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2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2


 


     앞의 글에서는 빈 라덴의 죽음을 계기로, 과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진행된 미국의 비밀 작전의 역사와 영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역사의 의미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함의의 살펴보려고 합니다. 냉전기 미국의 개입과 그 결과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라는 정치학자의 ‘블로우백(Blowback)’입니다. 블로우백은 원래 CIA 내부 용어로, 비밀 작전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해로운 결과가 아군에게 미치는 것을 설명하는 단어였습니다. 찰머스 존슨은 이 개념을 통해, 비밀리에 진행된 CIA 작전이 결국 9.11테러와 탈레반, 알카에다의 형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합니다. , CIA가 미국의 필요에 따라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아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이 결국 9.11테러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는 일종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입니다.[i]
                                              찰머스 존슨과 그의 책 ‘블로우백’


     9.11테러가 발생한 후, 당시 부시 대통령은 그들은 왜 우리를 증오하는가 (Why do they hate us)?”라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증오한다 (They hated our freedom)”이라고 스스로 대답을 했습니다. , 9.11테러 공격은 선을 상징하는 미국이 누리는 번영과 자유를 시기한 악의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며, 테러와의 전쟁은 선악간의 투쟁이라는 말이지요. 이에 대해 찰머스 존슨은 앞에서 소개한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를 증오하느냐구요?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파월, 아미티지, 1980년대에 아프간에서 역사상 최대의 비밀 작전을 수행했던 그들이 아주 자세하게 답해줄수 있을 겁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노리에가나 후세인 처럼 한때 미국의 가까운 협조자로 있다가 이제 공공의 적이 된 인물들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ii]


     모션캡쳐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베오울프(2007)를 보면, 영웅 베오울프는 괴물을 물리쳐 왕의 자리에 오르고, 외적과 괴물로 부터 왕궁을 지키는데, 결국 왕국을 위협한 최후의 괴물은 전쟁의 과정에서 베오울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를 비유로 사용한다면, 소련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죽이기 위해 미국은 작은 괴물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이제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과거 범죄조직의 일원이었다가 손을 씻은 후,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과거의 인물들이 찾아오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폭력을 사용해 악당들과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은연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성이 전염되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역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 읽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베오울프(2007)’
                                                     영화 ‘폭력의 역사(2005)’


     물론 테러의 원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책임이 미국에게만 있다는 주장도 당연히 지나친 생각이겠습니다. 미국의 정책과 상관없이도 반미감정을 내세우고 테러를 일삼는 집단이 나타날 수도 있겠고, 헌팅턴이 주장 했듯이 지하드와 같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영향도 중요한 요소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테러와 반미감정의 일정부분은 과거 미국이 냉전기에 뿌린 씨앗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국의 한 복음주의 목사님이, 기독인으로서 누군가가 죽은 것을 기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만,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빈 라덴은 자신이 뿌린 악의 씨앗의 열매를 거둔 것이며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빈 라덴이 수천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9.11 테러의 주범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는 미국에도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미국이 경험하고 있는 국제관계상의 문제들, 특히 테러와 반미감정은 상당부분 냉전기에 미국이 뿌린 씨앗의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는지 몰랐을 지라도 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할 때의 일인데, 같은 사무실에 있던 나이가 많으신 미군 특무상사 (Sergeant Major) 한분이, 9.11테러 이후 아프간 전쟁이 한창이던 2002년 경 제대를 해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분과 우연히 함께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분은 자신이 80년대에 아프간에서 스팅어미사일 교관으로 무자헤딘을 훈련시켰었다고 하면서, 그 무기로 지금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미군을 공격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럴수가 있냐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그럼 극단주의 무슬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후에, 소련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손떼고 떠난 미국의 정책은 잘한 것인가 묻고 싶었죠.


 


     물론 이런 비판은 미국안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고, 까딱하면 반미주의자나 극단주의자, 혹은 비미국적인 발언으로 공격받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내부 경선 주자 중 한명이었던 하원의원 론 폴(Ron Paul)은 미국 내에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몇 안되는 정치인중 하나인데, 미국의 무분별한 해외 개입을 중단해야한다는 입장에서, 위에서 말한 찰머스 존슨의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아프간전과 이라크 전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뉴욕시장이었던 루디 줄리아니를 비롯해서 다른 후보들은 그렇다면 9.11 테러의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냐그런 발언은 비미국적이고 용납할수 없다고 펄펄 뛰며 론 폴에게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iii] 


 


     조지 부시를 비롯해서 미국 보수인사들이 보이는 중요한 특성이, 반성적 사고가 부재하고, 쉽게 미국 스스로를 으로 미국의 적을 으로 등치시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기독교적인 수사들을 들으면 언뜻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지만, 결국은 성경적인 생각도 아닐 뿐더러, 복음전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가져옵니다. 사실 성경은, 외적으로 행해지는 악도 있지만, 내적 반성이 없이 스스로 선을 자처하며 문제를 외부로 돌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하라고 하는 태도 자체가. 더 심각한 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절한 비판을 보면 이를 잘 알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미국 남부에서 상당수의 보수 기독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미국 역사의 어두운 면들 인디언 학살, 흑인 노예제와 인종 차별, 베트남 전쟁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 등등 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알아도 반성적 사고가 없이 무조건 미국은 옳았다라는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서 깊은 실망감을 느낀적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과 반성적 사고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 테러리즘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결정에 결정적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결국 테러리즘을 포함한 국제 갈등의 원인을 문화와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서, 이슬람 문화와 종교의 폭력성에 테러의 근본 원인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반드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중요한 요소들인 과거 미국의 외교정책에 오점들, ,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원의 문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패권정책, 중동국가들의 비민주성과 그러한 독재정부와 미국의 유착관계 등을 간과하는 것이 상황을 심각하게 오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경우 단순화는 쉬운 답을 제공하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화된 사고와 신학이 끼치는 폐해들을 우리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



