인들에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과 현재 국가 이스라엘의 정책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식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에 비춰볼때,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미국의 보수기독인들안에는 “God bless America”로 대표되는 자국중심주의와 기독교신앙의 결합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그렇기에 이며,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실 거라는 생각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먼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적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그 국가가 기독교 국가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일개 국가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등 의문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방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구약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오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궤를 가지고 나갔어도, 이스라엘 안에 죄가 있을 경우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느냐 였습니다. 언약을 지킨 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를것을 의미했는데, 하나님은 혈연이나 기독인들의 숫자가 아닌, ‘정의와 공평’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방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이 미국의 편일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에 따라 미국이나 그 어느나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링컨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편인가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기도하라고 했는데,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이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고 자기들 편이어야 한다고 믿음으로서, 성경과 기독교의 정신을 왜곡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력을 상실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합리화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짐 월리스는 자신의 책 회심에서 진정한 회심은 우리가 섬기던 모든 죄와 우상에서 돌아서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 우상일 수 있고,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관찰한 보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결국 미국이 기독교화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미국화’ 된 것이, 오늘 미국 보수 기독교의 안타까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기독인들안에도 이런 민족중심적 사고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 예로, 한국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제사장 민족이요, 앞으로 공산권과 무슬림을 향한 복음의 서진을 위해 하나님이 크게 쓰실 민족이라는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은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저도 위의 바램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 이후제사장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안에 집단적 물질적 축복과 성공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닌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세계에 나간 일부 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처럼 예수 잘믿으면 경제가 발전하고 잘살게 된다는 것을 복음(?)으로 가르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이라면, 예를 들어 기독인과 교회가 적은 일본은 왜 잘 살고 있는걸까요? 축복이 아닌 핍박을 받은 순교자들의 삶은 또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국교회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면, 한국의 선교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한민족이 대륙을 달리며 세계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는 식의 희망을 피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담론에서는, 심지어 과거 제국주의 선교모델과의 유사성까지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론적 관점은 하나님의 윤리와 정의보다 성공과 부를 우선하게 하고, 그에 대한 욕망을 신앙적으로 합리화 해줄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독재정권시기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한 것, 많은 사회 이슈들에 있어서, 약자의 입장에 서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도, 교회안에 존재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사고의 악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편이라고 믿는 것은 세계 열방의 하나님을 일개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십자군이나, 이스라엘의 왜곡된 시오니즘, 그리스도인들안에 존재하는 인종주의, 민족주의, 패권주의, 선민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왜곡입니다


 


P.S. 미리 소개하는 결론


     이 시리즈의 결론이 되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기독인들 마저, 국제관계와 국내 정책에 있어 안보와 번영을 최 우선으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안보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잘먹고 잘살게 되는 것이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 부국강병의 논리이지요. 오늘이 한국에서는 지방선거일인데, 결국 선거를 좌우하는 메시지도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믿는 이들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인들마저 이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안보와 번영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화해와 평화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법도를 최우선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도입 질문에 소개했듯이, 이라크 파병과 같은 정당성이 부족한 정책에 있어, 저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가 이익보다 정의를 우선하고 끝까지 반대할 사람들은 기독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가 이익을 좇을 때라도, 정의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승리를 믿는 자가, 당장의 이익이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외칠 힘을 갖게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보수 기독인들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인 ‘정의’ 보다도, ‘국익’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것 같아 의아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왜곡의 결과는 역시 국가의 기독교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국가주의화’겠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단기간의 국익보다 정의를 우선했을 때, 장기적인 측면에서 더큰 국익이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단기적 국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했을 때,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손실이 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시기를 얼만큼 잡느냐, 그리고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논의가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파병결정 당시, 정책담당자들은 이라크 파병과 부시정부의 대북정책 유연화를 놓고 일종의 ‘빅딜’을 기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이러한 현실주의적 정책결정이 어떠한 득실을 가져왔는지 분명한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9월 3일 연설에서 제 3위의 파병국인 한국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대북 정책을 선회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가 아닌, 미국 국내 선거의 공화당 참패와 네오콘들의 퇴진,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내 비난이 고조된 2006년 말, 2007년 초에 일어났기 대문입니다. 
     많은 경우 안보와 번영을 추구하면서 평화와 정의가 파괴됩니다. 다른 말로세상의 권력자들은 ‘안보와 번영이라는 거짓된 약속’을 내세워 평화와 정의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그것을 절대화된 ‘우상’으로 섬길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 즉 공평과 정의를 추구할 때 ‘따라’오는 것이라는 점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위협도 있지만 그 안에 이미 정의와 공평이 파괴되고 극심한 빈부격차, 토지제도의 문란 등으로, 국민들이 그 나라의 체제를 지킬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외적의 침입과 나라의 상실은 이스라엘의 국내적 죄(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들이 삶에서 공평와 정의를 누리는 나라는 그 누구도 쉽게 침략할 수 없고, 그렇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의 원리를 따를 때,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안보와 번영이 최고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라를 지킬것이고,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순진한 소리 말아라”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먼저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공평과 정의가 서면 하나님이 안보와 번영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이는 개인의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와 성공과 생존”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정의와 공평과 인애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에 굴복하기 쉽고 그럴때에 우리 삶에서 정의와 공평과 인애는 파괴됩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보다 부와 성공을 합리화하고 축복하는 왜곡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복음의 내용 자체도 물질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로 교체되는 경향마져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비극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악’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고, 그분의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기독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성경구절을 몇구절 소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의’는 가급적 정의로 바꾸어 읽어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두 구절은 제가 개인적으로 바꾸어 읽은 것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5:10]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벧전3: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10:31]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패망하고,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이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양승혜] 내 친구 케이트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참 뒤였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한국을 떠나 선교훈련 과정을 거친 후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또 흐른 뒤 하나님은 내게 선교의 비전을 발견하게 하셨고, 

