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은] KOSTA의 노령화, new vision to serve or challenge to overcome?

미국내 한인 유학생 통계에 따르면 학부생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는, 전체 한인 유학생 중 학부생이 69.4%, 대학원생은 15.0%인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2008/9학년도 기준)

반면, 미국 코스타에 참가한 코스탄의 구성에서는 평균 연령의 증가, 기혼참석자 비율의 증가 (50% 상회, 2010 Chicago Conference), 그리고 직장인/일반 참석자 비율 증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KOSTA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한인 청년학생운동을 지향하는 KOSTA와, 넓게는 청년학생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도전을 주는지 고민해보고자 하며,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실 분들은 eKOSTA@kostausa.org로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eKOSTA 편집부)

“청년학생”운동, 그 이후

올해로 KOSTA 25주년을 맞이하였다. 25년동안 KOSTA의 섬김의 대상은 KOrean STudents in America(북미 유학생) 에서KOrean STudents Abroad로, 이제는KOrean STudents All nations으로 확장되어왔고, 대학원 유학생중심에서 1.5세를 포괄하는 학부와 청소년 사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조국과 민족을 향한 복음적 소명의 영역을 모든 나라와 족속을 향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선교적 사명으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으로서의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대한 기대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열정가운데 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전과 변화가운데에서도 한가지 변화되지 않은 KOTSA의 핵심가치는, 바로 KOSTA는 한인 “청년학생” 운동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학생”는 현재 학생인 사람들에 국한 하지않고, “학생”일 때에 KOSTA에 동참했던 사람들, 졸업을 하고 사회인으로서 KOSTA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인 사역의 영역에서도 이들 KOSTA “선배”들의 지속적인 헌신과 섬김 – 멘토와 강사님들의 background를 주목해보자 – 을 통해서 후배 “학생” KOSTA가 가능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전 “청년학생”일 때 KOSTA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멘토, 간사, 강사, 교사등의 한정된 영역이외에 KOSTA에 설 자리는 어디인지, 그들에게 KOSTA는 무엇을 기대하고 또 제시하는가. 일보 확장해서, “청년학생”의 때에 KOSTA를 만나지 못하고 “청년 이후 사회인”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KOSTA가 reach out할 수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복음주의 청년 학생운동으로 태동되고 발전해온 KOSTA에게 복음주의 “청년 이후” “부부-부모” “사회인” 운동의 역할까지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위의 질문들은, KOSTA의 미래에 대한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솔직히 그럴 여유도 자격도 없다), 다분히 개인적인 고민과 갈증, 경험과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8년, 유학생으로서의 힘겨운 첫 1년을 마치고 처음 KOSTA 시카고 conference에 참석했을 때, 나는 누가 뭐래도 “청년학생”, 한인 유학생이었다. 2002년 결혼을 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서른이 채 못 된 나이었기에 아직은 “청년”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직장인이며 두 아이의 엄마로 서른 중반이 된 시점에 다시 KOSTA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구학적/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조별모임을 하면서, ‘펄펄 뛰면서 부르는 엇박자의 찬양’을 잘 따라가기 어려운 부모된 우리들은 KOSTA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이제 ‘학생’ 아니고, 또 ‘청년’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많이 희석되어있어서, 진정한 “청년학생”들을 위한 자리에 minority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조별모임의 귀한 것과, 오전 QT의 풍성함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부부가 함께 하는 말씀 묵상의 그 깊음과 아름다움을 왜 우리가 사모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졸리고 배고프고 떠들고 우는 아이들이 있다면 앞서 열거한 것들을 부부 중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으로서의 부부는 포기하게 된다. 아이들이나 배우자의 희생이 없이는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고, 또 KOSTA가 기대하는 분량의 섬김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있는 여러 변수때문에 기혼 참석자들은 조장 지원에 주저하게 된다. KOSTA의 통계에는 이 현상이 ‘기혼조 조장 부족’으로 잡힌다. KOSTA의 사역가운데서 발견되는 기혼부부의 非청년적 특징은 어린 자녀가 있을 때 발현되기는 하지만, 자녀가 아직 없는 젊은 부부에게서도 “청년”적인 역동성의 저하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어느 정도 발생,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작년에도 올해에도 KOSTA 연차 수양회에 당당하게(?) 참석하였다. 그리고 40대의 동료 기혼가정 참석자들과 교제하였다. 우리들 “청년 이후”세대에게 KOSTA는 무엇일까? 영적 재충전, 지역교회에서 공급받지 못했던 좋은 말씀들을 통한 도전, 비젼의 (재)발견, 관계의 회복, 그리고 좋은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 혹자는 이것을 family retrea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KOSTA에서 제공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가족 휴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과연 KOSTA가 해야될 역할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담고서.

현상에 대한 description을 잠시 뒤고 하고, 보다 실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이제 마흔이 그리 멀리 보이지만은 않는 이 시점에 나는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이라는 KOSTA를 “졸업”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졸업”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KOSTA는 집회나 조직이 아니고 ‘운동’이기에, “졸업”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할 수없지만, KOSTA의 모든 사역과 집회에 참여하는, 혹은 그러한 사역과 집회가 초점을 두고 있는 대상자라는 협의에서 생각해볼 때, 더욱 좁게는 매년 연차수양회에서 제공되는 세미나의 주제들을 접할 때마다, 장성한 분량으로 가지 못하고 KOSTA가 떠먹여주는 이유식에 매달려 있는 영적 어른 아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KOSTA의 “청년”정신을 노쇠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KOSTA같은 곳을 원하는 우리들, 非청년 부부 사회인에게는 KOSTA외에 갈 곳이 없다!!

KOSTA의 노령화, new vision to serve or challenge to overcome?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면 조국으로 돌아가던 때와 달리, 최근에는 많은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친 후에 결혼을 통해서, 취업을 통해서 미국에 정착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KOSTA시카고 conference의 참석자 통계에 분명하게 반영되고 있으며, 확장일로에 있는 kids KOSTA, youth KOSTA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KOSTA의 영역이 학부생과 조기유학생 혹은 1.5세 학생으로 확대되는 것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이름에 맞는 방향성이다. 그러나, “청년학생” 이후에 대하여 KOSTA는 어떤 방향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참석자의 연령분포와 미혼-기혼비율변화가 KOSTA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며, KOSTA는 이 현상을 새로운 vision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위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가.