                                              헌팅턴 교수의 책 ‘문명의 충돌’
     그동안 중동에서의 미국의 정책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목표들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석유를 확보해야 하고, 또한 미국의 최우선순위인 이스라엘의 이익과 안보를 보장해야 하고, 이러다 보니, 실제로는 수많은 독재정부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 미국의 가치(민주주의, 인권, 경제발전)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미국의 이익(냉전에서의 승리, 석유이익확보, 이스라엘 지지, 테러와의 전쟁)이 더 중요했고, 이러한 괴리는 아랍인들에게 심각한 환멸과 반미감정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부시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알카에다와의 연계가 발견되지 않자, 후세인이 독재정부이기 때문에 침공이 합리화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미국은 자신의 다른 동맹국들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 이집트, 요르단, 쿠웨이트 등등도 침공해 민주화를 시켜야 했겠죠. 앞에서 말한대로, 파키스탄은 최근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긴 했지만, 군부와 ISI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재국가에 가깝고 테러와의 전쟁 내내 쿠테타로 집권한 무샤라프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최악에 가깝고 일종의 중세시대에 가까운 상황인데, 정당이나 헌법조차 없을 뿐더러, 여성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개종을 하게 되면 국가가 목을 베거나 국외로 추방할 권리가 있을 정도 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많은 기독인들이 이제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라크 전쟁은 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우디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우디가 최대의 산유국이고, 유가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석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기로 합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은 중동의 안정과 이스라엘의 안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의 독재정부를 지지해 왔습니다. 이집트에서 시민들이 무바라크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을 일으켰을 때 미국이 이를 선뜻 지지하지 못한 이유이지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한 점령정책과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함으로서 아랍인들의 공분을 사 왔습니다. 결국,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근본 원인이라는 헌팅턴의 주장은 단순한 설명을 원하는 미국인들에게 쉽게 지지를 받고, 과거의 정책에 대한 불편한 양심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테러리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듭니다.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일종의 거짓선지자인 셈이지요
 


     사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조직이 중동의 시민들의 삶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가 뭐가 있습니까? 말 그대로 공포(Terror)와 분쟁만을 안겨주었을 뿐이고, 아랍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고, 진정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가로막은 역할 밖에 한 것이 없지요. 예를 들어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중동에서도 시민혁명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테러리즘은 힘과 지지를 잃어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상당히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iv]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즘이 이제까지 지속 되어 온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내재한 모순으로 인한 반미감정이 워낙 극심하고, 그것이 테러리즘에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왜 그러한 반미감정이 일어나는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청난 무기와 첩보전을 통해서도 테러리즘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빈 라덴이 사살 된 후, 미국 언론에서 진행된 또 하나의 논쟁은 바로 고문의 효용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특히 폭스 뉴스를 비롯한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오바마가 정치적으로 유리해진 상황을 못견디고, 이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는데, 특히 과거 부시정부의 인사들을 불러다가 고문을 허용했던 것이 빈 라덴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전 부통령 체니, 전 국방부장관 럼스펠드, 그리고 법무부에서 일하면서 고문과 관련해 법률조언을 했던 버클리대 법과 교수 존 유 (John Yoo)등을 불러다가 인터뷰를 했는데, 특히 존 유 교수는 아부그레이브와 관타나모 기지에서 고문이 허용되도록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테러리스트에게는 제네바 협정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최근 폭스 뉴스의 마이크 허커비 쇼에 출연한 그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비난을 받았지만, 고문의 효과가 빈 라덴의 사살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했고, 호스트인 허커비도 고문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인 존 유 교수가 고문이라는 국제법에도 위반되고 인권을 유린하는 정책을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안타깝고, 아무리 보수인사라지만 남침례교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인 허커비가 자신도 고문의 중요성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v] 같은 보수 정치인이긴 하지만, 베트남 참전시 포로가 되어 5년동안 잡혀서 고문을 경험했던 존 메케인은 다행히도 고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습니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유교수의 사진



                 존 유 교수를 전쟁범죄로 기소해야한다고 비난하는 시위자들의 모습


     고문이 빈 라덴의 위치 파악에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고문이 도움이 되었다면, 부시 정부는 두번의 임기가 끝나도록 왜 빈 라덴을 잡지 못했고, 이라크 침공을 비롯해 왜 그렇게 처참한 정보의 실패를 거듭했는가에 대답을 해야하겠죠. 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주었더라도 그런 방식을 통해 과연 테러리즘을 해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엄청난 군사력에도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라크전쟁에서도 수렁에 빠저 헤어나오지 못하고 제2의 베트남전이 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모두가 정당성(legitimacy)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소련과 구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진 것을 보면, 고문과 도청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정당성이 없는 싸움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잘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정당한 목적과 더불어 정당한 수단이 도입되어야 장기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을 보면 이스라엘 특수조직이 검은 구월단의 테러에 보복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의 지도자들을 역시 테러를 통해 암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결국 테러는 테러를 낳을 뿐이며, 암살된 테러 조직의 지도자들은 더욱 악독한 인물들로 교체되고, 테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뮌헨(2005)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이 오늘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된 것을 살펴보면, 손쉬운 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한 불법적인 수단들은 결국 언젠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냉전기에 공산주의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정당성이 있었지만, 그 목적이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고, 오늘도 테러리즘을 저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니체는 괴물과 싸울때는 당신이 괴물과 닮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사단의 시험도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정당성을 이야기 하면 현실주의자들은 순진한 이상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책이나 전쟁이라도 정당성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당성이 국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담보하고, 국제적으로 동맹국들의 지지를 담보하며, 분쟁 지역에서 현지인들의 지지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전 이후 미국인들도 “winning hearts and minds”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배우게 되었죠. 이러한 정당성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정치와 관련된 논의를 들어보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요, 많은 미국의 기독인들도 하나님이 아닌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우상으로 섬긴다는 것은 번영과 안보가 궁극적 가치가 되어 다른 가치들과 충돌할때 최우선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문도 괜찮고 도청이나 납치, 암살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정의보다 국가 안보가 중요하다는 말외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다소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하면, 기독인들 중에서는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꽤 있으실 줄 압니다. 흔히 미국에 대한 입장은 친미냐 반미냐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갈라지는데, 저는 미국이 하는 것은 언제나 옳고 정의로우며 미국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친미, 그리고 미국이 곧 모든 악의 근원이며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반미도 기독인의 입장이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한다면, 벌써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지요. 기독인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거리를 두고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에서 지지할 것은 지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일치한다면 좋은 일이겠는데, 그 두가지가 충돌할 때, 우리가 국가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아닌 국익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절대화를 상징하는 금신상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 처럼, 모두가 옳다고 믿는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인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도해 봅니다. 설령 단기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목적과 수단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 정의와 생명, 평화의 길이라는 것이 성경과 역사가 말하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나오며


 


