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대재앙 앞에서

지구가 미쳤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환태평양 지진대 인근 나라들에서 지진, 태풍, 쓰나미로 수천 명에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 재앙이 이어지고 있다. 발생하는 빈도도 점차 높아진다. 3월 11일, 일본 동부는 강도 9.0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 불과 몇 분에서 수십 분 만에 들이닥친 최대 20여m 높이의 쓰나미로 동네가 떠내려가고, 땅이 갈라지고, 숲이 사라지고, 물이 치솟고, 육지가 바다로 뒤바뀌는 등 전후 최악의 자연재앙을 만났다. 그 결과 인구 수 만 명의 해안 소도시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되었다. 마을은 자동차와 배, 건물들이 처참하게 뒤 엉킨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돌변했다. 원자력발전소의 균열과 폭발로 일본열도는 물론 인근국가들이 최악의 방사능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동일본 쓰나미는 실시간 TV 뉴스를 통해 웬만한 영화 CG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참혹한 장면을 접할 때마다 ‘설마, 이것이 실제 상황일까?’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거대한 쓰나미가 평온했던 마을을 거침없는 속도로 집어 삼키는 처참한 장면은 잊지 못할 충격이다.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죽음과 사투했을 수 만 명의 절규가 머리에 스쳤고, 집과 가족을 잃고 배고픔과 추위, 슬픔으로 망연자실한 오십만 명이 넘는 수재민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시간이 없다. 나라와 종교, 정치와 이념을 초월해서 비난의 화살을 멈추고 상생의 손을 잡아야한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제발 말을 아꼈으면 좋겠다. 지금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말보다 행동할 때이다.


311 대지진은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인류 전체의 재난이다. 환경생물학의 대가이자 자신의 책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그의 최근작 《문명의 붕괴》에서 인류 문명의 공통분모를 환경파괴라고 경고했다. 과학의 발달과 전쟁 등을 통한 각종 첨단 무기들로 인해 자연계가 파괴되어 갈수록 문명은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의 대규모 자연재해들을 통해 우리는 지구문명의 한계를 어렴풋이 보고 있다. 최첨단, 초고속으로 자신만만하던 인간의 대단한 성과들이 외소하게만 느껴진다.

이번 재난이 인공구조물들의 엄청난 압력에 짓눌려 있는 지구의 지지력을 혹사하고 대자연의 인내심을 뒤흔들어 화를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세상의 종말을 예시하는 전조라는 극단론도 등장한다. 인간 문명 전체의 한계와 그 임계점을 드러낸 것으로 본 이어령의 언급은 우리 시대를 향한 묵시록처럼 들린다. 대지진이 일어난 날,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지원 의사를 적극 표명하면서 가슴에 남는 말을 했다. “오늘 사건은 우리네 인생의 토대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초라하다. 이런 때일수록 최첨단 문명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던 삶을 잠시 뒤로하고 겸허하게 인생의 궁극과 목적을 상고할 기회이다.

지난 월요일 아침, 한 교우의 부친이 소천해서 하관예배에 참석했다.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슬픔이 가득해야 할 장례예식 내내 위로, 소망, 부활, 생명이라는 단어가 끊이질 않았다. 예수 믿고 돌아가신 고인의 주검 앞에 유가족은 물론 조문객들도 뼈에 사무친 사별의 통곡 대신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신 고인의 삶을 기리는 차분함과 자제된 슬픔, 그리고 천국 소망으로 가슴이 채워졌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힘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영생이 시작되는 관문이다. 천재지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질서 있게 대처하는 일본의 시민정신도 훌륭하지만, 그 땅에 부활의 믿음이 창궐하여 세기말 재앙을 극복하는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해본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채영광] Living out The Dream (4) – “I-centered Life가 아닌 Christ-centered Life”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전편에서 계속)


