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광] Healthcare as a Mission – 4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영혼구원과 제자양육 (Discipleship)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 위해서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며,
당신의 양을 쳐야 한다.
물론 착한 행실로,
실력과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 직접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실로 막연히 크리스천들에게 무언가 있나 보다 그치게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는 기쁨 선사할
의무가 우리 의료선교사들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성적인 성격상 의무가 우리의 목사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훈련을 받아서 그냥 우리의 의료실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령께서 분명  말씀하신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는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구원 사역은 우리 주님이
친히 하신다.
우리는 다만 기회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씨를 뿌리거나,
거두기만 하면 된단다.
기회는 기도만 하면 언제든지 주신다.

나의 경우, 병원에서 환자를 보면서, 환자를
위해 기도를 했을 주님께서 씨를 뿌리거나 거둘 있는 기회를 종종 주셨다.
다발성 골수암
(multiple myeloma) 환자가 심정맥 혈전증 (deep vein
thrombosis) 의심되어 초음파 검사실에 내려가야 일이 있었다.
간호사의 일손이 부족해 당시 인턴이었던 내가 심장 모니터를 환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검사실 앞에서 한참 같이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나는 주님께서 내가 환자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느꼈다.  환자에게 기도에 대해 승낙을
얻은 오랜 시간 처음에는 영어로,
나중에는 한국어로도 환자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환자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번은 위에서 언급한
심내막염 환자가 호스피스로 퇴원해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이 지나도록 호스피스 자리가 나지 않아서 계속 병실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병동 스케쥴이 끝나는 바로 그날까지 환자를 내가 돌보게 되었고,
내가 휴가를 떠난 다음날 환자는 호스피스로 퇴원하였다.
내가 병동을 떠나기 마지막 환자와 나는,
환자에서 MRSA라는 균이 검출되었기에 배정된 격리 핼액 투석실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인턴은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순간,
나는 하나님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서라도 기도를 받기를 원하심을 느낄 있었다.  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지금 정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이 내가 병동에서 환자를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 드렸다.  환자도 괜찮다고 했다. 하나님이 환자 분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말했고,
환자분을 알게 되고 환자 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있게 되어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은 주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고난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승리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같이 일시적인 육체를 벗고 육체로 천국에서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함께 멋지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기도를 드리면서 나도 울고 환자도 울었다.
불평도 많고 힘들어했던 환자였는데,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졌다.
내가 오늘 너의 기도를,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다렸다고.

어떤 날은 환자도
아니었는데,
자기 남편을 수술장에 보내고 남편이 없는 병실에서 혼자 어쩔 몰라하고 있는 한국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다.
할머니가 영어를 못하니까 간호사가 지나가는 나를 알아보고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지금 수술장에 내려갔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실 그냥 할머니께 위로라도 해드리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너무 불안해 하셔서 내뱉은 말이 할머니 기도해드릴까요?”였다. 할머니께서 고맙죠 하시길래,
할머니 손을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하나님하는데
때부터 목이 메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임했다.
동안 목이 메어서 말을 못했다.
사실 처음 보는 할머니 앞에서 우는 모습에 내가 많이 당황했다.
할머니도 같이 우셨는데,
내가 기도하면서 나온 말이,
우리 하나님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쓰셔서 당신의 기도를 드리게 하십니까
였다. 할머니께 주님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평강이 임하길,
할아버지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간절히 구했다.  기도란 언제나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환자뿐 만이 아니라 동료 의료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마음 역시 소중하다.
의료 현장은 언제나 사역이다.
팀원 끼리 같은 영적인 호흡을 맞출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며느리 마음은 며느리가 안다고,
의사 마음은 의사가 알고,
간호사 마음은 간호사가 안다.
같은 의료인들끼리 현장에서 삶으로,  섬김으로 복음을 공유하는 축복을 유통시켜보자.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마음으로 품고 꾸준히 기도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열정을 부어주시고 기회도 만들어 주신다.  나의 경우 선배의사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던 와중 신기한 체험을 적이 있다.
선배와 전화 통화를 마치자 마자,
내가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안에 성령님이 선배의사의 영혼을 향해 깊이 애통하시는 같았다.
후로도 분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도와 대만에서 동료 의사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하나님 이야기를 기회들을  여러 만들어주셨다.

