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예전예배의 첨단을 경험하다

지난 주말은 미시간의 그랜드 레피드에서 개최되는 칼빈 워십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설로 동부지역 대부분의 비행기가 발이 묶이는 바람에 목요일 프로그램은 하나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금요일 오전부터 토요일 낮까지 진행된 빡빡한 심포지엄 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진주를 건졌다. 아울러 CRC(기독교 개혁교회) 소속 칼빈신학교의 숨은 저력을 발견한 좋은 기회였다.

이 행사는 칼빈신학교의 존 윗트릿(John D. Witvliet)이 책임자로 있는 칼빈 워십 인스티튜트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예배 심포지엄이다. 총 1500여명이 참석한 올해의 행사에는 개 교회 예배지도자와 목회자, 강사 외에도 35개의 기독교 고등학교 학생 180여명, 새 찬송가(Lift Up Your Hearts) 자문위원 80명, 200여명의 대학생, 대표적인 예배 기관의 출판 관계자 50명 등이 참석하는 등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행사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일본, 홍콩, 중국, 베트남, 싱가폴, 네팔,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 가나, 콩고, 이집트, 케냐, 앙골라, 카메룬, 리베리아,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권, 스코트랜드,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권, 코스타리코, 구아나, 자마이카 등 중미권, 그리고 미국, 캐나다, 러시아 등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온 100여명이 넘는 외국 참석자들을 보며 모든 종족을 포용하는 행사로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이 심포지엄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유명한 워십리더와 인기 강사를 앞세워 사람을 모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심포지엄이기에 최근 예배에 관한 다양한 주요 이슈들을 발표하고 나누는 것이 그 취지이다. 둘째는 칼빈신학교의 학풍처럼 개혁교단이 오랜 전통으로 지켜오던 예전을 중심으로 최근의 문화적 현상을 성경적으로 접목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3박 4일간 총 5번의 공식 예배와 7종류의 시범예배가 있다. 공식 예배는 예전예배에 기초하지만 현대적 요소를 무조건 배재하진 않는다. 그에 비해 시범예배는 파격적인 시도들이 선보였다. 멀티미디어 예배, 시편음악의 현대적 재해석, 악기 예배, 드럼과 일랙 기타를 전통예전과 접목한 시도 등 예전예배의 첨단을 보는 듯 했다.

셋째는 심포지엄답게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사진들이 최근의 다양한 예배 이슈들을 100여개 가까운 선택강좌로 폭넓게 다룬다. 사뭇 딱딱할 수 있는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세션 등록자들의 열정과 진지함에 놀랐다. 강사 가운데 한국교회에 최근 “아트 오브 워십”이라는 책으로 소개된 저자 그렉 쉬어(Greg Scheer)도 눈에 띄었다.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올해는 종족 예배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목요일 하루 전체를 이 주제에 할애했다. 텍사스 달라스에 있는 킹스리전 단체의 대표인 김재우 음악선교사와 그 팀이 목요일 세션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최근 음악과 예배사역자들을 선교사로 인정하고 세워주는 ACT(Artist in Christian Testimony International) 선교단체에서 선교사 안수를 받고 활발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이미 ‘글로벌 워십’과 ‘종족예배음악’으로 미국 현지의 예배사역자들과 활발한 네트워킹을 해오고 있었다. 이번 칼빈심포지엄에서는 “한국 디아스포라의 예배음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고 그때 한국을 대표하는 2곡의 예배찬양으로 고형원 선교사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와 필자의 곡 “오직 주 만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동안 현대적 회중예배 관련 예배컨퍼런스는 많이 참석해보았지만 전통예전을 중심으로 예배사역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행사는 처음 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수확은 60년대에 시작된 전통예배 갱신 운동의 최신 현주소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전통을 중시하고 최근에는 예전에로의 회기를 목소리 높이는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창의적이고 국제적인 예전예배 행사에 극소수만 참여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나라와 민족, 나이와 성별, 인종을 초월하여 예수의 사랑을 나누는 우주적 종교이다. 1세기 만에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이지만 이런 국제적 예배 행사에 아무런 네트워킹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교회 유산이 전 세계 교회와 자연스럽게 통용,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나누는 그날을 꿈꾸어본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섬기게 된 학생선교단체는 소위 끈질긴 성경공부로 유명한 곳이다. 성경공부와 독서모임, 토론등을 통한 기독지성인의 배출에 초점을 두고 사역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성경공부 교재도 많이 출간되어 있었고 그 덕을 톡톡히 보곤 했다.

많은 경우 교재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교재가 기초하고 있는 성경공부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의 본문에 집중하는 성경공부를 하곤 했다. 당시 신대원을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막 배우기 시작한 성경해석학과 그것이 실제로 쓰여지는 현장에서의 성경공부의 열매들을 보면서 감격해 하곤 했다.

