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영적 지도자의 권위 통찰 (Authority insights)

지도자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서 “권위”가 도전을 받는 시대 속에 살고 있고 “권위”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지만 나쁜 것은 권위를 내세우는 “권위주의”이지 참다운 “권위”가 사실상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한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참다운 권위를 가진 지도자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있다. 지도력은 참다운 권위에서 나온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지도자로서 성숙해 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권위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가 성숙해 가면서 특히 사역의 초반부에 지도력의 권위에 관하여 어떤 배움이 있어야 할까?


첫째, 한 사람이 권위를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권위에 순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 우리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철학이 다를 수도 있고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가 그 권위에 저항하고 반발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권위 질서를 세우시고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 속에 일정한 권위의 구조를 세워 두셨다. 그 지도자들에 대하여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물론 그 권위가 하나님에 대항하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이면 우리가 저항해야 하지만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도자에게 반항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권위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추종자가 지도자들에 대하여 불평을 하게 되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비판한다고 이야기하기 쉽지만 사실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추종자들은 지도자처럼 전체를 보는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 위치에 서 보면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한 지도자가 자신의 위의 권위에 대하여 순복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순복할 것을 요구한다면 누가 순복할 것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한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예는 다윗의 경우이다. 사울 왕이 그를 원수처럼 여겨서 몇 번이나 죽이려고 하였지만 자신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이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 질서를 존중하는 다윗이였기에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에 팽배해 있는,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위의 권위에 순복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즉 집에서는 부모에게,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학교에서는 스승에게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지도력 개발에서 초반부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둘째, 지도자는 권위를 스스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도력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그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하여 갈등을 경험할 수가 있다. 사실상 지도자가 바른 비젼과 목적을 가지고 움직여 갈 때 순종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정말로 힘이 들게 된다. 지도자가 권위에 대하여 도전을 받았을 경우에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그 도전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람이 나를 반대하고 공격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더욱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지도자 개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위, 즉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그 도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처입고 반응하기 보다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반응이다. 지도자가 보여야 할 반응은 자기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는 일에 정진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권위를 지키시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 어떤 추종자가 문제를 일으킬 때에 만일 지도자가 그 문제 일으킨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공격하면 다른 추종자들은 그 지도자의 모습에 실망하고 도리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옹호하게 된다. 그러나 지도자가 도리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용서하고 그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면 그 모습들을 보고 다른 추종자들이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는 결국 이런 갈등들을 지혜롭게 넘겨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에 순복하는 것을 건강하게 배우지 못하였다. 그들의 경험가운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권위에 피해를 입었기에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이 있다. 반항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쌀 때에 그들도 권위에 순복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지도력 개발에서 삶의 후반부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셋째, 지도자는 바른 권위의 사용을 배워야한다. 권위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섬기기 위하여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된 이유는 지도자들이 그 권위를 가지고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권위를 주장하는 권위주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권위주의를 세상의 이방인들의 것으로 규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속한 자들은 권위주의가 아니라 지도자들이 도리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영적 지도자들은 권위의 사용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삶과 사역속에서 지도자들이 이런 섬김의 지도력이 아니라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으로 인하여 힘든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권위의 사용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또 좋은 영적 지도자들의 모범을 통하여 권위의 바른 사용, 섬기기 위한 사용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성경적인 권위사용의 가치관을 배양하지 않으면 우리의 부정적인 경험들이 우리의 지도력 사용에 영향을 주게 되고 결국은 우리도 똑같이 부정적인 권위사용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깨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주워진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로 따르는 자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넷째, 지도자는 여러가지 종류의 권위를 가져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권위는 영적인 권위이다.
영적인 권위란 지도자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기 때문에 추종자들이 그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허락하는 권위를 말하는데 이는 주로 인격과 모범과 설득을 통하여 영향력을 발휘한다.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능력이 아니다. 다른 지적인 권위나 지위의 권위 혹은 인격적인 배려에서 오는 권위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노력해서 취득하는 능력이지만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하나님께 점점 더 깊이 다가섬으로 인하여 생기는 열매이고 부산물이다. 우리가 권위를 목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목적하여 나아가고 섬기고 동행할 때에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임재가 우리 삶과 사역가운데 나타나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영적인 지도자들이 의지해야 할 권위인 것이다. 물론 우리 지도자들에게 다른 모든 종류의 권위와 능력도 필요하다. 지식도 지위도 인간관계도 때로는 보상을 줄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역이 점점 깊어질수록 지도자들에게는 영적인 권위가 요구되는 것이다. 풀러신학교의 킬린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영적 권위의 기반 위에서 사역을 실행한다고 한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의 삶가운데 권위에 순복하는 일이 힘이 드는가? 그로 인하여 권위에 순복하지 못하여 지도자와 갈등하고 사역지를 떠나는 일들이 반복되는가? 여러분이 지도자로써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특정한 사람들이 반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가? 그것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가? 당신이 권위주의에 빠져서 권위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하는 그런 지도자 아래 있어서 힘들어 하는가? 무엇이 참된 권위요 지도력인지 가치관이 혼돈되는가? 아니면 당신의 참된 권위의 필요를 느껴서 찾고 갈구하는데 손에 잡히지가 않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든 지도자들이 그들의 지도력의 성숙을 위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권위에 대한 바른 통찰을 하고 참다운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와 능력 이양 (Empowerment)

