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원] 유진 피터슨 읽기 (5) 한국의 맥락들

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5. 한국의 맥락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글에서 텍스트 포지셔닝을 했는데요, 피터슨의 책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피터슨은 미국사회의 맥락에서 책을 썼습니다. 그는 미국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와 공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구체적인 맥락은 서로 다릅니다. 인격성, 일상성, 인내 그리고 기다림은 미국사회에서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실현되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은 미국사회의 것과 다릅니다. 바로 그 지점을 이해해야 비로소 이 텍스트를 우리의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번역가의 입장에서 저는 우리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우선은 한국어 어법의 문제입니다. 한국어의 열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 관련된 우리 언어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의 기초는 I-You관계입니다. 그런데 한국어 용례에서는 안타깝게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일컫는 2인칭 대명사인 ‘너’가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상대방을 일컫는 대명사는 다 ‘you’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2인칭 대명사를 쓸 수 있는 사이는 동갑내기밖에 없습니다. 한살만 차이가 나도 ‘너’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게다가 나중에 사회에 진출하면 다 사회적 직함으로 부릅니다. 번역할 때 이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영어로 2인창 대명사 ‘you’를 그냥 ‘너’ 혹은 ‘당신’이라고 그대로 번역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 서열, 직함 등을 찾아서 확인한 후에 그것을 써줘야 합니다.
한국사회는 사람을 이름으로, 나와 대등한 ‘너’로 알려 하지 않고, 즉 인격적으로 알려 하지 않고, 직함에 따라, 기능에 따라, 역할에 따라 알려하는 문화적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와 문화와 인간관계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유교질서입니다. 이러한 서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른 도리와 같은 것이 우리의 외피를 단단히 감싸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기’로서 자기를 알지 못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나와 분리된 고유한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나와의 관계에서 이 사람이 나보다 위냐, 아래냐, 높냐, 낮냐, 이런 것을 계산한 후에 관계 설정을 합니다. 이것은 아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이러한 서열 관계는 우리가 ‘인격성’을 이해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호칭과 직함이 세분화된 것은 그만큼 그 문화가 위계적이라는 뜻인데, 한국어의 화법은 또한 청자 중심의 화법입니다. 이 말은 화자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알아서 그 말을 해석할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오늘 날이 좀 덥네.’라고 하시면, 같이 사는 며느리는 이 말을 그냥 날이 덥다고 하신 걸로 이해하면 안 되고, ‘오늘은 그럼 시원한 콩국수라도 만들어 드려야 하나.’ 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서로가 아주 깊이 통하는 사이에서는 이러한 화법이 다소 시적이고 멋있게 들릴 수도 있지만, 늘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하는 아랫사람은 적잖은 억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관계의 피로가 커지는 것이지요.
두 번째 한국 사회의 특징은 ‘탈식민성’입니다. 말이 좀 어려울 수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우리 것으로, 우리의 ‘현실’로 보느냐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1세계 국가들은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이 고민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의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시절을 보낸 국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저항하는 ‘우리’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더 ‘우리’다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해외에 나가면 서구 나라를 갈 때랑, 다른 아시아 국가를 갈 때랑 좀 다릅니다. 서구에서는 우리 자신을 서구 앞에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너희는 왜 우리와 다르냐’, ‘너희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대답할 필요를 느낍니다. 서구는 존재 자체로 정당하다면,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합니다. 한국 문화는 이렇다, 한국 사람은 이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시아 국가를 방문할 때는 다르지요. 특히 동남아 국가 같은 경우, 오히려 우리가 존재 자체로 정당하고, ‘너희는 왜 그러냐’라고 묻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다름’을 나타냅니까? 우리가 우리로서 설명하는 ‘한국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외국에 알리려고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 한복, 농악, 김치, 한옥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은 한복도 안 입고, 농악도 일상적이지 않고, 저는 결혼 16년차지만 김치 담글 줄도 모르고, 한옥은 한옥 마을 가야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설명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전형화합니다. 이때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에 보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아침의 풍경을 이런 말로 묘사합니다. “베이컨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이제는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스크램블에그 그리고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자바 산 원두로 새로 내린 커피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의 일상을 한국 사람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상황을 끌어올까요?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 이럴 때 바로 전형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실 저희 집도 아침에 빵을 먹는 날이 많고, 커피는 매일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인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와 현실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전형화에 빠지면, 우리는 현실의 온갖 다양한 ‘결’과 그 ‘울퉁불퉁함’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변명적’으로 민족주의를 사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때그때 편리하게, 그건 한국적이지 않다, 서구적이다, 하는 식으로 변명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사용한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합리적인 것이 반드시 서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합리적인 사람을 우리는, 서구적이다, 정이 없다, 은혜롭지 않다, 하는 말로 비판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미국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 미국 것은 다 좋은 것이고,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압축적 성장’입니다. 서구에서 몇 백 년에 걸쳐서 이루어낸 것을 우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몇 십 년에 걸쳐서 이뤄냈습니다. 피터슨이 미국 사회가 아무리 ‘속도’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비판해도, 우리만큼 ‘속도감’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박민규씨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보면, 유명한 인디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압축적 성장을 이룬 우리 문화의 특징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야미도, 6년 사이에 지도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지금 대야미는 제가 처음 살던 1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한번 속도에 빠지면 속도를 늦추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지금도 늘 쫓기듯 삽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인데, 김진경 시인의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은 채 경쟁과 성장에 쫓겨서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 지금 우리 삶의 특징입니다.
피터슨이 35년에 걸쳐서 쓴 책들을 우리는 10년 안에 다 번역했습니다. 물론 번역은 필요합니다. 일본의 근대화에 번역이 기여한 바는 책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도 어떻게 보면 압축적 성장입니다. 자신의 토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는 시간보다 번역이 빠릅니다. 피터슨이 성경을 현대 미국어로 다 번역하는 데에 10년이 걸렸습니다. 박상익 교수는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에서 ‘출판사 사장 대학 총장론’을 이야기하는데요,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가 학문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말입니다.
피터슨이 메시지 성경을 내는 데에는 출판사의 편집자 공이 컸습니다. 출판사의 후원 하에 현대 미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나왔습니다. 만약에 한국에서도, 메시지를 수입해서 번역하지 말고, 출판사가 믿을만한 학자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주면서 이 작업을 한국어로 수행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압축적 성장은 구호와 동원에 익숙합니다. 사람과 세상을 찬찬히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구호가 많습니다. 뭘 자꾸 이루려고 합니다. 압축적 성장은 인격성, 일상성, 인내가 자라기에는 너무도 좋지 않은 토양입니다.

