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코스타 2006년 1월호

내가 jjKOSTA와 인연을 맺은 건 2002년 봄, 그러니까 처음 코스타에 “조장 코스타” 라는 것이 생겨날 때였다. 어느 간사님의 부탁(?)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순종” 해서 시작된 섬김이 어느새 햇수로 5년째 접어들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코디”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생소했고, 미국을 10개의 지역 (처음에는 1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으로 나눈 것도, 각각의 지역에 인터넷 게시판을 링크해 둔 것도 조금 특이하게 생각되었다. 한번 미국 사람들이 jjKOSTA 홈페이지에 와서 자신의 나라 지도가 1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지역마다 주지사도 아니고 무슨 의원도 아닌 “코디”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 지역이 자신이 섬기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상상을 해보라. 미국이 가나안 땅도 아니고, 코디들이 12지파를 대표하는 이들도 아닐 텐데, 왠지 처음 jjKOSTA 홈페이지에 올라온 미국지도를 보면서 나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갈렙의 기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들곤 했었다. 10개로 나눠진 지역 중 내게 주어진 “땅”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스케일 작은 나에게 넓게 그리고 황량하게 느껴지는 땅이었다. 지도상의 색이 회색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땅은 넓으나 그 땅의 넓이와 영적상태는 반비례로 느껴졌던 건 왜였을까? 마치 감당하지 못할 것을 떠 넘겨받은 어린애처럼 잠시 멍하게 있던 나에게 문득 이 땅을 내게 주신 이유가 이 땅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에 산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10지역으로 “배당” 받은 주 (State) 중에는 솔직히 처음 알게 된 주도 있었다. 그 주들의 이름을 부르며, 지도를 보며 내게 맡겨주신 땅 (적어도 내게 맡겨주셨다고 생각한 땅)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영혼을 섬길 제자들이 일어나길, 그 제자들이 코스타 조장 훈련을 통해 일어나길 사모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코디로서 내게 주어진 지역을 섬기는 방법은 기도가 우선이었지만 구체적인 섬김은 인터넷을 통해 주로 이뤄져야 했다. 개인적으로 그 당시만 해도 인터넷과 친하지 않았고 (이메일을 일주일에 한두 번 체크할 때였으니^^), 한글자판도 사실 익힌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때라 인터넷 게시판을 어떻게 섬겨야할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섬기는 대상이 되는 조장님들의 얼굴도 잘 모르면서 인터넷으로 처음 인사하고 조장훈련을 편하게 받으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것도 처음엔 좀 막막했다. 내 성격이 그렇게 외향적이지도 않고, 또 인터넷을 통해 만나는 조장님들의 반응이 어떠실 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 반으로 조장님들께 한 분 한 분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단번에 답장을 주시는 분도 있었고, 여러 번 애원하는 이메일을 보내고서야 답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입장을 바꿔 나라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제가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섬기는 코디입니다” 라고 이메일을 보내서 조장훈련을 돕겠다며 게시판에 자기소개를 올리라고 한다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내하고 계속 시도하되 최대한 친절하게 부담 느끼시지 않게 섬기려고 했다. 때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에서 얼굴을 두껍게 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인터넷으로 먼저 소개하고 친해진 조장님들과 코스타에서 만날 때는 참 긴장되고 떨리기도 했다. 마치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러 집을 나서는 사람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만나기도 전부터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던 조장님들이었기에 코스타 기간 동안에 스쳐지나가다 얼굴만 봐도 참 반갑고, 위해서 기도가 나왔다. 조장님들이 코스타 기간을 통해 영혼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의 자리로 돌아가 제자의 삶을 계속 사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보내는 코스타 집회는 또 다른 은혜로 다가왔다. 또한 함께 코디로 섬기는 분들과 멘토님들을 인터넷의 “담”을 넘어 만나는 것도 기쁨이었다. jjKOSTA 게시판은 모든 지역이 통합된 게시판이 없기에 다른 지역 보드를 엿보기(?) 위해선 담을 넘어 (다시 jjKOSTA 홈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코스타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jjKOSTA게시판은 코스타 이후 한 달 정도는 집회의 여파로 그 흥분과 활기가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대체로 8월에 접어들면서는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코디가 게시판을 무작정 지키며 도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조용해진 게시판을 보면서 왠지 나도 덩달아 조용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인적이 드물다고 아예 문을 닫아버리면 어쩌다 지나가던 사람이 인사하려다가도 머쓱해서 돌아나가게 되지 않을까? 그 중에 오늘 하루 너무 지쳐서 말씀도 보지 못하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목마른 사람이 있다면, 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에 역사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그냥 돌아나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눠주세요.”라는 부탁의 이메일보다 내가 먼저 나누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제자로 살면서 또 제자 삼으면서 느끼는 것들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다. 캠퍼스에서 성경공부하면서 기뻤던 일, 마음 아프게 한 사람들, 감동시킨 이들,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서 배웠던 맑고 순수한 신앙, 가족들, 친구들과의 대화중에 깨달은 것들, 읽다가 힘을 얻었던 성경구절, 찬양, 시 등등…….


재밌는 것은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 주위에 일어나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더 주위를 기울이며 영적으로 민감해 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치 육아일기를 쓰는 엄마처럼 내 주위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 하나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묵상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기쁨이 참 쏠쏠했다. 작은 화분 하나에 습관처럼 물을 주다가 어느 날 꽃이 피게 되었는데 그 꽃이 나를 왜 흥분시켰는지……. 그저 ‘꽃이 피었다’, ‘예쁘다’로 끝날 수도 있을 일이 영혼을 섬기며 말씀으로 물을 주는 것과 연결이 되어 생각하니 어찌나 큰 깨달음을 주던지……. 때론 어느 분이 지나가면서 던진 말 한마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던 표정하나가 예사롭게 지나가지 않아 곱씹어 생각하다가 그것이 말씀과 연결이 되어 내 머리를 때리기도 하였다. 함께 성경공부 하며 섬기는 캠퍼스의 영혼들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느껴질 땐 그것이 너무 기쁘고 자랑하고 싶어 게시판에 써 내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가끔 올리던 게시판의 글들을 읽는 사람들이 내가 섬기는 지역 조장님들이었는지, 다른 지역 조장님들도 있으셨는지도 또는 내가 전혀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있으셨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내가 생각하는 청중은 다수가 아니고 어느 특정인도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다 내가 올린 글을 읽고 공감할 그 한 사람이다. 누군가 오늘 “좁은 문” 을 지나가다 지친 무릎을 내가 나누는 글을 읽으며 다시 일으켜 세워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섬기는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주기철 목사님의 얘기가 나왔다. 어느 형제가 그 분이 순교하지 않으시고 사셔서 말씀을 전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셨을 텐데, 하나님이 보실 땐 손해가 아니었을 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을 받고 문득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은 고작 33년을 사시면서 단 12명의 제자만을 두셨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므두셀라처럼 969세까지 살면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도 집회를 하셨다면 적어도 12명보다는 훨씬 많은 제자들을 두지 않으셨을까, 아니 제자들이 전할 필요도 없이 어쩜 전 인류가 직접 예수님을 통해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의 12제자가 또 제자를 삼고 그 제자들이 또 제자를 삼는 참으로 느리고 더딘 방법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다. 놀라운 것은 그 연약하게 느껴지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또 변색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jjKOSTA를 시작할 때 미국의 50개 주를 바라보며 감히 그 50개 주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꿈을 꾸며 땅을 나누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선포하던 갈렙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 갈렙들과 함께 “이 산지”를 바라보며 섬기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은혜이고 복이다. 그러나 그 산지를 정복하는 일, 즉 미국 전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인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일어나는 일은 오늘 그 “산지”를 품고 기도하며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한 사람의 제자에게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jjKOSTA 코디로서 내게 주어진 땅을 품고 기도하며 그 땅을 밟고 사는 이들의 마음에 제자의 삶을 풍겨주는 일. 그 일이 어느새 내 삶에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아져 있는 것은 나 같이 연약한 자를 통해서도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감을 확인하게 하시려는 그 분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한다.