      빈 라덴이 사살된 것으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빈 라덴의 죽음 자체에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은 것은, 이제는 빈 라덴 개인이나 그의 죽음 자체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빈 라덴이 더 이상 테러를 계획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기독인으로서 한 개인의 불행한 죽음을 축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의 그를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로 즉결 사살 한 방식에도 문제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 이후 공포심을 이용해, 정당성 없는 이라크전쟁을 밀어부친 부시 정부가 거짓말로 점철된 임기를 보냈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빈 라덴을 추적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오바마가 상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바 대로, 드러난 현상인 테러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과거 정책을 반성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비롯한 중동의 평화와 민주화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테러리즘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i]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25



[ii] 2004년에 버클리대에서 진행된 찰머스 존슨의 인터뷰(Militarism and the American Empire)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OjYteh-ZRs )



[iii] 2007년에 진행된 폴과 루디 줄리아니간의 토론은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cQrwKr_b4Lg )



[iv] 지난 5 5 CNN 에서 진행된 마이클 무어의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CkOSgSsNXwM )



[v] 허커비와 교수의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video.foxnews.com/v/4683623/huckabee )

[이인엽]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1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이번학기에 박사과정 종합시험이 있어서 연재를 한참 쉬다가 오랫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이번에는 최근에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빈 라덴 사살과 관련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1


 


     지난 5 1일 오바마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했고, 뉴스에서 연일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백악관 앞에서는 수백명이 “U.S.A.”를 외치는 등, 많은 미국인들이 이에 대해 환호를 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2001년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 테러로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D.C.의 펜타곤 등이 공격당하고 약 3천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들의 이러한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과연 빈 라덴의 죽음과 지난 10년간 진행되어 온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고, 답하기 힘든 질문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일지라도, 기독인의 입장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리고 체포후 법정에 세워서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닌, 당시 비무장이었던 그를 일종의 암살에 가까운 방법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이었나, 또한 근본적으로 미국은 선이고, 테러리스트 혹은 이슬람을 악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 테러리즘의 원인은 무엇이고 현재의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과연 테러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이슬람권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인가 등등의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질문에 다 답하기는 불가능 하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빈 라덴이라는 인물의 과거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빈 라덴 사살을 발표하는 오바마 대통령
                                          빈 라덴 사살을 다룬 타임지 표지 사진



                빈 라덴 사살 발표이후 백악관 앞에 모여 환호하는 미국 시민들 (연합뉴스)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입차원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두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빈 라덴을 포함해 9.11에 가담한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90%이상)의 국적이 어디냐는 질문이고, 두번째는, 빈 라덴이 살해된 지역이 어디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문제의 답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비교적 쉬운 질문이지만, 미국에서 진행된 설문조사 (Program on International Policy Attitudes Survey)에 따르면 불과 설문자의 27%만이 답을 맞췄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중 하나이며, 미군이 엄청난 규모로 주둔해 있는 국가인데, 9.11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이 이라크나 이란, 아프가니스탄 같은 반미 국가, 혹은 소위 불량국가 출신이 아닌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라는 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번째 질문의 답인 빈 라덴이 발견되고 살해된 지역은, 최근 뉴스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산간지역이 아닌,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불과 38마일 떨어져있고 파키스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아보타바드(Abbottabad)라는 부유한 교외지역이었습니다. 파키스탄 역시 미국의 동맹국으로,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중요성 등으로 인해, 미국에서 해마다 10억 달러 이상씩의 엄청난 원조를 받아왔는데, 이 사건 이후, 자기네 수도 근처에 빈 라덴이 살고 있는 것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요, 빈 라덴을 숨겨주거나 묵인해 왔다면 동맹관계를 배신한 행위라며, 미국은 파키스탄을 엄청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CIA 국장 레온 파네타는 최근 미 하원에서 빈 라덴의 은거지 위치로 볼 때, 파키스탄이 “정말 무능하거나 아니면 빈 라덴에 연루되어 있다(either incompetent or involved)”고 볼 수 밖에 없고, 둘 중에 어떤 경우든 심각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어떻게 빈 라덴은 파키스탄의 수도 근방에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하는 가를 살펴봐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를 소련이 아프간을 통과해 중동의 석유에 접근하고 부동항(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을 확보하고자 하는 ‘팽창 전략’으로 해석하여, 당시 카터 대통령은 유명한 ‘카터독트린(외부세력이 페르시아만을 통제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필요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막겠다는)’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련을 약화시키고 아프간에서 철수하게 하기 위해 79년부터 3천만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사이클론 작전(Operation Cyclone)’을 시작하였고, 1985 3월 후임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 결정 명령166호에 서명하여 지원액을 25천만달러로 늘렸고, 2년 뒤인 1987년엔 63천만달러까지 증액하여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지원이 총 10년간 지속됩니다. 그 기본 전략은 파키스탄 정보국인 Inter-Services Intelligence(ISI)를 통해 근본주의 이슬람세력인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해 소련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대통령 카터(오른쪽)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운데), 그리고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왼쪽)


                            전 대통령 레이건(왼쪽)과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 (오른쪽)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초청해 백악관에서 대화하는 전 대통령 레이건



     
이에 따라
1986 1992년 사이 10만명이 넘는 이슬람 전사들이 CIAMI6(영국 첩보부)의 감독하에 파키스탄에서 훈련받았고 영국 특수부대 SAS는 미래의 알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쳤으며, 무자헤딘 고위 지도자들은 버지니아에 있는 CIA캠프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우디에서 온 빈 라덴을 포함, 전세계 43개국에서 온 35천명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아프간 무자헤딘과 함께 싸웠고, 수만명의 새로운 자원자들이 ISI CIA가 후원하는 파키스탄의 마드레사(이슬람학교)에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재정과 스팅어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들이 지원되어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았는데, 예를 들어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스팅어미사일을 쏠 때마다 거의 70%의 확률로 소련 헬기와 비행기들을 격추시켰고, 한발에 6~7만달러 하는 스팅어 미사일로 소련군에 거의 2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결국 소련은 14,427명의 군인, 118대의 전투기, 333대의 헬기와 다른 엄청난 손실을 입고 아프간에서 철수하였고, 이는 소련의 붕괴에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카터정부의 국가안전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1998년 프랑스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에서 수행한 미국의 비밀작전은, 소련을 미국의 베트남전에 비견되는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 뛰어난 아이디어였다고 자랑한 바 있습니다. [i]


 





                                          대 소련 투쟁 당시 무자헤딘 게릴라들 
                                      미국이 지원한 스팅어 미사일을 사용하는 장면 

