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최근 미국 갤럽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미국인의 68%가 사단의 존재를 믿는다고 대답했다. 사단에 대한 인식여부는 종교적 성향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나머지 20%만이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응답자 중 85.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미국 내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권위는 많이 상실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0,11)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이지않는 영적 전쟁터다. 사단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인 이중적 성숙이 요구된다. 교회는 연합의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 연합이 깨어질 때 사단의 모든 공격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시대의 교회가 연약한 이유는 개인의 성숙이 더디고, 교회의 연합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은 성숙하지 못하도록, 연합을 깨뜨리기 위해 힘을 다한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아시아센터 소장 프랑수아 고드망은 이라크 전쟁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사담 후세인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바그다드 국경 수비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국제 무질서가 도래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했다. 이라크가 허무하게 굴복한 이유도 수비대가 힘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의 존재성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사단은 정사와 권세, 세상 주관자로 묘사되고 있다. 세상을 둘러 싼


모든 정치, 경제. 문화,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악의 영들은 악의


본부에서 파송된 대리자들로 그리스도인 들을 실족 시키고 믿음을 무너뜨린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3).


        ‘하나님을 향한 열광이라는 책에서 크리스토퍼 에드워즈는 이단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벗어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1975년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위해 버클리 대학에


등록한 후 주말에 한 농장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참석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통일교 문선명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그는 7개월동안 광적인 세뇌교육을 받았고 새로운 메시야 문선명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제자로 변화되었다. 문선명의 절대 통치 아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고자


맹세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문가와 함께 아들을 만나고 거의 1년이 넘는 치료와 상담과 교육 후 광기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사단은 오늘도 비진리와 거짓된 교리, 이단종파의 유혹으로 그리스도인 들을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든다.


        존 번연은 사단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핍박과 환란


통해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유혹하여 범죄 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


들을 집중 공격하여 쓰러뜨리는 기본적인 5가지 영역이 있다.


의심.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멀어질 때 갑자기 의심이 반복된다. 자신이 받은 사명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멈추지 않는다. 의심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믿음으로 모든


의심을 일일이 거절해야 한다. 새가 머리 위로 떠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낙심. 낙심한 그리스도인은 쓸모가 없다. 낙심은 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악의 영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을 주시는 일이 없다. 사단의 가장 오래된 무기인 낙심은 가장 정확한 공격능력을


발휘한다. 낙심은 거의 실패율이 없다. 낙심에 빠진 그리스도인 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바쁜 생활. 바쁜 생활로 인해 우리의 관심을 영적인 것에서 다른 것에 몰두하게 한다. 모임도 많아지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지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면 깨어 경계해야 한다. 너무 바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바쁜 생활은 마치 닻이 끊어져버린 배와 같아서 조금씩 떠밀려가 버린다.


열등감. “넌 할 수 없어 사단은 우리의 무능의식을 자극한다.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쉼 없이 우리 안에서 속삭인다.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무너져버렸다. 블레셋 골리앗 장군은 결국 사울을 처형한 결과를 가져왔다.


게으름. 게으름도 사단의 오래된 공격무기 중 하나로 구형무기이지만 강력하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완벽한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바울은 두 가지 명령을 하고 있다.


        ꊱ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 하라(10절).


        ꊲ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11,13절).


모든 일상생활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잠시라도 전신갑주를 벗으면 공격 당하기 쉽다.


완전 무장한 채로 식사하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해야 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 들어갈 때


전신갑주를 현관 입구에 벗어두기 때문에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난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두 가지 목적이 있다.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13절: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구약의 열왕기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던 왕들은 거의 모두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만 한다. 6장11-14절에서 대적하라서라는 말이 각각 두 번씩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다. 두 번씩


반복해서 권면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의 중요성 때문이다.


마귀는 공휴일이 없다. 그는 결코 쉬지 않는다. 얻어맞고도 다시 일어난다. 앞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뒤로


들어간다. 뒤로 들어갈 수 없으면, 지붕이나 바닥에 터널을 뚫고 들어간다. 그는 들어갈 때까지 결코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마귀는 교활하며 많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가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그는


이길 때까지 계속해서 공격한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한다.


        캠브리지의 시므온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항상 H. 마틴의 초상화를 제일 먼저 새집에 거는 것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마틴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진지하라. 결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파멸의 구덩이로 몰려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결코 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영적인 깊은 진지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띠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14절) 허리띠는 갑옷이 아니라 속옷의 가운데를 묶는 끈이다.


속옷은 겉에서 보이지 않는다. 허리 띠는 힘의 상징이다. 허리 띠는 속 사람을 매는 경건의 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주님과의 오랜 교제를 통해 내면의 경건함을 성숙시켜야 한다. 또한 진리의


허리띠는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의 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간략하게 복음을 다시 설명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도덕적 부패가 심했다. 그 당시 런던으로 상경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런던의 뒷골목 전당포에 취지하고,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지난 밤에 일어난 거리의 광란의 현장을 목격했다. 타락한 도시를 바라보며 소년은 절망했다. ‘이 도시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살고싶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던 소년이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쓰였다. 매일 아침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그의 인생의 새로운 허리띠를 매게 해 주셨다.


        의의 흉배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


흉배는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군사장비다. 사단은 매일 우리 마음에 죄책감과 불안과 염려를 쌓아놓는다.


매일 부지런히 치우지 않는다면, 마당은 쓰레기로 넘쳐 날 수 밖에 없다. 죄책감과 염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① 죄책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롬8:33-34).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으며, 한 번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매일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죄책감에서 자유 해야


한다(요일1:9).


② 염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3). 염려는 곧 믿음이 실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물이다.


캔자스 주립대학 교수 팀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라는 사실에 대해 연구한 결과


뇌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결정


메커니즘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두 개의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신중한 시스템이고 하나


는 감성적인 시스템이다. 계산영역의 신중한 시스템은 수학과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반면, 감성적


시스템은 뇌의 원시적 부분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 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두 가지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염려는 뇌의 원시적 부분이다. 염려는 해결방법이 아니다. 해결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기도해야 한다.


③ 질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의의 흉배가 떨어져나간 그리스도인 들의 가슴이 질투심과 열등감의 늪에 빠진다.


심리학 교수 살로비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20%가 질투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질투의 임상 학


저자 화이트 박사는 이혼하는 부부의 30%도 질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질투는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는 사람은 불행하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든 질투심에서


해방되고, 겸손의 갑옷을 입을 수 있으며, 용서와 평화의 사람으로 공동체의 화목을 추구할 수 있다.