매년 더 많은 아이들과 기혼 가정이 참석함으로 인해서 운영상의 어려움이나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없다. 자봉은 부족하고 기혼 조의 조별모임은 ‘아빠’모임 혹은 ‘아무나 한 사람’모임이 되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관련된 안전사고와 식단 문제, 숙소의 확보 및 배정 문제, kids KOSTA와 youth KOSTA 의 부담이 더욱 커진다.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부부상담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가정사역 영역에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내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소즉적인 접근을 뛰어넘어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치고 나가는 “청년학생”운동으로의 KOSTA의 방향성에 맞지 않다는것이다. KOSTA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점에서 위의 현상들은 희망적이고 이상적이기보다는 ‘위기’라는 말로 요약될 만 하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차례이다. ‘위기’를 ‘기회opportunity to explore’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도전challenge to fight’로 볼 것 인가가 key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모든 사람은 “청년학생”의 때를 거쳐서 “청년 이후”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이었던 사람은 “직장인”이 될 것이며, 그저 한 사람의 독립된 “adult”이었던 사람은 “부부”가 또 “parent”가 된다. 이 시기를 지나가는 혹을 맞이하게 될 모든 KOSTAN들에게 KOSTA는 무엇인가? “청년”이후의 삶을 준비시켜주는 운동인가? “청년”의 때에 KOSTA에 동참하고 도전받고 헌신한 후에는 당당히 KOSTAN의 삶, 즉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은 KOSTAN 스스로가 지어야 할 짐이며 소명이다라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KOSTA 를 “졸업”해야만 한다. 그러나, “청년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KOSTA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KOSTA의 책임과 비젼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주기를 원한다. 만약 “청년 이후”의 삶이 “청년”때 KOSTA를 통해서 훈련되고 도전받고 헌신한 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이는 “청년학생”운동의 한계인가, 아니면 “청년학생” 자신의 문제인가?

다시 부끄러운 나의 경험과 나의 동료 젊은 부부들의 삶에 대한 간접 경험으로 돌아가본다면, “청년”의 때를 KOSTA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각자 나름대로) 뜨겁게 보냈던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룬 우리 가정이 “청년 이후”의 삶, 하나된 두 사람의 삶, 두 아이를 책임지는 부모의 삶, 그리고 사회인으로의 삶을 살면서, “청년학생”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과 도전에 대하여 전적 무지함과 지혜없음의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무언가 분명하게 대답해 줄 수있는 어떤 source도 없으며 모두가 그저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배 “청년학생”들에게 제시해줄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기는 한 것인가 좌절하는 한편, 지금의 “청년학생”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따라 곧 맞이하게 될 “청년 이후”의 삶에 대하여 잘 준비되고 있는지, 과연 “청년 이후”의 나는 무엇을 miss해왔고 이제 무엇을 pursue해야 되는지 의문에 의문을 더해갈 뿐이다.

“청년 이후”세대가 맞는 새로운 도전

미혼 청년학생(99-01), 기혼 청년학생(02-04), 그리고 기혼 非청년非학생(?)(08-10)으로 KOSTA와 함께 하면서, 나는 “청년”의 때에 도전받고 헌신했던 열정을 실제의 삶으로 지속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기본명제의 굳건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양식에 있어서 “청년”의 때에는 고려할 필요 없었던 새로운 조건들이 개입되는 것을 실감하였다. 바울과 같이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미혼으로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 귀한 부르심인 것을 사실이지만, 결혼과 가정, 그리고 자녀라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안하신 틀이며 축복이다. 하지만 헌신된 미혼 청년일 수록, 헌신된 청년 부부일수록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의 자리에 설 때에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지 못했는지를 깨달으며, 자신이 소망하고 계획했던 모든 사역을 이전과 같은 우선순위와 효율성으로 감당하지 못하게 됨에서 오는 좌절과 답답함을 절실히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부부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마저 발생한다. 또한 “청년학생”의 시절의 순수함을 마음이 품고 세상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자 할 때,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은 캠퍼스안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더욱 치열하고 더욱 거센 물결로 우리를 압도함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아주 헌신되고 열정적인 “청년”의 때를 지냈던30-40대 가정들의 “영적인 끼인 상태”는 비단 KOSTA내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아이들 때문에, 아직은 불안정하기만 한 사회생활가운데 struggle해야만 하는 이 시기의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은 종종 현상유지이상이 되기 어렵다. 대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자모실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과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하는 아내를 혼자 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와 섬김을 감당할 수있는 – 마치 “청년”처럼 – 남편은 많지 않다.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며 부부가 함께 손 잡고 중보할 수있었던, 그리고 하나님앞에서의 비젼과 결단을 밤새 이야기 나누었던 그 시간은, 종종 10분도 넘기기 어려운 주1회의 약식 가정예배로 대체되어버린다. 부부가 나란히 차를 나누며 각자의 비젼과 소명을 나눈 때가 언제인지를 회상하는 현상을, 정기적금과 선교헌금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뜨거운 “청년”의 때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헌신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섵부르지 않을까.