[이정실]코스타와 지도 읽기

이코스타 2005년 12월호

2005년 코스타에 참석한지 이미 반년이 지나가는 지금, 비록 그 당시의 뜨거웠던 체험의 열기는 식었을지 모르지만, 이 나눔을 통해 지난 몇 년 동안의 저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있어서 코스타를 통한 지속적인 훈련의 시간들이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1999년 유학생활을 시작한 후 Korean Bible Study를 만나 말씀 훈련을 받고 캠퍼스에서 전도하며 영혼들을 섬기던 중에, 제가 코스타를 알게 되고 그 사역에 미약하게나마 동참하게 된 것은 2002년 jjKOSTA 의 2지역 (현재 Southern California, Arizona, New Mexico) 코디 및 조장으로서 섬기면서부터 입니다. 마침 동부의 Maryland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가을부터는 서부의UCLA로 옮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지의 새로운 땅의 영혼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나아갈 때도 이러했으리라 상상하며, 미국의 지도를 펼쳐놓고 jjKOSTA 준비팀과 함께 전략을 세워갈 때만 해도 동부에서 본 서부는 시차도 세 시간이나 되는 까마득히 먼 동네였고, 저는 사막지대에 홀로 파병되는 비장한 각오의 군인 같았습니다. 그 해 여름에 코스타에서 만난 2지역의 조장들과 섬기던 조원들을 통해 지역 교회를 소개받았고, 새로운 캠퍼스의 지도를 펴놓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기도하던 중에, 그 교회를 통해서 캠퍼스를 향해 한 마음을 품은 동역자를 만나게 되어 개강과 동시에 매주 금요일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다시 2지역 코디로 섬기며 참석하게 된 2005년 코스타는 2002년 코스타를 통해 보냄 받은 UCLA 캠퍼스 사역의 첫 단계를 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년 동안 캠퍼스 사역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에 대해서 여기서 다 풀어 쓰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동부의 동역자들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가지고 캠퍼스를 개척하는 저를 홀로 두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적절하신 때에 신실하고 훈련된 동역자들을 보내주셨으며, 누구를 믿고 사는지 애매모호했던 어린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히 선포하게 하셨고, 말씀 공부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2003년과 2004년의 코스타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기간 동안 2지역 코디로서 제대로 섬기지도 못했지만, 인터넷 조장 훈련을 통해 알게 된 조장님들 중에 UCLA 가까이에 사시는 분들도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영혼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성경공부에 찾아왔고, 모이는 영혼들 사이에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저를 비롯한 말씀 인도자들은 하나님을 선장으로 모신 이 배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렴풋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배 안의 사공들 챙기고, 갑판 청소하고, 시설 정비하느라 바빴습니다. 배 안의 구조도면 읽는 것에 바빠서 큰 항해 지도를 읽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5년 코스타에도 또 참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들을 코스타에 갈 수 있게끔 그리고 그 예비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게끔 정리하셨습니다. 이미 코스타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던 동역자 부부와 한 형제님이 조장으로 자원하였고, 아직 크리스천 수양회 문화에 익숙지 않은 한 자매님도 저를 따라 가본다며 용기를 내어 따라 나섰습니다. 잠시 이 동네에 머물면서 캠퍼스 성경공부에 참여하신 타 지역 조장님과, 코스타 준비팀의 간사님도 가세하여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2005년 봄 학기 후반부는 코스타 참석과 섬김을 위한 준비와 중보의 시간들이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에 바쁘고 지쳐있었던 저에게 2005년 코스타 참석은 영적인 회복과 쉼에 갈급하여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코스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저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깊은 교제의 시간을 통해 양 어깨 위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위로 받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고, 2지역 조장들과 맡겨주신 조원들을 섬길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3년 만에 그리운 동역자들의 얼굴을 마주하여 볼 수 있다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코스타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제가 기대했던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히 만족 시키셨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코스타 주제, “흩어진 나그네 선택받은 백성”의 출처인 베드로 전서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철저한 순종을 이끌어내셨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잘 해야 한다는 교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던 제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시고 계시며, 모든 악한 것에서 떠나 더욱 정결하고 거룩한 그릇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든 죽든 저 없이도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이루어 질것인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저를 당신의 일에 써주시기 위해 부르셨고,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난을 묵상하게 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그러한 개인적인 만남과 교훈은 코스타 기간 중에 2지역 조장들과 우리 조 조원들의 체험을 통해 뚜렷이 확증되었습니다. 코디로서 또한 조장으로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책임져야 하고 인도해야 하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제가 낮아지고 조용해지고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인하여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엎드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은 저를 쓰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영혼들에 대한 온전한 섬김은 주님에 대한 섬김이 온전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다시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그렇게도 보고 싶던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의 손길과 위로를 넉넉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처럼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만나 격려하고 도전하고 또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각자의 가야 할 땅으로 흩어지는 순종의 장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동부의 동역자들과, UCLA 성경공부를 통해 형성된 동역자들 간에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서로 공유하게 하시는 가운데, 새로운 동역의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언니가 이제껏 저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고 계셨더군요.” 1년째 성경공부를 함께 해오던 자매님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던진 이 한마디에 저는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그것을 캠퍼스 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는데, 바로 그 세미나 강사님은 동부에서 저를 제자로 훈련시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로서 또 다른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과정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캠퍼스 사역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2005년 코스타를 통하여, 외로움과 분주함과 스트레스로 제가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잊어가고 있을 때, 저의 인생과 이 땅에서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지도를 다시 보게 하시고, 제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하시고, 어디로 가야 할지 초점을 다시 맞추게 하셨습니다. 2005년 코스타 이후 저의 개인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이제 3년간의 개척기를 지나서 성장의 단계에 접어든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도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꾸준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관계 중심의 전도를 통한 복음 선포 위주의 개척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말씀묵상 훈련을 통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는 제자로 세우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초점 맞추기는 이번 코스타 참석을 통하여 한 마음이 된 동역자들의 민감한 영성의 회복을 통해 영적 지도를 함께 읽어감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이 캠퍼스에 있을지 잘 모르고, 하나님께서 다시 어디로 보내실지 아직 알 수 없으며, 언제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실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동안 제가 어디에 머물던지 하나님은 저에게 거룩함과 겸손함과 순종함을 원하신다는 것과, 비록 흩어져 있지만 곳곳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한 마음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계속하여 세우시고 성령의 끈으로 연결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도전할 힘과 동역의 기쁨과 헌신의 결단을 이루는 일에, 코스타 집회와 준비과정과 이어지는 지원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저를 포함한 모든 코스탄들이 좋은 훈련의 도구로 쓰이기를 기대합니다.