[유시은] 북한이탈주민, 그들은 어디에

안녕하세요. 두 번째 만남이네요. 오늘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느 곳에 얼마나 살고 계신지 서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 전에 9월 말에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수련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수련회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Home coming day와도 같은 날입니다. 첫날 저녁 예배,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자로 말하면 무엇인지 아십니까?”예배에 참여한 우리들은 대답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렸습니다. 답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면 두 자로 말하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또 나’입니다. 세 자로 말하면 ‘역시 나’입니다.”북한이탈주민들의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목사님의 이 말 한마디에 그곳에 모인 북한이탈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마음이 일순간에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북한이탈주민들은 한인 디아스포라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살고 계십니다. 
 
우선, 대한민국에 살고 계신 북한이탈주민들은 2011년 4월 까지 21,191명입니다(한국, 통일부, 2011년 10월 17일 검색, http://www.unikorea.go.kr). 분단 이후, 북한 주민은 매년 10명 내외로 남한에 입국하였습니다. 남한 입국에 성공한 북한이탈주민들은 1989년까지만 해도 600여명이었으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김일성 사망과 북한의 경제난 등 체제위기가 고조된 1990년대 이후 높은 증가세를 보여 현재 이만 명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별에 따른 현황을 살펴보면, 2001년까지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으나 2002년부터 여성이 급증하였습니다. 현재, 북한이탈여성들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림 1> 북한이탈주민 입국인원 현황 