복음주의 운동에 동참한 “청년학생”에게 적용되는 성경적 원칙은 “청년 이후”의 세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만약 한 사람이 “청년학생”으로서 이러한 성경적 원칙위에 잘 서 있고 훈련되어 있고 헌신되어 있다면 그가 “청년 이후”의 시기를 지날 때에도 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할 본질적인 가치는 동일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앞에 두고 이 가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하는 부분에서 “청년학생”이 내놓게 될 해법과 “청년 이후”의 해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있다. “미혼 청년 학생”이 자신의 젊음과 자신의 career를 헌신하는 것과, “청년 이후 기혼 사회인”이 동일한 헌신을 하는 것은 “청년학생”의 그것을 단순연장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을 요구한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사이에는 삶의 목적과 방향과 방식에 있어서 존중과 침범의 tension이 존재한다. 이로 인한 갈등과 오해는 신실하게 “청년학생”때에 복음안에서 구축한 원칙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남편 혹은 아내일 수록, 부모일 수록 오히려 더 처절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

가난했던 “청년학생”의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재정관리, 이제 부부이므로 또 부모이므로 새롭게 발견하게 된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인격의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 성실하고 productive한 employee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직장생활과 복잡해진 인간관계, 자녀양육과 가사 때문에 좌절된 career등은, “청년학생”의 단계에서 획득한 복음적 원칙으로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의 답을 찾기 어려운 여러가지 삶의 도전들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고민들이 모든 “청년 이후”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만한 정도의 사람들에게 절박하고 절실한 삶과 신앙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부부관계의 문제도, 자녀 양육의 문제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과연 최선의 해결책일까. 이 ‘시간’동안 긴장감없이 “청년 직후”의 시기를 보내는 사이,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무방비상태로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이며, 그래서 정말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그 “청년학생”의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우리가 “청년학생”의 때에 KOSTAN이었음을 절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형태의 삶에 고착되는 것이다. 과연 “청년학생”의 때를 이제 막 지나온 “젊은 부부”는 기다림 혹은 일시적 쉼의 시기를 지나야만 하는 것일까? 부부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사회인이기 때문에 “청년학생”보다 더 역동적이고 더 powerful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속으로 나아가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우주적인 사역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나는 부부관계 상담, 내적 치유, 부모학교, 자녀 양육과 같은 전통적인 가정사역의 틀을 뛰어넘는, 북음주의 운동으로서의 “젊은 부부 KOSTA”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젊은 부부”에의 reach out은 청년학생 사역에 비해서 더 많은 인적 물리적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생업과 양육에 잠식되어 있는 “젊은 부부”들의 정신과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고 일어나서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청년학생”때의 향수에 의지않고 오늘 세상속 한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갈 수있도록 empower할 수 있다면, “청년학생”운동을 뛰어넘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기대할 수있다. 왜냐면, “청년학생”때의 헌신과 서원이 실질적으로 삶에서 세상가운데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roll model이 없다고 탄식하기를 멈추고 수많은 roll model들이 사회 각 영역에서 배출되도록 과감히 투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되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한다, 헌신이 사라진다라고 어떤 “청년학생”이 꾸짖는다면,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그“청년학생”앞에 사죄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으며, 어느 누구도 과거의 열정과 헌신에만 의존해서 오늘의 영적전투를 감당할 수는 없다는 일반론적인 진실을 이해해주기를, 그리고 피를 토하며 기도하는 “청년학생”들 앞에 떳떳한 “청년 이후”의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서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우리가 지나왔던 그 길을 함께 손잡고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선배, “청년 이후”들을 위해 지원사격해주기를 간청한다.

[이유정] 성공의 복음, 그 득과 실

아내가 디렉터로 있는 어린이 청소년 미니스트리인 갓스이미지 디렉터들의 연례모임 참석차 LA를 방문했다. 마침 시간이 되어 주일오전에 가든 글로브에 위치한 수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TV설교가 로버트 슐러 목사로 유명한 교회이다.
 
주차장이 만차일 것을 예상하고 15분 전에 도착했는데 예상외로 너무 한산했다. 드라이브인 예배를 드리는 자동차로 가득했어야 할 곳이다. 예배 시작 10분전 본당의 텅 빈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일 2회의 예배 때마다 4천 석을 가득 메웠던 곳인데 예배 시작 후에도 곳곳이 텅 비어 있다.
 
자리에 앉아 예배실을 둘러보았다. 20세기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 중 한사람인 필립 존슨의 작품답게 건물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벽과 천장을 구성하는 만장이 넘는 은빛유리, 입체 트러스트로 연결된 가로 125m, 세로 62.5m, 높이 39m의 거대한 본당 공간, 전동장치로 외부공기를 유입하고 더운 내부공기를 외부로 내보내는 자연 환기방식, 4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 좌석, 설교단 뒤에 있는 27미터짜리 거대한 전동 유리문, 12사도들을 상징하는 중앙 통로의 12분수, 2만여 개의 관으로 연결된 세계 최대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 등이 그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그 첨단의 위용도 이날은 왠지 외소해보였다.
 

로버트 슐러는 꿈의 사람이었다. 1955년 개척할 당시 그의 손에는 500불이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교회를 세우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고, 그 꿈은 이루어졌다. 그의 “아워 오브 파워” 방송은 매주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시청했다. 그는 수정교회 사역을 천국을 맛보게 하는 관광지라고 강조한다. 마침 인근 5분 거리에 있는 디즈니랜드 덕에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 사고방식’, ‘성공의 복음’을 강조하고, 드라이브인 예배를 처음 도입했으며, 교회를 기업, 전도와 선교를 판매,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목회스타일로 세계적인 메가처치를 이룩한 첫 번째 목회자이다. 최근에는 타임지의 언급처럼 그의 80년대 ‘번영의 신학’이 또 다시 부활했고, 부활 정도가 아니라 붐을 이루고 있다.
 
세간의 기준으로 성공한 이 교회가 요즘 헌금, 기부금, 교인수가 줄어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20에이커 규모의 수양관 폐쇄와 50명 직원해고, 유명한 뮤지컬 행사인 ‘글로리 오브 이스터’ 공연에 이어 ‘글로리 오브 크리스마스’ 공연마저 취소되었고, 부동산 매각 등으로 긴축 정책을 단행하고 있다.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리더십 교체의 실패에 있지만 필자는 보다 근본적 이유를 번영신학의 한계와 예배신학의 부재로 본다. 그의 성공의 복음은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했지만 다른 한 편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비난만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특정 시대에 특정한 지도자를 일으키신다. 로버트 슐러가 목회를 시작할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입은 경제적, 정신적 타격에서 막 일어나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때 미국인들에겐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로버트 슐러 목사를 사용하신 것이다. 물론 그를 비난하는 많은 입장이 있다. 인정도 한다.
 