[이혜련] JoJang, JeJa, Just Jesus!

이코스타 2005년 11월호

jjKOSTA는 미주 코스타 연차 수양회에서 조장으로 섬기시는 분들을 도와드리는 코스타의 파생 사역입니다. JoJang, JeJa, Just Jesus라는 모토를 걸고 조장(JoJang) 자원자들이 수양회 기간 동안 조원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수양회 이후에도 각 처소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Just Jesus)를 바라보며 제자(JeJa)로 세워질 것을 바라며 섬기고 있는 사역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jjKOSTA 웹 사이트 ( http://jj.kostausa.org)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KOSTA에서 small group (조)의 역할이 큰 만큼 소그룹을 인도하는 조장님들이 조원들을 잘 도와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코스타 이후에 활로우업을 함으로써 코스탄들이 코스타에서 헌신했던 마음을 가지고 제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은, 코스타를 일회적 수양회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코스타의 정신이 코스탄들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jjKOSTA는 계속적으로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입니다. 10개로 나누어졌던 jjKOSTA의 미국 지도가 지금은 16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각 지역별로 섬기고 있는 코디네이터가 모두 스물 다섯명, 그리고 멘토들이 열 다섯분이 계십니다. 모두들 섬기는 지역을 위해 겸손히 물심양면으로 뛰고 계십니다.


솔직히 저는 jjKOSTA 지역 코디 1년차 초년생입니다. 현재 제가 살고 있는 텍사스가 속해 있는 3지역(TX, MS, LA)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 작년 10월 말 무렵이었습니다. 오랫 동안 jjKOSTA를 섬겨 오신 분들의 노하우와 마음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부족하나마 2005년 jjKOSTA 준비팀으로 그리고 활로우업팀으로 섬기며 느끼고 배웠던 것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실은 2005년 jjKOSTA 준비팀으로 섬기게 된 것은 저의 무지함이 한 몫을 했습니다. 제가 2002년과 2004년에 코스타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조장으로 섬겨 본 적이 없고 조장 수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jjKOSTA 준비팀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대부분의 코디님들이 함께 하는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준비팀 참여를 묻는 이메일에 ‘네’라고 답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소수의 지역 코디님들만이 준비팀으로 섬기시더군요. 7월 코스타가 열릴 때까지 준비팀을 섬기며 배운 것들을 생각할 때 저의 무지함을 이용하셔서 귀한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2005년 준비팀에는 네 명의 준비당당과 또 다른 네 분의 준비지원 코디님들, 그리고 세 분의 준비자문, 그리고 코스타 지원 간사님과 웹 지원해 주시는 분이 함께 했습니다. 네 명의 준비담당 코디들과 자문을 맡아 주신 분들이 각기 다른 지역(뉴욕, 메릴랜드, 버지니아 그리고 텍사스)에 있는 관계로 컨퍼런스 콜과 이메일이 저희의 주요 의사소통 도구였습니다. 준비담당 코디들이 모두 처음 섬기는 지라 좌충우돌 잘 몰라서 실수도 있었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였지만, 모두를 함께 끌고 가기 위해 끊임없이 인내하시고 잘못이 있을 때마다 적절하게 지적해 주시며 필요시에는 솔선수범으로 본을 보여 주시며 도와 주셨던 자문위원들을 통해 섬김의 미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서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각자의 역할이 자리잡는 것도 서툴렀던 네 명의 준비 담당 코디들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각자 맡아야 할 부분들,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일들을 감당해 내는 변화의 모습을 경험하며 동역의 조화로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월 코스타까지 한 팀으로 영육간의 전쟁을 함께 치뤄내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싹트고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넷 훈련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가며 일촉측발의 상황들도 가끔 발생해 하나님은 우리가 꾸준히 그리고 열심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확인시켜 주시기도 했습니다.


준비팀 내에서 커뮤니케이션 외에 활로우업을 담당하고 있는 저로서는 7월 코스타가 끝난 후 한 달의 공식 활로우업 기간과 그 이후의 시간에 또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코스타 이후 활로우업의 필요성과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스타를 어떤 운동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jjKOSTA의 활로우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코스타는 일주일 동안 말씀과 성령의 잔치를 벌이고 끝나는 일회성 수양회가 아니라 그 이후에 코스탄 각자의 삶에서 그 능력이 발휘되어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저였기 때문에 준비팀 내에서 코스타 전/중/후로 그 담당 역할을 나눌 때 코스타 후가 가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부수는 매일의 삶을 어떻게 제사로 드리느냐에 달렸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코스타 이후 코스탄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활로우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코디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jjKOSTA의 10년 뒤의 모습을 그리며 섬기고 계시는 한 선배님의 열정과 비젼을 통해서 저의 눈도 조금은 떠졌습니다.


jjKOSTA의 네트워킹이 훨씬 단단해지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유용하게 쓰여질 10년 뒤의 모습을 그리며 올 해 처음으로 문을 연 jjKOSTA follow-up 웹 페이지. 100명 정도의 코스탄이 궁금한 마음에 회원 가입을 했습니다. 한 두번 방문하신 후에 발길을 끊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웹페이지의 운영과 내용 면에서 아직도 미숙한 점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가 끝난 지 석달이 훨씬 지난 현재, 매일 큐티를 나눠 주시는 분이 계시고 원투원 보드를 통해서 일대일 제자 양육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속적인 발전이 있고, 웹페이지를 위해 코스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코스탄들을 섬기기 위해 웹페이지가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 지길 소원합니다.