지도력의 상황적 이론을 전개한 Paul Hersey 와 kenneth H. Blanchard라는 사람은 지도자가 사람들의 성숙도에 따라서 적절한 종류의 지도력 스타일과 파워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도자라면 여러 가지 종류의 파워를 소유하고 그들이 이끄는 사람들의 성숙도에 따라서 적절한 파워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고 기술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위협이나 보상 혹은 지위와 같은 저 차원적인 파워를 사용하고 숙련된 기술과 동기 부여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전문기술 제공 혹은 인격적 대우 등과 같은 고차원의 파워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사실상 최고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한 지도력의 스타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지도자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력의 스타일을 사용하여 효과를 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도를 받는 사람들의 성숙도를 발전 시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다시 쉽게 말하면 참된 지도자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동시에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감이 없을 때에는 격려해?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들이 기술과 지식이 부족할 때에는 그들이 지식과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공급해 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일을 결정하고 책임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파워를 나누어 주는 일들을 통하여 추종자들이 하나의 지도자로 성숙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한 지도자로 세워 나아가는 데에 가장 힘드는 부분이 파워를 나누어주는 부분이다. 사람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서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파워를 소유하고 사용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지도자들이 자기만이 파워를 소유하고 사람들에게 파워를 나누어 주지 않아서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세워 나가는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워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참되고 현명한 지도자는 사람들의 성숙도에 맞게 파워를 나누어 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파워를 실행해 보면서 지도자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사역의 기회를 함께 나누고 적절한 영역에서 의견을 물어보고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는 과정들을 통하여 파워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능력을 추종자에게 이양해 주는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 사이에는 파워를 바라보는 관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어떤 지도자는 파워는 남에게 주면 자신에게 그 만큼 파워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지도자는 파워를 추종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런 과정을 통하여 능력 이양을 이루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지도자들은 파워는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아 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파워를 나누어 주고 그런 경험을 통하여 추종자들이 능력 이양을 경험하게 되고 지도자는 더욱 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파워를 자신만이 소유하고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고 사람들을 사용하기만 하려는 지도자는 사람을 세우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내가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에 나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클링톤 교수님의 지도 아래 학위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같은 원리였던 것 같다. 그분이 다른 교수님에 비하여 특별히 나에게 준 것은 없다. 장학금을 준 것도 아니고 학점을 특별히 잘 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준 것은 강의 시간에 나에게 도전을 주고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계속적으로 나의 은사를 개발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움을 준 데에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비교적 영어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공부는 할 수 있었지만 수업시간에 질문을 한다거나 앞에서 나가서 발표하는 것을 엄두를 못내던 나에게 수업에서 20분짜리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것에 대해 인정해 주고 또 나중에는 나의 연구한 글을 가지고 1시간 짜리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하여서 나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고 은사를 발견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분은 학교의 수업을 효과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지도자로 서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강의를 하는 파워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줌을 통하여 강의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동시에 가르치는 지도력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좋은 지도력이란 무엇일까? 사람을 선택하고 함께 일하면서 단순히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통하여 어떤 일들을 성취하는 것에서 끝이 나지않고 그 과정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세우고 키워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교회 속에서도 담임 교역자가 부 교역자들에 대하여 또 교육자는 평신도들에 대하여 또 사회 속에서 평신도들은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을 통하여 어떤 과업을 성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들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실제적인 발전이 있도록 또 그들이 지도자로 서갈 수 있도록 세우는 것이 참다운 지도력인 것이다.