그런데 지상에 완벽한 지도자는 없다. 흠 잡으려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사람을 품으시고 그를 사용하셨고 앞으로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딤후 1:9) (현대인의성경)
 
세례요한처럼 이제 그의 역할은 지나가고 있다. 그것을 실패로 봐선 안 된다. 그 사역의 장단을 분별하여 다음 세대가 더 온전한 사역을 하기 위한 토대로 삼을 일이다. 한 예로 슐러의 비신자를 향한 열정에 직접 영향 받은 목회자가 빌 하이벨스이다. 그가 시작한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가 탄생했고 그 결과 전 세계 수십, 수백만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벌써 83세의 고령인 슐러 목사, 625전쟁 때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으로 미국 다음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는 그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메시지를 전했다. “왜 교회는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까? 예수님이 교회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피 쏟듯 토해낸 메시지가 가슴에 남는다. 슐러는 은퇴해도, 수정교회는 기울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음 시대에 필요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실 것이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2010 스크랜튼 평가회 : 코스타를 향한 격려와 충고들

 2010 코스타 스크랜튼 컨퍼런스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열린지 벌써 두달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 있는 코스탄들은 지난 코스타를(들을) 돌아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요? eKOSTA 가 네분의 코스탄을 모시고 진솔한 생각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코스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해 주신 여러 격려와 충고의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eKOSTA
: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운학: 저는 김운학 입니다. 현재 North Carolina 에 살고 있고, 코스타는 6번 참석했고 GP 코스타를 North Carolina 에서 2번 했는데 모두 참석했습니다.

김영정: 저는 김영정 입니다. Maryland 에 살고 있습니다. 코스타에 4번째 이번에 참석했고요, 4번 다 조장으로 참여했습니다.

허수진: 저는 허수진입니다. 지금 DC 에 있고, 코스타는 작년 인디와 이번 스크랜튼 이렇게 2번 참석했습니다. 조장은 올해 처음으로 섬겼습니다.

기드온: 저는 기드온입니다. Wyoming 에 살고 있고 2007년 부터 올해까지 4번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eKOSTA: 참석하신지 한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2010 코스타를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반응을 주로 볼수 있나요?

기드온: 저는 사실 코스타 집회 때 보다는 코스타에 갔다온 이후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집회에 갔다 온 후부터 코스타가 시작된 것 같았습니다. 집회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전체 집회 말씀이 었던 것 같은데 주제가 잘 전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4년째 주 대표로 참석을 해서요, 주위 친구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수진: 기드온 형제님이 잘 말씀해 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체 집회 말씀들이 기억에 제일 남습니다. 작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올해가 특히 더 좋았던 것 같고, 제가 섬겼던 조에서는 김철수 선교사님의 저녁 말씀에 대한 은혜를 가장 활발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성경 강해 시간도 본문을 잘 선택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분들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은 어땠던 간에 떠날때에는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이 저의 경험으로는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영정: 전체 집회 때 김철수 선교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우리가 선교적인 존재들이다’ 고 말씀하셨던 것이 계속 생각이 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끼리 이런 얘기를 별로 안해서 친구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습니다.

김운학: 여러분들이 잘 말씀해 주셨지만 저도 오전 성경강해와 저녁 설교가 보완이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같은 경우 오전 오후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힘들어 하던 학생도 많이 보였는데, 이번에는 눈높이와 내용 모두 일관성있고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반응으로 보자면 일단 스페인을 응원하는 친구들에게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코스타였던 것 같고, 코스타를 잘 모르는 참석자에게는 내용이 조금 딱딱했다 라는 말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eKOSTA: 온라인 묵상훈련과 JJ 수양회 대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좋았던 점이나 개선할 점에 대해서 나누어 주세요.

김영정: 코스타 집회 기간 중 나누어 지는 것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으로 볼때 묵상훈련은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조장으로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 질문들에 있어서 아쉬웠던 점은 적용에 대한 비중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인데요,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동기와 묵상 자체를 충분히 다루기 보다는 적용점을 찾기에 서두른 질문들이 간혹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큐티중 본문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적용이 있었는데 그 적용이 성경 저자의 주 의도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허수진: 저도 동의하고 묵상 훈련 질문들을 접하면서 힘들었던 점들 중 하나가 질문들의 일관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출제하신 분들이 한 분이 아니시기에 스타일의 차이는 어쩔수 없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어떤 날에는 한가지 유형의 답을 의도하는 식의 질문도 있었고 또 어떤 날에는 본문의 범위를 넘어서서 너무 큰 질문을 접하며 당황하던 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타일 까지 맞출 수는 없겠지만 훈련 내용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부족해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 올해에는 JJ 준비팀을 도왔는데요, 시간이 촉박했던 것 같습니다. 조장을 선정하고 조원 배정하고 큐티 리뷰하고 하는 일이 많은데 비해서 스크랜튼 웹사이트 업데이트와 등록이 늦어지는 일 및 몇가지 일들로 인해 준비팀과 코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팀웍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시간이 없다보니 일 중심으로 하는 것 같은 기분도 종종 들었고 준비팀과 코디 사이에서 충분한 소통이 안되어 조장들에게도 목적의식이 잘 전해지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JJ 수양회 기간에서도 역시 바쁜 스케줄에 비해 한 지역에 속해 있는 조장들이 서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만한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JJ 말씀과 강의에 있어서는 주제에 잘 맞았다고 생각하고 참 만족스러웠습니다.

김운학: 조장 사역의 딜레마는 조장들이 잘 섬길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는 것과 동시에 그분들이 집회 기간 전달될 주제 또한 잘 이해할 수 있게 훈련 한다는 점 인데요, 두가지를 동시에 이루기에는 좀 힘들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는 것 같고요, 참 큰 고민거리 같습니다.

