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인터뷰 – 박영호 목사님

[vc_row][vc_column width=”1/1″][vc_single_image image=”5407″ align=”center” img_size=”full”][vc_column_text]1. 목사님 소개와 인사를 해주세요.

IMF가 있던 97년 미국에 유학을 왔습니다. 당시 800원 대였던 환율이 2000원까지 올라가는 충격을 첫 학기 때 겪으며 고생을 많이 했죠. 99년 시카고 대학 인문학부에서 박사공부를 시작했는데, 2012년에 마쳤으니까 13년 반이 걸렸습니다. 제가 했던 과정이 보통 10년 정도 걸리기는 하지만, 공부하는 중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해서 좀 더 오래 걸렸습니다. 아내도 박사과정을 공부했기 때문에 아이도결혼한지 13년 반 만에 낳았습니다. 여러모로 특별히 유학생 청년들에게 위로가 되는 스펙이 아닐까 합니다. ^^
유학생활 중 감사하는 것은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 뿐 아니라, 미국인들 통틀어도 신학생 중에 저처럼 선생님 복이 많은 경우는 드물거라 생각됩니다. 저의 미국 생활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이사야 30: 20)” 입니다. 이런 점에서 코스타는 참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에도 훌륭한 강사님들이 많이 오시는데 젊은이들이 여기서 좋은 스승들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감수할 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젊은이들이 자라서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스승이 되어주는 것이 코스타에 참석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축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세미나에서 <총체적 복음>에 대해서 강의하시는데 소개를 해주신다면

복음은 코스타의 강의 목록에서도 첫 번째를 차지하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총체적’이라는 말이 붙는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음이 온전하지 못한 단편적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유진 피터슨이 말하기를 “형용사는 명사가 타락할 때 필요해진다. 예를 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인으로 충분한데 이 명사가 타락하니까 ‘신실한’이라는 형용사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총체적 복음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이유입니다. 원래는 “복음”이라는 말로 충분하지요.”
강의에서는 성경에서 본래 복음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에 철저히 집중할 것입니다. 본래 복음은 그것 자체로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목숨을 걸만한 거였잖아요. 삶 자체가 신나게 되는 거였죠. “나는 이제 죽어도 천국 간다”는 것을 확보해 놓고 그것과 관계없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보는 시각 전체가 바뀌는 즉, 삶의 목적과 의미 자체가 바뀌는 것이었지요. 그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3. 올해 코스타 주제가 신학적으로 어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와 그 이유를 설명해주신다면?

어떤 말이든 구체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결정되지요.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사회의 상층부에 진출하는 것을 비전으로 합리화하는 그런 욕망들을 신학적으로 포장해 온 거짓 복음에 속아 왔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사회 상층부에 기독교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는데 사회는 더 혼탁해지고, 교회는 더 어려워졌지요. 이런 것에 대한 반성의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우리의 약함과 주님의 능력,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무 쉽고 자명하게 이 둘이 연결된다고 생각한다면 또 다른 거짓 복음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에 절망할겨를도 없이 그냥 주님의 능력을 가져다 쓰고 싶은 마음에 거쳐야 하는 단계로 약함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주님의 능력을 쓰고 싶은데 그 방법으로 “우리의 약함”이라는 카드를 내 놓는다면, 그것은 신앙의 이름을 빈 주술이지요. 내려놓음이라는 주제가 지나치게 유행할 때, 가만히 보니까 이게 “아, 내려 놓으면 더 주실 거야” 하는 기대가 그 뒤에 있더라 하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려 놓는 게 아니라, 내려 놓는 척 하는 것이지요.

