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운]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1)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1)


환경과 환경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시각


지난 호에서 살펴 본 내용들을 통해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소위 문화명령이 환경파괴의 원인이 아님을 익히 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크리스챤들은 환경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며 구체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본 고에서는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개괄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환경에 대한 기독교적인 시각을 살펴보고, 다음 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를 알아보고자 한다.


1. 환경문제


20세기 후반을 지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환경’은 모든 분야를 통괄하는 거대 담론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농학, 공학, 예술, 문화 등 모든 학문분야에서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의 생존문제를 놓고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실제적인 대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가 지구 전체의 생존과 깊이 연관되어있을 만큼 심각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어느 한 시기도 문제가 없는 시기가 없었고 늘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히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굳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때 과거에는 그 문제의 폭이 국지적이라고 한다면 현재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전지구적이라고 하는 면에서 차이의 한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라 하면 인간성의 상실, 빈곤, 질병, 소외 등 다양하게 지적될 수 있겠으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해서 인간문제의 총체적인 집합으로서 환경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바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라 할 때 산업혁명 이후 생겨난 기술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의 영향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자연계를 비롯한 인간의 삶의 영역까지 심각한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달리 기술산업의 발달로 생산이 증가되고 에너지의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천연자원을 마구 파헤치고 망가뜨린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농촌은 개발압력이 거세어지면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는 물론 도시와 연계된 주변지역에까지 도시화의 부산물 (Externalities)인 각종 오염이 확대되어 가고 있고, 핵무기 개발과 실험으로 인해 인간의 삶의 질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해양오염, 원자력 문제, 쓰레기 처리, 생태계의 변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영향의 범위도 부분적이지 않고 모든 자연환경 및 인간사회에까지 전면적이고 전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대기오염으로 인해 인간의 건강은 물론 자연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기 중에 화석연료를 태움으로써 생겨나는 이산화 탄소가 공기 중에 많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나는 지구온난화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산화 탄소나 아황산 가스가 수증기와 반응하여 생겨나는 산성비의 폐해가 국경을 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도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공장건립, 농약의 과다사용, 산업쓰레기의 무단투기 등으로 인해 지표수 및 지하수, 그리고 토양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고 그 영향권도 이제는 해양에까지 미치고 있다. 한 편 핵에너지의 사용, 폐기물 처리를 둘러싼 위해 (危害) 논쟁은 아직도 뜨겁기만 하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사막화, 오존층 파괴, 동식물의 변종화, 기형화와 같은 생태계 변화 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2. 환경문제의 성격과 원인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상적인 원인들로는 위에서 살펴 본대로 자연의 집중적인 이용 및 착취, 인구의 팽창, 그리고 에너지의 과다사용이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은 다분히 문제의 결과나 과정을 토대로 찾아낸 것들일 뿐이다. Garret Hardin은 그의 유명한 논문인 “The Tragedy of the Commons (공유재의 비극)”에서 환경문제의 근원적인 원인으로서 인구문제를 들고 있다. 따라서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기 보다는 출산을 조절하게 하는 법제를 만들어서 인구를 통제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과연 Garret Hardin이 주장하는 것처럼 환경문제가 인구증가에 근본적인 원인을 두고 있는 것일까? 또 여러 학자들은 정치 경제적인 구조의 모순에서 환경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경제구조의 불안정성은 물론 국가 내 또는 국가 간의 정치구도의 역학관계에서 환경문제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원인규명은 한 편으로는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다분히 표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움직임이긴 하지만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는 위의 문제제기와는 달리 환경문제의 원인을 좀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사고구조 즉 세계관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도 자연 즉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최후의 소비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일체의 월권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자칫 근본주의적이고 실제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 환경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영적이고 기본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환경과 환경문제는 어떤 성격과 원인을 가지고 있을까?


성경의 창세기를 토대로 볼 때 환경문제는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질서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면서 생겨난 것으로서, 하나님 중심의 질서가 인간 중심의 질서로 변하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깨어짐으로써 자연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세상은 총체적으로 부조리와 탐욕으로 가득찬 황량한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문제에 대한 해답은 다분히 사람의 수의 증가를 억제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정치 경제적인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인간과 환경의 일체적인 관계를 역설하는 생태적인 시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환경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오직 성경이 제기하고 있는 환경문제의 근원인 인간의 타락을 해결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창조, 타락, 회복 (구속)이라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통해 환경과 환경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창조의 눈으로 본 환경