기드온: 이런 고민들과 훈련 시간에 대한 고민들이 팔로업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 이후 충분한 팔로업을 통해 코디와 조장들이 잘 키워진다면 그 다음해에 많은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에서 다루어 졌던“복음”이라는 주제가 JJ 수양회와 전체
프로그램을 통해 잘 전해졌다고 생각하시나요? 조원들과 복음에 대한 얘기가 활발하게 나누어 졌나요? 이어서 “민족, 땅끝”은
참가자들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 궁금합니다.

김운학: 매년 코스타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일반적으로 참가자들이 ‘복음’ 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기초적이라고 여기고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 인것 같습니다. 여러해를 참석하는 분들은 특히 ‘복음’에 대한 관심 보다는 소위 advanced 되었다는 토픽들을 많이 찾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사님들이 앞에서 열심히 전해 주셨지만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복음’이 많이 나누어 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민족’에 대해서도 참가자들이 나누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고 ‘땅끝’에 대해서는 반면에 참가자들의 반응을 볼수 있었습니다. ‘땅끝이 지리적인 뜻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에 반응하여 땅끝을 ‘과거의 상처나 자신의 약점’ 으로 받아들인 참가자들을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허수진: 저도 계속해서 나누자면, 주제를 세가지 단어를 사용해 밸런스를 맞춘 것은 개인적으로 좋았지만, 일주일 동안 다루기에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복음’ 이라는 주제가 General 하고 많은 것을 포함하다 보니 전체집회에서 말씀해 주신 강사님들도 ‘복음’에 대해 많은 비중을 두셨습니다. 예를 들어 첫날 특별강의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쓰였고 마지막에 잠깐 ‘민족’과 ‘땅끝’에 대해 언급되었습니다. 아쉽게도 ‘복음’이 이렇게 많이 선포된 것에 비해 막상 조모임 안에서는 본질적인 ‘복음’에 대해 깊이 나누어 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운학 형제님이 말씀해 주신 것과 비슷하게 저의 주변에도 ‘땅끝’을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어려운 주변관계’ 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민족’ 이라는 개념을 inclusive 한 민족성에서 폭을 넓혀 ‘하나님 나라’로 해석해 주신 것은 좋았으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익히 들어온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사는 한국인과 디아스포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다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대한 문제도 ‘한민족이니 품어야 한다’ 라는 전제 하나로 ‘어떻게’에 대한 문제는 나누어 지지 않았던 것던 것 같은데 이런 부분들이 조금 실망이 되었습니다.

김영정: 복음이 참 기쁜 소식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감격스러운 소식이 막상 조 모임에서 나누어 질 때에는 지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감격 또한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복음’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이미 알고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강사님들께서 복음을 아주 잘 설명해 주셨지만 이런 부분들을 깨트려 주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세미나 들도 주제가 복음이었던 만큼 ‘복음’ 에 밀접한 강의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민족과 땅끝에 대해서도, 지리적이고 국가적인 정의를 벗아나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것은 좋았지만 오히려 마지막 날 해외선교 초청으로 마무리 된 것을 보았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조원이 ‘기도 중 선교사로 부름받은 것 같다’ 는 말을 들었을 때 말씀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초청과 Tradition 이 참 아쉬웠습니다.

기드온: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를 참 잘 연결해 주시고 전해주신 것 같습니다. 복음 안에서 민족, 땅끝을 볼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좋았고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민족, 땅끝을 신앙과 이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eKOSTA: 그럼 전체적으로 복음이 잘 선포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시나요?

김운학: 강사님들이 필요한 말씀을 앞에서 잘 하신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는데, 그것이 참가자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KOSTA: 올해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세미나는 있으셨나요? 코스타에 여러번 오시면 선택신 세미나의 제목들과 강사진에 익숙해 지게 되는데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영정: 강사님들이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세미나를 준비하시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친구들에 의하면 이번 세미나에서 신학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말씀 (예: 연옥에 대해)도 전하신 강사님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좀전에 얘기했듯이 주제 (복음) 에 맞는 세미나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도 생각했습니다.

기드온: 저도 전체집회에서 들은 말씀과 세미나에서 들은 말씀이 많이 다르다 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던 것 같고 영정 형제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또 세미나를 처음 등록하시는 분도 참 많은 것 같은데 강의를 고르시기 많이 힘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카고 컨퍼런스와 같이 연관있는 주제를 묶어서 강의 트랙을 만들면 참 도움이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세미나는 IBS 실습 세미나 였는데 이렇게 실제로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고 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여러 친구들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것 같습니다.  꼭 세미나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조원들이 모여 함께 체험하고 프로덕트를 만들어 볼수 있는 시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수진: 시카고 컨퍼런스만 보아도 유학생들이 많으신 것 같지만 스크랜튼은 1.5세가 대부분이고 유학생이 Minority 인것 같습니다. 강사님들이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볼때 강의를 하는 대상이 ‘어린 학생’ 이라고만 define 이 되어 있고 정확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거나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오신 강사님들에게 이런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는데 사전에 Clarification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운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건 판매되는 CD 가 리뷰되고 복사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인데요. 한 강의는 강사님이 ‘오늘은 디스커션 위주이니 다른 시간을 녹음해 달라’ 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 강의가 판매되어 신경이 쓰였습니다. 운영측에서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기드온: 동의합니다. 1.5세나 이민세대 그리고 87년도 위의 세대에게 잘 맞추어진 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운학: 폐회예배를 노진산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데 1.5세 목회자이셔서 잘 클릭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분들을 많이 세미나에 초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6년동안 세미나를 참석하면서 관찰한 것은 강사님들이 비슷한 주제로 타이틀을 바꾸거나 혹은 레파토리를 조금 수정해서 그대로 강의를 하시는 모습인데요 이런 점이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김종필 멘토님 같은 분은 매년 주제와 내용도 바꾸어 가시면서 준비해 주시는데 올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교육관, 올해에는 세계관을 말씀해 주셨는데 스타일이 비록 똑같더라도 새로운 내용을 준비해 주셨기 때문에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강사님들 마다 전문분야가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것에서 조금 벗어나시는 것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KOSTA: 평가 설문지에 가장 많이 나온 피드백은 프로그램이 너무 빽빽하다는
것인데 (세미나 여섯번, 오전/오후 집회, 큐티, 조모임, 새벽기도회) 어떠 셨나요? 코스타가 매해 마다 반복되는 틀보다 더
Engaging 해 질수 있다면 어떤 점들이 있을까요?
참석자 세대 (85,86,87) 들에게 내용, 눈높이나 전달방법과 연관시켜서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김운학: 하 목사님과 김 선교사님은 눈높이를 잘 맞추어 주신 것 같습니다. 오전 오후 집회로서 빽빽함에 대해서는 그리 달리 개선할 부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간사님들도 고민들이 많으시겠지만 답이 나오기 힘든 문제인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참가자들이 5시반 정도에 일어나는데 1시 2시에 취침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세미나 여섯번, 새벽기도, 큐티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모습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선택식으로 만들거나 횟수를 줄이는 방법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간사님들이 도전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포맷을 여러가지로 시도해 보셨으면 합니다.