 


        복음의 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절). 신자들에겐 두 가지 신발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신발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쟁이 세계의 종교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인간의


비극이 종교적 재앙이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광범위한 충돌을 가져올 경우 종교가 분열될 위험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함으로 기독교 보수주의단체에서는 중동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다고 전제하고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남 침례교단엔 이미 2만5천 여명의 전도자들이 중동선교를


위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주님께서는 “내가 전도하러 세상에 왔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매일


복음의 신발을 신고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따라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해외선교센터에서 세계기독교인구를


발표했다. 20억7662만 명으로 연평균성장률 1.27%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해외선교사는 43만4천 여명


이며,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매년 1900억 여 시간을 전도에 힘쓰지만 미전도 인구는 0.5% 증가했다.


한 신학생이 선교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필리핀에 있는 선교훈련원에 입학하고 언어훈련을


받았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곧 좌절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훈련을 중단하고, 여름방학 동안 필리핀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학기가 끝나고 거리전도 요청을 받고 필리핀 오지로 거리전도를


다니다가 그는 선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받게 되었다. 좌절감에 빠져있다가 그는 전도여행을 통해


다시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 전도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생명을 더한다.


 


        믿음의 방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16절). 로마군인의


방패는 몸 전체를 가리는 방패로 길이가 1.2m 너비가 77cm로 두 겹의 나무판자로 만들었다. 전신을


가리는 방패가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고대전쟁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불화살이었다. 두 겹의 방패는


가운데가 비어있어 불화살을 맞으면 즉시 꺼지도록 만들어졌다. 사단의 모든 불화살의 공격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한다.


        테레사 수녀께서 유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윌리엄즈를 면담하기로 했다. 변호사는 AIDS환자


치료수용소 재정후원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문구를 조수와 함께 작성한 뒤 테레사 수녀의 요청을 듣고,


이미 준비한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수녀께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한 뒤 다시 후원을


요청했다. 변호사가 거절하자, 수녀께서는 다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변호사는 두 번째 기도에서


자신이 이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달간이라도


계속 기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도가 끝나자 변호사는 즉시 사업후원을 약속했다.


정채봉의 간장 종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꾸물거린다는


사실이다. 누가 불러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오는 일이 없다.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끝난다. 마귀 군대는


매일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방패 없이 전쟁터로


나간 군사와 같다. 꾸물거리고 살다간 죽음뿐이다. 비참한 패배를 반복해야 한다. 방패 없는 군인이


생존할 가능성이 있을까?


 


        구원의 투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고 계급을 나타내는


장식이 있어 군대 내의 질서 유지와 군인의 생명을 보호했다.


        ① 구원의 투구는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모든 일에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철저한 삶의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


웬디스 햄버거 창업자인 David Thomas는 “나는 10억 배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책에서 그가 성공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사생아 출신으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일당 6천원을


받던 간이식당 종업원이었으나 근면과 정직과 헌신이라는 삼대정신으로 햄버거 장사를 시작하여


6조원 규모의 기업가가 되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분명한 삶의 정신을 보여야 한다.


        ② 구원의 투구는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나 바울 이라는 표현을 즐겨 말했다. 세속적 관점에서의 자기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


에서 자신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한 여인을 심방한 목사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거절하는 냉담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했다. 난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내 자신의 일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망쳐놓은


사람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옷장에 걸려있는 사진을 발견하곤 물었다. 저 귀여운 여자아이 사진은 누구입니까 제 딸입니다.


제겐 소중한 보물입니다. 만일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은 도울 건가요? 실수해도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할 건가요? 물론이죠. 뭐든지 그 아이를 위해서 라면 할겁니다..그런데 왜 물으시죠?


하나님의 옷장에 당신의 사진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는 투구를 써야


한다.


        ③ 그리고 구원의 투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또 다른 삶의 기대를 의미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무디는 나는 수년동안 설교할 때마다, 설교가 끝나기 전,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설교했다.고 말했다. 캠벨 몰간은 나는 매일밤, 내일이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다


고 고백했다. 재림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섬겼던


허드슨 테일러도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내 사역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성령의 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 모든 마귀의


시험을 기록하였으되 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우리도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모든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야 한다.


        한 청년이 한평생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무디의 성경책을 보고싶다고 했다. 무디가


성경책을 보여주자 청년은 놀랬다. 성경 전체가 빽빽하게 색연필로 칠해져 있었고, 성경 곳곳에 T.P


표시가 되어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묻자 무디는 실험해보고 입증되었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말씀이 곧 그의 삶이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결론: 세가지 헌신(6:18-24)


바울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헌신을 에베소 교회에 요청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세 가지 헌신으로 연합된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23-24절)들로 구분될 것이다.


        1. 기도의 헌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18절). 기도는 쉴 수 없는 헌신이다. 무시로 판티 카이로 모든 시간에, 항상, 늘


기도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명단엔 항상 게리 플레이어 이름이 남겨있다. 그는 남아프리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과 역경 가운데 성장했다. 8살에 어머니를 사별하고, 탄광 광부인 아버지 손에서


자라났다. 신발을 아끼려 신발을 신기보다 들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가난했다. 1953년 그는


프로 골퍼로 전향하여, 150여 개 대회를 우승했다. 우승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없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왜냐하면 골프의 재능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기도에 헌신하지 않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풍성하게 받을 수 없다


(23절). 기도는 기도로 배운다. 운동선수가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하듯이 기도도 많은 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 스펄전은 기도는 성령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기술이다라고 가르쳤다. 성령께


우리에게 마땅히 기도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주신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님과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2. 동역의 헌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9-20절).


에베소 교회는 기도로 바울과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도로 수술실 의사의 동역자가 되고,


오지의 선교사들과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주를 섬겼다.


복음 전도를 위해 그의 생애 전부를 주님께 쏟아 부었다. 로마의 감옥은 바울에게 그의 설교단과 전도


센터가 되어주었다.


        조지 포먼은 45세의 나이에 권투를 다시 시작했다. 그가 권투를 다시 시작한 이유는 휴스턴에


세운 청소년 회관과 교회 때문이었다. 청년시절, 포악한 삶을 살았던 그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포먼은 마약과 범죄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돈으로


교회와 회관을 세우고 복음 사업을 추진했다.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게 되자 그는 다시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다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늘도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기도로 동역하는 진정한 동역자들이 세계 복음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우리는 세계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밤 9시에 세계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여러 달 기도한 뒤 한 사람이 물었다. 부흥이


왔습니까? 아직 오지않았습니다. 다만 부흥이 올 때까지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역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이끌어낼 수 있다.