      당시 미국의 최우선순위는 냉전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에, 소련을 약화시키고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이었던 무자헤딘은 미국 언론에서 아주 호의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은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서 외부 침략자들에 저항해온 용맹한 전사들로 그려지고, 반면 소련군은 엄청난 무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저항세력을 토벌하는 잔인한 침략자로 묘사됩니다. 한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실베스타 스탤론의 영화 람보III(1988)’는 베트남전에서 활약했던 람보가 아프간에 가서 무자헤딘을 도와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심지어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영화를 용감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바칩니다(This Film is dedicated to the gallant people of Afghanistan)’라는 헌사가 나올 정도입니다. 오락영화이긴 하지만, 당시 아프간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2007년에 나온 영화 찰리윌슨의 전쟁(Charlie Wilson’s War)’을 보면, 플레이보이면서 냉전의 전사였던 하원의원 찰리 윌슨이 어떻게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적 국제적 수단들을 동원해 활약하는지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CIA는 무자헤딘 게릴라의 사기를 진작을 위해 코란 수천권을 인쇄해서 배포할 정도였습니다.[ii] 지금의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인데, 쉽게 말해 소련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작전은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미국 국민들 대부분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됩니다.


 





                                 영화 람보III (상), 영화 찰리윌슨의 전쟁 (중),
                     무자헤딘들과 함께 촬영한 하원의원 찰리윌슨의 실제 사진 (하)

      문제는 이러한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과격파 이슬람으로서의 무자헤딘 게릴라의 성격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파키스탄의 ISI를 대리인으로 사용하면서 ISI가 다른 목적을 위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무자헤딘 지도자 중, 굴부딘 헤크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 같은 인물은 유명한 6개의 헤로인 공장을 소유한 마약거래상이자 가장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이슬람 군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하원의원 찰리윌슨과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 등이 ISI에 수억달러의 지원을 보낼 때, 그 지원금의 거의 절반을 받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CIA의 윌리엄 케이시는, 전쟁을 아프간을 넘어 소련까지 확대시키고자 하는 헤크마티아르의 극단적 성향으로 인해, 그를 특별히 선호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iii]


 


          전 CIA 부국장 리차드 커(오른족)와 함께 한 헤크마티아르(왼족). 1988년 이슬라마바드


      이러한 미국의 비밀 작전에서 마약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는데,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재정지원과 더불어, 상당량의 자금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CIA가 정부로 부터 받는 예산은 의회에 감사와 보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불법적이거나 비밀리에 수행되는 작전들에 사용할 수 없고, 따라서 외부 예산을 확보하는데, 여기에 마약이 중요한 재정공급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베트남전 당시 Air America 항공을 통해 마약을 해외로 운송했는데, 이는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2007)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습니다. CIA 작전이 시작된 지 2년 안에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역은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지역이 돼 미국내 수요의 60%를 공급했고, 파키스탄에서 헤로인 중독자는 1979년 사실상 전무했으나 1985년에 12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무자헤딘이 승리했던 1986년경 아프간은 전세계 헤로인의  40%가까이를 생산하고 있었고, 1999년에는 80%를 생산할 정도였습니다. 1995년에 전직 CIA 아프간 담당자 찰스 코건(Charles Cogan)은 마약거래가 소련을 철수하는 주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부산물로 어쩔수 없이 나타났다고 합리화 했는데, 결국 마약 자금이 CIA작전에 중요하게 사용되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iv]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파트너로 선택한 북부동맹의 군벌들 역시 마약왕들이었고, 2009년 경에는 전세계 아편의 93%가 아프간에서 생산되었고, 현재 아프간 정부 내 정치인들과 고위층들도 공공연히 마약거래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현 대통령 카르자이(Karzai)의 친동생인 아흐메드 왈리가 바로 칸다하르를 지배하는 통치자이며 아프가니스탄의 ‘마약왕’이며 CIA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CIA ISI의 지원을 받은 헤크마티아르는 또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아주 가까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v] 오사마 빈 라덴이 CIA에서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느냐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결국 그도 미국의 지원 하에 치러진 아프간전쟁의 와중에 성장하고 적어도 간접적 지원을 받은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빈 라덴 개인도 중요하지만, 파키스탄의 ISI, 탈레반, 알 카에다의 동맹 관계가 결국 냉전기 미국 패권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 주목해야할 사실입니다.


 


      미국이 직접 지원이 아닌, 파키스탄의 ISI를 중개자로 해서 비밀리에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은 소련의 파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는데, 여기서도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파키스탄은 이 비밀작전에서 얻은 자원과 경험을 자신의 적대국인 인도와 싸우는데 이용했고, 카슈미르 등의 분쟁지역에서 아프간전쟁에서 체득한 게릴라 전술을 활용했습니다. 또한 파키스탄 군부와 ISI는 무자헤딘을 교육하면서 이슬람을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으로 가르치고, 무신론자인 소련 정부에 맞서 지하드를 일으키며 소련의 해체와 구소련 국가들에서의 무슬림 공화국 건설까지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교육했습니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아프간 전쟁 이후에도 소련의 해체와 중앙아시아 지역 6개 무슬림 국가 건설을 지원하고 개입한 바 있습니다. 파키스탄 내부에서도 CIA ISI의 관계는 지아 울 하크 장군(Zia Ul Haq)이 부토 총리를 쿠테타로 축출하고 세운 군사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결국 파키스탄 내에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권력집단이 된 ISI와 파키스탄 군부는, 현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과 민간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실질적인 파키스탄의 실세가 되어있고 핵무기도 이들의 통제하에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80년대에 미국의 지원하에 무자헤딘 네트워크와 극단주의 이슬람운동이 급속히 성장하자, 파키스탄의 전 총리였던 부토 여사는 미국을 방문했던 1989년 당시,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에게 당신들은 지금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경고할 정도 였습니다.[vi] 다시말하지만, 냉전기 미국의 비밀작전을 진행하면서 형성된 파키스탄 ISI  탈레반, 알카에다간의 견고한 동맹관계는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네트워크가 되어 버렸고, 오늘 미국이 골치를 않는 테러조직의 뿌리가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vii]


 
      아프간과 관련된 또하나의 정책 실패는, 소련이 철수하자 마자 미국이 아프간에서 즉각적으로 관심을 잃고 손을 떼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무자헤딘과 아프간을 소련을 패배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아프간의 미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련의 지배는 60만에서 2백만에 가까운 아프간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갔고, 5백만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습니다. 89년 소련이 철수하자 놀라운 승리를 자축했지만, 미국은 전쟁으로 찢겨진 아프간에 대해서는 이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무자헤딘에 대한 재정지원과 파키스탄의 난민 지원을 바로 끊어버렸고, 아프간 사회의 재건을 위한 진지한 지원은 전무했습니다. 1992년 마침내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책임을 넘기고 아프간에대한 모든 개입을 종료했습니다. 아프간이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와 관심에서 사라진 후, 아프간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소련이 떠나고 난 후, 통합된 리더쉽의 부재는 다양한 무자헤딘 파벌간의 권력쟁탈전을 낳았고 군벌들의 난립과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예로 1994년에만 수도 카불에서 만명 이상의 인명이 사망했고, 마침내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극단적 이슬람 세력인 탈레반(Taliban)이 카불을 장악하고 근본주의 이슬람국가를 설립해 200년에 95%의 국토를 장악하게 됩니다. 탈레반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단 세나라중의 하나가 파키스탄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겠지요.