활로우업을 위해 보냈던 이메일들과 걸었던 전화들… 여러 분들과 연락을 하며 미국 여러 곳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주의 제자들을 만났고,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가기를 소망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접할 때, 활로우업의 효율성과 필요성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시고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경제(가치)의 법칙이 이해가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코디님과 코스탄이, 조장과 조원이, 혹은 조원들 끼리 원투원을 시작하고, 지역교회나 캠퍼스의 영적 부흥을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통해 도전받은 대로 말씀 공부를 하고 훈련을 받는 분들의 소식을 들으며 저 또한 힘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끊임없이 코스타를 통한 열매가 미주 전역에서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jjKOSTA가 귀하게 쓰임받길 기도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김소연]The Thing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이코스타 2005년 8월호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1:1-2)



 



2000여 년 전 예수께서 이 땅으로 내려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오늘 우리의 교회 공동체와 캠퍼스 안에서도 동일한 은혜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 어느 곳보다도 우리 마음 안에서 가장 또렷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붓을 들었던 누가의 열의를 흠모하며, 오늘 여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친구들을 대신하여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일들 (the thing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에 관해 나누어보고자 한다.[i] 우리가 배운 바, 즉 복음의 능력이 다른 여러 곳에서도 귀한 열매 맺게 하시리라 기대한다.



 



한 어부가 내어드린 고깃배



 



요즘 두 명의 자매들과 함께 공부하는 누가 복음을 보면서 흥미롭게 지난 시간들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누가 복음 5장을 펴면 주님이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장면이 나온다 (5:1-11). 주님이 게네사렛 호수가 물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곧 제자가 될 어부들에게 말씀의 능력을 체험케 하실 터인데, 먼저 하셔야 했던 일은 작은 요청이었다. 누군가의 배에 오르시는 것이 그것이다. 배 두 척 중 한 척을 택하사 청하셨다. “선택이라는 단어와 만나면 늘 궁금증이 돋는다. 선택 된 배의 임자는 어떤 이유로 택함 받았을까? 하지만, 많은 경우 주님의 부르심을 우리의 단순한 방식으로 해석하려 할 때 항상 문제가 생기는 듯 하다. 차라리 주목하고자 하는 사실은, 주님께서 청하실 때 어쨌거나 먼저 배를 내어 줄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 ‘작은 순종이 가져온 결과는 귀하다는 것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기적은 순종한 첫 번째 어부 한 사람만을 향하신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이웃의 다른 배까지 물고기가 넘치도록 채워졌고, 그러한 말씀의 능력은 함께 하고 있던 호숫가 어부들 모두에게 목격되었다. 말씀의 능력 앞에서 어부는 뿌리 깊이 자리했던 믿음 없음의 죄를 주님께 자백했고, 배를 뭍에 대자마자 세 어부시몬, 야고보,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주님을 따랐다. 십자가의 길 앞에서 주님을 외면한 뼈아픈 실수들도 범했지만, 종국적으로 그들의 삶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훌륭한 제자의 삶으로 변화 되어 오늘날까지 믿음의 후학들에게 주님을 따른 순례자의 본을 보여준다. 그들처럼 우리도 그물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쫓았노라고, 그 첫 마음으로 끝까지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작은 순종의 시작은 너무나 소중하며, 우리는 그러한 작은 시작들을 계속할 수 있길 소망한다.



 



작지만 소중한 시작



 



필자는 개인적으로 2001년 뉴욕/뉴저지 지역 KOSTA (gpKosta) 기간에 주신 말씀이 처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구체적인 힘이 되어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15:10-11)



 



선명하게 남았던 것은 마지막 구절 이같이 전파하매 이같이 믿었느니라이다. 누구에게든 전하기만 하면 믿을 것만 같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확신을 주셨다. 그 확신으로 소그룹 리더 초보의 첫 걸음을 디뎠다. 집회가 끝난 후, 본 교회 전도사님의 도움으로 청년부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NAV Press에서 출판된 Richard Peace Learning to Love God, Learning to Love Ourselves, Learning to Love Others 세 권의 씨리즈로 각 권이 7개 단원으로 구성된 영문판 교재를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 안 청년 중 일부는 유학 초년생 혹은 어학 연수생이었던 터라 영어공부에 대한 불타는 열의 때문에 한국어로 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수렴하면서 말씀을 공부하는 자리로 한 사람이라도 더 유도하기 위해 결국 성경공부를 영문판 교재로 정하게 된 것이다. 뒤섞인 동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정화시켜나가셨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들이 영어보다는 말씀에서 받는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했다. 소그룹에서 첫 번째 목격한 복음의 힘이었다.



 



가장 높은 은사, 사랑을 사모하는 공동체



 



서툰 시작을 격려 받으면서 열 달 가량이 지날 무렵 세 권의 성경공부 소책자가 모두 마쳐졌다. 그 사이 주님께 내어드린 시간들이 하나님 손으로 채워져 가면서 생명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가슴 벅차게 바라보다가 배웠다. 복음 전할 사명이란 것이 사실은 믿는 자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을 나눌수록 우리가 열매 맺기 원하시는 성령께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게 하셨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알고 주님을 닮고 싶은 열망을 허락하셨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2:31-13:1)”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4-8)”



 



사랑이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인해 작은 공동체의 나눔이 풍성해져 갔다. 속 사람이 열매 맺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회복되어갔다. 사랑을 실천하려는 열심에 이따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 없이 무모한 일들도 했다. 새벽기도의 마음을 주셔서 서서히 새벽을 깨우는 지체들이 늘었다. 그러던 중, 두 시간 떨어진 어느 학교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한 지체가 새벽기도에 동참하고 싶어했다. 결국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 제일 먼 곳부터 차례로 서너 군데를 돌아 모두 모여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새벽 성전을 향해 함께 가던 그 발걸음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이 일은 한 번으로 그쳤지만 그 여파는 교회 안에서 상당 시간 지속되었다.



 



너희들은 가라 저 캠퍼스로!”



 



교회 안 성경공부가 막바지에 이른 이듬 해 초 여름 우연한 여행의 기회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도전을 주셨다. ‘기다리다 지쳐 사슴목이 된다’는 캠퍼스 소그룹 성경공부 리더로 헌신 중인 지체들의 삶을 보여 주셨다. 학교로 돌아오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교회 안의 성경공부가 어느덧 익숙해져 온실 안처럼 여겨졌다. 친절하게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인 인도 방법들을 제시해준 공과 책에 감사했지만, 다음 단계에 대한 새 소망에 갈증이 났다.



 



가을 문턱 자연스레 교회 안의 성경공부는 일단락 되었고, 학교 안은 개강예배 (캠퍼스 안에서 학기 초마다 각기 다른 지역 교회를 섬기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모여서 연합으로 드리는 예배) 준비로 분주해졌다. 그 무렵 교통 사고와 함께 차를 폐차하면서 캠퍼스 안에 발이 묶였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악도 선용하시는 섭리. 마음 안에 먼저 소망을 두시고 행하시는 섭리.



 



두 번째의 시작



 



2002년 가을 학기 대학원생 연합 개강예배. 말씀 전해 주신 멘토님께서 힘주어 전하셨다.





“하나님의 시계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의 깊이를 측정하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 복음의 능력은 이미 여러분에게 와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내 안에 쌓이게 되면, 우리는 교만으로 죽습니다!





