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재]섬김의 축복, 특히 성경공부 조장으로서

이코스타 2006년 8월호

1. 피츠버그에 내리다.
1999년 8월 피츠버그 공항에 혼자서 처음 내릴 때만 해도 제가 교회에 가게 될 거라고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교회를 안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싫어했으니까요. 그러다가, 2000년 8월 엄청난 교만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고선 교회 활동에 깊이 참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 피츠버그 한인 중앙교회 청년부 공동체에 대한 소개
제가 섬기고 있는 피츠버그 한인 중앙교회 (Korean Central Church of Pittsburgh, 이하 KCCP)는 주일 출석 인원의 약 절반 정도인 250 여명 정도를 ‘청년’으로 분류합니다. ‘청년’에 포함되는 사람은 일단 나이가 만 40세 이하의 대학생 및 대학원생, 포스닥, 직장인 등입니다. 이들 중 약 110명 정도가 매주 토요일 6시에 모이는 청년회 예배에 비교적 꾸준히 참석합니다. 6시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6시 45분부터 약 30여분간의 찬양예배, 7시 반부터 10시까지는 조별 성경공부를 합니다. 각 조당 구성인원은 대체로 8-16명 정도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공부 조는 克?싱글/매리드 등의 각 그룹 별로 편성됩니다. 학부 성경공부 조의 조장들을 위한 성경공부는 간사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하게 되고, 싱글/매리드 조의 조장들을 위한 성경공부는 부목사님이 담당하고 계십니다. 조 편성은 가을/봄/여름 의 각 학기 별로 약간씩 바뀝니다. 교재는 IVP나 프리셉트 등에서 나온 GBS 교재 중 성경본문에 충실한 것으로 해서 그때그때 저희 청년회 공동체의 영적인 상황에 적합한 것들을 조장들과 목사님이 상의해서 결정합니다. 좋은 교재가 많이 부족하여 언제나 아쉽습니다. 요새는 그래서 두어 개의 교재를 같이 놓고 본문 내용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교재를 조장들이 만들어 오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었습니다.


3. 성경공부를 처음으로 해보다.
2000년도 봄에 생전 처음으로 접했던 성경공부는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하시고, 인격적으로도 훨씬 성숙하신 분들이 진지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성경공부를 하시는 모습들이 저부터 (이전의 교만한 모습을 벗고)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말씀을 되새기고 생각하면서, 그 말씀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들을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고 나누는 모습으로 풍성했었습니다. 그러한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 말씀이 제 자신에게도 달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말씀들이 제 영혼도 하나씩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또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 또한 새로이 들리기 시작했고, 찬양 예배 역시 이전에는 지루했으나 점점 찬양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와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4. 성경공부 조장으로서의 섬김 그리고 부어주시는 축복
2001년은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뀐 해 였습니다. 교수가 저를 본격적으로 다그치면서 몰아대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처음이니까 하면서 봐주는 모습이었는데, 더 이상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하나님 말씀 가운데 받는 은혜가 더욱 귀했고, 아무리 학교 일이 바빠도 토요 성경공부를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2001년도 가을 학기에는 한 선배의 권유로 드디어 조장으로 섬기기 시작했고, 그것이 훨씬 복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약 5년간 두 학기 정도의 공백을 제외하고는 계속 성경공부 조장으로 섬기게 됩니다.