김영정: 저는 오히려 어린 세대 (88년도생 이상)에게는 눈높이가 잘 맞추어지고 쉽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참석자들에게는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는 앞서가는 것을 듣고 싶은 바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집회에서 웃을 수 있고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오히려 그런쪽으로 너무 치우치치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는 작년에 비해서 올해가 더 힘들었는데요, 빽빽하다 라는 점에 대해서는 말씀이 어려워서 였기 보다는 캠퍼스 이동거리가 조금 멀어진 것과 기후가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허수진: 저도 개인적으로 올해가 더 힘들게 느껴졌는데 그저 우리가 한살을 더 먹어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눈높이에 관해서는 영정형제님과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 분들이 기억에 남는 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첫날 김현회 목사님께서 전반부터 ‘말씀을 재미있게 하지 않을 것이고, 강의식으로 할거다’ 라고 도전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런 진지한 부분 또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받아들일 때 덜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지만, 재미있으신 분들과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시는 분들이 밸런스를 갖추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85, 86, 87 같은 세대들에게는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어 주셔도 좋지 않았을 까 생각해 봅니다.

빽빽함에 대해서는 참석자에게 선택할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쉬고 싶은 지체들도 있는 반면에 코스타에서 이것은 꼭 얻어가고 싶다 하며 오랜기간 준비해 오는 참석자도 있기 때문에 세미나나 프로그램의 숫자를 줄이기 보다는 선택을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드온: 너무 맞추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것 같고요. 저는 이번 코스타가 완벽히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열악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수고해 주신 것도 정말 감사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든 일정인데도 참석자들도 열정으로 잘 참여해 주신 것 같습니다. 네번째 오다 보니까 새내기 때 아무것도 모르고 참여할 때와 동생들을 바라보면서 참석하는 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어린 학부생들이나 이민 세대 학생들이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다른 코스타와 다르게 훨씬 덜 놀았는데요, 오히려 빽빽한 스케줄이 더 제 시간에 휴식하고 취침할 수 있게 한 효과를 보여 좋았습니다.  힘들었던 스케줄이 그런면에서는 좋을 수도 있겠네요.

eKOSTA: 코스타를 통해서 삶에서 가지게 된 고민이나 변화가 있었으면 나누어 주세요. 혹은 그런 고민을 던져줄 수 없었다면 왜 그런지 알려주세요.

김운학: 저같은 경우는 코스타에 가서 고민이 생겼다고 말할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저렇게 하면 안되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요.

코스타가 고민을 던져줄 수 없었던 부분도 있는데요, 대체적으로 코스타가 저의 삶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코스타가 집회가 아니고 학생운동이라는 말도 많이 있지만 확실히 수양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돌아왔을 때 돌아온 삶이 여행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동떨어 졌다고 느끼는 것 처럼 내 삶과 코스타의 Gap 이 크다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코스타에서 고민이나 도전을 받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영정: 저도 코스타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된 고민이 있었다고 얘기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말씀을 삶의 영역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힘든 문제이기도 하지만 말씀과 강의들이 삶에 대해 예리한 질문을 던져주었는 가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허수진: 비슷한 입장인데요, 코스타 집회 기간 만큼은 세속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믿는 사람들과 편하게 교제하는 부분이 신앙 생활에 활력소와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요, 과연 정말 좋은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적용 부분이 힘들었고, 삶으로 돌아왔을 때 천국에 있다가 지옥으로 오게 된것 같은 Gap 이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주일만 크리스찬인 것처럼 행동하는 Sunday Christian 의 모습도 1년동안 아무렇게나 살다가 코스타에서만 가장 은혜받는 모습으로 비슷하게 나올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서 개인적으로 그런 차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기드온: 리모트한 지역에 살다보니까 처음 코스타 갔던 체험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미국에 코스타라는 모임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되었거든요. 그 이후로도 코스타에 매년 올때 마다 저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겸손해 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스타에서 체험하게 되는 역동적인 일들과 깨달음은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석자였다가 조장과 코디도 하게 되고 준비팀에서 섬기게 되니까 여러가지를 볼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불편하고 잘 안맞는 부분이 때로는 있다해도 공동체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코스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지역을 넘어 범위가 넓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스타 후 리모트 지역의 삶으로 돌아와도 나름대로 고민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저만의 서포트 그룹이 만들어 지고 관계를 가질수 있는 그것이 저에게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eKOSTA: 그밖에 하고 싶은 말씀들 부탁드립니다.