주님!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만드신 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알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전하지 못하는 무능함과 주님을 더 잘 알아간다는 착각 사이에서 교만이 싸여 죽게 되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살고 나도 산다는데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살 수 있다는 생존본능으로 인해 빨리 결단했다. 때마침 교통 사고를 계기로 이사 들어가게 된 아파트에 한국인 신입생이 둘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는 분이심을 또 보았다. 이미 모아두신 이들과 캠퍼스 안에서 목요일 밤마다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예배가 있은 바로 다음날로 구체화 시켜 나갔다. 공과 책이 아니라 성경책을 붙들고 시작했다. 이후 성경공부 모임은 다른 학생 기숙사 아파트들로 서서히 옮겨 다니면서 계속되었다.



 



결단 후 실천은 신속할수록 좋다. 우리 머리 속에서 짜내어 나오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구실만 그럴싸해지고 그다지 신통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믿을만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오늘 생명의 양식을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다면 해가 지기 전, 그 마음이 식기 전에 어서 베푸신 자의 뜻대로 속히 행하길 권한다.



 



처음 배를 내어드리기로 작정하는 어부가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믿는다. ! 하나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환경을 잘 살펴본다. 당신보다 앞서 행해 놓으신 것이 분명히 있다. 눈을 크게 뜨고 그 뜻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주위 깊게 둘러 본다. ! 계획이 섰다면 반드시 말씀으로 확인 받는다. 그리고,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안 한다보다는 한다쪽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 부딪쳐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다면 자성의 시간을 허락하신 아버지께 감사 드린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실패했다면, 다음 기회가 왔을 때 더 낮은 포복 자세로 또 시작한



 



그 뜻대로 부르신 사람을 낚는 어부들



 



두 세 명을 기대했던 애초의 짧은 생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공부 반 첫 날부터 일곱 명의 지체들을 불러 모으셨다. 잘은 모르지만, 마지못해 온듯한 얼굴도 보였다. 첫 만남에서 간단한 자기 소개와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했다. 다음 주 같은 시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시 모였다. 그들 각자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성령님께서 친히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셨다. 그 때에 우리 중 누구도 자신들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기회들은 때때로 아주 작은 일인 것처럼 위장 되어있다고 한 워렌 목사님의 말처럼[ii], 이들은 지금 유학생 중심 개척교회의 일군들로, 또 캠퍼스 안에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섬기는 자들로 세워져 가고 있다. 어려운 시간들도 지나고 있지만, 말씀과 씨름하며 부심하는 삶의 모습들이 귀하다.



 



교재 준비하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참 믿음으로 인도한 책. 로마서! 그들과 같은 감동으로 아니 더욱 진한 감동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며 로마서를 공부하기로 정했다. 로마서 공부를 위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이것 저것 모았다. 친구가 권해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강해집 총 11권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년 전에 지역교회 목사님 한 분과 함께 공부하고 보관해 두었던 유인물들을 복습했다. 교회의 전도사님이 주신 IVP ‘말씀과 삶성경공부 시리즈 소책자를 문제 출제의 뼈대로 삼고 가급적 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성경공부 인도 경험 이제 겨우 두 번 째, 문제 출제에는 더더욱 초보인지라 결국 많은 핵심적인 문제들은 그대로 빌어다가 쓰기에 그쳤다. 그 밖의 상세한 부분들은 소그룹 인도의 경험이 많은 한 친구와 또 한 집사님을 멘토 삼아 조언을 받았다.



 



하나님의 복음은 자랑스러운 것!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16)



 



가장 놀라운 것은 공부해 나가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스러워하게 된 일이다. 능력은 사람의 말에 있지 아니하였고 참으로 말씀에 있었다. 복음의 능력을 확신 시켜준 코 끝이 찡한 감동의 현장도 경험하게 하셨다. 연변에서 온 한 형제 이야기이다. 두 분의 멘토님들께서 방문해 주신 자리에 이 형제가 초대를 받아 함께 하게 되었다. 초대해 두고서도 올 것을 기대하지 못했던 시간. 그 자리에 와서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2)” 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형제의 모습을 지켜본 우리 모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은혜를 체험했다. 믿음은 복음을 들음에서 난다는 것,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됨을 눈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영혼들이 다 그렇게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쉬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장기 기도 제목이 되어버리는 지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우리가 배울 것은 지치지 말고 그 영혼을 끝까지 품는 인내심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적인 사랑이 바로 그러하셨다. 포기하고 싶은가? 그럼 한 번 포기해보길 권한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이다.나는 너를 포기한 적이 없단다.”[iii]



 



항해의 바람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 뜻에 따라 영혼을 섬겨보려고 시작한 지체들이 부쩍 나는 받기만 했노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에게서 조원들에게서. 바쁜 학기 중에도 더 바쁜 학기 말에도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게 하신 것은 때마다 우리의 도움되신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이었다. 헌신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자녀들을 가장 먼 곳의 별과 지구상의 마지막 모래 한 알갱이 (the remotest star and the last grain of sand) 까지도 동원하여 도와주시는 하나님 은혜였다.[iv] 은혜를 아는 자들이 되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렇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우리의 이름을 하나씩 친히 불러 한 자리에 모으시고, 모인 중에 서로를 세우게 하신 아버지의 경륜으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우리의 약함을 쓰기 기뻐하시는 하나님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때와 비교하여, 성경공부 중 영혼들을 섬기며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일 것이다. 리더에게는 모임에 앞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할 사명이 있다. 또 먼저 준비된 자세로 은혜 받게 해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이러한 사명감은 어찌 보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위대한 일로 보일 수 있다. 열심은 있는데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그럼 당신은 잘 준비되어 있다. 의심치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쓰시는 분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지체들과 함께 공부하는 동안 마음 속에서 리더라면서 내가 왜 이렇게 어눌하지? 이것 하나 똑 부러지게 설명을 못 하다니…’등의 생각들을 수시로 했던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기도마저 너무 서툴고 어린 아이 같아서 스스로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서툰 말솜씨와 다듬어 지지 않은 대표 기도는 다른 지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부분에서는 그에 합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감당할 능력도 공급하시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는 것은 리더의 연약함과 다듬어지지 않은 소박함이라고 생각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준비는 물론 중요하지만 애써 완벽한 체 할 필요는 없다. 배를 움직이는 바람은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며, 실수와 좌절감으로 범벅된 눈물을 연료로 쓰신다.



 



낙심하는 순간은 여전히 온다. 아마도 가장 힘든 일은 부족한 스스로의 인격과 싸우는 일이 될 것이다. 리더로서 늘 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두려움도 많을 수 밖에 없다. 탄식 가운데 토로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7:24)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맛보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 사람들에게 얻는 호의로 높은 마음을 품을라치면 아버지께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지체들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도 있었지만, 이로써 모두에게 우리가 바라 볼 자는 오직 예수뿐임을 확인시키셨다.