처음이라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훌륭한 조원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존경스런 신앙의 선배들과 갈망함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는 초신자들이 조화를 이루었고,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에서도 진지함을 결코 잃지 않는 분위기가 조원들 가운데에서 절로 우러나왔습니다. 그러한 분위기가 주는 편안함 가운데에서,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시간 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는 지혜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조원들 안에서 생명의 양식으로 작용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매번 받았습니다. 신기하면서도 은혜로운 경험들이었습니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나누게 되는 기도제목들에서는 깊은 나눔들이 있었고, 그렇게 내놓은 조원들의 기도제목들을 주님께서 응답해주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조장으로서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조원들이 서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는 것에 감사해 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 같이 성경말씀 나누고 같이 기도해가며, 하나하나 결국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같이 체험해 가면서 같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장들끼리 모여 부목사님과 함께하는 조장성경공부는 그 나눔의 깊이에 있어서 조원들과 하는 성경공부와는 비교가 안되었고, 고영양가 말씀의 집중 투입으로 인해 저의 영적인 성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들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고, 그 기쁨이 참으로 강해서 그 이후로 5년 정도 거의 끊이지 않고 조장으로 섬기었습니다. 결코 작지 않은 축복이었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5.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특히 힘이 되는 섬김의 축복
그 무렵 학교에서도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과에서도 소문나게 깐깐한 제 지도교수님은 2001년도 12월에 제게 “네가 앞으로 박사과정을 계속 하더라도 잘 할 것 같지 못하니까, 다음 학기부터 다른 데를 알아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신을 수습하고 교수님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부분에 대해서 차근차근, 잘 안되는 영어로 말씀을 다시 드렸더니 좀 생각해 보시더니 “한 학기만 더 두고 보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시 제 일과는 아침 9시 반에 교수와 미팅, 10시 반에 처절하게 깨어진 모습으로 미팅을 마치고, 1 시간 정도 실험 준비, 간단한 점심식사, 그리고 12시 반 경에 실험 시작, 저녁 식사, 실험 계속, 새벽 4시 귀가, 다시 아침 9시반 교수와 미팅. 이런 스케줄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런 스케줄을 10개월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다는 게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교수님의 특별관리 대상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한테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준 것이어서 감사하게 생각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인 혹사였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열등의식은 끊임없이 저의 영혼을 잠식하려 했지만, 토요일 저녁마다, 찬양예배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서 겨우겨우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도리어 저로 하여금 섬김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보게 합니다. 학교 일은 잘리느냐 마느냐의 칼날 같은 능선 위를 걷는듯한 살벌함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교회에서의 섬김은 제게 학교에서의 일을 감당해낼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2002년 봄학기에 그 축복이 제 학교 일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웠던 실험이 어쩌다 두 번 만에 실험결과가 잘 나와서 바로 논문을 쓸 수 있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8월에 스웨덴에서 열렸던 국제학회에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회에서 만난 다른 그룹 사람들과의 토론 가운데에서 제가 2001년도에 교수한테 저를 쫓아낼 빌미를 제공해 주었던, 마치 실패한 것 같이 보였던 실험의 결과가 사실은 맞는 것이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학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논문을 써서 제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 지도교수님은 박사과정을 마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논문 개수를 3개로 정해 놓으셨기에 2개를 한 해에 한꺼번에 제출했던 저는 1년 만에 박사과정 자격미달자에서 박사과정의 2/3나 마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2003년도 1월에 실험실 전체의 연구 방향이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저 역시 예외일 수는 없어서 이전에 경험이 없던 큰 장비를 가지고 연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만 당시의 저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해야만 했기에 많이 어려웠습니다. 이전같이 새벽 4시까지 일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 밤 11시, 토요일이나 주일에도 예배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실험실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한 10 개월 정도 지속됩니다. 3월에 저한테 새로운 장비에 대해서 가르쳐 주던 다른 그룹 사람이 저지른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로 인해 교수님이 제게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릅니다. 지도교수님이 저를 department head 앞에 데리고 가서 저로 하여금 각서를 쓰고 사인을 하게 합니다. 내용인즉슨 한번만 더 실수를 하면 쫓아내겠다는 내용이었죠. 다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도 교회에서 감당하고 있던 성경공부 조장은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 섬김의 축복이 저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2003년도를 아무런 실수 없이 보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2003년이 지나 2004년으로 접어들면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 시작해서 교수님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2004년도 초에 마지막 논문을 제출하고 2004년도 12월에 박사 디펜스를 통과하면서 학위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저는 섬김을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저를 생각하면 제게 그러한 능력과 지혜는 처음부터 제 안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죠.


