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기] 지켜야할 세 가지 선


(신6:24-25, 마7:12, 잠28:19-20)


어느 날 운전을 하며 가다가 경찰이 붙여놓은 경고판을 보게 되었다. 그 경고판에 중앙선, 정지선, 차선을 제대로 지키라는 경고가 있었다. 교통질서가 무너지고 교통사고를 일으키는데 세 가지 선을 지키지 않는 것이 중요한 원인인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인생의 길에도 이 세 가지 선이 있으며 이것들을 제대도 지키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선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1.중앙선을 넘어서지 말라.
인도 캘커타에 가면 중앙선이 없는 도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동차들이 마구 달리는데 때로는 맞은 편 차가 내가 탄 자동차로 마주보고 달려올 때는 정말 아찔했다. 중앙선이 없으니까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금방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중앙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중앙선을 무시하고 뛰어든 차 때문에 대형사고가 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도로의 중앙선은 생명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도 생명선과 같은 중앙선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신6:24-25) 성경이 가르친 십계명은 그것 중의 대표적인 내용이다. 이 계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그 역할을 한다.(롬2:14-15)


그 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점차 그런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니 문화의 진보를 운운 한다. 그래서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가정이 와해되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가 생기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그런 자유는 중앙선이 없는 도로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자유일 뿐이다. 금방 혼란스럽게 되며 결국은 위험으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급해도 중앙선을 넘어서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도 양심과 윤리의 선을 지켜야겠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선이며 그것이 우리 개인의 영혼과 가정과 사회를 지켜준다.


2.정지선에서 반드시 서라.
요즈음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통위반 딱지를 뗀다고 한다. 나도 가끔 정지선을 위반한 적이 있어서 마음이 쓰인다. 정지선은 중앙선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지키지 않으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진다. 정지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네거리로 나온 자동차들 때문에 파란불이 켜졌는데도 지나가지 못해서 교통이 엉킨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리고 정지선을 지키지 않으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된다. 그런 장면을 생각해보면 정지선은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지켜야 할 사랑의 선, 배려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 리의 삶에도 그런 정지선이 필요하며 그 선을 지켜야 한다. 정지선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는 선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나 생각을 절제하게 하는 선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마22:39)이나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마7:12) 이 바로 인생의 정지선이다. 이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 때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지듯이 서로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인간관계가 어려워진다. 이 정지선을 제대로 지킬 때 교통질서가 지켜지듯이 우리들의 삶에서 인간관계가 제대로 유지된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을 할 때 정지선을 인식하자. 정지선을 넘어서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을 절제하도록 하자.


3.차선을 자꾸 바꾸지 말라.
언제가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운전을 하는데 내가 가는 차선이 밀려있고 옆 차선은 비어있는데도 차선을 바꾸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울 같았으면 나는 물론 내 앞의 차들이 벌써 차선을 바꿨을 텐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고 좀 답답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서 차선을 자주 바꾸는 내 모습에서 그들이 누리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차선은 우리 삶의 여유를 지켜주는 여유의 선, 절제의 선이다. 


물 론 차선을 바꾸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차선을 바꿀 수 있는 선이다. 그런데 차선을 바꾸지 않고 여유 있게 달리는 모습과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차선을 바꾸는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우리 자신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물론 급한 일이 있을 때 차선을 바꾸면서 빨리 가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은 정말 아쉽다. 때로는 차선을 바꾸어서 열심히 갔는데 나중에 보면 그냥 한 차선을 따라 간 차보다 별로 앞서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때는 정말 머쓱하기까지 하다.


우 리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다양한 차선이 있다. 사람들은 빨리 성공하려고 차선을 자꾸 바꾸려고 한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28:19-20)”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면 그런대로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지면 그 차선만 따라가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자꾸 옆 차선을 보게 된다. 그래서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의 능력과 관계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다가 오히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리고 혹 돈을 벌게 되고 일이 잘 풀리더라도 삶의 여유를 잃고 살기 쉽다. 물론 꼭 차선을 바꾸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냥 한우물만 파는 것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선을 바꾸고 싶을 때마다 정말 바꿔야만 할 상황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무작정 빨리 가려고만 하지 말고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자. 


이 세 가지 선은 교통질서를 위해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운전하면서 이 세 가지 선에 대해서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이 세 가지 선을 항상 의식해야겠다. 선을 잘 지키는 것이 도로에서 안전하게 운전하는 길이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방선기] 비젼과 직업


나는 공대를 나와서 한 육년 동안 엔지니어 생활을 하다가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하고는 남들이 다하는 목회의 길로 가지 않고 문서사역을 헌신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직장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문서사역을 하고 있다. 그간의 삶이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직업의 변화가 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대학시절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변함이 없다. 아니, 그 비전이 바로 이런 직업의 변화의 지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비전을 가지고 살게 마련이고 그 비전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한다. 돈버는 것이 비전인 사람은 어떤 직업이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그 직업을 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전과 직업의 선택은 인생의 중요한 요소이며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1.비전은 인생의 나침반이다.
과거에 모르는 곳을 여행할 때 반드시 가지고 다녀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나침반과 지도이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그것이 있어야 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고 그래야만 지도가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상세한 지도도 제구실을 못한다.


인 생에서 비전을 발견하는 것은 마치 나침반을 가지고 바른 방향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비전이란 어떤 특정한 직업을 말하거나, 특정한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직업이나 사역을 정하기 이전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 혹은 투자할 인생의 방향을 의미한다. 물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비전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향이나 기준을 정해줄 뿐 이다. 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얼마든지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대학 시절에 함께 비전을 나눈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나눈 비전은 젊은이들을 키워서 장래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동역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후배들을 키웠고 졸업후에도 그 일에 헌신해왔다. 지금은 다들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비전에는 변함이 없다. 그 비전은 지금도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택한 직업은 다르다.