 



많은 경우, 리더의 자존심을 생각하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 때에 형제 자매들은 오히려 하나가 되어 중보기도를 해주었다. 공동체 안에서 솔직하게 나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절대로 나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가장 취약한 자리에 가기로 자청하는 일을 기뻐하신다.[v] 내가 직면한 위기의 상황은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절호의 기회였고, 또 한편 더불어 먹고 자고 씨름하며 쌓인 우정의 중심에 주님이 자리하심으로 인해 견고한 삼겹줄이 되는 원리가 드러나는 계기였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4:12)”



 



공동체가 단단한 삼겹줄이 되려면 첫째,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하고, 둘째, 연약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셋째, 기도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감히 제안하고 싶다.[vi]



 



빈틈을 채우시는 하나님



 



본문을 공부하는 사이 사이로 언약, 예표, 성막 등에 대한 보충 수업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는 중간에 진도를 멈추고 짚어 나갈 부분을 짚고 지나갔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채워주셨다. 한 번은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단숨에 멘토님 한 분을 직접 학교로 보내주셔서 성막에 관한 보충 수업을 해주시기도 했다. 또한 모임 중에서 우리의 이해가 온전치 못하게 남겨진 성경구절들은 그 주(week) 안에 각자 다른 곳에서 때로는 설교 말씀으로 때로는 묵상과 독서로 한 번 더 깨우치시고 채워주셨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빈틈을 완벽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성경공부 진행 중반쯤이었다. 몸도 맘도 힘든 일로 지쳐가던 중 jjKosta의 어느 지역 웹 보드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성경공부 인도자들의 후기를 모아 만든 어느 잡지에서 발췌한 글이라 했다.  



 



아들을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어하던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피아니스트 연주회를 데려 갔어요. 그런데 공연 시작 전 엄마 몰래 그 조그만 아들이 무대 위 피아노에 올라 앉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 사람들은 ‘저 아인 뭐야..’하면서 웅성댔지요. 그 때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나오더니 그 아이를 뒤에서 안고 같이 연주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로 그 노래의 빈 부분을 채워가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아이의 귀에 속삭였대요.“Keep playing. Don’t quit. Keep playing. Don’t quit.”



 



서투르게 연주하고 있는 어린아이 뒤에서 빈 멜로디를 틈틈이 채워주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통해그만두지 말고 계속하라’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를 읽었다고 말하는 자매의 고백에 나도 눈물이 글썽했다. 우리가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성경공부도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 품 안에서 그 분의 도우심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한대로 빈틈을 친히 채우시고 격려하시면서 부르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셨다.



 



모임이 거듭되면서 형제 자매들이 떨리는 기대감으로 전도를 계속했고, 성경 읽기 모임과 일대일 양육 등이 파생적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물론 중요하지만, 이 당시 상황에서 우리에게 터득하게 하신 것은 듣고 안 만큼 어디까지 행동으로 옮기느냐의 중요성이었다. 성숙을 위해 실천은 꼭 병행되어야 한다.



 



여름 방학과 함께, 두 학기에 걸쳐 목요일마다 모이던 로마서 공부 모임은 일단락 지어졌다. 받은 은혜를 실천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자고 결단했다. 이후 모으셨던 자들을 통해 하신 일들은 첫 어부가 한 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주안에서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흩어지기 위해 모인 자들이라는 디아스포라의 비젼을 지속적으로 나누었고 이제 흩어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계속 된 사도행전 29



 



이어진 사도행전 공부 모임에 대해 증거하려면, 2003년 코스타 집회를 통해 하나님이 각 사람들의 마음 안에 행하신 일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주일 예배를 통해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 하신 한편, 계기가 될만한 도전을 받게 하심으로 뒤따른 실천을 용이하게 하셨다. 우리의 믿음은 실천해야 굳건하게 다져질 수 있다. ‘세상의 유혹을 소그룹으로 이겨야 한다는 마지막 날 파송 예배의 메시지가 지체들의 마음에 강하게 남았던 모양이다. 받은 은혜와 도전이 원동력이 되어서 지체들이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여름 내 다른 주(state)에서 summer program에 참가 중이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한편 너무나 당연하게 이 모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멀리서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인간인 내 마음이 이렇게 기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즐거우실까 생각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지체들의 깨달음이 너무 귀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이다. 성령이 없으면 복음을 전할 사명도 겁나고 부담스러운 과제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한다. 한 여름을 지내면서 또 한번 부쩍 커버린 모습들을 마주 대하던 날,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보았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3:6-7)”



 



이들의 모임은 프리셉트 성경 연구원의 GBS(Group Bible Study)용 교재로 시작했다. 사도행전 공부의 구성원은 로마서를 함께 했던 멤버 중 세 사람과 그 기간 새로이 주님을 영접한 두 사람, 그리고 새로이 함께 하게 된 두어 명의 학생들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기대처럼 로마서 멤버가 완전히 흩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새로운 그룹의 핵심 멤버가 되어 공동의 리더쉽을 가지게 되었다. 서너 명의 핵심 멤버들이 한 주씩 돌아가면서 준비하여 그룹을 인도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허락하신 리더쉽의 연습시간이었다. 가끔씩 참석할 기회를 얻어서 함께 할 때마다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지체들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고 도전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난감하리만큼 내가 할 일은 너무나 없었지만, 이제 지면을 통해 이들이 써나간 사도행전 29장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나에게는 큰 감사의 제목이다.



 



이와 동시에 뉴욕으로 파송된 예수전도단(YWAM)의 한 선교사님과 함께 하는 별도의 제자훈련 반이 캠퍼스 안에서 두 학기에 걸쳐 진행되었다.[vii]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훈련 시켜 주신 것은 우리의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알기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하나님의 품성은 짧은 글 속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룩과 순결, 그리고 친밀감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학교 안의 수요일 사도행전과 금요일 제자훈련 반은 해가 바뀔 때까지 계속 되었고, 각 사람들의 믿음의 나무에 하나 둘씩 나이테를 둘러 주었다.



 



순종으로 맺어지는 열매, 그 첫 열매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자로서의 부르심에 한번 순종했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인격이 linear relation으로 계속 향상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 넘어지고 일어났다가 또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자란다. 각자의 부족한 인격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넘어지는 위기상황을 자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소한 이유로 서로를 의심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화합하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도 한 쪽에서는 계속 진행된다. 우리가 사명에 대해 진지해지려 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할 때, 사단은 별의 별 종류의 방해물들을 늘어 놓는다.[viii] 다행히 이것은 아주 낮은 술수여서 조금만 정신 차리면 이겨낼 수 있는 시험들이지만, 그 상황에 몰입되어버리면 헤어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ix]믿으므로 선 자들이 할 일은 두려운 마음으로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 11:20)”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2-3)”



 



지난 학기 초부터 리더들이 한 번 더 흩어져서 다섯 개의 조로 재구성되었다. 유학생 중심 지역 교회 담임 목사님의 도움으로 빌립보서 공부가 시작되었다.