6. 새로운 섬김의 자리, 일대일
2005년부터는 PostDoc으로 일하면서 그 이전까지는 시간이없어서 엄두를 못 내던 KOSTA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KOSTA 에서 ‘조장’이라는 섬김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충 무엇인지 파악을 해보니, 교회에서 성경공부 조장으로 섬기는 것에 비해선 별 거 아니라 생각이들어 조장으로 자원합니다. 조장 코스타에서부터 받은 은혜와 도전은 실로 엄청나서, 돌아와서는 가을학기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의욕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가을학기부터 일대일이라는 것에 도전을 했습니다. 토요모임에서 조장으로 섬기면서 동시에 주중에 일대일까지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쉽지는 않았지만, 일대일을 통해서 새로이 깨닫게 하시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두란노에서 나온 교재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제 자신이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 기초는 제게 새로운 힘이 되었습니다. 가을 학기 내내 해서 한 명을 마치니, 이 후배가 많이 고마워 하더군요. 저도 많이 뿌듯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 기쁨이 은근히 대단했습니다.


맛들인 김에 2006년 봄학기에는 일대일을 두 명을 했습니다. 일단 한번 교재를 다 공부했었기에 준비하는데 비교적 적은 시간이 들 것이므로 두 명도 감당이 될 것 같았습니다. 물론 감당이 잘 안되어 힘들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7. 미완의 꿈, 캠퍼스 사역
KOSTA 2005에서 도전 받은 것 중, 다른 하나는 캠퍼스에서의 성경공부였습니다. 피츠버그 지역에서는 지역교회 기반의 청년 사역이 주류이지만, 캠퍼스에 교회에 나오기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라는 마음이 부담으로 많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루다가는 아예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 씨라도 뿌려보자는 심정으로 캠퍼스에서 혼자서 조촐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Christianity for Everyone’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교회 문턱을 높게 느끼는 사람들, 교회까지 가기엔 부담이 되는 바쁜 사람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잘못 알고서 비판 정신이 많은 사람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전설같이 들리던 얘기들, 5-6개월 동안 벽 붙잡고 기도만 했다는 얘기를 거울 삼아, 기도만 하다가 피츠버그를 떠나게 되어도 전혀 상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과 3주 만에 한 영혼을 제게 붙여 주셨고, 지금 그 친구와 같이 일대일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만 많고 믿음은 없던 친구에게,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하나씩 하나씩 일깨워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가득한 마음이어서 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마치 튕겨나오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어느덧 제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이 늘었습니다. 특히 두란노 교재를 가지고 3번을 일대일을 하면서 익히게 된 기초적인 내용들과 관련 성경구절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이 친구가 제 앞에서 영접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믿음도 연약하여 일대일을 계속 해 나가는 동안 이 친구의 믿음이 더욱 커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영접을 시키고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겪게 되었는데, 만나는 시간시간 마다 성령께서 제 영을 가득 채우고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느껴져서 긴장도 되지만 나태한 저에게 도리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갈망하는 마음은 있지만, 교회에 나가기에는 뭔가 부담이 있는 사람들이 캠퍼스에는 정말로 있었고, 그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보다 활성화된 캠퍼스 사역의 꿈을 꾸어보지만, 이것은 제게는 미완의 꿈으로 남게 됩니다. 제가 8월 말에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도 더 가르칠 수 없게 되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인도하심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가을 학기부터 캠퍼스에서 모임을 시작하려는 움직임들이 교회 내에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8. 맺으면서
교회의 어떤 집사님의 동생 되시는 분께서 한국에서 목사님으로 사역하시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해 돌아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러 한국에 갔다오신 이 집사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실 평소에 그 동생 되시는 목사님을 안쓰럽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던 동생이 왜 고생고생하는 목사로 살아가야 하는지. 하지만, 그 목사님의 장례식에 운집한 3천여 명의 인파를 보고, 그들의 통곡과 흐느낌을 보고선 생각이 바뀌셨다고 합니다. 자신의 동생이 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7년 전 피츠버그에 내렸을 때에는 제가 이런 모습과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그때 피츠버그에 내려서 교회에 안 나가게 되었다면, 떠날 때에 저의 떠남을 아쉬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같은 과의 몇몇 후배들 정도가 조금은 아쉬워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떠난다 하니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시는 걸 봅니다. 제가 이 피츠버그에서 박사 학위 말고도 뭔가 의미 있는 삶을 보낸 것 같아 아쉬움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삶의 순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섬김의 축복은 이제는 모든 섬김을 내려놓고 떠나는 마당에까지 유효하더군요. 한국에서의 새로운 자리에 예비해 놓으신 새로운 축복에 가슴 설레어 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강수욱]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통한 제자삼기