 

4.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문제와 직면하게 될 때 스스로를 약자라고 느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노동자와 고용주/ 실업자와 사회구조/ 빈부의 차이 등) 이런 문제 속에서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고민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신앙과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사회 전체에 대한 대안적 지혜와 내가 처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헌신, 이 둘의  조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를 위해서 끊임없는 공부, 성찰, 네트워크, 자신의 시각을 넓히는 도전과 자극을 찾는 게 필요합니다. 후자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내 옆에 한 사람, 즉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내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또는 해야하는 실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때로 내가 손해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를 도우려면 내 일정이 헝클어 진다든지, 재정적으로 출혈이 있다든지, 혹은 안전에 위협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런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그냥 가도 되지만 만약 만났다면 그 만남 자체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고백적 상황”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그 순간에 결정된다는 뜻이지요. 이런 사람을 봤는데 그냥 지나치고 길을 간다면, 이제 나는 그를 만나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곤란에 빠진 이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에 나의 전 존재를 걸고 대답해야 하는 겁니다.

 

5. 조금 더 세부적으로는 시카고 코스타에 참석하는 적지 잖은 숫자의 유학생들은 미국에 와서 사회, 경제적 약자의 위치에서 처음 서보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참석자들이 미래에는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 강자의 위치에 설 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이들에게 당부하는 이야기를 추가로 해 주신다면

유학생들 중에 상당수는 어릴 때 부터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서 “나는 천재일지도 몰라”하고 생각하는데, 미국에 와서 그 부분이 깨어지는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지요. 뒤집으면 이 시기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축복된 시기라는 겁니다. “앞으로 높은 자리에 가면 이런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은 사실 별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은 다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 어떻게 사는가만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최종 비전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였는데, “로마를”이 아니라, “로마도” 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금 에베소에서 이 말을 하는데, 로마가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지금 에베소에서 하고 있는 이 일을 로마에 가서도 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이 진짜 비전입니다.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젊은이가 생활 속에서 옆 집 사람 전도하는 일에 관심 없다면, 선교지 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교수가 되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싶다면, 지금 무엇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겠지만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같은 일이 없다면 비슷한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비전은 욕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6. 유학생/청년 사역을 오랫동안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에 느낀 변화가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미국의 경제 사정을 비롯한 환경 변화로 젊은이들에게 여유가 없어진 듯 합니다. 공부하고, 연구실에서 일하고, 직장을 구하는 모든 환경이 10여 년 전과 비교할 때 훨씬 더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럴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급함과 건강한 공동체의 필요성은 더 깊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외로워서 교회에 나오고 그러다 보면 은혜도 받고, 헌신도 하고 그랬는데 요즈음은 facebook에서 “야, 우리 밥 먹자” 라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되는 것 같으니까요.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놀아주고, 돌봐주고, 재미있게 해주고 이런 것 보다 더 본질에 즉, 복음과 말씀으로 가는 흐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 목사님이 코스타를 통해서 기대하는 것과 코스타에 참석하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들에게 도전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무엇이 이렇게 많은 청년들을 KOSTA에 모이게 하는가? 저는 “목마름”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멀리서,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올 수가 없겠지요. 모두 목마름이 있는데 그것을 다른데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방향을 맞추는 걸음이지요. 여기에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목마른 사람 시냇물을 찾아 헤메는” 간절함,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열정이 있다면 방법은 있습니다. 길은 많이 있습니다. 방법이나 길, 자리 같은 걱정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과감하게 헌신하고 철저히 준비한 후 주님께 요구하세요. 나를 써 달라고!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저 아직 준비 안됐는데요” 라고 대답해야 하는 일은 내 인생에 없어야 겠다는 결심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