선교사를 훈련하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 학교는 기본적인 성경을 비롯해 실질적인 선교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좋은 Christian college였다. 특히 기본적으로 타 문화권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어서 70%의 학생들이 영국인이었지만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다른 학생들과도 잘 융화하고 서로를 돕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내 친구 케이트를 소개하고 싶다. 학생들이 

열려있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보다 영국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사실 조금 더 어렵다. 영국인들은 모국어가 아닌 제 2외국어로 

공부해야 하는 타국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조금 다른 친구였다. 케이트는 나와 같은 지도교수님 그룹에 배치

되었는데 우리 그룹은 나와 연세가 좀 있으신 한국인 부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영국인으로 구성된 조금 특이한 그룹이었다. 대부분 그룹을 구성할 때 학교 방침상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 함께 배치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첫 학기부터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무엇보다 지도교수랑 잘 맞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룹 미팅을 할 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기 일쑤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주눅이 들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내리면서 엉엉 울고 말았다. 섬세하고 배려심이 

많았던 케이트는 아마 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화장실로 쫒아와서 

내 표정을 살피고, 그 날 오후 은행에 갈 일이 있던 나를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케이트는 

나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해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건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니고, 나 자신의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케이트는 

“너의 문제라면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야”라고 말해주어서 지친 나의 마음에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그 이후로 케이트와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 밝고 활달한 성격,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늘 배려하는 케이트를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녀가 품고 있는 지역은 중국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동양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간단한 다른 나라 인사말은 열심히 배우고 또 기억하는 열정이 가득한 

친구였다. 원래 외과 의사인 케이트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의사와 선교사, 두 개

였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두 가지를 다 하기로 마음먹고 

일단 의대에 진학, 외과의사로 몇 년을 일하다가 자신이 일하던 모든 좋은 환경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비전을 향해 우리 학교에 오게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따라 잡을 수 있었던 내 방에는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는데 기숙사 출입구 쪽 2층이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러 다녔던 케이트는 내 방에 불이 켜져있으면 놀러오곤 

했었다. 하루는 그런 그녀에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왜 너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냐고… 이상한 질문이기도 했지만 이곳에 있는 다른 학생들과 그녀가 정말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질문에 활짝 웃으며 케이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Because I want to be a missionary”  


선교사가 되기 위한 길,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는 길은 어떤 것일까? 

많은 지식을 알고, 수 많은 케이스를 공부하고 익힌다해도 머리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아니듯,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람을 향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다면 다른이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어디에 있든 삶과 신앙의 일치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삶이 아닐까? 

선교를 향한 비전을 품고, 그 길을 위해 배움과 훈련의 시간을 갖고자 이 학교를 찾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 몇 년이 지난 지금, 사실 그 때 교실에서 배웠던 학문보다

이들을 통해 배우고 느꼈던 살아있는 현장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 친구 케이트, 

밝고 환한 그녀의 웃음과 사랑이 중국 땅 어딘가에서 동일하게, 그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빛으로 비추고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케이트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