창세기에서 그리고 있는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과정은 인과관계에 익숙한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유일한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3),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4)….”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세계를 무에서 유로, 창조주 자신이 보시기에 흡족할 만큼 좋게 만드셨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괄하는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에 맞는 세계를 만드셨고 그 안에 사람을 만드셨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위를 주셨고 (창 2:19-20), 또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주셨다는 것이다 (창 1:26, 28, 2:15). 사실상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세계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잘 조화된 곳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례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풀을 식물로 삼고 (창 1:30) 있어 피흘리는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믿는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을 바라볼 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완벽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바라봐야 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몽상으로서의 이상향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의 원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더 더욱 창세기에서 그리고 있는 태초의 환경에 대한 신앙적이고 영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된 흙을 재료로 하나님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이 다른 피조물 보다 우월하다는 것보다는 인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한낱 흙에 불과하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창조의 눈으로 바라 본 환경은 인간과 동일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아버지가 자녀의 이름을 짓고 자녀를 사랑하듯이 이름을 지은 인간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인간과 자연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돌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각은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생각이나 자연과 공생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세계관보다 환경을 바라보는 면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준거 틀을 제공하고 있다. 창조신앙은 생태 신학적인 이론의 틀을 넘어 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기뻐하여 만드신 세계를 즐거워하며 누리며 아비가 자식을 돌보듯이, 아들이 아버지의 것을 관리하듯이 피조세계를 이해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인격적이며 확률적으로 환경을 바라보는 진화론적인 일체의 시도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환경문제는 인격적인 창조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 몰지각한 인간중심주의와 물질숭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와 물질숭배주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창세기 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간의 타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타락의 눈으로 본 환경, 환경문제


성경전체를 통해 볼 때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나타나는 원시 창조세계의 모습과 질서가 깨어지게 된 거대한 분기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3장의 인간 타락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면 무슨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보여지는 범죄와 타락의 묘사는 행위 중심적인 눈으로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이 있다. 여러 시각으로 인간의 타락을 설명할 수 있으나 관계 중심적인 눈으로 인간의 타락을 보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신 이유나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와 아담의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인간이라는 부자관계에 대한 반항이자 독립선언이라고 보면 어떨까?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시작, 곧 인간 이외에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는 영적 공황상태를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집단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쓰일 수 있다. 사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 25)라는 기록을 주의 깊게 상고해 보아야 한다.


창세기 3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된 타락의 과정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됨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왕 됨과 주인 됨의 기초가 되었음을 그려주고 있다. 또한 인간 (뱀의 유혹에 넘어 갔기 때문)과 자연 (뱀의 사주 때문)이 공히 저주를 받고 함께 창조의 질서가 깨어지게 되면서 인간은 더욱 수고하고 땀을 흘려 땅을 갈아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는 자연과의 질서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있지만 자연과 자연의 관계 역시 약육강식의 살륙과 투쟁의 관계로 떨어졌음을 이사야서 11장과 35장에 나타나는 회복의 상황을 역으로 유추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끝나고 창세기 4장에는 인간질서가 깨어진 전형으로 형제살인이라는 비극적인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은 민족 간에도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바벨탑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극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분노를 산 대홍수로 연결되고 있다. 이후 인간은 자연을 조화롭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잃게 되었고 한 편은 자연을 두려워 하여서 섬기기도 하고, 다른 한 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여 편하고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마냥 착취하고 파괴하기도 한 것이다. 환경문제는 이렇게 인간의 타락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중심주의의 가치관 속에서 발생하고 심화되었다.