북한이탈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이유는 남성은 직장에 소속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이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또한 인근 국가인 중국 동북 3성 지역의 농촌총각 문제도 북한 여성을 유입하는 원인이었습니다. 2003년 유엔난민기구(UNHCR)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내 북한이탈여성이 10만 여명이라고 발표된 것도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입국 연령을 살펴보면, 30대가 32%, 20대는 27%로 가장 많습니다. 19세 이하 청소년층은 16%로 2001년 북한이탈여성이 증가하면서 가족 구성원이 점차 늘었습니다. 이에 남한 정부는 남성 위주의 정착지원에서 가족 중심 및 청소년•여성 정착 지원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남한 입국 증가와 더불어 2004년 미국의 북한인권법이 통과하면서, 북한이탈주민의 다국적, 다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거주하는 많은 나라에 북한이탈주민들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유엔난민기구(2010)는 북한 출신의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가 전 세계적으로 1천명여명이 넘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국가

영국

네덜

란드

호주

미국

캐나다

노르

웨이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아일

랜드

스위스

키르기스스탄

이스

라엘

소계

인원

581

146

32

25

25

23

14

14

9

8

6

4

3

2

917

) 유엔난민기구. 2010. 자료

) 독일, 미국, 캐나다의 경우 영주권을 취득한 탈북자는 통계에서 제외됨. 한겨레신문 인용. www.hani.co.kr, 2010 9 12 검색

 

또한 제 3국에서 난민 지위자 및 망명 신청을 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또한 매년 그 숫자가 늘어나 2010년에는 1,194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표 2>. 

년도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인원

67

72

330

349

412

403

502

842

1,097

1,010

1,194

) 유엔난민최고대표사무소(UNHCR,
2010).
한겨레신문 인용.
www.hani.co.kr, 2010
9 12 검색

주변의 많은 분들은 제게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어디에 얼마나 살고 계시는지 궁금해 하십니다. 돕고 싶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날 수 없어서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여러분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과 늘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항상 마음에 두고 기도하면 눈앞에 선하듯이 말입니다.  

 
얼마 전, 시카고 수련회에서 만나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자매가 제게 전화 한 통화를 했습니다. 이틀 동안 같은 방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중보하지 못한 것 같아 헤어지면서, 그 자매에게 기도제목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마음에 두었나 봅니다. 그 자매는 남편의 형님이 북한을 탈북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생사를 위한 일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이런 귀한 기도제목을 허물없이 나누어준 그 자매가 고마웠습니다.

 
새로운 터전에 정착하게 된 탈북 형제자매들은 참 자유와 정착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탈북 했으나 북한에서의 교육과 사상•문화에 매어 참 자유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 싶지만 사회문화적인 차이와 언어적 어려움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 이름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기도하는 심령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깊이 교제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통로입니다. 

유시은 자매는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Post-doctor Fellow로 일하고 있다.

[양혜원] 유진 피터슨 읽기 (4) 영성생활의 요소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4. 영성생활의 요소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이제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피터슨이 말하는 영성의 내용 혹은 특징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피터슨 자신이 이것이 특징이라고 짚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번역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개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기독교적 삶을 이야기할 때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특징으로 저는 인격성과 일상성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꼽았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은 인격성과 일상성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인격성입니다. 피터슨의 영성신학 시리즈를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정말 많이 접했습니다. 인격성, 관계성, 이 말이 안 나오는 데가 없습니다. 「그 길을 걸으라 」서문에서는 “인격성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복음”(14쪽)이라고 말합니다.「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단연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관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분으로 계시하신다.”(28-29쪽)라고 말하고,「이 책을 먹으라」에서는 “계시의 모든 부분, 모든 양상, 모든 형태는 인격적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시든, 무엇을 계시하시든, 우리가 무엇을 받든 간에 그것은 인격적이며 관계적이다.”(57쪽)라고 말합니다.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상은 탈인격화된 하나님, 탈관계화된 하나님이다.…우상 숭배의 핵심은 탈인격화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563쪽)(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은 제가 한 것입니다.)

다음은 일상성입니다. 일상성은 종교성과 대립되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피터슨의 회고록에 보면 ‘Charity’라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방문한 외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에는 우리 하나님 얘기(godtalk) 하지 말아요, 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나는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살아요.” 이 아이의 말을 통해 피터슨은 “하나님이 하나님 얘기로 비인격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하나님과 삶이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러한 일상생활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관계를” 이 아이가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말에서 ‘우리 그냥 살아요’가 참 많이 와 닿습니다. 다시 한 번 솔기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존재와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 자연스런 일치의 삶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내와 기다림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인격성과 일상성의 특징 혹은 속성입니다. 인격성과 일상성은 서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두르면 인격성과 일상성을 놓치게 됩니다. 성급하게 목적에 도달하려고 할 때,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동원할 숫자로만 보고,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만 보게 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인내하기보다는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기를 좋아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는 흥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어버리고, 갈아엎고, 만날 새로 시작만 하는 삶은 기독교적 삶이 아니라고 피터슨은 말합니다.

