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이] 정의라는 이름의 사랑(2): 음란이라는 굴레, 빨간빛의 감옥!

“내 풍만한 가슴 골격을 보고 색욕을 느껴보세요! 내 날씬한 허리라인을 만지고 싶지요? 내 탱탱한 엉덩이에 눈이 가서 후끈 달아오르시지요? 내 매끈하게 쭉뻗은 다리가 당신을 유혹하나요? 내 눈짓과 몸놀림을 보고 욕정이 불타오르시겠지요! 나는 상품가치가 높은 물건입니다. 나는 상품입니다. 나는 당신의 섹스욕구를 건드려서 미친 망둥이처럼 뛰놀게 하는 상품입니다. 나를 마음껏 즐기세요! 나를 애용하세요!
 <–어지간한 걸그룹 뮤직비디오는 노래 가사에 상관없이 죄다 이 메세지를 정말 신실하고 열심히, 힘차게 외치고 있다. 미치겠다. 난 정말 마음이 불편해 미치겠다!

빛의 자녀들아, 함께 일어나자! 우리 빛을 발하자!” 



위의 글은 어느 한 선교사가 엘에이 사역방문중 한국 팝 문화를 보면서 통분하며 쓴 페이스 북의 status 글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좀 비약이 심하다’ 혹은 ‘스스로 좋아서 하는 건데,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 뭐가 문제라고’ 혹은 ‘맞아, 내가 다 부끄러워! 저것들 쯔쯔’ 혹은 ‘내부 깊숙한 곳에서의 분노’ 혹은 ‘아픔’ 혹은 ‘연민’?

필자는 엘에이의 한인 타운의 유흥가에서 일하는 몇몇 여성들을 알고 있다.

한 선교단체의 선교사 후보생으로 있으면서 섬기고 있던 교회 청년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새신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노래방으로 포장된 룸쌀롱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그녀에게 전도(?)되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들이 마피아나 갱 혹은 포주들에게 붙잡혀 있는 성매매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이냐고? 성매매 인신매매의 피해자인것은 맞는데 당신이 아는대로 물론 강제로 붙잡혀 있는 포로들은 아니다.[1]


성매매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분들이 노예라고 할 수가 있냐는 질문을 한다. 그들이 강제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닌데, 섹스가 좋거나, 돈 좀 쉽게 벌려고 혹은 명품 중독에 편하고 화려한 삶을 추구하며 그렇게 사는 여자들이 대부분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들이
선.택.한. 삶.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게 그렇게 쉽게 선택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깨어진 가정에서 어릴적에 미국에 맨몸으로 혼자 버려진 아이. 어릴적 친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면서 자란 아이. 불법으로 체류하며 유흥가에서 돈을 벌어서 한국으로 여전히 생활비를 보내고 있는 아이. 공부는 애초부터 타고난게 아니었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무언가 실력을 개발할 기회는 커녕, 당장 빚쟁이에 쫒겨다니며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 가진건 나름 남들이 말하는 이쁘장하다는 몸뚱이 하나뿐. 세상은 섹시한게 착한거라는데.

다른 방법은 없었느냐고 묻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니, 분명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조금만 다른 선택을 해서 더 열심히 살았으면 지금쯤 혁신적인 한 회사의 젊은 CEO가 되었거나 억만장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처럼. 혹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런 류의 책을 출판하는 유명한 법조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아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신의 부모님들이 늘상 언급하시는 그 엄친아 엄친딸 만큼쯤 될 수도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그 길 뿐이었다고 말하는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누구도 쉽게 ‘이렇게 저렇게 했었어야 했다’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거다.

전에 언급한 네파리어스 다큐에 나오는 한 전문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보통 미국 여성 세명중 한명이 성폭행의 경험이 있는데, 성매춘 현장에 있는 여성들의 경우는 그들의 90%이상이 어릴적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쯤되면, 그냥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거기에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미국의 남성들의90%는 8세에서 16세 사이에 포르노그래피를 처음 보게 되는데 그 평균나이가 11세라고 한다. 한국의 경우 포르노를 보는 소비율이 전세계 포르노 소비율 랭킹 1위인데 2위를 차지한 국가에 비해 그 소비율이 다섯배 이상이란다. IT 산업의 최강국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가정마다 인터넷 광케이블이 깔렸던 때가 X양 비디오가 처음 터졌을때라는 것은 IT 산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비들이 음란물을 보기위해 인터넷을 깔았고 자녀들이 그렇게 인터넷을 통해서 어릴적부터 포르노를 보면서 자라온 것이다.