환경문제를 말할 때 늘 논란이 되는 것이 인간의 과학기술 문제이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에 대한 논쟁은 참으로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난제 중의 난제이다. 과학기술의 중립성 논쟁이 바로 그 것으로서 한 쪽은 기술 자체가 어떤 목적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며, 다른 쪽은 기술은 절대적으로 중립적이고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적 여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 논쟁의 결론이 어떠하든 현대 과학기술의 끝간데 모르는 질주와 그에 따른 환경 위해성 여부는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영역이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 중심적인 욕망충족을 위한 기술개발과 자연 착취이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될 것을 목적으로 온갖 기술을 개발하여 섬기고 돌보아야 할 자연을 이용하고 착취하게 된 것이 바로 환경문제의 근본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또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은 바로 세계관이다.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이 깨어지면서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섬기도록 되었던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하고 (창 9:2) 섬기는가 하면 인간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신을 섬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생겨나는 본말이 전도된 현상으로써 모든 문제가 여기에 기인한다.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차츰차츰 인간중심적, 기계론적, 상대주의적 가치를 발전시켜왔고 그에 따라 인간과 자연, 객관과 주관, 존재와 본질, 이성과 신앙, 등의 이분법적인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심지어 현대 기독교인들의 가치관 속에도 무섭게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즉, 환경을 비롯한 세상의 일을 도외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거나 더욱 더 현실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영혼전도나 교회봉사에 모든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으로 교육하고 교육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이교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이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정신적인 것은 거룩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고 봄으로써 신앙과 삶을 분리시켜서 인간을 참된 신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다분히 현실 도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따라서 크리스챤들 마저 환경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거나, 환경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한 결과 파괴되어 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찾거나, 천국으로 빨리 들려 올라가길 바라는 파렴치한들로 변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에 의하여 무참히 파괴되어진 환경은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회복 (구속)의 눈으로 본 환경, 환경문제의 해결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는 대안들을 보면 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보다 완벽한 생태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즉,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일체감의 강조, 자연에 대한 경외심 고취, 생태계에 대한 책임의 윤리 등에 입각하여 기술 사용의 절제나 생태기술과 같은 생태복원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통해 어느 정도 환경위기를 둔화시키거나 부분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위기에 처한 환경을 근원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 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볼 때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의 회복을 전제로 한 환경 위기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창조질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하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속 (구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구속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담겨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단지 영혼에만 한정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 (kosmos)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뒷 부분만 보면 자칫 초점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 쏠릴 수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은 다름아닌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은 우주까지 포함하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과 구속사역이 바로 전 우주적인 구속 사역임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진정한 영생의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불교적인 것과 흡사) 보장 정도로 이해되어진 영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대한 구속과 깊은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시각을 훨씬 더 세상에 대해 적극적이고 총체적으로 만들어 준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한 부분이 바로 골로새서 1장 15-20절에는 만물과의 화목으로, 로마서 8장 19-23절에는 피조물들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에 의한 해방과 구속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의 어긋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이루어 내셨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 1장, 11장, 14장, 35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회복된 세상은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인간과 자연이, 자연과 자연이 서로 싸우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참 평화와 안식이 있는 곳이다. 에덴에서 보여진 창조질서의 회복이 바로 메시야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고, 이사야 53장은 그 메시아의 죽음과 대속이 인간의 죄악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이 해결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안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20절에 나타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 뿐 아니라 피조물도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자연의 진정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 달려 있다.


어그러졌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차지한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자연과는 청지기와 관리자의 위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회복된 인간은 이러한 위치를 자각하고 실제에서 관리인답게 행하면 자기회복과 만유회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에야 비로소 자연의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너무 성급하게 서둘러서도, 그러나 너무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행동해서도 안될 것이다.


회복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고 돌봐야 할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완성하실 것을 믿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체에 현재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접하고 있고 접하게 될 환경까지 포함시켜 이웃사랑의 하나로 가꾸고 보살피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린도 후서 5장 17-19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들에게 다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과 말씀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경에 대해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시각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부족한 형제를 돌볼 때 공동체가 더욱 살 맛나는 풋풋한 사랑이 흘러 넘치듯 환경을 돌보고 아끼며 사랑하는 회복과 화목의 직책을 수행할 때 우리의 삶의 자리는 더욱 풍성한 생명의 잔치로 변해갈 것이다.

[반영운] 기독교는 과연 환경파괴의 주범인가?

