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 2011을 기대하며

4반세기를 넘어서 올해로 26번째를 맞이하게 되는 미국 코스타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한국 복음주의 학생운동으로서의 그 역할을 감당해왔다. 특히 미국 코스타 컨퍼런스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믿음이 자라나며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도 많이 있을 만큼 그 열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코스타를 거쳐가고 섬겼던 사람들이 한국과 미국, 그리고 제 3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2011년은 나에게 10번째 코스타를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코스타와 함께 했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코스타 운동을 통해서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고민을 하게 되었고,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의 한 사람으로 미국 안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참석자로, 자원봉사자로 코스타 컨퍼런스를 섬기면서 매년 나를 일깨워주고 영적인 성숙으로 인도했던 다양한 주제들이 있었다.   
‘성장’, ‘성숙’, 혹은 ‘성화’ 를 다루게 될 올해의 주제는 예년에 비해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약 2000여명이 모이는 시카고와 스크랜턴 컨퍼런스에서 하나님이 인도해가실 깨달음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우리는 흔히 ‘영적 성숙은 교회에 잘 다니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패러다임에 묶여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성화되어 간다는 의미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나 반복적인 행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또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모델은 진정 어떤 것일까? 우리가 성숙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과연 예수님께서 살아내셨던 삶을 살아 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번 주제는 우리에게  back to the basics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고민해야 함을 도전한다. 특별히 내면을 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내면의 변혁이 없이는 예수님의 삶을 경험할 수 없고 우리가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코스타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모든 코스탄들이 하나님께서 Growing up into Christ라는 올해의 주제를 통해 도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KOSTA/USA 
총무간사 김동민 

[신자은] 살아있는 교회 The Living Church (by John R. W. Stott)

진정한 교회의 모습과 역할, 그리고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변화, 그러한 변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 시대의 고민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교회에게 제기하는 엄중한 물음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계라는 시대적 환경에 대한 민감성과 성경적 원칙들이 갖는 절대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의 균형을 이루는,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들을 고찰하고 있다. 먼저 교회의 본질을, 배움, 돌봄, 예배, 그리고 전도라는 4가지 요소로 제시한 후, 이 비젼을 7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풀어나간다: 예배, 전도, 사역, 교제, 설교, 연보, 그리고 영향력. 
전통적인 교회의 핵심요소들의 중요성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예배, 회중예배, 지역교회를 통한 전도, 목사와 감독의 역할, 그리고 강해 설교)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이머징 교회들의 특성들 (영적 초월성과 올바른 삶이 수반되는 예배, 세상 속으로의 침투, 교회중심 활동 탈피, 소모임의 중요성, 성속의 분리 거부, 설교의 호소적 감성적 요소)이 교회에서 균형을 이루어가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교회가 실제로 교회 자신만을 위해, 즉 자신의 생존과 편의 그리고 특권 유지를 위해 조직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니님과 사회를 섬기기 위해 조직되어 있는가? 교회를 지역 사회로부터 불필요하게 분리시키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교회의 건물, 예배 의식, 조직, 프로그램, 그리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점검하기를 촉구한다.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가운데 ‘시각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화석화되고 시대와의 소통에 닫혀있으며 그래서 교회 자신을 섬기는 교회에 대한 냉엄한 비판이자, 포스트 모더니즘적 요구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적실성에 대한 촉구이다. 교회가 지녀야 할 문화적 민감성에 성경적 원칙을 결합한 탁월함이 엿보인다.
제 8장에서, 저자는 소금과 빛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므로, 세상과 다르되 세상으로 스며들어서, 비기독교 세상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이 부패를 막고,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만약 사회가 부패하고 어둡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완전함을 목표로 하지 않고(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만 가능하므로), 개선에 머무르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가 헌신할 만한 목표이며 또한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변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무기고를 열어보인다. 중보 기도, 복음 전도(사회적 양심을 개발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비젼과 용기를 얻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이므로), 모범, 고난(인기가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도덕적 기준들을 위해 기꺼이 받는)과 같은 전통적인 무기에, 논쟁과 행동이라는 법제적 정치적 방법이 더해졌다. 법과 정치를 통한 사회변화는 통상 진보적인 성향을 띠며 종종 기도나 복음 전도에 중점을 두는 진영과 긴장을 이루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성향을 한데로 묶어서 서로의 보완성과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기도나 고난의 영향력에 대한 저자의 확신이 견고한 만큼이나 법과 정치를 통한 사회변화의 방법의 한계에 대한 저자의 보수적인 관점도 확고해 보인다.  
사회변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급진성은, 우리가 기독교적 독특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우리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사회 속으로 침투할 뿐 아니라 사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기준, 그리고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64쪽). 
200쪽에 조금 모자란 작은 책에 살아있는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길 것을 기대할 수는 없고, 많은 부분은 독자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채워가야 할 여백으로 남겨진 것이겠지만, 그래도 가려운 곳이 없지는 않다. 저자의 교단적 배경에서 비롯된, 교회력에 상응하는 성구집인 일과표를 매 주일 예배 마다 읽는 것에 대한 언급은 조금 낯설게 다가오고, 기독교의 연보가 균등화에 기여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다른 사람들과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차 환대하는” 삶의 기준으로서의 균등화)은 적용에서 자의적일 수 있다는 면에서 아쉽다. 또 기독교적 독특성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논증과 설명이 좀 더 깊이있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저자가 90세에 이르러, 이 시대와 교회를 바라보며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담긴 아래의 두 토막 글을 적어본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무엇인가 할 수있다. 
내가 할 수있는 것을, 나는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할 것이다” (Edward Everett Hale의 글, 167쪽)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온 영국 성공회 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 순수성을 좇아 탈퇴하거나, 하나됨을 위해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는 포괄성’을 선택함. (문제가 많고 불완전한) 교회안에 머물면서 진리를 지키는 영속적인 긴장상태 가운데 살아왔음에 대한 그의 고백은 곧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에게 저자가 보내는 초청장인 듯.   
(p.s.) 부록 II를 꼭 읽어볼 것. 1974년에 쓰여진, 존 스토트의 ‘살아있는 교회에 대한 꿈’인데 2011년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이유정]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지난 주, 멕시코 휴양지인 캔쿤 인근의 리비에라 마야를 다녀왔다. 섬기는 교회의 평신도 워십리더들과 후배 가족이 9년 동안 수고했다며 모든 비용을 지원해서 함께 휴가로 다녀온 것이다. 10여년 만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시계도 없이 4박 5일을 지냈다.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지만 차츰 이 원시적인(?) 삶에 익숙해졌다. 핸드폰이 없으니 오히려 상대방을 더 생각하고 미리 챙기고 묵묵히 기다리기도 한다. 인터넷이 없으니 세상사는 어둡지만 눈앞의 사람과 관계에 더 집중한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루가 더 여유롭다.