이코스타 2006년 6월호

제자 삼는 삶으로의 부르심은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참 기쁨과 소망, 그리고 모든 열심의 이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관심이셨던 영혼구원과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가는 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땅히 주인이 걸어가신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고, 그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저 짧고 부끄러운 사역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제자 삼은 사역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난 할 수 없구나.’ ‘안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을 더 알아 갈수 있었으니, 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며 살 수 밖에 없음’을 계속해서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


사역의 한 term을 마친 후 한때 긴 고민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름대로 좌절에 빠져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로써의 부르심 앞에 처음 섰을 때부터, 그 사역에 임하면 임할수록 다른 믿음의 선배나 동지들처럼 괜찮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거나, 듣던 대로 ‘성화’되어 가는 모습은 나한테서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미울 만큼 싫은 내 모습들이 더 분명히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자 삼는 사역에 열매 없음은 내겐 큰 영적고난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그런 걸까? 나름대로 난 분명whole heartedly 하나님사역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였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내게 맡겨진 지체들에게 나름대로 난 자신 있게 늘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은 내 제자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로 세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날 보며 따라오면 안 되고 오직 예수만을 보고 직접 배우고 따라가세요.’라고… 얼핏 들으면 굉장히 겸손한 모습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 motive는 죄 성으로 가득한 내 실질적인 삶이 드러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의한, 회피 하고픈 hidden agenda일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난 십자가 뒤에 비겁하게 숨어 버린 것일 수도 있겠고, 십자가라는 도로상에 off road에 서 있는 signage처럼 방향제시자였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입니다.’ 라는 표시처럼.


그렇지만 성경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 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얼마나 완벽한 사람이며, 또한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 있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담대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나 스스로에게 수많은 question mark들이 생겨났습니다.
‘난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 일까?’ 바울과 같은 고백을 1%정도라도 따라 흉내 낼 수 있는 당당함이 하나님 앞에서 있는가? 내 삶에 실제적 열매로 드러나고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역에 열매 없음의 원인은 결과적으로 내 첫 번째의 고민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삶을 볼 때 내가 가르치는 말씀과 내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찬양의 말들과 결코 일치 되지 못함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그것이 부끄러워서 복음 뒤에 내 모습을 감추려 했었을 지도, 어쩌면 실질적인 내 모습에 관해 denial stage에 머물러 있었지 않았나 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투명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요한복음 15:7-12)


참 제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심을 내가 알고, 그 앞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가는 것이지 않는가. 주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걸어가신 길, 종 된 내가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무슨 고난의 길을 걸은 것 마냥, 오버를 하지 않았나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예수님 말씀대로 참으로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살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산다면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다 하실 텐데 말이다. 그렇게 당연한 이치를 매번 인식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 것일까?


내가 하나님 임재 안에서 – 그 사랑 안에서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완전히 녹아 없어질 텐데…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만이 드러날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사용된 사역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 날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곧 더 이상 나의 열심이 아닌 나를 통해 드러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참 사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사로잡혀 하는 사역을 내가 할 때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의 본받는 참 제자가 되어갈 것이며, 열매를 바라는 사역 이라 믿습니다.