 



아무 일에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자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2:3-5)”



 



또 한번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양육과 성장의 기회를 맞고 있다. 각 그룹에는 신입생들이 많이 수용되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좌충우돌 부산한 모습도 가끔 드러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서 사랑할 이유만 찾자고 결심하자. 그 때에 복음의 문이 열린다.[x]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그룹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 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었지 않은가! 만일 나를 바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기 불가능한 갈등의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바꾸실 때까지 조용히 인내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 (pray God to grant you His support that you may quietly bear them) 하자는 아 켐피스의 조언에 귀 기울여보자.[xi] 성경공부 모임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서로의 모난 부분을 조용히 끌어 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배운다.



 



8:28로 마치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우리는 고백한다. 육신의 소욕을 위해 바친 시간은 너무나 헛되었지만 주님을 알기 위해 바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알게 하신 것을 실천하기 위해 바친 시간은 자연스레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배웠다. 성령의 열매와 구원의 열매!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더 헌신해서 아버지께 열매를 드리고 싶지 않은가? 제자 삼기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같이 넘어지는 사람이지만 그분을 의지하는 자를 아버지는 쓰시기 기뻐하신다. 기억하자. 오직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을! 아직 준비되지 않았노라고 한없이 기다린다면 어느덧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꾸중하실지 모른다.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통해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모두가 협력하고 짐을 나누어 지도록 하셨다는 점이다. 지난 4년간 여러 지역 교회들과 선교단체, 목사님들과 선교사님 또 평신도 사역자님들, 캠퍼스 소그룹과 캠퍼스 연합 예배, 복음주의 운동의 여름 수양회, 지역 지도자 훈련 학교 등 각자가 제 몫을 다했다. 재미있는 것은, 소그룹으로 먼저 초청되었다가 주일 성수와 십일조 신앙으로 자라는 지체가 있는가 하면, 주일 예배만 나오다가 소그룹으로 인도 되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지체도 있었다. 실제로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리더쉽을 양육 받고 지역 교회에서 더 헌신하기도 했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마다 성전에서 무릎을 꿇다가 선교 헌신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두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주어진 몫을 감당하겠다는 각오만 하자. 신실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때에 따라 필요한 힘과 은혜를 공급하신다. 가장 선한 열매가 우리 안팎에서 풍성히 맺어지도록 다만 그 분 안에 거하자. 함께 거하자. 주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혼자서 무엇을 이루라고 하신 적이 없다. 리더에게는 특별한 어려움이 올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세워진 지체들 중에도 오늘 하루를 살기가 버거우리 만큼 힘든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헌신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이도 있다. 공동체의 기도가 참으로 절실한 때 이리라. 고난이 육체를 뚫고 들어간 깊이만큼 영혼의 깊은 곳에 주님이 들어가실 수 있음을 배웠다. 형제의 고난이 썩어진 밀알이 되어 하나님이 맺게 하실 공동체 안의 선한 열매를 기대하며 함께 기도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지금 당신의 빈 고깃배를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채워주실 만선의 기쁨이 당신과 당신이 속할 작은 공동체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i]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 이젠 참으로 내 피붙이 같이 느껴지는 귀여운 동생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 길목에 섰을 때마다 옳은 선택을 위해 도와주신 멘토님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묶인 귀한 이들에게 전하고픈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밑 그림 삼아 부족한 글 솜씨로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ii]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340 .



[iii] 행여 내가 포기하더라도 그 분은 그 지체의 영혼을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그 사실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때로는 그 분께만 완전히 맡겨 버려야 할 때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영혼을 위해 내게 맡기신 역할이 장차 올 주인공의 길을 평탄케 하는 조연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변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이제 뒤에서 기도하는 자리로 가자.



짧은 지면을 빌어 잠시 사족을 붙여본다. 이성친구를 전도하려다가 겪는 심한 갈등상황으로 인해 본인의 신앙생활 마저 힘들어지게 되는 것을 종종 본다. 현상을 타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책하는 마음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대체로 ‘1)내가 주게 될 상처로 인해 예수님까지도 영원히 미워하게 될까 두려워서, 2)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심정으로 더 큰 죄를 짓지 않으려고 정리하지 않고 쳇바퀴를 도는 경우의 두 가지인 것 같다. 불신자 이성친구를 무조건 사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내게 주어진 역할 이상의 것을 위해 분투하면서, 위의 두 가지 예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놓길 권한다. 당신이 포기하더라도, 당신이 실수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도 실수하지도 않으신다.



[iv] Oswald Chambers, My Utmost for His Highest, Dec 1. 



[v] 이것에 대해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을 조금 덧붙이고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저술가 중 한 분인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많은 저서를 관통하는 가르침에는 무기력함과 겸손의 리더쉽이 피력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종의 모습, 어린 양의 모습으로 사랑 때문에 힘을 사용하기를 끊임없이 포기하시는진정한 영적 리더쉽을 가지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바로 그 모습을 배워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powerlessness”의 리더쉽은 단순한 심약함과는 다르다. 지나고 난 후 되돌아 보니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나의 심약함과 실수가 자발적 포기와도 같은 효과를 내도록 사용하여 주셨음에 감사 드린다.



[vi] 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를 보면 기도하는 지도자, 연약한 지도자, 신뢰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새 세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크리스쳔 리더쉽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특히나 소그룹 안에서 연약한 지도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vii] 교재는 YWAM (Youth With A Mission)의 제자훈련 성경공부 시리즈로 진행되었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에는 하나님의 품성을 깊이 알아가고, 배경 지식을 적절히 삽입하여 본문 이해를 도우며, 선교 사명과 중보기도의 동기를 부여하도록 짜여진 좋은 교재라 생각된다. 새 신자가 섞인 그룹에서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을 듯 하다.



[viii]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373-4 .



[ix] 사단의 전략에 대해 궁금하거나 아직까지 사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속히 읽어보기 권한다.



[x] 김서택, 출생의 비밀, 208 .



[xi] Thomas a Kempis, The Imitation of Christ, chapter 16. Bearing with One Anothers Failings.

[정지웅]전하는 삶과 유학 생활

이코스타 2005년 2월호

본인은 지난 2001년 가을 메릴랜드로 유학 온 후 줄곧 워싱톤 DC 지역의 유학생 중심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인 한어 성경공부(Korean Bible Studies; KBS)에서 훈련받고 있으며 2002년 가을학기 이후 간사로 섬기고 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했기에 결코 여유로운 시간만은 아니었지만 지난 3년여간을 되돌아볼 때 모든 순간, 과정들이 이전에 품고 바랬던 것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롭게 허락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 중 간사로서 말씀 전하는 사역을 통해 부족한 자에게 은혜로 깨닫게 하신 바들을 아래 3가지로 함께 나누려한다.