      알카에다(Al-Qaeda)는 빈 라덴과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이 파키스탄 페샤와르(Peshawar)에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외국인 출신의 무자헤딘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Maktab al-Khidamat)에서 유래합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후 미국에 의해 소위 자유의 투사라고 불리었던 이들은, 1991년 사우디의 이슬람성지인 메카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사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미국의 중동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이제 서방세계를 향해 테러를 시작합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에 폭탄 테러를 하고 CIA 요원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93년 이들의 폭탄 테러에는 과거 무자헤딘 게릴라들을 위해 쓰여졌던 CIA의 폭파 교본이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viii]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이지요. 여론이 악화되자 알카에다 본부를 제공하고 있던 수단은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알카에다는 마침내 과거 대소련 투쟁의 동지였던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본부를 옮기게 됩니다. 1998 8 7일 알카에다는 동아프리카의 미대사관을 공격하고, 2001년 마침내 9.11 테러가 발생합니다.


 
                                                          2001년 9.11 테러



     
9.11을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테러가 일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적으로 달라지는데, 소련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영웅적 전사들에서, 인권을 유린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마약거래를 일삼는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미국이 이들을 지원하던 80년대에부터 동일하게 존재했던 문제들이고, 단지 냉전하에서 소련과 싸우는 미국의 필요에 의해 감춰져왔을 뿐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유명한 노암 촘스키는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가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온갖 범죄행위들을 눈감아주다가, 독자노선을 가기 시작하고 파나마 운하에서 미국의 이익에 위협을 가하자, 바로 그를 깡패이자 마약장사꾼으로 비난하고 결국 침공해서 체포했다는 것을 예로 드는데, 사실상 그는 CIA 고용되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담 후세인도 이라크 전쟁시는 악당중의 악당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 80년대에 이란-이라크 전쟁시, 이란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미국은 후세인을 지지해 무기를 지원했었는데,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후세인은, 전쟁 후에 석유기업을 민영화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시작한 후부터, 비난 받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 가르시아(Somoza Garcia)에 대해 했다는 다음의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 합니다. “He may be an S.O.B., but he’s Our S.O.B.” 외국의 지도자가 독재자냐 아니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미국의 이익에 합치하느냐라는 것이지요. 결국 미국 외교정책의 가치판단과 윤리는 상당부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쉽게 조작될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1983년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과 악수하는 젊은 시절의 럼스펠드. 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시 미국은 이란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라크를 지지하고 무기를 판매하였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빈 라덴이 파키스탄 수도에서 가깝고 군부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아보타바드에서 발견된 것에 대해, 최근 미국 정치인들과 언론은 엄청나게 분개하면서, 파키스탄내에 빈 라덴을 지원한 세력이 있다며 파키스탄 때리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군부대까지 있는 파키스탄 수도 근처에서 빈 라덴이 5년이상 은거하고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는 파키스탄 내의 지원세력이 있다는 것(아마도 군부와 ISI내에 협력세력)이 거의 분명하겠지요. 이전에도 빈 라덴 이외에 상당수의 알 카에다 고위 지도자들이 파키스탄 영토 내에서 체포 된 바가 있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아흐마드 슈자 파샤 (오른쪽 끝) ISI 부장과
                            마이크 멀린 (왼쪽 끝) 미 합창의장 (사진: 한국일보)



      결국 9.11테러의 주범인 빈 라덴을 동맹국인 파키스탄의 어떤 세력이 숨겨주었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이제까지 살펴본 80년대 미국의 비밀작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파키스탄 ISI를 통해 80년대에 무자헤딘을 훈련하고 무장시킨 것은 사실 미국이라는 것, 그리고 무자헤딘의 후신으로 나타난 것이 알카에다와 탈레반이라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지금와서 그 관계가 깨끗하게 청산되었기를 바란다는 것이 오히려 우습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다 보면, 미국인들은 상당히 선택적인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미국의 개입에 대한 과거 역사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과거 아프간에 대한 미국 개입의 역사를 설명했다면
, 다음 글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


[i] Le Nouvel Observateur, Paris, Jan, 1998



[ii] Steave Coll ‘Anatomy of a Victory: CIA’s Covert Afghan War,’ a article in the Washington Post, on July 19, 1992



[iii] Robert Dreyfuss, Devil’s Game: How the United States Helped Unleash undamentalist Islam, New Work: Metropolitan books, 2005, p.268



[iv] Alfred McCoy, Drug fallout: the CIA’s Forty Year Complicity in the Narcotics Trade. The Progressive; 1 August 1997.



[v] Steave Coll, Ghost War,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4. p.119.



[vi] Evan Thomas, ‘The Road to Sept. 11,’ Newsweek, October 1, 2001.



[vii] Steve Coll’s interview at the University of Berkeley (the Conversation with History) on March 15, 2005.