내 안엔 창조의 능력이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 일엔 열매가 없는 건 당연 한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셨구나…라는 고백만이 나의 고백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신 그 길, 제자의 모습으로 살길 원합니다. 겸손함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방자함으로 오버하지 않고,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녹아 없어지기를 먼저 구합니다. 그렇게 내가 십자가 앞에서 투명 순결해질 때, 바울의 가르침처럼 그 신앙고백이 내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가르침을 행하는 제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어 변화되어가는 being으로써 내가 훈련되어지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제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김하나]소그룹을 통한 제자의 삶

이코스타 2006년 5월호

항상 그래왔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거나 준비해야 할 때 변함없이 내 자신에게 나의 자격과 능력에 대해 질문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볼 때, 늘 실수투성이고 부족한 내 모습 가운데 역사하시고 인도하셨던 그분의 손길을 다시 한 번 내 마음에 되새겨 본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거룩한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내게 있었다면 ‘제자의 삶’ 이였던 것 같다. JJkosta를 통해 가서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음을 발견했었지만, 내성적인 나의 성격으로 말씀을 전하고 외치는 삶이 크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늘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다가 내게 용기와 결단을 하게 해 주었던 것이 작년 3월 조지아 주에서 있었던 gpkosta이었다. 그 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준비하여 드디어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일이 KBS(Korean bible study)모임을 통해 시작되었다.


6명의 자매들과 QT 훈련과 나눔을 시작으로 말씀 모임이 시작되었다. 말씀의 기초가 없었던 자매들이여서 어떻게 하면 내게 허락하신 이 소그룹을 통해 효과적이고 건강하게 제자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 같다.
우리 모두가 구원의 대상자들이어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며 변함없이 영원토록 오늘도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더욱 사랑하는 지름길은 기도임을 발견했다. 기도는 그분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 모임과 제자 삼는 삶의 열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다. 한 영혼, 한 영혼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할 때,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김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각 영혼에 대한 눈높이 사랑으로 맞추어 갈 수 있는 훈련이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매, 감정 기복이 심하던 자매, 주제와 늘 어긋나게 대화를 이끌어 갔던 자매 그리고, 말씀이 어렵다고 투덜거리던 자매에게 나의 원래 모습과 감정과는 상관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 영혼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진정 섬기고 사랑하는 귀한 훈련이 되어가며 나를 더욱 성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제자의 삶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것을 우리는 다 알지만, 마음으로 느끼고 헌신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는 우리 모임의 꿈과 목적은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는 삶이었다. 나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을 때 비로소 내 안에 얼마나 말씀이 부족하고 지식이 없는지 깨닫게 되어서, 말씀을 더욱 붙잡고 씨름하며 고민하며 나중에는 더욱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입장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각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은혜를 부어주시지만, 말씀을 알고자 배우고자 갈망하는 모습들을 점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갈망할 때 비로소 말씀에 지배되며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섬김과 순종의 삶을 보여 주신 것처럼, 말씀을 인도하는 입장에서 내가 먼저 말씀에 순종하고 반응하는 삶을 보여서 그들에게 말씀에 대한 오묘한 맛과 능력을 증거하고 싶었었다. 말씀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삶을 다스리며 조정 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말씀이 내 삶을 흔들 때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고민하게 되고 결국은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 영혼씩 말씀에 귀를 기울여갈 때, 조금씩 반응하며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봤을 때 더욱 기쁜 마음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용기가 더욱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소그룹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며, 양육하고 돌보며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참된 종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영혼을 품고 사랑하며 말씀으로 함께 뒹구는 시간들 속에 함께 일하셨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여유와 믿음으로 제자의 삶에 더욱 헌신하며 씨앗을 뿌리는 삶이되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4-5)

[최규진]제자

이코스타 2006년 4월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후, 그 분의 부르심대로 살아갈 때 고민할 수 있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제자라는 개념인 것 같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솔직히, 필자도 “제자가 되는 것” 과 “제자 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직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때때로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사명이란, 모든 민족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항상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생각한만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전한 복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지키게 하는 것이 제자의 소명이라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필자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NIV; 1 Corinthians 15:58)