James MacGregor Buns는 퓨리쳐상을 받은 그의 저서“Leadership”에서 변화를 시키는 지도력(Transforming leadership)은 “임무가 완성되는 것을 넘어서 관련된 자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지도력”이라고 말하였다. 진정한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태도 비전과 가치관 또는 신념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의 그들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잠재력을 보고 그들과의 관계에 투자하여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도하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참다운 지도력이라는 것이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집중(Focus)

학교에서 사역을 하다 보면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상담해 주는 일이 가끔 있다. 대체적으로 많은 상담 내용 중에 하나는 학교를 중단 하던지 혹은 학교를 옮기던지 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사정에 따라 피치 못한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뚜렷한 대안도 없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학교생활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런 때마다 나는 “도둑질하는 것과 같이 나쁜 짓이 아니면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내라”고 권면을 한다. 아닌 것 같다고 학교를 중단하거나 학교를 바꾸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보면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뜻이 있어서 시작을 하였으면 모든 난관을 헤치고 마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것을 통하여 어떤 성취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일단 한 단계를 마치면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도 생기고 또 결국은 다른 일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좋은 자산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단된 것은 쓸모가 없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했으면 그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 물론 책을 읽을 때에 모든 책을 글자 글자 한자씩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읽던지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책을 읽을 때에 도중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이 있다. 책이 흥미로워서 골랐지만 실제로 책이 독자인 우리의 지적 능력을 도전하는 어려운 내용이 나오거나 혹시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오면 끝까지 읽어보기도 전에 여러 가지 핑계로 그 책을 읽기를 포기한다. 그러면 실제로 그 책을 통하여 자기에게 있을 수 있는 발전과 변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책은 완전히 읽을 때까지 읽은 것이 아니다. 책을 다 읽어야지 그 저자의 생각에 대하여 도전하고 반대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 읽기 전에는 그 저자의 생각에 도전을 할 수가 없다. 시작한 책은 끝을 보아야 한다. 한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은 가치가 없는 책이라고 결론을 내어도 좋다. 그것도 하나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리면 최소한 다시는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역을 하면서 매주 설교를 하면 어떤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갈등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설교준비를 하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두개의 설교를 가지고 어떤 것을 가지고 설교할까 갈등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면 설교를 깊이 있게 준비하지 못한다. 물론 하나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좋은 다른 설교의 영감이 떠오를 수가 있다. 그런 때는 그것을 메모해두면 된다. 좋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이것을 해 볼까 아니면 저번에 준비하던 것을 해볼까 하는 식으로 갈등을 하면 깊이 있는 설교를 할 수가 없다. 하나의 주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깊이 있는 말씀을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求? 돋보기가 태양빛을 모아 집중을 시킬 때에 불을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집중하는데 파워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주위에 보면 재능이 많은 사람인데 인생에 있어서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재능이 없는데 한가지에 집중하여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을 볼 수 가 있다. 한가지 일, 한가지 기술에 집중하여서 전념하다 보면 과정 속에서 장애를 뚥고 어려움을 넘기면서 깊이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설사 재능이 좀 부족하여도 한가지를 붙들고 승부를 거는 사람은 성공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 속에 “ 한 우물을 파라”는 말씀이 있다.