 


        3. 교제의 헌신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21-22절).


김명혁 목사께서 인생에 필요한 것은 참된 만남이다.라고 정의하셨다.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 만남의


확장이 요구된다. 누군가가 구원 받고, 헌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도 만남에 있다.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김명혁 목사께서도 미국 유학시절 도서관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전부였으나, 어느날 만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셨다. 그는 외국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주말에 학생들을 초청하여 식사와 교제를


가졌으며, 피크닉과 운동회를 열기도 하셨다. 그 모임들이 나중에 한인 회와 한인교회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바울은 마지막까지 알게 하여 서로의 교제를 위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로마의 감옥도


바울을 가두어 두지 못했다. 바울에겐 언제나 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이 함께 있었다.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2002년 코스타 주제를 따라 10번에 걸쳐 에베소서 요약


강해를 함께 나누었다.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지성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주소서 기도하며, 복음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이 시대의


젊은 지성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복음을 깨달은 참된 지식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께 헌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윌리엄 부쓰에게 그의 성공 비결을 물었을 때 부쓰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물어린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보다 훌륭한 두뇌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이미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 고백하며 하나님나라를 회복해가는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바란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 Lordship 구원 (엡 5:21-6:9)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Lordship 구원 (엡 5:21-6:9)


한 유명한 기독교 계 지도자가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지난 40여 년 간 나의 믿음은 진정 실패였다. 회심이후 사람들이 내 삶에서 분명한 변화를 볼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난 변화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족하고, 넘어지고, 거짓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회심 자들은 증가되지만 구원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존 맥스웰 목사는 ‘구원’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로드십구원”을 참된 구원으로 정의한다.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그분께 대한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죄인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성취한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바코드 그리스도인’들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했다. 바코드는 스캐너에게 물품의 정보를 줄뿐이다. 개 먹이 바코드를 과자에 붙여놓으면 계산대 스캐너는 과자를 ‘개 먹이’로 읽어버린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바코드 정보만 읽을 뿐이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바코드만 붙였을 뿐 그 내용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들어있지 않다. 바코드만 바꿔 붙여놓은 셈이다.
교회는 ‘구원’을 강조하지만 ‘구원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의 용서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바울도 ‘로드십 구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구원의 반쪽 교리다. 나머지 구원의 절반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과 삶의 연출에 있다.

아프리카 콩고 선교회에서는 선교사 훈련과정에 세(침)례 고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훈련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염소고기를 먹었음으로 세(침)례를 베푸노라” ‘염소 고기 먹기’ 풍습은 콩고 노예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노예가 자기가 섬기던 주인이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게 노예를 학대하면, 그는 도망쳐 다른 새 주인에게 간다. 구원을 요청 받은 새 주인이 그를 구해줄 의향이 있으면 염소고기를 함께 먹었다. 노예가 새 주인과 함께 염소고기를 함께 먹는 순간 과거의 옛 주인은 도망친 노예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 노예는 새 주인을 따라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된 신분변화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는지 새 피조물의 자각이 요구된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동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점이다. 10여 년 전, 구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레닌과 스탈린 동상이 수난을 당했다. 미?영 연합군이 바드다드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사담 후세인 거대한 동상이 무너지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독재자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도 약 3만5천여 개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 비용엔 동상철거 비용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 ‘소유주’ ‘주권자’ 예수께서 우리 자신과 온 세계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뜻한다. 내 영혼의 주님, 사회의 주님, 가정의 주님, 역사의 시간의 주님, 한국교회의 주님, 온 세상의 주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6-9).


모든 사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날과 음식의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업신여기자,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사랑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스티븐 닐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인간의 모든 관계는 변화된다”고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인간관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1. 부부관계(엡5:22-3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2-33).
미국판 현모양처를 촉구하는 “항복하는 아내가 행복하다”는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저자 도라 도일은 페미니스트로 바가지 긁는 전형적인 아내였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파경으로 치닫는 결혼생활을 통해 도라 도일은 ‘항복하는 아내’의 결론을 얻었다. ‘바가지를 긁거나 논쟁하지 말고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라. 남편을 통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여 전사와 같은 모습을 직장에 두고 집으로 와라..’ 그 말들은 불행을 통해 깨달은 아내의 아름다움과 사랑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권위의 질서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고전11:3).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될 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로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의 역할과 위치가 지나치게 굴종 적인 과거 문화 유산이나, 낡은 보수주의적인 견해가 아니다. 서로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권위의 질서 실종’으로 인해 오늘 많은 가정이 이혼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두 가지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델렐라의 꿈과 평강공주 꿈이다. 신데렐라 꿈을 가진 여성은 백마 탄 왕자가 유리구두를 들고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여성이며, 평강공주 꿈을 가진 여성은 현재의 남자가 바보온달 같아서 자신의 헌신으로 그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여성이다. 출세한 남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출세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원하는가? 남자를 통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두 성향에서 여성들의 남성관을 엿볼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의 두 가지 꿈은 미스 코리아 형과 복부인형에 있다고 한다. 미인이냐? 아니면 경제력이냐? 에 목표를 두고 있다. 진정한 결혼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 팀은 지난 2년간 남녀 5천명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가슴 뛰는 사랑은 18개월-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으로,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화학물질을 상실한 뒤 독서와 생활에서 다듬어진 지성미와 교양미로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꿔나가는 것이 사랑을 오래 지속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믿음에 있지 않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부부의 관계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부모와 자녀관계(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 순종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미 약속되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3). 인생의 성공과 건강은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소망이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자녀들에게 두 가지 약속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부모공경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비밀을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분의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원자력 분야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는 사람들 사이에 천재로 통한다. 서울대 차석 입학. 미국 미시간 주립대졸업. 24살에 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되고, 과기처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정근모 박사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 안에서 생활한 결과일 뿐”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는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공부 잘하는 7가지 방법을 말했다. 그가 첫 번째로 가르친 비밀이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나님께서 정근모 박사의 인생을 만드시는 섭리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주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유할 때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는 한 생명을 가진 운명공동체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 유전되고, 자녀들은 부모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의 존재가 자녀들의 인생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으로 논쟁을 벌이다 랍비를 찾아갔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짓고 싶어하고, 아내도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고 싶어했다. 랍비가 물었다. “두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두 분 다 요셉인데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지 않나요?”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시아버님은 말 도둑이고, 저의 아버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누구 아버지 이름 따서 지었는지 저희가 나중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말 도둑이 될지, 아니면 정직한 사람이 될지 지켜봅시다. 그럼, 어떤 아버지 이름을 따른 것인지 자연히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3. 사회생활 관계(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44개국에서 7만 명이 넘는 직장인들에게 강의한 탁월한 ‘인력 전문가’ 존 곤스틴박사는 “유럽기업들은 매년 매출액 1%를 기업 내 사람 사귀는 법에 투자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은 좋은 인재를 쉽게 잃고 만다. 무엇보다 중간 간부가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조직의 안정이 어려워진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주권이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 율법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유를 유지하는 유지 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골1:15-17). 그러므로 주님의 주권은 제한된 예배당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조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서울대생엔 ‘나 홀로 족’이 많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최모 씨(28)는 1년도 안돼 직장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다. 이기춘 서울대 총장은 “이제는 감성지수, 도덕지수가 높은 졸업생을 배출해야 한다. 대학에서 인성과 대인관계 증진을 위한 리더십개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인관계 능력 부족은 사회생활에서도, 주를 섬기는 제자의 삶에서도 결국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과 개인적인 깊은 고민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상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쾌락주의, 물질주의를 경계하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깊이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장소는 예배당 뿐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여야 하고, 우리들의 삶의 공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여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우리 몸이 가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가 되며,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손상시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뉴욕 셔틀버스 운전사 모임에 고든 목사가 참석했다. 한참 교제하다가 운전사 한 분이 “우리는 겨우 말 못하는 버스를 끌고, 맨해튼 섬이나 왔다 갔다 할뿐인데 목사님은 여러 나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시니 부럽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심스러워하는 운전자들에게 고든 목사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에, 빈 버스를 향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앞으로 8시간 동안 이 버스를 성소로 선포하노라.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을 선포하노라.’ 그리고 버스 운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뒤 고든 목사는 셔틀버스 운전사들을 만날 때마다, “버스를 운전하십니까? 성소를 운전하십니까?” 하며 반갑게 항상 질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버스 운전사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다. 한 남자가 정류장 아닌 곳에 내려달라며 우기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와 험악한 말을 하는데, 자신은 성소를 운전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하는 사명이 있기에 즐겁게 참았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반응했을 자신이었지만 그날은 다음 정류장에서 투덜거리며 내리는 그 신사에게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제 버스를 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운전사를 잘 아는 한 여자 승객이 “정말 많이 변화되셨군요” 하며 칭찬하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소이며, 우리의 하루하루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삶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평화의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요20:28)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주권이 높임을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의 복종. 하나님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방에 있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 직장생활의 인간관계에도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복종의 사회학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 준수 교수는 “뇌 중풍환자의 30%-50%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분노와 우울증이 밖으로 폭발할 때 대구 지하철 같은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02년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범죄는 1,447건에 이르며 한국에 약 16만 명의 심한 우울증환자가 방치되고 있다. “혼자 죽기 억울해..” 세상에 대한 원망이 깊어가고, 살기 점차 힘들어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대인관계 파괴와 소외감에 절망한다. 서울대병원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20세 이상의 남자 45%가 인격이상징후가 있다고 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는 소외감이 가져온 절망과 자포자기 행동이었다.