첫째, 제자로서 살아가려면 흔들림없이 굳건히 그 분을 믿는 믿음안에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stand firm” 이라고 표현했다. 즉, 세상의 어떠한 것들에 향해서도 자신의 믿음은 흔들림없이 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믿음을 흔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번 흔들리게 되는 것들은 다시 그 문제로 인해서 흔들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한번 이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문제에 흔들림없이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바로 그 중심의 흔들림없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경험했을 것이다. 즉,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제자로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이것에 해당하며,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가치있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Some faced jeers and flogging, while still others were chained and put in prison. They were stoned; they were sawed in two; they were put to death by the sword. They went about in sheepskins and goatskins, destitute, persecuted and mistreated 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Hebrews 11:36-38)


Do not deceive yourselves. If any one of you thinks he is wise by the standards of this age, he should become a “fool” so that he may become wise.” (1 Corinthians 3:18)


둘째,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하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 부분중에 하나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지 못하고, 복음만 전하는 형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속이는 자들에게 향하여 신랄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필자는 귀신을 쫓아본 경험은 없지만, 복음에 권능이 있다는 것을 매번 체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해도,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경건의 모양도 있고, 능력도 간혹 나타나지만, 자신을 속일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나 자신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류의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 자체도 그 분 안에서 치유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 날마다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고린도후서 6:8-10)


셋째,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땅에서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에서조차 자신의 사도됨을 의심받았다. 심지어 사기꾼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자신이 양육한 자들에게조차 버림받기도 하며, 또한 인정받지 못할 경우도 있다. 제자의 모습은 우리 육신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묻는다면, 그 곳에 숨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에 순종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비밀은 제자로서 살아갈 때 비로서 깨달을 수 있다.


앞서 말한 세 가지가 필자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깨달은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된 나를 제자로서 불러주신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셨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는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허정]F-2 유학생 배우자와 가정 사역

이코스타 2006년 3월호

결혼을 하고 캠퍼스 사역(Korean Bible Study)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말씀을 통한 제자 됨과 제자 삼는 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싱글 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런 기회가 내게 주어진 사실 만으로도 감사드리고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때였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jjKOSTA코디로 섬기면서 미주 지역을 그리스도의 띠로 묶으시고 동일한 마음을 품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제자들을 일으키시는 일을 보고 경험케 하심 또한 감사드린다. 너무나 부족한 믿음과 보잘 것 없는 헌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역으로 불러 경험케 하셨고 믿음의 경주를 위해 붙잡고 달려갈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그러던 중 2004년에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를 허락하셨고 이제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가 없을 때는 싱글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정도였을 뿐, 나름대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지만 막상 자녀가 생기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전부터 예상했었고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산후 조리와 육아로부터 오는 육체적인 피곤과 불규칙적인 생활은 말씀과 기도로 나튼〈쨉?여유를 주지 못했다. 주일날 예배 시간에는 아기 방에서 아기와 씨름하느라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나눌 공동체와 사역이 없어지니 나의 신앙을 붙잡아 줄 버팀목을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인 좌절감과 무기력함 가운데 주저앉게 되었다. 자녀가 주는 기쁨과 축복으로 감사가 넘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달라진 상황들로 인한 당황함과 무의식 가운데 있은 정신적인 충격, 엄마라는 새로운 자아 정체성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해 오는 혼란 또한 나를 힘들게 했다. 지금 돌아보면 자녀가 막 태어나고 얼마간은 자매에게 육적, 영적, 감정적으로 총체적 어려움을 겪기 쉬운 시기인 것 같다.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산모들의 이야기를 흔히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 것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힘든 시기일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더욱이 신앙인이라면 영적인 고갈이 더욱 삶을 건조하고 힘들게 할 것이다. 그 기간 중에 회복을 바라며 일대일 성경공부를 맡게 되었지만 나 자신에게 은혜가 부족하여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어 멈추게 되었다. 그로 인해 죄책감과 더 큰 좌절감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위의 동역자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셨다. 예전의 캠퍼스 사역을 하고 계신 간사님의 사모님께서 나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큐티 모임을 제안하셨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면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 자신이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모님의 나눔이 메마른 땅에 생명수가 되어 영혼이 소생하고 호흡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였다. 한 번 회복하시기로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놀랍게 이루어졌다. 예배를 맘껏 드릴 수 있는 환경으로 인도하셔서 예배의 기쁨을 회복시키셨고 새벽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로 반응 하게 하셨으며 동역자의 교제와 돌봄으로 지친 영혼과 마음에 따뜻한 사랑이 가득 차게 되었다.