코스타 둘째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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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아침, 어젯밤에 내린 비로 인해 더 밝고 화창한 날씨로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했습니다. “God’s purpose in Weakness”라는 Daily Theme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약함의 나눔과 약함 가운데 머물게 하시는 이유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오전에 조별 묵상을 마친 후 성경강해에서 마르바 던 교수님은 “A Prayer of David(시편 86:1-12)”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시편의 ‘LORD’라는 단어는 ‘여호와’라는 의미인데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고 하시며 영어로는 언약의 하나님, 약속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장, 건강, 가정 등의 다양한 문제로 압박 당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고 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고, 주님께 진정으로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필요가 있는지, 약함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v.6)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마르바 던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육체적인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분이고, 우리 역시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권면하시며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이어진 책소개에서 서재석 대표님은 고든 맥도날드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Steve Wilkens& Mark Sanford <은밀한 세계관>,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김근주 <구약의 숲>, 김도현 <나의 사랑하는 책 로마서>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오후에는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를 들은 후 정신실 강사님의 간증으로 저녁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받았던 연약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치유하심을 경험하고 음악치료사와 연애 강사가 된 이야기는 웃음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김병년 목사님은 “우리는 약한 질그릇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결혼  후 쓰러진 아내를 11년째 돌보는 남편과 세 자녀의  아빠이자, 엄마로서 살아온 삶 가운데  연약함을 품고 고난을 직면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을 나누었습니다.

김병년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때 그의 능력없음을 질그릇으로 칭한것이라며, 바울에게 쉽게 깨진다는 것은 나쁜 뜻이 아니라 내게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바울의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인간은 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가지고 이것을 채우길 갈망하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소망만이 그 욕구를 다스리게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욕구로 인해 매번 넘어지는데 이 때 무너진 욕구를 정죄할 것이아니라 복음의 용서 앞에 엎드리라고 전하셨습니다.

인간은 삶은 그 여정을 알 수 없는 질그릇이며, 이로 인해 인간은 끊임 없이 두려워하고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지만 끝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 오히여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깨어져도 그 속에 담기는 보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성육신 하나님이며, 연약함을 품고 삶의 걸음을 한 걸음씩 걸어갈 때 연약한 존재 가운데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며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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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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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입니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접속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외로움을 느끼는 모습,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엄기호의 <단속사회>는 이런 모습이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과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타인의 고통과 같이 우리와 다른 것은 차단하고 외면하며 가능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공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고, 이 사회는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누고 들어줄 수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곁’을 회복하는 것이 이 단속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한국사회를 그리고 있으며, 신앙서적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인 사회, 더 나아가서는 우리끼리 모이는 데에 익숙하고 또한 공적이고 정치적인 의견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은 한인 기독교 사회에 더 잘 적용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친숙함과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을 뛰어넘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의 고통을 듣고 공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불이익, 즉 누군가에게 찍히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이웃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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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인터뷰 – 김종호 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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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한국기독학생회(IVF) 대표로 일하고 있고, 대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딸 셋을 둔 아빠이고 남편입니다. 별로 소개드릴 게 없는데요, 대학생 때 약 1년에 걸쳐 세계를 한 바퀴 돈 적이 있고, 자전거 타기를 즐기고, 커피를 볶고 내릴 줄 알고,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40대 가장입니다.

 

2. 이번 컨퍼런스에서 어떤 사역으로 섬겨주시게 되나요?

성경강해자인 마르바 던(Marva Dawn)의 설교를 통역하는 것과 “선교: 세상의 필요와 나의 은사가 만나는 곳”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진행하게 됩니다. 코스타는 처음 참석하기 때문에 다른 코스탄들의 통찰과 경험을 통해 배우고, 또 제가 보는 관점을 나누며 더 발전적인 방향들을 세워가는 일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3. 올해 주제와 관련하여 간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부분을 나눠주시고, 가장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년의 때에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라는 역설이 왜 중요한지 나눠주신다면?