인간관계 파괴는 영적인 삶에도 치명적이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는 그의 저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Restoring Your Spiritual Passion)>에서 “열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열정, 믿음으로 살며, 아낌없이 주를 섬기고 봉사하려는 열정, 자신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열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열망이다. 그러나 이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열정을 얻는 지름길도 쉬운 길도 없다. 신비로운 해결책도 없다. 열정을 계속 공급받는 사람들만이 꼭대기로 오를 수 있다. 한 개인을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만드는 힘은 열정이다..” 열정은 마치 만나와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치 음식을 광야에서 거둬들여야 하듯 열정도 매일 새롭게 채워야 한다. 만나를 오래 간직하면 곰팡이가 펴서 먹을 수 없듯이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어 못쓰게 된다.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뒤에 쳐져 구경꾼으로 남겨지는 것은 열정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고백했다. 바울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주를 섬겼다. 쉽게 열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죄의식과 패배감, 지루한 종교행위를 힘겹게 치루고 있다. 열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든 목사는 다시 모으기를 하라(Re-collection)고 권면한다. “나”라는 조각을 다시 모아야 한다. 영적인 열정과 에너지의 저장고가 되게 해야 한다. 흐트러진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목적과 헌신의 다짐, 비전과 소망의 에너지를 다시 되찾아내야 한다. 다시 모으기의 세 가지 원칙이 ?특별한 시간. 특별한 예배. 특별한 친구들?에 있다. 세 가지 원칙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특별한 예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특별한 시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특별한 친구들”(엡5:18-21) .


특별한 친구들. 모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할 때 ‘특별한 친구’들의 관계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는 특별한 친구들에게 달려있었다(출17:9).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우리도 주를 섬기다 피곤에 빠질 때가 많다. 모세의 팔이 피곤할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패배하고 있었다. 모세의 팔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좌우에서 그 팔을 붙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세가 언덕 위에서 팔을 들고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골짜기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출17:13). 모세의 주소록에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잠재력을 증가시키거나 피곤을 막아주고, 약점을 막아주기 위해 동료의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분주한 생활과 시간 속에서 특별한 친구들을 위한 시간이 할애되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 교제하고, 서로 양육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시간을 그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일과 중 하나여야만 한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방인 전도를 위해 특별한 친구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곁에 두었다. 그의 주소록에는 바나바, 마가요한,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실라, 두기고..등 많은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 “복종의 사회학”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복종은 사람에 대한 비굴한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자발적 봉사를 뜻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 상담사 피트코언은 지난 18년간 1천 여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0가지 상황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5가지 상황을 선택하는 실험을 통해 행복의 공식을 발표했다. P+(5×E)+(3×H). P는 개인적 특성으로 인생관, 적응력, 탄력성을 의미하고, E는 생존조건으로 건강, 인간관계, 재정상태를, H는 더 놓은 수준의 조건으로 자존심, 기대, 야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복공식은 “생존조건이 개인적 특성에 비해 5배, 자존심, 야망등 더 높은 수준의 조건은 개인적 특성에 비해 3배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간의 행복은 건강과 돈 대인관계가 훨씬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흥미와 취미를 추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현재에 몰두하고, 운동하고 휴식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세 가지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부관계(5:22-33). 부모와 자녀 관계(6:1-4). 사회생활(6:5-9). 가정과 사회적 관계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관계되어 있다.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5:22)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5:25)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6: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6:4)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6: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인간관계의 비밀을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 여자-남자-그리스도-하나님으로 이어지는 헤드십의 관계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행복한 삶이 만들어진다는 행복공식을 이해하게 된다. 헤드십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서로 섬기고 돌봐야할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의 관계에서도 머리가 되신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지 않음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되고 그로 인한 피해가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환경과학자 데이비트 왠은 현대인의 소비 지향적이고 물질주의 적인 삶을 ‘어플루엔자’ Affluenza 유행성독감과 같은 전염성으로 비유했다.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은 과중한 업무, 많은 빚, 근심과 낭비등 증상이 수반되며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검소한 삶과 자연에 접하는 단순한 삶 그리고 공동체생활에 있다고 지적했다. 느림의 자세와 단순함의 실천이 경쟁의식에서 떠나 자신만의 장점과 가능성을 개발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연과 친해지는 삶과 사람과 사람이 함께 모여 숨쉬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인간의 소중한 자아상을 회복할 수 있다.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먼저 모든 인간관계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계심을 알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사랑”을 깨닫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선언되어야 한다.