리더들과의 성경공부를 위해 어떤 학기는 주말 지역교회의 파트타임 사역을 마치고 저녁에 양복을 입은 그대로 학교 도서관을 찾아 공부방에서 마치 외판원이 물건 팔듯이 ^^ 그렇게 어색한 복장으로 성경공부 그룹을 인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리저리 강의실을 건너뛰며 그 날 마쳐야 하는 성경공부에 소위 목숨을 걸었다. 미국대학은 한국대학과 달리 동아리방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라고 스스로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지금도 그때 함께 수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던 학생리더들의 수고에 참 감사한다. 그런데 2-3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한가지 발견하게 된 것이 있다. 매 학기마다 그 학기에 집중하는 주제(예: 순종, 헌신, 기쁨)가 있어 설교라든가 성경공부, 심지어 2nd activity까지도 학기 주제에 맞추어 일관성을 가지고 사역하려고 한 것은 좋았는데 특히나 성경공부와 관련하여서는 그것들이 하나로 꿰어지는 연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한 주제에 대하여는 나름 올바른 이해와 해석, 적용점을 찾는데 그것이 성경전체나 혹은 복음과의 관련성을 찾지 못하는 리더들, 학생들의 어려움을 목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하이브리드(그때는 그런 용어자체가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방식을 사용하여 교재와 본문 중심의 성경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재 중심의 소그룹은 최소화하고 본문 중심의 그룹을 주축으로 삼되, 그 본문은 성경의 어떤 책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고 드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당시 집중적으로 선택한 책이 마가복음(혹은 요한복음), 에베소서, 갈라디아서였다. 우리 그룹의 특성상 2-3년이면 대부분의 멤버가 바뀌는 현실을 감안하여 캠퍼스에 머무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나름대로 내린) 결국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7:2-3에서 “영생(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는 모르더라도 복음서 하나를 제대로 공부하고 나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 대하여 대략적인 이해를 갖는 경험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 요한복음은 자그마치 1년 반을 걸려서 마친 적도 있고 멤버에 따라서는 한 책만 공부하다가 졸업하고 나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라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리더쉽에서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intention and attention principle)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캠퍼스 사역에서의 성경공부만큼 이 원리가 적절하게 요구된다고 믿는다.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여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갈수록 복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또 복음을 모른다고 젊은 세대를 향하여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복음을 접한 세대가 물려 주어야 할 영적 유산이라고 믿는다.

[이유정]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열방을 향한 노래)

작년 10월, 찬양과 경배의 밤 집회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곡을 하나 주셨다. 시편 67편 1~7절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다. 본래 이 말씀은 김진호 목사의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큰 복을 부으시네.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 비추사 주님의 구원을 온 세계에 알리소서”라는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온 세상에 그 복을 알리게 된다는 그런 이미지가 강했다. 어느 날 이 구절을 끝까지 묵상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날에 모든 열방과 민족들과 모든 땅들의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게 될 강력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열방을 향한 찬송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찬양을 작년 10월 23일 찬양과 경배의 밤 주제곡으로 정하고 예배 때마다 불렀다. 필자가 본 교회에 온지 8년이나 되었는데 공연도, 집회도 아닌 순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자체 찬양모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예배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음을 회개했다.
 
많은 이민교회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 교회도 지금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한 때이다. 금융위기의 타격으로 휘청한 이후 오랜 동안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웃교회 아니 한인교회들 가운데 우리교회가 겪은 길에 들어선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왜 영광스러운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에 힘을 잃어야 하는가? 어느 날 기도하면서 이것이 재정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전 교우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그 얼굴빛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재정의 불편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우들이 서로를 긍휼이 여기고 인애를 회복(호 6:6)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는 어느 덧 사랑이 동기가 아니라, 내가 맡은 봉사의 일과 책임감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데 익숙해져있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달려 나오는 순수함이 그립다. 내가 맡은 담당 순서, 봉사의 자리가 없어도 그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내 마음을 쏟아놓고, 겸손히 회개하고 나를 드리는 그 자리를 사모하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타고 있을 때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죄로 여기고 눈물로 기도했던 느헤미야의 마음을 품자. 그럴 때 그 얼굴빛을 비추사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빛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1절에서 왜 그냥 ‘하나님의 빛으로’가 아닌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신다고 했겠는가? 바로 그 얼굴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얼굴빛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만방에 주의 구원을 알리게 되는 것이다. 빛을 비추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게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만방 중에 알리소서’(v2)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열방을 통치하시는 주께서 황무한 이 땅을 다스리신다. 그 결과 ‘모든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v5)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v6)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v7)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제 나 자신은 물론 우리 교회가 열방을 향한 복음의 빛을 높이 드러내고, 생명을 구하는 열정이 다시 한 번 뜨거워져야 할 때이다. 예배가 살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그럴 때 교회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면 개인과 가정과 사회도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