그들이 듣는 음악과 가수들의 몸짓들은 계속적으로 성적인 유혹을 불러 일으킨다. 어릴적부터 쉽게 접하는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야동이야기가 아주 자연스럽다. 이게 정상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되었다. 여자 연예인들의 옷차림과 춤사위와 그들의 표정은 여느 스트립바에서 볼만한 여성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것들은 여과없이 공영방송에 흘러넘치고, 소녀들은 그 여자 연예인들을 말 그대로 그들의 아이돌(Idol)로 삼는다.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며.

서두에 인용한 글처럼, 소녀들로 구성된 걸그룹의 유혹적인 메세지에 그 비슷한 또래의 자녀들을 둔 아비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그리고 옆에서 그의 딸들은 그 춤을 따라한다. 아비가 딸을 성폭행 했다는 뉴스가 종종 미디어에 올라오는 것은 이런 문화가운데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는 어쩜 당연한 결과물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한 단면이다.

어릴적부터 음란문화에 그대로 노출되어온 남성들에겐 이미 여성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남성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하고 자랐으며, 세상의 과대성애화된 문화가 섹시한것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가운데 이미 그 정체성이 망가져 있는 어떤 여성들에게는 유린당하고 강간당하는 것이 일상이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 돈으로 지불까지 한다는데에야 오히려 감격스러울 수 밖에. 마치 ‘이제야 내가 사랑받거나 인정을 받고 있구나’ 자부심까지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삶에 매춘이 들어오는데, 통계에 의하면 여성들이 매춘을 시작하게 되는 평균 나이가 열세살 이란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긴다. ‘나가요 언니들’이라고 비아냥을 섞어서!

누가 열한살의 남자아이에게 여성들을 돈으로 사서(포르노) 마스터베이션을 하라고 가르쳤는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다 포르노를 발견한 열한살 소년이 바로 당신은 아니었는가? 깨어진 가정에서 혹은 직장이나 유흥으로 바쁜 부모대신 자리를 지켜줬던 TV 앞에서 연예인들 춤을 따라했던 열두살 소녀가 당신은 아니었는가? 혹은 아무도 보지 않을때, 은밀한 곳에서 슬며시 야동을 틀어 본적은 없었는가? 당신은 걸그룹의 춤사위를 보며 박수치지 않았는가? 당신은 연예인들의 야동운운하는 저질대화를 시청하며 함께 웃어본일이 없는가?

돈을 위해서라면,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을 희생해도 상관없었던 우리 부모세대 혹은 우리 세대가 계속해서 성상품화와 성산업을 키워왔고 그 음란의 문화는 지금 자녀 세대가운데 60배 100배 1000배의 열매를 맺고 있다. 이제 자녀세대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상관없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어릴적부터 음란의 문화에 잠겨 자랐던 열한살짜리 남자 아이가 40대에 50대에 무엇을 하고 있을것 같은가? 5살 6살 7살된 아동 성매춘과 아동포르노 싸이트가 넘쳐나는 것으로 부터 우리 중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교회에서 조차도 자매들끼리 수다의 자리에서 종종 ‘이야~ 너 오늘 섹시해 보이는데!’ 이런 대화들을 쉽게 듣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너 오늘 남자들이 너를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품을 만하게 유혹적으로 보여!’와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듣는이에게 모욕이 아니고 칭찬인 것이다.

여성들은 거울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섹시한지 아닌지 다시말해 남성들이 보기에 유혹받을만 한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따스한 사랑의 눈이 아닌 남성들의 음란의 렌즈로 자신을 바라본다. 남성들이 마음으로 간음을 하듯, 하루에도 열두번씩 자신의 육신을 남성의 눈으로 바라보며 음란의 생각들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한참, 동남아고 유럽이고 K-POP 이 뜬단다.

한국 유명한 연예인들 덕분에 선교하기가 쉽다는데 그게 영 마음에 걸린다.

음란의 견고한 진들이 먼저 자리잡게 하고 나서 그곳에 복음을 전하겠다는게 우리 전략이 될 수는 없는것이 아닌가?