두 가지 전쟁.

750여명의 호주 여인들의 누드 사진이 신문 1면에 컬러사진으로 실렸으나 선정성 시비가 없었다. 호주의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시위였기 때문이다. ‘NO WAR’ 알몸으로 글자를 만들어 전쟁반대 시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축하행사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전 시위가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 러시아, 중국을 끌어 들여 형성한 반전전선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결국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촌을 동맹구도로 재편하고 말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석유독점을 위한 미국 패권주의를 그대로 드러낸 전쟁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에도 비슷한 두 가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 야망의 전쟁. The Battle of Ambition. 야망은 앞장서 가려는 충동이다. 야망은 거룩한 언어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하나님의 뜻이면.. 문을 여시면…” 야망은 보상과 명예가 있는 자리에 유혹을 당한다. 개인적인 야망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향하는 열정은 서로 비슷해 보인다.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전진하고 싶어하고, 자신과 재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어한다. 우리는 기회를 노리고, 자신을 높이고 싶어한다. 주목받는 것을 열망하고, 더 높은 명성을 주는 자리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한다. 영적인 열정과 야망은 한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다. 야망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끊임없이 정신적 게임을 시도하고, 자신의 처지와 하는 일을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성령의 빛이 없이 야망을 볼 수 없다.

  • 교만의 전쟁. The Battle of Pride. 야망의 친구는 성공을 다룰 능력이 없는 교만이다. 웃시야 왕은 교만의 경계가 되는 성경인물이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26:5). 웃시야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군대를 재조직하고 열악했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26:16) 몰락이 이어졌다. 결국 웃시야는 문둥이로 심판 받아 죽는다. 교만이 가져온 비참한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과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에게 인간관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없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며, 다시 비겁한 거래가 계속될 뿐이다. 야망의 세상에서 인간은 철저한 이용물일 뿐이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폐기될 뿐이다.

한국사회는 ‘사오정’의 시대를 맞았다. ‘45세 정년을 맞는 시대’라는 뜻이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60년이었을 때, 2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10년쯤 죽음을 기다렸다. 평균수명이 80년인 지금, 30년 공부하고, 10년 일하다가 퇴출 당하고, 40년을 막막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정년 이후 살아가야 할 시간이 20-30년으로 우리 사회의 중간허리 부분인 40대가 불안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40대가 불안한 시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40대를 불안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정 진홍 교수는 지적한다. 한국정부가 40대를 살려내는 정책을 펴야한다고 강조한다. 불안한 40대로 인해 가정도 깨어지고, 남자들의 존엄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크게 약화되고 있다. 야망도 교만도 상실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오정 남자들은 이 시대에서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위치와 권위가 인정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주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주님을 섬긴다는 말이 공허한 말로 남을 뿐이다.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인간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바울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따뜻한 인간관계 회복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 부부는 따뜻한 부부애와 동료의식으로 온 힘을 다해 주를 섬길 수 있었다. J.C. 폴록은 테일러 부부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허드슨은 자기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인 성숙함과 고요함. 확고한 신앙과 애정으로 활력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에게 있는 힘을 모두, 그녀의 총명한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모조리, 그녀가 가진 사랑과 힘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녀는 남편 허드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고갈시키도록 허락해주었고, 때로 그의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으로 흐를 때도 그녀는 그것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우리의 허상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가 어디서 허드슨 테일러 부부에게 보여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을 줄 곳 없어 외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님 안에 산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황폐한 땅 중국에서 평생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사랑으로 한사람 곁에 특별한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그리스도”이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모든 인간관계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한 겸손한 종들에 의해 무너진 하나님나라는 다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최인호씨와 김수환 추기경께서 대담을 나누셨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네.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질 못했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마음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야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음 한가운데 계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 한가운데 계신 주님이셨다. 평생 주님께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두 개의 세계…어두움과 빛)

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두 개의 세계…어두움과 빛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인 생의 삼분의 일을 억압상태에서 보낸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송금사건으로 더 큰 고통의 여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국민의 분노와 실망이 그를 외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퍼주기’ ‘현대 봐주기’로 이어진 북한과의 평화유지비의 비밀 송금에 대해 대통령 국민담화가 발표되었지만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지난 50여년 동안 갈라진 남과 북에 금강산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와 대북 사업 교역의 물꼬를 텄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이 지적한 대로 ?김정일 돈 바치기?로 만들어진 남과 북의 평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도 보이지 않는 두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이중 자아와 어두움과 빛의 이중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회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거룩한 햇볕정책은 무엇일까?


1. 이중 세계의 속성.


에 베소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도시였다. 학문과 철학의 도시 아덴과 상업과 교역의 도시 고린도와 더불어 에게해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에베소의 ‘아데미 숭배’는 여사제들과의 혼음으로 도시 전체가 섹스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 바울이 어두움의 속성으로 지적한 ‘음행, 더러움, 탐욕’은 모두 타락한 성적 욕망을 드러낸 부끄러운 단어들이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5:3)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5:5-6).




