최근에 나온 서적 중에서 공병호 박사의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이라는 좋은 책이 나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바로 집중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가지 일에 최소한 10년은 투자를 해야 결실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몇 년 하다가 포기하면 우리는 한 분야에서 진정한 의미의 프로가 될 수가 없다. 앤드류 카슨(Andrew Carson)박사는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서 지속적이고 정교한 훈련을 최소한 10년 정도는 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10년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한 분야에서 상당 수준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의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능력보다도 이런 집중하는 자세가 성패에 더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사실이다.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러 마음을 굳게 정하고 나아가시는 장면이 있다. 풀러신학교의 클린톤 교수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집중된 삶에 대하여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맡기셨고 그 동안 공사역을 통하여 감당하셨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인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싯점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젊었을 때에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미션을 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향하여 집중해 가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은사를 개발하는데 있어서도 이것저것 다하려고 하는 욕심보다는 자신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은사를 인식하여 그것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집중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다하려고 하면 집중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집중하겠다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들에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집중하는데 있어서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이들이 아니라 상당히 중요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하지는 않은 일들이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하여 이런 일들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중된 삶을 산다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어떤 의미로 금욕의 길이요 포기의 길인 것이다.


당신은 인생에서 어떤 것에 승부를 걸고 있는가? 어떤 분야에서 또 어떤 지식 혹은 기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장인이 되기를 추구하고 있는가? 당신이 가장 자랑하고 자신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무엇에 당신의 시간과 정열을 집중하고 있는가? 혹시 현재 어떤 일을 포기하고 싶습니까? 한 단계 깊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시고 인내하며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지금 포기 하려고 하는 그 일에서 당신은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자기성장 프로젝트 (Self-growth Project)”

퓰러 신학교의 Robert Clinton교수는 성공적인 삶을 산 지도자들을 연구하여 일곱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전 삶을 통하여 배우는 자세를 견지한다(Effective leaders maintain a learning attitude throughout life)”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 주위의 효과적인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진리이다. 지속적인 배움의 자세는 특별히 급변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도자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자질이기도 하다. 내가 대학교 다닐 시절만 하여도 대학교 교수님들 중에는 때로는 매년 같은 노트를 강의실에 가져와서 읽던 교수님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발전하지 않는 교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왜 지도자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현재 놓여있는 곳에 안주하여 그것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태도보다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삶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였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측면을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 삶의 다른 분야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자만과 나태에 빠져 그것에 안주하고 머문다면 현재 우리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할지라도 곧 영향력이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현재 부족한 상태에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배우고 연구하고 발전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가가 아니라 현재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둘째,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인데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큼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지도자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으면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나 단체도 성장할 수가 없다. 좋은 영향력 그리고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 지도자 자신이 먼저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 된 뒤에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성장 계획(Self-Growth Project)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인 교육 전문가인 Malcolm Knowles는 성장 계획을 성인 학습자가 전 생애에 걸쳐 성장하는데 주요한 수단이라고 말하였다. 성장 계획은 “성인 학습자가 자신의 삶의 특정 분야에 대해, 개인적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된 학습을 통하여 성장을 가져오도록 고안한 노력”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달성 될 수 있으며, 그 달성 후에 평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주로 어렸을 때 학교를 통하여 교육 받는 것은 다분히 수동적인 교육이다. 교육의 내용도 교사에 의하여 주어지고 그대로 따라가는 교육이다. 왜냐하면 어떤 교육의 내용이 필요한지도 스스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또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성장 발전의 필요도 다양해지고 스스로가 자기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분야를 파악하고 주체가 되어서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래 서 스스로 필요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성장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단기간 동안 실행하며 스스로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혼자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학습하는 것을 처음으로 익힌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는 학교공부를 따라가는 것이나 자신을 위한 학습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학교를 마치면서 대학원을 진학하기를 원했는데 그 당시에 우리 학부 과정에서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의 숫자가 대학원 정원의 숫자보다도 많았다.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 보다 우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공부하기 시작 하였다. 주로 그 당시에 우리의 학습방식은 영국 미국의 많은 소설들을 읽기 위하여 두 세 주에 한 권 가량의 책을 읽어오기로 한 것이었다. 대학생활 때라서 놀기도 바빴지만 스터디 그룹의 내용을 따라가기 위하여 밤을 새워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과정을 통하여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영어 원서를 사전을 찾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배웠다. 이 습관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나 스스로 현대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혼자 꾸준히 학교 공부에 상관없이 두 세 주에 한 권 씩 원서로 책을 읽었다. 이 때 독서를 통하여 현대 사상의 흐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또한 이 때 책 읽는 습관이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할 때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미국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학교공부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으므로 개인적으로 따로 공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선교학 석사과정을 할 때에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또 지도 교수님의 안식년으로 학업을 진행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때 다시 혼자 학습을 많이 하였다. 그 때는 주로 신학 책과 주석 책을 많이 읽었다. 미국에 와서 신학 과정에서 신학에 대한 기본 틀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나 스스로의 신학을 정립하기에는 힘들었는데 혼자 학습하는 시간을 통하여 나 나름대로의 신학을 정립해 갈 수가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나의 삶이 진척되지 않고 있어서 힘들었지만 사실은 나의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장기였다고 생각을 한다. 나름대로의 신학과 성경을 보는 안목이 생긴 시기였다. 그 후에 박사과정을 하면서도 학위공부와는 관계없이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소그룹 멘터링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당시에 멘터링을 통하여 글쓰기, 독서하기, 교수법, 예수님의 비유이해하기, 시편연구하기 등의 내용을 배웠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강의 초반부는 아무래도 강의 준비를 위한 내용들을 공부하는데 초점이 많이 있었다. 이미 학습한 분야에 대한 강의는 내가 추가로 조금만 연구하면 되지만 전혀 새로운 과목들은 새로이 공부를 했어야 했다. 학교의 필요에 따라 강의해야 하는 과목들을 위해서 공부를 하면서 가르쳤다. 동시에 학교 강의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도 있었지만 나 나름대로 필요를 느끼는 분야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학습하였다. 그러면서 최근에 관심을 가진 분야는 주로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와 현대 신학에 대한 학습이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하여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지도력의 분야에서 일반 지도력 이론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 외에 스스로의 계획 아래서 발전하기 위하여 학습하고 배우는 부분은 실제 지도력의 실행에 관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지도력을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사역의 현장 속에서 익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효과적인 교수법, 단기선교나 월드 미션의 밤과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법, 학교의 비전을 세우는 법, 학교의 평가 작업과 그것을 계획 속에 반영하는 법, 예산을 세우는 법, 모금을 하는 법, 회의를 진행하는 법, 사람들을 관리하는 법, 등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주로 이런 일들은 이론적인 것을 배운 다기 보다는 실제로 일을 하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또한 개인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수영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과업이다. 올해 특별히 익히려고 하는 기술은 인터넷으로 강의를 하는 방법을 익히고자 한다.