회복과 함께 사역에 대한 갈급함과 헌신으로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사역이 아닌 가정 사역이라는 다른 그림을 보여 주셨다. 처음에는 ‘자매’로 태어났기에 가정에 매이고 한계가 정해진다는 생각에 답답함과 불공평함에서 오는 반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동안 말로만 가정 사역이라 여겼지 진지하게 사역으로 여기고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제는 자녀를 통해 가정에서 평생 제자 삼는 일로 불러 주셨음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 전 참석한 가정 세미나에서 들은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선교는 수평 선교와 수직 선교가 있는데 지금까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수평 선교에만 열심을 내고 세대를 잇는 자녀를 향한 수직 선교에 소홀하여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가정 사역은 다른 사역에 비해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고 그래서 어쩌면 ‘사역’이라는 진지함이 결여된 채 헌신과 섬김에 소홀한 대상이 되기 쉽지 않나 생각 한다. 캠퍼스 사역에서 제자 삼는 것과 동일하게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도 제자 삼는 자가 먼저 제자가 되고 말씀과 기도, 인내와 사랑,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헌신의 값 비싼 대가를 치러 야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흔히 아줌마는 용감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 보니 자신감과 자존감이 오히려 싱글 때 보 다 낮아진 것을 경험하였다.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딸로 그밖에 여러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소속감에 혼돈이 오고, 내가 속한 가정과 가족 그리고 거기에 쏟는 나의 섬김의 가치를 낮게 인식하지는 않고 있나 되돌아본다. 다양한 역할들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필요와 사명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보고 하나님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할 때 남편의 조력자로서,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 삼는 스승으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가정 사역 가운데 쓰임 받는 나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매들은 돌봄(care)이라는 달란트를 선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좋은 도구로 쓰이는 축복을 주셨다. 하지만 그런 자매도 주위의 섬세한 돌봄이 누구보다 필요한 대상이며 그런 돌봄으로 세워질 때 주어진 달란트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주위에서 갓 자녀가 생긴 자매들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 배우자들이 관심과 돌봄의 대상에서 소외되거나 그들의 어려운 상황이 간과되는 것을 종종 보면서, 그리고 직접 경험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가까운 남편부터 그들의 필요를 아는 동역자들 그리고 교회 안의 작은 공동체들이 일어나 자매들을 회복시키고 세우는 사역들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그리고 자매 본인은 신앙생활에서 주변인이 아니라 주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줌마 특유의 용감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정 사역에 충성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쓰임 받길 기도드린다.

[김혜진]갈 수만 있다면 무조건 조장 자원합니다!