[viii] Michael Powelson, ‘U.S. support for anti-Soviet and anti-Russian guerrilla movements and the undermining of democracy,’ Demokratizatsiya, Spring 2003

[신자은]

<십자가와 칼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by Gregory A. Boyd 


<십자가와 칼>이라는 제목은, ‘칼의 힘’ 즉 ‘위에 서는 힘’ ‘세상 나라’와 ‘십자가’ ‘아래에서 섬기는 힘’간의 contrast를 강조해준다. 통상, 이 두 가지 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잘 융합해서 균형있게 사용할까인 것 같다. ‘칼’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칼’을 허락하시고 ‘십자가’를 위해서 사용하시는가의 원리를 찾아서, 세상 권세에 빼았겼던 ‘칼’을 ‘십자가’로 되찾아 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합리적인(?) 접근을 철저히 비판한다. 저자의 세계관에서, ‘칼’과 ‘십자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칼’은 ‘십자가’를 위한 도구일 수 없고, 도구여서도 안 된다. ‘칼’은 이 세상과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의 권한은 현재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부여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국가와 정부에게 권위를 주어서 – 악한 왕과 나라를 통해서도 – 선한 가치들을 이 땅에 구현하는데 이용하신다는 것, 세상 국가나 정부의 선기능을 성경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판단하기에 상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한 나라와 정부와 통치자라 하더라도 사탄의 강력한 권세와 근원적인 죄의 문제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 나라는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될 수 없다. 악한 나라와 사람들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지 않고, 자신의 나라(좀 더 선한 나라)를 ‘하나님의 군사’로 삼으셔서 ‘칼’의 힘을 쥐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악한 나라를 심판하게 하신다, 이것이 좀 더 선한 나라, 혹은 교회, 혹은 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나라의 힘을 맡기신 이유이다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이 세상 나라의 힘과 권력, 세상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 땅에 이루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고 세상 나라의 도덕적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에 대하여, 저자는 단호하게 “NO”라고 외친다.  
이 “NO”의 근거는, 첫번째, 역사에서 발견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화되어서 국가 권력과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과 손잡을 때 나타났던 폭력과 억압,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국가및 종교 이기주의,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방해를 받았는지의 사례는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 시작해서 2005년의 미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저자는 ‘십자가를 앞세운(혹은 그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을 myth라고 부른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발 성전Holy War이 이슬람발 성전과 한판 승부를 벌이던 2004년 무렵이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기 위한 전쟁은, ‘미국을 하나님께 되돌려 바친다’라는 기독교적 슬로건 아래 보수적인 기독교 그룹으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렇게 미국 vs미국에 대적하는 세력을 하나님 vs 사탄, 빛 vs 어둠, 선 vs 악으로 양분하면서 미국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군사력과 힘’으로 이 적대세력을 심판하는 일이 정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과의 전쟁에서 피해자가 된 국가와 사람들은 미국을 적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종교와 미국을 수호하는 신, 곧 기독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적으로 여기게 됨으로 세계 선교에 회복불가능한 해를 입혔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개종시키는 것이 성스러운 소명이기에, 폭력도 마다하지 않은 Christian Nation의 역사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바치겠다는 명목 아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었다” (116p)

이 “NO”의 또 다른 더 핵심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인간 세상의 문제가 더이상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사안들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들의 옳은 답이 무엇인지, pragmatic solution을 주시는데 관심이 없으셨고, 더우기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취하실 수있는 정치적 군사적 힘과 세상에서의 그 분의 왕국을 세움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시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셨다. 분명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은, 세상이 생각할 수있는 여러가지 해법중 하나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철저하게 세상의 방식과 차원이 다른 궁극적인 어떤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eg. 돌이냐 기도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중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답, 이혼과 낙태, 동성애를 어떻게 법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답을 주시지 않았다(그랬다면 오늘날 교회와 신학자들의 고민을 많이 덜었을텐데 말이다). 대신, 그 분은 곧 배신할 자의 발을 씻기시고, 세상 나라에서 소외된 그리고 세상 나라가 보살필 생각도 준비도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명 하나만을 남기셨다.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엄청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무조건적 사랑을 하라는 계명.

빠른 해법의 유혹
세상 나라의 방식, ‘위에 서는 힘’이 불완전함, 그 부정적 파급력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이 방식에 매료되고 어떻게든 이 방식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어쨋든 ‘위에 서는 힘’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룰 수있는 선이 상당하지 않는가라며 –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속담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What did Jesus do?

공생애 시작전 광야에서 예수님께 나타난 사탄은 천하 만국과 모든 영광을 주겠다며,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사탄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쥐고 있는 자이고 예수님은 천하 만국과 영광을 하나님께 되돌려 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예수님께서 소기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는 쉽고 빠른 (= 효율적, 효과적, 합리적) 방법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고난과 죽음 없이도 예수님은 손쉽게 온 세상 나라를 취하실 수 있었다. 

저자는 사탄의 제안이 선한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유혹이나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는 쉽고 빠른 해법의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이 유혹을 뿌리치신 예수님께서 대안으로 선택하신 방식은, 느리고 무기력하며 매우 ineffective해보이고 그래서 이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방식, 자신의 힘과 권력의 포기(하나님의 아들로서)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본으로 행하셨고 우리에게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이 사랑의 방식은,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과 정면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적 특성이며,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고 완성되는, 궁극적인 승리로 반드시 귀결될 방식,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다.  

Following Christ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imitate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모방해야 할까? ‘아래에서 섬기는 힘’ 즉 세상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살되, 그것이 윤리적 행동강령 준수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헛갈릴 수가 없고, 적어도 4권(복음서)의 메뉴얼마저 제공된 이 부르심앞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세상의 방식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일까? 

첫째,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세상 나라의 힘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봉할 힘은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나, 기독교 국가로서의 통치 권력이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있는 세상에 대한 희생적인 섬김의 행위다(167p).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했느냐 안 했는냐에 달려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랴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168p).”라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동의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현재화’하는데 ‘아래에서 섬기는 힘’ ‘무조건적인 희생적인 사랑’ 그리고 ‘기도’를 사용하자는 생각이 너무 순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세상 나라의 힘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면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힘을 기독교가 취해서 이 세상을 ‘맞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가자라고 열정을 불태울 수도 있다. 

법과 제도로 권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를 명문화하고 상벌을 규정해 두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한 국가(보통 내가 속한 나라다)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에 다른 나라보다 더 가깝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덜 가깝다’고 판단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위에 서는 힘’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이 힘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상관없는 혹은 반하는 어떤 국가적인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한 나라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정당화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방법을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한 국가뿐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세상 나라의 힘을 업은 기독교가 그 힘으로 복음을 강요하고 도덕을 수호하고자 할 때, 정작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으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권리를 위해서 죄인들과 싸웠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정복한다’는 논리는, 세상의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이 없이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둘째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궁극적인 해답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선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이루려는 동기는 이기적인 속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의 성취와 그로 인한 혜택의 가운데 자신이 서 있고 싶은 욕구(기여를 하든, 혜택을 받든, 혹은 역사적 증인이 되든)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초라하고 치욕적인 것이었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그 이후의 세계와 시대는 영원히 달라졌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라보셨고 그래서 빠른 해법의 유혹과 자신이 발휘할 수있는 힘을 포기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과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셨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빠른 해법에 매달릴 수 밖게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에 대한 영원의 관점과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조급함없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음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신 희생의 길을 갈 수있다. 