클린톤 교수에 따르면 효과적인 성장 계획을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 배우고 성장하려는 깊은 열망이 있어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요구가 아닌 스스로 동기 부여된 행동이어야 한다. 둘째, 학습의 목적을 도달하고자 선택한 학습수단에 헌신 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다고 해도 목표한 것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주어진 한정된 시간 안에 실현 가능한 계획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큰 계획을 세우면 뜻은 좋지만 주로 작심삼일로 끝을 맺게 되는 경우가 많다. 넷째 경험이던지 학습이던지 관찰이던지 최선의 학습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성장이 필요한 부분에 적절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다섯째, 실제적으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상의 계획이 필요한데 너무 길면 도중에 포기하기가 쉽게 되고 너무 짧으면 계획을 온전히 수행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습한 내용에 대한 평가와 삶에 적용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채찍질할 수 있는 습관은 지도자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가? 이제 나이도 많은데 무슨 공부를 하나?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가? 어떤 분야에서 성장의 필요를 가지고 있는가? 컴퓨터, 인간관계, 자녀 교육, 전문 기술, 운동과 취미 생활, 다양한 성장의 필요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까? 학습을 통하여 혹은 관찰을 통하여 혹은 경험을 통하여, 아니면 그냥 포기해 버리고 있는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자기 평가 (Assessment)