“미국 교회는 새로운 출생이 주는 희열과 흥분에만 빠져 있다. 사람들을 교회로, 하나님 나라로, 큰 목적으로, 운동으로,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이기에 급급하다.…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미국 교회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면 불안해한다.”「부활을 살라」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밑줄은 제가 그은 것입니다.) 비단 미국교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숫자 올리고, 동원하고, 사람을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것은 g한국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너무도 상식적인 말들입니다. 영성은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피터슨이 기도에 대해서 한 다음의 말이 저는 영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신비스럽거나 무슨 비법과도 같은 영성이 아니다. 기도는 평범한 행위다.…그것은 우정의 행위처럼 간단하다.…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고 가족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비유로 말하라」, 245쪽)
 

[유시은] 북한이탈주민,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만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동역자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거룩하고 축복된 영적 전쟁에 여러분을 초대하며 함께 동역하게 되어 반갑슴니다. 저는 북한이탈주민 덕분에 통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유시은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북한이탈주민과의 만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살고 계신지 모릅니다. 저 또한 10년 전에는 북한이탈주민이 제 주변에 살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저는 상담사에 대한 비젼을 품고 낮에는 대학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에서 상담교육 석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상담 연수를 마쳤을 때 한 지인의 소개로 통일부 하나원에 상담심리사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북한이탈주민과 북한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하나원이 고아원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능력도 없으며 준비도 없으며 마음도 없었던 저를 하나원이라는 나무에 접붙이셔서 북한이탈주민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원 입사 직후 제 몸무게는 10kg 정도나 빠졌습니다. 하루 하루 어떻게 이들을 만나 상담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세상 경험이 없고 미혼이며 젊은 여성인 제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사선을 넘어 중국 땅에서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그 불모의 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북한이탈주민들의 눈에 저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려움도 겪지 않은 젊은 남한 여성에 불과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저와 개인 상담을 마칠 즈음 “제 얘기가 소설같겠지요.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입국하기 전까지의 모진 여정을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갖은 역경 속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선 사람들이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순간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모르는 제게 이런 분들을 왜 주셨나요?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를 제발 다른 곳으로 옮겨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도무지 저를 하나원에 보내셔서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고 제게 환난을 주시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은 “네가 97년도에 북한을 위해 기도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며칠 후 하나님은 제게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끝없는 해안가를 누군가 저를 엎고 걷고 있었으며 날카로운 화살이 계속 저희를 향해 날라 왔습니다. 그 화살은 제 살갗을 스치갈 때 아팠지만 제게 큰 상처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저를 엎고 계신 그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내 등에 업혀 있으니 다만 네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모든 화살은 내가 다 맞을 것이다.’ 이 꿈이 있기 전까지 저 혼자 모든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원망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없고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며 다만 저 혼자 모든 화살을 맞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저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북한이탈주민들이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학에서 편안하게 일하던 제게 상담이라는 비전을 주시고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게 하시면서 저는 민족을 품게 되었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긍휼함을 아주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눈물과 심장 떨리는 아픔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들에게 각각의 부르심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제 부르심은 북한과 북한이탈주민을 향한 것이며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오늘도 저를 일깨우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달려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북한에 대한 사랑을 여러분에게 품게 하시고 부르십니까. 그 부르심에 아멘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셔서 새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북한 땅을 위해 여러분을 내어 드리십시오. 아멘으로 화답하셨습니까.북한과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기도는 북한 땅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북한 땅을 살리며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생명의 길입니다. 기도하고 계십니까. 마음과 물질로 헌신해주십시오. 북한과 북한이탈주민들은 여러분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는 것처럼 여러분 또한 북한주민과 북한이탈주민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는 여러분들이 함께 중보하며 사랑을 나눌 북한이탈주민들이 어디에 얼마나 살고 계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시은 자매는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Post-doctor Fellow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