저는 기대에 비해 기회가 많았던 세대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청년들은 기대에 비해 기회가 적은 세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대부분 집단적인 불안과 집착에 빠지게 됩니다. 한번이라도 경쟁에서 뒤쳐지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쫓기며 삽니다. 패자와 약자가 더이상 꿈꿀 수 없는 시대를 만들어 놓은 것은 큰 비극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런 “밑바닥”을 경험하실 일이 있다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삶의 의미와 소명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약함이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생후 9개월에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자의식이 생겨나면서 장애를 해석하고 극복하는 것이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자신감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고,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기를 은폐하거나 포장하려는 성향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장애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신앙의 회의도 오래 경험했습니다. 안 고쳐주시는 하나님,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의지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서른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고쳐달라는 제 기도에 응답하시는 시기와 방법은 제 기대와 달랐지만, 하나님이 제 삶 속에 이루신 일들을 보기 시작했고 제 인생의 행복이 제 기도대로 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제 장애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장애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에게도 삶에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용기를 주고 싶은 생각이 더 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약함이 결국 남을 돕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소명이 된다는 것이죠. 코스타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나름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유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상대적으로 본다면 약함보다는 강함, 실패보다는 성공을 더 경험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겠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외적 조건으로 어떤 위치에 오른 사람이 내면에서는 자신의 약함과 열등감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들고 나아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통찰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해석해 낼 때, 그 약함을 통해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큰 신비라고 믿습니다.

 

4. 한국의 대표적인 학생선교단체의 대표로서 오늘날 캠퍼스 사역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이라고 판단하시는지,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은 어떤 부분인지 나눠 주십시요.

기독교가 급속도로 외면 받고, 학생들이 취업의 공포에 떨고, 학생선교단체를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감하는 등의 외적인 위기도 물론 사역에 큰 어려움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큰 어려움은 우리 내부의 어려움입니다.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 우리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 건지 막막해 합니다.
IVF 간사회도 이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기에 많은 고민과 진통을 겪으며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중에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이 우리가 대학이라는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대학사회 전체에 관여(engage)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변질되어버린 대학을 “마치 가라 앉는 여객선”처럼 여기고 “학생선교단체라는 구명정”으로 사람들을 구해내는 모델로 오래 사역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은 나름대로 의미와 보람이 있었지만, 세상은 점점 더 무너지며 우리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 engage하는 것을 망각한 기독교는 결국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외면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소수로 전락한 기독교가 되어버렸지만, 저는 이 소수가 더욱 강인한 정신과 살아있는 신앙을 갖고 주류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고민하게 하고 성찰을 촉구하는 창의적인 소수로 살아갈 시대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력화된 힘을 갖춘 기독교는 오히려 이익집단으로 전락했지만, 세상의 힘을 상실한 기독교는 세상을 이롭게 할 샘물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5. 캠퍼스 사역과 더불어 선교의 현장에도 많이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교에 대해 청년들의 관심과 헌신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위해 선교단체나 캠퍼스 사역의 현장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선교에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전하고 선교지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필리핀의 한 교회 지도자가 “한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있는 한, 필리핀 교회의 미래는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추한 얼굴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비판과 성찰이 선교의 열기를 식게 하고 “무조건 가면 된다”는 식의 단순한 메시지가 사라지게 했습니다. 동원이 급속도로 약화되었죠. 게다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과감하고 단순한 헌신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감량”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정말 문제는 “선교는 안 좋은 일”이라는 오명이 보편화되면서 건강한 선교의 신학과 모델을 만드는 노력마저 사라지는 점이고, 결과적으로 자기를 선교적 삶을 위해 드리려는 자원자가 잘 나오지 않는 현실입니다. IVF는 선교가 “선교지에서 펼쳐지는 전도사역”이라는 전통적이고 좁은 의미의 이해를 극복하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문화를 넘어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한국은 급속도로 다문화 사회로 변해가고 있고, 유학생들이 캠퍼스에 크게 늘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우리의 관계망에 들어온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맺어야 할 관계가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친구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고 삶을 공유하고 우리의 가치관을 나누는 일, 즉 우리 관계 전체가 선교하는 일인 것입니다. 학생단체와 파송단체 모두는 이런 인식전환을 토대로,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기본적으로 자기 삶을 이웃과 나누고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강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선교는 선교지에 가야 비로소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을 살던 사람들이 선교지에 가서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6. 긍정적인 측면으로 젊은 세대의 잠재력이 어디 있다고 보시고그런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열매 맺게 도와줄  있을까요?