이코스타 2006년 2월호

jjKOSTA 한 게시판에 올라온 이 댓글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2005년 jjKOSTA에 참석하셨던 한 조장님께서는 왜 조장으로 자원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조장으로 자원하면 코스타가 5박 6일에서 6박 7일로 늘어나기 때문에, 하루만큼 은혜를 더 주실 것 같아서 자원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하신 기억이 난다. 3주간에 걸친 인터넷 조장 훈련을 받아야 하는 수고, 조원들의 리스트를 받고 기도하고 연락하며 준비해야 하는 부담, 하루 먼저 도착해 땅을 밟고 조원들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5박 6일의 수양회 기간 동안 조장(組長)이라기보다 조종(組從)(?)으로 섬겨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각오하고도 그래도 jjKOSTA에 모여드는 조장님들. 한 두 해 조장으로 섬겨보니 정신없고 힘들어서 못하겠더라 하지 않고 갈 수만 있다면 무조건 조장으로 자원하겠다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바로 jjKOSTA를 통해 심어주기 원하시는 아비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 2005년 코스타는 초-초-초보로서 미주코스타를 처음 참석하고, 7지역 코디로 처음 섬기고, 조장으로도 처음 자원하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어쩌자고) jj 준비팀을 섬기게 퓸駭쩝?사실 그 계기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하지만 실수가 아님을 믿으며 섬기는 분들과 한 배를 타게 되었다. 열심히 땀 흘리며 노를 저으시는 분들 곁에서 ‘근데 저, 실례지만… 지금 여기가 어디지요?’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배는 이미 코스타라는 강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가 버린 듯 2005년 코스타가 막을 내렸다. 역시나 초보는 티가 난다. 다름 아닌 무엇보다 가장 열심히 준비되어야 하는 조장으로 섬기는 부분에서 조원들을 만나는 코스타 당일이 되어서야 ‘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절실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단 코스타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공동체의 모임은 역시 그 해당 짧은 기간보다 모임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 가는데 더 큰 은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 그래서 더 낮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을 중보 하는 과정을 통해 그 분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섬기는 자들에게 덤으로 주시는 은혜인 것 같다. 참석하는 조원들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한 영혼을 위해 중보 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이제껏 이메일로만 인사를 나누던 조원들과 실제로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자 설렘과 함께 부담과 걱정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장 수련회를 마무리하며 jj로 jojang으로 jeja로 함께 서서 이제 ‘각자 해체 모여’를 준비하는 120여명의 조장님들과, 팀은 다르지만 같은 spirit으로 동역한다는 사실이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후문으로 듣게 된 멋있는 조장님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모든 조장님들을 뿌듯하게 그리고 한편 긴장하게 만든다. 날마다 늦은 시간까지 밤에 혼자 깨어서 조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날마다의 메모를 적어서 마지막 날 긴 편지로 모든 조원에게 전해주신 조장님, 대체 얼마나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오셨기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조원들로부터 ‘드림 조장님’이라는 자랑을 들으시는 조장님, 코스타가 끝난 후 에도 줄기차게 follow-up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교제를 이어가시는 조장님,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가고 찾아오도록 그렇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놓으신 조장님. 5박 6일로 영혼을 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분명히 코스타 전부터 한 영혼을 품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조장 훈련을 받는 가운데, 그리고 중보의 기도 가운데 성실하게 조원들을 기억했던 마음의 열매라고 생각한다.


사실 조장으로 자원하신 많은 분들이 이미 미국 땅 전역에 흩어진 나그네로서 각자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영혼을 섬기는 부르심 가운데 계신 분들일 것이다. 광야같이 메마른 땅에서 고독하고 외롭게 한 영혼을 섬기는 분도 계실 것이고, 넘치는 사역(일)과 방황하는 영혼들을 혼자 감당하기 벅차게 섬기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코스타가 시작되기 하루 전, jjKOSTA에 모여든 한 분 한 분의 조장님들이 모두 그렇게 섬김을 습관으로, 섬김을 나의 기질과 태도로, 한 영혼을 값없이 마실 수 있는 생명수로 인도하는 그 섬김을 나의 사명으로 알아서 나를 내려놓기 원한다. 부르시는 곳에서 섬기시라는 영혼들에게 언제나 stand-by의 상태로 나를 내어주고 나를 기꺼이 허비할 수 있는 마음. 코스타에서 만난 조원들에게는 혹 단 일주일짜리 조장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임명해주신 이상 일주일 24시간, 연중무휴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jj – 조장으로 그리고 제자 – 로 산다.


아비의 마음으로 한 영혼을 섬기는 조장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jjKOSTA가 있다. 서로 돌아보아 함께 세워지는 기쁨을 누리는 자리이다. 섬김은 언제나 서툴고 부족하기만 한데도, 나에게도 말씀을 주시고 영혼을 맡겨주신 것은 나의 처음을 아시면서도 나에게 기대와 소망을 품으시고 격려해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갈 수만 있다면 조장으로 자원하겠다는 앞서 말한 한 조장님의 고백은 마치 부르시는 곳마다 스승이 아닌 아비가 되겠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