기드온: 저는 코스타가 끝나고 돌아와서 롤러코스터가 시작된 것 같아요.  항상 코스타 끝나고 삶의 문제들이 더 많이 표출이 되곤합니다.  그런 문제들을 안으면서 코스타는 정말 집회 후에 시작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코스타 이후에도 코스타 기간처럼 함께 삶을 나눌만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앞으로 그런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노력할 건데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코스타라는 ‘항상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허수진: 영혼을 섬기는 헌신을 하신 조장들을 팔로업하고 케어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조장이 아닌 다른 참가자들에게 코스타 이후에 돌아오는 것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조원으로 참석하면 코스타가 끝남과 함께 거기까지 이고 그러면 조장들은 어디까지 케어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억울하면 JJ 해라’ 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원들에게도 코스타 이후에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은 조장의 코스타 후의 임무에 대해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다면 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영정: 저희 조에 커플이 있었는데 두분이 함께 신앙으로 서포트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어 함께 배정된 것 같은데, 실제로 조를 운영하는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경서주셔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예배 시간에 멀티미디어 팀이 사진촬영과 비디오 촬영을 너무 적극적으로 해주셔서 방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기록을 남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은데 찬양할 때 앞에 까지 나가서 찍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필요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것 같습니다.

김운학: 장소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컵라면도 커피도 끓여 먹지 못하는 것도 있고 장소가 엄격해서 힘들었습니다. 인디애나에서 스크랜튼으로 왔는데 왜 코스타에서 그렇게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메리우드가 앤더슨에 비교했을 때 숙소와 식당은 좋았지만, 그 밖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천장이 낮아서 답답하고 넓은 공간이 없어서 좁았고 화장실 사용도 불편했습니다.

김영정: 조원들이 간사님들 라면 끓여 드시는 장면 목격했는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것들이 비춰지고 드러났을 때 따라가야 하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운학: ‘먹다가 들키면 5천불 벌금’ 이라는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시면 간사님들을 신뢰하기 조금 힘들어 질수도 있죠. 간사님들이 만들어 주신 규칙이니까 지켜주셔야죠.

기드온: 대규모 운영 하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규칙인데, 간사님도 사람인데 라면 드실수도 있죠.

허수진: 간사님들의 롤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운영만 하시는 건가요? 집회 기간동안 하실 일이 많으시고 일에 집중하셔야 하는 것은 이해하는데요. 조금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참석자들과의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는 참석자고 우리는 운영자다’ 라는 태도들이 괴리감을 만들기도 했던 것 같아요. 마치 다가가면 안될것 같은 존재처럼 느껴질 때도 가끔 있었고요. 그렇습니다.

기드온: 충분이 그런 목소리를 내실수 있지만, 비판하기에 앞서서 그분들의 입장도 생각해야죠.

허수진: 간사님들의 롤을 참석자들에게 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마나 바쁘신지, 어쩔 수 없이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는 부분도. 그렇지 않다면 함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너무 남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김운학: 건의사항이 있는데요, 다음에는 코스타에서 질문을 만들어서 묻지 마시고 저희들이 하고 싶은 말을 더 할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영정: 다음에는 웹캠으로 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네요.

eKOSTA: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이런 듣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할것 같네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수고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크랜튼 코스타 여러분의 생각들을 듣는 시간을 앞으로 정기적으로 가져보려고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ekosta@kostausa.org 으로 연락을 주세요.  댓글도 환영합니다.

[채영광] “우리가 매일 만나는 환자는 우리의 ‘땅끝’이다” (Healthcare as a Mission – 3)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의료 선교사 되기

이제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사고하기를 거부하자당당히 의료 선교사 되자.  의료를 평생 선교지로 삼고 사명 의식(Mission mind)’으로 살아가는 의료 선교사 되자.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환자는 우리의 이다.  사도행전 1 8절의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예루살렘이 우리의 가족이고 유대가 우리의 친척과 친지라면 사마리아는 우리의 일부였던 우리의 원수이다하지만 끝은 정말 끝이다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 끝이다가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죽을 곳이 끝이다우리의 의료 현장에서 우리가 현장에 나아가지 않으면 평생 우리와 아무 상관 없을 사람들이 우리의 환자들이며 보호자들이다. 그런 의미에 우리의선교지의료 현장은 분명 우리의 끝이다.  당당히 스스로 의료 선교사임을 선포하자. 그리고  직함에 걸맞게 치열하게 살아가자그러한 삶의 실천적 지침으로서 아래의 세 가지를 제안한다.


복음과 회개 (Christ-centeredness)

진정한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환자보다 보호자보다 의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지적 교만공포와 근심에 사로잡힌 환자나 보호자와는 다르다는 감정적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내가 주님의 은혜의 혈관이어야 하는데 스스로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분히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지환자와 보호자의 모든 칭찬과 칭송을 스스로 다 받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C.S. Lewis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이야 말로 고린도전서13장에 나오는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있는 어떠한 선행도 가능케 하는 가장 죄악이라고 지적한다우리는 돌아온 탕자가 되어야지탕자의 형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분노를 회개해야 한다의료 현장에서 사실 화가 나지 않을 상황을 찾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의분도 있겠지만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사단에게 멋지게 이용 당한다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를 깨고동료 의료진 사이에 두터운 불신의 벽을 쌓는데 이용당한다우리는 일곱 번씩 일곱 , 49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분노를 회개하고 긍휼히 여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있을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깨끗한 그릇만이 주님의 축복을 담을 있고깨끗한 혈관만이 주님의 은혜를 흘려 보낼 있음을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自己愛를 회개해야 한다의료인들은 많은 시간을 자기 경력을 쌓고 관리하는데 투자했다엄청난 시간과 돈을 학업에 투자해 오늘날 자신의 이력을 만들었다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일정 수준의 전문인이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한다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손길로 인도함을 받은  神手成家 아닌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룩한 自手成家 인간이 된다. 후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할 있는 위험이 크다 남이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면이처럼 대단한 내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참을 없다 내가 실패하게 되면이만큼 이룩한 것이 아까워서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진다.  모든 과정에 처음부터 주님이 없었다예수님 분으로 만족하는 삶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없다내가 삶의 모든 초점이 되면 우리 주님이 거하실 곳이 없다. I-centeredness에서 Christ-centeredness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문해보아야 한다. “Is it all about me?” 우리 삶의 초점이 의료진으로서 얼마나 고생했고, ‘ 환자나 병원으로부터 얼마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 의료진으로 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에서, ‘하나님 아무 것도 아닌 삶에 정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해주셨고’, ‘하나님 나에게 얼마나 멋진 소망을 품게 해주셨으며, ‘하나님 나를 어떻게 지금 자리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용하고 계시는지 옮겨져야 한다. 