첫째로 ‘전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사역을 시작했던 2002년 가을학기는 참으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의 때가 아닌가 싶다. 1시간의 말씀 인도를 위해 주중에 10시간 이상의 묵상과 준비를 할 때 내 자신이 먼저 말씀을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매일 같은 본문을 반복하여 묵상함에 따라 전날의 의문들이 다음날 하나씩 풀려나갔다. 그렇기에 혹 깨달음이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하루를 넘길 때에도 다음날 새롭게 인도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잘 만들어진 성경공부 교재들을 예습하여 나누는 것이 아닌, 내 스볜?말씀으로 하나님과 독대하며 고민하고 묵상하며 찾아감으로 얻게되는 이 배움의 기쁨은 내 삶에 점점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로 자리매김 되어갔다. 그렇기에 당시 박사 학위 종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사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초대는 매주 말씀 인도를 위해 매일 일정시간을 들여 준비해야 함에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전하는 자로의 배움과 준비 과정은 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매일 말씀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는 ‘전하는 것이 곧 참된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전하는 자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묵상하고 동원할 수 있는 자료들을 빠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매주 정해진 한 장의 본문을 매일 연속하여 묵상했는데 성경공부 전날쯤 되어서는 거의 모든 구절이 머리 속에 외워지는 것이었다. 또한 한 본문을 한글과 영어의 다섯 개 번역본을 보며 단어나 문맥의 어려운 부분들을 서로 대조하며 풀어갔고 또한 귀납법적 관찰을 통해 그 구절이 문맥에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보다 정확히 파악해갔다. 하지만 더욱 깊은 깨달음은 말씀을 나누는 시간에 전하는 자로 그리고 또한 듣는 자로 있을 때였다. 소그룹 성경공부가 일반 예배 설교에 비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면 말씀을 놓고 서로의 생각과 삶을 나눈다는 것이라 하겠는데, 매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순서를 따르며 서로 나누는 시간은 각자의 생각과 삶을 점차 말씀 가운데로 이끌어가는 것을 본인은 소그룹에서 직접 보고 경험했다. 이 때 전하는 자는 자신의 한 주간의 묵상과 연구한 것을 공동체 안에서 나누며 검증하고 각인하며 더욱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유익은 모두에게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중 단연 전하는 자의 깨달음이 가장 깊고 오래 지속되어 삶에 남게 된다는 것을 본인의 경험으로 또한 주변의 경우에서 확실히 검증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 ‘전하는 것이 곧 생명이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근본이요 중요하다 하겠다.
전하는 자는 그 전하는 바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복음서의 바리새인들은 그 교훈과 삶이 일치하지 못했다. 그들의 가르침들을 정작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도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그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언제나 진실됨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쳤으며 행함으로 본이 되었던 사도 바울조차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여전히 말씀을 거스르는 자기 안의 죄성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괴로워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사정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온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시다. 말씀 앞에 끊임없이 삶을 돌아보며 습성과 소욕을 거부하고 주의 뜻대로 변화하며 나아가는 것, 그렇게 날마다 점점 더 주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며 거할 때 우리는 점점 온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아있어 그것의 공의의 의무를 이행한다. 즉 그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짐에, 순종에는 축복과 풍요함이 따르지만 불순종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말씀에 비추어 먼저 자신을 돌아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선생이다. 그렇기에 듣고 배우는 자들 앞에 본이 되어야하고 그것을 위해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변화를 이루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들이 살아가는 생명의 지속이라 생각한다. 죄로 인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 아닌, 의로 인해 그분께 나아가며 결국 말씀으로 변화된 자신의 삶을 전하고 나누는 것인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혼자 온전히 이 땅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학문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대인 관계와 사회 생활이 넓어질수록, 또한 부족한 자에게 작은 일에 충성하라 맡겨주시는 은혜의 직무들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내 자신은 주 앞에 더욱 연약한 자요, 무능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어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 이 은혜에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내 자신을 버리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가며, 그 진리의 말씀 위에 내 자신을 먼저 세워가고 나아가 다른 영혼들에게 참된 생명을 전하는 자로 삼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금 당신은 유학생으로 있는가? 학업을 마치고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가? 상관없이 지금 있는 그 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삶을 시작하기 권면한다. 한 사람도 좋고 두세 명의 소그룹도 좋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되게 자신을 돌아보며 은혜로 깨닫게 하시는 바들을 주변의 영혼들에게 전하고 나누어 주길 소원한다. 이것이 당신이 지금 그곳에 있어 참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요, 목적이 될 것이다.


이 죄인을 그리스도의 존귀한 보혈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난 3년여 동안 특별히 전하는 자로 삼으시고 그 존귀함을 깨닫게 하사 점점 더 그 은혜로 참 생명 안에 거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주연]유학생 사역과 말씀 묵상

(2004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씀을 통해서만 그 길을 갈 수 있다. 말씀 묵상이라는 주제는 두 가지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을 왜 묵상해야 하는가?’ 라는 말씀의 중요성의 차원과 둘째는 ‘어떻게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론적인 차원으로의 접근이다.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히브리서 11:3).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우리가 이 말씀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이 태초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 히브리서 1;3).


말씀 묵상이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고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묵상함으로, 즉 우리의 온 생각에 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누릴 수 있고, 어둠 가운데에 있는 삶에서 빛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참된 의미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던 눈이 띄어지며, 영적인 죽음에서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곧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생명의 말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채움으로, 즉 말씀을 묵상함으로 가능하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유익을 준다.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형통하게 하신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며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였던 여호수아가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편 기자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런 복이나 형통이 비단 한 개인에게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시 1:3) 한 사람의 형통은 또한 그 열매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도 형통을 가져올 수 있다. 여호수아의 형통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듯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얻는 삶의 형통은 우리 주변의 많은 영혼들에게도 함께 할 것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없을 때, 우리의 모습을 디모데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디모데전서 6:3 5). 우리가 말씀에 붙들리지 아니하면 타락한 죄의 본성에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우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할 때 (히 4 :12), 우리는 육신에 노예된 자가 아니라 온전히 말씀에 붙들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묵상 가운데로 들어가며 그리고 온전히 그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고전 1:21)는 것이다. 어떻게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요한복음 3장 5 6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듭나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거듭날 때에 비로서 영이신 말씀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묵상에는 반드시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 말씀과 성령님은 함께 하신다.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을 할 때는 먼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해서 깨닫게 해주신다. 말씀을 사모함은 곧 성령을 사모하는 것이다.


말씀이 궁금해서 처음 보기 시작한 성경책에서, 나는 끊임없이 발견하는 보물 같은 말씀을 만나며..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는 다른 분들의 말씀에 깊이 공감을 하게 된다. 기도 가운데, 묵상 가운데, 그리고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려주심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으로 충만한 것이, 예수님을 내 안에 가득채우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경험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한다. 말씀을 사랑하게 하심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


특별히 유학생 사역 중에서 말씀 묵상의 중요성은 더 없이 크다. 우리가 미국 유학을 오게 되면 배울 것이 많고 해야 될 일들이 상대적으로 많게 느껴지기 때문에 딴 짓(?)은 되도록 하지 않고 영어 공부나 다른 학위 공부에 더 열중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보다 학위를 따고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처럼 (빌3:8) 말씀 속에는 세상의 어떤 지식이 줄 수 없는 귀한 보배가 숨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