외적 비교를 거부하자.
이제 ‘외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이는 남을 나의 기준에 비교하여 내가 남을 정죄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잣대를 남들에게 들이대는 것이다. 학생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데, 저 친구는 완전 불량하구나. 절대 상종해서는 안될 부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적어도 예배와 봉사는 필수 인데, 저 사람은 어떻게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자기만 알고 변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깃들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미 교만해진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나니아 연대기(Chronicles of Narnia) 저자 C.S. Lewis가 지적했듯이, 사단의 최고급 전략이다. 이러한 비교는 가장 효과적으로 은혜를 빼앗아 간다. 천사를 타락하게 하여 사단이 되게 끔 한 원인이 바로 교만이다. 내 기준이 정답이고, 나의 길이 왕도가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액세서리가 된다.  
나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을 많이 괴롭혔다. 나는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획도 열심히 세우고, 시험 전에는 나름대로 계획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여동생을 위해, 손수 공부 시간표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동생이 공부하는 것은 내 눈에 안찼다. 나의 줄기찬 지적 때문에 동생과 사이도 안 좋아졌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부 겨울 연합수련회를 다녀오고, 내 눈의 들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태도 때문에, 동생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말을 하기 전에, 기도부터 하게 되었다. 내 기준으로 동생을 평가하지 않게 된 것이 내가 받은 그 겨울 수련회의 가장 구체적인 은혜였다. 물론 동생과의 사이도 더 좋아지게 되었다.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쏟아 버리는 가장 빠른 길은 말씀을 내가 아닌 남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누구보다 우리 아빠가 들어야 하는데, 내 친구 누구누구가 들어서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영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나는 괜찮으니 이 말씀은 내 양심을 비껴가도 좋다는 자만은 더 이상 은혜를 구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 우리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만큼, 우리의 은혜는 줄어든다. 언행일치가 부족한 장로, 권사, 목사 부모님을 보면서 실망한 자녀들이 있다. 그런데 기억하자. 주님께서 판단은 내 몫이 아니라 하신다. 우리의 몫은 오직 긍휼히 여김과 기도뿐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우리를 판단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 내 주위 사람들은 변화된 나를 보고 변화될 것이다. 나의 기도를 통해 변화될 것이다. 

교만의 위력
교만이 있다면, 사실 어떠한 희생도 가능하다.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런 표현이 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는데, 내 물질을 다 팔아 구제하고, 또 어떻게 내 몸을 다 내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간단하다. 교만이 있으면 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이 한 몸 희생해서 한 사람을, 아니 세상을 살린다는 신념이 있으면 된다. 내 것을 다 내어줄 때, 돌아올 남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대수롭지 않다. 나의 헌신으로 내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손해볼 수 있다. ‘내’가 받을 영광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될 때, 우리 주님이 거할 곳이 없어진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도, 구제와 봉사가 가능한 까닭이 여기 있다. CSR (Coope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말이 유행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이윤이 존재의 근간이 되는 기업은 CSR이 기업 이미지 홍보 전략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사회 봉사를 하는 기업을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은혜로 교만을 넘어서자.
기억하자. 우리 주님은 우리 중심을 보신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쁘게 하랴 주님께 기쁘게 하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잊지 말자.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흘려 보내는 생명의 통로, ‘Life Line’이다. 그 사랑을 공급받아, 하나님 주신 힘으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온전히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앞에서 나는 내 안에 선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내 안에는 나를 높일 것이 없다. 은혜의 토양에서는 교만이 싹틀 수 없다. 은혜의 십자가 앞에서는 판단과 정죄가 없다. 

비교의 영의 배후, 자기 사랑
지금까지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비교의 배후에는 ‘자기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질 때, 나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우월감과 교만함을 느낄 때 공통적으로 우리의 초첨은 ‘나’에게 있다. 내 기준에 의해 남이 나보다 잘났고, 나보다 못난 것이기에 그렇다.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의해 내가 나를,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우울한 것은 내가 이 정도는 대접받아야 하는데,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 기대치가 충족되지 못해서 그렇다. 내가 우쭐한 것은 내 기준으로 볼 때, 내가 남보다 특정한 부분에서 낫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 스스로 대견해서 그렇다. 내가 남을 부러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내 기준으로 나보다 낫고, 내 기준으로 나보다 못하기에 그렇다. 이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세운 기준은 내 안의 ‘자기 사랑’, ‘자기애(自己愛)’에서 나온다. 나 정도 되면,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는 생각, 세상은 나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나는 남들에게 이 정도 사랑은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고생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 등등,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자기애적인 틀 안에서 살고 있다. 사실 친구들끼리의 다툼, 부부싸움도 내 ‘자기애’가 상처 입고 느끼는 서운함에서 생길 경우가 많다. 내가 너에게 잘 해준 게 얼마인데, 나보고 더 이상 어쩌라고, 너는 내가 어떨지 생각해보았냐고, 그렇게 외치면서 우리는 싸운다. 이 문장들 속에서 ‘나’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나’만 중요하다. 주님이 없다. 내가 상처 입으면, 내가 운다. 내가 치켜져 올라가면, 내가 웃는다. 내가 짓밟히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손해보고 살 수가 없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자기 사랑’이 내 삶을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보자. 