엔 지니어로서 그 비전을 이루려고 했던 나는 목사가 되었고 주로 문서를 통해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한 때 신학교를 갈 것을 고려하기도 했던 박성수 형제는 기업의 경영자로 그 비전을 이루어가고 있다. 그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많은 직원들을 키우며 기업의 이윤을 하나님 나라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에서 그 사역을 하고 있다. 이들 친구들 외에도 대학부 후배들 중에 혹은 캠퍼스에서 교수로,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으로, 상사의 주재원으로 일하면서도 동일한 비전을 이루어가고 있다.


흔 히 세계선교의 비전이 있다면 다 신학교로 가거나 다 선교지로 가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우리 중에 한정국 선교사는 학생시절부터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신학교엘 갔고 인도네시아로 선교사역을 떠났었고 지금도 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경우는 선교의 비전이 그대로 직업으로 연결된 경우지만 모두가 다 그럴 필요는 없다.


많 은 크리스쳔들이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데 사실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인생의 비전이 없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 일은 그야말로 직업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그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크리스쳔으로 신앙적인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일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 때 삶의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비전이 있는 사람은 직업을 바꾸거나 혹 직업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미지의 목적지를 떠날 때 나침반을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인생의 여행을 떠나면서 먼저 비전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2.직업선택을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다.
흔히 선교의 비전을 가졌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나침반이 동쪽을 가리킨다고 무작정 동쪽으로 간다는 말과 같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했으면 그 다음에는 지도를 펴서 정확한 장소를 찾도록 해야 한다. 비전을 가진 크리스쳔이 직업을 택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지도를 펴야 한다. 물론 그 지도는 우리의 발의 등이요 길에 빛이 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다.(시119:105)


크 리스쳔으로서 직업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때로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개인을 향한 뜻을 보여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일반은총을 허락하신 주님은 삶의 순리대로 인도하신다.


직 업을 선택하는데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주로 인기가 있는가? 잘 팔리는가? 수입이 괜찮은가? 이다. 물론 그런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왕이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쳔에게는 무엇보다도 그 일을 “주께하듯”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주께하듯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객관적으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여야 하며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적성에 맞는 일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직업일 가능성이 많다. 물론 모세의 경우처럼 말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아론을 붙여주면서까지 지도자의 일을 맡기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도 모세가 가진 지도력을 높이 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맡기셨으리라 생각된다.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실 때 각자에게 독특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각자가 자기 속에서 그것을 발견해서 그것에 맞는 일을 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 유용한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유익했지만 현재 유용하지 않은 직업은 굳이 택할 필요가 없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회가 변하면서 직업의 종류도 많이 변한다고 한다. 이런 변화를 잘 알아서 현실적으로 유용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인기있는 직업을 택하는 것과 혼동될 수 있지만 분명히 구별된다.


흔 히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에게 소명을 확인한다. 물론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소명은 비단 목사나 선교사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에게 다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소명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을 맡을만한 은사가 지금 내게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우리교회, 사회가 과연 그 사역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별 생각없이 소명 하나만을 가지고 신학교로 몰려드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모르는 곳을 찾기 위해서 지도를 잘 살펴야 하듯이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결론)
지도를 가지고 원하는 장소를 찾았으면 그 장소가 정말 맞는 장소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침반으로 확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직장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나침반(비전)으로 확인해야 한다. 비전 운운하면서 직장을 선택하는 폭을 좁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단 선택한 직업이나 직장은 비전으로 비추어보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뜻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렇게 확인이 될 때 그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직장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업을 바로 선택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멋진 비전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비전은 그냥 멋있는 말만이 아니다.

[방선기] 모델하우스 철거현장을 보고서

마포 로터리를 지나다가 모델하우스를 철거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곳은 벌써 몇 번째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분양광고를 했다가 그 일이 다 끝나면 철거하고 또 새로운 아파트 회사가 다른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똑같은 광고를 하는 것이다. 잘 지어놓은 모델하우스가 철거되는 광경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돈을 들여서 멋지게 꾸몄던 것들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아파트 내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도 했겠고, 이런 집에서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닐었을 그 공간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델하우스가 아깝다고 그것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델하우스를 짓고 철거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그 장소에 맡겨진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일상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보았다. (조금 옆에 ‘아크로타워’ 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 그 건물들은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곳이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은 모델하우스처럼 자주 허물고 짓고 하지는 않지만 그 건물들의 자리에서도 지난 수백 년간 역사를 통해서 수도 없이 여러 건물이 지어졌고 또 철거되었을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언젠가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서게 될 것이다. 지금은 멋진 실내 장식이 있고, 그 안을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그 건물도 수명이 다해서 철거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멋진 실내 장식들이 다 쓰레기가 되고 사람들이 왕래하던 그곳이 폐허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건물이 또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기간이 좀 길기는 하지만 모델하우스의 변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며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곳이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될 것처럼 여기고 살고 있다. 그러나 모델하우스의 사용기간이 있듯이, 건물들이 사용되는 기간이 있듯이 사용기간이 있다. 언젠가는 철거가 되고 새로 지어질 것이다. 그 기간이 좀 길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3:4).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개인의 생애가 끝나기 전에 그날이 오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금 세상이 철거되고 새로운 세상이 세워질 때가 있다고 한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진리이다. 다 허물어진 모델하우스를 보면서 나는 어느 회사가 또 멋진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짓게 될 것을 예상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가 시작되고 있다. 그 허허벌판이 된 공사장을 보면서도 나는 ‘아크로타워’라는 이름의 멋진 건물이 세워질 것을 예상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무너져버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예상한다. 그곳에 입주할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