저는 최근 젊은이들에게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선교의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사방에 디아스포라가 넘쳐납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더욱 좁아졌습니다. Global Youth Culture라 불리는 문화로 젊은이들이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 의외로 이타적이고 명분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전히 젊은이들은 선교를 향한 중요한 자원이고 모판이라 믿습니다.

 

7. 고국을 떠나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며,  이러한 코스탄들에게 “선교적 삶”에 대한 자세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코스탄들 대부분은 자발적 디아스포라입니다. Robert M. Brown이란 분이 일찌기 이런 디아스포라를 Creative Dislocation이라 정의했습니다. 사는 곳(location)이 바뀌면서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창조적(creative)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통찰입니다. 맞습니다. 유학, 이민, 주재원 생활 등이 우리에게는 이전에 경험 못했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전환점이 됩니다. 사는 곳의 변화는 우리를 모두 타문화권 유경험자로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타문화 속에서 정체감 고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returnee들 중 유학생사역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례들도 봅니다.
또한 “비자발적” 디아스포라에도 눈길을 돌리는 코스탄들이 되길 바랍니다. 난민, 인신매매, 가난, 핍박 등의 다양한 사유로 여전히 디아스포라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해서도 합력해 선을 이루시기도 합니다만,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해 소명감을 느끼며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 비전을 품고, 자기의 배움을 세상을 위해 활용하려는 용기있는 젊은이들이 코스탄들 중에 더욱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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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와 약함의 자리 (주제 기획기사2)

[vc_row][vc_column width=”1/1″][vc_column_text]구속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며 구속사는 신약과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성취되고 구속사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의해서 완성된다. 구약성경 전체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신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 약자와 강자의 질서 속에서 일어난 충돌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에게 명백한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노예상태로 지배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통해 전수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 충돌하며 탄압받고 멸시받는 약자의 나라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강한 힘과 권력을 얻기 위해 집단의 동원을 추구하는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약자를 보호하는 공동체는 그 자체로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약해보이는 나라지만 그 안에 당신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련의 이적들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마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강자처럼 보이는 세상의 질서에 편승하고 노예의 삶에 머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은혜로 주어지는 약해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강자의 질서에 머무려고 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지 않고 강자의 나라를 부러워하고 한편으로 추구했다는 데에 있다. 강자의 질서를 추구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약자들에 의해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하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배를 받거나 지배하거나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추구하거나 세상 나라의 질서를 추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강자의 질서를 추구했고 세상 질서의 일부분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야망을 좇아갔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가난한 자를 특별히 취급한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관계의 핵심인 법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의 법이 약자를 특별히 대한다는 내용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신이 힘을 추구하는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법은 부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보다는 종들을 특별하게 생각했고 이민자, 과부, 고아들처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약하고 영향력이 없는자를 옹호하였으며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공동체의 정신은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가장 많은 생산력과 군사력을 창출하는데 있지 않으며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가난한 자들이 보호받는 약한 사회를 추구하는데 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의 노예생활과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상상하고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고대하며 견디고 단련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질서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투쟁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회복될 나라의 보존과 진전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과 원칙을 지키려고 할 때 찾아오는 약함의 자리에 동참함으로써 민족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불완전하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은 약함으로, 아파함으로, 고통당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 나라를 진전시켰다. 하나님의 방법은 공동체를 약함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약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한 민족공동체의 역사는 거듭되는 공동체의 반역에서도 끊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로의 사랑의 초대이며 하나님 나라 질서에 순종하는 신실하게 남은 자들의 응답이다. 그들은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그 장소에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공동체가 결집하여 약함을 벗어나 강해질 때 나타나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고통과 연약함, 낮아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뜻을 이룬 공동체 역사를 이룬 것이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