어두움의 열매


 


빛의 열매


음행


참예하지 말라


착함


더러움


시험하여 보라


의로움


탐욕


 


진실함


세상은 성적 탐욕의 늪 속에 빠져있다. 한국은 여성부에서 최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매년 섹스산업에 허비되는 돈이 24조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섹스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청소년 원조교제, 보도방..같이 숨겨진 일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20-30대 여성 25명 중 1명이 쾌락산업에 빠져있다. 섹스의 쾌락의 끝은 에이즈의 증가로 이어진다. 매일 전세계에서 1만5천명이 새로 감염되고 있으며, 한국은 매일 1명이 감염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계 에이즈 감염자는 2001년 말 3610만명으로 보고되었으며, 청소년 감염자도 매년 300만명이 증가하고 있다. 피어트 유엔 에이즈국장은 ‘미국에서 매년 비만 치료와 예방에 쓰는 돈 520억 달러 중 30억 달러만 있어도 아프리카 에이즈 감염률을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세계인구 2.7%가 에이즈로 숨지고 있으며 매년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빛의 자녀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도덕적 실천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이 살면서 인가다운 삶을 사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도덕성과 윤리적 실천력을 소유한 새로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8-10).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15살까지 교회를 출석했으나, 이후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다. 러셀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동정하고, 잔인성과 가증한 악에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무신론자를 자처했지만, 그가 말한 기독교인의 세가지 정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자아상을 지적한 말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도덕적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다. 권력남용, 이권개입, 불법정치자금, 뇌물수수와 청탁,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부정과 사기.. 청와대에서 검찰, 언론까지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30년간의 압축, 고속성장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했다. 근면, 성실의 도덕적 가치관은 퇴색하고, 물질과 쾌락 추구가 새로운 삶의 목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도덕적 나침반이 멈춰버렸다.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 반부패와 투명성에서 한국은 하위그룹에 밑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덕성을 상실해버린 무기력한 교회가 있다. 교회는 한국사회의 도덕과 윤리 붕괴를 저항할 힘을 이미 잃어버렸다.


2. 빛의 자녀들의 의무.


“너 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5:11-14).” 4세기 중엽, 안디옥에서 출생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크리소스톰은 그가 살던 도시가 사치와 쾌락의 극에 달하자,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세상을 책망했다. 좋은음식을 찾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거부했다. 기도와 명상으로 살면서, 자신의 것을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가 가진 것은 몸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깨어있으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돈을 쥐려는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 세상의 것은 나눠지면 적어지지만, 영적인 것은 나눌수록 늘어안다. 나누지않으면 가난해지고, 결국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것이다” 온 도시가 그의 말에 떨었으며, 황제도 그를 두려워했다. 오늘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 세습으로 한동안 곤혹을 치루었는데, 김동호 목사의 연봉 파문으로 또 다시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CCC의 세습 움직임으로 또 다른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여중생 장갑차 희생사건으로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한기총이 시청 앞 광장에서 연 기도집회가 교회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책망하라. 참예하지 말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은 책망하는 삶의 실천에 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가지는 빛이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곧 사라진다.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열매를 실천해야 한다. 1998년 중국에 취임했던 주룽지 총리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내 것을 포함해 관 100개를 준비하라. 청렴한 정치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강국의 꿈은 이뤄질 수 없다. 국가가 바로서기 어렵다.” 그는 취임직후 ‘밀수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2000년 ‘부패관료와의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세상은 빛을 찾고 있다. 기독교를 외면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빛’의 원리여야 한다. 스티브 쇼그린 목사는 섬김의 전도를 통해 복음이 닫혀버린 세상에 새로운 빛의 전도를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무료 세차, 상점 포장 도와주기, 상점 유리창 닦아주기…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0대 한 남자가 주일 아침, 교회 앞을 서성거렸다. 손에 빈 콜라캔을 들고.. 안내위원이 “제가 버려드릴까요?”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 청년은 “아닙니다. 이 콜라 캔을 저는 간직하고 싶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소중한 기념물이니까요” 그는 전날, 무료로 나눠주는 콜라 캔을 받아들고, 처음 자신에게 사랑과 친절을 보여준 전도팀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회까지 찾아오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빛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도덕적 실천능력일 것이다. 단순히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 기준은 아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기독교는 아니다. 세상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빛의 열매’는 세상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3. 빛의 자녀들의 삶.


“그 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15-21).

지혜-시간-주의뜻-성령충만 앙드레 모로아는 “인생을 영위하는 기술은 하나의 공격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역사의 인물들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목표를 정하고 그 한가지 일에 전력을 다했다”고 인생의 바른 태도를 설명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세상의 돈과 명예와 부를 좇는 ?죽은 자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현하는 바른 인생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지혜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다. 신학자 존 데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챨스 휴멜도 “우리들의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는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한데서 온다.”고 지적했다. 19세기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의사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장래가 보장된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하자, 그의 형이 이렇게 동생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너는 네가 원한대로 네 인생이 아프리카 정글의 미개인들과 매장되지만, 난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가 될 것이다.” 수세기가 지난 오늘, 리빙스턴의 유골은 영국으로 옮겨져, 정중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죄었지만, 그의 형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누가 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석다. 삶의 지혜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창고 문은 열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 삭개오의 소유는 무엇이 인생의 참된 목적인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 그 인생의 목적을 찾았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급하게 발전하고 있다. 자연과학 계열의 지식은 3개월 시차를 두고 변화하고 있다. 3개월전 논문은 이미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인문과학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인터넷이 학문의 속도를 더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선진국의 학문이 당일에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들이 함께 읽고 있다. 학문에서의 답보는 곧 퇴보다. 인생에서도 자기중심의 삶을 곧 퇴보다. 모험없는 인생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노라”고 고백하셨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라. – 예배. 찬양. 감사. 복종. 황성주 박사는 그의 책에서 “나는 주님 때문에 팔자 고친 사람이다. 내가 올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리 온 사람이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누린 사람이다. 오직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 변화받게 하시고,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하셨다. 이젠 그 행복이 흘러 넘쳐 행복의 전달자로, 기쁨의 발산자로 살게하신다. 차고 넘치는 은혜, 사역의 확대, 비전의 확대, 인맥의 확대로 나타났다”고 자신의 인생을 설명한다. 2003년 2월.. 러시아 코스타에서 황박사는 만났을 때 그는 “호산나 네트워크를 인수하고, 크리스챤 여성 잡지 레베카를 인수했다”고 말하면서, 인도와 아프리카 등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을 설명하며 흥분에 넘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랑의 전달자, 행복의 전달자, 복음의 전달자’이셨다. 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충만을 유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인간의 능력과 도덕적 의지와 자기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4가지 비밀을 가르치고 있다. “①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②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③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④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 예배에 힘쓰라.
매 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과 몸의 안식을 계속 얻는 사람들이 매일의 삶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지시하는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죠지 물러가 하루 16시간 넘게 일하는 한 형제를 방문했다. 그 형제는 심한 피곤과 영적 메마름에 지쳐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실하자, 모든 삶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뮬러는 그 형제에게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속사람이 힘을 얻게 하라”고 권면했으나 “이렇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일하는 시간 줄이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잃고 있었다.