自己愛, 자기연민에 대한 회개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 삶에 회복해야 한다결국 복음이 해답인 것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되면 이상 아파할 없다시체는 아플 없다성경이 분명 이제는 내가 것이 아니라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갈라디아서2 20절에서 선포하고 있다. 

기도와 섬김 (Servantship)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위해  우리는 복음에 빚진 주의 (servant)으로서 기도와 섬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할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기도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환자와 보호자에게 하는 모든 격려의 말이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되게 하자미국에서는 문화적으로 아직까지 ‘God bless you’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나는 환자를 진료하고 나서 마지막 인사로 항상 ‘God bless you’라고 말한다. 말을 때마다, 다니엘처럼 정말로 잠깐이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주께서 정말로 환자분을 축복해주시라고.  대부분의 환자는 축복의 말을 들으면 나에게 ‘God bless you, too’라고 화답해준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그것도 가장 몸이 아픈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은 축복을 받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나 내가 쓰는 말은 ‘I will pray for you’ 또는 ‘I will remember you in my prayers’,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이다사실 종교를 떠나 말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그리고 실제로 진료실을병실을 나설 때마다 나는 기도한다주께서  환자 분의 힘이 되어 달라고. 만약 환자가 정말 힘들어 때는 기도해주어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은 괜찮다고 하면 환자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다이러한 기도 내가 눈물이 나서 당황했던 적도 있다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같이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고감사하게도 예수님 영접기도까지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료인으로서의 섬김에는 최선의 진료돌봄을 제공하는 외에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경청해주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그리고 좋은 책이나 음악을 선물해주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있다.  퇴원 후에도 전화해주고 지속적으로 격려해주는 것도 훌륭한 섬김의 방법이다.  사실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고되다하지만 잊지 말자우리 주님은 우리 의료선교사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고린도전서 15 58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안수현 선생님은 그를 추모하여 나온, ‘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에서 진정한 의료선교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계신다.  역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책을 필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안수현 선생님은 안목 있는 책과 음악 선물을 통해 많은 환자와 보호자동료 의료인들의 인생에 필요한 복음적인 메시지들을 전하셨는데다음은 그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죽음과 싸우고 있던 백혈병환자에게 창세기 강해설교 5권인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신앙 선물했다책을 전하면서 환자에게 말했다선생님의 병을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병이 낫는 것보다 선생님이 주어진 곡을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나서성도들과 천사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환자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강건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이유정] 아버지 사랑합니다

한국행 LA 공항에서 눈을 감으셨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 가슴이 무너졌다. 유학 2,3년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떠난 미국생활이 11년 흐르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하늘나라로 보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평생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말,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내 가슴속 한켠에 외롭게 남게 되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사역지를 옮길 수 없는 목회자 인생… 그래도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것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육신의 정을 포기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 못 지켰던 임종을 아버지에게는 꼭 지켜드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이 두 손으로 입관, 하관해드려서 다행이다.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시고 코에 관을 삽입하여 위까지 음식과 약을 투여하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옆에서 손 한 번 못 잡아드린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른다. 지난 목요일 저녁, 아버지와 통화한 기억이 생생하다. 혀가 풀려 정확한 발음을 못하셨지만 의식만은 또렷하셨다. 5분 정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아무 소리가 안 들렸다. 매제가 ‘너무 힘들어 쉬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할 테니 아버지가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부활의 예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할 수만 있거든 생명을 연장해달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기도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멘~아멘~”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찾으셨기에 그 아멘 소리가 더욱 간절하셨나보다.

그토록 복음을 거부하시던 아버지, 60이 훌쩍 넘으셔서 신앙을 회복하시고, 어머니와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시며 기뻐하시던 아버지, 이제 병상에서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힘을 다해 ‘아멘’ 하시는 그 소리가 내 마음을 울렸다. 아버지께 격려해드렸다. “아버지 마음 약해지시면 안 돼요. 아들이 갈 때까지 힘내세요!”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가시기 전에 “유정이 오면 당직 서면 되겠네” 우스갯소리로 하신 말씀을 따라 밤새도록 빈소 옆에서 아버지의 천국 길을 지켜드렸다.


장례식장을 찾아오신 지인들 가운데 조용히 다가오셔서 “아버지가 아들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씀 하셨다.” “엄마가 유정이 가족 보고 싶다며 눈물을 자주 흘렸어.” 하는 말씀을 전해줄 때 가슴이 메었다. 영주권 수속으로 7년 간 묶였던 발이 3년 전에 풀려 매년 1회 한국 땅을 방문했다. 2주 동안 3~4일을 아버지와 한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집회와 개인 약속들 때문에 잠깐 씩 대화 나누는 정도였다. 그나마 올 초에 3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자면서 많은 이야기 한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라는 선조의 지혜가 뒤 늦게 뼈에 사무친다.

입관할 때 아버지의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얼굴을 만져보았다. 수의에 싸여있는 수척한 몸을 두 손으로 안아드리며 얼굴을 가슴에 대었다. 살아계실 때 한 번도 안아드리지 못했는데 가시고 나서야 안아드리는 내 마음이 회한의 눈물로 소용돌이 쳤다. 비록 가난하셨지만 평생 사람과 독서를 좋아하셨고, 관대하지만 최선을 추구하는 성격, 뒤 늦게 어머니와 든든한 신앙의 동지가 되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던 모습 등은 내 인생에 돈보다 중요한 커다란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자녀, 친지, 지우들은 헤어지는 슬픔으로 가슴 아프지만 뒤 늦게 그토록 챙기시던 먼저가신 어머니 곁으로 가셨으니, 지금 이 순간 천국에서 더 기쁘고 더 행복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바라보고 계실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뒤 늦게야 가슴으로 깨닫는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