조윤이

Eunice Cho

eunicecho@exoduscry.com

현대판 노예제 폐지를 위한 기도운동 본부

엑소더스 크라이


Exodus Cry

A Prayer Movement to End Modern Slavery

www.exodusc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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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회용 사람들: 글로벌 경제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의 저자인 케빈 베일스에 의하면 세상에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가 실제로 이천칠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유시은] 나는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제게는 북녘에서 온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저와 동갑내기 친구이며 중국 주재 한국영사관내 보호시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벌써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로를 친구로, 선생님으로 부르며 지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다르게 생각하면서 부릅니다. 그녀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꼭 부릅니다. 제가 그녀에게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러냐며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1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나 편안하게 밥을 먹으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어려움, 한국에서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를 수다로 풀어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정말 특이했습니다. 제가 탈북민 상담을 10년 동안 하면서 이런 만남은 손에 꼽을 만 합니다. 그녀는 활동성 결핵으로 중국 주재 탈북민 보호기관에서 거의 1여 년 동안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배달되는 음식을 혼자 먹으면서 혼자 생각하고 책보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다른 탈북민 또는 사람들의 왕래 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제가 그곳 기관에 상담심리사로 파견 되었을 때 직원들은 그녀를 내담자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저 또한 그녀의 병명을 듣고 상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1주일 동안 기관에 체류하면서 계획된 상담을 모두 마친 후 자투리 시간을 잠시 내어 몇 권의 책을 들고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책만 전해주고 빨리 나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제가 상상했던 환자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1년 동안 활동성 결핵으로 1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말상대도 없이 오락거리도 없이 누워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병자 특유의 절망감도 없었고, 외로운 기색도 없었으며 오히려 영사관의 다른 탈북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자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녀에게 책을 건네 주며 ‘힘내세요, 쾌차하세요.’라고 말하는 제가 어색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멀리 서울에서 저희를 위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결핵이라서 안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함께 잠시 기도만 하고 방을 나와 담당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활동성 결핵이 맞느냐? 굉장히 밝더라.’고 말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호기관에서 오랫동안 격리생활을 하는 탈북민들은 대부분 신경이 예민하고 우울하며 불안하며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특히, 몸이 아픈 탈북민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줄 것과 조속한 한국 송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지, 평안할 수 있는지 저는 의아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저는 일상생활로 인해 그녀는 차츰 흐릿해졌습니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어느 늦은 가을 날, 저는 충남 공주의 기독학생회 수련회에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가게 된 길이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혹시 저를 아세요? 낯이 익네요.’라고 하자 ‘처음 뵙는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다시 ‘혹시 탈북민 아니세요? 어디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중국 보호시설에서 잠시 만난 그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낯이 익은 탈북민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놀란 그녀는 중국 보호시설에서 저를 만났으며 제가 도착하기 전날 저에 대한 간증을 했다고 하며 반겨주었습니다. 저 또한 그 사실에 놀라며 그녀와의 재회를 기뻐했습니다. 보호시설에서 그녀는 병든 몸으로 낯선 남한 땅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너무나 선명한 꿈을 꾸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을 도대체 해몽할 수 없어 또 다시 꿈을 해석해 달라고 기도하던 참에 저에게 책을 받았고 그 책 표지의 그림이 꿈에서 본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책을 단번에 읽었으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계획하신 한국 땅에서의 삶과 길을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흘러 학교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여서 더욱 놀랐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이 많은 그녀가 우리 대학에 입학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저를 두 번 아니 세 번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학생회관에서 많은 젋은 신입생들 틈에서 그녀를 발견했다는 놀라움과 또 동문으로 만났다는 것… 사실 우리는 중국 보호시설이나 공주의 수련회 장소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지 않았고 그저 만나고 헤어졌을 뿐이며 다시 만나자는 인사는 했지만 이렇게 절묘하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맺어준 인연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약속을 하던 우연찮게 만나던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꼭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역사와 세계사를 아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36세의 나이에 Y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북한을 떠날 당시의 이야기, 한국 생활의 어려움, 학교 생활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언어의 어려움 등…
그녀는 북한 두만강을 넘어오면서 함께 강을 넘던 어머니를 그 강에서 잃었으며 중국에서 10여 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이모님 댁을 찾아 왔으나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중국에서 의지하고 마음을 기댈 곳은 아무 곳도 없었으며 오로지 새로 알게 된 하나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을 때, 안전한 다른 곳으로 숨어야 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직 하나님만이 그녀의 피난처요 등불이요 안식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낯선 한국 땅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공부하고 일하며 봉사하며 하루에 서너 시간의 쪽 잠을 자면서도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과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교우라기 보다는 이모뻘이 되는 자신이 때로는 어이없고 낙심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돈도 없고 나이 든 자신의 현실을 바라볼 때 지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1년에 한 번씩 고향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주위 어려운 친구들에게 학비의 일부를 남 몰래 후원하고, 아르바이트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다시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꿈을 기억하고 약속하셨다는 그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녀는 Y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함께 입학했던 남한 친구들과 졸업가운을 입고 졸업식을 대하는 그녀의 감회는 어떨까요? 졸업식을 축하해줄 부모님, 형제들은 없지만 그녀와 늘 함께 하신 하나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실까요? 상상만 해도 뿌듯하고 대견하고 그런 친구가 제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선생님으로 만났기 때문에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친구야 말로 제 선생님입니다. 힘든 상처가 있어 아프다고 힘들다고 넋두리를 할만한 그녀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 친구야 말로 제 선생님입니다. 
“친구야 난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고맙고 좋다. 우리 진짜 친구하자, 딱친구!.”
주) 딱친구는 북한 말로 서로 속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를 뜻합니다.  