제가 섬기고 있는 월드미션대학교는 지난 2월 17일에 The Association for Biblical Higher Education이라는 기독교 대학 인가단체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작년11월에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라는 인가 단체에 준회원으로 가입된 것에 이어서 이번에 ABHE라는 인가단체에 정회원으로 가입 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 미국의 주류 기독교 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교육기관으로써 인정을 받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 인가 시스템은 한국과는 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고등 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일단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월드미션대학교는 1989년에 창립이 되었고 1992년에야 주정부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연방 정부의 교육국(Department of Education)과 고등교육 인가 위원회CHEA(Council for Higher Education Accreditation)의 인정을 받는 연합체에 가입을 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우리가 문교부 인가라고 말하는데 미국에서는 연방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직접 인가를 주지 않는다. 대신에 미국에서는 관주도가 아닌 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연합하여 스스로 교육의 질을 관리하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연합체들이 있다. 이 연합체들을 CHEA(고등교육인가 위원회)가 인가를 해주면 정부에서 주는 모든 혜택을 받게 되어 있다. 이번에 월드 미션대학교가 정회원으로 가입된 ABHE라는 기관은 바로 연방정부 교육국과 고등교육 인가 위원회에서 인준한 기독교 대학교 연합회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에 있는 다른 인준 받은 교육 기관들과 학점을 교류하고 학위를 교류할 수 있게 되고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가단체에 가입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학교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많은 배움이 있었다. 이 인가과정은 Self Study라는 과정인데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대학의 행정의 전반적인 면에 있어서 연합체 기준들의 각 부분에 우리 학교가 얼마만큼 만족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작 업 (Compliance Document)이 있다. 연합체의 기준에 따라서 학교의 각 부분 부분을 점검하고 위원회를 만들어 기준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학교의 행정, 교수, 학무, 재정, 학생 관리 등등의 분야를 살피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학교의 사명과 목적을 분명히 하고 각 프로그램의 목적을 뚜렷이 정리하게 된다. 두 번째 부분은 학교가 세운 사명과 목적을 실제적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성공적인가를 평가하는 작업(Institutional Research)이다. 학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학교의 교육 목적이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성취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제적으로 교육을 통하여 어떤 발전이 있었는가, 학교의 행정의 부분이 목적에 맞게 잘 진행되고 있는가를 각종 Survey와 자료들을 통하여 점검하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학교의 5개년 발전 계획(5 year plan)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이 일을 하면서 구체적인 목적에 따른 평가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성취되고 있는가를 평가하지 않으면 실제적인 목적을 얼마나 성취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개선할 수도 없다. 그래서 평가라는 것은 중요하다.


조직의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발전을 위한 평가는 중요하다. 기독교 교육 학계의 대가인 달라스 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30년 가르친 경험이 1년 경험의 30번 반복일 수가 있다.” 나도 1999년 가을에 첫 강의를 시작하였으니까 나도 벌써 신학교에서 강의를 한 것이 만 6년이 넘었다. 그 동안 강의한 정식 강의의 종류만 해도 무려 12과목이 되고 그 외에 소규모 세미나들이 많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에 경력이 쌓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바람직한 교수로써 내가 발전하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 하게 된다. 하워드 교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많고 오랜 경험이 반드시 좋은 교수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0년 가르친 경험이 있다고 해도 평가와 발전이 없이 그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친다면 1년 경험을 30번 반복한 것과 같이 의미 없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늘 강의 내용과 강의 전달에서 평가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이 참 도전이 되어서 나의 책상에 써서 부쳐 놓았다.


학교에서 학기말이 되면 교수 평가서를 학생들이 작성한다. 사실상 교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지만 학생들의 평가서에는 냉정하게 평가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이 평가서를 참조하여서 교수를 채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교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한 한기 동안의 강의를 마치면서 이번 학기에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고 학생들의 피드백을 통하여 다음에 강의를 보다 좋은 강의로 만들기 위하여 어떤 점들을 구체적으로 개선해야 할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사역 속에서도 평가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학생들이 수련회를 가면 수련회를 마치고 평가서를 작성한다. 평가서를 통하여 수련회가 전체적으로 잘 구성되었는지 강사님의 말씀이 주제와 잘 연관이 되었는지 등의 평가서를 쓰게 한다. 그런 평가서는 다음 수련회를 더욱 의미 있고 은혜롭게 준비하는 중요한 자료들이 된다. 평가를 하지 않고 수정할 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평가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지루한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평가 없이 발전을 기대 하기가 어렵다. 나의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는데 평가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좋지 않은 점수가 나와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는 그것이 기도 제목이 되고 평가를 잘 받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여 나중에는 특별 보너스까지 받는 좋은 점수를 획득하였다. 아마도 평가가 없었다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가는 사실상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하다. 한 개인의 발전에 있어서도 또 우리가 하는 사업체에서도 또 우리의 기독교 사역에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좋은 목적과 목표를 세웠지만 평가 없이 그저 반복을 하기만 한다면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일과 사역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고 발전해야 되는 점들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수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도 인가 받는 과정을 통하여 부단히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계획을 세워서 미국의 주류 기독교 대학에 어떤 면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권위 (Authority)