결론

결론은 이것이다. 
의료인으로서 실력과 윤리의식은 기본이다.
환자를 대할 주께 하듯 하는 섬김을 소명으로,
사명으로 인식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 의료인이라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복음으로 거듭나고 기도와 섬김으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며 의료 현장에서도 제자 만들기에 힘쓰는 복음의 군사로 白衣從軍할  , 우리는 참된 의료선교사 있다. 비로소
글의 주제처럼
Healthcare
Mission 된다.
의료가 우리의 사명이 되고,
의료현장이 우리의 선교지가 된다.


하나님이 때를 위해 나를 쓰심 (God-given opportunity)

에스더 4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른 자신의 사촌 에스더 왕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왕후의 位를 얻은 것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에 에스더는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로다 답한다. 사람이
죽다가 살아난 경우만이 기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 역시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의료인이 것은 하나님의 정말 특정한 때를 위함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일터의 작은 만남 하나 하나를 위함일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환자에게 나를 생애 마지막 문턱에서 만나는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야 한다.

한번은 응급실에서 명의 환자를
내과로 입원시키고 있는데,
환자 모두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영어를 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이 분들을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미국의사고시 시험을 보게 하시고 어쩌면 미국 필라델피아로 부르셔서 분들을 모국어로 돌볼 있게끔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나는 내가 되기 원하는 의사상을 그리며 정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심은 때를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생각이 단순해졌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직 바라옵기는 오직 한가지 우리 주님께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매일매일을 주께서 나를 때를 위해 쓰심이
아닐까
하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산다면,
크리스천 의료인에서 의료 선교사 거듭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멋진 순간들이,
섬김과 전도의 기회들(God-given
opportunity) 우리들 삶에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안상현] 유학생 사역: 첫걸음이 중요하다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계획은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사과정도 M.Div가 아닌 MA를 먼저 시작했다.

기독교 교육학으로 석사를 하기에 아무래도 사역 경험들이 필요할 것 같아 지역의 이민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좌충우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와준 교사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배려해 준 교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러던 중 한 지역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한 영혼을 바라보는 나의 영적 시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 한 영혼, 한 영혼을 말씀으로, 인내로 섬긴다고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나는 M.Div를 고려하고 현장에서의 사역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은 자연히 대학생들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당시만 해도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들에게는 당시 이민 교회들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던 때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캠퍼스 사역 역시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단은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바탕으로 그에 적절한 교회/단체등에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열정적이기 보다는 좀 차분하고 사색적이기를 바라는 성향이 많기에 그런 색깔(?)을 가지고 사역하는 단체에 마음이 끌렸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학생선교단체가 바로 IVF였다. 당시에 남가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의 남가주 지방회라는 이름으로 UCI, El Camino collge, Cal State in Long Beach, 그리고 UCLA에서 KIVF가 활동하고 있었다.

S 목사님으로 부터 접하게 된 존 스토트의 많은 책들이 내 신학적인 밭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면, 그 존 스토트가 활동했던 IVF와의 만남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요, 만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같은 대학원을 다니던 1.5세 가운데 T 형제와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연결된 계기였다. 그러나 캠퍼스 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나의 말에 보인 T 형제의 첫 반응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단 한 마디였다. “쉽지 않아요!”) 지금 돌아보면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이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캠퍼스 사역은 쉽사리 덤빌 수(?)있는 현장은 아니다. 너무 겁을 내고 두려워 뒤로 물러설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덥석 발을 담글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나 ‘지속성’의 주제와 관련하여는 더욱 그렇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오랜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T 형제의 소개로 만난 지역대표간사님이었던 H 간사님과의 만남은 그 후로도 내가 캠퍼스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는데 있어서 좋은 토대를 놓기에 충분했다. 베테랑 간사님이었던 그 분의 경험과 간사 회의때마나 나누어 주던,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직접 수리하시면서 타시던 빨간 니산 센트라 안에서 나눠 주시던 귀한 말씀들이 생생하다.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세사람, S 목사님, T 형제, 그리고 H 간사님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캠퍼스를 마음에 품으며 기도하는 수많은 미래의 동역자들, 혹은 캠퍼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역자들, 특히나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캠퍼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동역자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부족함과 훈련받아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채워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눈을 부릅뜨고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간청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이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처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등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됨을 믿는다.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 김현회