세째로는, 세상 나라와 권력자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일부를 떠넘김으로써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을 경감시키는 편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필요할 것이고, 지금의 우리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부가 저소득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행동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저자는 묻고 또 묻는다. 

우리가 기독교를 국가에 접붙이는데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넘겨버리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영적 요구’만 걱정하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사람들을 돌보고 정의로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일은 분명 선하지만, 세상의 희망이 정부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선하고 합리적인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보이는 나라와 정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따라야 할 ‘사랑’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결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의 권세를 가진 위치로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게 행동하고 또 자신의 권세아래 있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최선은,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뤄가는 희생적인 사랑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의 명령에 예외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없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사랑’의 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힘과 권위의 차등성에 구애받지 않는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저자는, 제한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세상 나라의 선택사항을 받아들여 투쟁을 일삼기 보다는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지구상 유일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음의 질문을 항상 기억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물리적으로 강해지고 커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믿는 것과 하는 일의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의 신적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의 resources가 집중되고 축적되는 기독교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개인과 교회의 이런 모습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정반대의 것이어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짜라고 생각하던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짜, 심지어 둘 다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개인과 교회로부터 resources가 무조건적으로 한계없이 대량 방출될 때이다(그래서 본인들은 죽을 정도로). 그래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우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지?’라는 의구심을 들게 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를 본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런 비세상적인 모습을 비난하고 이를 갈며 죽이려고 달려들면, 우리는 목숨을 내주면 된다. 나의 죽음을 비웃고 기뻐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들은 우리가 행했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부흥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태도는 ‘위에 서는 힘’을 신봉하여 승리하느니 순진한 갈보리 언덕의 방식을 따라 패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적용할 수있는 무엇이 아니라 믿음이다”(265p) 
이렇게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미 당면한 현재 안에서 보여”주어야 한다(98p).

이 책의 context는 미국이지만,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만큼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떠안고 가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넘치고 있는 것인지, 문제의 본질과 근원적인 해답에 대한 고민에 clue가 되어준다. 책장을 덮을 때에, 모든 생각과 글이 다 사라지고 질문 하나만이 떠올라 맴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바로 여기서!”. 무척 긴 리스트가 될 것같다. 감사하다.     

[이유정]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
모 신학교 교수가 한국교회 성장의 하향곡선의 원인을 열린예배로 단정하며 새로운 예배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글을 잡지에서 우연히 보았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찬양운동이 시작된 이래 한국교회 안에서 열린예배를 제대로 드린 교회는 거의 없다. 아마도 열린예배라는 명칭을 그 본래 뜻인 구도자예배가 아닌 ‘문화적으로 전통예배에 비해 열린’의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본다.

실재로 한국교회는 현대예배와 열린예배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찬양운동 4반세기가 흐른 시점에 아직 용어조차 정의되지 않고 사용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열린예배는 시카고 인근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한국적으로 해석, 번역한 이름이다. 즉 비신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의도된 예배형식의 집회이다. 이에 비해 성가대 대신 찬양팀이 인도하는 예배의 바른 명칭은 ‘현대예배’(contemporary worship)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동시대적 예배라는 의미의 ‘현대적 예배’이지만 전통예배와 대비되는 명칭으로 ‘현대예배’가 더 일반화되어 있다.

여전히 남는 의문점은 이 글에서 주장한 교회성장 하향곡선의 주범이 ‘열린예배’라는 관점이다. 글쓴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주범’의 범주에 연루된 대상은 찬양운동을 온 몸으로 주도해 온 386세대이다. 과연 그럴까? 80년대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찬양운동 열풍의 결과는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으로 씁쓸하게 그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찬양운동의 부작용도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 무엇보다 이 운동을 통해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거룩한 예배의 열망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으며, 그 가운데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헌신의 열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중고등부 사역이 얼마나 힘들어졌는가? 주일에 학생들이 교회보다 학원에서 산다. 대학가의 학생선교단체들마다 젊은이 전도가 예전 같지 않아 위기감이 돈다. 그러나 찬양운동이 한반도를 뒤덮을 당시 교회마다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CCM 찬양집회, 화요찬양, 목요찬양 같은 찬양모임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때 기름 부음 받은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곡들이 한국교회 안에 흘러들어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그 결과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직종, 새로운 산업, 새로운 예배, 새로운 찬양 등 한국교회와 기독교 산업 전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지난 10여 년간 교회, 미디어, 방송, 음반 산업, 선교지, 심지어는 소셜 네트웍(SNS) 온라인 현장에서도 당시 찬양을 통해 만난 하나님 때문의 자신의 삶과 목표가 바뀌고, 직업이 결정되고, 하나님께 헌신해온 수많은 청장년들을 만났다. 나이 40이 넘도록 거친 야전에서 예배회복과 부흥에 목숨 걸고 한반도, 동남아시아, 미국은 물론 북한, 중국, 실크로드를 가슴에 품고 뛰는 중견 찬양사역자, 예배인도자, 선교사들이 곳곳에 살아있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이 부흥의 현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미국 60년대에 일어난 독특한 부흥운동이 있다. 히피문화에 젖어있던 젊은이들이 예수를 만난 뒤 자신에게 익숙한 록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때 수많은 젊은이가 하나님께 돌아왔다. 미국교계는 이 젊은이 부흥운동을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 명명했고, 미국 근대 기독교 부흥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교회 80년대에 일어난 이 독특한 부흥 현상도 단순한 찬양운동을 넘는 ‘젊은이 부흥운동’, 또는 ‘예배회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난 사반세기 넘도록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이 운동에 대한 교회사적, 예배학적 자리 매김을 하루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그럴 때 음악 양식에 대한 진부한 논쟁에 마침표를 찍고 부흥을 향한 다음 단계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

[신자은] 톰 라이트 – 1

서평 Part 1
<그리스도인의 미덕 > 톰 라이트 
<After You Believe: Why Christian Character Matters>  N. T. Wright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자백해야 겠다. 우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지식으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사상에 대하여 무척 무지한 상황에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의 우연한 일치에 힘입어 이 책을 만나고 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톰 라이트의 심중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나의 책읽기가 그가 제시하는 큰 그림의 핵심을 용케 비껴가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근거하여 편식하고 있음에 불편해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수준에서 쉽게, 바로 적용가능한 단답형으로 찾아내는데 몰입되어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미성숙의 소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집중력이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쓸 자격이 없는 자가 용감하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냉면 요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맛난 냉면 한 그릇의 행복을 나눌 수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마음에서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문제 제기 – James의 고민 
James는 20대의 청년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고, ‘요한복음3장16절’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배웠다. 기도와 예배의 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는다.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잘 하지는 못하고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What am I here for now? What happens after I believe?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 – 즉  전임목회자, 선교사, 교사나 의사와 같이 특정한 Christian service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James는 computer science의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이고 앞으로의 진로 또한 전도유망하지만, 위에 나열된 career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도대체, after we believe 와 before we finally die and go to heaven사이의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저 시간을 보내며 “죽어서 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릴 뿐인가? 컴퓨터 공학자로서 James의 지식과 삶의 기회들은 이러한 “영적인” 문제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What being a Christian is all about?)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1장에서 밝히고 있다.
James의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있는가라는 질문으로 rephrase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후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있는가?  
 