(2) 찬송을 힘쓰라.
하 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충만과 찬양은 영성의 두 날개와 같다. 사울 임금이 악신으로 고통당할 때 다윗의 수금을 타는 찬양으로 평온함을 얻곤 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할 때 감옥터가 흔들리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구원받으면서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도 구원을 받는 성령의 능력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한 교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있거나, 거리를 걷든지 혼자 중얼렸다. 궁금한 학생들이 질문하자 교수는 “며칠전 꿈을 꿨는데, 갑자기 베드로가 ‘찬송가 279장 불러봐’ 말하는데 우물쭈물거리자 ‘형편없는 신자구만, 찬송도 못부르면서 어떻게 천국 오려구해. 다음에 와..’ 놀라 깨서 찬송가부터 찾아봤지. 그날부터 매일 찬송가를 부르며 찬송이 충만해지도록 애쓰게 되었네” 웃으며 대답했다. 찬송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3) 감사를 힘쓰라.
감 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제물이다. 감사는 중요한 경건의 훈련이다. 감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열매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다. 작은 감사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닮았다. 글로벌화. 디지털화로 대변되는 21세기는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제품만이 생존하는 시대다. 세계일류기업의 뚜렷한 특징은 ‘연구개발, 제품개발, 생산, 마케팅’ 등 기업활동 4단계중 하나이상의 독특한 강점을 갖고 있다. 미국의 델 컴퓨터는 인터넷 마케팅으로 세계 컴퓨터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노키아는 직원 32%가 R&D 연구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강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 성품이기 때문이다.


(4) 복종하라.
바울은 복종의 인간관계를 가정과 사회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음 시간에 ?복종의 사회학?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성령충만한 삶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고 피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유는,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 구원의 제2변화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제2변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충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단원 중엔 10대 청소년들이 죽음으로써 조국과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데, 자살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폭탄이 터지면서 피해자들의 몸에 박힌 뼛조각에서 치명적인 질병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스라엘과 기독교인들은 어떤 관계일까? 아브라함의 혈통적 언약 자손들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 자손들은 누구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이 가져온 새로운 피조물의 자아상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의 제1변화(2:1-1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었다. 구원의 제2변화(2:11-18)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의 새로운 연합을 성취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델로 재창조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된 구세주의 단계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머리”에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실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성취는 교회이셨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 중 ‘죽음-부활-승천’의 세 단계를 통해 구원의 첫번째 변화가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만물의 주-교회의 머리’ 두 단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하여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신다.


구원의 제 2변화(엡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割禮黨)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和平)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1-18)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구원받기 전(2:11-12)


구원받기 전 죄인의 실상은 “이방인”과 “무할례당”이라 불리어졌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관점에서 인류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피부 색깔, 문화, 언어,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 부류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끌어왔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허상의 존재들일 뿐이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나온다. 한 랍비에게 유대인이 질문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방인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랍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옥불에 땔감이 필요해서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바울은 이방인의 버림받은 실체를 다섯 가지가 없는 자로 묘사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과의 접촉과 교제를 금지했다. 길거리에서 인사만 나누어도, 시체와 문둥병자를 만진 것과 동일한 정결예식을 치러야만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구속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라운 일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인류의 역사는 이방인과 유대인 간에 벌어진 오랜 증오와 피의 살육의 역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실에서 살육당한 600만의 유대인 대학살이 그 대표적 사건이었으며, 최근에까지 그 증오와 반목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9.11 테러 1주년. 희생자 2801명의 이름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호명되었으며,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 현수막도 건물에 걸려있었다.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한 언론인은 미국의 테러전쟁을 이렇게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유령과의 전쟁이다. 그것은 빈곤, 마약과의 끝없는 전쟁과 같다. 끝도 없는 전쟁을 통해 미국은 자국의 우월감을 세계에 보여주려 할 뿐이다.” 현대 평화학 창시자 유럽평화대학 요한 갈퉁 교수는 [평화 심포지움]에서 “지금 자행되는 보복의 악순환의 핵심에 미국의 패권주의가 있다. 미국의 태도변화 없이는 평화는 어렵다. 갈등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갈등이 해결되면 폭력도 사라진다. 갈등을 푸는 열쇠는 미국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중동의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 문명의 충돌로 묘사되는 테러와 전쟁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얼마나 “멀리 있는” 민족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멀리 있던 두 민족을 가깝게 만드셨다. 어떤 평화정책으로도 하나로 연합될 수 없는 증오와 적대감의 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그 화평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는 곳마다 화평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화평이시기 때문이다. 국가와 이념, 갈등을 이겨내는 진정한 평화가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다.


● 구원받은 후(2:14-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그 피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원수된 것’을 “헐어 버리시고,” “폐하시고,” “소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셔서, 새로운 제3의 인류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창조하셨다.





2:14 둘로 하나를 만드사
2:15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2:16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다.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은과 납을 녹여 금을 만들어내듯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새로운 민족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던 인류의 종족 구분은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사렛 예수 안에 있는 자와 나사렛 예수 바깥에 있는 자로 나뉘어졌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F.F 브루스는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은 기독교 공동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 제3의 종족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절 신약교회가 탄생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 곧 교회공동체로 만들어졌다. 아브라함은 혈통적 언약의 백성과 믿음의 언약 백성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2:18-22)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이 땅엔 하나님의 성전이 계속 지어져가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는 12m의 크고 단단한 기초석 위에 세워졌다. 새로운 종족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기초석이 되셔서 오늘도 계속 건물이 완공을 향해 건축되고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새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보이지 않는 장소다. 전 세계에서 구원받은 인간공동체가 하나님의 새 성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두가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먼저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도록 복음전도의 사명에 전념해야 한다. 릴리전(Religion) 뉴스는 유럽의 집시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전도의 열풍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100만-3800만으로 추정되는 유럽 전체 집시 가운데 50만-100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 내에 210개의 집시교회가 세워졌으며, 1300명이 목회자로 헌신하여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회심한 집시들은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어 싸움, 음주, 절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한다. 스페인에도 500여개의 집시교회가 있으며 2천여명이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유럽의 집시교회들이 하나 하나의 벽돌이 되어 하나님의 새 성전을 짓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는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지금은 이방인의 때라고 불린다.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들을 어떤 신학자들은 7년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7년 대환란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날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요한 섭리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고, 그 날에 완성될 교회의 영광과 위대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으로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날을 기다리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조각품 중에 예수상이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예수상이 월드센의 작품이다. 월드센이 예수상으로 유명해지자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서 그에게 ‘비너스상’ 조각을 의뢰했다. 조각가에겐 최고의 영광이었으나 월드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가 이 손으로 주님의 성상을 조각했는데, 주님께 드린 손으로 어떻게 신상을 조각할 수 있겠는가?” 그가 신상을 조각할 경우 자신에겐 명예로운 일이며, 영원히 기념될 일이었으나,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손상이 더 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 구원의 자아상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자아상



2002년도 코스타집회의 주제였던 “하나님의 나라”와 “자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코스타가 기획한 연재물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이번호는 그 두번째로 “구원의 자아상”이다. 필자인 조경호목사는 2002년 코스타집회의 새벽설교를 통해 “하나님나라”와 “자아상”이란 주제를 균형있고 심도있게 다루어준 바있다.