[2] 성령 세례
중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 결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강조하냐면, 다음 주제가 성령 세례인데, 성령 세례와 중생을 다르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믿고 중생했지만 아직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류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성령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는 것은, 즉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다’, ‘우리가’가 반복되는데 이 말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데, 바울이 이 성령 세례를 말할 때 바울의 의도, 요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이 오히려 교회를 둘로 나누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하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또 다른 사건으로 보는데, 어떤 신비적인 체험, 대표적으로 방언을 염두에 둡니다. 성령의 뜨거운 진동이 왔고 방언을 받았고 이런 체험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이렇게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했지만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거듭났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지체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지, 일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세례에 대한 본문이 7군데 있습니다.  모두 종합해 보면 세례에는 4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주는 자, 세례받는 자,  세례의 매개체, 그리고 세례의 목적. 이것을 요한의 물 세례에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있어서 주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받는 자는 요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세례의 매개체는 물,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  그래서 죄사함을 받기위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 세례를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배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서 주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받는 이는 믿는 우리 모두이며, 세례의 매개체는 성령,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며 성령 세례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동시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이 다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이, 어떤 측면에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함께하시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일하거나 동시적 사건이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마치 성령세례가 중생과 별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오순절까지는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성령 세계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오순절 성령사건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강림이 있자 술취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요엘로 약속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 말일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란 뜻입니다. 남녀 차별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으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는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성령이 임재하셔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는 어찌할꼬’하며 마음에 찔림을 느낍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한 찔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날 오순절날 3000명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나서 오전에 있었던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경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join을 합니다 – 오순절이 교회의 출발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무엇이냐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다 함께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받은 그룹은 2그룹입니다. 첫째로 사도들, 그리고 3000명. 그런데 두 그룹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셨으니깐 우리는 3000명에 해당되면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강림과 중생이 다르게 보이는 듯한 다른 본문은 사도행전 8장,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이 믿자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이 정말 예수 믿은 것을 확인 하고 나서 사도들이 안수하매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히 오순절과 비슷하게 두 단계죠.  빌립이 전하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이 안수했을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그런 여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것이 옳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같습니다, 다 유대인들이기에. 이 유대를 넘어서 제일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원수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면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면, 오순절이 한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 8장에서 나오는 사마리아판 오순절입니다. 그런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야만 ‘이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특별한 용어로써 Godly man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가운데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어 그곳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엔 부정한 짐승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정케한 짐승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그들을 따라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는데 오순절 사건과 같은 형태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과 이들도 똑같이 받았으니 누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유대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사마리아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너무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민족적인 장벽, 유대인과 사마리아 관계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때 거기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몰랐다’였습니다. 바울이 조금 의아해하여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성령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잘 보면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믿을 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2.믿을 때 당연히 성령을 받는다.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상했던 건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않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이전 18장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 있는 아볼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열심히 말씀을 전했지만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 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 주의 도를 자세히 일러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그가 메시아며 구세주라고 해던 것까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 문제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앞으로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 – 상속 –하나님의 상속자, 얻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Deposit/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치심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 믿는 자 안에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무슨 의미냐면, 마치 자동차를 살때 downpay를 하고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머지 것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그 새로운 세상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기 위해 우리안에 세로운 세대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3가지 – 중생, 성령 세례, 인치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출발점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사신다, 곧 내주하신다고 말, 즉 In dwelling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요즘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릇됨들이 있어서 자꾸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second class Christian인것처럼 그렇게 구분하는 건강하지 못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때 체험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것입니다. (계속)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