월드미션대학교의 총장님이신 임동선 목사님께서는 매 학기 신입생들을 맞이하면서 주시는 격려에서 꼭 빼어놓지 않는 말씀이 있다. 좋은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다니면서 인격, 지식, 또 영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열심히 공부하여서 지식을 쌓고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인격을 다듬고 하나님께 깊이 나아가는 기도 생활을 통하여 영력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사실상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능력을 갖추고 그 능력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영적인 능력과 권위이다. 일萱?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영적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주로 영적 권위의 기초 위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을 연구하면서 많은 지도자들의 삶과 사역 속에서 영적인 권위를 인식하고 소중히 하고 사역에서 영적 권위의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한경직 목사님은 그의 사역 가운데 영적 권위를 잘 인식하고 사용하신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분은 목회자들을 위한 글에서 영적인 권위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도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의 바른 권위를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설교자가 영적 권위로 가르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중요한 원리를 강조하셨다.


첫째, 설교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다른 어떤 지식을 통하여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에 지도자들은 영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지도자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권위를 가지게 된다.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지도자 스스로가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전할 때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셋째, 지도자는 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즉 도덕적인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될 때에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화려하게 말을 잘한다고 영적인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넷째, 지도자가 인간의 영혼을 향한 깊은 애정과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때에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지도자에게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지도자가 기도생활을 통하여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영적 권위가 나온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고 순복할 때에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은 이상과 같은 원리 위에서 삶과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그분의 지도력을 따른 것이다.


풀러 선교대학원의 지도자학 교수인 클린톤 교수는 영적 권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영적 권위란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자 안에 있는 영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의 삶과 사역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지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따르는 것이 영적 권위이다. 이런 영적 권위는 주로 지도자가 삶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때 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한 성령의 열매가 그 삶 가운데 나타날 때, 또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지도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준다. 또한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기보다는 주로 설득과 모범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의 탁월함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이끄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 권위를 가질 수가 있을까? 영적 권위란 욕심을 내어 소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되게 나아가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참다운 교제, 깊이 있는 만남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결과요 열매이다. 영적 권위 자체가 목적인 것이 아니란 오직 하나님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정이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하나의 결과이다.


영적인 지도자는 여러 다양한 능력을 소유하고 상황과 대상에 맞게 적절하게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지도자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여러 다른 능력을 소유했는가 아닌가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다른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그 능력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절대 겸손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목적하고 의지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영적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또 지도자들의 영적 권위가 부족한 것이 우리 지도자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하면 너무 아이러니컬한 표현일까? 우리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사역을 하신 대표적인 영국의 영적 지도자중에 한 분이신 존 스타트 목사님은 그의 “리더십의 진실”이라는 책에서 사도 바울의 영적 권위에 관한 중요한 역설적 진리를 지적하였다. 고린도후서 12:9-10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세번 간절히 드린 후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영적인 권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를 의지하여 살아갈 때에 주어지는 선물이요 결과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의 능력이 있을 때에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도리어 우리가 약할 때에 우리는 나약함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권위의 열쇠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동행하는 것인데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됨으로써 우리의 나약함이 도리어 우리의 진정한 강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다.


현대는 권위주위에 강하게 반발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참다운 권위에 대한 깊은 갈증을 가지고 있는 시대이다. 권위를 섬기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 다양한 권위를 소유하고 상황과 사람들에 맞는 권위를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의 사람, 무엇보다도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는 사람,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역설을 이해하는 사람, 이런 지도자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고 사람들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