자기 사랑의 죄와 내 안의 그리스도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Self-Idolatry 이다. 주 앞에서 나아가 이 죄를 내려 놓아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만 내가 온전한 크리스천이 된다. 작은 예수가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첫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다른 이들이 나를 비방할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래서 내 자아가 살아서 꿈틀거릴 때, 이 구절을 떠올리자. 시체는 흥분하지 않는다. 시체는 상처받지 않는다. 성경은 앞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한다고 증거한다. 내가 중요해질수록 예수님의 자리가 없어진다. 예수님이 초라해진다. 질그릇 안에 보화, 그리스도의 빛이 사라진다. 

‘나’에서 ‘그리스도’로의 초점 이동
이제는 ‘나’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I- centered Life가 아닌 Christ-centered Life로 돌아가자. Is it all about me? Is there a place for Jesus?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의 꿈이 설 자리는 없다. 내 상처를 묵상하면, 남는 것은 우울증과 홧병이다. 나의 문제에 골몰하지 말고, 그럴수록 남의 문제 풀기에 앞장 서자. 내가 코가 석자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내가 공부할 것 다하고, 돈 벌 것 다 벌고, 봉사하겠다는 사람치고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삶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속한 가정, 학교, 직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 상처를 확대에서 보기 시작하면,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자매, ‘Hug: Life without limits’의 저자 닉 부이치치도 각자 전신 화상과, 선천성 사지말단증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 하나로 감사히 오늘을 살고 있음을 또한 고백하고 있다. 내가 받은 고난이 나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상처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다. 
더 이상 자기연민(self-pity)을 거부하자. 냉소주의 (cynicism)도 거부하자. 깨어진 마음을 붙잡고 일어나자 (Stand up with a broken heart). 사람을 의지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자.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자. 빛 공해(light pollution)이라는 말이 있다. 도시에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많아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안에, spot light들이 내가 받은 여러 가지 모양의 상처들을 비추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spotlight없이도 빛 나아야 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포도원 이야기에서 얻은 깨달음 
해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다.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비유가 있다. 바로 천국을 포도원에 비유한 예화이다. 마가복음 6장 9-10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을 찾으러 다녔다. 주인은 일군들을 계속 찾으면서 데려와서는 하루 종일 일한 자와 한 시간 일한 자 모두 같은 하루 품삯 돈을 주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써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는가?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이 천국이라면, 가기 꺼림직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자격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나서부터, 하루 종일 일한 자 역시 주인의 은혜가 아니면, 일할 기회도, 품삯도 주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은혜인데, 나 같이 부족한 인간은 또 비교를 통해 은혜를 불만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구나 생각했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 나 스스로를 하루 종일 일한 자와 당연시 하고 있었다. 내가 막판에 한 시간 일한 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영적 교만’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가? 내 친구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면 속이 쓰린가? 예수님은 자기 옆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회개를 듣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같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불편한가? 인육을 먹고 살인의지를 다졌다는 지존파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천국에 갔다고 하면 그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나의 마음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 속의 형의 마음과 같다. 아버지 재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가 버린 둘째 불효자식이 다 망하여 집에 돌아오자 얼싸 앉고 춤을 추며 기뻐하는 아버지를 첫째 형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형은 아버지 옆을 지키며 집안 일을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아버지가 둘째 때문에 오버하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에게는 첫째,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없었고 둘째,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했기에 쉽게 비교의 덫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귀환을 기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내 영적 상태가 이 형의 상황과 같지는 않은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해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런데 또 한번의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부모님의 자녀 사랑이라고 했다. 만약,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아버지이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아들이거나 딸이었다면, 불평이 나올 수 없다. 오히려 주인에게 한 없이 감사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아버지의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게 되고 감사히 여기게 되겠구나. 비교의 영이 스며들 틈이 없겠구나. 바울은 우리 안에, 이 아버지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말한다. 이 깨달음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포도원의 이야기를 주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 보았다. 하루는 지나가는데, 일군을 한 명이라도 더 부르기 위해, 거리로 급히 뛰어나가신 그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셔서 해가지지 전에 동일한 품삯을 줄 테니 포도원으로 같이 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포도원은 포도를 생산해서 팔 아서 이윤을 얻기 위한 곳이 아니구나.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기 위한 곳,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기 위한 곳이구나.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 일터에서, 이웃을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포도원 주인의 마음으로 섬겨야겠구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음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