[조윤이] 정의라는 이름의 사랑 (1): 사랑의 스펠링은 J.U.S.T.I.C.E. 입니다!

미국 어느 신학교의 제자훈련관련 세미나에서 일어난 일이다.
학생들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겪는 다양한 고민들을 교수에게 질문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의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
“제가 제자훈련을 해주고 있는 학생이 있는데, 이 친구가 마약중독이 있고 열네살 소녀에게 마약을 팔고 있다는 것을 고백했어요. 저는 이 청년을 정말로 사랑하는데 제가 한번 더 기다려 주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이 학생이 열네살짜리 소녀를 성폭행 했다는 고백을 했다면 또 어떻게 하겠는가?

 

정의라는 단어는 너무나 버겁고,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면 안된다는 묘한 합리화 뒤에 혹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명분뒤에 숨거나, 종종 나나 잘하고 살자라는 자조섞인 비관에 머물고 마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결국 하나님의 정의도 사라지고 사랑도 희미해진다.
 
신학교 교수의 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경찰에 전화하세요. 그게 열네살 소녀를 사랑하고 그 청년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공원에서 당신이 가족들과 피크닉을 하고 있다고 가정을 해보라. 일단의 깡패들이 와서 당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괴롭히고 있다. 당신은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의는 어쩌면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이들이 상처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싸우는것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정의(Justice)”에 대한 많은 정의(definition)가 존재한다. 굳이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찾아 듣지 않더라도 단어만 떠올려도 이미 머리가 복잡해 지는게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는 의외로 참 간단해 보인다. 많은 이들의 죄를 한사람이 대신 짊어지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을 신원하여 주는 것, 힘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고 사랑인 것 같다. 혹은 하나님에게 있어 정의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은 아닐지.
 
유다의 번영과 평안 가운데 그 죄악이 하늘을 찌르고 이로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때, 하나님은 그분의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1:16-17]
 
스스로 씻으며 깨끗이 하라고 하시면서 실천해야 하는 항목들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여 주라는 것이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의에 대해서 너무나 어렵게만 생각하며 살아가는건 아닐까? 사랑에 대해 너무 감상적으로만 생각하는건 아닐까?
 
필자는 현대판 노예제라 불리는 인신매매 성매매 폐지를 위해 헌신되어져 있는 한 선교단체에서 사소한 일들을 돕고 있다. 5년전 단체의 대표가 노예제의 피해자 여성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큰 부담을 주셨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저 한 젊은 중보자였던 이분은 간단한 관련 비디오를 만들어서 세상에 알려야 되겠다는 마음의 부담으로 이 사역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4년여를 걸쳐 전세계를 다니며 실태조사로 이어졌고 이제 그것이 “네파리어스: 영혼의 상인(Nefarious: Merchant of souls) ” 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세상에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영화의 말미에 어떤 매춘현장에서 여성들을 관리(?)하는 포주였던 한 남성의 인터뷰가 나온다.
 
“제가 했던일들을 후회합니다. 제 스스로를 정말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요. 그 여성들은 포로가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저 또한 어떤것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또 한가지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은 내 죄악보다 훨씬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엇에 포로가 되어있었던 걸까? 이 남성은 정말 가해자이기만 했을까?
현재 이 남성은 결혼을 했고, 청소년들이 성매매에 팔려가지 않도록 보호하고 돕는 사역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공간을 통하여 의외로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인신매매 성매매라는 불의를 코스탄과 함께  들여다 보고자 한다. 정의라는 커다란 주제를 다룰 철학적 통찰도 없고, 쌈박한 신학적 지식도 없지만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만은 없는 이러한 숨겨진 불의를 들여다 보고 피해자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우리가 함께 기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풀어지기를 갈망하며-
 
조윤이
Eunice Cho
eunicecho@exoduscry.com
 
엑소더스 크라이
현대판 노예제 폐지를 위한 기도운동
Exodus Cry
A Prayer Movement to End Modern Slavery
www.exodusc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