이코스타 2002년 2월호

기독교는 과연 환경파괴의 주범인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


요즘 방학을 이용하여 그간 가르치던 학생들과 <Design With Nature >라는 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고 있다. 내가 학부시절 건축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바로 이 책을 통해 생태적 환경계획에 눈을 뜨게 되었기에, 혹시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도해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성경의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이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수 차례 설파하고 있다. 저자인 Ian McHarg는 캘빈의 장로교가 융성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유대이즘은 물론 서양사상의 대부분이 위 구절에 근거하여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견지하고 무차별한 정복과 약탈을 자행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로서 모든 개발계획에 있어서 생태적인 계획방법을 이용하여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으로 인해 미국은 각종 개발계획에 있어서 환경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을 의무화한 환경정책기본법이 제정되고 환경영향평가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저자를 미국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게 해 주었고 미국 환경운동에 새로운 동기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성경과 기독교를 마치 환경보존에 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고 심지어는 진화론적인 입장마저 고수하면서 생태적인 입장은 반 기독교적인 입장임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그간 환경을 공부하면서 읽은 많은 책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면서,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환경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조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창세기 1장에 근거하여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환경파괴와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 환경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다분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자구해석에 깊이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이 구절의 앞 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기자는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공중의 새와 땅 위의 것들과 바다에 사는 고기들을 다스릴(have dominion over) 수 있게 하실 계획을 기록하고, 27절에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1장 28절에서는 지으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할(subdue) 것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라고(have dominion over). 여기까지만 읽으면 앞에서 말한 대부분의 환경 학자들의 의견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자연보다 우월한 지위를 주어서 잔인하게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게 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본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본 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어원적으로 26절의 ‘다스리다’는 28절의 ‘다스리다’와 같은 단어로서 (radah)라고 하는데 미완료시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스리다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절대자의 지배나 통치의 개념보다는 전지하고 전능한 입장에서 사물을 통찰하고 그에 맞게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더 문제시 되는 단어는 바로 ‘정복하다’로 번역된 (kabash) 로서 단어 자체로만 보면 다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보인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정복자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이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장 문맥 전체와, 같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2장 15절과 그 외 관련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시각을 볼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당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셔서 그로 하여금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하는 것이 그 주된 요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것이 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잘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당신께서 지으신 세상을 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셨고,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을 구속하시기까지 하신 세상의 보호자이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간혹 구약에서 나타나는 냉정하고 몰인정한 것 같은 모습은 모두 다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기 위한 채찍의 손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존재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창세기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성경의 잘못과 기독교의 잘못을 논해서는 안 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정복하다는 단어가 다분히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표현상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참된 평화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투적이고 잔인한 표현은 뭔가 원어적인 표현을 영어나 우리 말로 옮기는 데 어색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쓰인 다른 성경을 찾아 보니 이 말은 다른 민족과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무릎 꿇게 하는데 쓰이고 있다(역대상 17:10, 시편 47:3, 이사야 45:1, 다니엘 7:24). 바로 어그러진 관계, 즉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새롭게 하고 정돈하는 의미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향한 죄악을 이기고 주께 돌아가는 것을 촉구하는 장면에서 사용되기도 했다(미가 7:19). 즉 이 단어는 무언가 행위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위적인 모습에 쓰이기 보다는 관계적이고 질서를 나타내는 데에 쓰이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보다 더 잘 뒷받침해 주는 곳이 바로 창세기 2장 15절에 설명된 에덴에서의 인간의 역할이다.


창세기 2장은 천지창조사역의 완성, 안식일, 에덴 동산 완성, 인간 창조의 구체적인 과정 묘사 등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나서 인간을 에덴에 들여 보내시면서 일하고 돌보는 역할을 지정하신다. 그렇다면 동사로 되어 있는 이 두 단어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 단어는 바로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의 다스리다와 정복하다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첫번째 단어인 ‘일하다’로 번역된 단어인 (abad) 는 동사로서 serve, work, worship의 뜻으로 쓰이고, 명사로는 servant, worshippers, labor 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위의 예들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첫번째 권한은 바로 에덴 동산에서 노동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편 하나님과의 관계는 섬기는 자, 즉 예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규명할 때 사용되는 소중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노동이 곧 예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돌보다’로 번역된 단어인 (shamar)는 동사로써 keep, observe, heed 등의 의미로 쓰이고 명사로써는 keeper, watchman 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용례에 근거하여 보면 두 번 째로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은 에덴동산을 지키고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에덴동산의 관리를 위임 받은 아담은 후에 에덴의 모든 생물들의 이름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으니 가히 하나님을 닮은 제2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자연(세상)에 대한 권한이 혹자가 지적하는 파괴자로서, 폭압적인 전횡을 휘두르는 압제자로서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환경)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 그대로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의 관리를 위임 받은 존재로서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노동을 함으로써 위임자를 예배하며, 자연과의 관계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관계임을.


내용이 이러할진대 인간이 과연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이미 지배와 정복의 패러다임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더 더욱 성경의 창세기가 환경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주 근시안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질서와 조화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께서 애지중지 만드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것은 아마도 자연과 인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섬김과 돌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인간은 자연을 돌보고 일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수직 수평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학 구도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의 중간에 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인간의 위치가 적어도 인간의 타락 전에는 잘 유지되었으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대로. 인간의 타락이 기록된 창세기 3장 이후에는 2장까지의 기록과는 상반된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이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 자연의 관계도 역시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으로 해석할 때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로서, 자연에 대한 관리자로서.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깨어진 환경을 보듬고 돌보는 데에 적극적인 자세를 제공해 준다. 자연을 사랑해야 할 대상, 섬기고 아껴야 할 대상, 아니 몸을 드려 희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환경보존에 대해서 이보다 더 강한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기독교 국가의 후손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작금의 기독교가 처해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상 성경 자체를 볼 때는 모순을 발견할 수 없으나, 현실적인 면에서 너무나 많은 모순과 괴리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성경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없이 남들이 한 얘기를 옮겨 적다 보니 이러한 우를 범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은 문제를 지적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오만과 불순종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좀 더 겸손히 성경이 말하는 진실과 우리의 상식과 이성이 밝혀내고 있는 사실들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 고쳐가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는 환경에 대한 크리스천의 자세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