돌이켜보면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빠른 정보소통은 없어도 느긋한 여유로움에 사는 맛이 있었다. 그러 요즘은 이 편안함이 문명의 편리함에 의해 제거 당하고 있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한켠에 자녀들이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은 흔한 일이다. 저녁 식사 마치고 가족이 함께 대화할 시간에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인터넷 서칭과 페이스북 하는 모습은 일상사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 방에서는 TV, 컴퓨터를 아예 못쓰도록 못 박았다.
최근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게임 그리고 텍스팅(texting) 같이 점차 그 양이 늘어나는 테크놀로지의 자극이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테크놀로지 세대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멀티족(multi-tasker)이다. 이들은 노트북에서 영화를 보며 공부하고, 인터넷 서치하며 커피를 마시고 텍스팅 하는 등 동시에 두세 가지 행동에 능숙하다. 요즘 청소년, 젊은 세대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멀티태스커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이 자료에 의하면 멀티태스커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산만한 사람들”이었다. 즉 멀티태스킹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주위가 산만하고 맡겨진 일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가설을 뒤엎는 충격적인 결과이다.
UC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한 연구 결과도 멀티태스킹의 해악성을 지적했다. 스마트폰이나 쇼셜 네트워크에 의한 주의산만이 두뇌활동과 장, 단기기억(long-term, short-term memory)에 장애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빈번한 자극과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두뇌를 손상시키며, 더 나아가 다양한 최신 테크놀로지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든다. 그 결과는 테크놀로지 중독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테크놀로지 다이어트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휴가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발걸음은 바닷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밑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소리도 귀에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박한 문명에 짜든 영혼에 안식을 주었다. 그 자연의 소리들이 내 심장에 그림을 그렸다. 이때 떠오른 시상이다.
“이른 아침 넘실대는 파도 소리 / 지저귀는 열대 새소리 / 귓가에 오가는 바람의 여유로움 /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 / 파라솔에 홀로 누워 / 흐르는 소리에 심취한다 / 아무런 조직도 프로그램도 / 편곡 악보도 없이 / 다양한 피조물이 저마다 노래하지만 / 불협화음 하나 없는 자연의 향연 / 그 신비에 묻어있는 / 창조의 DNA가 보이듯 하다 / 그 노래에 실려 있는 / 태초의 소리가 들리듯 하다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훌륭한 시는 아니더라도 등 떠밀려 떠난 이번 휴가의 가장 값진 깨달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리까지 들었으니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4일의 효과가 대단하다. 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테크놀로지가 진화해도 인간의 행복은 결국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친밀함에 있다. 올 여름, 휴가를 계획할 때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해봄 직하지 않겠는가? 혹 휴가를 꿈꿀 처지가 못 되더라도 이 새로운 다이어트로 단절된 가족 간의 대화를 회복해보길 강력 추천한다.
– 이유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