Christian Character, the Transformation
Faith와 final salvation사이의 bridge, 그리스도인됨(being a Christian)의 의미를 규명해줄 이 bridge를 저자는 character라고 제시한다. Christian character를 핵심개념으로 붙잡고 character란 무엇이며, 어떻게 character가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Aristotle의 접근법과 비교대조하면서 저자는 논증을 진행해나간다.  Aristotle이 인간의 character의 이상, 목표와 구현에 대해서 무엇을 설파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틀을 이해하는데에 약간의 노동이 필요했고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마저 불가능하다. 그러나, Aristotle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건너뛰어도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So, let’s continue.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do와 don’t를 분별할 수있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우리는 통상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도덕률(rules)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spontaneous self-discovery)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일련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칙들은 우리가 속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규칙들에 각자의 신앙과 가정배경, 개인의 양심에 따라 더하거나 감해지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 규칙들은 많은 부분 context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공간과 개인의 uniqueness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후자의 ‘True to yourself’식의 접근법이 우리 시대에 매우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마음에 원하고 좋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되는 이 자기 중심적 사고는, 사회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잠식되고 객체화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자못 바람직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의  guidelines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방종마저 허용되는 문화와 체계를 형성하는게 기여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어떤 rules를 지키도록 권면을 받는 일에 불편해한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내쳐두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붙잡고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새 계명에 따라 산다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가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떻게 이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있는지를 잘 모르는 무지함 가운데 있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위의 두 가지 접근법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통합 완성하는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주는데, 그것이 바로 Christian virtues(그리스도인의 미덕)를 습득함을 통한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인격의 변화)인 것이다. 
 
저자는 “믿은 이후after you believe”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인격(character)에 회복reflect하고 worship과 mission을 감당하는 authentic/genuine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의 핵심은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라고 말한다. 죄로 물든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선택과 연습/훈련practice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자리잡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골프선수에게는 골프근육이 발달하고, violinist는 악기연주를 위한 최적의 체형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Christian virtues가 편안하게 자신 안에서 발현되도록 지속적인 옳은 선택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일이 무척 ‘부자연’스럽고 ‘나답지’않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연습이 반복되다보면 이러한 미덕이 ‘나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철야기도와 오랜 고민과 이를 악무는 결단이 없이도 새 계명에 합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겸손과 온유, 평강과 희락, 자비과 긍휼, 오래 참음과 절제, 충성이 죄된 품성을 밀어내고 대신 나의 character가  되는 일, 그것이 being a Christian의 의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감의 의미인 것이다. 
 
Anticipating the Kingdom of God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Christian character를 develop한다는 것은, 이미 임했고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language와 그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미리 배우고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anticipate”이란,  일어날 일에 대하여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외야수가 공이 어디로 날아올 지를 “예상”하고 공이 떨어질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처럼 말이다. 외야수의 예상은 틀릴 수 있다. 공이 다른 곳에 떨어질 수도 있고 본인이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anticipate”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임하고 반드시 우리에게 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이 가까왔다”로 시작하여 “나를 따르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이다. (chapter 2)
 
A Royal Priesthood, rulers and priests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우리가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관점, 즉 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으로 조명해볼 때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소명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receiver에 그치지 않고 agent로 부르심을 받았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창조세계와의 관계가운데서 “a royal priesthood”로 정의한다. 하나님 나라된 백성의 vocation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광과 통치를 모든 창조세계에 exercise/reflect하고(“rulers”),  온 창조세계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priests”) 것이다. 저자는 worship과 stewardship을,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소명으로 요약한 뒤,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이 소명의 현재적인 구현은 거룩holiness과 기도prayer라고 제시한다. (chapter 3)
 
Jesus’s Call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을 풀어내어도, 여전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의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일관되게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How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follow me였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있는가에 대한 시작이요 완성이면서 또한 확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대신 다른 어떤 계명을 우리에게 얹어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완전한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moral example이 되신다고 하면, 통상적으로 이해하듯 타이거 우즈의 스윙 비디오를 보고 초보자도 그렇게 따라할 수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새로운 morality를 제시해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fullness of human life는 그 전까지의 율법과 도덕의 세계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new creation을 개시하심으로써 인간이 본래의 창조의 모습, 즉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창조세계 가운데 royal priesthood로서의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존재와 삶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Christian virtue를 practice함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만들어나갈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될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chapter 4).  
 
저자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찰하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moral effort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강조해준다. 즉, 옷장에서 적절한 옷을 골라서 입는 일이 mind를 통한 “through thinking”에 의한 것인 것처럼 (옷이 저절로 옷장에서 튀어나와 내 몸에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sinful character를 벗고(put off), Christian character를 입는(put on)하는 것은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혹은 자동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 반면, 구원 이후의 삶, 예수 그리스도같은 완전한 존재로 지어져가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임이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하는 소명적 여정인 것이다. (chapter 5)
 
소결
완성될 그리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오늘 연습하고 나의 second nature로 빚어가는 moral effort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새 창조 새 언약, 새 생명의 증거sign라는 관점은, 은혜로 얻은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reward나 payment”를 받으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rules of conduct”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줌으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혼란, 결국 예수님의 새 계명은 또다른 율법이 아닌가라는 부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거룩함사이의 도덕적 긴장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보다 실제적인 연관 질문들을 고민할 차례다. 이와 같이 Christian virtue를 생각함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 혹은 ‘gifts of Spirit’의 자리는 무엇일까? 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연습/획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context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울은 왜 수많은 미덕중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나의 인격이 될 수있는가라는 점에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라는 점과, 성령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6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평 Part 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