닐 앤더슨 목사가 쓴 책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에는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술주정뱅이 남편으로 인해 절망하고 괴로워하던 부인은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 좌절하고 있었다. 목사는 그 부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구원의 말씀이 적힌 종이를 주며 큰 소리로 읽으라고 권면했다. 절반쯤 읽다가 부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제가 그렇게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대한 거룩한 자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낼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재창조되었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묘사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최종적으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교회의 머리에서 실현된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실현은 교회였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땅에 세우고자 하셨던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 공동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재창조하셨다. 요즘 세계적으로 윤리문제가 되고 있는 ‘복제인간’의 시초는 하나님나라였다. 에베소서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5단계가 어떻게 재창조의 과정이 되는가를 살펴보자. 2장의 핵심단어는 “만드시고”(10,14절)이다. ‘포이에마’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 손으로 만든 예술품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복제한 위대한 창조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재창조하신 과정을 세밀하게 말씀으로 보이셨다.


구원의 제 1변화(엡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10)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자아의 본질: 구원받기 전 자아의 본질을 바울은 3가지로 정의한다.


(1)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2:2 그 때에 너희가 …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2:3 전에는 우리도 다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죄-죽음-불순종-진노’는 인간 타락의 원인, 과정, 결과를 보여준다. 죄의 시작은 불순종이었으며,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는 모두 ‘3중의 타락의 본질성’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 자아의 본성: 죽음의 세계는 3중의 노예적 세계다. 인간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시체가 되기 전까지 탈출할 수 없다. 로버트 벨라는 현대인의 삶을 정의하기를 “개인주의의 전성시대, 자기 왕국에 영광 돌리는 시대, 얻는 것에 매달리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죄인의 왕국에서 사람들은 어떤 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지 ‘죄’가 만들고 지배하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자.


(1) 첫번째 본성: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엡2:2)


세상 유행을 따라 사는 삶이 죄의 본성이다. 현대사회는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유행이 된 시대라고 정의했다. 죄는 거짓말, 술, 사기 등 기초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더 깊은 원인은 ‘유행 따라 사는 삶’의 구조에 숨겨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젊은 여성들의 미국원정출산 러시. 한국 성인 10명중 1명이 성형하는 성형중독 증상. ‘뇌물’은 정치 뿐 아니라 마케팅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한국 연예계비리. 아시아 중에서 가장 섹스비율이 높은 나라로 한국을 지목하고, 한국의 인터걸의 실태를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유행들이 사람들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정복하고 인간성과 삶의 가치관을 잔인하게 지배하고 있다. 지금 자신을 한번 둘러 보라. 세상 유행의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는지를 하나씩 점검해 보면 유쾌한 기분이 사라질 것이다.


(2) 두번째 본성: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사단의 세계는 ‘외모, 학벌, 계급’으로 지배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사단의 거대한 조직은 외모주의, 학벌주의의 세계로 외모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죄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


한국의 제일기획에서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여성의 70%가 “외모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대답해 충격을 주었다. 여성들은 외모에 신경 쓰고 외출하면, 사람들이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준다고 대답했다. 같은 또래의 여자를 만나면 먼저 외모부터 비교하고, 피부나 몸매를 보면 그 여자의 생활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외모 가꾸기를 위해 하루에 53분을 투자하고, 거울은 8.3회 본다. 여자들은 흰 피부, 잘 뻗은 종아리, 늘씬한 팔다리, 탄력있는 몸매, 작고 예쁜 두상을 갖고 싶다고 대답했다.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사회 전반에 안개처럼 깔려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8월 한달 동안 두번에 걸쳐 총리임명이 부결되었다. 학벌 위조와 부동산투기, 재산증식 의혹, 자녀들에 대한 위법이 동일하게 청문회 내내 긴 공방전을 가져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죄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 산다면 그의 구원은 거짓이다. 허상의 종교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대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3) 세번째 본성: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베이컨은 “인간에겐 세 가지 유혹이 있다. 거친 육체의 욕심.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교만. 졸렬하고 불손한 이기심. 이 세 가지로 인해 모든 인간의 불행이 과거에서 미래까지 인류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욕심과 교만과 이기심이 없었다면 완전한 질서가 인간을 지배했을 것이다.” 육체와 마음의 욕심은 악의 본래의 얼굴이다. 세상은 거대한 섹스시장이 되어가고, 섹스가 인간을 지배하는 인류의 신이 되었다.


인류학자 언윈은 “인류가 걸어온 88개 문명의 흥망사의 공통점은, 어느 문명이나 성도덕이 건전할 때 문명이 일어나고, 성도덕이 문란할 때 문명이 쇠망했다”고 역사를 해석했다. 미국아동의 10%가 13세에 섹스를 경험하고, 혼외정사를 부도덕하지 않다고 여기는 성의식의 세상에서 문명의 존폐위기가 경계선에 서있다. 구약시대의 모든 우상숭배는 거대한 섹스파티가 동반된 타락한 성의 역사였으며, 우상숭배는 오늘도 바뀌지 않았다.


● 구원의 자아상: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4-5)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을 때 과거의 세계와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옛 세상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겨졌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재창조하셨다. 과거의 삶의 구조와 가치관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은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에 나타난 기본적인 사실들은 아래와 같다.















(1) 구원의 세요소 긍휼. 사랑. 은혜
(2) 구원의 세단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미국 남침레교에서 발행하는 ‘BP뉴스’는 전 세계에서 영화 “예수”를 관람한 사람이 지난 7월1일 현재 51억6483만6643명이라고 발표했다. 전 세계에 743개 언어로 번역되어, 236개 나라에서 상영되었으며, 2초에 한사람씩 예수 영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1978년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했다. 워너브러더스 제작자 중 한 중역도 개봉전략회의에서 영화를 보고 중생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삼중의 자아실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신분은 영원하며, 구원의 자아상은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은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음달에 계속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디자인하신 구원의 자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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